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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26) 생명을 전달하는 신앙 영원한 생명의 전달은 계속된다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0|조회수39 목록 댓글 0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26) 생명을 전달하는 신앙

영원한 생명의 전달은 계속된다

 

지금 시대가 생명을 경시하고, 생명을 대상이자 도구로 대하는 지경에 이르렀지만, 보통 사람은 생명 앞에서 경외감, 압도감을 경험한다. 생명에는 놀라운 무언가가 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오직 선물로 주어진 것이라고밖에는 생명을 설명할 방법이 없다. 갓 태어난 아기 앞에서 마치 자기들이 직접 만들어낸 작품처럼 의기양양할 부모가 있을까? 부모는 자기들 능력을 훨씬 뛰어넘는 생명 전달의 놀라운 과정에 자기들이 속해 있음을 경험하며, 놀랍게 주어진 선물 앞에서 감격스러워하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의 힘이며 존엄함이다. 누구도 생명을 좌지우지할 수 없다. 생명은 인간의 손에 넣을 수 없고, 넣어서도 안 된다.

유전공학을 포함한 첨단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다고 할지라도 인간은 결코 생명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다만 생명 전달의 과정에 개입하거나 모방할 뿐. 인간은 창조주가 아니기 때문이다. 최근 놀라운 속도로 발전하는 인공지능 역시 스스로 생각하는 자율적인 생명체의 지능이라기보다는 인간의 지성을 모방하는 인공지능에 불과하다.

신앙의 전수는 생명이 전달되는 것과도 같다. 여기서 생명의 전달이란 말이 이상하게 들릴 수 있다. 생명은 물건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명이 태어나 자라고 성장하며 다른 생명을 낳고, 그런 방식으로 생명이 계속해서 전해지는 과정을 떠올린다면 생각이 달라지지 않을까. 한 세대가 지나고 새로운 세대로 넘어가는 과정은 놀랍다. 우리도 한 세대에 속해 있으며, 이 시대를 살고 나면, 우리 뒤를 이어 새로운 세대가 이 땅을, 이 문화를 이어받아 새로운 시대를 살아갈 것이다.

신앙 전수가 생명을 전달하는 것이라고 할 때, 여기서 말하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세례를 통해 새로운 하느님 자녀가 끊임없이 탄생하며, 영원한 생명은 그렇게 계속해서 전달된다. 세례를 통해 하느님의 자녀로 태어나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은, 죄악과 죽음의 현실에서 벗어나 영원한 생명을 산다는 의미다. 여기서 영원한 생명은 세례와 함께 완성품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의 삶과 개인의 삶을 통해 그 생명은 날이 갈수록 무르익는 것이며 삶에서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 영원한 생명의 탄생과 완숙, 그리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은 교회 안에 현존하시며 인간 삶에 새로운 창조를 가져다주시는 하느님의 힘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유아에게 세례를 준다는 것은 아기가 앞으로 성령의 보호 아래 살기를, 그리하여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는 것이기도 하다. 베네딕토 16세 교황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알 수 없는 미래 앞에서 아기에게 생물적 삶만 보장해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아이가 죄와 악, 죽음과 고통의 현실 속에서 생명과 사랑을 선택하여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살아갈 수 있도록, 은총에 따른 삶을 살아가도록 양육하고 동반하는 것은 교회와 부모의 중요한 책무다.

부모는 갓 태어난 아기를 두 팔로 받아 안으며 깊은 감동과 감사의 마음을 갖는다. 아이가 자기들 소유가 아니란 것을 알기 때문에 신비로운 생명 앞에서 압도감을 느낀다. 선물로 받은 아이를 하느님께 선물로 다시 봉헌하는 것, 아기가 영원한 생명을 향한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하느님께 청하는 것, 그것은 생명 앞에 압도된 인간의 가장 깊은 열망에 대한 응답이다. 현시대의 흐름에 반대되는 구시대적인 미신이 아니라, 오히려 선물처럼 주어진 생명의 존엄함과 위대함에 걸맞은 옷을 차려 입혀주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27) 생명 전달의 장소인 가정

생명이 나고 자라고 이어지는 가정

 

우리의 금쪽같은 신앙을 돌보고 자녀에게 전달하는 장소로서 가정은 무엇으로도 대체 불가한 성스러운 곳이다. 가정이야말로 육적인 생명만이 아닌 영원한 생명이 탄생하고 양육되며 전달되는 신비로운 장소이기 때문이다.

보편 교회는 제14차 세계주교시노드의 주제로 교회와 현대 세계에서의 가정의 소명과 사명을 택하였고, 전 세계 교회에 위기에 빠진 가정과 혼인의 중요성을 새롭게 일깨우고자 하였다. 주교시노드 후속 권고 사랑의 기쁨이 반포되었고, 2021년에는 반포 5주년을 맞아 사랑의 기쁨인 가정의 해를 보냈지만, 여전히 한국 사회와 교회 안의 가정 위기 현실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교회 내에서도 가정 사목에 대한 관심은 큰 변화가 보이지 않는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이 권고에서 혼인과 가정에 접근하는 새로운 길을 보여주셨다. 곧 가정과 혼인에 관한 이상적인 가르침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닌, 가정과 혼인의 구체적인 현실에서 출발하는 방법이다. 성경에 나오는 성가정에 대한 묘사는 매우 구체적이고 현실적이다. 사실 나자렛 성가정은 위기 가정이었다. 마리아가 성령으로 잉태한 사실이 드러나자 남편 요셉은 파혼하기로 작정하기까지 하였다.(마태 1,18-19 참조) 파라오의 위협을 피해 이집트로 도망까지 갔으며, 늘 위험과 폭력에 노출돼 있었다. 보편 교회가 그러한 성가정에 다시금 주목하는 이유는, 삶에서 닥쳐오는 도전이나 위기를 피하지 않고 신앙 안에서 정면으로 마주했기 때문이다. 성가정은 위기와 시련 속에서도 기도하는 가정이었으며, 늘 하느님 뜻을 찾으며 그분의 크신 계획에 자신을 맡기는 순례하는 가정이었던 것이다.

교회 역사를 볼 때 가정은 기도하는 곳, 전례가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초대 교회부터 가정을 중심으로 신자들이 모임을 가졌다. 또한 가정의 중요성은 쉼 없이 강조되었다. 그것은 가정이 신앙 돌봄과 전수를 위한 최적화된 장소이기 때문이다. 한국 교회도 다르지 않았다. 특히 박해를 피해 교우촌을 이루며 살던 시절, 가정은 신자들 모임의 장소였으며, 신앙 전수의 장으로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런 측면에서 가정은 단순히 장소의 의미를 넘어 교회적 차원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정은 작은 교회로서 신앙의 전수가 이뤄지고 선교의 출발점이 되는 곳이다. 가정 없이 교회는 존재할 수 없다. 교회는 가정을, 가정은 교회를 서로 필요로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앞의 문헌에서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가정의 또 다른 특성, 생명 전달의 자리’(사랑의 기쁨80~85)로서의 가정에 대해 강조하신다. 곧 가정이 생명이 잉태되고 태어나 보호받으며 신앙을 통해 완숙에 이르는 자리이며, 하느님 사랑의 도구요 창조와 구원 사업에서 중요한 주체라는 말씀이다.

한 생명이 탄생해 인격적 주체로 성장하며 새 생명을 탄생시키기까지의 전 과정은 놀랍고 신비롭다. 인간 스스로 해내거나 인위적으로 만들어낼 수 없는, 오직 하느님께서 인간을 통해 하시는 일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가정은 라는 인간이 태어나 삶을 시작하고 성장한 곳, 나약한 생명을 돌보고 양육시켜 자라게 한 곳, 그 생명이 떠나 새로운 생명을 위해 새로운 가정을 만들도록 한 곳이다.

가정은 그처럼 생명이 전달되며 하느님 창조 및 구원 사업이 실현되는 놀랍고 성스러운 곳이다. 그러한 놀라운 일이 가정에서 일어나기에, 가정은 거룩한 곳이며, 그 거룩함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교회와 가정에 맡겨진 사명일 것이다.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28) 생명을 전달하는 기쁨

생명을 열망 · 탄생 · 돌봄 · 포기하는 사명

 

생명 전달과 신앙 전수의 장으로서 가정이 차지하는 중차대한 역할을 설명하는 단어로, ‘제네러티비티(generativity, 생육성(生肉性)이라 번역)’가 있다.

이 단어는 프란치스코 교황께서 201412월 개최된 교황청 문화평의회(현 문화교육부) 총회에서 사용한 신조어다. 총회에 참석한 프랑수아 부스케 몬시뇰에 따르면 생육성은 생명 전달의 네 단계를 포함하는데, ‘열망, 탄생, 돌봄, 포기가 그것이다.(교황청 문화평의회, 여성문화: 평등과 차이, 92-109) “생명을 갖고자 열망하고, 생명을 세상에 탄생시키며, 생명을 돌보고, 그 생명이 떠나도록 내버려 둔다.” 부스케 몬시뇰은 이 생명 전달의 네 단계에는 각각을 넘어서는 무엇이 존재한다고 보는데, 그리스도 신앙은 거기서 하느님의 손길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생명 전달의 원리인 생육성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이며, 우리가 어떤 사랑의 결과인지 잘 설명해 준다. 우리는 놀랍고도 신비로운 생명 전달의 과정에 포함되어 있는 고귀한 존재들인 것이다. 우리는 그저 왔다 사라지는 우연적인 존재가 아닌, 위대한 사랑의 결과이며 필연적인 존재다. 그 사랑이란 생명을 그토록 열망하고, 그 생명을 세상에 낳고 보살피며 양육시키며, 그 생명이 떠나도록 포기하는 사랑, 바로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온 삶을 통해 보여주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이다.

이 모든 것은, 생명 전달의 과정을 하느님께서 축복하시고 창조와 구원의 장으로 삼으셨음을 의미한다. 생명은 그 자체로 하느님께 속하는 거룩하고 고귀한 것으로, 인간이 인위적으로 손을 대서는 안 된다. 생명 전달의 과정은 창조된 만물, 우주의 전 존재에 각인되어 있는 사랑의 법칙이며, 모든 인간 활동과 사고의 근본 전제이기도 하다. 인간은 선물인 생명 앞에서 경이로움을, 자신이 얼마나 소중한 동시에 나약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겸손하게 무릎을 꿇는 법을 배운다. 그리스도 신앙은 모든 생명이 하느님께로부터 선물로 주어졌음을, 인간은 그 선물을 보존하고 보살피며 전달할 사명을 부여받았음을 고백한다.

혼인과 가정의 기본 원리인 생육성은 교회 삶의 원리이기도 하다. 교회에서 일어나는 일은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과 흡사하다. 곧 생명을 열망하고, 생명이 탄생하고, 생명을 돌보고 생명이 떠나도록 놓아주는 일이 교회의 일이다. 신앙을 잉태하고, 낳고, 기르고, 양육하고, 돌보고, 가도록 놓아주어 새로운 신앙이 탄생하도록 인도하는 것은 교회가 지닌 모성(母性)을 실현하는 것이다. 생육성에 대한 자각은, 교회의 모성 회복이 오늘날 얼마나 시급한 과제인지를 인식하도록 한다. 이를 통해 영원한 생명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생명 전달 과정의 네 가지 요소는 가정의 교회성교회의 가정성을 회복시키도록 하며, 교회의 모든 활동이 생명 전달을 중심으로 행해지도록 안내한다. 곧 신자 개개인과 공동체 전체에게 생명을 향한 열망과 바람을 일깨우고, 선물로 주어진 생명을 세심한 배려로 돌보고 보살필 책무를 인식시키며, 스스로 길을 떠날 수 있도록 자율성을 함양하고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위해 자기를 포기하고 내어주는 삶을 살도록 한다. 그 모든 과정 안에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의 손길, 그리스도의 영이 활동하고 계시며,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도록 우리를 다그치신다.(2코린 5,14 참조) 이처럼 사랑으로 재촉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과 내적 친교를 이루며 하느님의 자비심을 닮고 온 삶으로 증언하는 것이 오늘 우리 교회에 맡겨진 사명일 것이다.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29)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하느님께 소중하디 소중한 존재, 인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만큼’. 부모가 사랑스러운 자식을 일컬을 때 종종 쓰는 말이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정도면 얼마나 사랑스럽다는 말인가!

성경에서도 그러한 표현을 발견할 수 있다. “네가 나의 눈에 값지고 소중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기 때문이다.”(이사 43,4) 공동번역 성경은 이를 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나의 귀염둥이, 나의 사랑이다라고 번역했다.

부모는 갓 태어난 아기를 두 팔로 받아 안으며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을 느낀다. 선물처럼 주어진 아기 앞에서 신비로움과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다. ‘어떻게 이런 아기가 나에게 태어났을까!’ 그러나 더욱 큰 신비는, 이 여리디여린 아기가 장차 부모와 대화를 나누고 친교를 이룰 인격적 주체로 성장한다는 점이다. 물론 긴 성장의 시간이 필요하고, 성장 과정에서 자녀가 부모를 적잖이 고통스럽게 하겠지만, 결국 자기 삶을 스스로 영위하고 책임질 성인이 된다. 사실 모든 이가 그런 과정을 거쳤으며, 아기를 키우는 과정에서 부모의 노고를 깨닫고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창조하시고 어떤 마음이 드셨을까? 성경에는 하느님께서 세상 모든 것을 창조하시고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을 좋아하셨다고 한다.(창세 1,1-31 참조) 동시에 하느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을 후회하시는 대목이 등장한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의 악이 세상에 많아지고, 그들 마음의 모든 생각과 뜻이 언제나 악하기만 한 것을 보시고, 세상에 사람을 만드신 것을 후회하시며 마음 아파하셨다.”(창세 6,5-6)

사람들을 땅 위에서 쓸어버리겠다고 결심하시고 홍수를 일으키시기까지 하신다. 그러나 이내 뉘우치시고 사람 때문에 땅을 저주하지 않고 파멸치 않으시리라 다짐하신다. 무지개는 하느님께서 노아와 맺으신 계약의 표지다.(창세 89) 인간이란 악하고 나약해서 때로는 하느님의 마음을 상하게도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런 인간을 파멸하지 않으시고 계약을 맺으심으로써 성숙한 존재로 성장하도록 인간을 돌보시며 양육하신다.

롬므, 메르베유 드 디유(L’homme, merveille de Dieu)’. 이는 프랑스의 저명한 신학자 베르나르 세스부에가 자신의 저서에 붙인 제목으로, 번역하자면 하느님께 경이로운 존재인 인간이라는 뜻이다. 롬므, 메르베유 드 디유! 하느님께서 보고 경탄할 만큼 소중한 존재인 인간! 카스퍼 추기경님도 성탄 강론집에서 대 레오 교황님의 뒤를 이어 말씀하신다. “인간아, 그대의 품위를 깨달으라.”

그리스도 신앙은 인간을 하느님의 모습대로(imago Dei) 창조된 존재로 고백한다. 이는 인간이 하느님을 알고 사랑하여 그분 생명에 참여하도록 부름을 받은 자유로운 인격적 존재임을 의미한다.

그리스도 신앙이 온 인류를 향해 전하는 기쁜 소식은, 인간이 그토록 경이롭고 고귀한 존재라는 사실이며, 더더욱 기쁜 소식은 인간과 친교를 나누기 위해 하느님께서 직접 인간이 되어 오셨다는 사실이다. 하느님께서 무한한 거리를 뛰어넘어 인간의 역사 안으로 들어오셨다. 단순히 우리들 사이로 들어오신 것이 아니라, 우리와 하나가 되셨다. 당신의 생명을 우리와 나누시기 위해, 우리와 함께 걸으며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향한 탈출기를 써나가기 위해서 말이다. 하느님께 경이로운 존재인 인간, 그것은 하느님의 눈에 비친 우리의 본래 모습이며, 우리가 일생을 통해 찾아가야 할 우리의 미래 모습이기도 하다. 신앙은 그 아름답고 위대한 길로 우리를 초대하는 이정표다.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30) 하느님과의 숨바꼭질

아기 예수 찾아내기와 가난한 마음

 

화려한 성탄 장식으로 물든 도시와 거리로 나선 수많은 인파, 성당과 교회에 모여 미사와 예배에 참여하며 축하를 나누는 신자들, 그리고 화려한 도시의 축제 그늘에서 외롭고 쓸쓸한 밤을 지내는 사람들, 어두운 길가에서 추운 겨울밤을 지새울 걱정을 하는 노숙인들. 매년 성탄 때 우리 눈앞에 펼쳐지는 대조되는 풍경이다.

우리는 기쁜 얼굴로 서로에게 성탄을 축하하며 인사를 건네지만, 성탄의 깊은 의미는 헤아리지 못한 채 지나치는 경우가 많다. 우리에게 성탄의 의미는 무엇이며, 우리는 왜 성탄을 축하해야 하는가?

성탄은 모든 이의 축제다. 누구에게나 성탄이 축제인 이유는, 성탄이라는 소식이 우리 안에 늘 어떤 희망을 솟아오르게 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 희망이 아주 밝은 빛이든 저 멀리 캄캄한 밤을 거슬러 조금씩 밝아오는 여명과 같은 것이든 상관없이 말이다. 바로 거기에 성탄의 힘이 있지 않을까.

성탄은 사람을 가리지 않는다. 성탄의 빛은 오히려 가난하고 소외된 이의 어두운 삶에 더 희망차게 비친다. 그것은 성탄이 화려한 도시 속에서가 아닌, 출산을 코앞에 두고 여행길에 오른, 여관방도 구하지 못한 가난한 신혼부부가 밤을 보내야 했던 어둡고 누추한 마구간에서 일어났기 때문일 것이다.

성탄은 우리의 시선을 베들레헴의 마구간, 구유에 누운 한 아기를 향하도록 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찾아오셨다. 어둡고 탁한 인간 삶에 희망을 주시기 위하여 아주 작고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오셨다. 여기에는 두 개의 의미심장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하나는 하느님께서 가난한 아기 안에 숨어 계신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가 찾아야만 그분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탄은 숨바꼭질이다. 인간을 찾아오신 하느님, 그리고 그분을 찾아 나서는 인간에 관한 이야기다. 우리 각자의 이야기이며 모든 이의 이야기다. 복음서에 따르면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을 가장 먼저 발견한 이는 종교인이나 학자가 아닌, 밤을 새워 양 떼를 지키는 목자들, 동방에서 별을 쫓아 길을 나선 이방인들이었다.

이러한 정황은 우리의 하느님 관념을 완전히 뒤바꾸어 버린다. 하느님은 겸손하신 분, 작은 아기의 모습으로 오신 분이시다. 당신 것을 모두 버리시고 우리와 똑같이 되신 분이시다. 그렇기에 쉽게 발견되지 않으신다. 하느님께서 화려한 궁전이 아닌 구유 속 아기 안에 숨어 계신 이유는 우리가 당신을 찾도록, 그리고 그분을 발견할 수 있는 가난한 마음을 갖도록 하기 위해서다. 동방의 박사들이나 목자들처럼 가난한 이라야 마구간의 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다.

우린 과연 그러한 하느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는가? 하느님께서는 동방의 박사들이나 목자들에게 먼저 당신의 모습을 드러내셨다. 그들은 찾는 사람, 깨어 밤을 지키는 사람이었다. 우리가 아직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우리가 엉뚱한 곳에서 그분을 찾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의 생각과 기대를 완전히 벗어난 곳으로 오셨는데, 우리는 그분을 익숙한 곳에서만 찾고 있었는지 모른다. 어쩌면 세상일에 파묻혀서 찾지조차 않았는지도 모른다. 혹은 다른 것에 눈이 팔려 우리가 찾는 중이라는 사실을 잊었는지도 모른다.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우리를 찾아오신 하느님을 찾아 길을 나서라는 것, 그 길에서 가난을 배우고 구유의 예수님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발견하라는 것, 그리고 주위의 가난한 이들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하라는 것, 이것이 성탄이 오늘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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