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 특집] 희망 영화관 : 완벽한 날들(Perfect Days)
그날, 저는 화진포호가 아름답게 펼쳐진 고성 습지로 향했습니다. 그곳에 다다랐을 때, 생명체를 만나러 가는 오래간만의 설렘이 올라왔습니다. 생명은 유희의 대상으로서의 관람이나 구경이 아니라, 신학자 스킬레벡스가 표현했듯이, 어떤 ‘궁극적인 만남’과도 같습니다. 고귀한 생명 현상을 보유한 그 생명체가 세상에 현현했을 때 우리 존재가 그 생명과 만나는 유일한 태도는 겸손과 존중이기 때문입니다. 마침내 각시수련 앞에 섰을 때, 그 모습은 생명체 안에 깃든 하느님의 섭리를 어떤 완벽한 아름다움으로 경험하게 해 주었는데, 그 모습이 화려하거나 찬란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꽃이 있다.’라는 단순한 진실이 그 어떤 아름다움을 추월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대지 안에 깃든 하느님의 지극히 겸손하고 고결한 총체적 조절의 기운이 이 수련을 무에서 유로 수려하게 각조했을 시간이 느껴졌습니다. ‘지금 내 눈 앞에 펼쳐진, 하느님께서 관할하시는 총체적 이 대지의 거룩한 운용의 법칙이 나에게 발견됨으로써 궁극적인 만남이 가능해진 것이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하느님의 존재가 화진포 호숫가에서 바람처럼, 불고 싶은 대로 불어왔고, 순간 아름다운 흰색의 자그마한 수련 잎새가 가녀리게 흔들렸습니다. 그러자 청록의 연잎에 드리운 그 수련 꽃잎의 흔들림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수련의 그림자가 연잎 위에서 가만히 떨렸습니다. 저는 분명히 그 떨림의 흔적들을 목격했고 모든 생명은 이렇듯이 세상에서 고유하게 흔들릴 수밖에 없는 존재이지만, 그러기에 고유한 그들의 모습이 지상에 불완전한 채로 반영되어 그들의 흔적을 남기고 가뭇없이 사라지는 것이 삶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자신만의 고유한 떨림을 남깁니다. 우리는 모두 빛이신 하느님의 지상의 반영이라는 생각이 든 것은 바로 그때였습니다.
빔 벤더스 감독의 작품 <퍼펙트 데이즈>는 시부야의 청소부 히라야마라는 주인공이 경험하는 ‘궁극적 만남’의 과정을 세밀화처럼 아름답게 그려낸 수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에서 히라야마는 그 일상이 수몰시킨 소중한 만남의 감각들을 떨리는 잎새들의 빛의 반영에서 경험하게 됩니다. 일상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미려하게 드러나는 겸손한 사태들을 태양 빛에 떨리는 나뭇잎들의 빛의 반영을 통해 목도하며 주인공 히라야마는 경이의 한복판으로 다가가 드디어 생명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주님의 기도를 통해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라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한 가르침을 듣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아버지의 나라’는 영토나 소유권 전유를 뜻하는 소버린(sovereign)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어떤 거룩한 질서감을 향한 다스림(governing)의 형태를 의미합니다. 아버지의 다스림은 통치의 형태로 드러나기보다 각시수련의 겸손하고 소박한 모습에서 완벽한 날들을 꿈꿀 수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 않게, 하지만 끊임없이 당신의 경이에 참여하라고 격려하시는 가운데 마침내 우리로 하여금 당신과의 ‘궁극적 만남’에 이르리라고 약속하시는 희망의 다스림입니다.
[희년 특집] 희망 영화관 : 땅에 쓰는 시(다큐멘터리, 2024)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선자령에 오른 것은 지난여름 작은 내 마음의 어떤 비움이 비로소 가능해졌을 때 맑고 선한 얼굴로 내 마음에 다녀가신 그분 자취에 대한 그리움 때문이었습니다. 가까스로 땀에 젖은 몸을 수습하고 허기를 달래려 준비해 간 도시락 덮개를 열어 옆 풀섶에 놓아두려는 무렵 발견한 것은 강원도 고산지대의 여름 야생화인 제비동자꽃이었습니다. 제비의 꼬리 깃처럼 매끈하게 갈라진 붉은 꽃잎이 특징인 제비동자꽃은 희귀 야생화여서 허기도 잊은 채 한참을 쳐다 보았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제 시야에 들어온 제비동자꽃 군락의 야생화 밭은 마치 대지의 흙이 땅에 써내려간 시처럼 아름답고 고결하며 동시에,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 풍경을 선물해 주고 있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부자와 라자로의 이야기가 등장하는데 가난한 사람이었던 라자로는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것으로 배를 채우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루카복음에서 ‘간절히 바라는’ 대목은 15장 16절에 그 유명한 두 아들의 비유에서 다시 등장하는데 모두 ‘간절히 바라지만 이루어지지 않는’ 상황을 묘사합니다. 성경에서 ‘간절히’라는 단어는 우리의 온 정신과 영혼이 어느 한 방향으로 깊은 몰입을 가져올 때 발생하는 어떤 현재를 극복하려는 거룩한 전 과정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치 선자령 산마루에서 만난 대지가 흙 위에 쓴 시처럼 여름 야생화의 제비동자꽃 그 아름다움을 땅 위에 당신의 피조물 안에서 그분 스스로를 현현할 때 하느님께서 피조물에 당신 기운을 집중하셨듯이 말입니다. 다큐멘터리 영화 <땅에 쓰는 시>는 이러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도시인들을 위해 우리 민족의 슬기로운 자연관을 고스란히 담은 ‘차경(借景;경치를 빌린다)’의 개념을 들여와 우리 눈 앞에서 대자연의 신비 안에 깃든 하느님 자취를 느끼게 해주는 한국식 정원의 정수를 보여주는 영화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가꾸어야 할 정원은 우리가 실기해 잃어버린 낙원의 하느님 나라에 대한 간절함을 상기하게 해주는 좋은 은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영화 속 주인공은 우리나라 1세대 조경사로서, 이 조경사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옛 선현의 정신을 자신의 정원 가꾸기의 철학으로 삼았다고 합니다. 곧, “검소하나 누추하지 아니하고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儉而不陋 華而不侈)” 덕 말입니다. 백제의 미라고도 알려진 바로 이 절제의 균형은 앞서 언급한 ‘간절함’으로 가능합니다. 우리 정신이, 우리 마음이, 그리고 우리 온 영혼이 한 방향으로 몰입되어 그 방향이 하느님께로 마침내 정향될 때 생기는 정제된 정신의 간절함은 우리 마음의 대지 위에 마침내 땅 위에 쓴 시처럼 꽃을 피워낼 텐데 그 마음의 꽃이 바로 오늘 복음에서 라자로가 간절히 바랐던 ‘구원’입니다. 선자령 제비동자꽃을 보고 내려오는 순간, 파울 첼란의 시가 생각난 것은 우연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빛이 있었다
그것은 구원.
- 파울 첼란 <언제가> 중 -
[희년 특집] 희망 영화관 : 세계의 주인(2025년 작, 윤가은 감독)
삶에서 때론 지금의 나를 있게 해준 미쳐 알 수 없었던 나를 향한 지지와 연대가 삶의 희망이라는 미래로 선명하게 드러나 과거의 나를 딛고 조금씩 나를 살아가게 합니다. 그리고 이 희망은 나 홀로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닌, 내가 미처 모르는 관계의 선량한 연대를 통해 이루어졌음을 믿게 합니다. 그날 저는 삼나무가 빼곡히 들어선 숲에 있었습니다. 최근 읽었던 루카복음 18장의 ‘세리의 기도’ 부분이 가슴 깊이 전달되어 그 엄청난 의미를 깨닫게 된 것은 바로 그때였습니다. 은총은 영혼이 준비할 틈 밖에서 시작되는 것이 틀림없다는 듯 저는 그 숲 한가운데에서 무언가를 내려놓은 채로 가만히 멈추어 서서 지금 내 마음의 준비 외곽에서 몹시도 부끄럽게 밀려오는 화해의 손짓을 감지하고 있었습니다. 사실, 방금 내려놓은 것은 나의 어느 한 부분이 아니라, 나 자신 자체였던 까닭이기에 죄스런 이 존재 전체의 어떤 원초적인 부끄러움이 사실상, 하느님 구원의 빛 아니고서는 회복될 수 없다는 간절함을 품고 있었던 까닭입니다. 저는 숲 한가운데에서 하느님을 불렀습니다. “오 하느님! 이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루카 18,13) 인간의 죄가 하느님 앞에서 겸손되이 통회될 때 은총은 풍성함으로도 모자라 넘쳐 흐르듯 영혼을 감격하게 합니다. 이 감격의 결정체는 바로 용서이며 화해입니다. 오늘은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입니다. 우리가 오늘 들은 루카복음 23장의 내용은 하느님의 모습으로 오신 예수님의 가장 처절한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도저히 우리들이 임금, 혹은 왕으로 부르기에는 비참한 그 모습으로 십자나무 아래에 달려 계신 그분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모두들 그분을 빈정거리고 조롱하며 비웃고 업신여깁니다. 그분의 왕홀과 그분의 권위와 그분의 왕으로 오심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들 세계 한 복판으로 오시는 것입니다. 이렇듯 한 해의 전례력을 마감하는 오늘, 그분께서 왕으로 오시는 방식은 그 직전에 고통을 통과해야 하는 우리 신앙인의 불가피한 원형의 전례를 말해 줍니다. 곧 고통을 통한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일치라는 인류 모두의 아름다운 신앙고백인 것입니다. 이와 어울리듯 오늘 소개할 영화는 최근에 개봉한 영화인 윤가은 감독의 <세계의 주인>이라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는 하느님께서 상처받은 이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는 방식이 우리 인간들의 ‘진정한 연대’에 기반한다는 사실을 매우 담담하게 역설하고 있습니다. 어느 고등학교 안에서 여러 친구들에게 성격 좋은 인싸로 통하며 대개 그 또래가 그러하듯이 연애가 가장 큰 관심사인 열여덟 ‘이주인’이 이 영화의 주인공 입니다. 이 영화는 한 존재의 화해 과정이 어떻게 공동체의 연대와 돌봄으로 가능한지를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공동체의 연대는 우리 교회 공동체의 오랜 전통이고 시노달리타스의 핵심인 것입니다.
[K톨릭: 뮤지컬] 소란한 시대에 남겨진 말씀
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 연출 박한근 | 작·작사 김하진 | 작곡·음악감독 문혜성
뮤지컬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는 서로 다른 시대를 살아가는 두 인물이 ‘책’이라는 매개를 통해 대화를 나누는 이야기입니다. 한 인물은 일제 강점기에 이름을 드러낼 수 없는 작가로 살아가며, 연애소설이라는 형식을 빌려 자유를 기록합니다. 다른 한 인물은 1980년대, 거리의 폭력과 상실을 겪은 뒤 침묵 속에 머물러 있는 청년입니다. 이들은 직접 만나지 못합니다. 다만 한 권의 책 위에 남겨진 문장과 질문, 그리고 그에 대한 답을 통해 서로의 오늘과 내일을 건너갑니다.
이 작품에서 음악은 신스팝을 중심으로 구성되었습니다. 전통적으로 시대극에서 기대되는 어쿠스틱 사운드 대신, 전자음과 반복적인 리듬을 선택한 것은 단순한 장르적 실험이 아니었습니다. 신스팝의 소리는 특정 시대에 고정되지 않고, 과거와 미래의 경계를 넘나드는 성격이 있습니다. 저는 이 점이 신앙의 시간성과 깊이 맞닿아 있다고 느꼈습니다. 반복되는 비트와 선율은, 인물들이 던지는 질문들이 하루아침에 해결되지 않음을 음악적으로 드러냅니다. 그것은 마치 묵주기도처럼, 같은 기도를 되뇌며 하루를 건너가는 리듬과도 닮아 있습니다.
작품의 마지막으로 갈수록 인물들은 ‘결말’을 알게 됩니다. 실패로 기록된 역사, 사라진 이름들, 돌아오지 못한 사람들. 그럼에도 이야기는 묻습니다. 그렇다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옳았는가. 실패가 예정되어 있다면, 시작하지 않는 것이 더 지혜로운 선택이었는가. 이 질문 앞에서 저는 신앙이 언제나 요구해 온 용기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성공을 보장받아서가 아니라, 옳다고 믿기에 끝내 걸어가는 용기입니다.
가톨릭 신앙은 언제나 부활을 말하지만, 동시에 성토요일의 침묵을 견디는 신앙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끝난 것처럼 보이는 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는 밤을 지나야만 부활의 아침에 이를 수 있습니다. 〈소란스러운 나의 서림에서〉 속 인물들이 끝내 서로를 완전히 만나지 못하더라도, 그들의 말과 선택이 다음 시간을 향해 남겨진다는 사실은 바로 이 성토요일의 신앙을 떠올리게 합니다.
소란스러운 시대에도, 아니 오히려 소란스러운 시대이기에 우리는 다시 책을 펼치고 문장을 남깁니다. 오늘의 기도와 오늘의 선택이 누군가의 내일이 되리라는 믿음으로. 그것이 이 작품이 제게 건넨 신앙의 초대였고, 지금 우리가 함께 나누고 싶은 한국 교회 신앙의 한 모습이라 믿습니다.
[K톨릭: 뮤지컬] 두려운 미래 앞에서 한 발을 내딛는 믿음
뮤지컬 〈A여고 사서의 영광과 비극〉 대본·가사 한재은 | 작곡 박현숙
뮤지컬 〈A여고 사서의 영광과 비극〉(대본·가사 한재은, 작곡 박현숙)은 1993년, 한 여자 고등학교의 반지하 도서관을 배경으로 네 명의 도서부 학생들이 겪는 이야기입니다. 도서부장 명경은 예지몽을 꾸는 아이입니다. 꿈에서 본 불길한 장면들 때문에 늘 불안에 사로잡혀 소풍도, 수학여행도 가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 명경에게 어느 날 존경하던 문학 선생님이 갑자기 사라지고, 도서관에 금서가 남겨지면서 예상치 못한 사건이 시작됩니다.
원래 방공호였던 이 반지하 도서관은 안전하지만 빛이 제한된 폐쇄의 공간입니다. 넘버 〈A여고 도서관〉에서 아이들은 노래합니다. “책을 읽다 저녁 햇살을 보면, 궁금해져. 이 지하 바깥, 찬란한 세상이.” 명경에게 이 지하는 불안으로부터의 피난처이지만, 동시에 세상과 단절된 감옥이기도 합니다. 미래를 미리 본다는 것은 두려움을 미리 겪는 것이기에, 명경은 오늘을 살지 못한 채 아직 오지 않은 비극 속에 갇혀 있습니다. 상상 속의 실패와 아직 오지 않은 상실 앞에서 발이 묶이는 명경의 모습은 우리 자신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작품은 명경을 혼자 두지 않습니다. 이 작품의 음악은 여성 4중창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가장 중요한 결정과 감정은 언제나 함께 부르는 노래 안에서 일어납니다. 저는 이 합창의 형식에서 전례 안의 공동 기도를 떠올렸습니다. 미사 중 우리가 함께 소리 내어 응답하고 함께 성가를 부르는 것은, 홀로는 약한 믿음이 여럿의 목소리 안에서 굳건해지는 체험입니다. 나의 기도가 형제자매의 기도와 하나 될 때 더 먼 곳까지 닿을 수 있다는 것을, 이 네 사람의 합창이 무대 위에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작품의 끝에서 명경은 고백합니다. “나쁜 꿈을 꾸었다면, 다시 좋은 꿈을 꾸면 돼.” 그리고 “앞으로 삶에 비극이 온다 해도, 우리가 이루어낸 영광의 순간을 기억하겠어.”라고 다짐합니다. 비극이 없으리라는 낙관이 아니라, 비극 속에서도 영광의 기억을 붙들겠다는 결단. 이것이 바로 우리 그리스도인의 희망이 아닐까 합니다. 십자가의 고통을 지나 부활에 이르신 주님을 따르는 우리는, 삶의 어둠 속에서도 이미 경험한 하느님의 선하심을 기억하며 다음 걸음을 내딛습니다. 반지하에 갇혀 있던 명경이 문을 열고 세상으로 걸어 나가듯, 우리도 각자의 두려움을 넘어 더 넓은 세상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