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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칼럼] 도서 '대학의 이념' 대학은 무엇하는 곳인가? 대학에 대한 가톨릭적 비전?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05|조회수43 목록 댓글 0

[도서칼럼] 도서 '대학의 이념'

대학은 무엇하는 곳인가? 대학에 대한 가톨릭적 비전?

 

대학 입학 철이 다가옵니다. 대학에 진학하게 된 새내기들 축하합니다.

우리나라 대학 진학열은 유별납니다. 그런데 왜 대학에 진학했냐고 신입생들에게 물어봤을 때 소신 있는 답변을 들은 적이 별로 없습니다. 많이 들은 답변은 남들이 가니까.”, “부모님이 가야 한다고 해서.” 등이었습니다. 기성세대에 속하는 사람들 중에는 학벌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해서 대학에 간다고 말하는 이도 있습니다. 대학, 특히 명문대를 통해 얻게 되는 상징적, 문화적 자본뿐 아니라 교우 관계를 통해 맺게 되는 인맥이 사회적 자본이 되어 일생에 도움이 된다는 관찰에 기반한 이야기입니다. 게다가 정부의 대학 정책도 도덕적, 사회적, 정치적으로 성숙한 시민의 양성이라는 관점보다는 경제성, 효율성의 관점에 방점이 찍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대학에 대한 그리스도교적 비전은 무엇일까요?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 <교회의 심장으로부터>(1990)라는 가톨릭계 대학교에 관한 교황령이나, 21세기 예수회 대학의 방향을 밝힌 예수회 총원장 콜벤바흐의 예수회 대학 교육에 있어서 신앙의 봉사와 정의의 구현(2000)은 훌륭한 안내가 되지만, 일단 2019년 시성된 존 뉴먼 추기경의 대학의 이념(1852)은 좋은 출발점이 됩니다. 이 책은 서양 대학의 역사에서 빠질 수 없는 고전입니다.

뉴먼에게 대학은 전공 중심의 단편적이고 실용적인 지식을 습득·활용하는 지식기술자를 만드는 곳이 아닙니다. 이를 넘어서서 학생들이 사유하는 훈련을 받고 판단력을 형성하여 보편 지식을 배우고 활용하는 지성인으로 성장하도록 교육하는 곳입니다. 그렇기에 뉴먼은 포괄적 능력을 갖춘 정신의 함양을 위해 교수와 학생의 역동적인 상호 관계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일반적인 지식은 집에서 책을 통해 배울 수 있지만, 그 지식의 분위기, 색조, 열정, 그것을 담지하고 사는 삶 등을 배우는 것은 교수와 상호관계를 통해서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혼이 담긴 교수와 이루는 만남이 중요합니다. 마치 아이가 부모와 인격적 상호작용을 통해서 언어를 배우는 것처럼, 정신의 계발에도 스승과 상호작용을 하는 것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는 대학은 자신의 자녀들을 한 사람씩 다 알고 있는, 영양을 주는 어머니(Alma Mater)이지, 주조장이나 화폐 주조소, 혹은 밟아 돌리는 바퀴가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가톨릭적 지성인 교육은 오늘날 시급합니다. 법률, 의료 등 분야마다 전문가는 많지만 지식기술자또는 영혼 없는 전문가처럼 보이는 이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작년에 개봉한 영화 <오펜하이머>에서 익히 이런 전문가들을 보았을 것입니다. 핵무기뿐만 아니라 기후 위기, 인공지능(AI), 양극화, 민주주의의 위기 등 현시대의 이슈는 단지 양심의 문제만이 아니라, 지성적으로도 기술적이고 단편적인 지식을 넘어서 문제나 사안을 포괄적으로 볼 수 있도록 훈련된 전문가를 필요로 하는 안건들입니다.

한국의 대학, 적어도 가톨릭계 대학은, 학생들을 이런 지성인으로 양성하는, 학문과 교육의 공동체가 되기를 희망합니다.

 

 

 

 

[도서칼럼] 도서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 ‘나를 이끄시는 분

어둠의 골짜기를 간다 하여도

 

모든 성인에게도 과거가 있고, 모든 죄인에게도 미래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옛 소련에서 스파이로 기소되어 23년간 포로로 살았고 지금은 하느님이 종으로 시복 후보자인 미국 예수회 신부 월터 취제크(Walter Ciszek, S.J. 1904-1984)의 삶에서 이 말의 의미를 실감하게 됩니다.

이분은 청년기 러시아 선교라는 청운의 꿈을 품고 로마 유학을 갔고, 폴란드에서 본당 사목을 하다가 전쟁 중 소련으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곧 체포되어 모스크바의 악명 높은 루비얀카 감옥에서 5년을 보냈고, 시베리아 강제노동수용소로 보내져 15년간 강제 노동을 했고, 3년간 감시받는 노동자로 살았습니다. 이후, 1963년 포로 교환을 통해 미국으로 돌아와 두 권의 회고록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나를 이끄시는 분을 쓰면서 그 삶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과 냉전 시기에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강제 노동을 하고, 건포도로 포도주를 만들어 낡은 위스키 잔을 성작 삼아 비밀리에 미사를 봉헌하는 이야기는 영웅적입니다.

그러나 취제크 신부님 이야기는 동시에 죄인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고문에도 버티던 정신력이 감옥에서 무너지면서 그는 자신이 바티칸 스파이라고 인정하는 서류에 서명했습니다. 이에 대한 죄책감도 견디기 힘든데, 취조관은 올가미에 걸린 이분을 진짜 스파이로 만들려고 공작을 했습니다. 죽음을 각오하고 이를 끊어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우유부단한 자신에게 그는 실망했습니다. 급기야 자포자기와 절망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길로 자살이 생각의 지평에 들어오게 됩니다. 이 위기의 순간에 이분은 겟세마니의 예수님을 통해 자기에게 비치는 한 줄기 빛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체험이 소련에서의 생활에, 아니 일생에 전환점을 맞는 계기가 됩니다. 교회 전통에서 말하는 두 번째 회심입니다. 이 절망과 회심의 체험이 있었기에 이후 강제노동수용소에서의 삶이든 미국에서의 삶이든 이분은 그분과 함께살 수 있게 됩니다.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가 외적인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 이야기라면 나를 이끄시는 분은 내면의 성찰을 담은 책입니다. 저는 나를 이끄시는 분을 여러 번 읽었는데, 인생을 경험하면서 음미하는 지점도 달라졌습니다. 처음에는 영웅적인 모습에 감탄했다면, 점차 다른 면들이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절망을 이겨낼 수 있었을까? 어떻게 극한상황에서도 내적으로는 의미 가득한 삶을 살 수 있었을까? 어떻게 판에 박힌 일과와 강제 노동을 강요하는 수용소에서 하느님 현존을 감지하며 살 수 있었을까? 또 어떻게 이런 성찰을 길어낼 수 있었을까?’ 등등.

이분처럼 극적이지는 않아도, 우리 역시 성인과 죄인 사이를 오가며 살고 있을 것입니다. 타인이나 자신에 대한 실망, 때로는 절망과 깊이 씨름해 본 적도 있을 것입니다. 혹은 현재의 삶을 의미 없는 반복의 연속으로 수용소에서 사는 것처럼 느끼는 분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순 시기 막바지, 취제크 신부님의 책을 읽으며 이분을 이끈 분을 만나는 것은 어떨까요?

 

 

 

 

[도서칼럼] 도서 안나 카레니나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 안나와 레빈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톨스토이의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유명한 첫 문장입니다. 이 소설은 인생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행복이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주는 소설입니다. 소설의 역할이 일차적으로 사상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데 있지 아니하고, 작품 속 인물들의 이야기, 감정과 갈등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여, 독자가 공감하고 카타르시스를 체험하도록 하는 것이라면, 이 소설은 탁월합니다.

이 소설을 읽는, 단순하지만 부정확하지 않은 한 가지 방법은 안나와 레빈을 대비해 보는 것입니다. 안나는 도시의 귀족 사회라는 공간에서 불륜과 죽음에 이르는 길을 걷게 되고, 이상주의적 지주인 레빈은 농촌에서 가족과 행복, 신앙을 향한 여정을 가는 것입니다. 레빈이라는 인물 안에 톨스토이는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레빈을 미화하지 않으며 안나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거두지도 않습니다.

나이 들어 이 소설을 읽으며 톨스토이의 인간과 인생에 대한 통찰과 묘사, 문장력에 감탄을 거듭 했습니다. 특히 한 부분에서는 멈추어 한참 음미를 했습니다. 그것은 레빈과 키티의 결혼 장면입니다. 신앙 없이 살았던 레빈은 정교회 미사 안에서 결혼을 합니다. 미사 중 사제의 기도를 듣던 레빈은 깜짝 놀랍니다. 기도 속에 반복되는 도와주소서.’라는 말이 자신의 마음을 두드렸기 때문입니다. “도와주소서. 이 사람들은 이것을 어떻게 알아챈 것일까.” 결혼을 앞두고 레빈은 자신이 합당하지 않다고 느꼈고, 어떤 가책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인가. 그렇다. 지금의 나에게는 도움이야말로 가장 절실한 것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여러 인물들의 약함과 이중성을 넘어서 사랑이 한 뼘 자라고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한계를 넘는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톨스토이는 케빈의 입을 빌어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이후 저는 혼배미사 강론에서 이 장면을 자주 인용합니다.

첫 문장만큼 주목받지 못하지만 소설의 끝맺음도 좋아합니다. 소설은 안나의 자살로 끝맺지 않습니다. 대신 농촌에서 레빈의 가정 이야기가 한참 이어지다가 레빈의 독백으로 마칩니다. 그는 여러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약함을 직시하고 있습니다. 여전히 마부에게 화를 내고, 재치 없이 말하고, 자신의 공포 때문에 아내를 꾸짖고 그리곤 후회할 것이라고. 그렇지만 나는 무엇 때문에 기도하는지 이성으로는 알지 못하면서 기도할 것이다.” “이제부터 내 생활은, 내 생활 전부는 무슨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과는 무관하게 한 순간 한 순간 예전처럼 절대로 무의미 하지 않을 것이며, 틀림없이 선의 의미를 지녀 그것을 내 생활에 부여할 것이다.”

톨스토이는 이 소설을 통해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사랑 이야기를 합니다. 하지만 나중에 쓴 단편소설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가 말하듯, 그가 정말 전하고 싶은 메시지는, 인생에는 사랑도 중요하지만 자기를 초월할 수 있게 하는 신앙이 필요하다는 말 아닐까요?

 

 

 

 

[도서칼럼] 도서 찬미받으소서

금사과’? 기후 위기를 직면하기

 

사과 가격이 올랐습니다. 기후 변화의 결과, 생산량이 줄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면 다음 세대는 금사과를 당연하게 여기게 되지는 않을까요?

그런데 기후 위기에 대한 인식에는 세대 간 차이가 있습니다. 젊은 세대가 훨씬 더 심각하게 느낍니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엠지(MZ)세대가 기후 위기에 대한 정부나 기성세대의 대응에 실망하고 있다는 연구가 보고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2015년에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발표하면서 교회와 인류가 기후와 생태 위기를 직면하도록 초대하셨습니다. 교황님은 생태 위기를 가톨릭 신앙의 관점에서 성찰하며 더불어 사는 집인 지구를 돌보도록 인류에 생태적 회심과 행동을 촉구했습니다. 이 회칙은 교회 안팎으로 반향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9년이 지난 지금까지 국내 학계를 포함해서 세계에서 수많은 학술 논문과 책이 이 회칙과 연관되어 쏟아져 나왔습니다. 생태적 실천을 위해 가톨릭 기관들은 적극적으로 호응했고, 어떤 대학들은 교내 패트병 생수 판매를 금지하기도 했습니다.

왜 이토록 반향이 컸을까요? 무엇보다 기후 변화의 심각성을 많은 분들이 이미 실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상기후가 일상화하고, 세계 각지의 농어민, ‘기후 난민들이 직접적으로 생계나 생존을 위협받기 때문입니다. 기후 위기는 미래에 닥칠 위기가 아니라 이미 체험하고 있는 현실이기에, 이 회칙의 반향이 컸을 것입니다.

이 회칙은 생태 위기의 뿌리로 기술주의 패러다임’ ‘인간중심주의를 짚습니다. 그리고 만물과 만인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며 통합적 생태론세대 간 연대를 가르칩니다. 특히 가난한 이들의 외침과 지구의 외침에 귀를 귀울이라는 초대는 울림이 컸습니다. 동남아시아의 젖줄인 메콩강 상류에 중국 등이 여러 댐을 건설하면서 강 하류에 있는 캄보디아의 농어민과 생태계가 직격탄을 맞는 것을 이미 십여년 전에 보았기 때문입니다. 후쿠시마 오염수는 어떻습니까? 과연 환경 파괴의 결과는 가난한 이들이 먼저, 직접적으로 받습니다. 이어 다음 세대는 더 심한 파국을 맞을지도 모릅니다.

<찬미받으소서>에 한국 교회도 응답하고 있습니다. 어느 교구는 2030년까지 교구와 본당 사용 전력의 100%를 친환경 에너지로 전환하겠다는 계획을 밝혔습니다. 사순 시기 실천 사항으로 탄소 배출을 줄이기 위한 탄소단식을 제시한 교구도 있습니다. 여러 교구와 수도회, 본당에서 나름대로 찬미받으소서 7년 여정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작년에 유엔은 이대로 가면 2015년 파리기후협정에서 정한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다고 이미 경고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갈 때입니다. 정부와 기업에 더 책임있는 응답을 요구해야 합니다. 524일은 회칙 발표 9주년입니다. 10주년을 내다보며 <찬미받으소서>를 배우고 실천하며 목소리를 냅시다. 이 과정은 기후 위기의 긴장을 직면하는 것이지만, 우리와 다음 세대를 위한 회심과 기쁨의 여정이 될 것입니다!

 

 

 

 

 

[도서칼럼] 도서 지식인의 표상

아마추어 지식인, 신앙인의 사회적 사명

 

지식인은 어떤 사람인가? ‘오리엔탈리즘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의 표상이란 책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지식인은 자기 전문성이라는 상아탑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공적인 문제에서 약한 사람의 존엄성을 옹호하는 사람이라는 말이죠. 우리 대부분은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식인에 대한 사이드의 관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인의 사회적 사명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이드에 따르면 권력에 진실을 말하는 지식인은, 제대로 대변되지 못하고 무시되는 약자들의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권력을 가진 이들의 편에 설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식인은 손쉬운 공식이나 미리 만들어진 진부한 생각들 혹은 권력이나 관습이 으레 말하고 행하는 것들을 거부하기에 항상 고독과 영합 사이에 서게 됩니다. 게다가 그는 억압받는 이들 안에서도 승리자와 패배자가 나누어지는 현실을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식인이 집단적인 승리의 행진에 동참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러니 그에게 지식인은 지적인 망명자였습니다.

사이드에게 권력에 진실을 말하는 지식인의 사명을 위협하는 것은 권력 유착이나 상업주의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문화된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영역 바깥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눈을 감는 전문가주의를 중대한 위협으로 보았습니다. 대신 지식인이 아마추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마추어라는 단어는 라틴어 amator(사랑하는 이)에서 나왔으니, 문자적 의미로 아마추어란 냉소주의나 두려움에 갇히지 않고 관심과 애정으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아마추어 지식인은 이윤이나 보상에 휘둘리지 않으며 전문성에 묶이는 것을 거부하고 여러 경계와 장벽을 가로지르는 연결점을 만들어 더 큰 그림을 그리려는지식인입니다.

여기서 잠시 자문해 봅시다. 사이드가 그리는 지식인을 보면 성경에 나오는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저에게는 예언자의 모습입니다. 유다에 대한 애끓는 사랑에서 하느님 말씀을 전하지만 이해받지 못하고 고독 속에 탄식하는 예레미아, 자신은 예언자 무리에 속한 적도 없는 한낱 농부이지만 하느님께 붙잡혔다는 아모스 등 구약성경의 예언자부터, 당대 종교 전문가에게 단죄받고 권력에 넘겨지는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사회적 사명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공동선, 연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상기하면, 사이드의 지식인론은 우리 모두에게서 멀리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웃에 대한 애정과 염려 속에 아마추어로서 관여하고 연대하는 것은 사회적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겠죠.

사이드는 세속적 지식인이었지만 자서전 첫머리에 12세기 수도승의 글을 인용하여 망명자로서 자기 삶을 그렸습니다. “고국이 달콤한 이는 초보자이고, 모든 땅이 고향처럼 여겨지는 이는 이미 강자이지만, 온 세상이 낯선 이는 완전한 자입니다.”

 

 

 

 

 

[도서칼럼] 도서 지식인의 표상

아마추어 지식인, 신앙인의 사회적 사명

 

지식인은 어떤 사람인가? ‘오리엔탈리즘으로 유명한 에드워드 사이드는 지식인의 표상이란 책에서 지식인의 역할은 권력을 향해 진실을 말하는 것이라 보았습니다. 지식인은 자기 전문성이라는 상아탑에 머무는 사람이 아니라 공적인 문제에서 약한 사람의 존엄성을 옹호하는 사람이라는 말이죠. 우리 대부분은 자신을 지식인이라고 여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지식인에 대한 사이드의 관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인의 사회적 사명에 대한 이해에 도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사이드에 따르면 권력에 진실을 말하는 지식인은, 제대로 대변되지 못하고 무시되는 약자들의 편에 설 것인지, 아니면 권력을 가진 이들의 편에 설 것인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래서 지식인은 손쉬운 공식이나 미리 만들어진 진부한 생각들 혹은 권력이나 관습이 으레 말하고 행하는 것들을 거부하기에 항상 고독과 영합 사이에 서게 됩니다. 게다가 그는 억압받는 이들 안에서도 승리자와 패배자가 나누어지는 현실을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지식인이 집단적인 승리의 행진에 동참하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러니 그에게 지식인은 지적인 망명자였습니다.

사이드에게 권력에 진실을 말하는 지식인의 사명을 위협하는 것은 권력 유착이나 상업주의에만 국한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전문화된 현대사회에서 자신의 영역 바깥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 눈을 감는 전문가주의를 중대한 위협으로 보았습니다. 대신 지식인이 아마추어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아마추어라는 단어는 라틴어 amator(사랑하는 이)에서 나왔으니, 문자적 의미로 아마추어란 냉소주의나 두려움에 갇히지 않고 관심과 애정으로 움직이는 사람입니다. 그러니 아마추어 지식인은 이윤이나 보상에 휘둘리지 않으며 전문성에 묶이는 것을 거부하고 여러 경계와 장벽을 가로지르는 연결점을 만들어 더 큰 그림을 그리려는지식인입니다.

여기서 잠시 자문해 봅시다. 사이드가 그리는 지식인을 보면 성경에 나오는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습니까? 저에게는 예언자의 모습입니다. 유다에 대한 애끓는 사랑에서 하느님 말씀을 전하지만 이해받지 못하고 고독 속에 탄식하는 예레미아, 자신은 예언자 무리에 속한 적도 없는 한낱 농부이지만 하느님께 붙잡혔다는 아모스 등 구약성경의 예언자부터, 당대 종교 전문가에게 단죄받고 권력에 넘겨지는 예수님에 이르기까지.

교회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사회적 사명이 있다고 가르칩니다. 공동선, 연대, ‘가난한 사람에 대한 우선적 선택이라는 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상기하면, 사이드의 지식인론은 우리 모두에게서 멀리 있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전문가가 아니더라도 이웃에 대한 애정과 염려 속에 아마추어로서 관여하고 연대하는 것은 사회적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겠죠.

사이드는 세속적 지식인이었지만 자서전 첫머리에 12세기 수도승의 글을 인용하여 망명자로서 자기 삶을 그렸습니다. “고국이 달콤한 이는 초보자이고, 모든 땅이 고향처럼 여겨지는 이는 이미 강자이지만, 온 세상이 낯선 이는 완전한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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