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칼럼] ‘파티마의 기적(Fatima)’ (2020년 감독 마코 폰테코보)
‘믿음’이 곧 기적입니다
누구나 살면서 한 번쯤은 ‘기적’을 바랍니다. 인간의 능력과 지혜로는 불가능한 일이 마치 꿈처럼 이루어져 내 삶을, 아니면 세상을 바꿔주면 얼마나 좋을까…. 현실이 힘들고 고통스러울수록 더욱 간절하지요. 그러나 희망과 행운만으로 기적은 결코 우리를 찾아오지 않습니다.
“기적은 신이 아닌 사람이 만든다”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우리가 불가사의하다고 말하는 일들도 결국 인간에게서 나온다는 것이죠. 그렇다면 인간의 무엇으로 그것을 만들까요. 대단한 초능력이 아닙니다. 영화 <파티마의 기적>은 ‘진실한 마음’과 ‘믿음’이라고 말합니다.
가톨릭 신자라면 알고 있는, 교황청도 공식 인정한 104년 전(1917년)의 이야기입니다. 포르투갈의 파티마에 사는 열살 소녀 루치아(스테파니 길 분)와 그의 사촌인 여덟 살 소년 프란치스코, 일곱 살 소녀 히야친타가 들판에서 양치기를 하다가 성모님을 만나지요.
누구도 아이들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어머니는 “왜 너한테 (성모님이) 오시겠니”라고 말하고, 마을의 신부는 ‘악마의 짓’이라고 합니다. 당국은 전시(1차 대전) 상황에서 사람들이 동요할까, 교단은 종교 탄압의 빌미가 될까 두려워 아이들에게 “거짓말이다”라고 말하라는 거짓말을 강요합니다. 그러나 세 아이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는 성모님의 모습과 목소리를 끝까지 믿습니다. “6개월 동안 매일 묵주기도를 하라”는 약속과 세상의 평화와 전쟁 종식을 위해 찾아왔다는 비밀을 지킵니다. 그 믿음과 기도는 7만 군중이 목격한 ‘태양의 기적’을 낳고, 성모님의 약속대로 더 이상 젊은이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지 않아도 되는 평화를 가져옵니다.
세 아이에게 믿음은 무엇이었을까요. 훗날 노년의 루치아 수녀는 그날의 성모 발현에 회의적인 니콜스 교수(하비 케이틀 분)에게 “이해의 끝에서 믿음이 시작된다”라고 말합니다. “거기에서는 (믿음이 아닌) 진실을 향한 과학적 탐구가 시작되어야 한다”고 반박하는 교수에게 루치아 수녀는 “믿음이 진실탐구가 아니면 뭐죠”라고 되묻습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믿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그 믿음이 니콜스 교수처럼 ‘불가해한, 비이성적인 희망을 낳는 진실’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도 인정했듯이 불가해한 일이라고 모두 초월적인 것은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일 뿐입니다. 영화에서 두 다리를 전혀 못 쓰는 소년을 걷게 만든 것은 성모님이 아닙니다. “나를 믿기 시작하면 치유될 것”이라고 말한 성모님을 믿은 소년 자신이었습니다. 혈루병을 앓는 여자를 구원한 것은 믿음이었고, 눈먼 두 사람 역시 예수님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그 믿음대로 눈을 뜰 수 있었습니다(마태 9).
평양교구장서리이신 염수정 추기경님께서 북한교회를 티 없으신 성심의 파티마 성모님께 봉헌해 우리에게 더 의미 있는 <파티마의 기적>은 이렇게 믿음이 곧 기적이며, 아인슈타인이 말한 인생을 사는 두 가지 방법 중에서 “기적이 없다는 듯 살지 말고, 모든 것이 기적인 듯 살아가라”라고 말해줍니다.
[영화 칼럼] ‘언플랜드(Unplanned)’(2019년, 감독 척 콘젤만 · 캐리 솔로몬)
이것을 보고도 모르겠느냐?
주님은 ‘말씀’으로 오십니다. 말씀 가운데에서 기억하고, 실천해야 할 것들을 일깨우십니다. 그 말씀을 가벼이 여기거나, 외면하거나, 잊고 있거나, 거스를 때 눈앞에 진실을 보이시고는 “이래도 모르겠느냐”고 호통을 치십니다. 그렇게 머리를 세차게 얻어맞고서야 비로소 어리석은 인간은 깨닫게 됩니다.
미국 최대 낙태 클리닉인 가족계획연맹의 상담사로 일한 애비 존슨(애슐리 브래처 분)도 그랬습니다. 매주 교회에 나가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낙태가 잘못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위기에 처한 여성을 돕는’ 것이고, ‘나의 정체성’이라는 신념으로 더욱 그 일에 열정적으로 매달렸습니다. 자신이 두 번의 낙태로 엄청난 고통과 분노, 자책과 죄의식을 경험했음에도 여성의 자기 결정권을 강조하면서 임신부 2만여 명을 수술실로 들어가도록 설득했습니다. 그 공로로 최연소 클리닉 소장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주님은 호된 충격을 주십니다. 처음으로 들어간 수술실에서 초음파 화면에 잡힌 머리와 팔다리가 또렷한 13주 태아가 살기 위해 수술 흡입관을 피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치지만 결국 빨려 들어가 핏덩이로 나오는 모습을 보게 하십니다. 그녀는 오열합니다. 지금껏 그녀가 우겨왔던 ‘아직 고통도 못 느끼는 세포 덩어리에 불과한 것’이 아닌 ‘아주 작지만 완벽한 아기’였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실’을 마주하는 순간 자부심은 수치심, 믿음은 배신, 일터는 감옥, 일은 죄가 되었습니다. 사실 주님은 그녀가 그 일을 시작할 때부터 다른 사람을 통해 ‘말씀’을 주셨습니다. “넌 수정된 순간부터 우리 딸이었어.”(어머니), “도덕성에 대한 기준이 과학발전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거야?”(남편), “우리가 자궁 안의 고요함 속에 있을 때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계속 창조하고 계십니다.”(목사)
단지 듣지 못했고, 들으려고 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렇게 오랜 시간 마음의 감옥, 양심의 감옥에 갇혀 있다 탈출하면서 그녀는 죄의 무게를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 눈물과 참회로 용서를 구했고, 태어나지 못한 자신의 두 아이를 비롯해 자신이 죽음으로 몰아넣은 수많은 태아들의 영혼을 위해 기도했고, 생명운동에 뛰어들었습니다.
<언플랜드>는 애비의 실제 삶과 경험을 바탕으로 만들었습니다. 다소 과장과 윤색은 있겠지만, 영화의 모습들은 ‘현실’이고 ‘사실’입니다. 그래서 영화를 시작하면서 애비가 말했듯이 누군가에게는 ‘불편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이고, 모습입니다. 더구나 낙태를 폭넓게 허용하려는 우리의 현실과는 반대의 목소리를 내고 있으니까요.
<언플랜드>는 인간이 만든 법으로 낙태가 죄냐, 아니냐를 따지려는 것이 아닙니다.
태아는 소중한 생명이고 주님의 섭리(시편 139)이며, 어떤 이유로든 그것을 함부로 팽개치는 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느님의 법이 인간의 법과 같을 수는 없습니다.
[영화 칼럼] 노매드랜드 - 2020년 감독 클로이 자오
내 쉴 곳은 어디인가?
집이란 무엇일까요? 독일 성 베네딕도회 뮌스터슈바르차흐 대수도원의 사제 자카리아스 하이에스는 『내 안의 휴식처』(바오로딸 펴냄)에서 “‘집’이라는 단어는 매우 정서적”이라고 했습니다. 집은 누구에게나 가족, 추억, 감정, 냄새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가 말하는 집은 하우스(house)가 아닌 홈(home)입니다. 크기와 위치와 형태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몸과 영혼이 편히 쉬고 위로받을 수 있는 곳. 그 정서와 역할이 없다면 아무리 크고 화려한 집도 단순한 구조물에 불과할 것입니다.
캠핑카에서 생활하는 <노매드랜드>의 주인공 펀(프랜시스 맥도먼드 분)은 자신은 ‘홈리스’가 아닌 ‘하우스리스’일 뿐이라고 말합니다. 가족과의 추억과 가족을 향한 그리운 마음을 심어놓은 좁고 낡은 밴이 ‘내 집’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자기 집에서 같이 살자는 이웃과 여동생, 친구의 제안을 모두 거절합니다. 차라리 새 차를 사는 게 낫다는 조언을 무시하고 거금을 주고 고장 난 밴을 고칩니다.
올해 아카데미에서 작품상, 감독상, 여우주연상을 받은 <노매드랜드>는 집을 잃거나 버리고, 대신 캠핑카를 타고 떠돌이 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펀과 그의 친구가 된 데이브(데이비드 스트라탄 분)를 제외하고는 모두 실제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영화는 그들의 삶과 상처, 꿈과 위안에 대한 고백과 석고 공장이 폐쇄되면서 우편번호까지 없어진 마을을 떠나 유랑 생활을 시작한 펀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죽어라 일하다 벌판으로 쫓겨난 가축”에 비유합니다. 그들에게 지난 삶은 “돈의 멍에에 속박되어 인생을 망친 시간들”입니다. 황량한 벌판과 길 위에서의 유랑 생활은 그것으로부터의 해방이자 인생의 발견입니다. 가족의 죽음, 질병, 가난 등 저마다의 사연으로 혼자가 된 그들은 광활한 자연과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의 교감에서 치유와 안식을 찾습니다. 남편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상처와 기억으로 아파하는 펀 역시 그들과 동화하면서 성찰과 치유와 관조의 길을 찾게 되지요.
그 선택이 결코 낭만적이거나 여유롭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가축을 몰고 푸르고 광활한 초원을 떠돌아다니던 저 옛날의 유목민이 아닙니다. 서부 개척 시대에 정착의 꿈을 안고 거친 들판으로 나아가던 카우보이도 아닙니다. 자연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없으며, 늘 불안한 노동과 고독한 시간 앞에 놓여있는 21세기 유목민의 삶은 불편하고 불안하며, 고단하고 애잔합니다.
펀과 달리 우리는 그들과 쉽게 동화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거주와 노동과 생활은 한곳에 머물러야 ‘안정적’이라는 관념, 영화가 의식적으로 외면한 그들을 길로 내몰아버린 사회구조에 대한 비판적 시각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선택이라고 하지만, 거기에는 2008년 금융 위기와 실업, 주택 투자 버블의 붕괴, 빈부격차가 스며들어 있으니까요.
이런 현실에서, ‘영끌’이라도 해서 내 집을 가져야 더 가난해지지 않고 행복할 수 있다고 믿는 세상에서 <노매드랜드>는 집착보다는 버림과 비움과 지움으로 자연과 자유와 내 삶으로 회귀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진정 ‘내 쉴 곳(집)은 내 마음 안에 있다’고 말합니다. 누군가에게는 그것이 공허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영화 칼럼] 희생(1986년,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희생>, 천국보다 낯선 영화 세계로의 초대
다양한 영화들이 있기에 감상하는 방법도 다양함이 마땅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에서 비롯된 고전주의적 가치들에 무의식적으로 사로잡혀 우리는 편협하고 고정된 영화 감상의 기준과 틀을 가지고 있습니다. 할리우드 영화들은 그것들을 더 강화시켜 놓았습니다. 개연성과 인과관계에 입각한 빠른 이야기 전개, 관객이 현실을 잊고 화면 위의 환상에 몰두하여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드는 서사 전략은 할리우드가 그 시학으로부터 계승한 것입니다.
영화 매체는 새로운 영화 형식을 꾸준히 모색해왔습니다. 우연의 요소와 비논리적 전개 방식의 고의적인 채택, 인간의 심리와 감정의 미묘한 움직임 그 자체에 대한 탐구, 꿈과 환상과 현실을 뒤섞으며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는 이야기 전개, 관객이 환상에 몰두하지 못하도록 비평적인 거리감을 유지하게 하려는 장치들의 활용 등 새로운 미학적 실험을 통해 새로운 영화들이 탄생하여 왔습니다. 새롭고 다양한 영화들을 제대로 감상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기준과 틀을 보다 유연하게 확장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만약, 신고전주의 회화의 걸작인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감상하는 기준으로 피카소의 <게르니카>를 감상한다면 과연 제대로 감상할 수 있을까요?
우리가 보다 유연한 감상의 틀을 가지고 감상한다면 <희생>은 경이로운 미학적 체험을 안겨줄 것입니다. 감독은 시간과 공간을 조각하여 움직이는 이미지들의 거대한 조각상을 완성하고 있습니다. 각 장면들은 단지 이야기 전개를 위한 수단에 그치지 않고 그 자체로 존재 이유를 갖고 그 조각상 속의 독립된 조각상이 됩니다. 그렇기에 이 영화를 감상하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조각 작품을 감상하는 것과 같은 방법일 수 있습니다. 로댕의 거대한 조각 작품 <지옥의 문>을 감상할 때 우리는 우선 멀리서 직관적으로 감상합니다. 그 후 가까이 다가서서 그 안에 자체의 존재 이유를 갖고 존재하는 부분적인 조각상들, 즉, <생각하는 사람>이나 <웅크린 여인>이나 <아담>이나 <이브>의 존재 이유를 해석합니다. 그리고 직관적이고 전체적인 인상과 부분적인 해석들을 종합하면서 우리는 이 작품에 대한 예술적 체험을 완성합니다.
<희생>에서, 아버지 알렉산더와 함께 바닷가에 이미 죽은 나무 한 그루를 심었던 어린 아들 고센. 3년 동안 매일같이 물을 주어 죽은 나무에서 꽃이 피어나게 했다는 한 수도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던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 나무 아래에서 고센은 질문을 던집니다.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는데, 아빠, 그게 무슨 뜻이죠?” 영화 안에서 제시되었던 문제들을 마지막 장면에서 완벽하게 해결하려는 대부분의 할리우드의 영화들과 달리 이 영화는 이렇게 질문으로 끝납니다. 관객들을 수동적인 수용자가 아니라 적극적인 참여자로 만들려는 것이 이 영화가 추구하는 미학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 한국 교회 공동체의 ‘하늘길 노래, 연도’
‘유튜브’에만 있는 아마추어 감독의 중편 다큐멘터리이지만, 위령 성월이 되면 많은 분께 권하고 싶었던 작품을 이 지면을 빌려 나누게 되었습니다.
‘하늘길 노래, 연도’는 감독의 소개에 따르면, “영국에서 작곡을 전공하는 학생”이 만든 1시간 남짓한 작품입니다. 도시와 시골을 아우르는 여러 곳의 실제 천주교 장례 예식과 교회 구성원들의 증언을 통해, 영화는 한국 천주교회 고유의 장례 문화인 연도(위령기도)의 역사와 공동체성, 유족을 위로할 뿐 아니라 장례 봉사자들의 신앙과 교회 구성원들의 친교도 굳건하게 하는 영적 효과를 조명합니다.
구성이 아주 매끄러운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한국 천주교회의 다양한 계층을 대표하는 인터뷰 대상자들의 구성, 한국의 단성부 교회음악인 연도와 서양식 장례음악인 ‘가톨릭 성가’ 속 4성부 위령 성가들을 교차 편집한 청각 효과 설정에서 주제에 대한 숙고와 섬세한 접근을 느낄 수 있습니다. 가정의 장례를 통해 연도의 노랫가락에 실린 위로의 힘을 절실히 느꼈기에, 이 작품을 2019년 초에 발견했을 때는 인터뷰에 공감하는 마음이 앞섰습니다. 당시는 교우의 상가에서라면 긴 연도를 노래하는 것이 당연했기에, 연도 자체는 낯설거나 새삼스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코로나19 사태가 계속되는 지금, 이 작품은 다른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모두의 건강을 위해 소리기도와 노래를 자제하자 장례식장의 연도 가락도 희미해졌습니다. 그렇기에 2020년 가을에 본 ‘하늘길 노래, 연도’는, 우리가 잠시 유보하게 된 공동체 문화에 대한 기록이 되었습니다.
한국의 연도는 어른들을 따라 부르며 배우는 구전 성가였습니다. 시편과 기도문에 곡을 붙인 장중한 성가를 통해 신자들은 죽음과 부활에 대한 교리를 배웠고, 모르는 사람을 위해서도 기도하는 공동체의 친교를 익혔습니다. 위로받은 유족들 가운데는 이에 감동하여 신앙에 입문하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영화의 노인 신자들이 증언하듯, 한때 장례의 모든 과정을 도맡았던 연령회의 기능은 장사법의 정착 이후 기도와 전례 봉사로 축소된 상태입니다. 장례 실무는 돕지 못해도 마음의 고통을 위로하던 신앙 공동체의 자리도 감염병 사태의 위험 앞에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 사태가 지나면 연도 소리가 돌아오리라 믿지만, 여러 세대에 이어 내려온 공동체 정신을 지키며 이웃의 슬픔을 나누는 일은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숙제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영화] ‘레미: 집 없는 아이’의 내리사랑
‘집 없는 아이’는 초등학생 때 공부방 안 책꽂이에 있었으나, 집 없는 주인공의 처지가 가엾다 못해 무서워 그냥 지나쳤던 세계명작 동화의 제목입니다.
올봄에 TV의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이 소설을 각색한 영화의 예고편을 접하고 영화부터 볼 마음을 먹었습니다. 감염병 사태 탓에 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이 학대당한 사건들을 접한 뒤, 원작 소설과 각색 시나리오의 작가는 학대의 위험에 놓인 주인공을 어떻게 묘사했는지가 궁금했습니다. 해외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형편에 영화 속 프랑스의 푸른 초원과 저잣거리 풍경을 눈요기하고픈 욕심도 있었습니다.
영화는 소설처럼 19세기가 배경입니다. 갓난아기 때 유괴된 소년 레미가 거리의 음악가 비탈리스를 만나 재능을 발굴하고, 주변인들의 도움으로 진짜 가족과 행복을 찾는 줄거리입니다. 영화는 2시간 이내의 분량에 맞춰 원작을 압축하되, 아픈 과거에서 시작된 비탈리스의 회심과 내리사랑의 서사를 도입해 감동을 줍니다. 또한, 원작의 모티프인 음악을 한껏 살린 레미의 청아한 노래와 비탈리스의 바이올린 연주는 귀를 즐겁게 합니다.
비탈리스는 명예를 좇다가 원가족을 잃어버린 자신에 대한 형벌로 이름 없는 유랑 음악가의 삶을 택합니다. 양아버지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단돈 35프랑에 팔아넘겨지듯 비탈리스를 따라가게 된 것은 레미에게는 오히려 구원이 되었습니다. 비탈리스가 글과 음악을 가르치고 친어머니를 찾아가는 길까지 보호해 준 덕분이지요. 레미가 재능을 포기하지 않도록 격려하고 레미를 구출하려고 자기 평생의 보물마저 포기하는 그의 희생은 과오에 대한 속죄처럼 묘사됩니다. 노년의 레미가 유년기를 회상하는 액자식 구성은 한 아이를 위한 희생이 훗날 수십 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영화에서 두드러지는 다른 설정은 주인공들을 위로하고 치유하는 여인들의 면모입니다. 버려진 레미를 정성으로 기른 양어머니, 신분에 구애받지 않고 친구가 된 소녀 리즈, 잃어버린 아들을 하염없이 기다린 친어머니, 비탈리스의 정체를 알아채고 점잖은 위로와 존경을 표한 귀부인.
혈육이 아니라는 이유로, 때로는 혈육인데도 연약한 아이들에게 고통을 주는 어른들의 이야기가 너무 많이 들려오는 요즈음, 우리에게는 이 영화처럼 혈육이 아니어도 서로에 대한 조건 없는 애정으로 희망과 구원이 된 이들의 이야기가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