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칼럼] 영화 ‘애프터 양’ - 2022년 작, 감독 ‘코고나다
애프터 크라이스트
필립 K. 딕의 공상과학 소설 《안드로이드는 전기양을 꿈꾸는가?》에서 안드로이드를 사냥해서 현상금을 버는 주인공 데커드에게 인간인지 안드로이드인지 구분하는 시험을 받는 레이첼은 “이 시험이 내가 안드로이드인지 알아내는 시험인가요? 아니면 내가 동성애자인지 알아내는 시험인가요?”라고 질문합니다. 이는 다양한 방식으로 서로를 구분 짓는 태도와 이를 바탕으로 한 차별이, 인간과 안드로이드를 구분 지어 안드로이드를 제거하려는 소설 속 미래 사회의 태도와 다르지 않은 폭력성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코고나다 감독의 영화 <애프터 양>은 ‘테크노휴먼’이라고 불리는 안드로이드 ‘양’(저스틴 H. 민 분)을 중심으로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탐구를 펼칩니다. 극중 백인 남성 제이크(콜린 패럴 분)와 그의 부인인 흑인 여성 카이라(조디 터너스미스 분), 부부가 입양한 중국인 딸 미카(말레아 엠마 찬드로위자야 분)와 미카의 오빠 역할을 맡기기 위해 부부가 구입한 양은 한 가족을 이룹니다. 여기서 영화는 양이 고장 나는 상황을 통해서 왜곡된 인간됨의 조건을 비판적으로 드러냅니다. 바로 나와는 다른 존재를 철저히 구분 짓는 태도입니다.
다양한 이윤 추구 및 욕망 충족의 과정 속에서 민족, 국가, 인종, 종교 간 갈등 및 각종 차별 등을 쉬지 않고 겪어온 인류는, 서로를 철저히 구분 짓고 타자를 대상화하는 과정을 통해서 스스로가 인간임을 증명하려는 듯 보입니다. 그래서 영화 속 양을 대하는 등장인물들의 지극히 인간중심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인간이 본능처럼 버리지 못하는 서로를 구분 짓는 태도를 상징하듯 다가옵니다. 이들은 고장난 양을 가족이나 이웃이 아닌 가전제품처럼 여기고 철저히 경제적인 잣대로 양에게 벌어진 문제를 해결하려 듭니다.
하지만 양은 자신이 터득한 인간성을 바탕으로, 서로를 구분 짓는 태도가 인간 본연의 습성이 아닐 수 있음을 증명해 나갑니다. 세상을 바라보는 양의 시선에는 차별의 기준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엇보다 양의 메모리칩 속 영상화된 기억들에는 양이 바라보는 대상을 향한 깊은 애정과 호기심이 드러납니다. 모두를 따뜻하게 품고 싶은 의지로 가득한 양의 시선이 담긴 그의 기억은 가족들의 마음에 짙은 울림을 전합니다. 그렇게 영화는 인간됨의 기준이, 모든 것을 나와 철저히 구분 지으려는 인류의 습관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세상을 향한 양의 따뜻한 시선으로 옮겨가기를 소망합니다.
복음이 증언하는, 세상을 향한 예수님의 시선을 떠올려봅니다. 어느 누구도 구분 짓지 않으며 단 한사람도 놓치지 않으려는 섬세한 시선, 불의로 신음하는 이들을 향한 연민의 시선,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이들을 향한 용서의 시선 등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예수님의 시선은 복음서라는 이름의 기억저장소에 소중히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복음서에 담긴 예수님의 시선에 감화되고 그 시선을 닮아가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영화칼럼] 영화 ‘노라 없는 5일’ - 2008년 작, 감독 ‘마리아나 체닐로’
떠나보내고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1833년, 영국 시인 아서 헨리 핼럼은 22살의 나이에 뇌출혈로 사망했습니다. 그러자 핼럼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 시인인 앨프리드 테니슨은 장장 17년에 걸쳐 그를 기리는 애가를 썼습니다. 1850년 《A.H.H.를 추모하며》라는 제목으로 익명 출간된 이 장편시에서 특히 27편에 나오는 구절이 인상적인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진실로 받아들이리, 무엇이 닥치든/ 나는 가장 슬플 때 깨달으니/ 사랑하다 헤어지는 아픔이 낫다네/ 한 번도 사랑한 적 없는 것보다
보통 우리는 사랑하는 이와 함께 살아가며 부대끼는 동안 온전히 알아차리지 못했거나 내 뜻대로 왜곡해서 바라보았던 나에 대한 상대방의 진심 혹은 상대방을 향한 나의 진심을 그 상대가 세상을 떠난 뒤에야 비로소 ‘사랑’으로 여길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맞을 때 후회와 미련의 감정이 가장 크게 밀려오나 봅니다. 그 후회와 미련이 ‘그래도 사랑하길 잘 했다.’는 고백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영화 〈노라 없는 5일〉은 주인공 호세(페르난도 루한 분)가, 자신의 집 건너편에 살고 있는 전 부인 ‘노라’가 오랫동안 앓고 있던 우울증으로 목숨을 끊은 이후 겪게 되는 5일을 보여줍니다. 노라의 장례식은 여러 부분에서 삐걱거립니다. 우선 유다교 신자인 노라의 장례를 유다식으로 치루어야 하는데 파스카 축제일과 안식일이 연달아 겹치는 바람에 당장 장례를 치를 수 없게 됩니다. 또 노라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만큼 이를 씻을 수 없는 죄로 여기는 유다교의 전통에 따라 유다식 공동묘지에 온전히 묻히는 것이 어렵게 됩니다. 무엇보다 노라를 대하는 전 남편 호세의 태도가 장례를 치르는 데 어려움으로 작용합니다. 호세는 노라가 자신에게 골탕 먹이려는 속셈으로 미리 파스카 축제일과 안식일을 염두에 두고, 장례를 온전히 치를 수 없도록 목숨 끊을 날을 정했다고 확신합니다. 심지어 호세는 자신의 지인이자 노라의 오랜 정신과 주치의가 노라와 불륜을 저질렀다는 증거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영화는 이렇게 노라의 장례를 억지로 치르는 호세가 결국 ‘자신을 향한 노라의 진심’과 ‘노라를 향한 자신의 진심’을 함께 깨닫는 과정을 그립니다.
위령 성월은 가까이 함께 지내며 자주 마주해서 익숙하게 다가오는 존재들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를 가다듬는 시기가 되어줍니다. 익숙한 존재들을 향한 그 익숙함이 상쇄되는 순간, 곧 사랑하는 이의 죽음을 경험하게 될 때 우리는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은 채 지내온 시간을 후회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영화 〈노라 없는 5일〉은 익숙하게 다가오는 존재들이 이 세상에 부재하게 될 때를 미리 떠올리며, 그들을 이전보다 더욱 소중하게 품어주고자 하는 다짐으로 우리를 이끌어줍니다.
[영화칼럼] 영화 ‘퍼펙트 데이즈’ - 2024년 작, 감독 ‘빔 벤더스’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
고(故) 정진석 추기경님이 은퇴하신 후 신학교에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하셨을 때, 강론 중에 신학생들에게 들려주신 이야기가 가슴 깊이 남아있습니다. 추기경님이 은퇴 후 처음으로 은퇴 사제 숙소의 신부님들과 함께 미사를 봉헌하시는데, 성전 벽면에 걸린 문구가 눈에 들어왔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 성인께서 하신 말씀으로, “사제여! 이 미사를 네 첫 미사처럼, 유일한 미사처럼, 최후의 미사처럼 봉헌하라.”는 내용입니다. 추기경님은 그 문구가 수십 년을 사제로 살아온 당신의 마음을 울리며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사제 생활을 해나가야겠다는 다짐으로 이끌어주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렇게 추기경님은 후배들이 훗날 사제로 살아갈 때 매일의 미사성제를 반복되는 일상이 아닌 매 순간 다른 방식으로 약동해 오는 은총으로 받아들일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퍼펙트 데이즈〉는 반복되는 것 같아 보이는 우리네 일상 안에서 ‘지금의 소중함’을 발견해 낼 수 있도록 일깨우는 작품입니다. 영화는 주인공 히라야마(야쿠쇼 코지 분)의 평범한 일상을 따라갑니다. 골목에서 들려오는 빗자루질 소리에 잠을 깨는 것으로 정갈하게 시작되는 그의 일상은 꽤 이상적으로 보입니다. 누군가는 허드렛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는 공용 화장실 청소 업무를 맡고 있지만, 그는 자신이 맡은 일에 진심을 다합니다. 점심시간에는 신사에서 점심을 먹으며 필름 카메라로 나뭇잎을 통과해 오는 빛을 담습니다. 일이 끝나면 집 근처 목욕탕에서 몸을 씻고, 돌아가는 길에 단골 선술집에서 끼니를 해결하며 한 잔의 하이볼을 곁들입니다. 그리고 잠들기 전 문고판 고전을 읽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다음 날, 히라야마는 다시 시작되는 하루를 다르지 않은 마음가짐으로 맞습니다. 동료 타카시(에모토 토키오 분)가 일터에 여자 친구를 데려오거나 오랫동안 보지 못했던 조카 니코(나카노 아리사 분)가 갑작스럽게 자신을 찾아온 상황과 같은 예상치 못한 변주가 발생하기도 하지만 히라야마는 이를 담담히 받아들이며, 이 또한 반복되듯 다가오는 일상과 마찬가지로 소중하고 유일한 순간으로 여깁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는 시점에 우리 사회는 일상의 소중함을 뼈저리게 체험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반복되듯 다가오는 우리네 일상이 하루아침에 다시는 찾아오지 못할 뻔한 사태를 경험하게 되면서, 일상 안에 속한 모든 것들을 우리는 전과는 달라진 시선으로 마주하게 됩니다. 더불어 우리 사회가 당연하게 누려온 가치가 순식간에 유린당하는 장면을 마주하며, 그가치를 이전보다 더욱 소중하고 각별한 마음으로 여기게 됩니다. 같은 날의 당연한 반복 같지만 매일을 다른 날로 인식하며 일상을 맞아들이는 영화 속 히라야마의 모습처럼 우리도 ‘당연함’이라는 늪에서 벗어나, 수많은 이들의 희생을 통해서 구축해 온 가치와 그 가치를 누리는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고 특별하게 여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희년 특집] 희망영화관 : 희망의 순례자
희년을 맞아 서울주보는 희망을 주제로 다양한 특집을 준비했습니다. ‘희망 영화관’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희망의 가치를 다양한 측면에서 풀어내는 코너입니다. 희망의 다양한 속성을 제시하고, 서사 안에 이를 잘 담아낸 영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이어집니다. 희망을 보여주는 영화와 함께 희년을 보내보시면 어떨까요?
- 〈말 없는 소녀〉 The Quiet Girl, 2022년작, 콤 베어리드 감독
아직은 이른 봄 인적이 드문 한강공원 물골에 다다랐을 때, 어두움 한가운데서 수변의 단구형 지형의 돌 위에 야광체의 두 눈을 가진 생명체와 정확히 눈이 마주쳤습니다. 수달이었습니다. 거대 도시 한 복판에서 1급수의 수질에서만 서식하는 수달을 만나리라고는 가히 상상도 못 했지만, 더 놀라운 것은 야생의 그 생명체가 도심의 저녁 산책을 즐기던 낯선 저와 눈이 마주치고는 바로 줄행랑을 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3초간의 시선의 교감이 이뤄진 후, 마치 자기가 갈 길을 가겠다는 듯이 수변으로 몸을 담그고는 유유히 사라져가는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옆에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이 경이로운 시선의 교감을 증거해 줄 목격자가 없다는 안타까움이 올라온 것은 그때였습니다. 그렇게 그날 저녁, 저는 사라져 가는 수달을 향해 가만히 서서 어떤 존재와 처음으로 ‘살아있음’에 대해 서로 경축하는 의미로 고요히 오른손을 치켜들고 가볍게 몇 번 인사하듯 흔들었습니다.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각자의 생명체에 마음을 다해 서로의 시선과 마주하려는 태도는 비록 저에게서는 우연한 일로 벌어진 선물이었지만, 어떤 이들은 이 ‘타자의 시선과의 응시’를 자기 삶의 가치로 여기기도 합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세계적인 작가인 클레어 키건(Clarie Keegan)의 원작 소설을 영화화한 아일랜드 영화 〈말 없는 소녀〉는 사순 시기를 보내는 우리에게 어떻게 타자와 시선을 교감해야 하는지 잘 알려주는 영화입니다. 우리는 주변에 자신의 목소리를 미처 갖지 못한 존재들을 가끔, 아니 자주 접하게 됩니다. 이렇듯 목소리를 갖지 못한 존재들은 대부분 유력하지 못하고 또한 그러기에 숨은 존재들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모두 재의 수요일 전례를 통해 복음으로 들었던 마태오복음 6장 18절의 말씀을 기억할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드러내 보이지 말고, 숨어 계신 네 아버지께 보여라.” ‘숨어계신’이라는 말은 원래 ‘봉인되다’라는 성경 원문의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봉인된 시선 가운데 머무시는 하느님을 찾는 행위의 첫걸음은 우리 시선에서 사라진 존재들과 마주함으로 시작될 수 있습니다.
영화 <말 없는 소녀>는 소녀의 시선으로 우리 주변에서 사라져 가는 존재들과 관계 회복을 꿈꾸게 해 줍니다. 아울러, 우리를 양육한 힘들이 단순히 가족이라는 생물학적인 관계를 훨씬 초과하여 우리 자신을 인격으로 키운 모든 존재들을 ‘아빠’라는 호명으로 새롭게 정립해 줍니다. 우리 자신에게 쏠린 시선을 열고 너무나 미약하고 작아서 눈에 띄지 않아 소홀하기 쉬운 숨어있는 존재들을 향해 우리의 시선을 나누어 주는 행위를 교회는 ‘자선’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 우리가 사순 시기를 살며 남을 돕는 행위는 우리의 자비심을 남에게 드러내는 행위를 넘어서서 봉인된 우리의 고결한 마음을 비로소 열어 타자에게로 시선을 향하게 되는 나아감입니다. 이렇게 타자를 향해 시선이 앞으로 나아갈 때 우리가 홀연히 마주하게 되는 어떤 숭고한 정신을 조우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나 아닌 존재에게서 느끼는 본연적인 설렘을 동반한 경이로운 열림, 희망 말입니다.
[희년 특집] 희망 영화관 : 프란치스코 교황 - 맨 오브 히스 워드
그날 오후 늦게 저는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선종 소식을 접했습니다. 누군가를 온전히 상실한다는 감각은 바삐 일상에 임하도록 강요받는 현대인들에게는 매우 낯선 감수성이기도 했거니와 저도 큰 차이가 없이 그저 먹먹함으로 잠시 가던 길을 멈추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다음 날에야 비로소 아주 소중한 내 마음속의 누군가를 상실했다는 슬픔에 빠질 수 있었습니다.
인간의 진실한 감각은 어떤 사태를 맞이했을 때 반응하는 감정으로 말미암아 평상시 그가 견지했던 그 대상과의 인격적 관계의 정도가 드러납니다. 전례력으로 부활 팔일 축제를 보내고 있을 무렵이었던 그날, 저는 어떤 ‘넘어섬’의 가닿을 수 없는 신앙을 경험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던”(루카 24,5) 그분의 제자들이 천사들의 선포로 “여기에 계시지 않는”(루카 24,6) 그분의 존재를 온 마음으로 벅차게 받아들인 그 사태가 파스카 신앙의 시발점이었듯이 저에게도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잃은 슬픔이 더 이상 ‘여기’에 머물게 하지 않고 무언가를 넘어서게 하는 신앙으로 저를 이끌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희망’이었습니다. 명확한 인간의 언어로 규정할 수 없는 그 신비스러운 신앙의 보고인 희망의 땅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간직했던 그의 말, 곧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인용한,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Spes Non Confundit).”(로마 5,5)라는 말씀에 고스란히 녹아 있습니다. 여전히 우리의 일상과 삶은 지긋지긋한 부조리와 점철된 삶의 고통으로 충분히 주눅 들어 있지만, 우리는 이 넘을 수 없어 보이는 경계를 넘어가도록 부르심을 받은 그리
스도인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등장하는 마르타는 더 이상 희망할 수 없는 상태로 죽음을 맞이한 라자로를 찾으신 예수님 앞에서 2천 년 교회의 역사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넘어서는 희망’을 노래한 분이십니다. “그러나 지금도 저는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주님께서 청하시는 것은 무엇이나 들어주신다는 사실을.”(요한 11,22;필자 직역)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삶은 마르타가 고백한 바로 이 언어, 이 말, ‘그러나 지금도’를 상기하게 합니다. 이 세상이 함부로 규정한 모든 경계를 넘어서서 반어적으로 그 경계를 부수고 지금 이 순간 도래하는 하느님 섭리와 은총을 신앙하는 태도가 우리 믿음의 전부라는 사실을 말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말씀을 가장 잘 다룬 영화는 독일 거장 빔 벤더스 감독의 <프란치스코 교황: 맨 오브 히스 워드>(2018년)입니다. 이 영화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우리 교회의 희망에 대해 이렇게 고백합니다. “세상으로부터 고립되어 자신의 안위에만 매달리느라 병든 교회보다는 가난한 거리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느라 멍들고, 상처 나고, 흙먼지에 더럽혀진 교회가 낫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잃었지만, 죽은 이들 가운데 그분을 찾는 것이 아닌, 희망 안에서 그분을 볼 수 있게 되었음을 함께 기뻐합니다. 그 희망은 우리를 재촉합니다. 우리가 선명하게 그어 놓은 어떤 안위의 경계를 넘어 ‘그러나 지금도’ 우리 자신을 향해 격려하러 오시는 성령을 기다리며 우리 자신이 누군가의 희망이 되어주는, 바로 그 희망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