CAFE

달천/달래강 인문학

달래강 인문학 기행 1 답사자료

작성자동해의 푸른 이상기|작성시간22.03.21|조회수231 목록 댓글 0

탄금대 다리에서 달천교 왕복

 

탄금대 다리가 두 개다.

 

 

달천 인문학기행 첫 번째 행사날이다. 달천이 한강에 합류되는 탄금대에서 만나기로 했다.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공개적으로 문자를 보내지 않았는데 16명이나 모였다. 모두 달천을 사랑하고, 걷기를 좋아하고, 역사와 문화를 알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다. 4쪽짜리 안내 자료를 나눠주고, 답사 코스를 간단히 설명한다. 거리는 11㎞ 정도로 3시간 정도 걸릴 것이다.

달천 인문학기행은 3월부터 11월까지 9회 진행하기로 되어 있다. 5번은 걸으면서 탐사하고, 4번은 버스를 타고 탐사를 진행할 것이다. 걷기 탐사는 충주시내권을 자세히 살펴보고, 버스 탐사는 보은, 청주, 괴산 권역으로 나눠 진행할 예정이다. 이들 지역을 탐사한 다음에는 달천 인문학기행이라는 결과물도 내놓으려고 한다. 달천 인문학기행은 말 그대로 달천의 역사와 지리, 문화와 예술 그리고 사는 이야기를 조사하고 정리하는 작업이다.

탄금대는 달천과 한강이 합쳐지는 합수머리 안쪽에 위치한다. 합수머리에는 현재 두 개의 다리가 있다. 하나는 달천의 하구에 놓인 탄금교고, 다른 하나는 달천과 한강을 가로지르는 탄금대교다. 탄금교는 1977년 세워진 2차선 다리다. 이 다리는 충주시 칠금동 탄금대와 중앙탑면 창동리 갈마를 연결한다. 탄금대교는 충주시내와 중앙탑면을 연결하는 4차선 도로로 2014년 건설되었다. 탄금대와 쇠꽂이(金串)를 연결한다.

다리 중간에 달천과 한강을 전망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 이곳 쇠꽂이는 과거 광산이 있던 곳으로 황금박쥐의 서식지로 알려져 있다. 그 때문에 환경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다. 쇠꽂이를 지나면 청금정(聽琴亭) 삼거리가 나온다. 청금정은 탄금대에서 연주하는 가야금 소리를 가장 잘 들을 수 있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다.

우리는 탄금대 다리를 건너지 않고 달천의 동쪽 제방을 따라 올라간다. 이 제방은 1991년 현재처럼 높이 쌓여지게 되었다. 그 전까지 탄금대 앞 달천변은 여름에 홍수만 나면 물이 넘치는 지역이었다. 그러나 현재는 둑도 높이고 배수펌프장도 설치해 비닐하우스 단지가 되었다. 이곳에서 탄금대 상추작목반이 상추 등 채소를 재배해 전국으로 출하하고 있다. 둑방 안쪽으로는 축대를 높게 쌓은 전통한옥이 한 채 들어서 있다.

 

하방교를 건너며 충주천을 살펴본다.

 

충주천

 

둑방을 따라 올라가면 충주천이 달천에 합류되는 하구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는 쇠물닭과 오리 같은 조류들이 놀고 있다. 수심도 적당하고 가까이 제방이 있어 조류들이 서식하기 좋은 환경이다. 우리는 잠시 하방교 쪽으로 충주천을 따라 올라간다. 그리고 하방교를 건너며 충주천을 잠시 살펴본다. 하방교에서 보면 바로 앞에 푸르지오 아파트가 보인다. 그리고 그 너머로 계명산과 남산이 보인다. 충주 시내는 달천의 동쪽 충주천을 끼고 발달해 있다.

충주천은 발티에서 발원해 호암동, 용산동, 지현동, 성서동을 거쳐 봉방동으로 흘러내려온다. 무학시장에서 교현천을 아우르고, 칠금동에서 금곡천을 아우른다. 교현천은 안림동 약막에서 발원하고, 금곡천은 연수동 금곡에서 발원한다. 발티에서 봉방동까지 이어지는 충주천의 길이는 11㎞라고 한다. 시내를 관통하는 하천치고는 수질이 좋은 편이다. 그것은 발티 아래로 도수로를 통해 충주댐 물이 흘러 넘어오기 때문이다.

또 충주천 하구 봉방동에는 충주시 하수처리장이 있어 이들 물을 정화해 내보낸다. 방류수질의 BOD가 4.6 COD가 9.2 정도여서 3급수라고 한다. 충주 하수처리장은 75,000㎥의 처리용량을 갖추고 있다. 1일 평균 하수처리용량은 10만㎥이고, 방류수 수질기준은 BOD 10 COD 40이다. 정화된 방류수는 청소용수와 식물 재배용수로 이용된다.

그런데 아무래도 하수처리장에서 냄새가 나는 것 같다. 그것은 하수처리에 악취를 유발하는 물질을 제거하는 SMART 3 공법을 사용하지만 완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SMART 3 공법은 혐기 무산소와 호기공정을 이용하여 하수를 처리하는 방식이다. 수질오염총량제가 발효되면 하수처리시설이 보완될 것이고, 악취가 줄어들 것으로 기대한다. 또 인근에 위생처리장이 있어 분뇨와 음식물을 처리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도 악취가 발생한다.

 

달천 다리 옆에 있는 선정비 이야기

 

 

하수처리장과 위생처리장을 지나면 달천 다리에 이르게 된다. 달천 다리에 가기 전 왼쪽으로 정자가 하나 있고, 주변으로 산수유 꽃이 한창이다. 이곳에서 우리는 기념촬영을 한다. 제방 오른쪽으로 선정비(善政碑)가 네기 세워져 있다. 이들 비석은 조선 후기 충주목사를 지낸 사람들을 기리는 선정비다. 비신이 깨진 것도 있지만, 비문은 훼손되지 않아 그들의 이름을 정확히 알 수 있다.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이채(李采), 이광헌(李光憲), 엄찬(嚴纘), 이정로(李正魯)의 선정비가 보인다.

이채는 1795년(정조 19) 12월 충주목사로 부임했고, 1799년 12월 나주목사가 되어 떠난다. 그리고 청덕애민영세불망비가 1802년(嘉慶七年 壬戌) 가을(秋)에 세워진다. 일성록에 나오는 암행어사들의 서계를 통해 그는 진정 백성을 사랑한 목민관이었음을 알 수 있다. 1798년 암행어사 여준영(呂駿永)이 복명(復命)한 서계(書啓)에 따르면 “충주목사 이채(李采)는 아랫사람을 단속하는 정사가 자못 칭찬할 만하다”고 했다.

1799년 암행어사 김희순(金羲淳)이 복명(復命)한 서계(書啓)에 따르면 “충주목사 이채(李采)는 삼가고 단정한 것을 법도로 삼아 치밀하고 합리적으로 다스렸다. 창고의 장부를 잘 정리했기 때문에 아전들이 실상을 숨기지 못하였고 세를 거둘 때에 곡(斛)을 평미레로 밀었기 때문에 백성들이 먼저 달려와 납부했다”고 했다. 그는 1799년 12월 나주목사로 전임된다.

이채(1745~1820)는 우봉(牛峯)이씨로, 자는 계량(季亮) 호는 화천(華泉)이다. 할아버지가 대제학을 지낸 도암(陶菴) 이재(李縡)다. 1774년(영조50) 사마시에 합격해, 휘령전(徽寧殿) 참봉, 사헌부ㆍ호조ㆍ형조의 하위직 벼슬을 거쳐 돈녕부 주부를 지냈다. 1780년 음죽 현감이 되었을 때 무고로 벼슬을 그만두고 귀향하여 학문에 전념함과 동시에 가업을 계승하는 데 힘썼다. 1790년(정조14) 다시 출사하여 지례현감, 선산부사(1793)를 거쳐 1795년 충주목사가 되었다.

1800년 이후 나주목사, 황주목사 등을 역임했다. 1808년에 좌부승지가 되면서 내직을 맡았고, 1814년 가선대부가 되어 호조참판, 동지의금부사를 제수받았으나 나가지 않았다. 1820년 세상을 떠나 충주 족자동(簇子洞: 현재 엄정면 신만리 족동)에 묻혔다. 문경(文敬)이라는 시호를 받았고, 문집으로 『화천집(華泉集)』이 있다. 1886년 충주목사로 있던 그의 증손 이호익(李鎬翼)이 목판으로 문집을 간행했다. 문집은 모두 16권 8책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광헌(1764~?)은 1795년 사마시에 합격한 후 1804년 남평현감, 1808년 순창군수를 거쳐 1811(순조 11) 12월 충주목사로 부임한다. 1814년 5월 후임으로 김용순(金龍淳)이 임명된 것으로 보아 2년 5개월 재직한 것으로 보인다. 1814년(嘉慶十九年 甲戌) 여름(夏) 청덕애민선정비가 건립되었다. 그는 1819년 대사간이 되고 1822년 이조참의가 되었다. 1823년에는 이조참판이 된다. 1824년에는 동지사 부사로 중국에 간다. 1826년에는 강화유수가 되었다. 이광헌은 도암 이재의 증손이며 충주목사를 지낸 이채의 조카이다.

엄찬(嚴纘)은 1693년(숙종 19) 4월 충주목사 명단에 들어있다. 그렇지만 부임연도는 정확히 알 수 없다. 1694년(甲戌) 8월 청덕휼민선정비(淸德恤民善政碑) 건립되었고, 1702년에는 청주목사를 지낸 것으로 나와 있다. 일부에서는 선치인(善治人)으로 일부에서는 사간원의 탄핵을 받은 것으로 나와 있다. 이정로(李正魯)는 1875년(고종 12) 9월 충주목사에 부임해 1876년 2월 이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선정비는 1876년(丁丑) 3월에 건립되었다. 겨우 5개월 근무에 선정비를 세운 것은 지나치다.

 

달천제방 서쪽으로 유입하는 요도천

 

요도천

 

달천교는 달천을 동서로 가로지르는 2차선 다리다. 폭 8m, 길이 264m, 다릿발 13개로 1962년 건설되었다. 그 후 국도 3호선의 교통량 증가와 대형차량 증가로 1994년 재가설이 결정되었다. 1996년 기존 달천교 북쪽으로 폭 10.5m, 길이 276m의 2차선 교량이 완성되었다. 다릿발은 9개로 다릿발 사이 간격은 30m이다. 그리고 1999년 남쪽으로 폭 10.5m, 길이 276m의 2차선 교량을 추가로 완성했다. 그 때문에 달천교는 두 다리의 높이가 다른 분리형 4차선 교량이 되었다. 남쪽 충주방향 달천교는 높이가 11.3m고, 북쪽 서울․청주방향 달천교는 높이가 10m이다.

달천 다리를 건너면 용두동이다. 용두동은 달천과 요도천 사이 들판에 위치한 행정동이다. 이곳에 조선시대까지 용두원(龍頭院)이 있었다고 한다. 옛날 원 기능은 1928년 충북선 달천역이 생기면서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나 2000년대 들어 충북선 기차를 이용하는 사람이 줄면서 2020년대 달천역 역시 폐쇄되었다.

우리는 달천의 서쪽 제방을 따라 하류로 내려간다. 이 제방은 홍수로 여러 번 유실된 후 1991년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제방은 차량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편이다. 3월 중하순이어선지 버드나무 잎이 피어나고 제비꽃, 광대나물 꽃이 피어난다. 달천 건너편으로 충주시내와 계명산, 남산, 대림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남산과 대림산 사이로 월악산이 보이기도 한다. 서쪽으로는 가섭산(迦葉山: 일명 가엽산)도 보인다.

용두동에는 가구공장, 석재상, 닭고기 가공공장, 폐기물 처리장 등이 있다. 생물자원화연구소로 불리는 폐기물처리장에서는 음식물 쓰레기와 폐지 등이 처리되는 것으로 보인다. 조금 더 하류로 내려가면 송어양식장이 보인다. 그 건너 밭에는 비닐하우스가 있어 채소를 재배한다. 용두동은 칠금동, 봉방동과 마찬가지로 비닐하우스를 이용한 근교농업지역이다. 이처럼 채소와 원예농업이 발달할 수 있는 것은 요도천 하구로, 요도천이 달천과 합류되는 지점에 위치하기 때문이다.

두 물길이 만나기 때문인지, 요도천 하구 달천에 모래톱이 만들어져 있다. 그곳 모래톱 주변은 수심이 낮고 제방으로부터 떨어져 있어 새들의 휴식처로 좋은 여건을 가지고 있다. 그 때문에 겨울 철새들이 많이 온다. 12월부터 2월까지는 고니들이 수십 마리 떼 지어 서식한다. 또 기러기, 청둥오리, 쇠물닭도 함께 생활한다. 이들 중 고니와 기러기는 2월말 3월초면 북쪽으로 떠난다. 지난 겨울 내내 이곳에서 먹이활동을 하며 쉬는 고니들을 볼 수 있었다.

요도천은 신니면, 주덕읍, 대소원면을 지나 용두동에서 달천에 합류하는 지방하천이다. 부용산과 수레의산에서 발원해 동쪽으로 흐르며, 동서로 길게 충적평야를 형성한다. 하천연장 시점이 신덕저수지로 길이는 25㎞이다. 유로시점까지 계산한다면 30㎞가 넘는다. 요도천 북쪽 검단리에는 한국교통대학교가 위치하고 있다. 우리는 요도천에 놓인 하검단교를 건너 하검단리로 넘어간다.

 

원종근 캘리그라피에서 잠시 쉬어가다.

 

원종근 캘리그라피

 

하검단교 건너편으로는 2차선 도로가 교통대학교와 탄금교를 연결해준다. 이 도로변에 원종근 캘리그라피 화실이 있다. 달천 다리를 넘어 용두동 제방을 따라 내려오며 우리는 원종근 캘리그라퍼에게 전화를 해놓았다. 30분 후에 도착한다고. 회원 16명이 원종근 선생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우리는 그곳에서 잠시 쉬어가면서 캘리그라피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려고 한다. 약속된 시간을 조금 지나 들어가니 집을 지키는 개(dog) 달수가 먼저 짖어댄다. 달수는 원 선생의 친구이기도 하고, 작품의 오브제기도 하다. 달수를 표현한 캘리그라피가 여러 점 있다.

화실로 들어가 보니 간단하지만 예쁘게 다과가 준비되어 있다. 우리 회원들을 위해 그 짧은 시간에 준비를 했다. 우리는 원종근 선생과 대화를 나누며 20분 정도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예술은 역시 즐거운 것이다. 6월에 배우게 될 캘리그라피가 벌써부터 기대된다. 팔봉서원 문화재활용사업 예술과 친해지기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캘리그라피 수업이 편성되어 있다.

원종근 선생은 캘리그라피를 시서화(詩書畵)의 종합예술로 보고 있다. 자신은 그림에서 출발해 글씨를 배우고, 마지막으로 글까지 쓰는 방식을 취했다고 한다. 화가이니 그림은 되고, 글씨는 어릴 때부터 서예를 배워 가능했고, 글은 경구(驚句) 또는 잠언(箴言) 형식으로 만든다고 한다. 그렇지만 처음 배우는 사람들은 글씨를 먼저 배우고, 그림과 글로 영역을 확장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말한다.

원종근은 2020년 ‘글씨맛집’이라는 캘리 달력을 제작한 바 있다. 여행, 삶, 소통 등을 주제로 하고, 계절에 따라 간단한 문구를 캘리그라피로 표현했다. 그는 또 함께 사는 개 달수를 가지고도 캘리그라피를 한다. ‘달수의 봄날’ ‘Hi 달수’가 있다. ‘Hi 달수’는 모자이크다. 집 마당 수도전 바닥을 모자이크 장식으로 만들었다. 그가 만든 카피로 “개편한 세상”과 “개춘기”도 있다.

요즘은 나만의 수제 도장 만들기 프로그램도 진행한다. 일종의 서각(書刻)이다. 새로운 한글 글꼴을 개발해 신선함을 준다. 글씨보다는 그래픽에 중점을 두는 도장도 있다. 캘리그라피는 2년 정도 공부해야 제대로 개성을 발휘할 수 있다. 6개월 정도는 기초교육 과정이다. 기초 교육과정이 끝나면 자기만의 서체를 만들어 나가는 심화과정이 기다린다. 심화과정에서는 자신의 느낌을 글자와 글로 표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다. 이를 통해 자기만의 서체가 만들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달천담(達川潭)에 남아 있는 퇴계 이황의 흔적

 

달천담과 탄금대

 

검단리를 지나 요도천을 따라 내려오면 대소원면과 중앙탑면의 경계를 지나게 된다. 경계를 넘으면 중앙탑면 창동리 담바우가 된다. 담바우는 달천담의 담과 바위를 합쳐 만들어진 이름이다. 요도천, 충주천이 달천과 합쳐지며 수량이 늘어 넓은 못을 형성하기 때문에 달천담이라는 지명이 생겨났다. 바우는 바위의 사투리로, 마을 앞에 있었을텐데 도로를 내며 없어진 것 같다. 담바우 아래쪽 마을은 갈마(渴馬)다. 목이 마른 말이 갈증을 면하게 되었다는 전설이 서린 곳이다.

이곳 달천담은 조선시대 배를 타고 한양과 충주를 오간 사람들이 수없이 지나간 장소다. 또 금천면에서 충주시내로 들어가려면 이곳을 지나야만 했다. 그곳을 지나며 시인묵객들이 많은 글을 남겼는데, 퇴계 이황의 기록이 가장 인상적이다. 그는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현 안동시 도산면 온혜리) 출신이다. 34세 때인 1534년에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벼슬을 지냈다. 단양군수, 풍기군수 등 지방관을 거쳤고, 홍문관 교리,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1561년에는 고향에 도산서당(陶山書堂)을 짓고 강학과 독서 그리고 저술에 몰두한다.

그 후에도 수차례 벼슬이 내렸으나 사양하고, 임금의 부름에 받아 서울을 오르내렸다. 그리고 1569년 3월 사직 상소가 받아들여져 고향으로 완전히 돌아가게 된다. 이때 충청감사를 하던 유홍(俞泓)이 퇴계를 만나고 싶어해 배를 타고 가흥을 거쳐 충주감영을 향하게 된 것이다. 3월 11일 퇴계는 달천담을 건너 감영에서 송당(松塘) 유홍을 만나고 시문을 주고받는다. 그 시문이 퇴계의 문집에 남아 전한다. 조선 중기 두 정치가의 우정이 정말 아름답다.

 

퇴계에게 바치다. 贈退溪

 

백세의 큰 문장가 있어 百世斯文在

그 이름 북두성 이남에서 높더라. 高名斗以南

임금님이 국정을 조율토록 하나 天將調鼎鼐

몸이 늙어 강담으로 가려하네. 身欲老江潭

한가한 가운데 세월을 보내며 日月閑中遣

고요한 가운데 자연을 즐기리라. 乾坤靜裡探

남아로 할 일을 다 했으니 男兒能事盡

우러르고 굽어봐도 부끄러움 없어라. 俯仰兩無慚

 

충청감사 유홍의 시에 차운하다. 두 수 次韻忠淸監司俞泓之二首

 

퇴직해 물러날 것을 임금님께 빌고 乞退辭天上

영남을 향해 돌아가노라. 言歸指嶺南

가흥관에서 술잔을 주고받고 杯傳可興館

배를 타고 달천담으로 거슬러 올라간다.舟泝達川潭

세상사 고담준론 흠모하고 世事歆高論

선경은 솟아오르려 하지만 仙區聳歷探

시 속의 언사가 지나치게 과분해 詩來言過重

푸른산 보며 읊조리기 부끄러워라. 吟對碧山慙

 

나랏님을 모신 신하 종적을 감춘 날 故國藏蹤日

봄날 중원에서 이별 한스럽구나. 中原別恨春

어찌 알았으랴, 감사가 시를 써 那知棠案筆

사슴무리 속의 몸으로 기록할 줄을. 能記鹿群身

아름다운 새, 시로 지저귀게 하고 好鳥迎詩哢

그윽한 꽃, 붓으로 새로이 조명하니 幽花照墨新

답글을 쓰고 다시 고개 돌리니 酬書更回首

어느 날 다시 만날 수 있을까? 何日得重親

 

탄금대 다리를 건너다.

 

탄금교

 

탄금대 다리가 있는 곳은 옛날 나루였다. 금천에서 탄금대로 건너는 사람들이 많이 이용했다. 다리가 생긴 것은 1977년이다. 1970년에 착공을 했는데 7년이나 걸려 선거용 다리라는 오명을 갖고 있다. 탄금교는 길이가 343m, 폭이 8.5m, 높이가 9m이다. 다릿발은 16개다. 1994년 안전검사를 받아 하중에 대한 보강공사를 했다.

2014년에는 탄금교 아래 쪽으로 (신)탄금대교가 건설되었다. 400억 예산을 들여 길이 580m, 폭 21.5m의 4차선 다리로 완공되었다. 교량형식은 강합성교와 닐센아치교라고 한다.

탄금대 다리를 건너면 굴다리가 나타난다. 신탄금대교로 연결되는 길 아래로 난 터널이다. 이 굴다리는 충주시내와 북충주 인터체인지를 연결하는 4차선 신탄금대교가 만들어지며 생겨났다. 굴다리를 지나면 왼쪽으로 탄금대 장례식장이 있다. 그러므로 탄금대 장례식장은 탄금대의 서쪽 물가에 위치한다. 이곳 주차장에서 우리는 달천 인문학기행 첫 번째 행사를 마무리한다. 회원들이 모두 만족해한다. 11㎞를 3시간 30분 동안 걸었다. 예정보다 30분 정도 더 걸렸다. 그것은 회원과 역사와 문화유산을 이야기하고, 원종근 캘리그라퍼와 예술에 대한 대화를 나눴기 때문이다.

달천 인문학기행은 3월부터 11월까지 9번 이루어질 예정이다. 4월에는 달천의 발원지인 속리산으로 가려고 한다. 법주사를 답사하고 달천의 하천연장 시점인 상수도 수원지까지 살펴볼 것이다. 더 올라가 복천암에도 가고, 일부 회원들은 유로시점인 상고암까지 올라가려고 한다. 달천인문학 기행, 한 번은 하구에서 상류로 걸어 올라가면서, 한 번은 발원지에서 하류로 차를 타고 내려오면서 진행된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