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도서칼럼] 도서 ‘삶과 나이’, ‘우울한 마음의 의미’ 우리 삶의 본질에 대한 가장 간결한 말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08|조회수42 목록 댓글 0

[도서칼럼] 도서 삶과 나이’, ‘우울한 마음의 의미

우리 삶의 본질에 대한 가장 간결한 말

 

나도 저렇게 늙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사람을 만나 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반대로 불평이 많거나 꼬장꼬장한 사람을 보면서 나는 저렇게 나이 들지 말아야지.’ 하는 속생각도 해 본 적 있을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아름답게 나이들 수 있을까요? 시중에는 이를 돕기 위한 책들이 많이 있습니다. 고령화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희망과 두려움의 반영입니다. 대부분 자기 계발을 위한 조언을 합니다. 저마다의 지혜를 나누고 있지만, 인생이 그렇게 만만한 게 아니기에 때로는 값싼 위로를 준다는 인상도 받습니다.

과르디니 신부님의 삶과 나이도 나이 듦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흔히 볼 수 있는 심리학적 접근이 아니라 그리스도교 인간학에 바탕을 둔 강의입니다. 이 책은 인격이 온전한 전체로 완성되어 가는 과정으로 인생을 봅니다. 인생은, 그리고 인생의 각 시기와 그 안의 위기도, 유일하고 고유한 것이며 또한 영원히 사라져가는 것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시기마다 고유한 가치를 실현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책이 보는 인생에 대한 이해와 가치관은 다음 문장에서 엿볼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생의 마지막을 향해 가라앉아가는 노인에게 친절을 베풀 줄 모르고, 계속 더 좁아지기만 하는 노인의 삶에 도움을 제공하기를 거부한다면, 삶이란 게 도대체 무엇인지, 삶의 비극이 얼마나 가혹한지, 삶의 고독이 얼마나 깊은 것인지, 그리고 우리들이 얼마나 서로 깊이 연결되어 있는지 깨달을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발로 차버리는 셈입니다.”

이 책은 탄생에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인생을 논하지만, 위의 단락이 암시하듯, 특히 노년기에 주목합니다. 청춘의 가치가 돋보이고, 노년의 가치가 잊혀가고 있는 오늘날에, 나이 듦, 물러남, 타인의 도움에 의존함 등 노년기 삶의 고유한 가치를 옹호합니다. “늙는다는 것은 죽음에 가까워진다는 뜻이다.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게 된다. 죽음이란 공허로 해체되는 것인가, 아니면 진정한 것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인가?” 번역자는 이 책을 우리 삶의 본질에 대한 가장 간결한 말이라고 후기에 적었는데, 적절한 표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자 과르디니 신부님은 베네딕토 16세와 프란치스코, 두 교황님 모두에게 영향을 준 20세기 그리스도교 사상가입니다. 이분이 쓴 소책자가 몇 권 번역되어 있는데, 기도나 전례에 대한 책도 있습니다. 우울한 마음과 씨름하는 분에게는 우울한 마음의 의미라는 책도 추천합니다. 이 책 역시 그리스도교 인간학에 바탕을 둔 해석입니다. 의학이나 심리학적 접근처럼 우울한 마음을 위로하고 치료하고자 하는 책은 아니지만, 이를 안고 사는 용기를 얻을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철에 책을 통해서 과르디니 신부님을 만나면 어떨까요? 인생이 무엇인지, 완성된 삶이란 무엇인지, 어떻게 나이 들어갈 것인지, 간결하지만 묵직한 배움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도서칼럼] 담화 인공지능과 평화’, 도서 감시자본주의시대’, 회칙 찬미받으소서

인공지능 시대, 어떻게 살아갈까?

 

10년 후 2035년 생활이 어떨까 자문하면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사회의 변화가 너무 빠르기 때문입니다. 이미 생활에 깊이 들어온 인공지능을 생각해 봅시다. 이제 외국어를 공부하지 않았어도 외국인과 일상 소통이 가능한 시대가 임박했다는 생각도 합니다. 지하철 문화가 스마트폰을 중심으로 바뀐 게 불과 지난 10여 년이라는 것을 돌아보면, 10년 후 우리 생활을 인공지능이 어떻게 변화시킬까 가늠이 되지 않습니다.

인공지능 활용이 주는 기대도 있지만 위험도 벌써 보이고 있습니다. 30여 년 전 인터넷을 처음 사용하면서 직접 민주주의가 가능한 시대를 순진하게 상상했었는데, 역사는 그렇게 전개되지 않았습니다. SNS나 인터넷 공간은 신속한 정보 공유로 투명성, 효율성을 높이고 소통과 네트워크를 활성화시키기도 했지만, 소비주의, 거짓 정보, 각종 중독, 사회적 고립의 산실도 되었습니다. 대표적 SNS인 페이스북은 유명 인사들을 특별 관리하고 인스타그램이 10대의 정신 건강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내부 보고서를 무시했으며, 마약 카르텔과 인신매매 조직 등의 불법적 이용 행태를 알면서도 방치했습니다. 인공지능도 이미 전쟁 무기로 활용되고 있고, 테러에 악용될 위험에도 노출되어 있습니다. 여느 과학기술과 마찬가지로 인공지능 역시 중립적인 것이 아니라, 권력과 자본이 감시하고 통제하고 이익을 추구하는 정치적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인공지능에 대해 그리스도인은 어떤 관점을 가지면 좋을까요? 몇 가지 읽을거리를 추천합니다. 먼저,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올해 11일에 발표하신 인공지능과 평화라는 세계 평화의 날 담화입니다.(한국천주교주교회의 홈페이지에서 열람 가능) 교황님은 인공지능이 주는 가능성도 보시지만, 차별, 선거 개입, 감시 사회의 증대, 디지털 배척 등 부정적 영향도 지적하십니다. 그렇기에 인공지능이 존엄성을 증진시키고 강력한 소수가 아닌 모두에게 혜택을 주는 방향으로 개발되고 사용되게 할 것을 촉구하십니다. 원자력이나 디지털 기술이 얼마나 쉽게 공동선보다는 경제적 이익이나 특정 권력에 유리하게 이용 또는 남용되었는지 생각하면, 도전이 되는 요청입니다. 신앙인은 영적으로 깨어 있을 뿐 아니라, 깨어 있는 시민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서 감시자본주의시대라는 사회과학 책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국가나 권력이 안전을 명분으로, 기업이 편리함을 명분으로 수집하는 데이터에 의해 어떻게 우리가 감시되고 기업은 수익을 창출하는지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제 인공지능을 외면하고 살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교황님은 이미 인공지능에 대한 국제적 거버넌스, 알고리즘 윤리, 디지털 문해력을 요청하셨습니다. 교회는 이런 방향으로 힘을 더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전에 소개했던 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다시 읽고 실천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회칙에서 제안하는 생태친화적 삶과 영성을 위해서는 자기 수련이 필요하며 도구주의적 사고에 저항해야 합니다. 우리 영혼은 인공지능보다 훨씬 귀합니다.

 

 

 

[도서칼럼] 도서 A Secular Age(세속 시대), 의례의 과정, 희망의 문턱을 넘어

세계청년대회를 보는 시선

 

2027, 서울에서 세계청년대회가 열립니다. 이 대회는 1986년에 개최된 이래, 미디어와 일반 학자들도 주목하는 세계적인 행사가 되었습니다. 전 세계 청년들이 무엇을 체험하기에 전 세계에서 모이는가? 이는 오늘날 세계와 교회에 무엇을 의미하는가? 인문학적 시선에서 이를 해석할 때, 크게 세 가지 중요한 관점이 드러납니다.

첫째 시선은 세속화와 복음화의 맥락에서 세계청년대회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서구 세속화의 결과로 청년 세대가 교회를 멀리하게 되었는데, 이 대회는 새로운 복음화를 위한 혁신적인 창안이라는 것입니다. 전통적 신앙 내용(십자가, 이콘, 교리교육 등)을 청년 세대의 감수성에 맞는 양식(순례, 축제, 문화 행사 등)으로 성공적으로 표현함으로써 복음화에 공헌했다는 의미입니다. 철학자 찰스 테일러도 A Secular Age(세속 시대)라는 저서에서 이런 접근을 합니다. 그는 제도적 소속보다는 개인적 경험을 통해 의미를 찾는 진정성의 시대에 이런 대회가 청년들에게 잘 맞는 종교적 형태라고 봅니다.

둘째 시선은 세계청년대회에서 경험하는 공동체성체험에 주목합니다. 청년대회 참여는 쾌적한 여행이 아니라 불편을 감수하는 순례입니다. 멀리서 온 청년뿐 아니라 홈스테이를 제공하여 순례자를 맞아들이고 환대하는 가정도 순례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들은 이 대회를 통해서 신앙인의 정체성, 가치관을 심화하고, 어떤 이는 심지어 인생이 바뀌는경험도 합니다. 이들은 평상시의 사회적 지위나 의무, 계층을 초월하여 평등하게 연결되는 상태, 즉 문화인류학자 빅터 터너가 의례의 과정에서 말하는 커뮤니타스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셋째 시선은 세계화와 가톨릭 세계시민의 관점입니다. 세계청년대회의 역사는 20세기 후반 냉전의 해체와 경제적·문화적 세계화, 과학기술 혁신 등과 맞물려 전개되어 왔습니다. 이러한 세계화 흐름 속에서 세계청년대회는 가톨릭 사회관과 인간관을 교육하고 체험하게 함으로써 가톨릭적 세계시민을 양성하는 우정의 학교가 되고 있습니다. 순례자들은 외국 친구와 우정을 맺으며 문화적 다양성을 체감할 뿐 아니라, 전쟁과 평화, 빈곤과 발전, 생태와 같은 공동 이슈를 성찰하고 대화하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순례자는 자신이 속한 지역교회를 넘어서 세계교회를 감지함으로써 가톨릭 세계시민으로 성장하게 됩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 세계청년대회에 대한 인문학적 시선은 관료적·행정적 접근이나 양적인 성공을 넘어서 한층 넓은 지평을 열어줍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가장 중요한 시선을 기억해야 합니다. 바로 청년들의 목마른 시선과 이를 대하는 그리스도의 시선입니다. 일찍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희망의 문턱을 넘어에서 그 시선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어디에나 교황이 가는 곳이면 교황은 젊은이들을 찾고 젊은이들은 교황을 찾으려고 합니다. 사실, 그들이 찾는 것은 교황이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이 시선이 2년 남지 않은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준비하는 매일의 우리 시선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도서칼럼] 도서 이주의 시대, 파친코, 모든 형제들

이주의 시대 더불어 살아가기 위하여

 

미국의 이주 문제는 트럼프의 재선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이번 미국 대통령 선거는 한국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이기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트럼프의 재선을 두고 여러 분석이 나오고 있는데, 공통적인 분석 중 하나는 이민자에 대한 정책이 표심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이민자는 경제뿐만 아니라, 국가적 정체성, 백인우월주의의 침식에 대한 두려움 등 사회의 여러 단층선이 겹치는 쟁점입니다. 유럽에서 극우 포퓰리즘 정당이 약진하는 데에도 이주민에 대한 혐오가 큰 배경이 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이주는, 생태 위기와 더불어 21세기 중반을 향하는 인류에게 중요한 화두이고, 인류의 기쁨과 희망에 응답하고자 하는 교회의 사명에도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도 이주는 이미 중요한 쟁점이 되었습니다. 어떤 이가 한국은 이민 국가가 아니라고 말한다고 해도, 사회구조적 흐름은 이미 이를 부정하기 어려운 현실입니다. ‘다문화가정’, ‘외국인 노동자라는 말은 그런 현실의 일부를 가리킵니다. 21세기 중반을 향하는 한국도 이제 이민 국가가 되었다는 현실을 뉴 노멀(새로운 정상 상황)’로 삼아 이에 맞는 제도적 정비를 하고 시민 의식을 갖추는 것이 필요하겠습니다.

이런 현실을 읽는 데에 도움이 되는 사회과학 책으로 이주의 시대를 추천합니다. 이 분야에서는 교과서와 같은 책입니다. 사람들은 왜 이주를 하는지, 이주를 하게 되면 목적지나 출신지의 정치, 경제, 사회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국가는 왜 이를 통제하려고 하며 과연 통제가 가능한 것인지, 이주민을 통합하는 데에는 어떤 모델이 있는지 등 관련 주제를 폭넓게 개관하고 있습니다. 이 책은 특히 이주민이 사회에 잘 통합된 경우를 종족적 공동체라고 부르고, 그렇지 못하고 소외되어 2등 시민이 된 경우를 종족적 소수자라고 구분합니다. 소설 파친코에서 보듯, 재일한인은 일본의 종족적 소수자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종족적 소수자가 생기는 경우, 2등 시민으로 차별받는 종족적 소수자만 어려움을 겪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차별하는 주류 사회도 사회의 품격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부메랑 효과처럼 지속적으로 사회적 비용을 지불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일본이 그렇고,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을 지속하는 미국도 그렇습니다.

뉴 노멀을 살아가야 하는 한국 사회도 이런 함정을 유념해야 할 것입니다. 한국에서도 괄시받는 종족적 소수자가 등장하지 않게 노력해야 하는데, 일차적으로 정부나 기업이 뉴 노멀에 걸맞은 정책을 펼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동시에 정보의 홍수 속에서 거짓 정보와 선동을 식별할 줄 아는 깨어있는 시민의식도 필요합니다. 이를 위해서 교회나 그리스도인이 감당해야 할 사명은 무엇일까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회칙 모든 형제들을 읽으며 이에 대한 답변을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의미있는 시간이 되지 않을까요?

 

[도서칼럼] 도서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편 가르기 너머 동행하기, 사회적 우애

 

마지막 칼럼을 쓰는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 21세기 각국에서 등장하더니, 한국에서도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사상가와 예술가를 배출한 독일에서, 그것도 바이마르 공화국이라는 민주적 체제에서 히틀러가 출현하고 홀로코스트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이, 젊은 시절 저는 의아해했습니다. 그런데 노벨문학상, 몰려오는 유학생 등으로 향상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을 실감하는 2024년에 이런 사태가 벌어져 안타깝습니다.

이 현실을 대면하면서 본래 기획했던 글을 내려놓고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에 대해 쓰게 되었습니다. 책의 배경은 트럼프 1기입니다. 세계 각지에서 포퓰리즘이 활개치며 민주주의가 위협받는 가운데 미국에서도 대놓고 여성과 유색인을 멸시하고 비판자에 대한 폭력을 부추기는 대통령을 보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정치학자의 고민이 담긴 책입니다.

이 책은 트럼프처럼 행동할 수 있는 인물이 어떤 조건에서 선출되는지, 선출된 독재자가 어떻게 합법적으로민주주의를 무너뜨리는지 설명합니다. 저자들은 모든 민주주의는 유사한 방식으로 무너진다.”며 잠재적 독재자를 감별하는 기준을 제시합니다. (1) 민주주의 규범을 거부하는가. (2) 경쟁자의 존재를 부인하는가. (3) 폭력을 용인하거나 조장하는가. (4) 언론이나 경쟁자의 기본권을 억압하려 드는가. 저자들은 어느 민주주의 사회나 포퓰리스트 선동가가 있고, 안보나 국민의 뜻을 명분으로 포장한다고 지적합니다. 그런 이들로부터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두 요소를 강조합니다. 하나는 정당입니다. 정당이 그런 인물을 걸러내어 중앙에 나오지 못하게 고립시키고 무력화하는 문지기역할을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요소는 제도와 법률보다 더 중요한 실질적 규범인데, ‘상호관용제도적 자제입니다. 극단적 인물을 걸러내고 경쟁자라도 동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놓고 보면 질문해 보게 됩니다. “한국의 (신자) 국회의원과 정치인들은 상호관용과 자제를 실천하며 자기 정당에서 민주주의의 문지기 역할을 하는가? 아니면 악해도 좋다. 내 이익만 보호할 수 있다면!’이란 계산으로 정치를 하는가?” 그런 정치인을 감별하는 눈을 키우는 데, 이 책은 도움이 될 것입니다.

세계 곳곳에서 포퓰리즘의 득세와 민주주의의 침식을 보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한복판에서 신앙인은 희망의 순례자들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편 가르는 “‘패거리들의 세상 너머로” ‘사회적 우애를 촉구하며, “모든 것이 와해되고 일관성을 잃어버린 것처럼 보이는 오늘날 연대, 특히 힘없는 이들에 대한 연대를 호소하십니다.(모든 형제들101-102) 구세주의 오심을 더욱 기다리며, 다음 구절을 묵상하게 됩니다. “부드러운 정적이 만물을 뒤덮고 시간은 흘러 한밤중이 되었을 때 당신의 전능한 말씀이 하늘의 왕좌에서 사나운 전사처럼 멸망의 땅 한가운데로 뛰어내렸습니다.”(지혜 18,14-15)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