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합시다! 신앙교리] 성체에 대한 공경 (1) 초대교회에서의 성체공경
교회의 역사 속에서 성체에 대한 공경은 시대의 흐름과 변화에 따라 그 양상을 조금씩 달리하여 왔습니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시고 당신의 교회에 그 거행을 명하신 성체성사는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시대에 따라, 교회의 처지에 따라, 신학과 전례의 발전에 따라, 또는 사목상의 이유로, 성체성사의 거행과 그에 대한 이해는 계속 변화되어 온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성체성사는 지금도 발전의 과정 중에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러한 성체성사에 대한 신심을 비롯한 성체에 대한 공경이 역사적으로 어떻게 변천되어 왔는가, 특히 미사성제와 영성체 참여에 대한 이해는 어떠하였던가를 알아봅니다.
공동체를 위한 사랑의 만찬
성체성사는 초세기부터 ‘유카리스티아’(Eucharistia), 곧 ‘감사의 예(禮)’, ‘감사의 말’ 혹은 ‘감사의 기도’라는 말로 불리었는데, 이 용어는 ‘감사의 기도’를 노래하면서 행하는 성찬례의 특징을 잘 나타내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이 용어는 빵과 포도주가 ‘기도’에 의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축성된다는 성체성사의 신약성서적인 기원을 잘 나타내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곧 “주 예수님께서는 잡히시던 날 밤에 빵을 들고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는 너희를 위한 내 몸이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또 만찬을 드신 뒤에 같은 모양으로 잔을 들어 말씀하셨습니다. ‘이 잔은 내 피로 맺는 새 계약이다. 너희는 이 잔을 마실 때마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사실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여러분은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실 적마다 주님의 죽음을 전하는 것입니다.”(1고린 11,23-26) 라는 성경말씀이 그것입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성령강림 이후 먼저 (유대교) 성전에 모여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이어서 (그리스도교) 신자의 집에 모여 빵과 포도주를 가지고 감사의 의식, 곧 주님의 만찬을 지냈습니다. 이 만찬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주일에 거행되었는데, 이는 공동체가 나누는 ‘사랑의 만찬’으로 다함께 나누는 ‘식사’였고 ‘잔치’였습니다. 일반적으로 ‘배불림의 식사’와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 이때의 성찬례였는데, 이 배불림의 식사는 만연하는 남용(1고린 11,17-34 참조) 때문에, 또 공동체 식구가 점점 불어남에 따라 자연스럽게 사라져갔습니다.
이렇게 차츰 일반 식사에서 분리되어 거행된 감사의 의식, 곧 성찬례는 유대교인들의 박해가 시작되면서 그리스도교 고유의 ‘성체성사’로 곧 ‘미사’로 발전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로써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는 차츰 유대교와는 다른 모습의 교회가 되어 간 것입니다. 이때 신자들은 축성된 빵을 예식에 참가하지 못한 신자와 가난한 사람, 병자, 감옥에 갇혀 있는 사람에게까지 나누어 주었습니다. 성체성사가 박해시대의 신자들의 삶에 큰 힘이 된 것이지요.
성체에 대한 경외심의 태동
사도 이후의 초기 교회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심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그리스도 중심의 신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뜻과 계명이 신자들의 삶과 윤리, 도덕의 기준이 되었고, 그분께서 남겨 주신 성체성사는 현세의 모든 음식을 초월하여 영원한 생명을 주는 양식이 되었던 것입니다.
성체성사에 관해서 전해 주고 있는 초기사료가 많지는 않지만, 사도시대 직후에 저술된 ‘12사도의 가르침’(디다케)에 따르면 신도들은 성체성사를 거행하기 전에 자신의 죄를 고백해야 했고, 이웃들과 불화 가운데 있다면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없었습니다. 2세기의 호교 교부인 유스티노(Justinus, 100?-165?)가 전하는 다음의 기록에서 성체성사에 참여할 수 있는 조건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음식을 우리는 성체라고 부른다. 누구든지 우리의 가르침이 참되다고 믿고 그리스도의 계명을 따라 죄를 용서하고 생명의 재탄생으로 이끄는 세례욕에서 씻었던 사람이 아니면 이 음식의 한 몫을 가져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 예물을 보통의 빵이나 보통의 음료처럼 즐기지 않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신적 말씀을 통하여 육(肉)이 되셨던 것처럼, 그리고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살과 피를 취하셨던 것처럼, 우리의 가르침에 의하면 말씀께 향한 기도를 통해서 감사기도 아래서 축성된 음식은 그렇게 우리의 살과 피를 변화시키고 양육하기 위하여 이 예수의 살과 피가 되기 때문이다.”(호교론, 이때의 신자들이 성체를 배령함에 있어 경외심을 가졌던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성체현시’나 ‘성체강복’ 같은 미사 밖의 성체공경은 보이지 않습니다. 신생교회는 그때까지도 전통적인 유대교 신심의 영향을 많이 받아 유대교 조직의 기본 원칙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 있었는데, 우선 미사 밖에서 성체를 보관하는 일은 교회의 모태인 유대교의 관습에부터 어긋났던 것이지요. 왜냐하면 유대백성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을 때 안식일 전날을 제외하고는 그날 먹을 것 외에 더 모아서는 안 된다고 하는 것을, 또 빠스카 기념제에서 제물인 양을 먹을 때에도 그날 다 못 먹게 되면 불을 살라야 한다는 것을 원칙으로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체를 보관하는 관습의 시작
성체를 보관하는 관습은 당시 신학자들로부터 많은 반대를 받았습니다. 예를 들어 오리게네스(Origenes, 185-254?)는 이렇게 말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최후의 만찬 때 (빵을 들어 축복하시고 나누어 주시면서)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고 했지, 언제 다음 날까지 보관하라고 지시한 일이 있습니까?”(레위기에 대한 5번째 강론) 그런가하면 축성된 제병은 만나처럼 금요일에서 토요일까지, 혹은 다음날까지만 보관할 수 있다고 한 신학자들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이견들 때문에, 또 유대 관습과 불일치 한다는 이유 때문에 미사 밖에서 성체를 보관하고 공경하는 일이 공식적으로 행해지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미사에 참여하지 못하는 신자들이 있으면 부제들이 직접 그들에게 성체를 모셔가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외에도 신자들이 미사 밖에서 개인적으로 성체를 보관하고 공경하는 일이 있었는데, 이러한 관습은 고대 교회에서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그리스도교적 관례로 보입니다. 즉 신자들은 (아직 4세기경까지는 매일미사가 일반화되지 않았기에) 미사 후 성체를 집에 모셔가서 매일의 첫째 음식으로 영하기도 했고, (박해시대엔 미사거행이 어려웠기에) 성체를 몸에 지녀 보관하며 공경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초대 아프리카 교회의 성체에 관한 신앙의 증인으로서는 테르툴리아누스(Tertullianus, 160?-220?)를 들 수 있는데, ‘교회에서 정한 단식일에 성체를 영하면 그것 때문에 단식을 깨게 되는 것이 아닌가?’ 하고 걱정하는 당시의 신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권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단식 날에도 성찬례에 참여하는 것은 좋은 일이니 그것을 포기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단식을 깨고 싶지 않은 신자는 성찬례 때 ‘주님의 몸’을 손에 받고 그것을 다음날까지 간직했다가 영할 수 있다.”(De oratione, 19) (물론 이와 같은 방법은 훗날 금지가 됩니다.)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성체에 대한 공경 (2) 고대교회에서의 성체공경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명에 따라 거행된 초대교회에서의 성찬례는 감사의 기도와 함께 배불림의 식사를 포함한 식사로서 공동체를 위한 사랑의 만찬과 잔치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예배에 이어 성찬례를 가지다가 차츰 유대인들의 박해를 받으면서 독립된 성체성사를 거행하였습니다. 이렇게 거행된 박해시대의 미사는 자연스럽게 성체에 대한 공경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미사 밖에서의 성체공경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러면 박해시대 이후 고대교회에서의 성체공경의 역사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바실리카미사와 성체공경의 시작
313년 콘스탄티누스 대제(285-337)가 밀라노 칙령으로 종교의 자유를 선포함으로써 그리스도교에 대한 로마제국의 박해시대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후 그리스도교회는 바실리카(Basilica)와 같은 로마시대의 공공건물에서 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321년에는 그리스도교가 로마의 국교가 되고 주일예배가 국법으로 선포됩니다. 이렇게 교회가 이제 소위 ‘제국교회’(帝國敎會)가 되면서 미사를 더 성대하게 드리게 되었고, 그럼으로써 성체에 대한 공경과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제대에 대한 공경도 더 높아지게 되었습니다.
성찬례 풍경의 장엄한 변화
다음에 소개해 드리는 글에서 당시에 행해지던 성찬례의 풍경을 잘 알 수 있습니다.
“박해 시대가 끝나고 교회가 자유로이 그 신앙을 나타내고 전례를 행할 수 있게 되면서 로마 제국 각처에 큰 성당이 세워지고 신자는 증가되고 일요일에는 성찬례가 성대히 거행되게 되었다. [···] 세월이 흐름에 따라 의식도 점차로 장엄해졌다. 최후 만찬 때 예수의 말씀을 내포한 감사기도로 빵과 포도주가 축성되는 점은 변하지 않았지만 점차로 초나 향이나 무릎을 꿇는 등의 로마 황제 궁전에서 사용되던 의식이 성찬례에도 도입되어 노래와 행렬로 의식의 장엄성이 증가되었다. 성찬례에 참가하는 것은 뚜렷이 세례를 받은 신자에만 국한되어 있어서, 성찬례 전에 행해지는 성서 낭독과 주교의 강론에 참가하는 것은 세례 지망자(예비신자)에게도 허락되어 있었으나 강론이 끝나고 성찬례가 시작되면 성당을 나가지 않으면 안 되었다. 또 성찬례 동안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이 성당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세례를 받지 않은 사람을 성찬례에 참가시키지 않는다는 것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세례나 성체에 대한 것을 설명하지 않는다는 습관도 4세기 교회 전반에 지켜졌다.”(P. 네메세기, 주의 만찬, 105-106쪽)
노자성체예식과 성체에 대한 직접적 공경
4세기 이후에는 성체에 관한 기적 이야기들이 생겨나 신자들의 신심을 자극하곤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임종을 앞둔 신자에게 성체를 ‘노자’(路資, Viaticum)로 영해주기 시작하였고, 긴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도 안전을 위해서 성체를 지니고 다니기도 하였습니다. 매일미사가 일반화된 것은 5세기경부터 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체를 직접적인 공경의 대상으로 삼아 집에까지 성체를 모셔가서 경배하는 신자들도 있었고, 급기야 성체를 훔쳐가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병자봉성체와 공복제 규정
로마에서는 미사 중에 교황이 축성한 성체를 시내 각 성당으로 보내 (교회 일치의 상징으로) 그 성체 조각을 성혈에 넣는 관습이 있었고, 영성체 예식 후에 환자들에게 성체를 모셔가는 봉성체도 행해졌습니다. 동방교회의 전례문에는 ‘거룩한 것을 거룩한 사람에게’ 라는 표현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처럼 영성체를 하려는 사람은 먼저 ‘죄가 없이 거룩한 상태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당시 영성체에 대한 규정이었습니다. 영성체 전의 공복상태를 요구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인데, 9세기까지는 손으로 영성체를 하되 영성체시 엄격한 규정을 두어 지키도록 하였습니다.
신자석에서 멀어지게 된 사제석과 제대
시간이 흘러 교세가 확장됨에 따라 로마제국의 여러 요소를 받아들인 교회는 바실리카 미사를 더욱 더 성대하게 거행하였고, 이에 따라 성사의 외적인 의식이나 전례 행사 등에 더 치중하는 경향이 생겨났습니다. 미사의 규모가 커지면서 성당의 규모가 더 커짐에 따라 사제석이 신자석에서 더 멀어지게 되었고, 제대는 높은 곳에 설치되어 신자들의 접근이 어려워졌습니다.
신자들의 영성체 약화와 교회의 엄격한 준비 규정
신자들이 높고 먼 곳에 위치한 사제석과 제대를 바라보며 미사를 구경하는 식이 되다보니 미사 참례가 점차로 적극적인 면을 잃어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에 따라 이미 4세기 무렵 ‘미사에 참여하는 모든 신자들은 영성체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의식이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즉 신자들의 영성체가 더 이상 당연한 일이 아니게 되어, 5세기 말부터 6세기 초를 거치면서는 영성체자가 현저하게 줄어들게 된 것입니다.
이런 의식의 변화 속에서 이후 한동안 영성체는 사제만 행하는 일이 되어 버렸습니다. 때문에 506년 지금의 프랑스 악드(Agde)에서 개최되었던 공의회는 ‘적어도 성탄, 부활과 성령강림날 영성체를 하지 않으면 신자로서의 자격이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악드 공의회는 엄격한 영성체 준비를 강조하였고, 그래서 영성체를 권장함에 있어서는 별 효과를 보지 못하였습니다.
신자들이 영성체를 멀리하게 된 가장 큰 원인은 무엇보다도 이렇게 교회가 너무 영성체를 위한 조건을 엄격히 정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체사리오(Caesarius, 470-542)는 영성체를 위해서 며칠 동안 금욕할 것을 요구하였고, 심지어 신혼부부의 경우에는 한 달 동안 교회에 나오지 말라는 권고까지 하였던 것입니다.
성인신심의 성행
이제 매일의 미사가 잦은 영성체와 무관한 것이 되었고, 성체성사는 차츰 공동체의 만찬이라기보다 개인적인 은혜를 위한 신심의 대상으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신자들은 좀 더 감각적인 종교행위를 찾아, 이제 ‘그리스도 중심의 신심’ 보다 ‘성인 중심의 신심’을 더 즐겨 구하였습니다. 특히 마리아에 대한 공경이 교회 전례 안에 정식으로 도입된 것이 6세기 말에서 7세기경이었는데, 성지순례와 순교자, 성인들의 유해와 유물에 대한 공경이 성행하여 이 제대에서 저 제대로 옮겨 다니며 제대에 모셔져 있는 순교자나 성인의 유해 앞에서 기도하는 신자가 많아진 것이 이때부터 입니다.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성체에 대한 공경 (3) 중세교회에서의 성체공경 ①
개인 신심미사의 번성
중세에 들어 성체성사가 가졌던 공동체적인 특성이 갈수록 희박해지고 사제가 홀로 집전하는 사적(私的)인 미사가 더 성행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성찬례는 주교에 의하여 집전되고 사제들은 하나의 사제단으로서 참가하는 것이 일반적이었지요. 그러다가 로마와 같이 큰 도시에서는 하나의 성찬례로 모자라 주교가 주례하는 성찬례 외에도 다른 성당의 주임 사제들이 따로 집전하는 미사가 많아지게 된 것입니다.
또한 순교자의 무덤 위에 세워진 제단에서는 그곳을 순례하는 이들을 위한 성찬례가 성행하였고, 큰 수도원의 경우에는 공동집전 외에 개인적으로 성찬례 거행을 원하는 사제가 많아졌습니다. 그렇게 하여 7세기 이후 서방교회에서는 사제들이 성찬례를 공동으로 집전하기보다 개별적으로 집전하는 것이 일반적이 되었고, 이러한 경향이 오늘에까지 이르렀습니다.
이렇게 미사가 사제의 공동집전보다는 개인적으로 거행하는 신심으로 성행하게 된 것은 특히 8-11세기경까지의 미사이해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미사가 공동체의 전례가 아닌 개인적인 기도의 장으로서 가장 효과적인 신심행사로 이해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결과 같은 성당 내에 여러 제단이 생기게 되었고, 사제는 신자들과는 무관하게 벽을 보고 혼자서도 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한 해 전체의 미사 본문이 담긴 ‘완전한 미사경본’이 생겨남)
미사는 성직자의 전유물이고 신자들은 그 구경꾼?
13세기에 들어서 미사는 전 교회 구성원이 함께 거행한다는 개념이 사라지고 성직자만의 전유물이 된 듯 했습니다. 미사거행에 있어서는 사제가 행하는 것만 ‘유효’하다는 인식이 생겨나, 평신도는 독서낭독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게다가 어려운 전례언어가 신자들의 이해를 가로막아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미사는 말씀을 선포하는 기능을 상실하게 되었고, 말씀보다는 전례 의식과 또 예식에 쓰이는 외적인 물건, 그리고 성사들의 표지가 더 큰 비중을 갖게 되었습니다. 적지 않은 신자들이 미사언어인 라틴어를 잘 이해할 수 없어 미사참여에 소극적이 되었고, 미사를 바라보기만 하는 시청자요 성체성사의 구경꾼이 되어 갔습니다.
또한 성당이 커지면서 신자석은 사제석에서 완전히 분리되었고, 그에 따라 평신도와 성직자 간의 차별도 켜져 갔습니다. 한편 이때부터 그리스도께 대한 기도를 중재해 줄 ‘성모 마리아와 성인들에 대한 신심’이 성행하여 교회력에 성인을 기념하는 축일들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미사를 거행하는 제단은 공동체의 식탁으로 신자들 가까이 있지 않고 멀리 떨어져 있었습니다. 여러 층계와 칸막이와 문턱으로 이루어진 높은 제단이 신자들에겐 근접하기 어려운 대상이 되었습니다.
실체변화교리와 영성체 기피 현상
12세기 말에는 “빵 그 자체가 그리스도 자체로 변화한다.”고 하는 ‘실체변화’(Transsubstantiatio) 개념이 등장했습니다. 실체변화 개념은 ‘성체 안의 그리스도’, 정확히 말하자면 ‘성체이신 그리스도의 실제적 현존’을 강조하는 개념이지요. 그러다보니 이제 미사성제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현존이 빵의 형상에만 제한되어 있는 듯이 이해되는 경향이 생겨났고, 이에 따라 눈에 보이는 성체에 대한 구체적이고도 지나친 경외사상이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무릎을 꿇고 성체를 영하는 관습이 생겨난 것도 이 때부터입니다.
유감스러운 것은 그리스도의 성체 현존을 강조함에 따라 신자들은 영성체를 더 멀리하게 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제 신자들은 ‘성체를 잘못 영하면 스스로를 단죄한다’는 식의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은 바오로 사도의 다음 말씀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므로 부당하게 주님의 빵을 먹거나 그분의 잔을 마시는 자는 주님의 몸과 피에 죄를 짓게 됩니다. 그러니 각 사람은 자신을 돌이켜보고 나서 이 빵을 먹고 이 잔을 마셔야 합니다. 주님의 몸을 분별없이 먹고 마시는 자는 자신에 대한 심판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가운데에 몸이 약한 사람과 병든 사람이 많고, 또 이미 죽은 이들도 적지 않은 것입니다.”(1코린 11,27-30)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의 영성체 규정
신자들의 영성체 기피 현상이 심화되자 교회는 이제 “신자는 적어도 1년에 한번은 영성체를 해야 한다.” 라는 규정을 발표하였습니다. 1215년의 제4차 라떼란 공의회는 ‘실체변화’라는 표현을 정식으로 이용하여 “미사성제 안에서의 축성으로 빵은 본질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 된다.”고 하면서, 신자들은 적어도 1년에 한번 부활 전에 고해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해야 한다고 규정한 것입니다.(1983년, 새교회법 920조의 규정도 그러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성체를 위한 교회의 철저한 준비 규정은 신자들의 영성체를 여전히 어렵게 한 면이 있었습니다. 당시 교회는 ‘인간은 죄인’이라는 점을 많이 강조, 구원을 얻기 위해서는 철저한 신앙생활이 필요하다고 가르쳤지요. 따라서 신자들은 영성체에 지나친 주의를 기울여야 했고, 그 결과 그들은 성체에서 점점 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거양성체의 등장
성체에 대한 경외심이 일방적으로 강조되는 분위기 속에서,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은 자신들이 영성체에 초대받고 있다는 의식을 갈수록 덜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라틴어로 거행되는 말씀의 전례를 잘 이해할 수 없어 영적으로 항상 부족함을 느꼈고, 그러다보니 미사전례를 거행하는 사제가 확실한 볼거리를 제공하면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신자들의 요구에 부합하여 생겨난 것이 바로 ‘거양성체’ 의식인데, 미사의 가장 중요한 순간으로 여겨진 ‘성체의 거양’은 12세기 말부터, ‘성혈(성작)의 거양’은 14세기 말부터 행해졌습니다. 게다가 거양성체와 관련하여 일어난 성체기적의 이야기들이 성체에 관한 신자들의 공경심을 자극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영성체 대신에 눈으로 성체와 성혈이 담긴 성반과 성작을 우러러보며 성체를 공경하는 신심이 큰 의미를 갖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몇몇 학교의 경우에는 거양성체 때 수업을 중단하고 학생들에게 거양성체에 대한 주의와 공경을 강조할 정도였지요. 거양성체에서 성체를 올려다본다는 것은 구약성경의 ‘구리뱀 이야기’를 상기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뱀에게 물렸을 때 모세가 쳐든 구리뱀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았듯이, 성체를 올려다보는 사람도 그와 같은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것이었지요.(민수 21,4-9 참조)
이렇게 성체에 대한 과도한 공경심은 영성체 방법의 변화로 이어졌습니다. 즉 신자들은 차츰 성체를 영할 때 더러운 손으로 받아 모시면 불경하니 혀로 (사제의 손에서 바로) 받아 모셔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월간 레지오 마리애, 2019년 3월호, 조현권 스테파노 신부(대구대교구 사목국장, CBCK교리교육위원회 위원)]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성체에 대한 공경 (4) 중세교회에서의 성체공경 ②
성체조배와 같은 성체신심의 확산
13세기 즈음에 신앙생활에서 성체성사를 멀리하는 분위기가 전반적으로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교회개혁을 이끌었던 수도원 등에서는 이미 12세기경부터, 특히 분도회 내의 엄격수도회인 씨토회와 프란치스코회 등에서 성체에 관한 공경이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성체조배와 같은 일반신자들의 성체신심의 경우에는 특별히 우리 교회내의 위대한 민중운동가라고 할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에 힘입은 바가 컸습니다. 이와 함께 성체를 보존하는 제대 앞에서 가져야 할 경외(敬畏)의 자세도 강조되었습니다. 제대에 대한 이러한 경외심은 13세기에 파리 시노드에서 의결되어 다른 교회 시노드로 확산되었습니다.
병자성사를 위한 봉성체와 감실의 등장
미사 밖에서 성체공경이 본격적으로 행해진 것은 환자를 위한 사목적 배려에서, 즉 병자성사 때 성체를 모셔가는 데서 유래하였습니다. 10세기 말부터는 이렇게 임종을 앞둔 병자에게도 소위 ‘노자’(路資, Viaticum)로 성체를 영해주기 위해 성체를 (미사 시간 외에) 성당에서 보관하게 되었습니다. 즉 ‘미신적인 남용을 목적으로 한 도난’과 ‘이교도에 의해 저질러지는 모독’으로부터 성체를 보호하기 위해 ‘감실에 성체를 보관하고 열쇠를 채우기’ 시작한 것이지요.
네메세기의 글을 봅니다. “11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서 성체를 보존하기 위하여 아름답게 장식한 감실이 만들어졌다. 또 신자는 성찬례 때 이외에도 성체를 보기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운 성체 현시대가 만들어지고 성체가 신자에게 예배받도록 현시되고 성체를 들어 높여서 신자에게 축복해 주는 의식이 행해지게 되었다.”(P. 네메세기, 주의 만찬, 164.)
이러한 ‘미사 밖에서의 성체보존 규정’이 1215년 9차 라떼란 공의회에서 정식으로 의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신자들은 사제가 병자성사를 집전하러 (성당 밖으로) 갈 때에도 성체에 대한 공경을 나타냈습니다. 즉 그들은 촛불을 들고 종을 치면서 행렬을 이루어 (문밖에서 기도하는 마음으로 함께하며) 병자를 방문하는 사제와 동행하였던 것입니다. 때문에 13세기 말 교회에는 사제가 병자성사를 집전한 다음에도 (환자의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신자들이 성체를 공경할 수 있도록 ‘적어도 두 개의 축성된 제병을 모셔가야 한다’는 원칙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병자 봉성체는 특별히 16-17세기에 걸친 공의회에서 강조되었습니다.)
이 시기 교회는 성체를 영할 수 없는 환자들에게도 성체를 모셔가서 (영성체는 못하더라도) 성체를 바라보며 기도하도록 배려해주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는 성 아우구스티노의 가르침에 의지하여 그러한 환자들에게 신령성체(信領聖體)를 권하였습니다. (영성체를 못하는 환자에게 조배와 경배를 위해서 성체를 모셔가던 이 관습은 16세기에 금지되었습니다.)
성체행렬과 성체현시 및 성체강복의 시행
이제 ‘그리스도의 실제적 성체 현존에 대한 신심’은 신자들의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 하는 욕구와 더불어 성체성사를 기념하는 행렬로 이어졌습니다. 즉 성체에 대한 신자들의 신심에 상응하여 성지주일과 성목요일, 성금요일 등에 성체를 모시고 사제들과 신자들이 성대한 행렬을 거행한 것입니다. 이는 1264년 우르바노 4세 교황에 의해 성체성혈대축일이 제정되고 경축됨으로써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행렬의 방식은 신자들이 성체를 모시고 성가를 부르면서 꽃을 길에 뿌리는 등 여러 가지 의식으로 성체에 대한 신앙과 감사를 표하며 마을을 행진하는 것이었습니다.
나아가 14세기엔 성체현시와 성체강복도 성행하였습니다. 이때 특이한 것은 그 전에는 성체를 (사람들이) 볼 수 없는 상태로 (감실에만) 보관하며 공경하다가 이제는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상태로 (감실 밖에) 현시하며 공경하기 시작했다는 점입니다.
미신적인 미사신심의 발생
미사 밖에서의 성체에 대한 공경은 심화되었지만, (그에 비례하여 미사 안에서의) ‘성찬례가 가진 제사와 식사의 의미’가 희박하게 되어 14-15세기를 거치면서는 미사효과에 대한 지나치게 과장된 신심이 발견됩니다. 예를 들어, (미사에 참례하는 사람은) 미사시간 동안 더 이상 늙지를 않는다든지, 미사 참례하는 날은 벼락을 맞지 않는다든지, 급사를 면할 수 있다든지 하는 미신적인 믿음입니다. 미사 끝에 드리는 비를 기원하는 예식이 생겨난 것도 이때입니다.
한편 미사의 효과에 대한 지나친 생각으로 미사 신청이 쇄도하여, 미사만 많이 드리려고 하는 소위 ‘제단 사제’, 즉 미사를 드리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사제들이 많아졌습니다. ‘(세상을 떠난) 죽은 이를 위한 미사’가 성행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미성숙한 교회전례는 종교개혁(분열)의 한 이유가 됩니다. 이해를 위해 다음 글을 인용합니다.
“사실 중세 말기의 그리스도인은 신학에 의한 충분한 지도를 받지 않았으므로 일반의 신앙생활은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이끌리고 성체에 관해서도 사람들 간에 다양한 미신이 생겨났다. 예를 들면, 일정한 수의 성찬례를 계속 바치고 청원하면 그 청원은 꼭 들어 허락함을 받는다는 미신이나, 또 어떤 특정의 기원을 위하여 성찬례를 봉헌하도록 사제에게 청하는 경우에 신자가 사제에게 주는 예물에 관해서도 여러 가지 혼란한 방법이 취해졌다. 사제 중에는 예물을 받기 위하여 매일 3-4회나 성찬례를 바치는 것을 유일한 업으로 삼고, 그것만으로 하루 종일 태만하게 지내는 사제가 중세 말기에는 허다했다. 동시에 이 시기의 교회의 상태는 일반적으로 바람직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성찬례의 집행 방법도 충분한 경건이 결핍되고 사람들은 성당이 더러워도 모르는 척하고, 또 성찬례 중에 부르는 찬미가는 신심을 더하기보다는 세속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었다. 더욱이 신자가 성체를 영하는 것은 극히 드문 일이었다. 이와 같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성체에 관한 그릇된 생각이 나온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할 만하다.”(P. 네메세기, 주의 만찬, 167.)
성체공경에 대한 종교 개혁가들의 이견
‘사람의 의화는 믿음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원칙이 16세기의 종교 개혁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들은 의화를 위한 조건으로 ‘하느님의 자애를 신뢰하는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을 강조했고, 이를 자신들의 근본교의로 내세웠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가 교회의 사제가 행하는 성찬례에 의하여 사람들에게 분배된다.” 라는 가톨릭교회의 교의를 배척했습니다.
그런데 종교 개혁자들 대부분은 성찬례가 ‘십자가상 그리스도의 새로운 봉헌’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일치하였지만, ‘성체 안의 그리스도의 현존’의 문제에 관해서는 의견을 달리했습니다. 즉 루터는 (실체변화라는 이론은 배척하면서) 복음서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의 몸의 현존을 굳게 믿었던 반면에, 쯔빙글리나 그의 제자인 칼슈타트(Karlstadt), 에콜람파디우스(Oecolampadius)의 경우에는 ‘성체는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상징에 불과하다.’며 성체 안에서의 그리스도의 실질적 현존을 부정하고, 미사의 거양성체와 감실의 성체보관에 대해 비난하는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성체에 대한 공경 (5) 중세말기와 근대교회에서의 성체공경
트리엔트 공의회를 통한 교회 전례법규의 확정
가톨릭교회에 반하는 종교개혁가들의 주장과 공격이 심해지자 가톨릭교회는 그에 대한 반발로 성체공경을 더 강화하게 됩니다. 예를 들어, 프로테스탄트교회가 가톨릭교회의 성체론을 공격하면서 라틴어 외의 모국어 전례집전을 강조하자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는 “라틴어가 아닌 모국어로만 미사가 드려져야 한다는 자는 파문에 처한다.”(미사성제에 관한 전문 9항) 라는 규정을 발표하였습니다. (1661년에는 알렉산더 7세 교황은 ‘라틴어 미사경본’을 다른 언어로 번역하는 일 자체를 금지하였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는 (당시 전례에 대해 심도 깊은 개혁을 관철하지 못한 채로) 교회의 수장인 교황에게 모든 전례서적에 대한 발행을 위임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교황은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의 도움을 받아) 1570년에는 로마 미사 경본을 발간하고, 1588년에는 교황청 내 예부성성을 창설하여 전례법규를 규제하고 감독토록 하였습니다. 이후 400년간 가톨릭교회의 전례는 (불행하게도 이렇다 할 발전과 변화가 없이) 완전히 획일화되고 고정화되었습니다. 다음의 글은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전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트리엔트 공의회 이후의 전례는 ‘중세기의 계속으로 [···] 성직자의 특별한 전례로 [···] 남아 있었다. 언어는 예전과 같은 라틴어이며 강론을 제외하고는 하느님 백성을 약간 고려했을 뿐이다.’ 백성은 ‘미사에 참례’하고, 그들의 참여는 듣고 보는 데에 한정되었다. 평범한 백성에게 미사 전례는 대부분 이해하지 못하는 신비로 남아 있었다. 바로크 시대에 와서 교회의 공적 전례는 점점 더 화려하게 거행된다. 수많은 바로크 성당들의 화려한 공간, 다성(多聲)의 노래와 악기가 동원된 음악은 미사 전례를 하나의 ‘눈과 귀의 향연’으로 만든다. 강론은 대부분 미사 전에 행해졌으며 그럼으로써 말씀의 전례의 구조적인 틀에서 벗어났다. ‘중세기의 발전은 출발점을 뒤돌아보지도 않은 채 계속된다.’” (아돌프 아담, 성찬례, 29.)
약(藥)으로써의 영성체 신심
그럼에도 트리엔트 공의회는 나름 쇄신의 노력을 기울였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공의회의 결실과 이후의 노력으로 성체를 새로운 양식으로 깨닫고 적어도 매주 한번은 성체를 모시려고 노력하는 신자들이 많아졌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의 미사 참례는 여전히 수동적이었고, 성체 안의 그리스도의 실제적 현존에 대한 신자들의 신심은 아직도 그 도가 지나친 상태였습니다.
이를테면 17-18세기를 거치면서 그리스도의 성체가 신비한 영약(靈藥)으로 여겨져,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가장 효과적인 약’인 성체를 모신다는 ‘약으로써의 영성체’ 의식이 널리 퍼지게 된 것입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그 흔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미사 통상문에서 볼 수 있는 영성체 후 사제의 기도가 그것이지요. (“주님, 저희가 모신 성체를 깨끗한 마음으로 받들게 하시고 현세의 이 선물이 영원한 생명의 약이 되게 하소서.”)
이런 배경에서 ‘사제가 위령미사를 드리면, 연옥에서 고통 받고 있는 영혼이 천사에게서 성체를 영한다.’는 생각까지 퍼지게 되었습니다. 또한 성체는 ‘가벼운 죄들로부터 영혼을 정화하고 연옥불에서 받을 고통과 정화의 시간을 단축시키는 약’으로써의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생각에서 나온 그리스도상(像)이라고 할 ‘죽은 이를 위한 약제사(藥劑士)로서의 그리스도’는 17,18세기 천주교와 개신교 신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소재였지요. 한편 프란치스코 회원의 노력으로 확산된 ‘십자가의 길의 신심’, 그리고 도미니코 회원이 보급한 ‘로사리오 기도의 신심’이 신자들의 건전한 신앙생활을 위해 큰 활력소가 되었습니다.
근대교회에서의 전례쇄신과 영성체 강조
근대에 들어와 교회 내에 전례를 쇄신하자는 바람이 일어났습니다. 그러한 운동의 선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프랑스의 솔렘 수도원을 부흥시킨 베네딕토회의 게랑제(Prosper Guėranger, 1805-1875) 신부였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비오 10세 교황도 전례쇄신 운동에 동참하면서 신자들에게 주일(主日)의 우위성과 영성체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그들의 능동적인 전례 참여를 독려하고 권고하였습니다.
또한 교황은 1905년 영성체교령(Sacra Tridentina Synodus)을 반포하여 미사에 참례하는 신자들에게 적극적으로 성체를 영할 것을 권장하였고, 어린이들의 조기(早期) 영성체와 그를 위한 첫영성체 준비의 중요성도 강조하였습니다. (어린이 첫영성체는 19세기 가톨릭 신자들에 있어서 중요한 가족축제의 하나였습니다.) 교황은 이때 영성체자는 ‘은총 지위에 있어야 한다’는 것과 ‘올바른 지향을 가지고 모셔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습니다.
이에 따라 교회 내의 전례 쇄신은 활기를 띠어갔습니다. 그러면서 이 시기의 성체신심에도 우려스러운 미신적인 요소가 발견됩니다. 신자들 중에는 영성체 효과에 대한 과신으로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영성체를 하는 경우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에 1917년에 반포된 교회법에서는 ‘같은 날 한 번 이상의 영성체를 금한다’는 규정을 발표하였습니다. (구교회법 857조의 이 규정은 1983년의 새교회법 917조에서 ‘같은 날이라도 자기가 참여하는 성찬 거행 중에서는 다시 [두 번까지] 영성체할 수 있다’는 문장으로 바뀌었습니다.)
한편 19세기 후반부터 세계성체대회를 비롯하여 여러 지역에서 성체대회가 자주 열리게 되었습니다. 중세기부터 계속되어 오던 ‘예수성심(聖心)에 관한 신심’은 1856년 비오 9세 교황의 예수성심축일 제정으로 심화 확산되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능동적 미사참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를 거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 교회 쇄신의 바람은 먼저 전례 부문의 개혁으로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공의회의 전례헌장(Sacrosanctum Concilium)에 의하면, 신자들은 미사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고, 사제와 더불어 제물을 바치며, 자기 자신을 제헌하는 것을 배우고, 서로 간의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신자들이 이 신앙의 신비에 마치 국외자(局外者)나 묵묵한 방관자인 양 참여하지 않고, 예절과 기도를 통해서 이 신비를 잘 이해하고, 거룩한 행사에 의식적(意識的)으로, 경건하게, 능동적으로 참여하도록, 또한 하느님의 말씀으로 육성되고, 주의 성체의 식탁에서 보양되고, 하느님께 감사하도록, 성교회는 이에 모든 노력을 기울인다. 또 신자들은 티 없는 제물을 사제의 손으로 뿐 아니라, 사제와 함께 제헌하면서, 자기 자신을 제헌하는 것을 배워야 하며, 그럼으로써 중재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의 일치 또 자기들 상호간의 일치가 날로 긴밀하게 되어, 하느님이 모든 것 중의 모든 것이 되시도록 해야 한다.”(48항)
전례헌장은 이제 미사성제를 모국어로 드리는 것을 전면적으로 허용하고(40항, 54항), 신자들의 영성체를 강조하였습니다. “사제의 영성체 후에, 신자들이 같은 성제에서 (축성된) 주의 몸을 받아먹도록 하는, 더욱 완전한 미사성제의 참여를 크게 권장한다.”(55항) 이어서 전례헌장은 미사의 사제 공동 집전을 원칙으로 제시하면서, 사제들이 한 성당에서 같은 시간에는 한 대의 미사만 드리는 것을 원칙으로 제시하였습니다.(57항)
[공부합시다! 신앙교리] 성체에 대한 공경 (6)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성체공경
성체 신비에 관한 훈령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1967년에 발표된 ‘성체 신비에 관한 훈령’은 성체성사를 구원을 위한 ‘은총의 보고(寶庫)’로 제시하면서, 신자들에게 일상생활 중에 성체성사의 정신을 실천해야 하다고 권고하였습니다.
“사랑을 실천하는 산 신앙으로 영성체를 하기만 한다면, 성사적이며 영신적으로 주의 성체와 성혈에 참여하는 것이므로 성령의 은혜는 생명수같이 각 사람에게 충만히 흘러내린다.(요한 7, 37-39 참조) 그러나 이 성사가 지표(指標)하는 그리스도와의 영적 일치는 성체를 이루는 순간에만 도모할 것이 아니라, 신자 생활 전체에서 계속되어야 할 것이며, 신도들은 받은 은혜를 끊임없이 신앙으로 관상(觀想)하며 성령의 인도를 받아 감사하는 마음으로 일상생활을 영위하고 보다 풍성한 사랑의 결실을 맺어야 할 것이다.”(Eucharisticum Mysterium, 교황청 예부성성 1967. 5. 25,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1988 재판 [1968 초판], 38항)
더불어 훈령은 신자들에게 미사에 참례해서 적극적으로 영성체 할 것을 권고하였습니다.
“잦은 영성체와 매일 영성체는 그리스도와의 일치를 깊게 하고, 영적 생명을 더욱 풍만히 양육하고, 영혼을 덕행으로 아름답게 꾸미며, 영원한 행복의 보다 확고한 보증이 되는 것이 사실이므로, 본당신부, 고백신부, 강론신부들은 자주 열성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백성을 교훈하여 이렇게 신심 많고 유익한 습관을 기르도록 격려해야 한다.”(37항)
훈령은 또한 영성체는 우리를 일상의 허물과 범죄에서 지켜주는데, 영성체를 위한 준비로 합당한 통회가, 경우에 따라서는 고해성사가 중요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각 미사는 중죄가 아닌 가벼운 죄들을 사해 주는 하나의 작은 고해성사와 같다고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사의 도입 부분엔 참회의 예절이 있는데, 이때 사제가 고해성사에서와 같이 사죄경을 외우기 때문입니다.
“전능하신 하느님, 저희에게 자비를 베푸시어 죄를 용서하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이끌어 주소서.”(미사통상문) 물론 미사 자체가 고해성사를 대신할 수는 없지만, 말씀 드린 것처럼 대죄가 아닌 소죄의 경우에 죄를 사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법
1983년에 반포된 교회법의 성체에 관한 규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 성체를 개인적으로 보존하고 휴대하는 관습을 금한다.(935조)
– 성체가 보존되는 성당은 중대한 이유가 없는 한, 매일 적어도 몇 시간 동안은 신자들의 성체조배를 위해 개방되어야 한다.(937조)
– 성당과 경당들에서는 매년 적당한 기간 동안 비록 연속적이 아니라도 장엄한 성체현시(現示)가 권장된다.(942조)
– 교구장의 판단에 따라, 가능한 곳에서는 특히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에 성체께 대한 공경의 공적 증거로 공공 도로에서 성체 거동 행렬을 하여야 한다.(944조)
– 사제들이 자주, 더 나아가 매일 성찬을 거행하길 권장한다. 사제들은 사목적인 필요 외에는 하루에 한 번 성찬을 합당한 기도로 준비하여 거행함을 원칙으로 한다. 이 경우, 사제는 정당하고 합리적인 이유 없이는 신자들이 함께 하지 않은 채 홀로 성찬을 거행해서는 안 된다.(904-909조)
이제 공의회의 개혁작업을 바탕으로 바야흐로 성체 신심은 그 균형을 찾아가는 듯합니다.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세계성체대회는 교황을 비롯한 주교단, 성직자와 평신도 전체의 일치를 드러내는 공동체적인 사랑의 만찬인 성체성사를 기념하는 모임으로 부각되고 있습니다.
변화하는 교회 안에서
가톨릭교회는 이천여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이 역사는 여느 인간사(人間事)처럼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지니고 있습니다. 교회는 ‘거룩한 교회’이지만 동시에 ‘죄 중에 있는 교회’이고, ‘성인들의 교회’이면서도 ‘죄인들의 교회’인 것입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우리 교회는 ‘죄인들의 거룩한 교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우리 교회 공동체가 ‘거룩한 하느님’을 믿는 ‘나약한 인간’의 모임임을 드러내는 것이고, 그러기에 교회는 역사 속에서 많은 잘못을 범하기도 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께서는 이러한 교회의 역사적 과오를 공식적으로 처음 인정하고 그에 대한 인류의 용서를 구하였지요.
이렇게 파란만장한 교회의 역사 속에서 성체성사의 거행과 그에 대한 이해와 공경도 많은 변천을 겪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속엔 긍정적인 면과 함께 부정적인 면도 있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교회의 역사가 과오와 허물에도 불구하고 발전하여 왔듯이, 성체에 대한 공경의 역사도 이상적인 방향으로 발전되어 온 듯합니다. 그럼에도 분명한 사실은 현재우리 교회가 실천하고 있는 성체성사에 대한 거행과 그에 대한 공경의 모습이 결코 다일 수 없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결코 완성되어 고정된 것이 아니라 발전 중에 있는 것이고, 발전 중에 있는 것이기에 변화되어야 할 성질의 것이지요. 물론 이러한 변화는 본질과 정통성을 잃고 퇴보하지 않으면서 진행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교회는 중세와 근대를 거치면서 행해 왔던 식민지 주입 방식의 선교 활동을 반성하면서 복음전래에 대한 토착화 작업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교회는 전례에 있어서도 토착화 작업을 비롯한 쇄신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하며, 이에는 미사전례도 예외일 수가 없습니다. 미사성제는 공동체의 사랑의 만찬으로서의 성체성사가 거행되는 자리이며, 공동체는 끊임없는 자기 개혁을 필요로 하는 인간들의 모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의 원천이 되는 사랑의 성사
그리스도인의 신앙생활은 크게 성사생활과 기도생활로 나눌 수 있는데, 이러한 신앙생활의 원천은 성체성사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우리 삶에 꼭 필요한 양식과 음료로 내어 주심으로써 우리와 신비로운 일치를 성령의 활동 안에서 이루고자 하십니다. 우리는 성령을 신뢰하며 늘 감사하는 마음으로, 또 성의 있게 준비된 상태에서 성체를 영하고 성체성사적인 삶, 곧 서로 나누는 사랑의 삶을 가꾸어 나가야 할 것입니다.
어느 연로한 수녀님께서 첫 서원 금경축일을 지내며, 오십여 년 수도 생활을 하면서 가장 기뻤고 고마웠던 일은 매일 미사에 참례할 수 있었던 것이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매일의 성체성사에서 당신 삶의 활력을 길어낼 수 있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듯 성체성사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참으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극적으로 드러내고 증거하는 사랑의 성사라 할 수 있습니다. 매일매일, 또는 매주 마다 하느님과 하나가 되고, 또 그분의 사랑을 그렇게 가까이 느낄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천주교 신자가 된 남다른 보람이 있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