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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과 소통한 침묵의 관상가 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48) 토마스 머튼의 초연함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1.19|조회수55 목록 댓글 0

[세상과 소통한 침묵의 관상가 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48) 토마스 머튼의 초연함

영적 집착은 무절제한 욕망과 다를 것 없다

우리 삶에서 마주하는 시련이나 사람과의 관계에서 오는 어려움의 원인 중에 하나는 집착이다. 집착은 물건, 재물, 건강, 능력, 자리, 사람 등에 대한 외적인 것에서부터, 과거 기억, 칭찬, 실수, 미운 사람 등에 대한 심리적인 것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무엇보다 자아에 대한 집착은 오직 그것만을 바라보게 해 그것에 묶이게 만들어 우리를 외적, 내적, 영적으로 고착되게 한다.

 

 

 

이러한 집착의 반대 개념은 초연함이다. 머튼은 초연함은 도달하기 힘들지만, 우리에게 꼭 필요한 영성이라고 강조했다. 근본적으로 초연함은 분리를 뜻한다. 영적 여정에서 초연함은 창조물로부터 자기 자신을 분리하는 것인데, 이는 자신이 창조된 목적과 자신의 최종 행복을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찾기 위해서다.

 

초연함, 세상을 물러나 하느님께로 가는 것

우리는 물질적 소유, 명예, 유명세, 권력, 건강 등을 찾으며 살고 있지만, 이 모든 것들을 통해 인간의 완전한 성취를 이룰 수 없다. 창조된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진정한 행복은 오직 하느님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 이를 위해 본래의 창조된 영역 밖으로 가야만 한다. 그래서 초연함은 사람들과 세상을 물러나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다. 초연함은 창조물에 대한 애착, 심지어 하느님의 선물에서도 자신을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자아에 대한 애착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이다. 이런 자유로움 속에 있는 이들은 모든 망상을 내려놓고 진정한 실재를 볼 수 있는 초연함에 도달한다.

 

 

 

그런데 초연함에 도달한다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머튼도 사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 명이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이 한두 사람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모든 것을 하나로 묶고 우주의 붕괴를 막는 사람입니다”(새 명상의 씨)라고 했다. 이기심과 애착은 마지막까지 우리 힘으로 넘을 수 없는 산이다.

 

 

 

머튼은 초연함에 도달하기 힘든 이유 중 하나로 융통성 없는 경직성을 들고 있다. “가장 엄격한 수도원에서도, 완덕을 닦으려고 있는 힘을 다하는 곳에서도 많은 사람은 그들이 자기도 모르는 이기심에 얼마나 지배를 받고 있는지, 그들의 덕행이라고 하는 것이 편협하고 인간적인 이기심에 얼마나 영향을 받고 있는지 생각조차 못 합니다. 사람이 진정으로 초연해지지 못하는 것은 사실 흔히 열심하다는 사람들의 이런 융통성 없는 경직성 때문입니다.”(새 명상의 씨) 융통성 없는 경직성을 벗어나 진정한 영적 자유로움에 도달하려면 자신의 힘으로 이것을 이루려는 망상을 포기해야 한다.

 

 

 

앞서 서두에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초연함에는 외적, 내적, 영적인 레벨이 있다. 물론 인간의 삶을 획일적으로 구별할 수 없고 외적인 것에 집착하는 것이 하급 단계의 수준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궁극적으로 결국 자아에 대한 집착이 어떤 이에게는 외적인 물건이나 재물에 대한 집착으로, 어떤 이에게는 인정받고 싶거나 심리적 만족에 대한 집착으로, 또 다른 이에게는 영적인 은사를 많이 받고 싶은 집착으로 고상하게 나타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내적인 자아를 온전히 그리스도께 맡겨야

 

 

 

머튼은 초연함에 도달하기 위한 시작으로 외적이고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을 권고한다. 이를 넘어 영적인 좋은 것들로부터도 초연할 것을 당부한다. “이 정도면 괜찮다고 생각하는 범위 안에서 물질적, 정신적 사물들을 소유하고 즐기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을 순수하게 소유하고 즐기려면 모든 기쁨을 초월하고 모든 소유를 넘어야 합니다.” (새 명상의 씨) 내적인 자아를 온전히 그리스도께 맡길 때 주님의 은총은 우리를 망상적 자아에서 벗어나 영적인 자유로움으로 인도할 것이다.

 

 

 

이 글을 읽는 독자들은 영적인 쾌락에서 오는 집착에 대해 생소할 것이다. 머튼은 기도하는 사람이었고, 이 기도에서 오는 기쁨이나 평화, 하느님 현존에 대한 체험을 맛보았다. 그는 영적인 기쁨에 대해서도 초연할 것을 당부한다. 머튼은 관상이나 기도에 관심을 갖는 이들이 내적인 평화와 하느님 현존을 느끼는 데만 집착하게 되는 경우를 경계한다. “명상이라는 것도 결국 자동차와 마찬가지로 피조물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적 평화에 대한 느낌 역시 피조물이라는 점에서 포도주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느님 현존에 대한 체험적 의식은 맥주와 조금도 다름이 없는 또 하나의 피조물일 따름입니다.” 이어 영적인 쾌락 역시 집착이라고 강조한다. “명상과 내적 평화, 하느님 현존에 대한 느낌은 영성의 쾌락이고 다른 것들은 물질의 쾌락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적인 것에 대한 집착은 다른 어떤 것들에 대한 무절제한 욕망과 다를 것이 없다. 그들은 하느님의 무한한 기쁨에 절대 깊이 빠져들지 못합니다. 관상의 초보자들에게나 주어지는 보잘것없는 위로에 매달리기 때문입니다.” (새 명상의 씨)

 

 

 

초연함에 도달하려면 결과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우리는 통제할 수 없는 결과들에서 적당히 물러서야 하고, 선의와 내적 생활의 고요한 표현 활동에 만족해야 한다. 자기 삶을 바라봄 없이 만족하며 살아야 한다. 즉각적인 보답을 기대함 없이 일하는 것에서 만족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사랑하고 특별한 인정을 받음 없이 존재하는 데 만족해야 한다.”(인간은 섬이 아니다)

 

 

 

그렇다고 초연함은 세상의 불의에 대해 방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진리를 위해 몸과 마음을 집중하는 것이다. 진리, 곧 하느님에 집중할수록 결과에 대한 관심은 줄어든다. 초연함은 결국 하느님의 더 큰 선과 자비를 믿고, 그분 마음과 하나 되어 살아가는 것이다.

 

 

 

 

[세상과 소통한 침묵의 관상가 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49) 토마스 머튼의 종교간 대화 영적 체험을 통한 의식의 변화

하느님의 영은 모든 종교적 시스템을 초월한다

필자가 토마스 머튼에 대해 공부하면서 가장 놀랍고 흥미로웠던 것은, 그가 처음부터 관상에 대한 새로운 영성, 혹은 종교 간의 대화에 관심을 가진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머튼의 영성 변화와 성장은 그가 초기에 기록한 글과 후기에 기록한 글들을 비교해 보면 확연한 차이를 알 수 있다. 이것은 그가 자신의 삶의 전체적인 여정을 통해 하느님과 인간, 세상과 다른 종교들에 대해 새로운 견해를 얻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예를 들어, 그의 초기 작품에서 머튼은 가톨릭의 전통적인 관상에 대한 가르침에 충실한 수도승으로서 다소 우월적인 입장에서 관상에 대해 미숙하게 묘사하는 경향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후기 작품에는 그의 초기 생각을 수정해 개인의 정체성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 선물의 다양성 안에서 관상적 체험이 각 개인에게 다르게 수용될 수 있고, 다른 종교적 전통에서도 나타날 수 있다고 진술하고 있다. 관상에 대한 관점이 달라진 것이다.

 

 

 

 

 

영적 체험의 보편성과 다양성

 

 

 

앞서 살펴보았듯이, 머튼은 일생 신비적이고 내적인 체험들을 다양하게 했다. 이 체험들은 그의 가톨릭으로의 개종, 심리적이고 영적인 좌절들의 극복, 관상과 활동의 통합, 다른 이들에 대한 개방, 그리고 불교-그리스도교 대화를 위한 새로운 길을 발견하는 데 도움을 줬다. 보편적인 길로서 신비적이고 내적인 체험의 가치를 발견함으로써, 머튼의 불교와의 대화 방법은 그리스도인의 신학적 전망으로부터 경험적이고 실존적인 전망, 영적이고 관상적인 전망으로 변화됐다.

 

 

 

내적-신비적 체험을 통해 변화된 머튼의 영적 성장 과정을 종교 간 대화 측면에서 바라볼 때, 우리는 두 가지 중요한 요소를 발견할 수 있다. 첫 번째는 바로 영적인 성숙이다. 각자 자신의 종교 안에서 영적인 성숙에 도달하지 않은 상태로 나누는 종교 간 대화는 위험하다. 머튼은 우리의 영적인 여정은 지속적인 하느님과의 관상적 일치의 여정이며, 여기에 참된 뿌리를 내리지 않을 때 우리가 하는 모든 것은 모래 위에 세워진 집”(마태 2,26 참조)으로 보았다. 그래서 아시아에서의 마지막 연설에서 진정한 종교 간 대화를 위해, 머튼은 관상적 대화는 반드시 오랜 침묵과 오랜 명상의 수행을 통해 진지하게 영적인 훈련을 해 온 이들에게 유보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는 진지한 영적인 훈련과 자기 자신의 전통 안에서 준비 없이는 종교 간 대화는 주관적이거나 고루한 미성숙의 표면적 수준에 머물 수 있다고 보았다.

 

 

 

둘째, 머튼은 이러한 내적-신비적 체험은 그리스도교만의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발견했다. 영적 체험은 다양한 종교 안에서 혹은 종교를 넘어서도 일어날 수 있으며, 영적 변화에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와 언어를 통해 각기 다른 형태로 묘사될 수 있다. 이러한 영적 체험의 보편성과 다양성은 머튼에게 깊은 초월적인 단계에서 다른 종교적 표현에 대해 배우도록 자극했다. 예를 들어 그는 자신의 내적 체험들을 표현하고 해석하기 위해 불교의 영성으로부터 다양한 개념을 취하여 사용했다. 그는 불자와 그리스도인이 다양한 방식으로 표현된 그들의 내적 체험을 상호 교환함으로써 서로가 더 충만해질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렇다고 불자들과의 체험적인 대화에서, 그는 그리스도교 중심적인 구원론을 거절하지도, 종교 혼합주의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는 하느님의 영은 모든 종교적인 시스템을 초월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종교간 대화 통해 초-문화적 성숙 도달

 

 

 

마침내, 그는 자신의 내적 체험과 종교 간 대화를 통해 최종적 통합인 초-문화적 성숙의 상태에 도달했고, 깊은 영적인 단계와 보편적인 수준에서 불자와 그리스도인 사이의 풍성하고 지속적인 대화를 이룩하는데 공헌할 수 있었다. 또한, 그는 말년에 다른 종교적 전통과의 대화를 위해 직접적인 삶의 체험과 영적 교류를 강조했다. 특히 불교는 수도승 생활에 기초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 수도승들이 불교 수도승의 삶을 직접 체험하거나, 불교의 수도승들이 그리스도교 수도원에서의 삶을 직접 체험하는 상호 영적 교류 체험을 할 것을 권고했다.

 

 

 

 

 

불교와 상호 영적 교류 체험 확대 권고

 

 

 

그의 이 제안은 실제로 1970년대부터 국제적인 수도승들 상호 간의 네트워크인 AIM(Aide l’Implantation Monastique)1993년부터 AIM에서 독립한 국제 수도승적인 종교 간 대화 기구(DIMMID)에 의해 수도승적 손님 환대프로그램과 영적 교류프로그램, 그리고 겟세마니 모임들의 형태로 불교와 그리스도교 수도승 간에 시행되었다. 이러한 모임들은 개방성, 영적 우정 관계, 친교와 굳건한 협력의 영성 안에서 관상적 대화에 집중해 왔다. 그들은 수도승들만의 친교에 제한된 것이 아니라, 모든 관상가와의 친교를 향해 개방되었다. 그러나 여기에 언급된 프로그램들은 여전히 서구 수도승들이 그 중심이 되고 있으며, 아직 아시아 수도승들에게는 낯설기만 하다. 이러한 프로그램들은 종교 간 대화에 더 깊이 참여해야 하고, 이러한 기회들을 더 가져야 할 아시아의 불교와 그리스도교 수도승들에게 더 장려될 필요가 있다.

 

 

 

[세상과 소통한 침묵의 관상가 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50) 토마스 머튼의 종교간 대화 자기 변형과 우정 관계

 

이교도였던 불자, 친구요 영적인 형제들로 바뀌다

과거에는 종교들이 자신의 종교에 고립되어 존재해 온 반면, 오늘날 종교들 사이의 분위기는 상당히 달라졌다. 종교에 따라 어떤 종교와는 극도의 대립된 관계를 갖는가하면 또 다른 종교와는 대화나 협력을 통해 우정 관계를 맺어 상호 관련성 안에서 영향을 주고받으며 공존한다. 예를 들어 2015624일 불교와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의 모임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자기-변형 기초로 우정 관계 형성

이 만남은 형제애, 대화와 우정 관계의 방문이며 매우 좋습니다. 이것은 유익합니다. 그리고 전쟁과 증오로 상처받은 이러한 순간에 함께하고자 하는 이 작은 운동은 평화와 형제애의 씨앗입니다.”

 

티벳 불교의 지도자 달라이 라마 역시 같은 어조로 서로 다른 전통에 대한 상호 인식과 동등한 진정성 그리고 본질적인 상호 보완성의 깊은 수준에 도달하게 하는 진정한 대화의 기초로서 우정 관계의 필요성에 대해 강조하고 있다. 오늘날 종교 간 대화에 참여하는 이들은 그들의 마음과 가슴을 다른 종교를 향해 열고 있고, 갈라진 사회를 넘어 세계 공동체를 설립하기 위한 길을 모색하고 있다.

 

우정 관계와 형제애를 통한 종교 간의 대화 방법은 토마스 머튼의 불교-그리스도교와의 대화에서 두드러진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그는 자기-변형을 기초로 다른 종교인들을 향한 개방을 촉진시키는 우정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종교 간 대화에서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다양한 불자들과의 관계를 통해 실제로 보여주었다. 사실 1930년대 머튼에게 있어 불자들은 이교도였다. 그러나 1960년대에 머튼에게 있어서 불자들은 친밀한 친구들이요, 영적인 형제들로 바뀌었다. 심지어 1968년 아시아 여행에서 샤트랄 린포체에게는 스승이 되어 달라고 청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우정 관계와 형제 관계를 통한 영적 유대뿐 아니라, 머튼의 관상적 체험과 종교 간 대화의 방법들은 불교-그리스도교 대화를 위한 다양한 모델을 제공하고 있다. 그중 하나는, 머튼이 불자들과 통합적 수준에서 대화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오늘날 교리적인 차이에도 불구하고 불자들과 그리스도인들 사이의 대화는 잦아지고 있는데, 이러한 대화는 다음의 세 분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 종교적 경험에 대한 대화, 2) 신학에 대한 대화, 3) 활동에 대한 대화. 불교-그리스도교 대화에서 이러한 세 주제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가령 그리스도인들은 대화의 경험을 통해, 실천과 영성 사이의 대화 없이는 불교의 교의를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게다가 대화의 근본 토대가 되는 영성과 그 열매인 사회적 실천과의 관련 없이는 두 종교 간의 진정한 친교를 향한 발전은 있을 수 없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즉 통합적인 방법의 접근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세 가지 대화 주제의 통합된 만남

 

이러한 세 가지 대화 주제의 통합된 만남은 머튼의 불교-그리스도교 대화 방법이었다. 그는 단순히 개념적, 체험적 혹은 사회 참여적인 각각의 방법으로 불교에 접근하지 않았다. 그는 불교의 가르침에 대해 깊이 공부를 하였으며, 깨달음의 체험을 통한 자기-변형에 기초하여 불자들과 영성과 삶의 나눔을 가졌으며, 두 종교의 공통점인 인간 의식의 변형을 통한 사회 변형을 추구함으로써 통합된 만남을 이루려고 했다. 사실 불교와 그의 첫 만남은 지성적인 수준에서였으나, 그의 선()체험에 대한 관심은 불교 안에서의 종교적 체험과 자기-변형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 주었다. 그는 내적 자아, 영적 수행, 종교적 체험 그리고 자비로운 사랑 위에 존재론적이고 체험적인 것에 집중하는 것은 두 종교의 양립 가능성을 드러내고, 연대적 감각을 증진할 수 있다고 믿었다.

 

영적 연대에 중심을 둔 머튼의 통합된 만남은 안이한 비교 신학과 종교 융합주의의 위험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는 자기-초월을 체험한 이들은 더는 고립되지 않고 개방과 자유와 사랑으로 다른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고, 성숙한 수준에서 다른 이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보았다. 머튼은 이렇게 말했다.

 

 

선 불교와 대화, 영적인 성숙에 기여

 

자기 자신 안에서 다른 이들을 발견하고, 다른 이들 안에서 자신을 발견함으로써 더 많이 다른 이들을 지지하고, 자신 안에서 그들에 대해 라고 말하면 말할수록 더 많이 참된 자기 자신이 됩니다. 만약 저 자신의 마음으로 모든 이들에게 라고 말한다면 저는 충만한 실재가 됩니다.”

 

다른 이들을 향한 그의 개방과 다른 전통 안에서의 중요한 차이점들에 대한 그의 세심한 존중은 그들로부터 배움과 깊은 영적인 성숙을 얻도록 해 주었다. 실제로 자신의 관상적 전통 안에서 자기-변형과 하느님과의 일치를 향한 그의 열망은 선() 불교와 대화를 하게 했고, 관상에 대한 그의 새로운 관점과 새로운 영적인 깨어남을 얻는 데 기여하였다. 이 과정에서 그는 하느님 혹은 절대자와 인간의 연결점으로서뿐만 아니라 동서의 교차 지점인 내적 자아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는 내적 자아의 통합은 새로운 신원과 그리스도 안에서 유대인도 그리스인도, 남자도, 여자도, 노예도, 자유인도 없는 영적인 재탄생을 이끌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갈라 3,28 참조)

 

 

 

[세상과 소통한 침묵의 관상가 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51) 토마스 머튼의 종교간 대화 수도승적 관상 대화

관상적 대화 통해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회복

201411월 프란치스코 교황은 모든 축성된 이들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수도승 간의 대화 개발 필요성에 대해 다음과 같이 격려했다.

수도 생활과 종교적 형제애의 다른 표현들의 현상은 모든 위대한 종교 안에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가톨릭교회와 위대한 다른 종교 전통이 수도승 간 대화에 다년간 지속적으로 참여한 사례들이 있습니다. 저는 축성된 이들이 수도승 간 대화에 깨어 있고, 더 위대한 상호 이해와 인간 삶에 대한 봉사의 영역에서 위대한 협력을 향해 나아가는 기회를 얻기를 바랍니다.”

 

 

 

수도승을 향한 이러한 프란치스코 교황의 권고는 토마스 머튼의 수도승적 종교 간 대화의 유산이다. 세상의 위대한 종교들은 대부분 수 세기 동안 실천해 온 수도승적 삶과 수행 방법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머튼은 서로 다른 종교의 수도승들이 자신의 수도 생활을 교류함으로써 종교 간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 나은 깨달음을 얻은 수도승이 되기 위해

그는 1950년대 말, D.T. 스즈키와의 대화를 시작으로 아시아의 여러 수도승 전통을 본격적으로 연구하고 그들과 교류했다. 1968년에는 아시아의 여러 다른 종교들의 수도승ㆍ관상가들과 직접 만났다. 관상적인 수도승이었던 머튼은 특히 불교는 근본적으로 수도 생활의 형태이며 그리스도교 수도 생활 이전에 이미 존재해 왔다는 것을 인식했다.

그래서 많은 불교의 수도승, 다양한 종파의 관상가들과의 만남의 기회를 준 아시아 순례를 했다. 그는 아시아 순례는 불교의 수도승적 분야에서 중요한 사람들과의 접촉과 배움이었다고 말했다. 자신의 수도승적 전통에 대한 이해를 깊게 한 머튼은 아시아의 고대 수도승적 원천들로부터 배우기 위해 그리고 그 자신의 수도승적 맥락 안에서 그들과 함께 관상적 삶을 체험했다. ‘더 나은 깨달음을 얻은 수도승이 되기 위해다른 종교의 수도승들과 관상가들을 만났다.

 

 

 

이 만남을 통해 그는 수도승 간의 대화는 수도 생활의 쇄신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으며, 평신도든 수도승이든 상관없이 모든 관상가와의 대화를 위한 길을 개척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삶의 마지막에 머튼은 수도승 간의 친교를 통한 관상적 대화를 실존적이고, 체험적이며 영적인 단계에서 증진시켰다.

 

 

 

그가 제안한 서로 다른 종교의 수도승과 관상가들 사이의 대화는 교리적인 영역을 넘어 영적인 친교영적인 가족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는 만약 수도승 간의 교류가 수도승적 관상적 대화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그것은 다른 전통과 마음과 마음의 대화, 지혜의 상호확인을 이끌 수 있다고 보았다. ‘-문화적 성숙의 상태안에서, 머튼은 우리는 이미 하나라는 것을, 그리고 관상적 대화와 수도승 간의 교류는 인간의 본래의 다양성 안에서의 일치를 회복하는 것임을 주장하였다. 요컨대, 아시아에서 그의 삶의 마지막에 그는 현대 세계를 위해 위대한 종교들의 수도승들 사이의 그리고 종교ㆍ문화적 경계를 넘어 관상가들 사이의 종교 간 대화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마련할 기회를 가졌다.

 

 

 

 

 

수도승적 손님 환대 · 영적 교류 증진의 모범

 

 

 

수도승ㆍ관상가 간의 대화에 대한 그의 사상과 방법들은 카를레스의 표현을 통해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방문하고 자주 교류하라, 개방 안에서 함께 살라, 공통된 프로젝트들에 협력하라, 논쟁하지 말고 오히려 명상하라, 교리적인 유사성들을 추정하지 말라, 준비되지 않은 사람들에게 두 종교의 이중적 수행을 권고하지 마라.”

 

 

 

1968년 방콕 회의에서 다른 수도승들과 관상가들과 머튼의 만남은 수도승 간의 종교 간 대화를 위한 이어지는 모임에 영감을 주었다. 그의 유산은 DIMMID(국제 수도승적인 종교 간 대화 기구)의 유럽과 북미 위원회들에 의해 주관되어 유럽에서 수도 생활 교류 프로그램들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북미에서 겟세마니 만남들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꽃피었다.

 

 

 

공적인 교회 문헌들과 교황의 진술들 역시 아시아 전통과의 대화에 이러한 형태를 권고하고 있다. 아시아 수도승들과 관상가들 역시 수도승적이고 관상적인 종교 간 대화에 대한 이러한 표현들을 환영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일본의 불교 수도승인 토마스 키르치너는 그리스도인과 불자들 사이의 풍부한 교류의 주목할만한 특징은 관상가들에게 중요한 역할이 주어진 것이다. 불교-그리스도교 대화의 배경에 숨겨진 다이내믹한 힘은 수도원의 남녀 수도승들에 의해 대부분 제공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리스도교 수도승들과 평신도 관상가들을 향한 머튼의 관상적, 실존적, 경험적, 보편적인 접근은 그들과의 대화를 양육하고 증진하기 위한 모델을 제공하고 있다. 수도승 간의 교류와 관상적 대화에서 그가 보여준 길은 수도승적 손님 환대, 영적 교류, 영적 성숙, 인간 고통의 변형, 수도승적 훈련, 수도승적 순례와 수도원적 생태학 등 다양한 주제들 위에서 종교 간 대화를 위한 새로운 지도를 마련해 주고 있다. 그의 모범은 평신도 관상가들을 위한 수도승적 체험 프로그램에도 영감을 주고 있다.

 

 

 

 

[세상과 소통한 침묵의 관상가 토마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52 · ) 토마스 머튼의 종교간 대화 관상은 종교 간 대화의 미래다

 

 

 

, 하느님! 우리는 당신과 하나입니다

1968년 태국의 방콕에서 개최된 아시아와 서구 수도승 간의 첫 번째 회의에서 토마스 머튼은 비공식적으로 그러나 확신에 찬 선언을 하였는데, 이 선언을 통해 그의 사상과 영성, 종교 간 대화에 대한 결론을 맺고자 한다. 당시 아무도 머튼 자신을 포함해 이 회의가 그에게 있어 마지막 회의가 될지 알지 못했다. 뜻밖의 죽음 바로 전날 밤, 머튼은 존 모핏트(John Moffitt)에게 이렇게 말했다. “()과 그리스도교는 미래다.”

 

(), 문화와 종교와 형태 초월한 의식

확신 속에서 한 그의 이 선언은 많은 질문을 갖게 한다. 그가 아시아 순례에서 티베트 불교에 진정으로 감동하였음에도 그리스도교의 관상적 수도승이 왜 선()에 대해 언급한 것일까? ()과 그리스도교 사이의 관계 안에서 그는 무엇을 본 것일까? (선과 그리스도교만을 언급했다면) 그가 다른 종교들은 무시한 것일까? ()과 그리스도교를 통해 그가 고대하던 미래란 과연 무엇을 말하는가?

 

 

 

모핏트는 머튼의 이 선언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머튼이 선()을 언급할 때 선은 일반적인 감각에서의 종교가 아니라 본질적으로 해탈에 도달하기 위한 기술로서의 선을 의미한다. 그래서 선()은 그리스도교 안에 포함된것으로 여길 수도 있을 것이다.”

 

 

 

머튼이 선()을 선()불교와 구별할 때, ()내적 깨달음을 위한 테크닉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선()문화를 초월하고, 종교를 초월하며, 어떠한 형태를 초월하는 의식으로 간주하였다. 그가 선()의 관점을 통해 발견한 세계의 위대한 종교들의 공통된 영적 요소들은 관상적 혹은 깨어남의 체험을 통한 인간 의식의 변형영적 해방이었다.

 

 

 

그의 불교-그리스도교의 대화와 그의 수도승 간의 대화에서의 선구자적 업적과 수도 생활의 중심 주제가 바로 관상이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우리는 다음의 결론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의 관점을 통해, 머튼은 인간 의식의 변형과 영적인 깨어남을 우선으로 추구하는 다른 종교적 전통의 수도승들 혹은 관상가들 사이의 관상적 대화의 가치와 가능성을 보았다.

 

 

 

()과 그리스도교는 미래다라는 주장에서 미래와 관련하여, 그는 이 관상적인 대화를 통하여 수도승들이 수도승 간의 친교영적 가족의 형성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그들이 점점 물질화되고 갈라지고 있는 이 세상을 향한 인류의 근본적인 일치를 위한 증인들이 되기를 희망하였다.

 

 

 

토론토대학에서 종교 간 대화에 관한 머튼의 여정을 연구하는 동안 필자는 그가 선()의 관점을 통해 미래의 종교 간 대화를 위한 관상적 핵을 발견했다는 확신이 생겼다. 필자는 관상적 핵()의 핵이라는 표현보다 더 적절한 용어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의 핵이라고 표현했을 때, 불교에서 선()이란 용어를 오랫동안 사용해 왔기에, 많은 이들이 즉시 불교를 떠올리게 되기 때문이다.

 

 

 

 

 

관상적 수준에서 종교간 대화 강조

 

 

 

아시아 전통 특별히 선()과의 만남을 통해 머튼은 관상적인 대화가 가능함을 깨달았다. 그는 종교적 의식의 초월로서 선()은 그리스도교를 포함하여 모든 아시아 종교적 전통 안에 있는 관상적 핵을 표현하고 있다고 믿었다. 비록 각각의 종교들이, ()의 깨달음, 힌두교의 삼매(Samadhi), 도교의 무위, 그리스도교의 하느님과의 일치 등과 같이 관상 혹은 해탈의 체험을 다르게 이해하고 다르게 표현한다 할지라도 그들의 우선적인 목표는 궁극적인 자기-초월혹은 자기-변형을 얻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머튼은 인간 의식의 변형과 영적 해방을 위한 관상적 수준에서 다른 종교적 전통과의 대화를 강조했던 것이다. 그는 많은 종교 전통의 관상적 핵이 깊은 영적인 수준에서 종교 간 대화를 지탱할 수 있는 것임을 내다보았다.

 

 

 

필자는 토마스 머튼의 영성에 영감을 받아 다음과 같이 말하고 싶다. “관상은 종교 간 대화의 미래다!” 만약 우리가 하나의 영적인 가족으로서 평화 안에서 함께 살아가기를 원한다면 위대한 세계 종교들은 서로 다양한 방법으로 대화의 장으로 나와야 할 것이며, 이 모든 종교 간 대화의 심장에는 반드시 관상적 대화가 있어야 할 것이다.

 

 

 

토마스 머튼의 종교 간 대화의 정신이 잘 나타나 있는 그의 기도를 함께 바치며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 하느님! 우리는 당신과 하나입니다. 당신은 우리가 서로 마음을 열면 당신이 우리 안에 머무르시겠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이 개방성을 보존하고 우리의 마음을 다해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도록 도와주소서. , 하느님, 우리는 서로를 온 마음으로, 온전히, 완전히 받아들임으로써 당신을 받아들이게 되고, 당신께 감사드리게 되고, 우리의 존재를 다해 당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우리를 사랑으로 가득 채우시고, 우리로 하여금 각자 다양한 길을 가면서도 사랑으로 결합되고, 이 한 분의 성령 안에서 하나 되게 하소서. 사랑이 승리했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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