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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6월 18일 축일 맞으신 성인

작성자김영철 베드로|작성시간26.06.18|조회수2 목록 댓글 0
        ♡6월 18일 오늘의 성인♡ ============== 성 그레고리오(Gregory) 성 데메트리우스(Demetrius) 성 칼로게루스(Calogerus) 축일 6월 18일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또는 그레고리오) 주교와 성 데메트리우스(Demetrius) 부제 그리고 수도원장이었던 성 칼로게루스(Calogerus)는 아리우스파의 반달족에 의해 그들의 고향으로부터 북아프리카로 쫓겨났다가 시칠리아(Sicilia) 섬 메시나(Messina) 부근 프라갈라타(Fragalata) 주변 지역에 정착하여 복음을 선포하였다. 성 칼로게루스는 원래 그리스의 은수자이자 선교사로 ‘은둔자’로 불렸는데, 교황으로부터 수도원의 관습을 받아들여 시칠리아 섬 지르젠티(Girgenti, 오늘날의 아그리젠토 Agrigento) 근처에서 30여년 이상을 은수자로서 살았다. 그는 또한 레파리(Lepari) 섬의 선교사로서 봉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 성 그레고리오 바르바리고(Gregory Barbarigo) 축일 6월 18일 성 그레고리우스 바르바리고(Gregorius Barbarigo, 또는 그레고리오)는 162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Venezia)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당시 유럽에서는 개신교와 가톨릭 신자들간의 맹렬한 전쟁이 7년간 지속되고 있었는데, 그것은 30년 전쟁의 시작이었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베네치아에서 교육을 받았다. 그는 20대 초반에 베네치아 정부의 대사인 루이지 콘타리니(Luigi Contarini)가 독일의 뮌스터 (Munster)로 파견되는 데 동행하게 되었다. 그곳에서 1648년 베스트팔렌(Westfalen) 조약이 이루어졌다. 그 회의에서 교황 대리인 파비오 치기 (Fabio Chigi)는 예외적으로 젊은이였던 성 그레고리우스를 발견하고 그와 친구가 되었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1655년 사제 서품을 받고, 1657년 흑사병이 창궐하던 시기에 대담하게 활동하였다. 파비오 치기가 교황 알렉산데르 7세(Alexander VII)로 선출되었을 때 그는 뮌스터에서 만났던 베네치아 출신의 성 그레고리우스에 대한 인상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성 그레고리우스를 이탈리아 베르가모(Bergamo)의 주교로 임명하였다. 3년 후인 1660년 추기경으로 승품된 성 그레고리우스는 1664년 파도바의 교구장으로 임명되어 그곳에서 33년간 봉직했다. 성 그레고리우스는 탁월한 교회의 사람이었고 정치가였다. 그는 종교개혁 시기에 그리스도교의 재일치를 위해 노력했고, 사제 양성을 개선하기 위한 방안을 추진하여 신학생들을 위한 좋은 대학과 신학원을 세웠고, 자체 출판사를 설립했으며, 교부들의 작품에 대한 지식이 있는 이들과 성서를 아는 인물들을 교사로 임명하였다. 그 출판사에서 출판한 몇몇 작품은 이슬람 국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전해졌다. 그의 자선행위는 실로 엄청나고 지속적이었다. 성 그레고리우스의 사목적 헌신은 성 카롤루스 보로메오 (Carolus Borromeo, 11월 4일)의 헌신에 견줄만했다. 자신에게는 엄격하면서도 타인에게는 친절하여 곤경에 처한 이들을 큰 열정으로 도왔다. 추기경으로서 그는 다섯 번의 교황선거에 참여했고, 유력한 교황 후보로 손꼽히기도 했다. 그는 선종하여 파도바의 대성전에 묻혔다. ================================ 성 레온시오(Leontius) 성 히파티우스(Hypatius) 성 테오둘루스(Theodulus) 축일 6월 18일 페니키아(Phoenicia, 시리아와 레바논 해안지대의 고대 지명) 지방 트리폴리의 성 레온티우스 (또는 레온시오)는 시리아에 주둔 로마군의 장교로 그리스인이었다. 종교적인 인물이었던 그는 비그리스도교로 개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때에 고문을 받고 죽을 때까지 매를 맞았다. 그리고 그를 체포했던 두 명의 군인인 성 히파티우스 (Hypatius)와 성 테오둘루스(Theodulus) 역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고 순교하였다. 성 레온티우스는 요안나(Joanna)라는 이름의 한 여인의 집 뜰에 묻혔고, 그녀의 남편은 그 순교자를 기념해서 성당을 지었다. 그런데 그곳에서 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이후 다른 많은 성당들이 성 레온티우스를 기념해서 봉헌되었다. 그는 이전까지 시리아의 수호성인이었다. ================================ 성 마르코(Marcus) 성 마르첼리아노(Marcellian) 축일 6월 18일 성 마르코(Marcus)와 마르첼리아누스(Marcellianus, 또는 마르첼리아노)는 형제지간으로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당시에 부제들이었다. 그들의 순교사적을 자세히 알지는 못하지만, 성 세바스티아누스(Sebastianus) 못지않은 용맹성이 있었다고 한다. 이들은 쌍둥이로 젊어서 그리스도인이 되었고 또 결혼도 하였다. 박해가 일어나자마자 체포되어 로마(Rome)의 집정관 크로마티우스에게 끌려가서 투옥되었다. 그의 친구들은 그들을 회개시킨다는 조건으로 30일 간의 시간을 얻어서 이방 신전에 희생물을 드리는 것이 무슨 대수냐는 식으로 그들을 달랬지만 허사로 끝났다. 이어서 그들의 아내와 어린 자녀들 그리고 부모까지 와서 마음을 고쳐먹도록 간청하여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마침내 크로마티우스는 나무기둥을 두 개 세우고 그들의 다리에 못을 박았다. 그런 상태에서 24시간이 흘렀으나 죽지 않으므로 창으로 찔렀다고 한다. 이들의 유해는 성 코스마(Cosmas)와 다미아누스(Damianus) 성당의 카타콤바에 묻혔는데, 지금은 이곳이 로마의 성 프락세데스 대성당이 되었다. ================================ 성녀 마리나(Marina) 축일 6월 18일 로마 순교록은 성녀 마리나를 알렉산드리아 (Alexandria)의 동정 순교자라고 기록하였다. 그러나 많은 고대 순교록은 그녀를 동정녀로서 기록하고 있다. 그녀는 또한 종종 안티오키아(Antiochia)의 성녀 마르가리타(Margarita, 7월 20일)나 남장을 하고 수도원에서 살았던 성녀 마리나(2월 12일)와 혼동되기도 한다. 성녀 마리나는 8세기에 비티니아(Bithynia, 고대 소아시아 북서부 지역) 지방에서 활동했는데, 대단한 열정을 지닌 수도자로서 하느님을 섬겼다. 그녀의 놀라운 겸손과 온유 그리고 인내는 사막의 교부들의 삶을 기리기 위함이었다. 그녀는 8세기 중반에 선종하였고, 1230년 그녀의 유해가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서 이탈리아 베네치아(Venezia)로 이장되어 성녀의 이름으로 봉헌된 성당에 안치되어 공경을 받고 있다. 그리고 프랑스 파리(Paris)에도 그녀를 공경하는 성당이 세워졌고, 유해의 일부를 베네치아에서 가져다 모셨다. ================================ 성녀 바울라(Paula) 성 키리아쿠스(Cyriacus) 축일 6월 18일 성녀 바울라와 성 키리아쿠스(Cyriacus)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박해 때 에스파냐의 항구도시인 말라가(Malaga)에서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 성 아만도(Amand) 축일 6월 18일 우리는 놀라의 성 바울리누스(Paulinus)의 글에서 성 아만두스(Amandus, 또는 아만도)는 아기 때부터 하느님을 섬겼고, 성령의 지식으로 성장하였으며, 육적인 죄에 휩쓸리지 않았다는 내용을 읽고 감동한다. 그러나 그의 어릴 적 내력은 전혀 알 수 없다. 그는 보르도의 주교인 성 델피누스(Delphinus)에 의하여 사제품을 받았다. 그는 성 바울리누스와 아주 가까운 사이로서 서로의 신심과 지혜를 격려하였다. 성 델피누스의 사후에 그가 보르도의 주교로 착좌하였다. 투르(Tours)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는 이런 글을 남겼다. “만일 그대들이 하느님 앞에 의로운 주교를 보려면, 툴루즈(Toulouse)의 엑스수페리우스(Exsuperius)나 베네치아(Venezia)의 심플리키우스(Simplicius) 그리고 보르도의 아만두스 주교를 보면 된다.” ================================ 성 에테리오(Etherius) 축일 6월 18일 성 아이테리우스(Aetherius, 또는 에테리오)는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에 니코메디아에서 순교하였다. ================================ 성녀 엘리사벳(Elizabeth) 축일 6월 18일 엘리사벳은 히브리어로 '하느님은 나의 맹세'란 뜻이다. 비천한 가정에서 태어난 성녀 엘리사벳(Elisabeth)은 12세 때에 독일 본(Bonn) 근교의 쇼나우의 베네딕토 수도원에 입회하여 1147년에 서원을 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극히 엄격한 수덕생활을 시작하였다. 1152년경에 그녀는 첫 번째 환시를 보았다. 그 후 일생동안 수많은 초자연적 현상, 곧 환시, 탈혼, 예언 등을 하였으나 가끔 그녀의 몸에 타박상을 내고 때리는 악마적인 환시도 있었다. 엘리사벳은 자신의 환시, 특히 주님의 수난과 부활 그리고 승천에 대한 환시를 묘사하였는데, 이를 처음으로 기록한 사람은 자신의 남동생인 에그베르투스(Egbertus)였다고 한다. 그 역시 쇼나우 수도원에서 수도자가 되었다가 후일 그곳의 원장을 역임하였다. 그녀의 책에 기록된 어떤 환시 내용은 분명치 못한 것도 있고 또 학자들로부터 의문시 되는 부분도 있다. 예를 들면 그녀의 동생의 친구이던 대립교황 빅토르 4세(Victor IV)를 지지한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진실에 대한 의구심은 추호도 없고 높은 존경과 사랑을 받아왔다. 그녀는 1157년에 원장이 되었고 7년 후에 운명하였다. 그녀가 공식적으로 시복 혹은 시성된 기록은 없지만 로마 순교록에는 성녀 엘리사벳으로 언급하고 있다. ================================ 성녀 호산나 안드레아시(Hosanna Andreassi) 축일 6월 18일 호산나 안드레아시(Hosanna Andreassi)는 이탈리아 롬바르디아(Lombardia)의 만투아에서 그 도시의 귀족인 니콜라우스 안드레아시와 루이자 곤자가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다섯 살 때에 처음으로 신비체험을 하였다. 어느 날 카르보나롤라의 포(Po) 강변을 거닐고 있는데 "아가야, 생명과 죽음은 사랑이신 하느님께 달려 있단다." 하는 신비스런 음성이 들려왔다. 그 말을 들은 즉시 탈혼에 빠진 그녀는 한 천사의 인도로 천국으로 인도되었다고 한다. 호산나는 거기서 모든 창조물이 하느님을 영원히 찬양하는 것을 보았다. 이때부터 어린 호산나는 장시간 동안 기도와 보속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읽고 쓰기를 배웠으며, 14세 때에는 도미니코회 3회원이 되려고 했으나 결혼을 주장하는 부모의 반대를 받았다. 이상한 것은 그녀가 37세가 될 때까지 서약하지 않고 거의 항상 수련자로 지낸 것이다. 이것은 부모께 대한 순종이 하늘나라에서도 매우 중요함을 환시를 통하여 알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476년부터 1481년 사이에 그녀는 그리스도의 수난에 직접 동참하는 체험을 하였다. 처음에는 가시관, 그 다음에는 옆구리의 상처, 그리고 마지막으로 양손과 발에 상처가 드러나게 되었다. 그녀는 지극히 단순하고 또 깊은 신뢰심을 가지고 하느님만 바라며 일생을 살았다. 1501년 그녀는 비로소 재속 도미니코 회원으로서 서약을 하였고, 그 즉시 56세의 일기로 선종하였다. 오산나(Osanna)로도 불린다. 그녀에 대한 공경은 1694년 교황 인노켄티우스 12세 (Innocentius XII)에 의해 승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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