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아볼까요] 성사, 약함을 강함으로, 소외를 우리로 변화시키는 사랑
모든 성사 거행이 다함없는 하느님 사랑을 건네는 자리이지만 그중에서 성찬례는 그리스도교 입문성사를 완성시키며 우리의 모든 성사 생활의 중심이자 목표가 됩니다. 그렇기에 교회는 성찬례를 교회 생활과 사명의 원천이자 정점이라 가르칩니다.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께서 “몸으로 우리에게 오시어,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하여 당신의 일을 계속하시는 것”(베네딕토 16세 교황,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14항)이기에 그렇습니다. 성찬례는 사랑 자체이신 분께서 우리의 조건에 동참하시는 것이며 하느님 생명 전체가 우리를 만나러 오는 것입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완벽한 사랑의 친교에 참여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생명에 참여하고 그분과 친교를 이룸으로써 우리가 세상 안에 또 다른 그리스도로 살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세례와 견진은 성찬례 안에서 완성되고 다른 모든 성사는 이 성찬례를 지향합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사랑의 친교가, 우리와 우리 사이의 사랑의 친교가 성찬례 안에서 온전히 드러납니다. 이는 마치 같은 밥상을 나누는 이들을 한 가족이라 부르듯이 그리스도의 몸을 나누는 우리는 하나의 교회 공동체를 이룹니다. ‘주님 밥상’에서 이루어지는 성찬례는 오늘만이 아닌 영원한 천상 잔치를 의미합니다. 지금 여기서 이루는 주님 밥상에서의 나눔은 종말에 이루어질 하느님 사랑 안에서의 영원한 잔칫상을 미리 맛보는 것입니다.
성찬례의 이러한 특징을 베네딕토 16세 교황님은 다음과 같이 명료하게 설명해줍니다. “구원을 위한 당신 수난 전에 최후 만찬에서 당신 제자들에게 당신을 기억하여 행하라 하신 명령에서, 예수님께서는 역사 안에서 당신을 기원으로 하는 종말론적 모임의 표지이며 도구가 되어야 할 임무를 당신이 세우신 공동체 전체에 넘겨주고자 하셨습니다. 따라서 모든 성찬례 거행은 하느님 백성의 종말론적 모임을 성사적으로 실현합니다. 우리에게 성찬 잔치는 예언자들이 이야기하고(이사 25, 6-9 참조) 신약에서 “어린양의 혼인날”(묵시 19, 7-9)이라고 묘사한, 성인들과 이루는 통공의 기쁨 안에 거행될 마지막 잔치를 실제로 선취하는 것입니다.”(‘사랑의 성사’, 31항)
성찬례 거행은 하느님과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것
이처럼 성찬례 거행은 사랑의 관계 맺음, 곧 주님의 몸을 나누는 우리가 이미 혼자가 아닌 하느님과 사랑의 친교를 나누는 것이며, 한 성령 안에서 같은 몸을 나누는 우리 서로도 사랑의 친교를 이루는 것입니다. 더불어 성찬례 거행은 파스카 사건으로 이루어진 구원을 기억하며 육신 부활에 대한 희망과 신앙의 표지를 간직하고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 곁으로 떠나간 이들과의 사랑의 친교도 이룹니다. 성찬례는 이처럼 우리가 따로가 아닌 서로 함께임을 드러냅니다.
이러한 신앙 고백은 감사기도 제2양식에서 보호자 성령을 청하며 올리는 기도문에 잘 나타납니다. “간절히 청하오니 저희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어 성령으로 모두 한 몸을 이루게 하소서.” 성 바오로 사도는 성찬례와 이교 제사의 차이를 설명하며 ‘주님 밥상’ 안에서 우리 서로가 하나의 사랑의 관계를 이룬다고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가 축복하는 그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떼는 빵은 그리스도의 몸에 동참하는 것이 아닙니까?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 16-17)
그렇다면 이러한 성찬례에 초대받고 참여하는 이들은 누구일까요? 예수님의 말씀을 빌리자면, 그들은 바로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마태 11,28) 이들이며, “병자와 허약한 이들”(마태 4,24 참조), “의인이 아니라 죄인”(마태 9,13) 그리고 “가난한 이들”(이사 61,1-2; 루카 4,18)입니다. 이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바오로 사도가 자신을 “칠삭둥이”(1코린 15,8)라 여긴 부분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나 자신에 대해서는 내 약점밖에 자랑하지 않으렵니다.”(2코린 12,5)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리스도의 힘이 나에게 머무를 수 있도록 더없이 기쁘게 나의 약점을 자랑하렵니다.”(2코린 12,9)라고 선포합니다. 바오로의 이 고백은 십자가의 약함이 사랑의 충만임을 그의 삶과 믿음으로 고백한 것입니다.
성찬례가 드러내는 진리가 바로 이것입니다. 사랑의 충만을 열망하며 그리스도의 제단 앞에 스스로 자신을 낮추는 이들, 그 사랑이 나의 전부임을 고백하며 자신의 전부를 하느님께 내맡기는 참으로 가난한 이들,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듯이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는 이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겐 한없이 작아지는 이들, 죄로 인해 고통당하는 이들을 자매요 형제로 품어 안아주는 이들, 그리스도의 벗이 되기 위하여 스스로 가난하고 나약한 죄인임을 고백하는 이들이 사랑의 성찬례의 초대에 응답할 수 있는 이들입니다. 죄책감에 사로잡힌 모습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과 하나가 되는 희망으로 그렇게 고백하는 이들이 바로 그들입니다.
생기 있는 모든 삶의 원천은 성사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
레지오 마리애 단원뿐만이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첫영성체를 기억할 것입니다. 물론 어른이 되어 첫영성체를 하신 분도 있겠지만, 순박한 철부지 어린이로서 처음으로 성체를 받아 영하던 그때의 마음과 느낌을 떠올려본다면 성사 참여가 주는 감사와 감동을 다시금 새롭게 느껴볼 수 있을 것입니다. 순백의 작고 가냘픈 모습으로 성체와 처음 하나 되는 그 순간의 감동을 맛봅니다.
형제님들 중에는 입대 후 훈련소에서 처음으로 성찬례에 참여한 기억을 갖고 계시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가족과 친지와 떨어진 낯설고 외로운 군대에서 미사에 처음으로 참여하며 이유도 없이 가슴 뭉클해지면서 울었던 기억을 갖고 계실 겁니다. 그 울음은 슬픔이 아니라 낯선 타지에서 홀로 떨어졌다 느끼고 있는 순간에 하느님 사랑이 함께함을 가슴 깊이 느꼈기 때문일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시편 저자의 마음과 같습니다. “제가 부르짖던 날 제게 응답하시고 저를 당당하게 만드시어 제 영혼에 힘이 솟았습니다.”(시편 138,3)
생의 마지막 성체, 곧 노자성체를 영하며 하느님 사랑과의 온전한 하나 됨의 희망을 드러내는 분들의 모습을 잊을 수 없습니다. 그 희망은 “자기 목숨을 사랑하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이 세상에서 자기 목숨을 미워하는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이르도록 목숨을 간직할 것이다.”(요한 12,25)라고 말씀하신 그리스도께서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요한 10,15) 분임을 믿기에 생기는 희망입니다.
이렇듯 우리가 사랑으로 생기 있게 살아가는 모든 삶의 원천은 바로 성사에서 마주하고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그곳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남으로써 약하고 소외된 내가 아닌 충만하며 생명력 넘치는 나를 만나게 됩니다. 그렇기에 성찬례의 영성체 안에서 우리는 “주님, 제 안에 주님을 모시기에 합당치 않사오나 한 말씀만 하소서. 제 영혼이 곧 나으리이다.”라고 겸손한 기도를 바치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에 허기지고 목마른 이들을 위해 오늘도 예수 그리스도는 교회의 성찬례 안에서 우리의 밥상이 되어주고 계십니다. 그 밥상에 함께 둘러앉아 생기를 얻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이 성찬에 초대받은 복된” 자입니다. 하느님은 손수 당신 손으로 빚으신 우리를,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영원한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알아볼까요] 성사, 사랑의 진리이신 그리스도를 받아 입음
일상을 살아가며 우리는 사랑이란 낱말 때문에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며, 사랑이 머무는 것에 행복을 느끼기도 하고, 사랑의 빈자리 때문에 지독한 외로움을 느끼기도 합니다. 사랑 때문에 감히 짊어지지 못할 것 같은 버거운 일상도 기꺼이 짊어지며 사랑으로 충만하고 싶은 목적이 있기에 오늘의 삶에 용기를 내기도 합니다. 물론 잘못된 사랑의 이해로 폭력과 억압을 보기도 하고 그 속에서 자기 성숙이 아닌 불행한 결과를 맞닥뜨리기도 합니다.
달리 말하면, 사랑이란 낱말을 사용하든 사용하지 않든 간에 한 사람의 삶에서 사랑을 분리한다면 그 삶은 설명할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습니다. 어찌 보면 우리는 사랑에 의해 생명을 시작하고, 사랑에 의해 길러지며, 사랑을 향해 나아가고, 사랑의 충만을 위해 삶의 달음질을 지속합니다. 그렇기에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사랑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존재를 이렇게 말합니다. “인간은 사랑 없이 살 수 없다. 인간에게 사랑이 계시되지 않을 때, 인간이 사랑을 만나지 못할 때, 사랑을 체험하고 자기 것으로 삼지 못할 때, 사랑에 깊이 참여하지 못할 때, 인간은 자기에게도 이해할 수 없는 존재로 남게 되며 그의 생은 무의미하다.”(‘인간의 구원자’, 10항)우리는 매일 사랑을 드러내고 마주합니다. 사랑은 한 사람 한 사람 그리고 우리 모두의 시작이고 여정이며 목적지입니다. 우리 삶을 근본적으로 구성하며 그 삶을 자라게 하고 충만케 하는 필수불가결한 요소입니다. 성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공동체의 분열된 문제를 지적하며 한 성령을 받아 마신 그리스도인들 모두는 그리스도의 한 몸의 지체들임을 강조하면서 이 한 몸을 이루는 근본을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어질 믿음과 희망과 사랑이라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 중의 으뜸은 사랑이며 사랑은 결코 변두리 것일 수 없고 사라지는 것도 아닌 영원하고 근본적인 것이라 전합니다.
그렇기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모든 선물을 하나로 이루어주는 것은 사랑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다음과 같이 말해줍니다. “내가 인간의 여러 언어와 천사의 언어로 말한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요란한 징이나 소란한 꽹과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고 모든 신비와 지식을 깨닫고 산을 옮길 수 있는 큰 믿음이 있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모든 재산을 나누어 주고 내 몸까지 자랑스럽게 넘겨준다 하여도 나에게 사랑이 없으면 나에게는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1코린 13, 1-3)
예수님이 드러내신 사랑의 최정점은 바로 십자가
여기서 우리는 사랑이 세상의 한계를 넘어서는 영원한 신비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물건처럼 고정되고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 주시는 미래의 새로움을 향해 우리를 나가게 하기 때문입니다. 곧 하느님께서 종말에 이루어주실 사랑의 완성과 충만함에 대한 희망으로 지금 여기서 새롭게 나갈 수 있게 합니다. 이는 일상에서 우리가 발견하고 마주하는 사랑을 넘어서서 영원한 사랑의 완성이라는 신비를 바라보게 합니다. 있다가 시들고 사그라지는 사랑이 아닌, 어느 때가 되면 멈추고 끝나버릴 사랑이 아닌 늘 생기있고 싱그런 그러면서도 완성될 영원한 사랑을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 사랑의 신비를 사랑 자체이시며 하느님의 살아 있는 진리이신 예수님에게서 발견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사랑하시는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입니다.(요한 13,1 참조) 사랑의 성령 안에서 새로 태어나야 함을 니코데모에게 말씀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삼위일체 하느님이 사랑 자체이시며 그 사랑 자체인 당신 자신이 세상과 사랑의 관계를 맺기 위해 오셨다고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 16-17)
여기서 구원은 사랑 자체이시며 그렇기에 사랑의 진리인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그 사랑 안에 참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최고의 선물은 사랑 그 자체이신 예수님이며 그 예수님을 보고 만지고 먹고 받아들임으로써 우리는 구원된 이들, 곧 사랑이신 하느님과 사랑의 관계를 이루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드러내신 사랑의 최정점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이는 예수님 친히 우리에게 가르쳐주신 대로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 15,13) 하신 그 말씀을 십자가 위에서 이루셨습니다. 우리 사랑의 원천이며 영원한 사랑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이 바로 십자가에서 우리에게 자신을 내어주신 그 사랑 안에서 온전히 드러난 것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랑 충만한 그리스도의 모습을 자주 맞이합니다.
죽음의 고통을 넘어서며 하느님이 주신 사랑의 선물인 자녀를 출산하는 어머니의 모습에서, 자녀들이 하느님 사랑 안에 살아가기를 청하는 간절한 부모의 기도 안에서, 기아와 내전으로 인한 죽음의 상황 속에 머무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는 선교사들의 모습에서, 하느님과 하느님 백성을 위해 온전히 자신을 봉헌하며 제단 앞에 엎드린 사제들의 모습에서, 세상의 불의와 고통에 몸부림치며 묵주기도를 봉헌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에서, 사랑 자체이신 그리스도만을 온전히 받들며 살기로 서원하는 수도자들의 모습에서, 오늘도 가족을 위해 새로이 맞이하는 하루를 하느님께 봉헌하며 묵묵히 열심히 살아가는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하느님이 맡기신 터전을 가꾸는 농부들의 바쁜 손놀림에서, 나와 나에게 맡기신 이들을 하느님 사랑 안에 맡겨 드리며 레지오 단원이 바치는 정성 어린 까떼나 소리에서 우린 사랑의 그리스도를 만납니다.
성사는 하느님 사랑의 생명 전체가 우리를 만나러 오는 것
이러한 하느님 사랑의 신비와 진리를 드러내는 삶은 혼자만의 힘이나 또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신앙생활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의 우리에 대한 그리고 우리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을 완전히 드러내는 것은 바로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성사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진 구원과 사랑의 일곱 성사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사랑 자체로 현존하는 그리스도를 드러냄과 동시에 이 사랑과 하나가 됩니다.
성찬례는 십자가에서 완성하신 하느님 사랑의 정점인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통해 그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 사랑을 만나며, 세례성사는 파스카를 이루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들임으로써 사랑의 원천인 삼위일체 하느님과 사랑으로 결합됨을, 견진성사는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총을 통해 이 사랑을 세상 안에서 구체화하고 현실화시키는 충만한 사랑의 준비를, 고해성사는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화해하여 하나를 이루는 그 사랑이, 병자성사는 고통과 죽음 속에서도 현존하시며 영원한 사랑으로 동행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혼인성사는 교회와 사랑의 일치를 이루는 그리스도의 사랑이, 성품성사는 세상을 구원으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성사를 통해 이루도록 사제를 축성하는 그 하느님의 사랑이 충만하게 드러납니다.
성사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사랑을 우리가 얻어 누림으로써 하느님은 구체적인 방식으로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시고, 그럼으로써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아 입은 우리는 우리 삶 속에서 그리스도께서 거저 베푸시는 사랑을 세상에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곧 성사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사랑과 결합됨으로써 일상의 우리 삶 전체가 하느님 마음에 드는 사랑의 예배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분의 사랑을 받아 입지 않고 사랑하며 살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사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 사랑에 젖어 들지 않은 채 내 삶이 사랑 안에서 시작하여 사랑의 완성을 향한 신앙인의 여정을 걸어가고 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사는 하느님 사랑의 생명 전체가 우리를 만나러 오는 것이며 우리는 그 생명을 얻어 누립니다. 친구인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사랑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신 사랑 자체이신 그리스도는 오늘도 같은 양식을 우리에게 내어주십니다. 이 사랑의 양식을 먹고 받아들일 때, 우리도 사랑의 진리이신 그리스도로서 더욱 활기차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알아볼까요] 성사, 하느님 사랑과 만남 그리고 사귐
20대 초반 청년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하던 시기,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통상적으로 평일 미사 후에 레지오 마리애 주회가 있었습니다. 그 당시 미사 강론에서 본당 신부님이 자주 하시던 말씀이 기억납니다. “미사 봉헌이 있는데도 미사에 참여하지 않고 레지오 회합만을 참석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때에는 왜 저런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그 의미를 잘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평일 저녁 미사에서 유독 비슷한 말씀을 자주 하셨는데, ‘평일에 레지오 마리애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직장이나 생업에 관련된 일을 하다가 미사 시간에 못 맞추고 레지오 회합만 겨우 참여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는 거 아닌가? 그런 분들은 일부러 미사를 빠지는 것 같지 않은데 왜 신부님은 그런 사정을 헤아리지 못하시지’라는 생각을 했었습니다.
레지오 마리애 단원들이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이 바로 성체성사 안에 있으며, 그 미사가 그 목적을 지금 이 자리에서 체험하게 해주는 살아있는 장(場)임을 그때는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그 목적은 바로 첫 번째 감실이셨던 성모 마리아께서 그러하셨던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룸으로써 오늘 여기서 나 자신이 성령의 도움으로 새로운 그리스도인, 곧 성령의 도유를 통해 새롭게 거듭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손수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듯이 그리고 사랑하여 만나러 왔고 함께 사셨듯이 당신을 닮기 위해 당신을 만나고 사귀기 위하여 ‘서로 사랑하라’는 계명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당신을 닮는 사랑 안에 당신 또한 세상 끝날까지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을 통해 이 계명 실천이 우리만의, 우리 만에 의한 사명이 아니라 당신의 계속되는 구원 역사임을 드러내셨습니다.
우리와 세상 끝날까지 함께하시겠다는 약속은 예수님의 사랑에 충만한 공생활과 파스카 사건에서 흘러나오는 성사를 통해 교회 안에서 지속됩니다. 그렇기에 성사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하심을 드러내는, 그리고 그분 사랑으로 가득 찬 보물창고입니다. 이 성사 안에서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충만한 사랑을 만나고 그 사랑을 나누고 사귐으로써 세상 안에서 또 다른 예수 그리스도, 곧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갑니다.
성사는 하느님과의 충만한 데이트
그리스도인은 ‘성령의 도유를 받은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의 도유를 받은 그리스도, 곧 구원자(메시아)이셨듯이 우리는 성사를 통하여 성령 안에서 그분을 만나고 그분과 사귀고 사랑에 빠집니다. 그렇기에 성사는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과 사랑을 나누게 하는 살아있고 생기 넘치는 하느님과의 데이트입니다. 이 안에서 우리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거듭나게 됩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나누고 사귀는 이들은 시나브로 서로를 닮아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과의 충만한 데이트 안에서 서로의 사랑을 키워나가는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 사랑이 완성”되며 “그분 안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1요한 2,5) 성사는 바로 하느님 사랑 안에 머무르는 사람이고 그리스도께서 살아가신 것처럼 그렇게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사의 의미를 요한 사도는 자신의 첫 번째 편지 3장 23절과 24절에서 잘 보여줍니다. “그분의 계명은 이렇습니다. 그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 서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은 그분 안에 머무르고, 그분께서도 그 사람 안에 머무르십니다. 그리고 그분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신다는 것을 우리는 바로 그분께서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알고 있습니다.”
레지오 마리애가 근본으로 지향하는 하느님과의 일치가 성사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사귐으로써 이루어진다는 것을 단원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한 단원들의 성사 생활을 지난 2년여의 코로나 상황이 어렵게 만든 것도 사실입니다. 코로나로 인한 성사 참여의 어려움은 하느님 사랑에 일치된 삶을 어렵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시기를 통해 우리가 새롭게 깨닫고 얻은 것도 있습니다. 그것은 크게 두 가지일 것입니다.
하나는 그동안 우리가, 성사가 주는 근본적인 의미를 마음에 깊이 담고 살지 못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성사가 주는 풍요로움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절실히 느끼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성사에 자유롭게 참여할 수 있었던 그때에는 성사가 전하는 사랑의 하느님과의 만남과 사귐은 우리 삶에서 큰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였습니다. 오히려 더 즐거운 일상을 성사가 가로막고 방해한다고 생각하였던 적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참여가 코로나로 어려워지면서 성사를 통한 사랑의 충만함을 채우지 못하는 갈증과 목마름이란 호된 경험을 치러야 했습니다.
이제 코로나 상황이 안정되면서 성사 참여의 기회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하느님 사랑에 일치함으로써 놀라운 신앙의 모범을 드러내신 성모 마리아를 닮은 레지오 마리애 단원으로 거듭나기 위하여 하느님 사랑을 만나고 그 깊은 만남 속에 우리 마음과 삶을 하느님 사랑으로 충만케 할 성사 참여의 기회가 소중하게 다가온 것입니다.
하느님은 성사 안에서 우리를 만나고 우리의 사랑을 원하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힘든 것은 서로 함께 사랑 안에서 만나고 사귀면서 사랑으로 더욱 충만해지지 못하는 때와 맞닥뜨리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이와 떨어져 지내본 분들은 이러한 고통을 체험해봤을 것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은 성사 안에서 우리를 만나러 오시고 우리의 사랑을 받고자 하십니다. 그렇게 우리와 깊은 사랑의 사귐을 성사 안에서 갖기를 원하십니다. 그 사랑의 데이트를 통해서 우리가 사랑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기를 바라십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교 생활의 완성과 사랑의 완덕으로 부름 받고 있습니다.”(제2차 바티칸 공의회, ‘교회헌장’, 40항) 곧 우리를 하느님과 이웃과 하나로 일치시키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우리가 사랑 충만한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이러한 소명은 “세례성사 안에 뿌리박고 있으며, 다른 성사들, 주로 성체성사 안에서 새롭게 제시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다시 입고 그분의 성령으로 새롭게 되었으므로”(요한 바오로 2세의 권고, ‘평신도 그리스도인’, 16항) 바로 여러분은 ‘거룩’합니다. 성사 안에서 전달되는 하느님의 “사랑이 없으면 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1코린 13,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