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5일 오늘의 성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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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르키아누스(Marcianus)
성 니카노르(Nicanor)
성 아폴로니우스(Apollonius)
축일 6월 5일
로마 순교록은 성 마르키아누스(Marcianus)와
성 니카노르 그리고 성 아폴로니우스(Apollonius)를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 이집트에서 순교한
이들 중의 일부로 기술하고 있다.
그런데 성 마르키아누스와 니칸데르(Nicander)로도
불리는 성 니카노르에 대해서는 불확실한 부분이 있다.
일부 학자들은 그들을 불가리아나 루마니아에서
순교한 로마 군인으로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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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도로테오(Dorotheus)
축일 6월 5일
순교자 성 도로테우스(또는 도로테오)는
티레의 사제였고, 또 불확실하긴 하지만
그 교구의 주교였다는 설도 있다.
그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체포되어
유배되었다. 박해가 다소 누그러지자 그는
양떼에게로 돌아왔고, 325년의 니케아 공의회
(Council of Nicaea)에 참석하였다.
학식이 풍부한 그는 그리스와 라틴 시에도 해박한
지식을 갖고 있었는데, 그의 저서들도 여러 권
있었다고 한다. 배교자 율리아누스 황제가
새로운 박해를 일으키자, 그는 잠시 발칸 반도 동부
트라키아(Thracia)의 오디소폴리스(Odyssopolis)로
피신하였으나, 결국은 체포되어 비참한 죽음을
당하여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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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플로렌티우스(Florentius),
성 율리아누스(Julianus),
성 키리아쿠스(Cyriacus),
성 마르첼리누스 또는 마르첼리노(Marcellinus)
성 파우스티누스(Faustinus)
축일 6월 5일
성 플로렌티우스(Florentius),
성 율리아누스(Julianus),성 키리아쿠스(Cyriacus),
성 마르첼리누스(또는 마르첼리노)와
성 파우스티누스(Faustinus)는 데키우스 황제 때에
이탈리아의 페루자(Perugia)에서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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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제나이스(Zenais),
성녀 키리아(Cyria),
성녀 발레리아(Valeria)
성녀 마르키아 또는 마르치아(Marcia)
축일 6월 5일
성녀 제나이스(Zenais), 성녀 키리아(Cyria),
성녀 발레리아(Valeria)와 성녀 마르키아
(또는 마르치아)는 서로 다른 두 그룹의 순교자들이
합쳐진 것으로 보인다. 성녀 제나이스는 분명히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순교하였다.
다른 세 명의 초기 순교자들은 카이사레아
(Caesarea)에서 순교하였고,
예수님과 동시대인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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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마인베르크(Meinwerk)
축일 6월 5일
색슨의 귀족인 마인베르크는 할베르슈타트와
히데샤임에서 사제직 수업을 받았고,
파더보른 주교가 서거했을 때 후임자로 선출되어
성 빌리지스(Willigis)로부터 축성되었다.
그는 흔히 파더보른 교구의 제2의 설립자로
불릴 만큼 큰일을 많이 하였다.
먼저 그는 화재로 소실된 주교좌를 복원하고
압딘고프에 클뤼니(Cluny) 수도원을 세우는 한편
도시의 성을 쌓고 방비를 튼튼히 하였다.
또 학문과 예술의 수호자답게 그는 독일에서
가장 유명한 파더보른 학교를 운영하였는데,
이 모든 일을 행함에 있어 자신의 유산으로
충당하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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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보니파시오(Boniface)
축일 6월 5일
보니파시오는 라틴어로 '선행 실천'이란 뜻이다.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또는 보니파시오)는
675년경 영국 웨식스(Wessex)의 크레디톤의
귀족가문에서 태어나 주로 수도원에서 교육받았다.
그는 불과 7세 때에 엑서터(Exeter)의 베네딕토
수도원 학교에 들어갔고, 14세 되던 해에는
너슬링(Nursling)의 베네딕토 수도원에서
윈버트(Winbert)의 지도하에 공부하였다.
그는 너슬링 베네딕토회에 입회하여 30세에 사제로
서품되었고, 수도원 학교의 교장이 되어 교수생활과
설교자로서의 생활이 성공하자 프리슬란트(Friesland)의
선교사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그러나 716년의 첫 번째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이렇게 되자 그는 718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2세
(Gregorius II)가 계시는 로마(Rome)로 갔으며,
여기서 교황으로부터 라인 강 동쪽에 사는 이교도들을
개종시키라는 명을 받고 길을 떠났다.
이때부터 그는 보니파티우스로 개명하고 3년 동안
성 빌리브로르두스(Willibrordus, 11월 7일)를 도와
프리슬란트에서 선교사로 활약하였다. 그가 722년
가장 이교도적인 헤센(Hessen)으로 가서 아뫼네부르크에
베네딕토회 최초의 수도원을 설립하고 많은 사람에게
세례를 주는 등 선교활동의 대성공을 거두게 되자,
교황은 보니파티우스를 로마로 불러들여 주교로
서품하고 교회 법령집과 독일의 모든 수도자들과
관리들에게 보내는 추천서를 써주었다.
이 서한은 그의 독일 선교 활동을 보호하기 위한 것으로,
특히 프랑크 왕국의 재상인 카를마르텔(Karl Martell)의
보호를 받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보니파티우스는 카를마르텔의 보호를 받으며 723년부터
725년까지 제2차 헤센 선교에 나섰는데, 이때 그는
가이스마르(Geismar)에서 이교도들이 신성시하는
떡갈나무를 베어 경당을 짓는 데 사용하였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개종자들이 확산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후 그는 튀링겐(Thuringen)에 가서
오르트루프(Ohrdruf)에 수도원을 세웠고,
영국의 수도자들을 독일의 선교사로 파견하는 일을
성공적으로 수행하였다. 또한 그는 여러 곳에
수도원을 세웠다.
744년에 그와 성 스투르미우스(Sturmius, 12월 17일)는
풀다(Fulda)에 수도원을 세웠는데, 이 수도원은
몇 년 지나지 않아서 북유럽에서 가장 큰 중심
수도원으로 발전하였다. 또한 그는 독일과 프랑크의
교황대사로 임명되었고, 피핀을 프랑크의 유일한 통치자로
세우는 대관식을 거행하였다.
성 보니파티우스는 754년에 마인츠(Mainz)의 대주교직을
사임하고 성 빌리브로르두스의 사후 이방 관습에
다시 떨어진 프리슬란트를 재건하는데 여생을 바쳤다.
그가 프리슬란트의 도쿰(Dokkum) 근처 보르네
강변에서 개종자들에게 견진성사을 주려고 준비하던 중에
이교도들의 급습을 받아 살해되었다.
'독일의 사도'로 불리는 그의 축일은
비오 9세(Pius IX)로에 의해 1874년부터 전 교회에서
거행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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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산치오(Sancius)
축일 6월 5일
성 산치우스(또는 산치오) 혹은 산초(Sancho)는
남부 프랑스의 알비(Albi)에서 태어났으나, 무어인들의
포로가 되어 전쟁 포로로서 코르도바(Curdoba)에
수감되었다. 그곳에서 그는 터키 보병 훈련을 받고
소년병으로 등재되었다. 그러나 성 이사악의 표양을
보고 산치우스는 공개적으로 자신이 그리스도인임을
고백하고 마호메트 예언자를 배격한다고 선언하였다.
그는 즉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 당시 몇몇 다른 신자들도 같은 이유로 고문을
받았지만, 산치우스 혼자만이 잔인한 형벌 끝에
운명하고 말았다. 그의 유해는 성 이사악의 경우처럼
며칠 동안 전시되었다가 화장하여 재를 강물에
흘려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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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에오바노(Eoban)
축일 6월 5일
아일랜드 태생의 성 에오바누스
(Eobanus, 또는 에오바노)는 베네딕토회 수도승이자
사제로서 독일 선교 중에 성 빌리브로르두스
(Willibrordus, 11월 7일)와
성 보니파티우스(Bonifatius, 6월 5일)와 함께 활동하였다.
성 보니파티우스는 그를 위트레흐트의 주교로 임명했고,
그는 프리슬란트(Friesland)의 도쿰(Dokkum)에서
독일의 사도인 성 보니파티우스를 뒤따라 순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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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페르디난도(Ferdinand)
축일 6월 5일
포르투갈의 요한 1세(Joannes I) 국왕과
필리파(Philippa)의 아들인 페르디난도(Ferdinandus)는
포르투갈의 산타렘(Santarem)에서 태어났다.
그는 그 당시의 왕자로서 보기 드문 신심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는 부친의 명에 따라 아비스(Aviz)
기사직을 수여받았지만, 교황 에우게니우스 4세
(Eugenius IV)가 제의한 추기경직을 사양할 만큼
겸손하고 열심하였다.
항해사인 동생 엔리케(Henrique)와 함께 페르디난도는
오늘날 아프리카 북서부 끝에 있는 모로코(Morocco)의
항구 도시 탕헤르(Tangier)에 주둔해 있던 무어인을
치기 위하여 군대를 인솔하였으나, 그의 동생인 국왕
에드워드가 큰 착오를 일으킴에 따라 포르투갈 군대는
대패하고 말았다. 엔리케는 겨우 피신하였으나
페르디난도는 체포되어 혹사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에드워드 왕이 석방금을 보내지 않아
그는 더 많은 고통을 당하였다.
그는 6년 동안이나 포로생활을 하다가 페스(Fez)
감옥에서 옥사하였는데, 무어인들은 그의 시신을
감옥 벽에 걸어두는 등 시신에게조차 온갖 모욕을
주었다. 그는 흔히 '지조 있는 사람'으로 불리며
포르투갈의 영웅 중에서도 가장 공경을 받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