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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사노바가 사랑한 여자 (52)

작성자오색 아줌마|작성시간26.06.18|조회수60 목록 댓글 0

카사노바가 사랑한 여자 (52)

 

카사노바가 사랑한 여자 (52)
“T기업 건설 회사의 사장 30대 중반의 J 씨가 

아나운서 K양에게 치욕적인 성추행을 해 물의를 일으키고 있습니다.

H호텔 승강기 안에서 우연히 K양을 만난 J씨는

평소 K아나운서의 팬이었다며 사인을 요구해 왔고,

이에 K양은 아무런 사심 없이 흔쾌히 허락을 했습니다.

하지만 J 씨는 주위에 아무도 보이지 않자

K양을 자신이 묶고 있는 객실로 강제로 끌고 들어갔습니다.

다행히 J 씨의 범행은 미수에 그쳤으나,

그는 오히려 K아나운서의 반항에 적개심을 품고

H호텔과 K아나운서를 상대로 고발한 상태라고 합니다.

H호텔의 직원들 말에 따르면 J 씨는 상당히 술에 취해 있었고,

본인의 실수에도 되레 자신들에게 불 같이 화를 냈다고 털어놓았습니다.”
넘어가지 않는 밥을 아이를 생각해 꾸역꾸역 씹어 삼키던 규휘는

뉴스에서 흘러나오는 기사에 들고 있던 숟가락을 놓치고 말았다.

그녀의 귓가로 흘러들어오는 J 씨, K양, H호텔의 이니셜이

누구를 뜻하는지 단번에 알아버리고 말았다.
“왜? 속 울렁거리니? 냄새 싫은 반찬이라도 있어?”
규휘의 밥그릇만 쳐다보고 있던 현진이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을 물어왔지만,

규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왜 저런 기사가 뉴스에서 보도가 되는지 알지 못했고,

어째서 그녀만 알게끔 딱딱 맞아떨어지는 이니셜이 나왔는지 의문스러웠다.

어제 직접 찾아가 보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몰랐을 텐데.

그러면 지금처럼 비참하고 슬프지는 않았을 텐데. 

어제 그를 찾았던 일이 극심한 후회로 몰려왔다.

생각에 빠진 규휘를 흔들며 현진이 왜 그러냐고 다시 물어왔다.

자신을 걱정스레 쳐다보는 현진을 향해 이번엔 규휘가 물었다.
“저거, 우리 오빠 얘기지?”
“어? 뭐가?”
멍하게 TV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규휘를 쫓아 현진도 그곳을 들여다보았다.

분명히 모자이크 처리가 되어 K아나운서의 얼굴을 가렸지만

그 모습이 누군지 알 수 있었다. 

현진의 입이 놀라움으로 벌어졌다.
“현진아, 나 몸이 너무 떨려. 어떡하니? 가슴이 진정이 안 되는데, 어떡하니?”
“진정해! 오빠가 아닐 수도 있잖아.”
놀라서 떨고 있는 규휘에게 다가온 현진은

눈물을 흘리는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얼마나 많이 놀랐는지 금세 규휘의 몸은 차갑게 식어버리고,

식은땀도 흘러내렸다.

바들바들 추위에 떠는 것처럼 극심한 떨림과 파랗게 질려버린 입술은

현진의 마음을 쿵쾅 내려앉게 만들기 충분했다.
현진의 품 안에서 떨고 있던 규휘가

갑자기 화장실로 뛰어가 속에 있는 모든 걸,

좀 전에 간신히 먹은 걸 다 게워내고 말았다.

현진이 등을 토닥이며 두들겨 주었지만,

한번 틀어진 그녀의 장기는 가라앉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예민하게 신경 쓰지 마. 너 홀몸이 아니잖아.”
“흑흑. 모든 게 다 끝났어. 이제 어쩌면 좋아?”
규휘는 그대로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아 울분을 토해냈다.

임신한 기쁜 소식을 알리기도 전에

그와의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 앞에 분하고 서러운 마음만 가득했다.
너무도 서럽게 우는 규휘로 인해

현진의 눈에서도 저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 바보.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지금이라도 오빠 만나러 가자.

가서 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네 두 귀로 직접 해명을 듣고 그러고 오자.

TV에 나오는 것이 모두 사실일리는 없잖아.”
“필요 없어. 다 끝났어. 흐흑.”
대환에게 가 보자는 현진의 말에 규휘는 때를 쓰며 투정을 부렸다.

가는 건 문제가 안 되었지만, 그것이 사실로 들어 날까 봐 몹시도 두려웠다.

만에 하나 그것이 모두 사실이라면 그 후엔 어찌 살아야 할지 앞이 캄캄하기만 하였다.

차라리 사실여부를 확인하지 않고 그냥 이대로 묻혀 지내고 싶은 마음이 더욱 간절했다. 
“겁먹지 마. 다 잘 될 거야!”
여전히 옆에서 자신을 토닥여주는 현진의 어깨에 기대어 눈물만 쏟아내었다.

이제는 누구를 믿고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지도 몰랐다.
“이거 입고 따라 나와.”
임신한 그녀가 환절기의 스산한 기류 탓에 혹여 감기라도 걸릴까 봐

현진은 점퍼 하나를 규휘에게 내밀었다.

그리고 일어설 생각을 하지 않는 그녀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이렇게 바보 같이 구는 건 딱 질색이야. 가서 모든 걸 다 확인하고 오자.”
규휘는 마지못해 끌려가는 척하며 현진이 잡아 놓은 택시에 올라탔다.

현진이 자신도 함께 따라가겠다고 했지만,

규휘는 현진을 떼어놓고 혼자 다녀오겠다며 택시를 출발시켰다.
‘그래, 현진이 말대로 일단 부딪쳐 보는 거야.

정말 사실이 아닐 수도 있는 거니까.

이규휘. 두려워하지 마. 나에게선 오빠의 아이가 자라나고 있어. 그러니까 힘내!’
스스로 위로를 하는 사이 어느새 택시는

현진을 버려두고 쌩쌩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뉴스를 시청하던 세진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재잘재잘 혼자서 잘도 떠들어 댔다.

그가 묻는 말에도 아무런 대답이 없는 대환이지만,

세진은 혼자 묻고, 혼자 그의 몫까지 대답하며

답답함을 풀어나가더니 속이 타는지 술을 한잔 들이켰다.
“어제 규휘 만났어. 밤 11시 넘어서 그 호텔 가보라고 했는데, 

그럼 규휘가 오기도 전에 사건이 터졌다는 거야?”
세진의 말은 듣지 않고 대환은 TV를 꺼 버렸다.

규휘가 그 호텔에 왔었다는 사실 하나에

그의 머릿속은 이은이 남긴 말로 온통 도배가 되어 맴돌았다.
“당신 와이프 강태준이랑 이곳 객실로 올라가는 거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요.

그 두 사람 당신 눈 피해 매일 은밀한 밀회를 즐기고 있단 말이에요!”
왜 유독 미친 여자의 말 중에 그 말은 신뢰가 가는지

대환은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자신의 마음에 쓰디쓴 침을 뱉어냈다.

믿어야 된다고,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장담하면서도

이은의 말에 쏠리는 마음은 어쩔 수 없었다.
“이제 어떡할 거니? 설마 저게 사실일리는 없겠지?”
세진의 질문에 대환은 피식 실소를 터트리고 술잔을 들어 올렸다.

저 뉴스를 규휘가 보았다면 그녀는 무턱대고 진실이라고 믿겠지.

원망에 찬 얼굴로 그를 비난하며 울부짖겠지. 

지금 세진이가 내 던진 말처럼 농담 섞을 여유가 그녀에게는 없겠지.
“지금 웃음이 나와? 술이 넘어가? 이 사태를 어떻게 마무리 질 거야?”
“후후. 재미있네. 어디까지 가나 둬보자고. 한번.”
“제정신이야? 너까지 저 여자랑 같이 미쳐가는 거냐?”
너무도 천하 태평한 대환의 태도에

세진은 답답함을 참지 못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화를 내고 다 뒤집어엎어도 시원찮을 판에

물질적, 공간적, 시간적으로 느긋하고 차분하게

또 너그럽게 일처리를 하는 대환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기 꾀에 자기가 빠질 날이 올 거야.”
“그때까지 저 여자의 짓거리를 방관해 두겠다는 거야?

난 그렇게 못해! 저 미친년 나라도 정신병원 보내버리든가 해야지.

아니, 대체 넌 어쩌자고 저런 여자를 만나서 이렇게 속을 썩이고 그러냐?

그러게 내가 여자 몸에 직접대지 말라고 경고하지 않았어?

내 말 무시하더니 천벌 받는 거야.”
마누라 마냥 쉬지 않고 재잘대는 그가 규휘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저 듣기 싫은 잔소리도 감미롭고 행복한 밀어로 들리리라.

그를 구박하면서도 걱정하는 저 말투에서 묻어나는 커다란 사랑에

더욱 규휘를 사랑할 수밖에 없으리라. 

하지만 그를 야단치는 사람은 그의 친구 세진이었다.

대환은 이은을 갖고 놀았다고 생각하는

세진의 사고를 바로 잡아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손이라도 한번 잡았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억울하긴 해?”
“나도 사람인데, 그런 감정이 없겠어? 생각하니 화나네.”
“왜? 자선사업가처럼 좀 더 방치해 두지 그러냐?

내 살다 살다 저렇게 미저리 같은 여자는 처음 본다. 

간혹 스토커에 몇 년을 시달려온 사람들이

참지 못하고 경찰에 신고하는 경우는 더러 보았는데,

내 친구가 그런 일을 당할 줄 누가 알았겠어? 

아니, 바보 천치들이지 처음부터 신고를 했어야지

왜 몇 년씩 혹은 몇 달씩 질질 끌고 가냐고.

웃지 마. 인마. 너라고 예외는 아니니까!”
얼마나 더 사설을 늘어놓아야 직성이 풀리려는지

그보다 더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세진은 구구절절 잘도 떠들어댔다.

그 모습에 대환은 저도 모르게 피식 또 웃어버리고 말았다.
“아침에 눈 떴는데 같이 옆에서 일어나며 잘 잤어요? 하고 묻지 않은 것에 감사,

납치나 감금이 아닌 것에 감사.

목숨 부지하고 있는 것에 또 감사해라.

그 여자의 집착과 광기가 대체 어디서부터 발단이 된 거냐?”
발단을 물어오는 세진의 말에 대환의 머릿속을 스치는 한 가지 사실이 떠올랐다. 

처음 이은을 만났던 그의 단골집 재즈 바에서

자신에게 은밀한 유혹을 보내오며 악수를 청하는 이은에게

그는 손을 맞잡는 대신 그녀의 손등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

또 이은은 작별인사로 그의 볼에 가벼운 키스를 했었다.
“지금 생각났는데, 내가 손등에 키스를. 또 그 여자가 내 볼에 키스.”
“그거 봐. 내 이럴 줄 알았어.

손도 안 잡아 봤다 길래 설마 했는데, 그 설마가 사람 잡는구나.

너 때문에 혈압 오른다.”
대환의 말을 자른 세진은 그의 가슴팍을 쳐대며 불 같이 화를 냈다.

그런데 그때 현관문이 조용히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영감이 벌써 들어왔나 싶어 그는 세진의 행동을 저지하고

현관 쪽으로 세진과 함께 시선을 돌렸다.

신발을 벗고 들어서는 사람은 영감이 아니라 그가 보고 싶어 하는 그의 아내 규휘였다.

저 모습이 다시 미친 여자로 둔갑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하며 대환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뜨며

그의 앞으로 걸어오는 규휘를 뚜렷이 쳐다보았다.

이번만큼은 정말 그의 아내 규휘가 맞았다.

너무도 반갑고, 기쁜 마음에 그녀를 꼭 끌어안아 버리고 싶었다. 

왜 이제 왔냐고 그녀의 가슴 안에서 투정을 부리고 싶었다.

하지만 규휘가 대뜸 내뱉은 말에

대환은 좀 전의 모든 생각들을 다 접어버려야만 했다.
“왜 그랬어?”
뉴스를 본 모양이었다.

세진이 내던진 마지막 말을 들은 모양이었다.

또 이미 그것이 사실이라고 단정 지은 모양이었다.

세진과 다르게 무작정 그렇게 자신을 몰아붙이는 그 한마디에 대환은 화가 났다.
“봤어?”
“왜 그랬어?”
“저, 저기 규휘야. 우선은 앉아서 얘기해. 오빠가 다 설명할게.”
“미안하지만, 세진오빠는 빠져줘요. 우리 두 사람 문제니 까요.”
대환이 사실대로 털어놓을 성격이 아니라는 걸 안 세진이

그들 사이에 끼어들어 규휘에게 설명하려고 했다. 

하지만 규휘는 세진의 말을 칼 같이 자르고 자리를 피해달라고 했다.

그녀의 말대로 두 사람의 문제이기에,

세진은 대환에게 무언의 눈짓을 하였다. 

덜도 말고, 더도 말고, 사실만 말하라고.
“그래, 그럼 난 이만 가볼게.”
집을 나서는 세진에게 누가 먼저 잘 가라는 배웅의 인사도 건네지 않았다.

그저 덜컥 닫히는 소리만이 세진이 나갔다고 알려주었다.
“한잔 할래?”
잔에 술을 채우는 대환이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을 채 물었다.

당장 뱃속에 아이가 있다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규휘는 애써 참으며 대환을 노려보았다.
자신을 보자마자 그가 먼저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오보라고 해명해 주길 바랐다.

하지만 대환은 마치 그것이 사실인 것 마냥 부인을 하지 않았다.

그가 들이키는 알싸한 술 냄새가 그녀의 후각을 타고 들어오자

규휘는 슬슬 부아가 치밀기 시작했다.

또 한잔 따른 술을 입으로 가져가는 걸 규휘가 빼앗아 바닥으로 집어던졌다.
쿵 소리와 함께 잔 안의 액체가 거실의 카펫 바닥에 입수하였다.

적은 양이지만 빠르게 스며들었다.

돌림병 마냥 카펫 주위로 점차 번져나가는 모습이

꼭 오늘 터져버린 사건 같았다.
“술이 넘어가요?

온 세상에 망신살이 뻗쳐 놓고 그게 잘도 넘어가요?

이은이랑 대체 언제부터 그랬어요?”
“네 마음속에 다른 녀석이 있다고 해서,

나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의심하는 거야. 지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자신을 구석으로 몰아붙이는 규휘의 말에

대환은 유치하게 태준을 빗대어 말을 툭 뱉어내고 말았다.

상당히 흔들리는 규휘의 눈빛을 바로보지 못하고 대환은 피해버렸다.

차라리 영원한 카사노바로 낙인찍혀 살아가는 것이 더 낳을까? 하는

어쭙잖은 상념도 잠깐사이에 흘러들었다.
“네 마음대로 생각해.

분명 예전과 같은 나는 아니라고 했는데도,

여전히 넌 나를 지저분한 카사노바로 기억하고 있구나.”
“말 돌리지 말고 바로 해요. 내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바로 하란 말이야!”
전혀 그의 의중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로 인해

규휘는 머리가 혼란스러울 뿐 아니라

마음까지도 갈팡질팡하여 갈피를 잡지 못했다.
“그게 네가 원한 모습이니? 그렇다면 계속 지저분한 놈으로 남아줄게.”
“말 돌리지 마요. 사실인지 아닌지 진실만 말해.”
“사실이니까 보도 됐겠지.”
구차한 변명 따위는 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신이 아닌데도 그가 직접 말하지 않아도 규휘가 알아주길 바랐다.

아니 아무 말 없이 힘들어하는 자신의 어깨를 토닥여주고 감싸 안아 주길 바랐다.

묵묵히 자신의 행동을 따르며 그의 옆에서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었으면 바랐다.

하지만 지금껏 자신이 규휘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다는 사실을 자학하며

대환은 전혀 다른 말로 규휘의 가슴을 아프게 만들었다.

마음과 다르게 잘도 튀어나오는 모진 말들은 그의 가슴에도 멍울을 지웠다.
“정말 이야?”
“대체 무슨 소릴 더 듣고 싶은 거야?”
시인하는 대환의 말에

‘거짓말!’이라고 크게 소리치고 싶었다.

하지만 말을 뱉어버리면 눈물도 같이 흘러내릴 것 같아

침과 함께 꾹 식도 안으로 삼켜버렸다.

설령 보도의 내용이 사실이라도 길길이 날뛰며 아니라고 변명해 주길 바랐지만,

그런 바람마저 대환은 묵살시켜 버렸다.
“그래, 사실을 알았으면 됐어요. 그만 가볼게.”
단념하며 뒤돌아서는 규휘의 팔을 대환이 잡아챘다.

그녀의 심장이 두근두근 사정없이 뛰어왔다.

대체 그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을 잡은 것인지 모르나, 

이제라도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규휘는 대환을 바라보았다.
“또 어딜 가겠다는 거야?”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간신히 쥐어짜며 용기 내어 대환이 내뱉었다.

그냥 보내버리면 이번엔 정말 규휘를 두 번 다시 보지 못할 것 같았다.

어떠한 억지를 써서라도 잡아둬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내가 여기 있어야 할 이유가 없잖아요.”
“왜? 망나니 같은 남편 둬서 부끄러워?

네 얼굴마저 못 들고 다닐까 봐 피하겠다는 거야?”
“그래요. 부끄러워서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에요!

내가 왜 이런 남자랑 결혼해서 험한 꼴을 당하는지 후회하는 중이야.

할 수만 있다면 이 결혼 물리고 싶어요!”
물리고 싶다는 규휘의 말에 대환은 커다란 충격을 받았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감정을 숨기었다.

누구 좋으라고 이 결혼을 물린단 말인가!

이렇게 허무하게 규휘와의 결혼생활을 끝내 버릴 수는 없었다.
“누구 마음대로 물린다는 거야?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해?”
“네. 충분히 가능해요. 어차피 우린 법적으로 남이니까요.”
아직도 혼인신고를 하지 못한 자신을 탓하며

대환은 머리를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그 종이 쪼가리에

규휘의 도장을 강제로라도 찍게 만들어 버리고 싶었다.
“이혼을 하더라도 혼인신고를 하고 난 후에 해. 그래야 합법적이지.

그때까지는 이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마.”
“나한테 이래라, 저래라 명령하지 말라고 했잖아…”
억지를 부리는 대환의 말에 반박하던 규휘는

갑자기 거칠게 자신의 입술을 밀어붙여 오는 그로 인해

뒷말을 고스란히 삼켜야 했다.
너무나도 그리웠던 그의 따뜻한 입술에

규휘의 입술은 제 주인을 만난 걸 아는지 자연스럽게 입을 벌렸다.

숨이 막히도록 강한 그의 키스는 모든 걸 말끔히 씻어내주었다.

좀 전까지 화가 났던 마음은 그의 입술 하나로 녹아내렸다.

지금 이 순간 규휘의 머릿속은 오로지 

그에게 자신을 내던지고 이대로 안착하고픈 심정이었다.
그의 입술에 취하고 나니 이제는 그의 품 안에 안기고 싶어졌다.

넓고 강인한 그의 가슴에 온몸을 던져 예전처럼 그와 하나의 몸이 되고 싶었다.

대환의 혀가 그녀의 입안을 점령하고 멋대로 돌아치며 규휘의 혼을 쏙 빼놓았다. 

오랜만에 느끼는 달짝지근한 그 느낌에 규휘의 목이 뒤로 젖혀졌다.
대환의 손이 이때다 싶었는지 불쑥 그녀의 가슴 안으로 들어와

복숭아처럼 아담한 가슴을 잡아챘다.

그리고 규휘를 소파로 밀어붙이며 그 위에 눕혀버렸다.

그녀가 일어나 도망갈 새라 대환은 재빠르게 규휘의 위로 올라가 

다시 뜨거운 키스를 강하게 퍼부으며

그녀가 입고 있는 겉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거의 상체가 다 드러났을 때쯤 퍼뜩 정신이 돌아온 규휘는 그제야 대환을 밀쳐냈다.

불현듯 이은이와도 그가 이런 모습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강한 질투와 시기가 그녀의 안에서 꿈틀거렸기 때문이다.
“하, 하지 마! 오빠가 뭐라고 이래요? 불쾌해!”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자신을 쏘아보는 규휘의 눈빛에 대환은 기가 눌렸다.

지금의 이 기세라면 반항을 하든 말든 규휘를 안아버려야 정상이었지만,

강한 거부의사를 드러내는 모습에 마치 자신이 죄인이 된 것 같았다.
“내 여자고, 내 부인인데 내 마음대로 못해?”
행동은 멈춰졌지만, 그의 혀는 징글맞게 잘도 나불거렸다.

계속해서 마음과 다르게 어긋난 오는 말로 인해

대환은 더 이상 말을 말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이제 그 사실은 오빠의 착각이지요!”
침묵하기로 한 결심을 지키기 위해 말을 아끼는 그의 속에서

천불이 일었지만 대환은 꾹 참아냈다.

차마 입에 담지 못할 말을 지껄이는 규휘의 혀가 못내 미웠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괜히 만나서 서로 얼굴 붉히는 일 없도록 해요.”
헤어지자는 직접적인 말은 아니었지만,

규휘가 그에게 이별을 고하고 돌아섰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온몸에 기운이 빠져 버리고 앞이 캄캄해져 왔다.

규휘의 마음이 다른 곳에 가 있다 하더라도,

결코 규휘와의 이별은 용납할 수 없었다.
소파에 앉아있는 그의 몸이 모래성 마냥 금방이라도 밑으로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흔적도 없이 공중으로 분해 돼 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가슴에 대 못을 박은 규휘가 표정도, 생기도 없이

그의 앞에 작고 외소 한 그녀의 등을 보였다.

규휘가 가고 있다.

한발 한발 내딛으면서 그녀가 조금씩 그에게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극도에 달한 그의 몸은 불안전한 떨림으로 인해 머릿속을 백치로 만들어 버렸다.

가지 말라고,

자신을 버려두고 그렇게 뒤돌아서지 말라고 사정해야 하는데,

그의 성대는 결정이라도 생겼는지,

한 마디도 내뱉지 못하였다.

핏줄이 터질 것 마냥 목구멍이 따끔거리며 너무도 아파왔다.

어느새 규휘의 냄새와 규휘의 온기가 그에게서 멀어져 갔다.

차갑게 식어버린 그녀의 뒷모습이

집 안을 싸늘하게 잠식시키더니 그녀의 손이 현관문을 열었다.
“멈춰! 한 발짝만 더 움직여 봐.

모든 다 폭파시켜 버릴 거야. 그러니까 그대로 멈춰!”
심장이 자리 잡은 가슴팍을 세게 그러쥐고,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억지로 짜내어 절규하듯 대환은 외쳤다.

몸을 베어내고 심장을 후비어 파는

날카롭고 서슬 퍼런 발악의 외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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