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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천 이상설애국투사 !!!

작성자star1538|작성시간17.05.29|조회수99 목록 댓글 0


항일운동가 보재(溥齋) 이상설(李相卨·1870~1917) 선생 순국 100주년 행사가 그의 고향 진천에서 다채롭게 펼쳐졌습니다.


보재 선생이 그토록 자주독립을 열망하던 이 나라 이 땅은  광복을 이루었으나 남과 북의 오랜 대립과 갈등으로 제2의 6.25를 걱정하는 처지가 되었네요..




충북 진천군에서 출생한 보재는 본관이 경주이고 본명은 순오(舜五)이다.

동부승지였던 이용우의 양자로 입적하여 서울로 이주해 양명학을 공부하다가 신학문을 접했고 영어·러시아어·법률·수학 등을 독학으로 공부해 상당한 경지에 이른 수재였다. 1894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여 관직에 올라 1904년 보안회(保安會) 후신인 대한협동회(大韓協同會) 회장이 되었고,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조병세(趙秉世) 등과 조약의 무효를 상소한 후 돌에 머리를 부딪쳐 자결을 기도했답니다...

이를 목도한 김구가 `백범일지'에 당시 상황을 기록했으니 그의 우국충정이 어떠했는지 짐작이 가고 남음이 있습니다.





국권이 일본에 넘어가게 되자 1906년 이동녕(李東寧) 등과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노우키에프스크로 이주하여 원동임야회사(遠東林野會社)를 세웠고, 간도(間島) 룽징춘[龍井村]으로 가서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설립해 조선에서 이주해온 사람들에게 항일민족정신과 서구문명을 교육했습니다..





1907년 고종의 밀지(密旨)를 받은 이상설은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李儁)·이위종(李瑋鍾)과 함께 참석해 일본의 침략행위를 규탄하고 국권 회복을 국제 여론에 호소하려 했으나 일본의 계략으로 참석을 거부당하였다.

이에 이준 열사는 자결을 단행하여 부당성을 세계에 알렸고, 뜻을 이루지 못한 이상설은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 유인석(柳麟錫) 등과 국권침탈의 부당성을 통박하는 성명서를 작성하여 각국에 발송하는 등 세계를 상대로 항일운동을 벌이다가 47세의 일기로 머나먼 타국에서 순국했습니다..





위대한 항일운동가이자 민족교육자였던 그에게 조국 대한민국은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해 기리고 있고 그가 순국한 지 100주년이 되도록 변변한 기념관 하나 없이 지내오다가 진천군이 100주년 기념행사를 열고 기념관도 건립하니 기쁜마음입니다...


송기섭 진천군수는 `이상설애국투사 추모 행사는 이상설 선생이 독립운동사에 남긴 위대한 발자취를 찾는 여정의 첫걸음이자 신호탄'이라며 `역사적 재평가가 오롯이 이뤄질 수 있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답니다...


이들 학교의 명칭인 ‘서전’은 ‘상서로운 배움터’라는 뜻으로 진천 출신의 독립운동가인 보재 이상설(1870~1917) 선생이 만주에 세웠던 신학문 교육기관인 ‘서전서숙’에서 따왔습니다..

서전고는 1학년 8학급과 특수학급 1학급에 162명으로, 서전중은 1학년 4학급, 2학년 2학급, 3학년 1학급 등 모두 7학급에 152명으로 지난 3월 2일 진천군 덕산면 혁신도시에서 문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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