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우리는 남이다” -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조화를 이루어 가는 삶
“우리가~” “남이가!” 연말연시를 맞아 곳곳에서 송년회다, 신년회다 모임이 많습니다. 회식자리마다 빠질 수 없는 것이 또 건배사입니다. 매번 기발한 구호로 멋있게 건배를 제의해야 모임의 분위기도 달아오릅니다. 수많은 건배사 중에서 모임 구성원의 단합과 일치를 위하는 자리에서 많이 들을 수 있는 것이 바로 “우리가~ 남이가!”라는 구호일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는 하나다, 모두들 한 마음으로 같은 목소리를 내며 일치단결해서 훌륭한 공동체를 만들어보자, 이런 마음이겠지요. 하지만 우리는 엄연히 “남”입니다. 나와 너가 똑같을 수는 없지요. 내가 너와 다르고, 네가 나와 다르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무조건 나와 뜻을 같이 해야 하고, 한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독선적인 이기주의입니다. 나와 너가 서로 다름을 인정하는 데서 진정으로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이 생기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공자(孔子)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군자는 조화를 이루려고 하지, 같아지려고 하지 않으며, 소인은 같아지려고 하지, 조화를 이루려고 하지 않는다.”1)
군자는 각자의 의견이 다르면서도 그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여 서로 조화를 이루지만, 소인은 각자 자기 이익에 맞는 사람들끼리 서로 모여서 뭉치기는 잘 하지만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손해가 되거나 의견이 맞지 않으면 화합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씀입니다. 여기서 일치로 나아가는데 아주 중요한 “조화(和)”라는 개념이 나옵니다. 조화는 고대로부터 동양에서 참 중요한 개념이었습니다. 조화는 비단 다른 사람과의 관계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나 내면의 근본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유가(儒家)의 대표적인 철학서라고 할 수 있는 『중용(中庸)』에서는 “조화(和)”의 의미에 대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희노애락과 같은 감정이 아직 내면에서 일어나지 않은 상태를 중(中)이라 하고,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 모두 절도에 맞는 것을 화(和)라 한다. 중(中)은 천하의 큰 근본이고, 화(和)는 천하에 두루 통하는 도(道)이다.”2)
우리 마음은 수많은 감정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기쁘기도 하다가 화가 나기도 하고, 슬픈 감정에 휩싸이다가 어느새 즐거운 감정이 일어나기도 하지요. 그런데 그런 감정이 일어나기 전의 고요하고 맑은 마음의 상태를 “중(中)”이라고 합니다. 이 상태에서는 누구나 선하고 거짓이 없으며 맑습니다. 하느님의 목소리인 양심(良心)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이 중(中)의 상태를 잘 유지한다면 우리의 감정이 드러날 때 자연스레 모든 것이 절도에 맞고 조화롭게 된다는 이야기입니다. 기쁠 때 기뻐하고 슬플 때 슬퍼하는… 그야말로 거짓 없이 진실하며 모든 것이 서로 조화를 잘 이루는 상태입니다. 이런 경지를 “화(和)”라고 합니다.
이야기가 너무 어렵게 갔나요? 아무튼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며 잘 지내기 위해서는 나 자신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감정이 먼저 올바른 조화(和)를 이루어야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나의 마음이 중심(中)을 잘 잡고서 모든 감정들이 상황에 맞게 조화(和)를 이룰 때 우리는 다른 사람도 잘 받아들일 수 있고 조화를 이루며, 더 나아가서는 일치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지요. 사실 우리 신앙은 세상 끝 날에 모두가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나로 일치될 것을 믿으며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일치로 나아가려고 하지만 아직 때가 차지 않았기에 완전한 일치를 이루지는 못합니다. 그러기에 먼저 나와 다른 타인을 인정하고 다름을 받아들이며 서로 맞추고 조화를 이루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그들이 모두 하나가 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요한 17,21)
“때가 차면 이 계획이 이루어져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고 하나가 될 것입니다.”(에페 1, 10 : 공동번역)
이렇게 우리는 하느님 나라가 완성될 때 이루어질 하느님과 모든 이의 완전한 일치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부터 사랑하고 기도하며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일치를 향한 노력은 무조건 하나의 구호를 두고 목소리를 합치는 것도 아니고, 하나의 목표를 두고 다른 이들을 끌어당기는 것도 아닐 것입니다. 먼저 다른 이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것, 그리고 나의 목소리나 뜻을 조금 낮추어 다른 이의 이야기를 들으며 조화를 이루는 데서 일치를 위한 노력은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을까요? 그 방법은 노자(老子)에게서 들어볼까 합니다. 공자와 동시대를 살면서 중국철학의 양대 산맥을 이루는 노자도 자연의 ‘길(道)’을 따르는 성인이라면 조화를 이루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합니다.
“그 빛을 부드럽게 하여 먼지와 하나가 된다.”3)
자신이 성인이라 하여, 다른 사람보다 덕이 뛰어나거나 재주가 많다 하여 환하게 빛을 뿜어낸다면 일반인들이 가까이 하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울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밝은 빛으로 남을 눈부시게 어지럽히지 않고 적당히 빛을 낮추어 먼지나 티끌과도 같은 일반인들과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자신이 돋보이고 남에게 인정받기를 원하는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노자의 이 구절을 접하게 되면, 우리 인간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하느님이시면서도 먼지와 같은 나약한 존재인 인간이 되어 오신 예수님을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것도 가장 낮은 자의 신분을 취하셔서 낡고 더러운 구유에 누워 계시는 아기 예수님을 보며 “화광동진(和光同塵)”의 가장 완벽한 형태는 바로 주님의 강생(降生)신비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을 맞았습니다. 새로운 한 해가 밝았습니다. 올해는 나의 빛을 줄이고 다른 사람들에게로 관심을 돌릴 수 있었으면 합니다. 나의 뜻에 맞춰주기를, 내 생각대로 되기를 바라지만 말고 나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고 받아주며 그 사람에게로 다가갈 수 있는 조화로운 삶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의 빛을 낮추면 비로소 다른 사람의 빛이 보일 것입니다. 나의 목소리를 줄이면 비로소 다른 이의 목소리가 들릴 것입니다.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우리는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고 있나요?”
- 이익을 버리고 인의를 택한 성현들
“수난기약 다다르니, 주 예수 산에 가시어~.” 사순시기에는 미사 전 입당 성가만 들어도 감정이 북받쳐 오를 때가 많습니다. 사순 성가의 애절한 노랫말 때문인지 장엄한 멜로디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유독 사순시기의 성가는 우리 마음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나 봅니다. 특히 천주교 신자들은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 죽음에 대해 더 깊이 공감하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우리네 삶 자체가 하나의 ‘십자가의 길’이어서 사순시기가 더 깊이 와 닿는 건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십자가의 길을 걸어갈 수밖에 없는 우리네 인생살이가 사순시기에 그대로 느껴지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자의 삶도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퇴역 군인으로 64세에 무당의 딸인 17세 소녀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았습니다. 그 사이에서 공자가 태어났지요. 그리고 세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공자는 어머니와 단 둘이 가난하게 살았습니다. 열일곱 살엔 어머니마저 돌아가셨어요. 가난하고 부모도 없는 열일곱 살의 청년 공자는 홀로 일어서야 했습니다. 하지만 배움에 뜻을 두고 열심히 노력했지요. 온갖 비천한 일도 마다하지 않고 살았습니다. 공자 스스로도 자신은 젊었을 때 미천했기 때문에 할 줄 아는 천한 일이 많다고 했습니다. 이런 공자가 노나라의 작은 관직을 시작으로 나중에는 재상의 자리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리고 정치를 잘해 노나라의 힘도 강해졌고 이 시기에 제자도 많이 생겼습니다. 그런데 노나라의 군주와 실권자들이 불의한 일을 저지르는 사건이 생겼습니다. 이에 공자는 미련없이 재상의 자리를 버리고 노나라를 떠납니다. 그의 나이 55세였습니다. 그때부터 공자는 제자들과 함께 14년 동안 7개국을 돌아다니며 자신의 뜻을 받아줄 군주를 찾아 다녔습니다. 그 유명한 “주유열국(周遊列國)”의 시기였지요.
사실 공자가 편한 길을 택했다면 재상의 자리에서 적당히 타협하면서 편하게 부를 누리며 살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공자는 이익(利)을 택하지 않고 평생 자신이 추구한 인의(仁義)를 선택했습니다. 68세가 되어서야 늙은 몸을 이끌고 공자는 고향 땅으로 돌아올 수 있었지요. 이익을 추구하는 길과 인의를 따르는 길 가운데서 공자는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이익을 추구하는 길을 버리고 인의를 따르는 길을 갔습니다. 공자 이후, 이익을 버리고 인의를 택하는 삶은 그의 뒤를 따르는 모든 유학자가 가야 할 길이 되었습니다. 맹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방대한 분량의 책 『맹자』의 첫 대목은 이와 같습니다.
맹자가 양혜왕을 만나니 왕이 말하였다. “선생님께서 천리 길을 멀다 않고 오셨으니, 장차 내 나라에 이익이 있겠습니까?” 그러자 맹자가 대답했다. “왕은 어찌 이익을 말씀하십니까? 인(仁)과 의(義)가 있을 따름입니다.”1)
그 유명한 맹자라는 선생님이 자기 나라를 방문한다고 하니 왕이 기쁜 마음으로 나가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께서 자기 나라를 찾아 주셨으니 얼마나 큰 이익이 있겠냐?’고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맹자의 대답은 단호했지요. “왕께선 왜 하필이면 이익을 이야기하십니까? 가장 중요한 것은 어진 마음과 의로움입니다.” 그러면서 덧붙이기를, “나라의 왕이 이익을 추구하면 그 밑의 대부도 이익만 좇으며, 그러면 그 밑의 하급 관리와 서민들도 모두 이익만 좇으며 살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결국 나라 전체가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2천 년이 훨씬 지난 오늘날 우리에게도 의미있게 와 닿는 내용입니다. 국가는 자국의 이익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쏟아 붓고, 정치인들은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며, 기업은 기업의 이익만 따지고, 국민은 각자와 자기 집안의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더 많은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서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무한 경쟁에 시달려야 하지요. 신자유주의 경제체제 안에서 우리는 태어나 죽을 때까지 경쟁에 내몰리며 이익만을 추구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이익을 얻는 만큼 행복이 따라오지는 않습니다.
공자의 제자 가운데 공자가 가장 사랑한 제자가 있었습니다. 안연(顔淵)이라는 제자입니다. 그는 정말 가난하게 살았지만 개의치 않고 학문을 배우고 덕을 실천하는 데 큰 기쁨을 느끼며 잠시도 소홀하거나 게을리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젊은 나이에 스승인 공자보다 먼저 죽었죠. 『논어』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안연이 인(仁)에 대하여 묻자,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자신을 이겨 예를 회복하는 것이 인(仁)을 행하는 것이다.”2)
공자의 가르침 가운데 가장 핵심은 어진 마음, 즉 인(仁)입니다. 하지만 그 인에 대해서 누구도 자세히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제자 안연이 공자에게 인에 대해 물었습니다. 그러자 공자는 인이 무엇인지는 직접 가르쳐 주지 않고, ‘인을 행하는 것(爲仁)’에 대해 이야기해 줍니다. “극기복례가 바로 인을 행하는 것이다.” ‘극기복례(克己復禮) - 자기를 이겨 예를 회복한다.’ 즉 공자는 자신의 욕심, 아집, 이기심 등을 이겨내어 자기 안에 있는 타인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 양보하고 겸손하며 사랑의 마음을 드러내는 예(禮)를 다시 살리는 것이 바로 인을 행하는 것이라고 가르쳐 줍니다. 이것은 무조건 자기를 억누르고 억지로 예를 차리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기 안에 있는 본래의 선한 마음,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 자신을 낮추는 겸손의 마음을 회복하기 위해서 자신을 단단히 싸고 있는 껍질 같은 이기심을 극복하고 깨부수는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누누이 당부하신 말씀과도 같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 24)
안연은 스승의 가르침을 들으면 바로 그날 그것을 실천하려고 노력했다고 합니다. 머리로만 알고 넘어가지 않고 직접 몸으로 실천해야 진정으로 그것을 ‘안다.’고 했습니다. 이른바 ‘체득(體得)’했다는 말이 그것입니다. 머리로만 이해하고 아는 것이 아니라 내 온몸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삶을 살 때 비로소 우리는 체득했다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참으로 복된 시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나를 버리고 내 십자가를 지고 이 길을 걸어갑시다. 이익을 추구하는 삶의 길이 아니라, 그런 욕심을 버리고 올바른 가치를 찾아 나가는 길을 걸어갑시다. 하지만 이 길은 결코 외롭고 힘든 길만은 아닙니다. 주님께서 앞서 걸어가셨고, 주위의 많은 이가 함께 걸어가는 길입니다. 내가 가는 길이 너무 험하고 고달프고 외롭더라도 앞서 가시는 주님을 바라보면서 같은 길을 가는 동료, 이웃들과 함께 이 십자가의 길을 걸어갑시다.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즐길 준비 되셨나요?”
- 생명을 좋아하는 단계를 넘어 삶을 즐기는 경지로 나아가기
오랜 중국 생활을 하며 제가 가장 그리워했던 것은 한국의 자연이었습니다. 푸르른 나무숲과 풀과 야생화가 지천에 피어 있는 한국의 산이 그리웠죠. 그래서 한국에 돌아와서는 거의 매주 산에 갔었습니다. 가까이 있을 때는 알지 못했는데 떠나 보니 그 소중함을 알게 된 것이지요. 산에 가면 평소에는 알아채지 못했던 꽃과 나무의 변화가 확연히 눈에 들어옵니다. 겨우내 죽은 듯 마른 가지에서 새순이 돋고 잎이 무성해져 신록이 우거지고, 온갖 꽃이 철따라 피고 지기를 되풀이하는 모습을 보면 모든 살아 있는 것, 생명 자체가 참으로 경이롭고 아름답고 신비합니다. 동양철학에서도 우주의 기본 원리는 만물을 낳고 살리는 데 있다고 했습니다. 『주역(周易)』에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만물을) 살리고 살리는 것을 일러 역(易)이라고 한다.”1) 아주 작은 풀 한 포기, 꽃 한 송이도 생명을 얻어 잘 자라도록 도와주고 살리는 것이 자연의 본성입니다. 그러니 자연을 바라보면 자연스레 삶에 대한 예찬이 터져 나옵니다. 산다는 건 얼마나 행복하고 감사한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은 이 아름다운 삶을 충분히 즐기고 계신가요? 공자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는 것은 좋아하는 것만 못하고, 좋아하는 것은 즐기는 것만 못하다.”2)
공자는 무언가에 대해서 알아가는 단계와 그것을 좋아하는 단계, 그리고 그 속에서 즐기는 단계를 구분합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클래식 음악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일단 클래식 음악에 대해 배워 나갑니다. 관현악은 어떻고 작곡가는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시대별로 어떤 사조가 유행하는지, 한 곡을 두고서도 지휘자와 연주자에 따라 어떻게 곡 해석이 달라지는지 등 많은 것을 알아 가지요. 하지만 단순히 클래식 음악에 대한 지식을 쌓아 나가기만 하는 사람은 클래식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에 미치지 못합니다. 클래식 음악을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지식을 쌓아 나가는 것은 물론, 자주 음악을 듣고 연주회를 찾아다니며, 자기가 특별히 좋아하는 지휘자나 악단의 음악을 골라듣기도 하면서 마니아가 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은 진정으로 즐기는 사람에 미치지 못합니다. 좋아서 찾아다니며 음악을 듣던 단계를 넘어서면 이젠 그 음악에 푹 빠져 즐길 수 있는 경지에 이릅니다. 굳이 누구의 작품인지 언제 레코딩한 것인지 따지지 않고 그냥 일상 속에 클래식 음악이 녹아들지요. 우리말에는 ‘즐긴다’는 표현이 부정적인 의미로도 많이 사용되어 진정한 의미가 퇴색되기도 했지만, 여기서 즐긴다는 것은 그 속에서 혼연히 하나 되어 즐거워하는 경지입니다.
우리네 신앙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느님을 알아 가고 신앙을 배워 나가는 경지에서 더 나아가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신앙생활을 좋아해서 기쁘게 봉사하며 사는 경지에 이릅니다. 더 나아가 하느님 안에서 어린아이처럼 노닐며 나에게 주어진 삶을 기쁘게 즐기는 것은 얼마나 높은 경지인지 모릅니다. 성무일도 기도를 하다 보면 유독 마음에 들어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런 표현이 있지요.
“주께서 당신 백성의 귀양을 풀어 주실 그때, 야곱이 춤을 추리라 이스라엘이 봄놀으리라.”(시편 14,7)
이 구절은 돌아가신 최민순 신부님의 번역인데요. 새 성경의 번역문보다 시인 신부님의 감성이 돋보이는 부분입니다. 여기서 ‘봄놀다’라는 표현은 ‘뛰놀다’의 옛말이지요. 그런데 말이 참 재미있어요. 예전에 고된 시집살이를 하던 여인들이 일 년에 하루쯤 봄놀이 나가는 모습을 보고 ‘봄놀다’ 라고 표현했답니다. 봄나들이를 나와 꽃구경도 하고 기뻐 뛰어노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우리는 지금 귀양살이를 하는 것도 아닌데, 주님의 사랑 안에서 자유로운데, 삶에 감사하고 기뻐하는 모습이 부족한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때로 삶의 현실이 팍팍하고 고생스럽더라도, 병의 고통 중에 있다 하더라도, 이별의 슬픔에 아파하더라도 우리는 살아 있잖아요. 하느님께서 주신 이 생명을 누리고 있잖아요. 그러니 기뻐했으면 좋겠습니다. 살아 있음에 감사하며 이 공기를 마시고, 이 자연 속에 살아감에 봄놀았으면 좋겠습니다. 인간에게는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정신의 경지가 있으니까요. 하느님과 맞닿을 수 있는 마음이 있으니까요. 그런 마음으로 삶을 제대로 알고 삶을 좋아하는 단계를 지나 삶을 즐길 수 있는 경지가 되어야겠지요. 어디에도 구속되지 않는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의 절대 경지를 노래한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장자(莊子)입니다. 그는 주로 우화를 이용하여 자기 사상을 풀어갔는데, 책 『장자』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혜자(惠子)가 양나라의 재상으로 있을 때, 장자가 그를 찾아 양나라에 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가 혜자에게, ‘장자가 와서 당신 재상 자리를 노린답니다.’라고 했습니다. 이에 혜자는 두려워 사흘 동안 장자를 찾아 온 나라를 뒤졌습니다. (이 사실을 안) 장자가 혜자를 찾아가 이런 이야기를 했다고 합니다. ‘남쪽에 새 한 마리가 있는데 이름이 원추라고 합니다. 당신은 그걸 아시오? 이 원추는 남해에서 출발하여 북해로 날아가지만,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와 앉지를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으며, 감로수가 아니면 마시지 않소. 그런데 여기 썩은 쥐를 얻은 올빼미가 있다가 원추가 지나가니까 혹 쥐를 빼앗길까 싶어 위를 올려다보며 꽥 하고 소리를 질렀다는 거요. 지금 당신도 양나라 벼슬자리를 빼앗길까봐 두려워 내게 꽥 하고 소리를 지를 건가요?’”3)
‘원추’라는 이름의 새는 봉황의 일종입니다. 높은 이상을 지니고 절대 자유의 경지를 노니는 봉황이 썩은 쥐를 탐할 리가 없겠지요. 하지만 세상에서 아등바등하며 자기 밥그릇 챙기기에 바쁜 이들은 누구에게 그걸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합니다. 우리도 살아가는 데 바빠서, 눈앞의 이익 챙기기에만 급급해서 원래 지니고 있던 자유로움을 많이 잃어버린 건 아닐까요? 봉황처럼 하늘 높이 훨훨 날며 삶을 즐기던 방법을 잊어버린 건 아닐까요?
5월입니다. 가장 아름다운 시기이죠. 성모 성월이며 전례력으로는 부활시기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린이날, 어버이날이 있는 가정의 달이기도 하고요. 봄도 무르익어 자연도 가장 아름다운 때입니다. 꽃들도 화려하게 피고 나무도 신록을 더해 갑니다. 부활시기를 보내고 있는 우리는 죽음을 이기고 영원한 생명을 여신 예수님과 더불어 삶을 즐길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 6)
주님은 생명을 주신 분이시며 영원한 생명 그 자체이십니다. 그러니 우리도 영원을 내다보며, 지금의 삶을 기쁘게 즐겨야 하겠습니다.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모든 관계의 시작은 자기 사랑에서부터”
- 성현들에게 배우는 자존감(自尊感)의 중요성
미국의 명문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펜실베이니아 대학에서 최근 1년 사이에 자살한 학생이 6명이나 된다는 보도에 미국 사회가 충격에 빠졌습니다. 주변의 다른 명문 대학들도 사정이 다르지 않습니다. 「뉴욕타임스」는 완벽주의 풍조와 부모의 지나친 간섭이 이런 상황을 낳았다고 분석했습니다. 그리고 자랑거리만 올리는 SNS가 학생들의 경쟁심과 우울증을 부추기고, 대학에 간 뒤에도 자녀들의 학교생활을 일일이 챙기는 부모들이 많아진 게 원인이라고 합니다. 세계 최고 명문 대학에 다니면서도 자존감(自尊感) 없이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다 보니 작은 실패에도 쉽게 좌절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우리 사정도 다르지 않지요. 요즘 스마트폰으로 친구들과 많은 정보를 주고받습니다. 어떻게 살고 있는지도 실시간 알 수 있지요. SNS를 통해 친구들과 수다도 떨고 자신의 사진도 올리며 어떻게 지내는지 소식을 주고받습니다. 주로 맛집에 가서 맛있는 걸 먹은 사진이나 멋진 장소에 휴가 가서 재미있게 노는 사진이 올라옵니다. 문제는 친구들이 교대로 이런 걸 올리니 나 빼고 모두들 행복해 보이기만 합니다. 친구들은 늘 맛있는 거 먹으러 다니고, 늘 휴양지에 놀러 가는 것처럼 보이지요. 그래서 나도 기회가 생기면 사진부터 찍어 올리기 바쁩니다. 한껏 즐거운 표정을 하며 정말로 행복하다는 듯이 말이죠. 서로 자랑하면서 더 불행해지고, 서로 소통하면서 더 외로움을 느끼는 것이 오늘날 스마트한 시대의 자화상입니다.
자공이 말했습니다. “가난하면서도 아첨하지 않고, 부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그러자 공자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괜찮으나, 가난하면서도 즐거워하며, 부유하면서도 예를 좋아하는 사람만은 못하다.”1)
우리를 불행하게 하는 것은 남들과 ‘비교’하는 데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가진 고유한 장점을 보지 못하고 늘 남들과 비교하다 보면 우리는 불행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은 비슷한 수준의 사람들끼리 이웃하며 지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객관적으로 볼 땐 나도 잘 살고 행복하지만 그 안에서 다른 사람과 비교하다 보면 금방 자신이 초라해지곤 합니다. 호화로운 고급 아파트촌에 살아도 비교하기 시작하면 불행하고 우울해집니다. 더 큰 집에, 더 호화롭게 사는 이웃, 성공한 남편, 공부 잘하는 아이들을 비교하면서 ‘우리 집은 왜 이럴까, 나는 왜 이렇게 사나?’ 하며 불행해합니다. 일단 비교하기 시작하면 결과는 안 좋습니다. 남과 비교해서 내가 우월하다고 느끼면 교만하게 되고, 남보다 못하다고 여기면 열등감에 빠지겠지요. 어느 것도 좋지 않습니다. 비교해서 우월하다고 한들, 거기서 오는 행복은 불안한 행복입니다. 자만에 빠지면서도 언제든 뒤집어질 수 있으니 늘 불안해하며 이 자리를 지키기 위해 노심초사합니다. 반면에 비교해서 열등감에 빠지면 우울해지고 시기, 질투하게 되고 경쟁에서 이기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됩니다.
그러니 공자의 제자인 자공이 이야기한 경지도 대단합니다. 남과 비교해서 가난하더라도 부유한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아첨하지 않고, 부유해도 교만하지 않다는 것은 덕을 많이 쌓은 군자의 경지에 이르러야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이런 자공의 말에도 남과 비교하는 사람의 모습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에 공자는 가난하면서도 자신이 하는 일에 만족하며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람, 부유하면서도 타인을 먼저 배려하고 사랑을 표현하는 예(禮)를 좋아하는 사람의 경지를 이야기합니다. 이 정도의 경지에 오르기 위해서는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고 인정해 줄 수 있는 “자존감”, 즉 자아존중감(自我尊重感)이 커야만 합니다.
공자는 비록 가난하고 비천하게 자랐지만 남들과 비교하며 신세한탄이나 하면서 우울해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고귀한 인격으로 성장하여 수많은 이들을 바른 길로 이끌었습니다. 외적 조건이 사람을 결정짓는 것이 아니라 인(仁)을 실행하고 예(禮)를 존중하는 내면의 힘이 그 사람을 결정짓는다는 것을 잘 알고 몸소 실천했습니다. 공자가 세상을 떠돌아다닐 때 구이(九夷)라는 오랑캐들이 머무르는 비천한 곳에 가서 살려고 했습니다. 그때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누추한 곳인데 어찌 사시렵니까?” 그러자 공자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군자가 거주하는데 무슨 누추함이 있겠는가?”2) 거처하는 곳이 비록 누추한 곳이라도 자기가 군자라는 의식이 있다면 그곳은 이미 누추한 곳이 아니라 군자가 머무르는 성스러운 공간이 됩니다. 자존감은 결국 내가 나를 인정하고, 내가 먼저 나를 사랑해 주는 마음입니다. 나 자신도 사랑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나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소중히 여길 수 있습니다. 나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이런 자존감이 있을 때 우리는 다른 사람과 나를 비교하지 않고, 나의 모습을 온전히 바라보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중국 철학사에서 나를 사랑하는 데 최고의 전문가로 ‘양주(楊朱)’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자기만 알고 자기 것만 챙기는 이기주의자가 아닙니다. 자기애에 가득 차서 자기 모습에 심취해 다른 것은 볼 줄 모르는 나르시시즘도 아니었습니다. 양주가 주장한 “자신을 위하기(爲我)”, “자기를 귀하게 여기기(貴己)”는 삶을 긍정하는 자세를 강조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다른 무엇보다 자신의 소중함을 깨닫고 그 삶을 위할 줄 안다면 세상이 어지러울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양주는 삶 자체를 단순한 수단으로 여기는 모든 것을 배격했습니다. 세상에서 오직 자신의 삶이 소중하고 귀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디에도 구속받지 않는 자유인이 되기를 바랐습니다. 이런 양주의 사상은 도가(道家)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자신의 삶이 소중하다는 가르침은 성경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마태 16,26) /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19,19)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만큼 나의 삶이 소중하다는 뜻이겠지요. 이제 다른 이들과 비교하고 싶은 눈은 잠시 감고, 남에게 자랑하고 싶은 마음도 잠시 접어 두고, 하루 종일 만지작거리는 스마트폰도 잠시 내려놓고 나 자신을 바라봅시다. 나의 모습, 나의 마음, 나의 정신.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만들어 주신, 세상에 하나뿐인 나를 사랑해 줍시다. 그리고 이런 나에게 소중한 것들, 감사한 사람들을 생각하며 행복에 젖어 봅시다. 이런 자존감으로 충만할 때 우리는 열린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비교하는 마음 없이 다른 이들에게로 다가가 충만한 사랑을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