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 번째 순례
황간 성녀 루치아 성당
신성근 신부(문화유산교육지도사)
「빛을 품고 흐르는 신앙의 시냇물」
충북의 마지막 마을이자 영남으로 넘어가는 추풍령 길목,
충청도의 바람이 머물고 경상도의 바람이 시작되는 경계,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던 이 길 위에서 복음 역시 조용히 전해졌고
이곳에 오랜 세월 믿음의 길을 지켜 온 공동체가 있습니다.
바로 황간 성 루치아 본당입니다.
황간(黃澗), 빛을 품은 시냇물
황간(黃澗)은 ‘누를 황(黃)’, ‘시내 간(澗)’자를 씁니다.
그대로 풀이하면 ‘누런 시냇물’이라는 뜻입니다.
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계곡을 따라 흐르다가 시냇물이 되고,
마침내 강을 이룹니다.
때로는 맑고 때로는 흙탕물을 품지만
흐름을 멈추지 않습니다.
황간 성당의 역사도 이와 닮아있습니다.
신앙의 흐름은 멈추지 않았고,
복음의 물길은 한 세기가 넘도록 이어져 왔습니다.
공소에서 시작된 복음의 물길
황간 지역의 신앙 역사는 1900년대 초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당시 옥천 본당 관할 노근리 공소와 당저 공소에서
신자들은 함께 기도하며 신앙을 이어 갔습니다.
이러한 신앙의 토대 위에 1936년경
황간면 남성리에 황간 공소가 설립되었습니다.
작은 공소는 황간 지역 복음화의 중심이 되었고,
신앙의 물줄기는 점차 넓어져 갔습니다.
마침내 1957년 10월 5일 황간 본당이 설립되었고,
이듬해인 1958년 10월 5일 소박한 성당이 봉헌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앙 공동체가 성장하자,
1967년 새로운 성당을 신축하였습니다.
성녀 루치아, 영혼의 눈을 밝히는 성인
황간 성당의 주보성인은 성녀 루치아입니다.
루치아는 라틴어로 빛을 뜻합니다.
성녀 루치아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는
단순히 육신의 눈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루치아 성녀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무엇을 놓치지 말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래서 황간 공동체의 역사는
빛을 지켜 온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건물보다
보이지 않는 믿음을 먼저 지켜 온
신앙 공동체의 역사입니다.
옛 성당, 지역사회의 빛이 되다
1958년 봉헌된 첫 성당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새 성당이 건립된 이후에도 이 건물은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며 공동체와 함께해 왔습니다.
많은 성당이 낡은 건물을 철거하고
새로운 건물을 세우지만,
황간 성당은 옛 성당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었습니다.
성녀 루치아가 빛의 성인이라면,
황간의 옛 성당은
지역사회를 향해 빛을 비추는 등불과 같습니다.
복음은 성당 담장 안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흘러가야 함을 보여 주는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두 번의 화재, 그러나 꺼지지 않은 빛
황간 공동체는 두 차례의 큰 시련을 겪었습니다.
2011년에 공동체의 중심이던 성전 내부가 불 탓지만,
신자들은 절망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시 일어섰습니다.
그러나 시련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2026년 카페 루아(RUAH)와 경당에서
또다시 화재가 발생하였습니다.
마치 맑게 흐르던 시냇물이 폭우를 만나
흙탕물이 된 순간과도 같았습니다.
그러나 시냇물은 결국 다시 맑아집니다.
황간 공동체 역시 아픔 속에서도
기도를 멈추지 않았고,
믿음의 흐름을 이어 왔습니다.
루아(RUAH), 성령의 숨결
화재가 발생한 카페의 이름은 ‘루아(RUAH)’였습니다.
히브리어로 루아는 ‘바람’, ‘숨결’, ‘영’을 뜻합니다.
창세기에서 하느님의 영이 물 위를 감돌던
바로 그 성령의 숨결입니다.
비록 건물은 상처를 입었지만
성령의 숨결까지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공동체가 서로를 위로하며 다시 일어설 때,
루아의 바람은 더욱 깊이 공동체 안에서 살아 움직입니다.
「빛을 품고 흐르는 공동체」
물은 빛을 만날 때 가장 아름답습니다.
햇살이 비치는 시냇물은 반짝이며
자신 안에 담긴 생명을 드러냅니다.
빛 없는 물은 어둠에 묻히지만,
빛을 품은 물은 주변까지 밝힙니다.
시냇물이 끊임없이 흐르듯 공동체의 신앙은 이어져 왔고,
루치아의 빛이 물결 위에 비치듯
복음의 빛도 공동체 안에서 계속 빛나고 있습니다.
황간 성녀 루치아 성당은 오늘도 우리에게 말합니다.
참된 교회는 건물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빛을 비추는
공동체의 믿음 안에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