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어머니가 함께 도시로 외출했고, 소년은 사택에 홀로 남아 있었다. 잠자리에 누운 지
한참 되었을 때였다. 문을 요란하게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소망원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참 보모였다. 한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가야겠는데 같이 갈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다.
누구냐고 물었더니 서희라고 했다. 소년은 보모와 함께 서희를 없고 병원으로 내달았다.
자정이 가까운 시각이었는데 읍내 하나뿐인 병원에선 소망원 식구
는 받을 수 없다며 도립병원으로 가라고 했다. 몇 번 사정을 했지만 그들은 고개를 흔들 뿐이었
다.
지나가는 트럭을 세워 서희를 짐칸에 태우고 도립병원 응급실로 갔다. 서희는 울지도 못하고
끙끙 신음만 토해냈다. 소년은 서희의 이마에 샘처럼 솟아나는 땀을 연신 닦으며 말했다.
“조금만 참아, 서희야. 괜찮을 거야. 병원만 가면 문제없어.” 소년이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그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소년은 내가 의사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털털털, 비포장도로를 1시간쯤 달려 도립병원에 도착했다. 그러나 이번엔 도청에 가서 원생 확
인서를 받아오라는 것이었다. 확인서가 없으면 진료할 수 없다고 했다. 보모가, 소년이 수없이 애
원했지만 사정은 바뀌지 않았다.
보모는 도청으로 달려갔고, 소년은 응급실 한 구석에 있는 나무 의자에 서희를 누이고 지켜볼
도리밖에 없었다. 서희는 이미 가물가물 정신을 잃고 있었고, 그는 바보처럼 울고만 있었다.
두어 명의 의사가 응급실을 오가며 서희를 보고는 간호사들과 수군거리더니 그냥 지나쳤다. 그
때 한 의사가 다가왔다. 깡마른 체구에 안경을 썼다고 기억한다. 의사가 서희를 내려다보더니 간
호사들에게 물었다.
간호사가 고아원 아이라 확인서가 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라고 했다.
아이가 다 죽게 생겼는데 확인서는 무슨 확인서야. 의사는 그렇게 화를 냈다. 간호사는 서희가
고아원 아이임을 거듭 말했다.
의사는 다시 화를 냈고, 간호사도 책임질 거냐고 목청을 높였다.
소년은 의사에게 달려가 울부짖었다.
“서희를 살려주세요.”
의사는 서희를 번쩍 안아 침대 위에 눕혔다. 그리고 빠르게 침대를 밀고 응급실을 빠져나갔다.
2시간쯤 흘렀을 때 그 의사를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때까지 보모는 돌아오지 않았다.
의사는 맹장이 터져서 수술을 했다고 말했다. 그리고 어깨를 툭 치고는 말했다.
“이젠 괜찮아. 그리고 남자는 우는 게 아냐. 알았지?”
그러나 소년은 울음을 그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였다. 그는 싱긋 웃어 보이더니 도립병원의
긴 복도로 사라졌다.
고맙다는 인사도 못했다.
소년은 멀어져 가는 의사의 뒷모습을 보면서 내가 커서 무엇이 된다면 저런 의사가 되는 것도
좋은 일이라는 생각을 했다. 의사가 되어 서희를 지켜주리라. 막연하지만 깊이 박힌 생각이었다.
별똥별 하나가 동쪽에서 서쪽으로 꼬리를 길게 그으며 떨어졌고, 세준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불길하고 꺼림칙한 기분이 한순간 자신을 휩싼 까닭이었다.
그는 한 차례 눈을 힘주어 감았다 떴다.
하룻밤에도 수천수만 개의 유성이 떨어지고 그중 하나를 본 것이었다. 그뿐이었다.
눈을 감았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이젠 잠을 자둬. 네가 먼저 쓰러지겠어.
머리는 젖은 솜을 쑤셔 넣은 듯 무거웠지만 도대체 잠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위독하다는 것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 것일까?
혹시, 시한부 삶? 아니야. 그 지경은 아닐 거야.
그는 들고만 있던 캔맥주를 따서 단숨에 들이켰다. 저릿한 기운이 식도를 타고 내장 깊숙이까
지 내려갔다. 빈 캔이 그의 손아귀에서 은박지 밟는 소리를 내며 구겨졌다.
위독하다니? 서희에게, 또 우리에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이지. 이제 남은 것은 행복뿐이라
고 생각하는 순간마다 왜 이렇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왜?
언제부터? 그래, 그날이었어. 서희가 민혁을 처음 만난 그날.
그때부터 소중하게 꿈꿔온 길에서 비켜나야 되었어. 우리 모두 원치 않는 일이었지. 하지만 우
리는 꼭 눈먼 자와 같았어. 더듬더듬, 어둡고 아득한 길을 따라 걸어야 했지.
첫눈 그 무엇으로도 진실한 사랑을어지럽힐 수 없으라니, 진실한 사랑은 평온한 것. 그대는 헛되이 내 양 어깨와 가슴을 조심조심 모피로 감싼다.
그리고는 헛되이 첫사랑에 관해
조용히 말한다.
내가 왜 모르리.
이렇듯 완강하고 채워지지 않는 그대 눈빛을!
안나 (진실한 사랑)
1
눈이 내렸다. 어스름이 밀려드는 하늘로부터 눈송이가 흩어졌고, 오렌지
빛 나트륨 가로등이 막 불을 밝힐 즈음이었다.
세 준은 학교 앞 허름한 목조 건물 2층에 있었다.
밟을 때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소리, 낡은 풍금의 페달을 힘주어 누르는 것 같은 쓸쓸한
고도 적막한 소리를 들으며 술을 마셨다.
본과 3학년 2학기 마지막 임상 실습을 마친 것이 정오가 조금 넘었을 때니까 꽤 오랫동안 술을
마신 셈이었다. 그럴 생각은 없었다. 저희를 만날 그 시간까지, 오랫동안 그녀를 생각해 볼 작정이
었다. 뜨거운 카 푸치 노를 마시며 창 밖의 풍경을 무심히 바라보며.
그러나 함께 대학병원을 나선 민 혁이 차나 한잔 하자며 동행했고, 민 혁은 차 대신 술을 주문
했다. 한잔하고 그칠 줄 알았던 것이 몇 시간째 계속되었다. 어쩌면 그 자신도 오랜만에 술이 주
는 방만함과 안락함, 위안 따위 같은 것에 젖어들고 싶었는지도 몰랐다.
돌이켜보면 괴롭고 고단했던 시간이었다.
본과 3학년 가을 학기부터 시작된 임상 실습은 많은 생각을 바꿔놓았다. 의사가 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정해진 시간표에 따라 내과, 일반외과, 산부인과, 소아과 등의 의국을 돌며 참관할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 4개월 동안 그는 10여 명의 죽음과 맞닥뜨려야 했다.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참혹한
주검도, 안타까운 주검도, 김은 잠 속으로 빠져 드는 듯한 고요한 죽음도 있었다. 그러나 어떠한
주검에도 그는 담담할 수 없었다.
학생일 뿐이었다. 의사가 아니었다. 따라서 아무런 능력도, 권리도, 책임져야 할 이유도 없었
다. 의 학도에겐 죽음도 익히고 뛰어넘어야 할 과정일 따름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들을 목격하면서 두려웠다. 참담했다. 후회가 됐다.
의사라는 직업이 죽음 앞에서 얼마나 무력한가를 뼈저리게 실감했다. 의사가 되기 위해 어렵고
고단한 수업을 받아야 하는 것이, 과연 의미 있는 일인지 회의가 앞섰다.
실습 마지막 날인 오늘까지 그랬다.
뇌종양으로 투병 중인 초등학교 5학년 여자 아이였다.
뇌종양을 앓고 있는 아이는 한결같이 예쁘다고 하는데, 그 아이도 예외가 아니었다, 방사선 치
료로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린 아닌 핏기 한 점 없이 창백했다. 하지만 참으로 예쁜 얼굴이었다,
아이는 자신을 빙 둘러싼 실습생들을 반짝이는 눈동자로 바라보면서 고통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
했다.
중환자실을 나선 뒤 실습생들을 모아놓고 주치의는 말했다.
“말기는 아니지만 오래 견디지 못할 거다.”
주치의는 진료 카드를 담담히 읽어 내렸다, 하지만 머리카락 한 올 남지 않은 아이의 자그마한
머리통, 창백한 얼굴, 감은 눈동자가 오랫동안 그의 머릿속에 가득했다.
어둠이 짙어가고, 눈발이 굵어졌다.
학교 정문에서부터 시작되는 4차선 도로에는 불을 매단 차들이 꼬리를 이은 채 늘어서 있고,
술 취한 사람들이 어깨동무를 한 채 비틀거리며 차도를 가로질러 갔다.
한동안 창 밖으로 시선을 묶어두고 있던 세준은 흠칫 놀라며 시계를 보았다.
5시 30분.
아직은 시간이 충분하다. 그러나 서둘러야 한다.
그는 탁자에 고개를 묻고 잠들어 있는 민혁을 깨웠다.
"얼마나 잤어? “
“한 시간.”
“이런 데서 고개를 처박고 한 시간씩이나 자다니... 이 장민혁의 무신경도 알려줘야겠군.”
민혁은 가볍게 웃었고, 불현듯 생각이 난 듯 물어왔다.
“언제 떠날 거냐?”
“내일.”
“꼭 가야 하니?”
그는 웃는 것으로 대답했다.
“기분 나쁘게 생각하지 마. 내가 다른 일을 알아봐 줄까?”
방학이 시작돼 일자리를 찾아 떠날 때마다 민혁은 말하곤 했다. 더 편하고 더 많은 보수가 보
장 된 일을 알아보겠노라고.
그때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민혁에게 신세 지고 싶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 다짐한 일이었다.
자신의 힘으로만 이루어 나가리라고.
“하여간 이세준의 고집은 알아줘야 해.”
민혁이 일어서며 덧붙였다.
“어디 가서 저녁이나 먹자.”
그는 앉은 채 손을 내밀었다.
“먼저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