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영성] “비바람이 지나가니 폭풍우가 몰아치네~”
얼마 전 수도 공동체 형제들과 함께 연피정을 하던 중, 식사를 마치고 계단을 오르는데 어느 선배 수사님이 옆에서 저에게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비바람이 지나가니, 폭풍우가 몰아치지~” 무슨 말씀인가 하고 수사님 얼굴을 쳐다보니, “안셀모 신부의 부산 분원 소임이 비바람처럼 힘들었을 텐데, 이제 새로 맡은 본원장 소임은 폭풍우처럼 더 힘들지”라는 의미라고 설명을 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순간 가슴에 뭔가 뭉클한 것이 북받쳐 오면서 눈물이 쏟아져 나올 뻔했습니다. 그것은 위로받는 느낌, 이해받는 느낌이었습니다. ‘내가 힘들다는 것을 말하지 않아도 형제들은 이미 알고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 수사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미소 지으며 이렇게 질문을 했습니다. “수사님, 그럼 폭풍우 다음에는 무엇이 오나요?” 그 수사님은 털털한 웃음과 함께 “산 넘어 산이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폭풍우 다음에는 ‘따뜻하고 시원한 날들이 이어질 것’이라는 말을 기대했는데, ‘산 넘어 산이라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그런데 피정 중에 가만히 그 수사님의 말씀을 곰곰이 묵상하면서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나는 지금 과연 힘든가?’ ‘지금 나의 삶은 폭풍우처럼 그렇게 무섭게 휘몰아치고 있는가?’ 그렇지 않은 것 같았습니다. 사실 외적으로 볼 때 해야 할 일, 신경 써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공동체와 수도 형제들을 돌보는 일뿐만 아니라 각종 원고와 피정 지도, 강의, 면담, 대외적인 역할 등 하루하루가 분주한 날들이지만 이 모든 일들이 힘들고 고달프게 만들지 않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매일 수도원의 규칙에 따라 기도하고 일하는 공동체의 삶은 마음의 평화를 가져다주고 있습니다. 다양한 형제들이 함께 살아가지만 모두가 아름답게 보이고 고마운 마음이 생겨납니다. 일이 많지만 할 수 있는 만큼만 합니다.
예전에도 지금처럼 많은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때는 참 힘들었습니다. 아마 그 원인은 ‘하느님의 일을 내가 한다’고 여겼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느님의 일을 예수님과 함께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다 못하는 일은 성령께 맡겨 드리자’는 마음으로 하루하루 살아갑니다. 그리고 수도원의 일과가 끝나면 꼭 휴식의 시간을 갖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일이 순조롭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힘든 사건이나 사람들이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하실 수 있도록 주님의 때를 기다리며 조용히 기도합니다. 자신의 의견이 완벽하지도 않고 자신의 삶이 완전한 모범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겸손하게 다른 이를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사랑하려고 노력합니다. 결국 그 모든 시련은 더 큰 사랑으로 건너가기 위한 도구요, 우리를 성장시키는 삶의 여정 가운데 하나일 뿐인 것 같습니다. 근원적인 문제는 집착인 것 같습니다. ‘내 뜻’을 버리고 포기하기 시작하면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자유로워집니다. 그리고 마음을 비우고 고요히 주님 십자가 앞에 머물면 주님의 영이 마음 안에 평화를 심어 주십니다. 참으로 놀라운 신비입니다.
한편 저는 그 수사님의 “비바람이 지나가니 폭풍우가 몰아치지~”라는 말을 통해 ‘다른 사람을 위로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상대의 마음이 되어 주는 것, 상대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주는 것이 어떤 해결책을 제시해 주는 것보다 더 큰 위로가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참 많이 힘드셨겠어요.” “얼마나 힘드셨으면…” 때로는 아무 말 없이 함께 울어 주고 손을 잡아 주는 것도 큰 위로가 될 것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며, 그리고 지난 2년 반 동안 마산교구 주보 연재를 마무리하며, 하느님의 위로와 한결같은 사랑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부족한 글을 읽어 주시고 공감해 주신 많은 마산교구 교우 여러분께도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우리 삶에 비바람이 몰아치던, 폭풍우가 닥쳐오고 산 넘어 산처럼 막막해 오더라도 아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과 함께라면 그 어떤 것도 다 이겨 낼 수 있고 그 어떤 시련도 다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주님께서는 우리를 꼬옥 안아 주시며 “많이 힘들었제! 내 니 마음 다 안다”라고 어깨를 토닥토닥해 주시며 위로해 주심을 느낍니다. 예수님께서 세상 끝날까지 변함없이 지금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힘든 마음, 억울한 마음, 서러운 마음 모두 다 주님께 맡겨 드리고 더 큰 선으로 인도해 주시는 주님의 섭리를 믿고 오늘도 묵묵히 말없이 사랑하며 기쁨과 감사로 살아가는 우리 마산교구 교우들이 되시길 빕니다. 아멘.
[현대 영성] 깨어 기다림은 사랑하고 있음이다
‘기다림’이라는 주제로 묵상을 하던 중 저는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를 앞두고 부모님을 기다리던 때가 떠올랐습니다. 당시 부모님께서는 시골에서 할아버지, 할머니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시며 사셨고, 장남을 공부시키기 위해 도시에 사시던 이모님 댁으로 저를 보내셨습니다. 시골 촌놈이었던 저는 초등학교 때 도시로 전학을 왔고, 나름대로 도시 친구들과 잘 어울렸습니다. 그리고 합주부에 들어가 악기 연주도 하게 되었는데, 마침 운동회 때 근사한 합주부 복장을 하고 행렬을 하며 연주를 하게 되었습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그리고 부모님께 자랑스런 저의 모습을 보여드릴 마음으로 운동회날이 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운동회 바로 전날 어머님께서 ‘도무지 시간이 되지 않아 운동회에 올 수 없다’는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어린 마음에 부모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나름대로 열심히 준비하고 오시기를 손꼽아 기다렸는데, 부모님께서 오시지 못한다는 말을 듣고 너무나 실망이 컸습니다. 그날 저녁 방문을 잠그고 홀로 책상에 엎드려서 엉엉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혼자서 쓸쓸하게 운동회에 참석하면서, 부모님과 함께하는 친구들을 바라보며 제 처지가 참 서럽게 느껴졌습니다. 운동회를 마치고 홀로 이모님 댁으로 터덜터덜 걸어오면서, “그래, 나는 혼자다. 나는 홀로 살아야 한다. 그리고 다시는 울지 말자”라고 다짐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그러나 지금 그 시절을 다시 되돌아보면 추수철이라 바쁜 때였을 뿐 아니라 뇌졸중으로 쓰러진 할머니를 모시고 시골에서 살아가시는 부모님 역시 아들에게 오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하신 상황이 이해되고, 부모님을 원망했던 제가 참 속이 좁았구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세월이 흘러 이제야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했던 마음이 점점 넓어져 다른 사람의 입장도 생각하게 되고, 오히려 부모님의 더 큰 사랑을 헤아리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느님을 향한 우리의 신앙도 더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나를 위한 하느님’에서 ‘하느님을 위한 나’로 변화되어 하느님의 더 큰 사랑을 닮아 가는 여정인 듯합니다. 그래서 주님의 성탄을 기다리는 대림 시기는 우리 신앙을 더 깊게 하여 ‘나 중심에서 하느님 중심으로’ 생각하며 구체적인 사랑을 실천하는 시기라는 생각이 듭니다. 내가 간절히 기다리는 것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여, 다시 말해 내 뜻대로 다른 사람이나 심지어 하느님께서 행동하지 않으신다고 하여 원망하거나 불신하기보다는, 더 큰 마음, 더 큰 사랑을 하기를 바라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것이 대림절을 잘 보내는 길일 것입니다. 또한 이미 우리 곁에 오신 주님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를 방해하는 것들을 정화하는 시기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사랑의 나눔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께서 참된 믿음과 사랑을 강조하셨고, 사도 야고보 성인께서는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하셨듯이, 우리는 이 대림 시기 동안 믿음으로 더욱 주님과 가까워지고 사랑의 실천으로 이웃과 더 가까워져야 할 것입니다.
독일의 신비가 요한네스 타울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세 번 이루어집니다. 첫 번째는 천지 창조 이전 아버지에 의한 영원으로부터의 탄생, 두 번째는 2000년 전 베들레헴에서의 탄생 그리고 마지막 세 번째 탄생은 하느님의 모든 날, 바로 우리의 작고 여린 영혼 안에서의 탄생입니다.” 그렇습니다! 대림 시기가 우리에게 작년과 같이 후회스러운 시간이 되지 않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태어나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태어나심을 잘 준비하기 위해서는 산모가 뱃속의 아기를 위해 온갖 정성을 다 쏟듯이 우리의 마음을 주님께 집중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께 집중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깨어 준비하는 자세를 지녀야 합니다. 깨어 있다는 말은 단순히 잠을 자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종말, 즉 세상의 마지막 날이 언제일지 모르니, 지금부터 주님이 오실 것을 준비하고 그분의 뜻을 충실히 따르는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마지막은 먼 훗날의 일이 아닙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계신 주님의 오심은 바로 지금 오늘 우리 가운데 일어나는 일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곁에 항상 오시는 주님을 어떻게 깨어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사랑이신 주님을 깨어 맞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사랑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있을 때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 가운데 그분을 만나는 길은 ‘그분처럼 사랑할 때’이며, ‘사랑하고 있음’ 그것은 바로 그분을 만나고 있음이요 그것은 ‘깨어 그분을 기다리고 있음’과 같은 것입니다.
[현대 영성] 종말은 마지막이 아니라 구원의 시작이다
교회 전례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시기에 우리는 세상 종말에 대한 말씀을 자주 듣고 있습니다. 종말은 두 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나의 죽음으로 세상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것과 예수님이 다시 오시는 세상의 마지막에 대한 것이 바로 종말론(eschatology)입니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계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마지막이라는 말은 시간 안에 있는 우리 인간의 관점과 다릅니다. 하느님께는 항상 현재만 있기 때문에 지금 여기에서의 현재가 곧 마지막이기도 한 것입니다. 여기서 다음 설명을 위해 한 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내용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종말의 시대가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2000년 전 역사의 예수(Historical Jesus)께서 부활하셔서 우주적 그리스도(Cosmic Christ)가 되심으로써 이제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지금 여기 우리 각자에게 선포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시작된 종말은 믿는 이들에게는 구원의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객관적인 구원’이라고 합니다. 다시 말해 예수님의 부활로 우리 모두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구원을 충만히 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직 나의 구원이 완성이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주관적인 구원’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면서 해야 할 것은 바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이미 주어진 구원을 지금 여기에서부터 사는 법을 배우는 것입니다. 복음서의 다른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가 어디에 있다”고 말씀하셨습니까? “우리 가운데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루카 17,21). 이미 우리 가운데 있는 하느님 나라를 사는 법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나의 사랑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예수님과 같이 나를 내어 주는 사랑을 배우고 나누며 하느님의 사랑이 되어 갈 때 우리의 구원, 우리의 종말이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종말이라는 말은 세상이 끝난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다스림이 시작되었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구원이 우리 가운데 성취되었다는 말이며 우리는 모두 구원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구원이라는 말은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과 함께 그분 안에 일치하여 영원히 산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구원이 이미 시작되었다면 왜 세상에는 여전히 고통이 있고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과 기근과 재해가 여전히 존재합니까”라고 말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신다면 왜 죄 없이 죽어가는 많은 이들을 외면하는 것인가요?”라고 말입니다. 그런데 이 질문에 답을 하기 위해서 이런 질문을 던져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생각하시는 고통과 우리 인간이 생각하는 고통이 같은 것일까요?” “하느님께서 당신 아드님을 사랑하신다면 왜 십자가의 죽음 앞에 침묵하셨을까요?” “그리고 나는 지금 고통받는 이들을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요?” 성경의 많은 구절에 “하느님의 생각은 우리보다 크시다”라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보다 더 크신 분이시고 더 큰 사랑을 하시는 분이시기에 우리의 고통을 외면하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우리가 보기에는 고통스럽게 느껴지지만 그것을 통해 더 성장하여 하느님의 그 자비와 사랑의 마음 안으로 들어오시길 섭리하고 계신 것입니다. 죄 없는 이들의 죽음이 우리 눈에는 부조리하게 보이지만, 하느님께서 그들을 위해 마련해 놓으신 더 큰 은총을 우리는 헤아리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겪고 있는 고통과 전쟁과 재해는 하느님께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우리 인간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저질러 놓은 죄의 결과이며 선의 결핍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또다시 “왜 하느님께서 개입하셔서 그것을 조정하시지 않고 악인들의 자유의지를 꺾지 않으시는가?” 질문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로봇이 아닙니다. 악인도 선인도 모두 끝까지 기다려 주시는 하느님의 자비를 기억해야 합니다. 사도 베드로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 어떤 이들은 미루신다고 생각하지만 주님께서는 약속을 미루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여러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무도 멸망하지 않고 모두 회개하기를 바라시기 때문입니다.”(2베드 3,8-9) 부족하고, 이기적이고, 변덕스럽고, 죄 많은 우리 모두가 회개하여 당신 사랑 안에 살기를 기다리고 계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침묵은 자비입니다.
[현대 영성] 내가 죽고 나면 나를 기억해 줄 사람이 얼마나 될까?
2018년 11월 프란치스코 성인의 성지인 이탈리아 아씨시에 다녀온 적이 있습니다. 이곳을 방문하는 수많은 순례자들의 행렬을 보고 깜짝 놀랐으며, 수백 년이 지났지만 성인은 사람들 사이에서 잊혀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더 그분을 통해 예수님을 본받고자 하는 제자들이 늘어가고 있다는 사실에 다시금 놀랐습니다. 그런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가 죽고 수백 년, 아니 수십 년 후, 과연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를 기억할까?’ 함께했던 수도 형제들 마저 죽고 나면 역사의 무수한 사람들처럼 그렇게 잊혀지고 말 것입니다. 참으로 허무하고 보잘것없는 인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하느님께도 그러하실까요? 성인이 되고 교황이나 주교가 되어야 사람들과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억해 주실까요? 하느님께서 성인들을 특별히 불러 주시고 기적의 은총을 주시지만, 아무것도 아닌 우리는 그저 외면하고 계신 것일까요? 우리를 잊고 계실까요? 우리 인생은 아침 이슬처럼 한낮의 태양빛 아래 사라지고 마는 것일까요?
그때 문득 예전에 생태학(Ecology)을 배울 때 교수님께서 설명해 주셨던 대우주(Macro-cosmos)와 소우주(Micro-cosmos)의 개념이 떠올랐습니다. 하느님의 대우주는 우리 각자의 소우주와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삶의 소우주는 태어나 죽을 때까지 그리고 죽음 후 영원한 삶에 이르기까지 하느님께서 당신 영을 통해 직접 돌보고 계십니다. 각 사람의 소우주를 돌보는 하느님께서는 대우주를 관장하실 뿐 아니라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로운 방법으로 모든 다른 사람의 소우주, 그리고 모든 피조물의 소우주를 연결시켜 주십니다. 성인은 더 많게, 우리는 더 적게 연결된 것이 아니라, 각자의 그 몫으로 충만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나의 일상의 작은 소우주 안의 모든 삶을 주님께서 기억해 주시고 인도해 주시고 사랑을 베풀어 주시며 당신의 대우주와 연결시켜 주고 계신 것입니다. 10달란트와 1달란트가 우리 눈에는 차이로 보이지만, 하느님 눈에는 그렇지 않습니다. 성인이 됨은 하느님의 대우주를 보다 널리 알리기 위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역할’을 수행하는 것일 뿐, 우리 모두는 우리 인간의 방식이나 인간의 생각을 넘어 하느님의 방식으로 대우주에 참여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두를 소중히 기억하고 사랑해 주시며 우리 모두가 당신의 대우주를 우리 각자의 소우주 안에 전하기를 바라시며 우리를 초대해 주신 것입니다. 그분의 이 부르심에 우리 각자가 자신의 여건 안에서 사랑으로 기꺼이 응답할 때 우리 역시 성인들처럼 하느님의 대우주를 세상에 전하는 도구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부터 사람들에게 기억되는 성인이 되기를 원하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선택함으로써 그분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성인의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매일매일의 나의 소우주 안에서 주님의 사랑을 선택할 때 나의 삶 안에서 크신 주님을 만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 보시기에는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우리의 몫을 다 한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 각자가 지금 살고 있는 삶의 영역이 크든 작든 서로 다를지라도 그곳이 바로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는 소우주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삶의 모든 영역이 바로 교회요, 그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의 삶을 배우는 곳이요, 그곳이 하느님에게는 모두 소중하고 고귀한 나와 주님만의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서 만나는 사람들 모두가 나에게 주어진 소우주요 그 활동 범위가 넓든 좁든 하느님께는 모두가 다 똑같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아침에 온 일꾼이나 오후 늦게 온 일꾼이나 똑같이 한 데나리온의 품삯을 주시는 분이십니다(마태 20,1-16). 가진 것 중 일부를 봉헌하며 생색내는 부자보다 그 금액은 적지만 전적으로 주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봉헌하는 그 과부의 작은 헌금이 더 크다고 하시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십니다(루카 21,1-4). 역사에 위대한 업적을 남기고 이름을 남긴 이들만이 가치로운 것이 아니라, 우리 각자 한 명 한 명을 주님께서는 모두 소중하게 생각하십니다. 그래서 지금 나의 삶의 자리에 대해 후회보다는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잔소리하는 아내, 무심한 남편, 저 멀리 가버린 듯한 자녀들, 다람쥐 쳇바퀴 돌듯 매일 똑같은 삶인 듯하지만, 이곳이 바로 주님께서 나에게 주신 세상이요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유일하고 귀한 삶이라는 것을 기억했으면 합니다. 사람들이 나를 기억하지 않는 것에 마음 쓸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나를 기억해 주심에 감사하며 영적인 눈을 뜨고 깨어나는 삶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현대 영성] 내 마음속 작은 겨자씨를 자라게 하는 방법
미국 뉴저지의 한 식당에서 7년간 일해 온 리즈 우드워드(Liz Woodward)라는 여성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아침에 화재 진압을 마치고 돌아온 두 소방관을 손님으로 맞게 됩니다. 음식을 차리던 중 우연히 지난밤 화재 진압을 위해 12시간 동안 화마와 사투를 벌인 두 소방관의 이야기를 듣게 되고 고마운 마음으로 영수증에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두 분의 아침 값을 제가 대신 계산할게요. 모두가 도망쳐 나오는 곳으로 뛰어 들어가 사람들을 구하는 당신들에게 정말 감사합니다. 두 분은 용감하고 든든한 분들입니다. 오늘은 푹 쉬세요!” 소방관들은 이 따뜻한 쪽지 이야기를 페이스 북에 올렸습니다. 이 식당에 간다면 그녀에게 많은 팁을 부탁한다는 말과 함께…. 그런데 얼마 뒤 소방관들에게 선행을 베푼 여종업원 리즈가 사실은 진짜 도움이 필요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에게는 사지 마비 환자인 아버지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녀는 아버지를 위해 휠체어를 실을 수 있는 승합차를 구입하기 위한 기부금을 모으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사실이 알려지자 단 하루 만에 53,000달러가 모였다고 합니다. 그녀의 작은 선행이 불러온 이 놀라운 기적에 대해 리즈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저의 부모님은 작은 도움이라도 누군가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항상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누군가를 도울 기회가 온다면 그들을 도우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단지 힘든 소방관들의 미소를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결국 부모님의 작은 가르침이 자녀와 다른 사람들을 거쳐 자신에게 되돌아온 것입니다. 마치 복음서에 나오는 작은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처럼, 작은 사랑의 나눔이 큰 열매가 된 것입니다. 이 이야기와 겨자씨의 비유를 통해 묵상한 것을 여러분과 나눕니다.
작고 어린 아기였던 나의 아들, 딸들이 이제는 나보다 더 크고 힘 있는 어른이 되어 어머니를 도와줍니다. 이 아기가 언제 자라나 싶었지만, 어느새 훌쩍 자라 이제는 힘 없는 부모를 지켜 줍니다. 이렇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자녀들이 자라듯이, 우리 마음속에 주님께서 심어 주신 사랑의 씨앗이 조금씩 조금씩 자라납니다. 하지만, 내 욕심 때문에 모진 시련과 아픔을 견디어 내며 상처 가운데 자란 아이가 있듯이, 내 욕심 때문에 내 맘속에 심어진 사랑의 씨앗은 성장을 멈추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쉼 없는 은총의 비는 우리의 욕심을 잠재우고 메마른 우리 마음을 촉촉이 적셔줍니다. 내가 가졌던 것들이, 내가 이루고자 했던 것들이, 심지어 주님의 이름으로 했던 많은 일들이 나를 위한 일이었음을 깨닫는 순간, 내가 무너지는 그 순간, 주님 앞에 아무것도 아니었던 나를 변함없이 지켜봐 주시고 사랑해 주시는 ‘당신’을 만나게 됩니다.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와 함께했던 당신을 만나는 순간, 내 안에 가득했던 어둠은 환한 빛으로 밝혀지고, 텅 빈 그곳은 사랑으로 충만해집니다. 내가 아니라, 당신의 사랑이 내 안에서 꽃 피고, 풍성한 열매가 되어 사람들 사이에 전해집니다. 아무런 말이 없어도 나를 사랑하시는 당신이 느껴집니다. 아무런 변화가 없는 듯해도 그것 역시 나에게 필요함을 깨닫게 됩니다.
견디어 내고, 버텨야만 했던 시간이 이제는 그저 은혜로움으로 가득한 일상이 되었습니다. 아프고 억울했던 시간들이 이제는 모두 필요한 시간이었음을 깨닫게 됩니다. 함께 웃고, 함께 울며,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든 순간들이 충만한 사랑입니다. 좁고 메마른 제 맘속에 심어진 당신의 사랑이 그렇게 당신 안에서 온 우주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제 마음에 심어 주신 사랑의 겨자씨는 결국 당신이셨습니다. 당신의 십자가 위에서의 죽음이 겨자씨가 되어 우리 모두를 참된 생명의 삶으로 인도해 주셨듯이, 제가 당신 안에서 죽는 순간, 당신의 겨자씨는 자라 무성한 사랑의 나무가 되어 사람들이 그 가지에 깃들이게 됩니다. 이제야 깨달았습니다. 제 마음이 바로 하늘나라의 시작이었음을! 당신께서 겨자씨 되어 제 마음에 들어와, 제 마음이 바로 하늘이 되게 하셨음을! 이제 제가 겨자씨 되어 충만한 당신의 사랑을 살게 하소서. 주님, 저의 작은 미소가, 저의 작은 선행이, 저의 작은 기도가 그리고 저의 작은 내적 변화가 바로 당신 나라의 시작이 되게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