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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칼럼] 여러분은 어떤 어른인가요? 어떤 어른이 되고 싶나요?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0|조회수47 목록 댓글 0

[도서칼럼] 여러분은 어떤 어른인가요? 어떤 어른이 되고 싶나요?

 

지난 2015, 초등학교 4학년 어린이가 쓴 동시집으로 세간이 떠들썩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 동시집 안에 실린 한 편의 시가 문제가 되었는데, 학원에 가기 싫은 어린이의 심경을 매우 직설적이면서도 기이하게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이 시는 기성 언론들에서 일명 잔혹 동시라고 불리게 됩니다. 이로 인하여 인터넷상에서는 동시집을 낸 어린이와 어린이의 부모에게 온갖 나쁜 말들이 쏟아지게 됩니다. 심지어 일부 종교 단체에서는 동시집를 향해 사탄의 영이 지배하는 책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이 같은 부정적인 여론으로 결국 동시집은 전량 수거되어 폐기되고 맙니다.

얼마 후, 한 일간지의 논설 위원이 쓴 기고문에 이 시를 두둔하는 내용이 실립니다. “처음엔 섬뜩했고. 제정신인가 싶기도 했지만30년도 더 지난 어린 시절을 떠올려 보니 소녀의 마음이 궁금해졌다.”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논설 위원은 시를 쓴 어린이의 마음을 헤아려보니, 어른들을 끔찍이도 싫어했던 자신의 소녀 시절이 떠올랐다고 고백합니다. 또 학원에 가는 것이 너무나도 싫은 어린이의 마음이 느껴져 끔찍해 보였던 시가 슬프게 다가왔고, 시를 쓴 어린이를 향한 미안한 마음이 밀려왔다고도 말합니다.

지난 2021년에 출간되어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은 책 어린이라는 세계를 쓴 김소영 작가의 신간 어떤 어른, 어린이와 함께 동시대를 살아가는 어른의 자리를 살피고 어린이가 또 한 사람의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 필요한 어른의 역할을 탐색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작가는 우리가 보통 어린이와 어른의 관계를 생각할 때 흔히 미성숙한 어린이를 지켜보는 어른의 모습을 떠올리기 쉽지만, 사실 어린이 역시 어른을 보고 있음을 상기합니다. 그렇게 어른을 보면서 세상이 어떤 곳인지 배우고, 세상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궁리하며 성장해 가는 것이 어린이가 하는 일임을 알려줍니다. 이러한 과정을 기억하고 짐작하며 기다려주고 존중해줄 수 있는 어른이라면 어떤 어른이어도 좋다고 작가는 말하며, 어린이에게 필요한 다양한 어른들의 모습을 책을 읽는 독자들이 떠올려볼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이처럼 어떤 어른은 우리 사회의 어른들이 민식이법을 악용하여 장난을 치는 극히 일부의 어린이들을 두고 민식이법을 부당한 법으로 여기는 어른이기보다 어른들의 부주의함으로 교통사고를 당하는 어린이들을 향한 안타까운 마음을 지닐 줄 아는 어른, 지금 당장의 편리함에 집착하는 어른이 아닌 미래 세대인 어린이들을 현재의 동료 시민으로 여기며 그들이 누리게 될 미래를 위해 기꺼이 일상 속 불편함을 감수할 줄 아는 어른, 어른의 마음으로 쉽게 이해되지 않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긴 호흡으로 헤아려볼 줄 아는 어른, 일상 안에서 자신을 향한 어린이들의 시선에 신경을 쓰는 어른, 어린이들의 모습 안에 숨겨진 자신의 어린 시절 모습을 포착해 낼 줄 아는 어른으로 거듭날 것을 요청합니다.

 

 

[도서 칼럼] 시류를 거스를 줄 아는 용기

 

체 게바라의 스물세 살 의대생 시절 모습을 담은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2004)는 세기의 혁명가 체 게바라가 혁명에 몸담기 이전 시기를 조명한 작품으로, 그가 대학생 시절에 겪은 여행을 통해서 세상을 마주하는 시선이 어떻게 변화해 가는지 인간적으로 그려냅니다. 평범한 대학생이었던 체 게바라가, 못 본 척 지나칠 수 없었던 거대한 시류를 마주한 뒤에 군복을 입고 수염을 기른 혁명가의 모습으로 거듭나게 된 이유를 영화는 보여줍니다.

김훈 작가의 소설 하얼빈은 영화 <모터사이클 다이어리>가 청년 체 게바라를 마주하는 시선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청년 안중근을 그리며, 그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기 위해 하얼빈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차근차근 뒤따릅니다. 이러한 뒤따름은 김훈 작가가 역사 속 실존 인물이며 동시에 자신의 이전 소설들 속 주인공이었던 청년 이순신청년 황사영등에게 이미 보인 시선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소설 하얼빈은 감당하기 어려운 시대의 거대한 흐름을, 두렵지만 결의에 찬 심경으로 마주하는 청년의 모습으로 안중근을 그립니다. 무엇보다 시대를 벗어나면 평범한 모습이었을 청년 안중근에게 있어서 시대와 실존 간 가장 큰 충돌이 벌어진 강렬했을 며칠간의 일들을 선명하게 재구성합니다.

특별히 소설 안에서 작가의 또 다른 소설 흑산의 주인공이자 역사 속 실존 인물인 황사영을 소설 속 안중근과 비교한 대목이 인상적입니다.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할 당시 조선대목구장이었던 뮈텔 주교는 안중근의 거사를 이해하지 못하는 대표적인 인물로 등장합니다. 천주교가 박해를 받던 시기에 종교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 서구 열강에 도움을 요청하려다가 발각되어 처형당한 황사영이 남긴 보자기 글을 훗날 번역한 뮈텔 주교의 모습은, 교회의 만류에 국가 앞에서 종교도 없다.’라는 신념하에 교회 밖에서 이토를 죽인 안중근의 모습과 대비되어 등장합니다. 여기서 소설은 황사영은 국가를 제거하려다가 죽임을 당했고, 안중근은 국가를 회복하려고 남을 죽이고 저도 죽게 되었는데, 뮈텔은 이 젊은이들의 운명을 가로막고 있는 국가를 가엾이 여겼다. 황사영에서 안중근에 이르는 백 년 동안 두 젊은이의 국가는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갔다.”라고 말하며, 청년 안중근을 시대에 종속된 젊은이로서 자신이 시대에 종속되어 있음을 스스로 깨닫고 그 종속된 처지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발버둥 치는 모습으로 그립니다.

이처럼 소설 속 청년 안중근의 모습은 각자가 속한 시대의 흐름에 정면으로 맞서는 모든 청년들을 대변하며, 시대의 아픔을 바라볼 여유를 갖추기 힘든 사회적 분위기 속에 놓인 청년 세대의 심경을 헤아립니다. 보이지 않는 길을 찾아내기 위해 악전고투하고, 때로는 시류와 타협하여 가치관과 신념을 버릴 것을 요구받기도 하는 우리 시대의 청년들에게 작가는 소설 속 안중근을 통해서 용기를 불어넣어주며 동시에 기성세대로서 느끼는 안쓰러움과 부끄러움을 고백합니다.

 

 

[도서 칼럼] 의심을 자양분으로 삼은 믿음

 

교황의 갑작스러운 선종 이후 벌어지는 교황 선거를 그린 가상의 이야기를 담은 어느 소설의 한 대목입니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추기경단의 단장이 교황 선거를 앞두고 봉헌되는 미사를 집전하며, 준비한 원고 대신 자신의 마음에서 즉흥적으로 우러나온 이야기를 강론으로 전합니다.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에 봉사하는 동안, 제가 무엇보다 두려워하는 죄는 바로 확신입니다. 확신은 통합의 강력한 적입니다. 확신은 포용의 치명적인 적입니다. 그리스도조차 종국에는 확신을 두려워하지 않았던가요? “‘저의 하느님, 저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셨습니까?’ 십자가에서 9시간을 매달리신 후 고통 속에서 그렇게 외쳤죠. 우리 신앙이 살아 있는 까닭은 정확히 의심과 손을 잡고 걷기 때문입니다. 오로지 확신만 있고 의심이 없다면 신비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물론 신앙도 필요가 없겠죠. 의심하는 교황님을 보내주십사, 주님께 기도합시다. 바로 그 의심 덕분에 가톨릭 신앙은 계속해서 생명을 얻고, 그로써 전 세계에 영감을 줄 것입니다.”

비교종교학 교수인 찰스 킴볼의 저서 종교가 사악해질 때는 오늘날 종교가 쉽게 빠질 수 있는 오류와 함정을 날카롭게 지적하며, 종교가 사악해지는 다섯 가지 징후에 대해 다룹니다. 우선 첫 번째 위험신호는 자기들만이 절대적인 진리를 알고 있다고 주장하는 현상입니다. 이 과정에서 경전의 오용과 악용이 빈번히 일어납니다. 둘째, 맹목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현상이 발생합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스스로 생각하려는 노력을 멈출 때, 종교 지도자가 사람들의 합리적인 의문을 억누를 때 커다란 위험이 생겨납니다. 셋째, 이상적인 시대를 확립하려는 태도가 나타납니다. 물론 희망적인 미래에 대한 욕구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종교가 추구해야 할 지향점입니다. 하지만 이상을 편협하게 정의하고 세상의 흐름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방식만으로 이루려는 이들에 대해서는 경계해야 합니다. 넷째, 모든 수단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종교적 목표를 실현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숭고한 목적만을 강조하며 모든 수단을 정당화한다면 이미 타락한 종교에 접어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종교의 이름으로 전쟁을 선포하는 현상입니다. 이는 국제 뉴스를 통해 보도되는 전쟁뿐만 아니라 작금의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하느님의 이름으로 거짓된 확신을 펼치고 나와 다른 신념이나 성향을 지닌 이들을 향한 혐오를 조장하는 일부 그리스도인들의 태도에도 해당됩니다.

너희와 많은 이들’, 곧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세상 모든 이들을 위해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의지를 마음에 새길 때, 우리는 의심을 자양분으로 삼은 믿음을 지향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한 믿음이 우리 신앙의 근간을 이룰 때, 예수님께서 바라는 모습의 건강한 신앙공동체를 일굴 수 있습니다. 종교가 사악해질 때에 담긴 오늘날 종교를 향한 날카로운 진단을, 신앙공동체에 몸담은 우리 각자를 향한 진단으로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도서 칼럼] 결여의 지위, 도서 사이보그가 되다

 

지난 2021420, 41회 장애인의 날을 맞아 서울시는 장애인을 대상으로 무료 콜택시를 운행했습니다. 비슷한 시기에 한 서울시장 후보는 장애인들의 버스 요금 무료 공약을 내세웠습니다. 하지만 공약의 대상자인 장애인들은 오히려 무료 콜택시 운행과 무료 버스 공약에 우려와 유감을 표했습니다. 장애인을 위한 저상버스 도입율이 낮아 설령 버스 요금을 내지 않더라도 장애인이 탈 수 있는 버스가 몇 대 없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실이고, 또 무료 콜택시 운행은 흡사 놀이 공원 무료입장처럼 지극히 시혜적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비단 행정상의 문제만이 아닌,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엄격하게 구분 짓는 우리 사회의 병폐 어린 시선과 맞닿아 있어 보입니다.

김초엽 작가와 김원영 변호사가 함께 쓴 사이보그가 되다는 장애인을 비롯한, 우리 사회가 씌운 소수자라는 굴레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에 대한 심도 있는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후천적 청각장애인으로 살아온 김초엽 작가와 골형성부전증을 앓아 휠체어를 타고 지내야 하는 김원형 변호사가 장애인으로서 우리 사회에서 겪은 여러 경험과 체험을 골자로 삼기에 사이보그가 되다에 등장하는 여러 사례와 예시, 인용과 주장은 밀도와 신뢰가 높아집니다.

무엇보다 장애인에게 장밋빛 미래를 약속하는 과학 기술을 향한 작가들의 중립적인 태도와, 보청기와 휠체어에 의지하는 저자 자신들의 모습이 로봇팔이나 인공눈 등에 의지하게 될 미래의 사이보그와 진배없다는 진단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옵니다. 더불어 장애인을 대상으로 한 미래의 과학 기술과 의료 기술이 철저히 비장애인의 시선으로 그려지고 있는 현실과 장애인을 향한 보통의 사회적 편견이 일맥상통한다는 점을 알려줌으로써, 비장애인으로 별다른 부딪힘 없이 일상을 매끄럽게 살아가는 이들이 자신들이 누리는 매끄러움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도록 이끕니다. 장애인들의 장애를 극복과 치료의 대상으로만 바라보는 세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장애인으로 살아가는 사이보그가 되다의 두 저자는 평생을 안고 살아온 장애가 단순히 비극과 절망으로 점철되지 않음을 알리며, 장애가 결여와 결핍의 영역이 아닌 키와 몸무게와 같은 일상적인 신체적 차이와 다르지 않을 수 있음을 일깨웁니다.

김원영 변호사는 책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예수님이 일어나 걸어라.’라고 말하지 않고, ‘걷지 않아도 좋으니(네 방식대로) 당당히 일어나라.’라고 말했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이처럼 사이보그가 되다는 장애인들을 비롯한 우리 시대의 소수자들이 자신의 방식대로 당당히 일어설 수 있는 세상을 꿈꾸며 모든 사람이 유능해 보이는 세계보다 취약한 존재가 자신의 모습대로 살아가도 무방한 사회, ‘어떠한 손상도 존재하지 않게 만드는 미래보다는 고통받고 손상된 몸도 동등하게 환대받을 수 있는 현재가 더 해방적임을 일깨우고자 합니다.

 

[도서칼럼] ‘희망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이름입니다

 

신학생 시절, 철학을 가르치셨던 교수 신부님께 들은 이야기입니다. 신부님이 독일 뮌헨에서 유학 중이셨을 때, 전 세계적으로 불어닥친 미국발 경제 위기로 독일 사회도 어수선했다고 합니다. 이 같은 위기 상황을 상세히 진단하고 해결해 나갈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프로그램이 국영방송을 통해 일주일에 한 차례씩 방영되었습니다. 4주에 걸쳐 구성된 이 프로그램은 각 주마다 각계 전문가 한 명이 출연하여 자신이 몸담은 분야의 시각으로 당시의 경제 위기를 분석하고 해결 방안을 모색하는 내용을 담았다고 합니다. 첫 주 차에는 애널리스트가, 둘째 주 차에는 경제학 박사가, 셋째 주 차에는 심리학자가 출연하여 각자의 방식으로 경제 위기를 극복해 나갈 방법을 모색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 주 차에는 놀랍게도 당시의 뮌헨교구 대주교님께서 출연하여 영적인 맥락에서 경제 위기 상황을 분석하셨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세속화가 심화되고 교회의 영향력이 줄어든 독일 사회가, 그럼에도 결정적인 사회문제를 두고서 최후의 조언을 교회에서 듣고자 하는 의지를 보인 것이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독일 사회가 교회의 목소리를 듣고자 하는 것을 통해, 영향력이나 유명세, 외적인 규모와 같은 부분을 두고 교회를 판단하지 않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덧붙이셨습니다. 아마도 신부님은, 세속과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세간의 눈길을 끄는 교회나 지극히 개인적인 능력을 과시하는 방식으로 자신을 드러내는 성직자의 모습보다는 시대적 징표에 대해 깊이 숙고하고 스스로를 진지하게 성찰하는 교회와 성직자들의 모습이, 희망이 희미해진 세상으로 하여금 교회를 찾게 한다는 점을 후배들에게 일깨우고 싶으셨던 것 같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자서전 희망의 원제목은 희망하라는 의미의 라틴어 ‘Spera’입니다. 교황님이 당신의 전 생애를 통해 일깨우시고자 했던 희망은 어떻게든 괜찮아지겠지.’라는 식의 낙관주의와는 차원이 다릅니다. 교황님께서 말씀하셨던 희망은 괜찮지 않다고 드러나는 것들도 재해석할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현실의 무게를 받아들이고 희망적이지 못한 상황을 버티고 견디면서, 가능하다면 다른 이들에게도 도움이 될 수 있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님은 할아버지가 들려주는 옛날 이야기마냥 다소곳이 희망을 이야기하시지 않습니다. 교황님은 희망을 사치처럼 여기거나 공허한 메아리로 치부해 버리는 우리 시대를 향해 지금 당장 희망하라!”고 명령하듯 외치셨습니다. 이러한 차원에서 희망을 품기 어려운 시기에 독일 사회가 교회를 최후의 보루로 여긴 모습은 자서전 희망에 담긴 희망하라.”는 교황님의 제언과 맞물려 작금의 교회가 가슴 깊이 새겨야 할 하나의 징표처럼 다가옵니다.

안미옥 시인은 희망을 모서리가 깨진 서랍장을 이사 때마다 버리지 못하고 끌고 가는 것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세상이 낡고 부질없다 치부해 버린 희망을 끝까지 품으며 포기하지 않고 끌고 온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노고를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도서칼럼] ‘유난에 희망을 두는 사회

 

다큐멘터리 영화 고양이들의 아파트는 재건축을 앞둔 대형 아파트 단지를 터전으로 삼은 길고양이들의 모습과 함께, 재건축이 시행되기 전에 길고양이들을 안전한 곳으로 이주시키려는 봉사자들과 활동가들의 모습을 담습니다. 영화는 수많은 사람들이 떠나간 거대한 공간을 비춤으로써 재건축을 맹목적으로 조장하도록 이끄는 한국 사회를 향한 날카로운 시선을 보여줌과 동시에 도시 안에서 살아가는 야생 동물들을 향한 인간들의 무관심과 무지함을 꼬집습니다. 그리고 무지함과 무관심을 뛰어넘는 봉사자들과 활동가들의 모습에 영화는 희망을 겁니다.

특별히 영화 속 봉사자들과 활동가들의 모습은 유난이라는 표현을 떠오르게 합니다. 보통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기 쉬운 유난이, 이제는 무언가 정체되어 있어 보이는 곳에 생기를 돋우는 활력소와 같은 의미로 활용될 수 있어 보입니다. 누군가는 길고양이들을 이주시키는 일을 유난 떤다는 식으로 폄훼할 수 있습니다. 길고양이들을 이주시키기 위해 사용되는 비용으로 차라리 어려운 이웃을 돕는 것이 더 낫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작은 것들을 위한 관심과 노력이 전제되지 않은 사회는, 그 누구도 존중해주지 못하는 사회일 공산이 큽니다. 그렇게 아파트 대단지의 재건축과 맞물린 길고양이들의 이주 프로젝트는 유난을 존중하고 유난에서 힘을 얻는 사회를 희망하도록 이끕니다.

최재천 교수와 최재천의 아마존유튜브 채널을 기획 · 제작하는 팀 아마존이 함께 쓴 양심을 읽으며 유난의 의미를 되새기게 됩니다. 양심이 담고 있는, 과학자이자 동시에 환경운동가이며 양심에 귀 기울이는 시민의 한 사람으로서 최재천 교수가 보인 모습들은 모두 유난으로 귀결됩니다. 4대강 사업에 반대하는 입장을 내며 환경단체에 힘을 실어주던 최재천 교수에게 당시 정부는 정치적 메시지를 내는 유난스러운 과학자라는 프레임을 씌우듯 그의 연구 예산을 삭감했습니다. 남방큰돌고래를 제주 바다로 돌려보내는 데 앞장선 최재천 교수를 향해 초기 여론은 왜 그런 프로젝트에 막대한 돈과 시간을 들이는 유난을 떠냐는 식으로 판단했습니다. 호주제 폐지에 힘을 실었던 최재천 교수에게 호주제 폐지를 반대하던 남성들은, 남자가 왜 여성의 편에 서서 유난을 떠느냐고 손가락질했습니다.

이처럼 양심에 담긴 최재천 교수의 지난 행보는, 우리 역시도 불편함을 감수하며 세상을 더 나은 방식으로 바꾸기 위한 노력을 기울일 수 있다는 용기를 북돋웁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복음 속 예수님이 유난과 밀접한 삶의 모습을 보이셨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회적 약자들의 서서 하느님 나라가 도래하였음을 선포하셨고, 모두가 손가락질하는 죄인들에게 먼저 손을 내미셨던 예수님의 모습은 세상의 모든 유난을 대변합니다. 무릇 그리스도인이라면 유난을 대변하고 유난으로 상징되는 복음 속 예수님의 삶, 곧 양심의 소리에 귀 기울이는 삶을 살아내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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