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의 삶] 변화된 삶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영성생활은 기쁘고 행복한 생활이지만 때로는 자신 안의 갈등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기도 하고 어둔 밤처럼 어려움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주님과 함께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정화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편한 삶을 선택하고, 사회 속에 살다보니 남들과 비교하면서 더 좋은 것을 가꾸며 누리기를 원합니다. 명예, 권력, 재산과 같은 욕심은 조금만 방심하면 금방 마음 한 구석에 자리를 틀고 앉아 버립니다. 이렇게 끊임없는 유혹 속에서 마음을 순수하고 깨끗하게 유지하는 것은 참으로 힘이 듭니다. 자기도 모르게 점점 세속화되어 판단의 기준도 모호해질 때가 있습니다. 아무리 윤리의식을 잘 지니고 있다하더라도 마음 한 구석에는 자신만을 위한 이기심, 욕심이 자라고 있어 잘못된 판단을 하곤 합니다.
자신의 영성이 뛰어나다고 생각할 때는 더 큰 유혹이 찾아오기도 합니다. 그것은 바로 교만입니다. 교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합니다. 교만하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하더라도 깊은 곳에 자리한 교만은 조금씩 주님에게서 멀어지게 합니다. 영적 교만은 오히려 영성이 무엇인지 몰랐던 과거보다 더 자신을 망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선민의식이 하느님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한 눈가리개였던 것처럼 말입니다.1) 기도를 열심히 하는 사람이 삐뚤어진 신앙심을 지니게 되는 경우가 이러한 영적교만에 기인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교만한 사람은 결코 그분을 올바로 맞이할 수 없습니다.
자신의 삶을 돌아보는 성찰의 시간은 자신을 정화시켜 순수한 마음을 유지하게 도와줍니다. 주님 앞에서의 성찰은 윤리 도덕적인 부분이나 지키지 못했던 계명, 의무를 살펴보는 시간이기보다는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주님과 멀어진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고 다시 주님께 나아가기 위해 마음을 다지는 시간입니다. 주님을 제대로 맞이하지 못했던 내면의 상태를 꾸준히 살펴볼 수만 있다면, 순수한 마음으로 영성생활을 해나가는데 많은 도움을 받을 수 있습니다. 매일 자기 전 10분이라도 자신을 살펴보는 소중한 시간을 가져보시면 좋겠습니다.
성찰이 영성생활에 큰 도움이 되지만 혼자서 자신을 알아가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주관적인 생각이 온전한 자신의 모습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것만 고집하게 되면 영성생활에 불균형을 가져올 수 있습니다. 성숙된 영성은 결코 자신의 것을 절대시하지 않습니다. 크고 신비하신 하느님과의 만남을 통해 성숙되기에 항상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순수함을 지속하기 위해 자신의 생각이나 기준에만 집착하지 말고 마음을 나누는 영적 동반자가 있는 것이 좋습니다. 같이 영성생활을 나누며 긴 영적 여정을 함께 걸어갈 동반자 말입니다. 자신의 내면을 열어놓고 서로 나누다보면 상대방을 통해 자신을 더 잘 볼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성찰과 영적 동반자의 도움으로 순수함을 유지하고, 지속적인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영성을 성숙시켜나갈 수 있습니다.
올바른 영성생활을 지속하게 되면 우리의 삶은 많은 부분에서 변화가 일어납니다.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요? 가장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변화는 ‘관심’의 변화입니다. 세속적인 것에서 조금씩 벗어나 정신적인 것, 영적인 것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지금까지 물질적인 것을 중요시하고 그것에서 만족을 얻었다면, 이젠 정신적인 것을 더 중요시하고 그 안에서 기쁨을 누리게 됩니다. 사실 이러한 관심의 변화는 모든 것의 변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마음가짐이 달라지고, 생각이 달라지는 것은 삶의 근본적인 자세를 변화시키기 때문입니다.
근본적인 삶의 변화는 마음의 변화에서 두드러지게 느껴집니다. 형식적인 것에서 벗어나 모든 것에 마음을 기울이게 합니다. 특히 기도할 때 더욱 마음을 담게 됩니다. 성호경, 식사 전후 기도처럼 습관화된 짧은 기도까지도 마음으로 정성껏 하게 됩니다. 또한 봉사활동, 신심활동, 액션단체에서의 활동 등 지금까지 의례적으로 해왔던 성당 일들도 마음을 담게 됩니다. 겉으로 드러나는 것에 중요성을 두지 않고 본질적인 것에 의미를 두며, 항상 주님의 뜻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이것은 큰 변화처럼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지만 본인은 그것을 깊이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진정한 가치를 찾고 추구하며 삶 속에서 실천하게 됩니다.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은 이렇게 마음의 변화를 가져와 자발적으로 기쁘게 신앙생활을 하게 합니다. 어떠한 의무나 규칙에도 매이지 않고 자유로우면서도 적극적으로 모든 일을 행하지만 의무와 규칙에서 벗어나지 않게 됩니다. 세상 어떤 것에도 매이지 않고 단 한 분, 주님께만 매이는 생활을 하게 됩니다. 주님께 매이는 생활은 진정한 자유를 얻게 하면서 동시에 주님의 뜻 안에 머물게 합니다. 모든 것을 생각하고 결정할 때, 그분의 뜻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도 신중하게 되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항상 본질적인 것을 추구하게 됩니다. 혼자 있든, 다른 이들과 함께 있든 상관없이 자신의 생활은 한결같게 됩니다.
주님 안에서의 자유는 죄에서 해방되는 참다운 자유입니다.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은 죄가 자리할 곳이 없게 됩니다. 죄는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죄로부터의 해방은 진정한 자유의 기쁨을 누리게 합니다. 참된 자유와 행복을 누리고 싶다면, 지금부터 주님과 함께하는 삶을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조금씩 변해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기뻐할 것입니다.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을 두고 서서히 이러한 삶이 무르익는다는 것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단시간에 이루기 위해 욕심을 내면 결코 이룰 수 없는 삶입니다. 주님과 함께함으로써 천천히 마음으로 그분을 사랑하게 되면서 완성되는 삶입니다.
끝으로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마태 9,17)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봅니다. 지금까지 자신의 능력으로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 그분께 모든 것을 맡기는 변화된 삶을 살아보시기 바랍니다. 변화된 새 부대로 주님을 맞이할 때 그때서야 참다운 신앙의 기쁨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동안 몇 회에 걸쳐 영성생활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인 영성생활이 지식으로만 남지 않고 삶으로 이어지기를 희망해 봅니다.
[영성의 삶] 어둔 밤
영성생활은 삶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분과 함께 살아가는 생활입니다. 이 생활은 기쁘고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행복의 근원이신 주님과 함께 살아가기에 그 어떤 곳에서도 얻을 수 없는 기쁨과 행복을 맛보게 됩니다. 그렇지만 누구나 경험하듯이 영성생활이 항상 기쁘기만 한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이유도 없이 영적 메마름으로 힘든 시간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기쁜 영성생활 중에 왜 이런 어려움을 겪게 될까요? 그리고 이런 시간을 겪게 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런 상황은 잘못된 영성생활로 인해 일어나기도 하지만 바른 영성생활 중에 일어나기도 합니다. 영성생활을 마음으로 하지 않고 형식적이거나 의무적으로 행할 때는 당연히 영적 메마름을 경험하게 됩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럴 때는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면 조금씩 나아질 것입니다. 하지만 때로는 마음으로 주님을 만나며 살아가는 이들도 영적 메마름을 경험하게 됩니다. 영성가들은 이러한 상황을 ‘영적 어둠’, ‘어둔 밤’ 등으로 표현했습니다. ‘어둔 밤’1)이 무엇인지 좀 더 구체적으로 알아보겠습니다.
우리가 겪는 고통 중에서 가장 큰 고통은 무엇일까요? 지옥의 영혼들은 어떠한 고통을 겪을까요? 가장 큰 고통은 ‘하느님의 부재’에서 온다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것이 가장 큰 고통입니다. 하느님이 계시지 않는 지옥의 고통은 우리가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지상생활 속에서도 하느님이 없는 삶을 산다면 그 자체가 지옥과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영성생활은 선택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할 우리의 삶 입니다.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보다 기쁘고 행복한 것은 없습니다. 주님과 더 깊은 만남이 이루어진다면 기쁨과 행복 또한 더 커질 것입니다. 어둔 밤은 주님을 더 깊이 만나기 위해 겪게 되는 시간입니다. 갑자기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처럼 영적 메마름을 겪게 될 때 우리는 주님을 찾기 위해 더욱 노력하게 되지요. 엄마의 손을 놓친 아이가 엄마를 찾기 위해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가서는 사랑하는 이를 찾기위해 밤거리를 헤매는 여인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를 들려줍니다.2) 가로등 하나 없는 시골길을 걷는다면 작은 불빛 하나라도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고, 불빛을 찾으면 그것만 보고 걸어가게 됩니다. 이처럼 하느님의 부재를 경험하게 되면 영적 메마름으로 고통을 겪지만 더욱 열정적으로 주님을 찾게 됩니다. 이러한 열정은 더 깊이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바탕이 되어 영성적으로 성숙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 안에서 ‘어둠의 밤’이라는 시간을 바라본다면 이것은 결코 부정적인 것이 아니라 좀 더 자신을 성숙시켜 하느님을 깊이 만나게 되는 소중한 시간임을 깨닫게 됩니다.
걷지도 못하는 어린 아이가 걸음마를 배울 때를 생각해 보면 더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걸음마를 가르칠 때 부모는 아이의 손을 잡고 조금씩 걸을 수 있게 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손을 놓고 조금 떨어져 아이가 걸어오기를 기다립니다. 아이는 처음으로 혼자 서서 걸어야 하는 상황이 당황스럽고 두려워 몇 걸음 걷다 주저앉아 버립니다. 처음으로 부모의 손에서 벗어나 혼자가 된 상황, 스스로 걸어야 되는 상황이 아이에게는 어둔 밤의 상태와 같습니다. 이때의 어둔 밤은 아이에게 힘든 시간이 될 수 있지만 스스로 걸을 수 있는 힘을 기르는 시간이 됩니다. 처음에 울며 당황하던 아이는 부모에게 다가가기 위해 조금씩 걷기 시작할 것입니다. 혼자 걷게 되면 기어 다닐 때와 달리 많은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 더 적극적으로 다가가서 안기기도 하고, 부모와 함께 많은 곳을 갈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아이에게 어둔 밤은 부모와 더욱 깊은 사랑을 나눌 수 있는 과정이 됩니다.
이처럼 어둔 밤은 주님을 찾기 위한 열정을 키워 믿음, 희망, 사랑이 더욱 굳건해지게 합니다. 터널을 통과하면 밝은 빛을 다시 볼 수 있는 것처럼 어둔 밤은 터널 안의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터널을 통과하면 그 전에 보았던 빛보다 더 밝은 빛을 만나게 됩니다. 이렇게 어둔 밤을 통해 우리는 더 밝은 빛속에 머물게 되고, 더 깊이 주님을 사랑하게 되며, 더 참된 기쁨과 행복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어둔 밤은 언제든지 우리들에게 닥칠 수 있습니다. 주님께 가는 여정 중에 언제든지 어둔 밤을 경험할 수 있고, 그 경험을 통해 더욱 성숙될 수 있습니다. 어둔 밤의 시기는 오래 갈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습니다. 때로는 어둠이 아주 짙을 때도 있고 옅을 때도 있으며 여러 번 겪기도 합니다. 어둔 밤이 찾아왔을 때 각자 다른 상황이겠지만 중요한 것은 힘들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걷는 것이 힘들어 그냥 주저앉아 버린다면 더 나은 삶을 향해 나아가지 못 하게 됩니다.
어둔 밤을 겪게 될 때 어떻게 극복해낼 수 있을까요? 먼저 이런 상황이 무엇인지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마음을 지녀야 합니다. 그래야 당황하지 않고 어떻게 극복해야 할지 찾아가게 됩니다. 그런 다음 주님과 더 깊이 만나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다만 그 노력은 자신의 능력으로 주님을 찾고 만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버리고 온전히 주님께서 이끌어 가시도록 맡기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능동적으로 주님을 찾았다면, 점점 수동적으로 주님의 이끄심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자세로 바뀌어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때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마리아의 자세3)처럼 온 마음을 기울이고 주님을 향한 열정을 더욱 불태워야 합니다. 어둔 밤을 겪을수록, 이러한 노력을 기울일수록 주님께 맡기는 마음은 커져가게 되고, 그분과의 만남은 한없이 깊어지게 됩니다. 이런 만남은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영적 기쁨과 평화를 누리게 합니다. 어둔 밤을 통한 성숙은 이렇게 점점 주님께 모든 것을 맡겨드리는 삶으로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피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고통이 더욱 주님께 손을 내밀고 그분만을 바라보게 만드는 시간이 될 수 있다면 피해야 할 것이 아닌 오히려 좋은 선물이 됩니다. 많은 성인들은 고통을 통해 성숙했고 더 주님께 나아갔습니다. 어둔 밤이 자신에게 고통으로 다가오겠지만 주님께서 주신 사랑의 선물이라는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인다면 또 다른 기쁜 세상이 다가오게 될 것입니다. 어둔 밤은 주님의 사랑입니다.
1) 고요한 호수에 돌을 하나 던지면 물결이 뭍까지 퍼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영적인 어둠’은 영성의 역사에서 오랜 시간 동안 이야기되어 온 내용입니다. 14세기 무명 저자의 영성 서적인 『무지의 구름』에서부터 십자가의 성 요한의 저서 『어둔 밤』에 이르기까지 많은 영성가들은 영적 어둠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영성의 삶] 고요 안에서의 깊은 대화
하느님과의 사랑의 만남이 기도입니다. 주님을 만나 대화하고 사랑하는 것, 그것이 기도인데, 많은 분들이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주님을 만나는 것 자체를 어려워합니다. 주님이 앞에 계시다 생각하고 대화하는 것까지는 쉽게 할 수 있지만 일방적인 독백처럼 혼자서만 이야기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분명 대화는 서로 주고받는 것이지만 듣는 것이 제대로 되지 않아 참다운 대화를 통한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좀 더 깊은 대화를 하는 방법에 대해서 이야기해보려 합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은 사람 간의 만남과는 같으면서도 다릅니다. 부모님처럼 친구처럼 쉽게 만나 대화할 수 있는 분이면서도, 너무나 크고 신비한 분이시기에 그분과의 만남은 쉬우면서도 어렵습니다. 좀 더 깊게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만남의 주도권을 우리가 아닌 주님께 드려야 합니다. 주님이 바다이시면 인간은 작은 물방울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일대일의 관계로 만나려고 하니 제대로 된 만남이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입니다. 한 방울의 물이 바다에 스며들어야 바다를 느끼고 체험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한 방울의 물이 바다를 품으려 하거나 떨어져있는 상태로 바다를 느끼고 알려하면 제대로 알 수가 없는 것처럼 하느님과의 만남은 그분의 이끄심에 온전히 자신을 맡길 때 진정한 만남을 이룰 수 있습니다. 기도는 이렇게 하느님께 맡기는 자세가 중요합니다.
기도를 할 때 두 가지를 항상 생각하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는 ‘하느님의 현존’이고, 다른 하나는 ‘하느님께 맡김’입니다.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기도에 대해 좀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먼저 기도를 시작할 때 하느님이 내 앞에, 내 안에 계심을 믿고 느끼며 대화를 합니다. 대화는 서로의 의견을 나누는 것이기에 일방적으로 자기의 말만 하면 진정한 대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 솔직히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말씀 드리는 것도 필요하지만 주님 말씀을 듣기 위해 기다리는 것은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기다림’ 그 자체로 아주 훌륭한 기도가 됩니다. 그런데 아무런 말씀이 없으시다고요? 주님이 전혀 말씀이 없으시다기보다는 말씀을 하셔도 우리가 못 알아듣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말씀을 듣지 못하는 이유는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거나 말씀에 대해 가지고 있는 편견때문입니다. 먼저 말씀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은 온갖 분심, 걱정, 불안, 의심 등이 마음에 가득해서 말씀을 하셔도 받아들이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마음이 이러한 것으로 가득 차 있으니 말씀이 들어올 공간이 없는 것이죠. 그래서 가장 먼저 이러한 것을 비워내는 시간이 필요합니다. 이것을 ‘고요함에 머문다.’, ‘내적 침묵 상태에 있다.’라고 이야기합니다.1) 이러한 상태로 주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것, 이것이 주님께 자신을 맡겨 드리는 것입니다.
주님께 맡긴다는 것은 내가 무엇인가 알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말씀하시기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마리아와 마르타’ 2) 이야기에서 마리아가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면 기도의 중요한 자세인 ‘기다림’이 무엇인지 좀 더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온 마음으로 들으려 합니다. 몸과 마음이 온전히 예수님을 향해 있습니다. 이때 마리아는 어떠한 분심도, 걱정도, 불안도, 의심도 없이 오로지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는 것에만 집중을 합니다. 이 상태가 내적인 고요함, 내적 침묵 상태이며 모든 것을 주님의 이끄심에 맡겨둔 상태입니다. 이러한 상태가 될 때 드디어 주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준비가 됩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마리아처럼 언어로 말씀하시는 예수님 앞에 있지 않습니다. 주님 앞에 있는 것은 같지만 인간의 모습으로 오신 주님이 아니라 영적인 주님 앞에 앉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분과의 만남에 어려움을 느끼고 혼자 있는 것처럼 독백만 하다가 기도를 끝내곤 합니다. 분명 지금의 상황은 쉽게 주님과 마주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을 달리 하고, 마음가짐을 다시 하면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먼저 영적인 주님과의 만남에 대한 고정관념을 버리고, 모든 것을 받아들일 개방된 마음 자세가 필요합니다. 분명 주님은 항상 언어로 우리에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특히 육신의 귀로 들을 수 있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물론 필요하면 그렇게 하시기도 하겠지만 대부분은 그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주님과의 깊은 대화는 어떤 큰 울림같은 것으로 전해질 수도 있겠지만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고요함 속에서도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어떤 깨달음이나 자신의 부족함, 좋은 결심 등을 통해서도 이루어지고, 따뜻한 느낌, 사랑스런 느낌, 포근하면서도 밝은 느낌 등을 통해서도 이루어집니다. 또한 특별한 깨달음이나 느낌이 없더라도 주님을 따르고자 하는 확고한 믿음, 그분에 대한 사랑이 조금씩 자라난다면, 그것은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얻게 되는 훌륭한 열매입니다. 결국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 사랑으로 충만된 사람이 되는 것, 주님을 조금이라도 더 사랑하고 닮아가게 되는 것, 그것이 주님과의 만남이라는 기도에서 얻게 되는 가장 큰 열매입니다.
주님은 항상 곁에 계시며 우리와 만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준비되어 있지 않을 따름입니다. 준비가 잘 되어 있다면 주님과의 참다운 사랑의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이 기도입니다. 말씀을 듣기 위해 예수님의 발치에 앉아 있던 마리아의 모습을 떠올리며 마리아의 마음, 생각, 자세 등을 따라하다 보면 주님을 만나기 위한 준비가 쉬워질 것입니다. 기도는 이렇게 주님을 만나 사랑을 나누는 시간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을 자주 가져 사랑으로 충만된 기쁜 삶을 살아가시면 좋겠습니다.
1) 고요한 호수에 돌을 하나 던지면 물결이 뭍까지 퍼져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바람이 불어 물결이 크게 일렁이는 상태에서 돌을 던지면 돌이 물에 떨어졌는지 아닌지 구분도 가지 않을 만큼 아무런 변화가 없습니다. 온갖 분심, 걱정, 불안 등을 가지고 있는 상태가 내면에 물결이 크게 일렁이는 상태입니다. 이때 주님이 어떤 말씀을 하셔도 알아듣지 못합니다. 내면이 잔잔한 호수처럼 고요해야 작은 한 말씀에도 바로 깨닫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과 소통하기 위해서는 내면의 고요함, 내적 침묵 상태가 필요합니다.
2) 루카 10,39
[영성의 삶] 하느님 아버지 -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
영성생활은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입니다. 아주 단순하고 쉬운 의미지만 실제적인 삶 안에서는 막막함이 느껴질 수 있습니다. 주님이 너무나 큰 분이시기에 어떻게 사랑해야 할지, 어떻게 함께해야 할지 분명하게 와 닿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 만물을 창조하신 분, 보이지도 않고 느껴지지도 않는 분을 막연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일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영성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먼저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잘 정립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고의 한계를 지닌 나약한 인간입니다. 하느님에 대한 생각에도 많은 왜곡된 개념과 사고의 한계를 경험하게 됩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 잘못된 신관(神觀)이 수도 없이 등장했고, 사이비 종교는 지금도 세상에 널리 퍼지고 있는 중입니다. 자신들의 생각에 맞는 신을 만들어 믿는 것입니다. 올바른 정통 종교를 가진 신앙인들도 편협하고 왜곡된 신앙을 가진 분들이 많습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도 수많은 이단들이 생겨났고, 교리의 왜곡된 이해로 잘못된 신심에 빠진 분들이 있습니다.
이렇듯 하느님을 좁은 인간의 사고로 완전히 이해하려 한다면 잘못된 신앙심을 가질 수 있습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모른다’는 생각이 더 주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합니다. 지식 이전에 하느님을 마주하는 마음가짐이 더 중요한 것입니다. 주님을 어떤 분으로 마주해야 하는지, 그분 앞에서 어떠한 마음으로 임해야 하는지 등이 우선적으로 자리잡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과 나와의 관계가 명확히 정리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 다음에 얻게 되는 지식은 주님과의 관계를 더 깊게, 더 넓게 만들어 갑니다.
주님과 나와의 관계는 어떠한 장애물도 없는 순수한 관계여야 합니다. 우리는 의외로 공기청정기의 필터처럼 여러 필터를 끼고 주님을 만나곤 합니다. 그 필터에는 하느님에 관한 지식도 포함되고, 자신의 신분도 포함됩니다. 지식이나 신분이 잘못된 것은 아니지만 인간 사고의 한계 때문에 좋은 지식과 신분도 왜곡된 필터의 역할을 할 때가 많습니다.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처음의 순수한 모습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이 그분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게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를 가르쳐 주실 때 가장 먼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습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우리는 이 부분을 너무 쉽게 지나쳐 버리곤 하지만 기도를 시작할 때의 마음, 하느님을 향한 마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아주 중요한 부분입니다.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어떠한 가식도 꾸밈도 없는 순수한 관계입니다. 아무리 큰 권력을 가진 사람이라도 부모에게는 그저 자식일 뿐입니다. 교황님도 부모에게는 단지 사랑하는 아들입니다. 어떠한 이익이나 목적 없이 형성된 가장 순수한 관계이면서 서로를 너무나 잘 알아 가식적이지 않는 관계가 부모와 자식의 관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께 이처럼 진솔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다가가기를 바라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온 마음으로 아버지로 받아들이게 될 때 그분과의 관계는 진솔해지고 순수해져 더욱 사랑하는 관계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여러 이유로 부모와의 관계가 정상적이지 않은 분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럴 경우 사랑하는 아버지 상을 생각하며 하느님을 바라보면 됩니다. 또한 가장 순수하고 진솔하게 다가갈 수 있는 다른 사람을 생각해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어떠한 장애물도 없이 순수하게 주님을 만날 수 있는 마음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창조주이시고, 세상 만물의 주인이시며, 모든 권한을 쥐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이러한 분께서 당신 아들을 하찮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보내셨고, 우리에게 당신을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 당신을 친구로 부르라고까지 하셨습니다.(요한 15,15) 이것은 우리와 깊은 사랑의 관계를 형성하시기 위한 그분 마음의 표현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더 사랑하기 위해서 그 어떤 겉치레도 다 벗어버리고 있는 그대로 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영성생활은 이렇게 주님을 마주하는 마음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진정 하느님을 아버지로, 예수님을 친구로 마주할 수 있는 마음을 지니는 것, 이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모든 것을 그분께 드러낼 수 있고, 어떠한 가식도 벗어 버릴 수 있으며,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주님께 나아갈 수 있습니다. 사랑은 이러한 순수한 마음에서부터 싹트게 됩니다. 이처럼 ‘사랑하는 주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영성생활이 됩니다.
[영성의 삶] 하느님과의 사랑의 만남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삶’이 영성생활이고, 영성생활을 잘 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주님을 순수한 마음으로 마주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사랑스런 아버지로, 친구로 어떠한 가식 없이 주님을 일상의 삶 속에서 자주 마주하게 되면 튼튼한 영성생활의 기초가 다져지게 됩니다. 이제 좀 더 구체적으로 영성생활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아보겠습니다.
영성생활의 가장 구체적인 모습은 기도를 통해 드러납니다. 그러나 많은 신자 분들이 어떻게 기도를 해야 하는지 잘 모르는 듯합니다. 교회에서 정해준 기도문 중심의 기도를 열심히 하지만 뭔가 허전함을 지울 수 없고, 제대로 기도하는지에 대해 의문을 가지기도 합니다. 기도를 자주 해도 신앙생활이 성숙해지는 것 같지 않고 제자리걸음만 하는 것 같다는 이야기도 합니다. 기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왜 기도가 어렵기만 할까요?
기도를 잘 하기 위해서는 먼저 기도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영성생활에 대한 정의처럼, 기도도 한마디로 정의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하지만 단순하고 많은 의미를 담고 있는 하나의 정의를 알아두면 기도를 좀 더 쉽게 이해하고 행할 수 있게 됩니다. 기도는 정해진 기도문 중심의 기도보다 더 넓은 의미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그래야 기도의 본질을 놓치지 않게 되고 교회가 알려준 기도문 중심의 기도도 제대로 할 수 있게 됩니다.
넓은 의미의 기도는 한마디로 ‘하느님과의 사랑의 만남’이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기도를 하느님과의 대화로 표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만 만남은 대화 외에 그냥 함께 있는 것까지 모두 포함하는 더 넓은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처음에는 대화를 많이 하지만 점점 대화는 줄고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좋다는 걸 느낍니다. 이렇게 만남은 대화를 포함한 ‘함께 있음’의 의미까지 담고 있습니다. 기도는 주님을 만나서 대화하고 듣고, 함께 있는 모든 것입니다.
먼저 기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만나야 합니다. 만남은 같은 공간에 두 사람이 함께 있어야 이루어집니다. 하느님과의 만남도 그분이 지금 나와 함께 있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기도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가장 우선적으로 하느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시다는 하느님의 현존에 대한 믿음을 지녀야 합니다. 지금 주님이 내 안에, 내 앞에 계시다는 믿음이 있어야 그분과의 만남이 이루어지고, 기도가 시작됩니다. 하느님의 현존을 전혀 의식하지 않고 일방적으로 하고 싶은 기도만을 하게 되면 그것은 만남이 아닌 독백이 되어버립니다. 일방적인 독백도 기도의 한 형태일 수 있지만 만남을 통한 깊은 관계까지 나아가지는 못합니다. 기도를 많이 하고도 신앙의 성숙이 이루어지지 않고 때로는 영적 메마름까지 느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어떠한 기도를 하든 가장 먼저 해야 할 것은 하느님이 지금 나와 함께 계심을 믿고 느끼는 것입니다. 내 앞에 계신 주님, 나를 만나기 위해 오신 주님 앞에서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모든 기도는 이렇게 주님 앞에서 해야 진정한 기도가 됩니다. 즉 하느님의 현존을 느끼며 대화를 하고, 기도문을 읊고, 때로는 그분과 함께 침묵 중에 머무는 것, 이것이 기도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에서 중요한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만남에는 여러 종류가 있는데, 하느님과의 만남은 사랑하는 이와의 만남입니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만나 대화하며 사랑을 속삭이는 그러한 만남입니다. 주님께 대한 사랑이 부족해서 그러한 만남을 못 가질 것 같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우리의 사랑이 부족하지만 주님의 사랑이 워낙 커서 이 만남은 사랑 안에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만남입니다. 부족한 사랑이지만 주님의 사랑에 기대어 속삭이며 머물 수 있다면 훌륭한 기도가 됩니다.
사랑의 절정은 일치입니다. 사랑이 깊어지면 서로 하나가 되고 싶어 합니다. 기도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하는 주님과 지속적인 만남을 갖게 되면 점점 사랑이 무르익게 되고 자주 그분과 하나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이렇게 하느님과의 일치가 기도의 완성입니다. 주님과 하나될 때 체험하는 기쁨은 그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습니다. 그만큼 기도는 우리 삶에 큰 기쁨이고, 축복이며 행복입니다.
이런 넓은 기도의 의미는 기도를 한정된 공간이 아닌 모든 장소에서 어떠한 형식에도 매이지 않고 행할 수 있게 합니다. 내가 있는 장소가 주님을 만나는 곳이고 기도의 장소가 됩니다. 시간이 없어서 아침기도를 못 해도 출근하면서, 등교하면서도 언제나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기도문의 기도는 주님을 향한 아름다운 찬미와 감사를 담은 훌륭한 기도입니다. 하느님과의 만남은 기도문의 기도도 더 아름답게 느낄 수 있게 합니다. 형식적이고 의무적인 기도에서 벗어나 사랑하는 분을 만나는 기도는 자유롭고 기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게 합니다.
기도는 이렇듯 하느님과의 사랑의 만남입니다. 기도가 영성 생활의 의미와 비슷한 것은 기도는 영성생활의 가장 구체적인 모습이면서 동시에 모든 것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기도가 삶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때, 기도는 삶이 되고, 삶은 기도가 됩니다. 즉 기도생활은 영성생활이 되고, 영성생활은 기도생활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