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못 볼 텐데 저녁은 먹고 헤어져야지.”
“약속이 있어.”
“약속?”
민혁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말을 이었다.
“별일이네. 이세준이 약속이 다 있고... 누구야?”
“... 아는 사람.”
"여자냐? “
그는 방긋 웃었고, 민혁이 놀란 눈을 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떤 여자야?”
“그냥 좀 아는 여자야... 방학 잘 보내.”
그는 다시 손을 내밀었다. 악수 따윈 아무래도 좋다는 듯 민혁은 건성으로 손을 잡았다.
“솔직히 말해봐. 어떤 여잔지.”
“동생이다.”
“아는 사람이 졸지에 동생으로 바뀌네. 네가 동생이 어딨어. 그것도 여동생이? 내가 이세준을
하루 이틀 알아 왔냐? 자그마치 오 년이다, 오 년.”
민혁은 갈 생각일랑 아예 걷어치워 버린 듯 의자 깊숙이 등을 기댔다.
5년. 긴 세월이었다.
의대에 입학한 후 그는 민혁과 가깝게 지냈다. 번잡스럽게 이 사람 저 사람 만나는 것을 좋아
하지 않는 성격 탓도 있지만, 달리 사람 사귀는 데 시간을 할애할 만큼 여유 있는 생활도 아니었
다. 5년 동안 줄곧 그랬다.
공부하고, 돈 벌고... 그리고 한 사람을 그리워하기에도 분주한 세월이었다. 물론 그 사람이 민
혁은 아니었다. 민혁은 2백 명의 동급생 중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는 가까
운 친구였다.
민혁이 팔짱을 끼고는 말했다.
“하여튼 좋다. 누군지 직접 만나봐야겠어. 불만 없지?”
그는 웃고 말았다. 안색을 바꿔 친구의 등을 강제로 떠밀 순 없는
일이었다.
그의 마음을 알았을까, 민혁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걱정 마, 얼굴만 보고 갈 테니까. 몇 시야, 약속 시간이?”
“여섯 시.”
민혁은 시계를 들여다보고는 고개를 흔들었고, 잠시 망설이는 기색이더니 일어섰다.
겨우 30분이 남았을 뿐이었다. 민혁에게 너무 긴 시간이었다면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가야겠다. 내일 일찍 떠날 거냐?”
그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손을 내밀진 않았다.
“잘 다녀와.”
대답 대신 그는 빙긋 웃었고, 민혁이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민혁이 막 돌아설 순간이었다. 돌아서 나가면 그만이었는데, 밟을 적마다 삐걱거리는 나무 계단
소리가 들려왔다.
삐걱삐걱.
긴 울림이 세준의 가슴을 불안하게 흔들고 지났다. 그는 고개를 빼고 출입구를 바라보았다.
댕강 댕강.
한 번 두 번. 문 위에 매달아 놓은 작은 종이 흔들렸다. 문을 미는 손이 먼저 보였고, 누구인지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서희였다.
바람에 가볍게 울리는 깊은 산사의 풍경 소리처럼 그녀가 들어섰다. 소슬바람이라도 그녀처럼
부드럽게 들어설 수는 없을 것이었다.
민혁아, 이제 그냥 가.
세준은 그렇게 마음속으로 되뇌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를 향해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를 지었고, 그는 까닭 모를 불안에 빠져들었다.
손을 들어 보이진 않았다. 어색한 일이었다. 적어도 그녀에겐. 아주 가까운 사람 사이에 나누는
악수의 어색함처럼.
그녀가 어깨에 멘 가방을 한 차례 추스르더니 다가왔다. 천천히, 사뿐사뿐.
"춥지?"
첫인사인 양 그가 물었고,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민혁이 돌아보았다.
"아!"
민혁의 탄성이었다.
그녀의 내부 어디선가 그녀 자신을 아름답게 만드는 샘이 깃들어 있었다. 너무 눈부시지 않게,
너무 수선스럽지 않게, 너무 가볍지 않게 샘물은 흘러넘쳐 그녀를 아름답게 감싸고 있었다.
그녀의 아름다움은 고요하고, 부드럽고, 그윽했으므로 민혁의 탄성은 당연하다고 그는 생각했
다.
"일찍 왔구나."
"언제 왔어요? 오늘도 오빠보다 늦었네요."
그녀를 만나는 것이 기쁨이라면 기다리는 것은 설렘이었다. 따라서 그녀보다 먼저 약속 장소에
나오는 것이 당연했다.
같은 대학에 다니고 있었고, 걸어서 10분이면 족히 닿을 수 있는 곳에 있는 그녀였다. 하지만
자주 만날 수 없었다. 그녀 탓이 아니었다.
그의 일상이라는 것이 분주하기 짝이 없었다. 정해진 일과표에 따라 쳇바퀴 돌듯 지나가버리는
하루하루였다. 그래도 일주일에 한 번
얼굴을 맞대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려고 애써 왔다. 그 하루를 위해 엿새를 살아가는 사람처
럼...
언젠가 그녀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서울에 오면 오빠를 자주 볼 줄 알았어요.”
그 자신인들 매일 보고 싶지 않겠는가. 어쩔 수 없었다. 엿새를 기를 쓰고 살아온 까닭에 그녀
곁에 있을 수 있었다. 그러므로 단 하루라도 그에겐 벅찬 감사였다.
“안녕하세요?”
민혁의 말에 그녀가 목례로 대신했다.
그는 여전히 까닭 모를 불안에 적은 채 막 그녀에게 민혁을 소개할 참이었다.
민혁이 히죽 웃으며 말했다.
“우리 전에 만난 적이 있죠? 기억해요?”
그녀가 당황한 기색으로 민혁이 아닌 그를 바라보았고,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듯 연신 눈을 깜
빡거렸다. 그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정작 영문을 알고 싶은 것은 그 자신이었으므로.
“서희, 한서희 씨 맞죠?”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민혁이 환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언젠가 꼭 다시 만날 줄 알았어요.”
“그런데 전 누군지 모르겠어요. 어쩌죠?”
그녀는 말을 하면서도 민혁보다 그를 더 자주 바라보 앗다. 그는 짐짓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바
라보았다.
폭설이었다.
거친 눈발 사이로 앞 불 밝힌 시계탑이 가물가물 멀어져 있었다.
"섭섭한데요, 날 기억 못 하다니. 하긴 이 장민혁의 기억력이 워낙 비상한 거죠. “
민혁은 의자를 빼 그녀에게 권하고 자신도 자리를 잡고 앉았다. 얼굴만 보고 가겠다더니, 민혁
은 아예 다리를 꼬고 앉았다.
“정말 모르겠어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이자 민혁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머리를 가볍게 쳤다. 기억하지 못함을 탓하여
는 것인지, 억울하다는 뜻인지 얼른 분간할 수 없는 몸짓이었다.
“지난봄 도서관에서, 서희 씨 수첩을 찾아준 적이 있었죠. 서희씬 고맙다는 말 한마디 없이
달아나버렸다고요.”
2
아, 이 남자였던가.
남자를 기억하진 못한다. 그러나 그때의 일을 잊은 것은 아니다.
남자 역시 자신의 말과를 달리 기억력이 비상하진 못한 모양이었다. 그때는 봄이 아니라 여름
의 시작이었다. 중앙도서관으로 오르는 계단 양옆으로 등나무가 짙은 그늘을 드리우기 시작한 6
월 중순 즈음이었다.
그런데도 어떻게 이름을 정확히 기억하고 있담.
물론 서희 쪽에서 이름을 밝힌 적은 없을뿐더러 단 한 마디의 말을 건네지도 않았다. 그렇다
면 수첩에서...
서희는 이마를 짚었다. 오래된 버릇이었다. 예기치 않은 일을 만날 때마다 그녀는 가벼운 현기증
으로 이마를 짚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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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로 아는 사이라면 달리 소개할 건 없겠네.”
세준의 말을, 민혁이 대뜸 받았다.
“찬만에. 서희씬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걸. 정식으로 인사하죠. 장민혁입니다. 세준이
하고는 같은 과에 다니고 있고 둘도 없는 친구죠.”
남자가 손을 내밀었고, 서희는 흘끗 남자를 바라보았다. 눈 주위가 붉게 상기돼 있었지만 전체
적으로 단정하고 말쑥한 모습이 그때와는 사뭇 달랐다.
그날 남자는 막돼먹은 불량배처럼 굴었다. 비스듬히 선 채 비웃음을 짓던 모습, 반말투의 빈정
거림, 막무가내로 손을 잡아끌던 거친 행동.
그런데 그의 친구라니, 그것도 둘도 없는...
같은 과에 다닐진 몰라도 둘도 없는 친구 사이는 아닐 것이다. 그 정도의 사이라면 자신이 모
를 리 없으리라.
한편으론 안심이 되었다. 어쨌든 그의 친구라면 나쁜 사람은 아닐 것이었고, 사람의 첫인상이란
그다지 신뢰할 것이 못된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남자가 머쓱한 낯으로 내민 손을 거두었다.
“하여튼 서희 씨를 다시 만나게 되다니, 영광입니다.”
의례적인 치사이거나 당치도 않은 과장인 줄 뻔히 알면서도 그녀는 마음이 가벼워졌다.
그날은 어땠는가.
남자가 자신의 손을 잡아끌 때 너무 놀랐고, 집으로 돌아와 생각하니 화가 났다. 남자를 탓하고
싶진 않았다. 어차피 스쳐 지나갈 사람이었으니까. 꾸짖고 나무라고 싶은 건 바로 자신이었다. 왠
지 형편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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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여자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을 한동안 떨치지 못했다.
매사가 도무지 뜻대로 되지 않는 날이 있기 마련이고, 그날이 그랬다.
밤새 어지러운 꿈으로 시달렸고, 늘 입던 옷이건만 자꾸 매무새가 흐트러졌고, 도서관 입구에선
한 남자와 부딪혀 넘어졌으며, 간혹 흘리던 코피가 그날따라 좀처럼 멎지 않았다.
학기말 시험이 막 시작될 때였다. 서희는 일찍 도서관으로 향했지만 그날도 자리를 잡는 데는
실패했다.
시험 준비를 하는데 굳이 도서관이어야 할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수많은 동료들 속에 묻혀 있
는 것이 좋았다. 그녀 자신도 그들과 다를 바 없다는 객쩍은 느낌에 젖어들면서.
오랫동안 남들과 다르다는 생각에 사로잡혀왔다. 좋은 의미로서의 남다름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고, 그건 그녀가 자라온 배경과 환경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맛보아야 하는 감상이었다.
사흘째 그녀는 같은 자리에 앉았다.
이미 누군가 차지한, 그러나 빈 채로 있는 자리였다. 첫째 날과 이튿날, 자리의 임자는 나타나
지 않았다. 첫날 모습 그대로 가방이 놓여 있었고, 주인 있음을 과시라도 하듯 펼쳐놓은 노트도
그대로였다.
첫날은 곧 주인이 들이닥쳐 호통을 칠 것 같아 초조했다. 둘째 날은 자리만 차지해 놓고 나타나
지 않는 사람의 몰염치에 혀를 찼다. 그리고 셋째 날 그녀는 생각했다.
아예 어디론가 사라져 버린 것은 아닐까. 혹시 사고라도 나서 영영 돌아올 수 없게 된 것은 아
닐까. 교통사고, 혹은.. 갑자기 불길한 생각에 펼쳐진 노트를 넘겨다보았다. 빈 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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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방의 모양새로는 남자가 분명하다. 가방을 열어볼까. 단서가 될만한 무엇이 있지 않을까. 무
슨 사고가 아니라면 사흘씩이나 돌아오지 않을 리가 없다.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타인에게 쏟는 관심이 얼마나 덧없는 것인지, 그녀는 살아오면서
뼈저리게 느꼈다.
어린 시절 그녀는 동화 속의 소녀처럼 모든 사람을 사랑하고,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하지만 먼저 손을 내미는 일이 엉뚱한 속셈처럼 비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철이 들면서 그녀는 무관심 쪽으로 마음의 갈피를 잡았다. 타인도 그녀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차라리 편한 일이었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려고 애쓰지 않았고, 마음을 열어보이지 않았어
며, 따라서 속상할 이유도 없었다.
예외는 있었다.
세준이었다.
그는 언제든 손을 내밀어도, 마음을 열어 보여도 좋을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녀가 타인에게 철
저희 무관심한 채로 지낼 수 있는 것은, 그가 있었기 때문인지 몰랐다. 그를 생각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을 이웃으로 얻은 듯 마음이 넉넉해졌으니까.
그에 대한 부질없는 생각들을 접고 고개를 속였다. 펼쳐놓은 서양사의 책장을 넘기려는 찰나,
주르르 코피가 떨어졌다.
자주는 아니지만 간간이 코피를 흘리곤 했다. 이유야 있을 테지만 코피 나는 정도로 병원을 찾
는다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때로 자신이 정말 큰 병에 걸린 것은 아닌가 하는 느낌에 젖어들
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우울한 기분 탓이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코피를 멎게 하기 위해 눈을 감은 채 한동안 고개를 젖히고 있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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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그러나 평상시와는 달리 쉽사리 멎지 않았고, 서너 차례 같은 행동을 반복했다.
남자를 만난 건 그때였다. 고개를 젖힌 채 눈을 뜨자 와락 남자의 얼굴이 달려드는 듯했다. 하
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아니 비명조차 지를 수 없을 만큼 그녀는 놀랐다.
“남의 자리 함부로 앉아 있어도 되는 거야?”
남자가 잔뜩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가 아무렇게나 책과 노트를 가방에 넣었다. 그때 다시 뚝뚝 코피가 떨어졌고, 공교롭게도
남자의 하얀 노트 위였다.
남자가 혀를 차는 소리가 목덜미로 넘어왔다.
“자리 얻어 쓴 대가가 겨우 이건가?”
그녀는 휴지를 꺼내야 한다는 생각조차 못했다. 손으로 닦아내자 노트 위로 선홍빛 선이 길게
이어졌고, 그 위로 다시 코피가 떨어졌다.
그녀는 한 손으로 코를 막은 채 후다닥 돌아서 나왔다. 정신을 차릴 수 없었으므로 미안하다는
말도 남기지 못했다. 다만 자신의 등뒤에서 거칠게 노트가 찢겨나가는 소리만이 비명처럼 들려
왔다.
화장실로 달려가 찬물로 이마와 목덜미로 닦아냈다.
10분쯤 지났을까. 코피와 흐트러졌던 정신을 수습하고 화장실을 나왔다. 그리고 몇 발짝도 미처
떼지 못했을 때였다.
“이봐!”
돌아보니 그 남자였다. 남자는 한껏 거드름을 부리는 걸음새로 다가왔다.
“이거 아가씨 거 아냐?”
남자가 수첩을 부채질하듯 흔들어댔다.
그녀는 수첩을 받아 확인하기 전에 가방을 뒤적였다. 소용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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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일이었다. 경황없이 나오면서 책상 위에 그냥 두고 온 것이었다.
“어디 한번 볼까.”
남자가 그녀 앞에서 수첩을 펼칠 기세였으므로 그녀는 재빨리 손을 뻗었다. 남자는 수첩 든 손
을 위로 치켜들었고, 그녀는 까치발을 하며 잡으려 했다.
한 번, 두 번.
그녀는 처음으로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았고, 이내 고개를 돌렸다. 수첩쯤 잊어버린 셈치자고 돌
아설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