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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이름 이진희/

그녀가 눈을 뜰 때 2

작성자내방아줌마|작성시간26.06.19|조회수51 목록 댓글 0

그녀가 눈을 뜰 때 2

 

브리티시 미드랜드 항공편으로 런던 히드로 공항에 도착한 것은 재석의 전보를 받은 지 5시간이
지난 뒤였다.
 그 동안 세준은 국제전화를  걸기 위해 병원에서 웨벌리 역까지 달려갔다. 재석을  향해 고함을
쳐댔고, 재석은 가장 빨리 올 수 있는 방법을 택하라고 했다.
  그는 무작정 에든버러  시가지를 쏘다녔다. 정오가 지났건만 에든버러의 안개는  좀처럼 걷히지
않았다. 걷고 있다는 느낌조차  없는데 올드 타운의 고풍스러운 석조 건물들이 자꾸  그를 밀어냈어
므로, 그는 그저 고요한 수면 위의  수상 건물들이 자꾸 그를 밀어냈으므로, 그는 그저 고요한 수
면 위의 수상 식물처럼 둥둥 떠다녔을 뿐이었다.
  기숙사로 돌아와 주섬주섬 짐을 꾸리기 시작했고, 이내 그만두었다. 그리고 하루나 이틀쯤 짧은
길을 떠나는 사람처럼 칫솔 따위만 챙겨 들고 기숙사를 나왔다.
  5시간.
  그 사이 그가 인정하고 결정한 것은 오직 한 가지였다. 직접 서희를 만나야 한다는 것. 그 외에
어떠한 생각도, 아무런 단정도 하지 말자는 것이었다.
  하을의 모든 길들이 그를 막아서고 있었다. 영국 항공은 이틀 뒤에, 대한항공은 사흘 뒤에나 하
늘의 길들을 열어줄 심사였다.
  그는 히드로 공항을  미친 듯이 뛰어다녔고, 좀처럼  서두르는 법이 없는 영국인들이  휘둥그런
눈으로 한 동양 남자를 쳐다보며 길을 열어주었다.
  영국 항공 예약 창구에서 그는 목을 빼고 외쳤다.
  “난 잠시도 이 땅에서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어요.”
  악을 쓰는 그를 예쁘장하게 생긴 여자 직원이 무표정하게 바라보았다.
  “무슨 수를 내봐요. 제발!‘
  소용없는 짓이었다. 아무리 악을 써도 막힌 길을 열 재주가 없었다.
억지를 부리고 있는 낯선 동양인에게 자선을 베풀 그들이 아니었다.
  합리적인 것을 좇고 순리와 질서를 존중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그들의 사고방식에 박수를
보낸 그였다. 그러나 이제 그따위 것들에게는 넌덜머리가 났다.
  사흘 뒤에나 갈 수 있다는 대한항공 창구를 다시 찾을  도리밖에 없었다. 적어도 그들은 조국에
게 어깨를 맞대고 살아가던 동포였고, 이 아득한 땅에서 그  사실이 얼마나 소중하고 든든한지 알
고 있을 터였다.
  그는 생각했다. 이 불쌍한  사내를 위해 없는 길도 열어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동포이므로,
조국 땅에서 살 때 이를 드러내며 앙앙거려도 분명히 한 핏줄일 터이므로.
  그는 창구 직원이 말리는 것을 뿌리치고 지점장실로 쳐들어갔다.
  지점장은 점잖고 예절 바른 오십 대  남자였다. 그는 지점장에게 무조건 꾸벅 절을 했다. 그리고
거침없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대학병원 의사였다. 이 몹쓸 땅에  유학 왔다가 이런 꼴을 당했다. 난 사랑하는 사람이 있
다. 그런데 그 사람이  지금 위독하다. 한시라도 빨리 갈 수  없다면 나는 차라리 이 몹쓸 땅에서
죽어버리는 게 나을 것이다.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이야기를 듣던 지점장이 인터폰을 들었다.
  “한국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조선을 찾아보게.”
  10분쯤 지났을 때였다. 지점장의 지시를 받은 직원인 듯한 사내가 들어왔다.
  “방콕가지 가는 사운스바운드  항로가 있긴 합니다만, 모레의 직항로보다 크게  빠르진 못합니
다.”
 직원의 말에 의하면 에어 UK  편으로 프랑크푸르트, 암스테르담, 바레인을 거쳐 방콕에 도착하
는 것이었다. 방콕에서 JAL 편으로 동경으로, 다시 대한항공을 갈아타고 서울로 이어지는 복잡한
하늘 길이었다.
  복잡한 것쯤이야 문제없었다.  하지만 각 공항의 체류  시간까지 합하면 이틀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차라리 영국 항공의 직항로로 대여섯 시간 늦는 것이 나을지도 몰랐다.
  직원이 그의 얼굴을 안타깝게 바라보더니 지점장을 향해 입을 열었다.
  “오늘 밤에 떠나는 화물기가 있긴 한데...”
  그는 다시 지점장에게 매달렸다.
  “지점장님, 도와주십시오. 화물기라도 좋습니다. 빨리만 갈 수 있다면.”
  지점장은 고개를 저었고, 직원은 지점장의 눈치를 살피며 어물쩍 밖으로 나갔다.
  “죄송합니다. 선생님. 운항 법규상 저희로서도 어쩔 수 없습니다.”
  법규를 헤아려 포기할 만큼 그는 한가하지 않았고, 물러설 생각도 없었다.
  “사람이 살다 보면 이런 일 저런 일 닥치게 됩니다.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부득이 병원 신세를
져야 할 경우가 있습니다. 지점장님 본인일  수도 있고, 아내일 수도 있고, 친구일 수도 있습니다.
그때 제가 병원 법규를 어기는 일이 생겨도 선생님을 돕겠습니다.”
  부탁인지 협박인지 모를 말을 그렇게 쏟아냈다.
  지점장은 난처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그의 말대로 언젠가 닥칠지도 모를 병원  신세를 생
각하고 있는 듯 보이진 않았다. 다만 불쌍한 사내의 처지를 이해해 보려  애쓰고 있는 듯했다.
아니면 정말 방법이 없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초조한 시간이 속수무책으로 지나갔다.
  지점장은 결심을 굳힌 듯 직원을 불러 필요한 조치를 명령했다.
  길게 안도의 숨을 몰아쉬는 그를 바라보며 지점장이 물었다.
  “의사라고 하셨던가요?”
  “예.”
  “그럼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셔서 사랑하는 사람의 병을 고쳐주십시오.”
  지점장이 손을 내밀었다. 그는 굳게 손을 맞잡으며 지점장에게, 아니 그 자신에게 말했다.
  “물론입니다. 꼭 그렇게 하겠습니다.”
  출발 시간까지 두어 시간 남아 있었다.
  불시에 닥친 나를 보고 서희는 무어라고 할까?
  세준은 면세점으로 향했다.
  떨어져 있는 1년  동안 그녀에게 선물 하나 보내지  못했다. 알량한 선물 하나 사지 못할  만큼
그의 생활은 궁핍했고, 이제 겨우 그 궁핍에서 벗어날 참이었다.
  그는 지갑 안쪽 깊숙이 1년 동안 들어 있던 1백 달러짜리 지폐  다섯 장을 꺼내 들었다. 1년 전
김포공항에서 그녀가 건넨 동이었다.
  “얼마 안 돼요. 필요할 때 쓰세요.”
  그러나 그는 한 푼도 쓸 수 없었다. 그녀의 형편을, 아니 그녀의 마음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착한 여자다. 그런 그녀가 위독하다니...
 재석은 병명조차 밝히지 않았다. 아니  밝히지 못하는 것이리라. 전화로 말해야 할 상황이 아님
을 짐작했으므로 추궁하지 못했다.
  그는 면세점에서 돈이 허락하는 한도에서 선물을 샀다.
  웨일스 산 울 스웨터,  카사렐의 상표가 붙어 있는 여성용 모자와 핸드백, 타탄체크의 머플러,
그리고 바다에게 줄 장난감 몇 가지.
  항공 사고가 발생할 경우 어떠한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각서에 사인을 하고 그는 화물기에 올
났다.
  이제 짐짝들과 함께 14시간 하늘을 날면 서울에 도착할 것이었다.
  기적에 가까운 짧은 시간이었다. 그 기적에 그는 감사를 했다. 그리고 기적이 잠시도 곁을 떠나
지 않았으면 하고 간절히 기대했다.
  화물기가 이륙의 굉음을 울리기 시작하더니 이내 별들이 반짝이는 하늘을 쏜살같이 날아갔다.
  별들이 반짝이는 것은 대기가 불안하기 때문이라고 했던가.
  그는 불안하고 초조한 심정으로 반짝이는 별들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그는 울고 있었으므로 별은 더 이상 반짝이지 않았다.
  그는 눈물을 닦아낼 생각도 않고 중얼거렸다.
  우리는 아주 편안하고 아름다운 길을 갈 수 있었어.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거칠고 험한
길만 걷게 되었지.
  그때가 언제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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