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마르코 복음사가 축일
성 바르나바의 조카였다. 사도 성 바울로의 첫번째 선교 여행에 동행했고 나중에 그를 따라 로마에 갔다. 성 베드로의 제자로서 자신의 복음서에다 그의 가르침을 반영시켰다. 알렉산드리아의 교회를 세웠다고 전해져 온다.
성 이레네오 주교의 저서 [이단자를 거슬러]에서
(Lib. 1,10,1-3: PG 7,550-554)
진리의 전파
땅 극변에까지 온 세상에 전파된 교회가 사도들과 그들의 제자들로부터 이어받은 신앙은 한 분이신 하느님이시고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지으신 전능하신 아버지,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우리 구원을 위해 사람이 되신 한 분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예언자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드러내신 성령에 관한 신앙입니다. 성령께서 예언자들을 통하여 드러내신 하느님의 구원 계획은 사랑하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림하시고, 동정녀에게서 탄생하시며, 수난받으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며, 육신으로 승천하시고, 또한 하늘로부터 성부의 영광속에 다시 오시며, 만물을 일치시키시고 모든 인간 육체를 부활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보이지 않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모든 것이 우리 주님이시요 하느님이시며 우리 구세주이시요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을 꿇고 모두가 입을 모아 그분을 찬미하고" 그분은 모든 이 위에 정의의 심판을 내리실 것입니다.
그리고 교회는 이어받은 이 가르침과 이 신앙을 충실히 간직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온 세상 곳곳에 퍼져 있지만 같은 한 집안에 사는 것과 같습니다. 온 교회는 마치 한 영혼과 한 마음만을 지니고 있듯 이것을 믿고, 또한 흡사 하나의 입만을 가지고 있듯 일치된 목소리로 그것을 전파하고 가르치고 또 전수해 줍니다. 세상의 언어에는 여러 가지가 있지만 신앙을 전달하는 전승의 활력은 하나이며 같은 것입니다.
독일 지방에 세워진 교회들이 믿고 또 전수하는 것과 스페인이나 켈트 지방이나 동방의 교회들이나 에집트나 리비아의 교회들이나 세계 중심의 교회들이 믿고 전수하는 것은 다르지 않습니다. 하느님께서 지으신 피조물인 태양이 세상 어디에서나 똑같은 것처럼 진리의 선포도 세상 어디에서나 빛나고 진리를 알게 되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을 비추고 있습니다.
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웅변을 지닌 사람도 이것과 다른 어떤 것을 말해서는 안되고(누구도 스승이신 그리스도의 위에 있어서는 안됩니다.), 또 지식이 부족한 사람도 전승의 효력을 감소시켜서는 안됩니다. 신앙은 하나이고 같은 것입니다. 신앙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은 그것을 불리지 말아야 하고 또 이야기를 적게 할 수 있는 사람도 그것을 축소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성서의 인물] 좌절을 극복한 마르코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인 '마르코'는 베드로 사도가 아들과 같이 아끼는 제자였다. 그의 유대식 이름은 '요한'이었다. 당시 사람들은 유대식 이름과 희랍어 이름을 동시에 갖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마르코는 열심한 믿음을 지녔던 그의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베드로 사도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또한 마르코는 희랍어에 능통했기 때문에 베드로 사도의 통역사로 전교의 일선에서 많은 활동을 할 수 있었다. 베드로 사도가 청중에게 복음을 전할 때 마르코는 예수 그리스도의 기쁜 소식에 관해 자연스럽게 많은 사실을 알게 되었다. 베드로 사도가 전하는 주님의 복음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정리한 내용이 바로 '마르코 복음서'였다.
마르코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은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산실이었다. 마르코의 어머니는 자신의 집을 예배모임의 장소로 기꺼이 봉헌했다. 마르코의 어머니는 자신의 집을 신도들이 모임의 장소, 즉 교회로 사용할 수 있게 했을 정도로 신심이 깊었다. 이런 신심을 가진 어머니 밑에서 자라고 영향을 받은 마르코도 자연스럽게 어머니의 신심을 본받았을 것이다.
마르코의 집에서 주님의 제자들과 신자들이 함께 모임과 예배를 가졌다. 그러다 보니 마르코는 자연히 사도들과도 잘 알게 되었고, 세례를 베푼 베드로 사도와는 아주 절친한 사이가 되었던 것 같다. 그 단적인 예로 헤로데에 의해 감옥에 붙잡힌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탈출해서 제일 먼저 찾은 집이 바로 마르코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었다.
죽음의 위기에서 탈출한 베드로가 마르코의 집을 찾아 문을 두드렸다. 그러자 여종이 나와 베드로의 목소리를 듣고는 너무 반가와 황급히 안으로 들어가 소리쳤다.
"베드로 사도께서 문 앞에 와 계십니다."
그러나 안에서 기도하고 있던 신도들은 여종의 말을 도대체 믿으려 하지 않았다.
"무슨 소리 하니? 야, 너 미쳤구나!"
그러나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서 문을 열었다. 정말 베드로 사도가 거짓말처럼 문 밖에 서 있는 것을 보고 모두 깜짝 놀랐다.
베드로 사도는 "쉿, 조용히들 하시오. 내가 감옥에서 천사들의 도움으로 빠져 나오게 된 경위를 다 말하리라. 어서들 들어가십시다." 하면서 그간의 경위를 알려주었다.
마르코 어머니의 집은 대문을 지키는 여종이 있었던 재산이 많은 큰 주택이었던 것 같다. 또한 남편의 이름이 등장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과부였던 것 같다. 그리고 마르코는 유명한 바르나바 사도와는 사촌지간이었다. 그래서 오순절 이후 유대지방에 큰 기근이 들었을 때 예루살렘에 구호를 위해 바르나바 사도가 바오로 사도와 함께 올라온 적이 있었다. 처음으로 사도 바오로는 마르코를 만나게 되었다. 바오로 사도는 대뜸 마르코의 됨됨이와 능력을 보고 자신들과 함께 같이 일할 것을 권고했다.
"마르코, 우리 같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활동을 하지 않겠나? 우리 같이 떠나세."
"저는 모든 게 아직 부족한 사람인데요.…"
"이 사람 겸손하기는 아무 말 말고 함께 떠나세."
두 사도는 예루살렘을 떠날 때 마르코를 데리고 갔다. 마르코는 바오로와 바르나바 사도와 함께 얼마동안 동고동락하며 전도 활동을 했다. 바오로 일행이 바포에서 배를 타고 밤필리아 지방 베르게로 건너갔을 때였다. 마르코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갑자기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했다.
"선생님, 저는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겠습니다."
"무슨 소리야, 이제 전도여행이 시작인데…"
마르코는 만류하는 바오로 사도와 헤어져 결국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바오로 사도는 몹시 실망했다. 그만큼 마르코에게 기대가 컸던 탓이었다. 부유한 생활을 했던 마르코가 바오로 사도의 권고에 따라 따라나섰지만 앞에 놓여있는 어려움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이다. 베르게에서 시작되는 전도여행 앞에는 홍수 등 자연적인 재해, 유대인의 박해, 풍토병, 강도의 위험 등이 바오로 사도 일행을 괴롭혔다. 결국 두려움과 어려움을 이기지 못한 마르코는 일행에서 혼자 빠져 나와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마르코는 고향으로 돌아오면서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용기 없는 자신이 너무 초라하고 참담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예루살렘에 돌아온 마르코는 얼마 후 다시 용기를 내어 주님의 복음 전파자로 활동을 하게 되었으며, 베드로 사도의 통역을 맡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열심히 전했다.
마르코는 과거의 실패를 거울삼아 다시 일어서는 기회로 삼았던 것이다. 마침내 초대교회에서 전승을 모아 마르코 복음서를 저술해서 오늘날의 신앙인들에게 귀한 복음을 전해주었다. 마르코에게 있어서 신앙의 길은 좌절과 낙담을 반복하면서도 끝내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었다. 최후의 승리가 진정한 승리인 것이다.
<평화신문, 제654호(2001년 12월 2일), 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성서못자리 전담)>
[역사속의 그리스도인] 17. 사도와 성서저술가 (3) 마르코 사가

성서 전문가들은 마르코가 기원후 64년경 로마에서 복음을 저술한 것으로 보고 있다.
‘불멸의 빛’ 마르코 복음의 저자
예수님 말씀 활동 첫 저술
타 복음서 연구 토대 이뤄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의 말씀과 활동에 관해 처음으로 쓰여진 복음서로 마태오 요한 루가 등 다른 복음서를 연구하는 중요한 토대를 이룰 뿐 아니라 감추어진 「메시아 비밀」을 예수님의 행적과 십자가 죽음, 부활 안에서 밝혀주는 생생한 예수님 사건의 증언록으로 평가 받는다.
그렇다면 복음을 저술한 작가 마르코는 대체 어떤 인물이었을까.
『마르코는 예수의 제자나 목격 증인이 아니었고 베드로의 통역이었는데 베드로로부터 들은 예수의 말씀과 행적들을 순서대로는 아니지만 기억나는 대로 충실히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어떤 것도 삭제하거나 삽입하지도 않았다』
115년경 초대 교부들 가운데 소아시아 히에라 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는 베드로의 통역을 맡았던 마르코의 얘기를 밝힌다. 평소에 요한 원로로 부터 익히 전해들은 바가 있어 저간의 사정을 잘 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 그는 『마르코가 베드로를 통해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이레네오 테르툴리아노 유스티노 알렉산드리아의 클레멘스와 같은 교부들도 파피아스의 말을 받아들였고 그러한 과정에서 파피아스의 증언은 교회 전통으로 자리잡게돼 「마르코」는 네 복음서중 가장 먼저 쓰여진 것으로 추정되는 복음서의 저자로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이 복음 작가는 이름만 알리고 있을 뿐 생애에 대한 실제적인 이야기는 거의 알 수 없는 상태다.
신약성서 곳곳에 「예루살렘 출신으로서」(사도 12, 12) 「바오로와 바르나바의 제자」였으며(사도 12, 15 ; 13, 5~13 ; 15, 37~39 필레 1, 24 골로 4, 10 ; 1디모 4, 11) 또한 「베드로의 제자」(1베드 5, 13)로 「요한」 마르코 라는 인물이 묘사돼 있으나 복음 작가와 같은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이레네오가 사도행전에 나오는 「마르코라 불리는 요한」이 바로 복음작가 마르코라고 설명한 것들과 관련지어 본다면 마르코는 베드로가 순교할 무렵부터 베드로와 연관을 맺으며 내용을 기록했다고 추측할 수 있고 따라서 성서 전문가들은 마르코가 기원후 64년경 로마에서 복음을 저술한 것으로 보고 있다.
마르코에 대한 내용을 좀 더 자세히 살피다 보면 추적 가능한 몇가지 실마리들을 찾을 수 있다. 이레네오가 언급한 내용을 따를 때 우선 마르코의 어머니는 베드로가 석방될 즈음 예루살렘 자신의 집에서 신도들을 보살펴 주던 분(사도 12, 12)으로 생각할 수 있다.
바로 헤로데 아그리빠 왕의 박해로 체포돼 갇히게 된 베드로는 어느날 밤 두 천사의 힘으로 기묘하게 옥에서 구출된 후 「마르코」라 부르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서 머물다가 원수들을 피하기 위해 다시 「로마」로 향해 출발했다는 대목이다.
또 베드로 전서 및 사도행전에 따르면 마르코가 로마에 살았으며 바르나바와 바오로의 첫 번째 전도여행에 동행하였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중에 헤어진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두 번째 전도여행에서는 바르나바가 마르코를 동행하려 했으나 바오로가 반대한 것을 알 수 있다.
한편 필레몬서에서는 이후 바오로가 에페소에서 투옥 생활을 하던 곁에서 마르코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밝히고 있다. 특히 제3차 여행(53~58)에서도 바오로 곁에 마르코가 있었다. 그는 디모테오에게 『그대는 마르코를 데리고 함께 오시오. 그는 봉사하는 일에서 내게는 귀한 사람』임을 드러냈다.
또한 베드로도 마르코를 자신의 아들로 여겼다는 구절을 볼 수 있는데 학자들은 아마도 베드로가 친히 마르코에게 세례를 주고 신앙적으로 가르치며 키웠을 것이라는 추측을 보이고 있다. 그런면에서 베드로의 통역을 맡았던 교부들의 증언은 의혹이 어느 정도 불식됐다고 봐야 한다.
마르코 복음서는 모두 16장.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1, 1)의 기쁜 소식이 역사적인 인물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통해 선포되고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 안에서 밝혀지는 메시아 비밀, 수난 예고에 이어지는 제자들이 걸어가야 할 길, 복음서 전체에 면면히 흐르는 예수님의 수난은 예수님께서 누구인지, 오늘을 사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은 어떠한지 되새기게 만들고 있다. 이 복음은 지금껏 설교 역사상 세상 끝까지 불멸의 빛을 내뿜는 커다란 금자탑의 하나로 여겨진다.
전승에 의하면 마르코는 베드로 바오로가 치명한 뒤 로마를 떠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현지 주교로서 베드로 정신을 따라 교회를 발전시켰지만 그리스도교에 대한 박해가 일면서 체포된 것으로 알려진다. 이후 마르코는 목에 줄을 매 읍내를 돌게 되고 참살 당하게 된다. 정확한 순교 날짜나 장소 등이 불분명하나 마르코 복음사가의 유해는 9세기경 이탈리아 베니스의 성 마르코 성당으로 옮겨졌다.
전문가들은 그러한 순교 후에도 「베드로」의 제자로서 손색이 없을 것이라는 의견. 또한 그가 교회 전승상 마르코라는 사실을 정확히 입증할 수는 없지만 저자가 해외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었고 사도들의 증언 내용을 몸소 두루 익힌 자로서 복음 전파에 전념한 인물이었다는 것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통상 날개 달린 사자가 마르코의 상징으로 표현되는데 이는 그의 복음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시작되며 이 소리가 포효하는 사자와 같다는 의미 때문이다.
[가톨릭신문, 2004년 5월 9일, 이주연 기자]
성 마르코 복음사가
배문한 도미니꼬(수원 가톨릭 대학 교수 · 신부)
마르코는 베드로 사도의 통역자요 바오로 사도의 협조자일 뿐 아니라 제2복음서의 저자이다. 그가 복음서의 필자임을 의심하는 설도 있으나 초기 그리스 필사본은 제2복음서를 마르코에 의한 복음서라고 하고 있으며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도 “베드로의 통역이었던 마르코는 주님의 말씀과 행하신 일을 듣고 왼대로 주의 깊게 그러나 차례에는 구애받지 않은 채 썼다고 장로는 말하고 였다”고 하였다. 또한 성 이레네오는 “베드로의 제자 또는 중개자 마르코는 베드로가 설교하고 있던 일을 써서 전했다”고 하였으며 오리게네스 역시 마르코가 이 책의 필자라고 하고 있다.
마르코에 대하여 우리가 아는 것의 대부분은 신약성서에 의거하는 바 베드로 전서에 “내가 아들로 여기는 마르코”(5,13)나 바오로 서간에 나오는 바르나바의 사촌 마르코(골로 4,10), 바오로의 동료 마르코(필레 l,24), 바오로가 투옥당했을 때 데려오기를 청한 마르코(2디모 4,11), 사도행전에 나오는 요한 마르코(13,5; 12,12.25; 15,37), 복음사가 마르코는 모두 동일 인물로 보고 있다. 그리고 옛 풍습에 따라 유다인들에게는 요한으로, 이방인들에게는 마르코라고 불리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의 사촌인 바르나바가 사제 계급 출신(골로 4,10)이니 마르코도 그러하리라 보며 그는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살았다. 그 집은 새로 태동하고 있던 교회의 집회를 위하여 이용되었으니(사도 12,12) 결코 작은 집이 아니었을 것이며 로데라는 여종(사도 12,13)까지 거느릴 정도면 상당히 유복한 가정이라고 하겠다. 43년 감옥으로부터 탈출한 베드로는 이 집을 피난처로 삼았었다(사도 12,12-17).
마르코가 예수님을 개인적으로 알고 있었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어떤 학자들은 그가 게쎄마니에서 예수님의 체포를 얘기할 때 자기 자신의 얘기를 하고 있다고도 말한다. 즉 “몸에 고운 삼베만을 두른 젊은이가 예수를 따라가다가 사람들에게 붙들리게 되었다. 그러자 그는 삼베를 버리고 알몸으로 달아났다”(마르 14,51-52)는 얘기다. 마르코는 명백히 베드로의 가르침을 받았다. 이어 바오로를 따르고(마르 14,44-49) 그 후(마르 14,61-63) 로마에서 다시 바오로의 협조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또 베드로의 통역자로서 복음 활동에 헌신하였을 것이다. 오랜 전승에 따르면 마르코는 바오로의 영향보다 베드로의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고 한다.
마르코는 바오로와 바르나바를 따라(사도 12,25) 45-49년경 1차 전교여행을 함께 했다(사도 13,5).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로 갔다가 그 후 키프로스 섬까지 함께 갔으나 그 다음 목적지인 소아시아의 주요 지역 여행을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버렸다(사도 13,12). 이에 바오로가 그를 못마땅히 여긴 나머지 50-52년경의 2차 전교여행 때는 동행하기를 거절하였다. 그러자 바르나바는 격렬한 언쟁 끝에 헤어져 마르코와 함께 바르나바의 고향인 키프로스 섬으로 가 전교하였다(사도 15,37-40). 그 후 로마에 가서 베드로를 도와 교회 발전에 전력하였다. 그가 신자들의 희망에 의하여 베드로의 설교를 재료로 삼아 간단 명료하고 강력한 필치로 복음서를 저술한 것은 바로 이때인데 아마 70년경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바오로가 디모테오에게 마르코로 하여금 감옥에 있는 자신을 방문해 주도록 요청한 것을 보면(2디모 4,11) 서로간의 나쁜 감정은 없어진 것 같다.
전승에 의하면 마르코는 성 치릴로, 성 안또니오, 성 미카타리나 동 훌륭한 주의 종을 배출한 에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교회의 창립자였으며, 주교로서 베드로의 제자답게 복음을 전하다가 줄에 몸이 묶이어 자갈밭에 끌려다니다가 순교하였다. 동정과 순교와 저술가로서의 세 가지 영광 속에 천국에 갔다고 하나 순교한 날짜와 장소 등은 불확실하며 그의 유해는 9세기경 이딸리아 베니스의 성 마르코 성당으로 옮겨져 공경받고 있다.
날개 달린 사자는 바로 마르코의 상징인바 이는 그의 복음이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로 시작되며 이 소리를 포효하는 사자와 비교하기 때문이다. 날개는 에제키엘이 날개 달린 네 마리 생물을 환시로 본 것을 복음사가들에게 적용시킨 데서 유래한다. 축일은 4월 25일이다.
마르코는 그리스도교 신자의 존재 이유인 복음 선포에 온갖 정열을 다 바쳤으며 특별히 글로서 전하기에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우리도 성인을 본받아 우리의 말과 글, 행동 하나하나가 모두 복음 선포에 귀착되도록 노력해야겠다.
[경향잡지, 1988년 4월호]
[명화 속 불멸의 성인들] 41. 성 마르코
이교도 습격받아 거리에서 순교
고종희(한양여대 교수)
- ‘성인의 시신을 빼돌리다’, 캔버스에 유채, 398 x 315 cm, 1562-66, 틴토레토, 이탈리아 베네치아 아카데미아 미술관.
이교도 손에서 신자들이 성인 유해 수습하는 장면
역동적 인물묘사·몇 가지 색채로 생동감 있게 표현
마르코 복음서의 저자인 성 마르코에 대해서는 많은 정보가 알려져 있지 않다. 전해지는 자료에 의하면 그는 베드로 성인에 의해 세례를 받고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사도행전은 베드로가 감옥에 갇혔다가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나와 간 곳이 바로 마르코의 집이라며 “마르코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으로 갔다. 거기에는 많은 사람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바깥문을 두드리자 로데라는 하녀가 누구인지 보려고 문으로 갔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초기 공동체 시절에는 아직 교회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비밀리에 가정집에 모여서 집회를 가졌는데 집회를 제공한 주인은 많은 신자들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가 큰 저택을 소유한 귀족인 경우가 많았다.
위의 성경 말씀으로 미루어 보건대 마르코의 집 역시 집회를 제공한 집이었고, 하녀도 있었다는 것으로 보아 마르코는 귀족 출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도행전에 따르면 바오로의 일차 선교 여행 때 마르코는 예루살렘에서 안티오키아를 거쳐 키프로스 섬까지 바오로를 동행했다고 한다.
전승에 의하면 베드로가 마르코를 알렉산드리아로 보냈으며 거기서 주교가 되었다. 부활절 미사를 드리던 중 마르코는 이교도들의 습격을 받고 붙잡혔는데 이들은 주교인 마르코의 목에 밧줄을 걸어서 성인을 거리에서 끌고 다녔으며, 이튿날 같은 일을 되풀이 했고, 성인은 살점이 떨어져 나가고 피가 낭자하여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이교도들이 시신을 불태우려 하자 천둥과 번개가 쳤고, 사람들은 시신을 방치한 채 도망치기에 급급했는데 그 틈을 타 신자들이 성인의 시신을 수습하여 교회에 모셨다고 한다.
알렉산드리아에 모셔졌던 성인의 유해는 829년 베네치아의 상인들에 의해 베네치아로 옮겨졌으며, 이를 기념하여 베네치아 사람들은 성인의 이름을 따 성 마르코 대성당을 짓고 그곳에 유해를 보존하여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마르코 성인이 대중적 인기를 누린 데에는 복음저자라는 사실 외에도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이라는 사실이 큰 몫을 했다. 베네치아에서 마르코 성인은 특별한 공경을 받았으며, 성 마르코 대성당이 도시의 수호성인 성 마르코께 헌정된 것을 비롯하여 베네치아 곳곳에서는 복음저자 성 마르코를 상징하는 사자상을 흔히 볼 수 있다. 과거 베네치아 상인들은 긴 여행을 떠나면서 성 마르코께 무사안일을 기원했고, 돌아와서도 안전한 여행과 도시의 번영을 이룩해준 것에 대해 감사드렸다.
성 마르코의 생애를 그림으로 보여준 화가는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화가 중의 한 사람인 틴토레토(Tintoretto, 본명 야코포 로부스티 Jacopo Robusti, 1518∼1594)이다.
이 그림의 배경은 성 마르코가 생존했던 고대 로마시대가 아니라 화가가 살았던 16세기 중반 베네치아의 모습이다. 성인의 시신을 불태우기 위해 쌓여진 장작더미가 광장 한복판에 놓여져 있고,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치자 사람들이 모두 건물 안으로 피신하고 있는 사이에 신자들이 성인의 시신을 구출하는 장면을 그리고 있다.
성인의 몸은 발가벗겨진 채 사람들에 의해 옮겨지고 있는데, 후기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답게 인물들의 동작이 역동적으로 표현되었고, 인체의 단축법이 강조되었으며, 누드로 표현된 성인의 모습은 당시 화가들이 인체묘사에 특별한 관심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색채와 빛의 대가였던 틴토레토답게 이 작품은 갈색과 먹구름으로 표현된 검은색 그리고 건물을 표현한 흰색 정도의 색채만을 사용했으나 성인의 최후의 모습을 생동감 넘치게 보여주고 있다.
[가톨릭신문, 2010년 6월 6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