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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36) 인간 행복을 보장하는 정당한 법의 기초: 자연법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4|조회수47 목록 댓글 0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36) 인간 행복을 보장하는 정당한 법의 기초: 자연법

자연법 따르는 정당한 법만이 참된 선과 행복 실현 위한 버팀목

 

지난 회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법이 인간이 지닌 이성적 본성을 실현하고 공동체 안에서 번영을 이룰 수 있도록 보호하는 울타리 역할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그렇지만 그는 결코 소크라테스의 말로 오해되어 널리 퍼져나갔던 악법도 법이다라는 주장에 동의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악법이란 법이 아니라 법의 타락”(I-II,95,2)이나 폭력”(96,4)이라고 주장했다. 만일 어떤 법이 공동선을 지향하지 않고 특정 집단의 이익이나 권력자의 욕망을 위해 작동한다면, 그것은 법의 본성을 잃은 것이다. 이런 경우 법치주의의 위기를 넘어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 된다. 그래서 법의 정당성은 형식이나 절차만으로 결정되지 않고, 그 내용이 정의와 선에 부합하는지에 의해 판단되어야 한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많은 규칙이 법의 형식을 갖추고 있었지만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경우들도 있었다. 인종차별을 제도화한 법, 특정 종교나 민족 집단의 권리를 박탈한 법, 정치적 반대자를 침묵시키기 위해 제정된 긴급조치 등은 모두 외형상 법일 수 있다. 그러나 토마스의 기준으로 보면, 그것들은 공동선을 지향하는 이성의 질서가 아니라 권력의 왜곡된 의지를 제도화한 것에 가깝다. 나치 독일의 인종차별법이나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Apartheid) 법제는 이런 점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특히 현대 사회가 직면한 실증주의의 위기 속에서, 도덕적 기초가 결여된 법은 인간의 양심을 따르기는 커녕 사회적 혼란만을 야기할 뿐이다. 법의 보호적 기능과 타락 가능성 사이의 긴장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법의 기준을 명확히 세우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렇다면 그 기준에 대한 근본적인 물음이 제기된다. 과연 무엇이 정당한 법을 정당한 법이게 하는가? 토마스의 대답은 자연법과 영원법의 관계 속에서 제시된다.

자연법의 제1원리: ‘선을 행하고, 악을 피하라

토마스는 우선 사변적 학문의 영역에서 이성의 제일원리인 모순율이 있는 것처럼, 도덕의 영역에는 선을 행하고 추구하며, 악을 피해야 한다’(I-II,94,2)는 윤리의 제1원리가 있다고 주장한다. 극히 단순해 보이는 이 원리에서 제시된 객관적인 선이 무엇인지를 토마스는 자연법(lex naturalis)’의 사상 안에서 찾는다.

이미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스토아학파 그리고 특히 아우구스티누스는 자연적인 윤리 법칙이라는 사상과 용어를 사용했다. 토마스는 이를 받아들여, 이성적인 피조물은 영원한 이성 자체를 분유하게 되어, 그것을 통하여 마땅한 행동과 목적으로의 자연적 경향성을 갖는다”(I-II,91,2)고 말한다. 이러한 인간의 도덕률은 인간의 본성 자체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자연법이라고 불린다.

따라서 자연법은 인간 안에 새겨진 선()의 기준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인간은 자연적으로 생명을 보존하려 하고, 진리를 알고자 하며, 타인과 함께 사회를 이루어 살고자 한다. 이러한 성향들은 단순한 본능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선한 방향을 드러낸다. 따라서 법은 이런 기본 성향들을 보호하고 질서 있게 실현하도록 도와야 한다. 예를 들어서, 생명 보존의 성향은 살인 금지와 안전 보호의 기초가 되고, 진리 추구의 성향은 교육과 양심의 자유를 뒷받침하며, 사회적 삶의 성향은 정의와 약속의 준수라는 원리로 이어진다. 자연법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 위한 최소한의 도덕 질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인간이 만든 인정법은 이러한 자연법에 어긋나면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 그렇다면 이성에 의해서 반포된 자연법은 어떠한 초월적 근거도 지니고 있지 않을까? 토마스는 자연법을 이성적 피조물의 영원법에 대한 참여(participatio)’(I-II,91,2)라고 정의한다. , 모든 인간이 이성적으로 동의할 수 있는 자연법도 그 뿌리를 신적인 영원법에 두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가 말하는 영원법이란 무엇인가?

법의 형이상학적 토대: 영원법

영원법(lex aeterna)’은 온 우주를 다스리는 신적 지혜 그 자체로서, 모든 피조물을 각자에게 적합한 행위와 목적으로 인도하는 궁극적인 근거가 된다.(I-II,93,1) 토마스는 자연법이나 영원법이 자의적이거나 독단적이라는 주장을 피하기 위해, 영원법이 본래 신의 의지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 본성의 범형적인 이데아를 생각하는 신의 지성에 근거함을 밝혔다. 우주의 질서와 만물의 운동은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 영원법에 의해 규정된 목적론적 체계 속에 존재한다.

따라서 모든 정당한 인간 법체계는 영원법이라는 거대한 질서의 한 부분으로 이해되어야 하며, 인간의 법은 영원법이 가리키는 객관적 진리를 반영할 때만 진정한 법으로서의 권위를 갖는다.(I-II,93,3) 영원법은 법이 권력자의 자의적인 의지로 변질되지 않도록 막아주는 최후의 보루가 된다. 인간은 이 영원법 전체를 직접 파악하지는 못하지만, 이성적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에 참여할 수 있다.

자연법을 통한 인간 존엄과 행복의 수호

토마스 아퀴나스가 정초한 자연법과 영원법의 체계는 인간의 행복을 지키기 위한 가장 견고한 형이상학적 울타리다. 인간이 추구하는 영원한 행복(지복직관)이 그의 자연적 능력을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에, 인간은 신의 힘으로 주어진 영원법에 의해서 인도되어야 한다. 이러한 토마스의 통찰은 현대 법치주의가 망각하기 쉬운 도덕적 좌표를 제시한다.

법은 힘의 논리가 아니라 인간 존엄성이라는 보편적 실재를 수호하기 위한 이성적 기획이어야 한다. 이 점은 현대 인권 개념과도 밀접하게 연결된다. 표현의 자유, 양심의 자유, 평등권, 신체의 자유와 같은 기본권은 국가가 임의로 부여한 혜택이 아니다. 그것들은 인간이 인간으로서 마땅히 존중받아야 할 존엄을 지키기 위한 조건들이다.

토마스의 사상은 인간 존엄성이 법적 관습이나 합의에 의해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영원법에 참여하는 이성적 본성으로부터 유래하는 형이상학적 실체임을 일깨운다. 자연법은 실증법이 저지를 수 있는 자의적인 횡포에 맞설 수 있는 절대적인 비판 기준을 제공한다. 결국 자연법을 따르는 정당한 법만이 인간을 억압하거나 통제하지 않고, 모든 인간이 자신의 본성적 선을 온전히 실현하고 공동체 안에서 진정한 행복에 도달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1) 우리는 어디에 서 있는가 우주론적 상상

우주적 실재 앞에서 하느님에 대한 우리 신앙의 의미는?

 

일상에서 만난 작은 경이(驚異)

미국에서 공부할 때 학교 도서관에서 학술지와 잡지를 읽는 일이 작은 즐거움이었다. 특히 세계 각 지역에서 발행되는 신학 학술지들을 도서관 한 귀퉁이에 앉아서 읽는 재미는 쏠쏠했다. 학술지를 통해 각 지역의 학문적 특성과 최신 동향을 가장 잘 알 수 있었다. 내 공부의 시작점은 언제나 학술지와 잡지 읽기였다. 그 읽기 가운데 만난 가장 인상적인 글 하나는 예수회 신부 월터 옹(Walter J. Ong)의 짧은 에세이였다. 현대 과학이 발견해낸 우주의 압도적 크기와 생명 진화의 현상 앞에서 창조에 대한 신앙적 신념들과 우리 인간들의 위치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에 관한 정직한 질문과 자신의 솔직한 소회를 적은 글이다. 종교와 과학에 대한 많은 논의들이 발전한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살짝 유치한 글이기도 하다. 하지만 2000년도의 나에게는 작은 경이감을 선사한 글이었다. 그 글은 적어도 나에게는, 우리가 살아가는 자리의 시공간적 위치를 우주론적 관점에서 늘 상상하게 하는 모티프를 제공했다.

요즘 옆집에 살고 있는 동기 신부와 거의 매일 저녁 산책을 한다.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동네여서 시골의 풍경을 만끽할 수 있다. 저녁 무렵의 시간을 걷는 일은, 동기 신부와 내가 누릴 수 있는 하루의 작은 행복이다. 산책이 끝날 때쯤이면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다. 동네 끝자락에 있는 작은 다리 위에서 우린 늘 밤하늘을 쳐다본다. 저기 북두칠성이, 토성이, 샛별이, 카시오페아가, 별로 많이 알지도 못하는 별자리 지식이지만, 신기한 듯 어린이처럼 말하는 우리를 발견한다. 별을 보지 못하는 흐린 날은 괜히 기분 안 좋다고 투덜거린다. 별을 보는 순간만은 우리는 늙음의 슬픔도 잊고 어린 시절의 동화로 돌아간다. 또한, 저 우주의 광활함 속에서 우리는 작은 먼지에 불과한 존재이기에 겸손하게 그리고 지금 여기의 삶을 소중히 살아야겠다고 마음 깊은 곳에서 무의식적 다짐을 한다.

정교하게 조율된 우주인가

오늘날 우리가 몸 담고 있는 이 우주가 얼마나 광활한지, 그 시공간적 규모가 얼마나 엄청난지, 우리는 이제 안다. 물론 자주 잊고 산다. 우리 은하계가 수천억 개의 별들로 되어있고, 우리 은하 역시 1조 개가 넘는 은하 중 하나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광대한 우주 역시 다중 우주의 하나에 불과할 수도 있다는 천문 물리학 이론들을 접할 때, 비록 제대로 이해할 수는 없지만, 잘 상상이 되지 않는 그 압도적 현실 앞에서 내가 가진 신학적 지식과 신념이 흔들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름답고, 경이롭고, 수수께끼 같은 우주의 현실 앞에서 우리의 생각과 신념은 과연 어떻게 될 것인지. 한 탁월한 물리학자는 말한다. “우주를 이해하려는 노력은 인간의 삶을 광대극에서 조금은 벗어나게 하고, 인간의 삶에 한 가닥 비극의 품위를 불어넣는다.”(스티븐 와인버그) 이 서늘한 무신론적 통찰에 우리는 어떻게 반응할 것인지.

우리를 당황하게 하는 이 광대한 우주적 실재 앞에서 하느님에 대한 우리 신앙의 의미가 무엇일까. 객관적 실재에 대한 신앙 주체적 반응은 교회 안에서 자연신학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어왔다. 신학적 이해와 설명을 통해 신앙적 실존은 안정성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신학은 자연을 이해하는 방식보다는 인간의 변화와 구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인간의 위치와 삶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이 압도적 실재에 대해 신학은 나름의 설명과 의미를 찾아야 한다. 오늘의 자연신학은, 자연 속에 정교한 조율이 있고 자연 현상 안에는 인간중심 원리가 있다는 가설과, 우주의 우연들 속에 어떤 경이의 원인이 있다는 원인론적 관점에서 하나의 실마리를 찾으려 한다.(알리스터 맥그래스)

생명 진화는 하느님의 자기 비움인가

과학자들은 우주의 역사를 약 138억 년으로 추정한다. 지구의 역사는 우주의 탄생 후 90억 년 뒤에 시작된다. 지구에서 생명의 역사는 지구가 탄생 되고 10억 년 뒤인, 38억 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본다. 단세포 생명체에서 진화되어 식물이 되기까지는 다시 30억 년이 더 걸렸다고 한다. 인류의 역사는 대략 700만 년으로 추측한다. 현생 인류는 400만 년 전 아프리카의 직립 보행인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호모 사피엔스는 겨우 25만 년의 역사를 갖고 있고, 문자 이후의 인류사는 만년도 채 안 된다. 생명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생명체 안에 마음과 감정과 의식은 언제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떼이야르 샤르댕이 말한 것처럼, 마음은 우주의 시작부터 물질 속에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이 긴 생명의 진화 여정 속에서 하느님은 어떻게 관계하고 있었던 것일까?

138억 년이라는 엄청나게 긴 진화의 현실 앞에서 하느님의 전능이라는 개념과 창조 교리는 문제에 봉착한 것 같다. 신학과 과학의 공명을 찾는 신학자들은 케노시스 개념에 대한 확장된 이해를 통해 신학적 난제를 해결하려 한다. 하느님은 창조 세계에 부여한 자유를 억누르지 않는다. 자기 비움과 자기 내어줌이 하느님의 존재 방식이다. 능력과 성취라는 인간적 관점에서 보는 전능함이 아니라 당신을 내어주는 사랑에 전능하신 분이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하느님은 창조 세계의 인과관계에 개입하는 분이 아니다. 창조 세계의 자연법칙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것이다. 케노시스는 자신을 규제하는 비움이 아니라 모든 것을 내어주는 하느님 사랑의 본성에 기인한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어떤 신학자들은 가톨릭이라는 개념 안에 우주적 보편성을 향한 지향과,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궁극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사유와 의식이 담겨있다고 주장한다.

새로운 상상과 겸허함

신학은 신앙적 관점과 사유 체계 안에서 하느님과 인간과 세계(자연)를 이해하려는 노력일 뿐이다. 신학의 논리 체계 안에서 모든 것이 다 명쾌하게 해명될 수는 없다. 신학적 인식과 상상은 그 당대적 상황의 산물일 뿐이다. 사유와 인식의 한계를 고백하자. 그리고 상상력을 조금 확장해보자. “천년도 당신의 눈에는 지나간 어제 같고”(시편 90,4), “주님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습니다”(2베드 3,8)라는 성경적 상상은 오늘의 우주적 상상의 문맥에서 낡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느님의 신비는 말할 것도 없고, 우리는 자연의 신비, 즉 우주와 생명의 기원과 의미에 대해서도 만족스러운 설명을 할 수 없다. 몇십 억 년 뒤 태양이 늙고 팽창하면 지구는 생명이 더 이상 존재하지 못하는 행성이 되고 화성과 다른 행성이 또 다른 생명의 거주지가 될 수도 있다고 한다. 우리는 몇백 년 뒤의 일도 상상하지 못하는데 하물며 몇십억 년 뒤의 일은 또 어떻게 상상할 수 있으랴. 하지만 과학적 발견들은 늘 우리를 겸손하게 하고, 새롭게 상상하도록 요청한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2) 우리는 서로 말을 나누고 있는 것일까? - 공동합의성에 관한 하나의 단상

다양한 교회 구성원의 정직한 목소리 존중·경청돼야 한다

 

공동체 안의 대화와 회의 문화

신부로 살다 보니 회의를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신부들과의 회의도 있고, 수도자와 신자들과 함께 하는 회의도 있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형태의 회의들이 있고 저마다의 방식으로 운영되고 있다. 솔직히 고백하면, 세상의 모든 공식적 회의들은 지겹다. 뜻 맞는 사람들끼리의 사적 모임과 대화는 즐겁지만, 공적 회의는 언제나 불편하고 힘들다. 적어도 내가 참여한 교회의 많은 회의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정직한 의견 표명과 진솔한 대화가 이루어지기보다는 의례적이고 형식적인 말들이 난무한다. 회의 구성원들이 대등한 입장에서 서로의 의견을 말하기보다는 지위에 따른 불평등한 의견 표현과 수렴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다. 교회의 회의는 자주 위계적이다. 교계적 구조가 교회의 삶과 문화 속에 깊이 뿌리내려져 있음을 발견한다. 위계적 구조에서 평등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나누기는 정말 어렵다. 물론 현실 교회가 교계적인 제도인 이상, 식별과 결정은 위계적인 구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하지만 참여와 대화는 평등한 방식으로 이루어지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함께 의논하고 함께 일하는 것은 어디서나 쉽지 않다. 역할 분담의 문제, 역할의 차이에 따르는 질서와 책임의 문제, 질서와 책임의 무게가 필연적으로 가져오는 차별의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어처구니없는 상상일 수도 있지만, 그래도 교회의 회의가 세속의 회의보다는 덜 위계적이지 않을까? 세속의 일반 회사들의 회의는 어떨까 가끔 상상해본다. 아마도 우리 교회보다 더 위계적이지 않을까? 사장과 부장과 과장과 대리와 평사원이 동등하게 회의에 참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정부 기관과 군대의 회의 역시 더 위계적이지 않을까? 이런 엉뚱한 상상을 하며 위안을 삼는다. 사실, 교회는 집단과 조직이 아니라 공동체다. 공동체의 회의는 집단과 조직의 회의와는 다를 것이고 또 달라야 한다.

말의 무게도 자본과 지위에 따라 달라지는가

가끔 의문이 든다. 모든 인간은 정말 평등한지 말이다. 물론 근대 이후 인류는 적어도 형식적 민주화는 이루었다. 귀족과 평민, 양반과 평민의 형식적 구별은 사라졌다. 하지만 세상에는 여전히 신분질서가 존재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다. 부모로부터 물려받았든지 스스로 성취한 것이든지 간에, 자본을 많이 소유한 사람은 이 자본주의 사회에서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대통령, 국회의원, 검사, 의사 같은 사회적 지위와 권력을 가진 사람 역시 특별한 인정을 받는 것 같다. 자본과 사회적 지위는 여전히 사람들 사이에 어떤 보이지 않는 경계와 질서를 낳는다. 세상이라는 인정투쟁의 장에서 사람들이 돈과 권력적 지위에 목숨을 거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슬픈 일이다. 너무 부정적인 시선인가?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현실을 냉정하게 분석하는 것이 실제적 변화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사적 대화의 장이나 학문적 토론의 장에서는 의견과 주장의 논리와 설득력에 무게중심이 놓인다. 누가 어떤 지위에서 주장하고 말하는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조직과 집단의 회의 안에서, 말의 무게와 설득력은 논리적 정합성과 설득력의 여부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자주 목격한다. 모든 참여자가 동등한 자격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서로의 생각과 의견을 조정하면서 어떤 바람직한 결정의 방향으로 나아가는, 그런 회의가 가능할까?

공동합의적 여정

프란치스코 교황은 2021년에서 2023년까지 3년에 걸친 시노드의 과정을 시작했다. 이 공동합의적 여정은 교구와 국가와 대륙적 차원의 과정을 거쳐 보편교회 차원으로 확장된다. 202310월 로마에서 열리는 제16차 세계주교대의원회의가 정점이다.

공동합의성이 교회 공동체의 생활 방식과 행동 방식이 되기를 프란치스코 교황은 간절히 원하고 있다. 공동합의적 여정 안에는 하느님 백성의 친교와 참여를 통해 교회의 사명 수행을 강화하려는 비전과 지향이 담겨있다. 물론 현실 교회가 과연 얼마나 공동합의적 지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지, 또 그 여정에서 발생하는 어려움과 위험이 무엇인지에 대한 생각은 학자들마다 조금씩 다르다. 한편으로, 지역 교회들의 사정과 개별 주교들의 협력과 능동적 참여의 방식에 따라 결과가 달라질 것이라고 추측되기도 한다. 하지만 교회 역사가들과 신학자들은 이 여정이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가장 큰 교회적 행사이며 교회 구성원들에 대한 전례 없는 초대임을 강조한다. 특정한 주제와 특별한 사람들이 교회의 대화를 독점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구성원들 모두에게 교회 안의 모든 문제에 대해 자유롭게 대화하기를 요청하는 초대이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오랫동안 소외되었던 여성들과 젊은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는지의 여부에 시노드 여정의 결과가 달려있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공동합의적 태도와 방식

진정한 쇄신은 구조의 변화와 의식과 문화의 변화가 함께 이루어질 때 가능하다. 하지만 현실에서 법과 구조의 변화는 언제나 늦다. 생각의 방식과 문화의 변화가 시작점이 될 수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사목적 회심을 강조하는 이유다.

공동합의적 태도는 토론과 논쟁과 투표의 과정을 밟는 의회주의적 형식을 뜻하는 것이 아니다. 경청과 대화와 소통과 친교를 지향한다. 토론과 논쟁이 상대의 약점을 찾는 일이라면, 경청과 대화는 상대의 장점과 가치를 찾는 일이다. 공동합의적 방식은 투표가 아니라 식별과 수용의 방식을 택한다. “결정에 도달하려는 작업은 공동합의적 과제이고, 결정을 내리는 것 자체는 직무적 책임인 것이다.”(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공동합의성69)

공동합의적 방식은 권력’(Power)의 방식이 아니라 권위’(Authority)의 방식이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권력과 권위를 구별하는 지혜가 절실히 필요하다. 권력은 강제하는 힘이고 권위는 설득하는 능력이다. 권력은 수동성과 피동성을 낳지만, 권위는 참여와 능동성을 유발한다. 예수는 권력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권위가 있는 존재였다. 예수의 말과 행동은 권위가 있었다. 명령과 강요가 아니라 동의와 수용을 끌어낼 수 있는 권위의 존재가 교회 안에 절실히 요청된다. 권위는 지위의 높이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신앙과 영성과 인격의 깊이에서 온다.

공동합의적 교회가 되기 위해서는, 교회 구성원들의 참여를 끌어내고 그들의 목소리가 존중되고 경청되고 있음을 느끼게 해야 한다. 진정한 대화는 정직한 의견 표명이 가능할 때 시작된다. 말할 수 있는 자리와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 어느 대교구에서 신자, 수도자, 성직자 각 14명씩 참여하는 하느님 백성의 대화를 시작했다는 뉴스를 봤다. 우선 이렇게 시작하면 되지 않을까?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3) 가르치고 배우는 이야기

세상을 배우는 교회, 진정한 복음 선포는 그 길에 있다

 

선생의 즐거움

신학교 선생으로 한 시절을 지냈다. 젊은 신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호흡을 맞추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기성의 때가 아직 덜 묻은 청춘들의 생각과 이야기를 듣는 일은 그 자체로 나를 정화시키는 과정이다. 가르침과 배움은 상호순환적이다. 신학교에서 학과목을 강의할 때, 시험을 치지 않았다. 늘 글쓰기 과제를 주었다. 스스로 생각하고, 자기의 언어로 말하고, 자신의 글을 쓰는 것을 강조했다. 시험지 채점이 아니라, 신학생들의 글을 읽는 일은 또 다른 즐거움이다. 물론 모든 글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정직한 생각과 정직한 말과 정직한 글은, 내용의 인식적 수준과 관계없이, 읽는 즐거움을 선사한다. 아하, 요즘 세대는 이렇게 생각하는구나. , 이 주제에 대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네. 배움의 연속이다. 처음에는 자기 글쓰기가 어색하고 서툰 학생도 있지만, 몇 학기를 거치면서 점점 달라지는 글쓰기를 보는 일도 기쁘다. 자기의 생각과 말과 글을 벼려가는 학생들을 지켜보는 즐거움이 크다. 신학적 주제와 책과 영화에 대해서 자신만의 고유한 시각으로 읽어낸 글들에 감탄한 적이 많다. 솔직히 고백하면, 어떤 글들은 그 주제에 대한 내 시각보다 훨씬 더 뛰어난 통찰을 담고 있다. 신학생들의 글을 읽을 때 나는 선생이기보다는 학생이 된다. 그들에게 배운 게 더 많았다는 뜻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존재와 신분과 지위에 따르는 만남이 아니라, 이야기와 이야기의 만남이어야 한다. 나의 이야기와 너의 이야기가 만날 때, 관계와 친교의 넓이와 깊이가 심화된다. 진정한 만남이란, 이야기와 이야기의 만남, 살아온 역사, 사연, 솔직한 생각과 관점들, 마음의 무늬들 간의 평등한 만남이다. 인종, 성별, 나이, 선후배, 지식, 지위, 신분에 의한 차등적 만남이 아니다. 진정한 만남 안에는 가르침과 배움이 언제나 동시에 발생한다.

신학교 선생 시절, 세대를 넘나드는 만남의 즐거움을 누렸다. 물론 강의 시간에 말을 우선적으로 독점할 수 있는 권한을 지녔기에, 자기 말에 취해 열정을 쏟은 기억도 많다. 일방적 강의와 가르침은 자기만족과 지적 권력 행사로 전락할 위험이 늘 있다. 선생의 진정한 즐거움은 가르침이 아니라 배움에 있다는 것을 요즘 다시 깨닫는다.

내용보다 방식이 더 중요할 수 있다

무엇을가르치고 배우는가의 문제보다 어떻게가르치고 배우는가의 문제가 더 중요할 수 있다. 아무리 좋은 내용이라도 전달하는 방식이 그 내용과 어긋날 때, 그 진정한 의미가 상실될 위험이 있다. 참된 가르침과 배움은 강요와 주입의 방식이 아니라 언제나 열린 대화의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철학자 김영민은 강의 중에 자기 식대로 말하지 않고 학생들의 말에 응대하는 방식으로 자신의 생각을 밝히는 원칙을 갖고 있다고 한다. “능동적이며 섬세한 말의 교환과 교차만이공부와 실력을 키우는 방식이라고 주장한다.(김영민의 공부론) 대화는 가르침과 배움이 동시에 발생하는 자리다.

가르침과 배움이 이루어지는 공간의 지적, 정서적, 공동체적 분위기 역시 중요한 요소다. 탁월한 교육 행동가 파커 파머(Parker J. Palmer), 교육은 진리의 공동체가 실천되는 공간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여긴다. 가르침과 배움이 이루어지는 공간 자체가 진리의 공동체로 변화되지 않는 한 깊고 만족스런 가르침과 배움을 가질 수 없다. 선생과 학생, 학생과 학생 사이에 신뢰의 공동체가 형성될 때 진정한 가르침과 배움이 발생한다. 열린 마음과 태도로 정직하게 묻고 답을 찾아간다면 진리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신뢰가 형성되는 공간을 창출하는 것이 먼저라는 의미다.(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철학자 김영민 역시, 장소의 중요성에 대해 이와 비슷한 견해를 말한다. 예수는 자신의 존재를 장소로 빚어 신을 내려오게 하고 사람들을 불러모아 머물게 하였다는 것이다.(차마, 깨칠 뻔하였다) 결국, 가르침과 배움이 이루어지는 공간이 어떤 모습인지에 대해 항상 성찰해야 한다는 뜻이다.

가르치는 교회, 경청하고 배우는 교회

교도권이라는 말이 의미하듯이, 일반적인 교회의 이미지는 늘 가르치는 교회였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르치는 교회뿐만 아니라 경청하고 배우는 교회를 강조한다. 현대 신학은 교도권에 관해 달라지고 확장된 이해를 제안한다. 교도권을 교리와 법을 규정하고 제정하는 좁은 의미로 이해하기보다는 교회 안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넓은 의미의 기능과 역할로 이해한다. 물론 교리와 법을 규정하고 제정하는 권한은 교황과 주교단에 있다. 하지만 교회 안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기능과 역할은 주교들에게만 있는 것 아니라 신학자와 신자 모두에게 있다. 교회의 구성원들은 서로 서로에게 배우고 가르칠 수 있어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교도권과 교의의 선교적이고 사목적인 지향성에 대해 강조한다. 교도권과 교의는 그 자체가 아니라 교회의 선교와 사목을 위해 존재한다. 교도권과 교의는 복음 선포를 지향하는 것이며 교회의 사목적 삶 안에 놓여있는 것이다. 교도권은 교의의 규범적 주장들과 신자들이 실제로 처해 있는 사목적 현실이 갖는 긴장관계를 끊임없이 해소하려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교회의 가르침에 관한 타협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구체적 현실 속에서 선교와 사목을 지향하는 교의에 대한 진정한 해석을 의미한다.

가르침과 배움의 영성

경청하고 배우지 않는 사람은 가르칠 수 없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다. 교회는 하느님 말씀의 수호자이지만 동시에 언제나 하느님 말씀의 경청자이며 수용자이다. 교회가 세상과 사람의 삶과 사연을 경청하고 배우지 못하면, 교회의 선포는 그저 허공에서 맴돌 뿐이다. 교회는 세상과 사람들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야 한다.

시인 이성복은 주장한다. 스승을 갖지 못한 자는 스승이 될 수 없다. 선생은 늘 자기를 성찰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가르치는 것을 무엇보다 자신에게 먼저 적용할 줄 아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좋은 선생은 언제나 더 큰 선생으로 인도할 줄 아는 사람이다. 선생은 언제나 매개자다. 선생은 잠시 맡은 자리일 뿐이다. 어느 시점에 주어진 배역으로서 선생일 뿐이라는 의미다.(끝나지 않는 대화) 존재로서 영원한 스승은 오직 주님뿐이다.

가르침의 내용보다는 경청하고 배우는 자세와 태도가 더 큰 가르침이 된다. 선생은 자세와 태도로 기억된다. 돌아보면, 삶은 세세한 영역은 사라지고 큰 줄기만 남아 있다. “세상 모든 것들의 표정은 지워지고/ 자세만이 남아 있다.”(김소연의 시, ‘빛의 모퉁이에서’) 삶은 낱낱의 표정으로 있기보다는 대강의 윤곽이 보여주는 자세로 남는다. 선생도 마찬가지다.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 - 세상을 읽는 신학] (14) 나는 누구로 살아가고 있는가 정체성의 신학

살아가는 방식이 정체성어떻게살고 있는가가 결정한다

 

정체성 질문

나는 나를 누구로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사람들은 나를 누구라고 규정하고 있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나와 타인의 시선에 비친 나는 같은 사람인가? 정체성은 라는 인식인 동시에 타인이 나를 받아들이는 방식이다. 나는 나를 무엇으로 규정하는가? 나는 누구인가? 나는 무엇인가? 더 나아가 내가 생각하는 나와 내가 실제 삶에서 나를 타인에게 표현하고 있는 나가 언제나 같은가? 내가 생각하는 나, 타인이 규정하는 나, 내가 표현하는 나, 이 셋의 미묘한 불일치가 정체성의 위기를 낳는다.

정체성의 문제는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이다. 내가 누구인지, 내가 누구로 타인에게 인식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정체성의 규정은 동일성과 차이성을 강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나와 유사한 것과 나와 다른 것을 통해 자기를 규정하고 이해하는 것이다. 정체성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 속에서 진행되고 성취된다. 정체성은 하나의 요소가 아니라 복합적인 요소들로 구성된다. 정체성은 다양하고 복잡한 양상을 지닌다.

일반적으로 정체성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구성된다.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는 타인과 나누는 상호작용에 달려 있다. 혹은 넓은 의미의 환경과 문화에 달려 있다.” “정체성은 타인들이 우리의 몸에 새겨 넣은 특성들의 집합으로, 대개 우리의 출신과 운명에 관한 견해들의 총체이다.”(파울 페르하에허) 정체성은 끝없이 타자와의 문제를 제기하며, 나와 타자 사이의 근본적인 틈새와 차이를 담고 있다.

우리에게 타자란 누구인가?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타자는 누구인가? 타자로서의 하느님, 타자로서의 사람들, 또 하나의 타자로서의 나 자신. 우리의 정체성은 이 셋의 관계에 따라 규정되고 구성된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의 사회적 정체성은 여러 요소로 구성된다. 젠더와 민족과 국가와 인종적 요소들이 있다. 한 개인은 다양한 사회적 정체성을 갖고 산다. 한 개인 안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 여성으로서의 정체성,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 등이 복합적으로 있다. 그리고 이러한 정체성이 서로 충돌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어떤 선택과 결단의 자리에서 더 고려해야 할 정체성이 있다. 그럴 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항상 우선적 고려의 대상이 되는가? 일종의 종교적 정체성인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성적 정체성, 민족적 정체성, 국가적 정체성, 인종적 정체성, 계급적 정체성을 뛰어넘어 우선성을 갖는가?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 사람에게 신앙은 삶의 자리에서 일차적이거나 중심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이차적이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또는 삶의 한 장식품으로 작동되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체험하고, 닮고 재현하는 일이다. 신앙은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것이며, 이 지상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성사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신앙인의 정체성은 종교적 행위와 관습에 익숙해지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닮고 재현하는 데에 기초한다. 오늘날 신앙을 말하고 신앙의 이름으로 행동하는 사람들은 많지만, 정작 그들의 모습과 태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닮은 모습을 찾기가 점점 어렵다는 사실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외형적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이지만 실제적 정체성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경우가 많다. 외적 신앙생활(종교생활)은 하고 있지만, 실제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신앙의 방식이 아니라 세속의 논리(자본과 권력의 논리)로 살아가는 경우다. 정체성의 분열과 괴리다.

나는 사제로 살아간다

사제의 정체성은 부르심에 기초를 두고 있다. 사제의 정체성은 직무적으로 그리스도의 삼중직에 참여한다는 것과 사목자라는 특성에 뿌리를 두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신학적 관점에서의 정체성을 묻기보다는 일반적 관점에서 묻고 싶다. 사제는 누구인가? 사제는 무엇보다 예수의 제자를 자처하는 사람이다. 예수의 제자로 살고자 하는 이 시대의 사제는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처럼, 예수와 늘 일치해 있어야 하고, 그래서 누구보다 더 예수를 닮은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그런데 이 시대의 사제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발견하기보다는 때때로 종교권력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슬픈 일이다.

나를 봐도 그렇다. 사람들이 정말 나를 보고 예수를 떠올릴 수 있을까. 내가 하는 말, 내가 하는 행동, 내 삶의 모습 속에서 사람들은 예수의 그 어떤 흔적을 발견할 수 있을까. , 저 사람은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라서 확실히 세상 사람들과는 뭔가 다르다는 것을 사람들이 나를 보고 느낄까? 부끄러운 일이다.

성경의 개념들을 사용하고 교회 전통 안에서 전해진 신앙의 말들을 사용하고 있지만, 또한 미사를 집전하고 성사를 거행하고 있지만, 정작 예수를 닮은 모습을 드러내고 있지는 못하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사용하는 말들과 용어들은 신앙적이지만 구체적 내 삶은 예수를 닮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정작 예수의 제자로 살아가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다. 삶이 종교적이긴 하지만 복음적이지는 않다는 느낌이다. 아픈 일이다.

내가 로 살아간다는 것은

정체성은 고유성이기도 하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나의 사유 방식과 행동방식은 무엇인가? 나는 자신의 사유, 감정과 정서, 욕망을 정직하게 바라보고 정확하게 이해하며 성찰하고 있는가? 나의 삶은 고유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누구인가?”(셰익스피어) 나는 어디에서 무엇이 되어 어떻게 살고 있는가?

나는 내 삶을 어떤 문장으로 서술하고 있는가? 나는 어떤 문장을 쓰고 있는가? 내가 쓰는 문장의 명사, 동사, 형용사, 부사는 무엇인가? 명사는 존재다. 나는 어떤 모습으로 존재하고 있는가? 동사는 행위다. 나는 어떤 행위들을 하며 살고 있는가? 형용사는 성격과 특성이다. 나는 어떤 특징을 지니고 있는가? 부사는 동사와 형용사를 수식한다. 진정한 정체성은 언제나 부사에 있다.

내가 어떤 명사(신분, 지위)인지, 내가 어떤 동사(행동과 일)와 관련이 있는지, 내가 어떤 형용사(특성)로 수식되는지, 별로 중요하지 않다. 명사와 동사와 형용사가 나를 거룩하게 하지 않는다. 나를 거룩하게 하는 것은, 내가 어떻게’(부사) 내 직무와 일을 수행하는가에 있다. 성직자, 신학자라는 명사가 나를 거룩하게 하지 못한다. 미사를 거행한다고, 신학을 연구한다고 거룩한 것이 아니다. ‘어떻게살고 있는가가 나의 거룩함을 결정한다.

살아가는 방식이 정체성이다. 삶의 자세와 태도가 진정한 정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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