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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회는 진행 중… 한국교회와 새로운 복음화] (1) 총론 (상) 공의회 배경 및 영향 '시대의 징표' 읽고 교회 쇄신을 천명하다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6|조회수46 목록 댓글 0

[공의회는 진행 중한국교회와 새로운 복음화] (1) 총론 () 공의회 배경 및 영향

'시대의 징표' 읽고 교회 쇄신을 천명하다

쇄신의 움직임

1959125일 성 바오로 사도의 회심 축일. 교황 비오 12세의 후계자로 선출되고 불과 3개월째를 맞고 있던 교황 요한 23세는 이날 성바오로대성당에서 미사를 봉헌한 후 베네딕도회 성바오로 수도원을 방문, 현장에 있던 17명의 추기경단 앞에서 공의회 소집을 선언했다.

 

- ‘시대의 징표에 유의하며 교회 쇄신과 현대 세계로의 적응을 목표로 19621011일 개막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 유럽교회 교부들이 참석했던 이전까지의 공의회와 달리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교부들의 참석으로 보편성의 특징을 잘 드러낸 공의회였다.

 

 

요한 23세의 회고처럼 전혀 예상치 않게 천상의 섬광처럼 눈과 마음에 감미로움을 발산하면서 보편 공의회 개최에 대한 열기가 일깨워지면서발표된, 향후 교회 안에 새로운 바람을 몰고 올 일성(一聲)이었다.

 

그해 517일 준비위원회를 설치했던 요한 23세는 629일 회칙 베드로좌를 통해 공의회의 세 가지 목적을 밝혔다. 그것은 가톨릭 신앙의 발전’ ‘그리스도인의 생활 쇄신’ ‘교회 규율의 현대 적응화였다.

 

이후 19621011일에 시작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연설을 통해 교황 요한 23세는 교회가 고귀한 신앙의 유산을 수직함에 있어서, 이를 골동품처럼 다루지는 않고, ‘시대의 징표에 유의하여 현대 세계 안에 형성된 새 생활 조건들과 양식에 부응하는 교회의 내적 쇄신을 도모하고 하느님 나라의 실현을 위해 외부 세계와 우호적 자세로 대화와 협력을 도모하는 데 역점을 두는 사목적인 공의회가 될 것임을 공표했다.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

 

2차 바티칸공의회는 규모면에서 역사상 가장 큰 공의회였다. 다뤄진 안건의 양도 방대했을 뿐 아니라 참석 인원 규모도 엄청났다. 2908명 교부들 중 2600명 이상이 참석한 것을 비롯해 신학자와 전문가를 포함, 회의에 참석한 전체 인원은 3000여 명에 이른 것으로 집계된다.

 

유럽교회 교부들이 참석했던 이전까지의 공의회와 달리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등 제3세계 교부들의 참석으로 보편성의 특징을 잘 드러낸 공의회이기도 했다. 수도자들을 포함 50여 명의 평신도들도 방청인으로 참여, 교부들과 의장단 요청과 자문에 응했다.

 

개막 후 만 32개월 동안 열렸던 교회 역사 안의 21번째 공의회. 1965128일 바오로 6세 교황은 폐막 연설에서 전체 공의회 의미를 형제애를 통해 현대인을 하느님께 다시 데려오기 위한 것으로 요약했다. 이 공의회를 두고 교황 바오로 6세는 교회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건으로 평가했다.

 

4개 헌장(전례, 교회, 계시, 사목)9개 교령(사회 매체, 일치운동, 동방교회, 주교, 수도생활, 사제양성, 평신도, 선교, 사제직무), 그리고 3개 선언(그리스도교 교육, 비그리스도교, 종교 자유) 16개 문헌을 통해 교회의 쇄신 의지를 표명했던 바티칸공의회는 교회 안팎의 열렬한 환영과 함께 엄청난 변화를 몰고 왔다.

 

학자들은 이로써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 교황 아래에서가 아니라 교황과 함께 교회 운영에 협력하는 주교단, 교회의 사회적 사명, 평신도의 적극적 교회 직무 참여, 교회의 비가톨릭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과의 대화·협력의 필요성이 강조됐고, 새로운 쇄신과 개혁의 시대가 열렸다고 진단한다.

 

공의회 후 신학의 다원주의가 가톨릭 신앙을 혼란에 빠트림으로써 미사에 참여하는 신자들 수가 계속 감소됐고 성소를 포기하는 성직자·수도자들 수가 심각하게 증가했다’ ‘교회의 민주화 현상으로 교황과 주교 권위가 약화되었다는 점과 함께 세계에 대한 교회의 영향력이 사라졌다’ ‘공의회에서 드러난 보수주의 진보주의 대립으로 교회가 분열된 모습을 드러냈다는 등의 비판이 없지 않았으나 진보주의자들은 이 같은 내적인 동요가 교황 요한 23세의 아죠르나멘토를 구현하는데 있어 거쳐야할 필수적인 과정임을 역설했다.

 

 

한국교회의 변화

 

한국교회 안에서도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성과를 내외적으로 이룩했다.

 

라틴어 미사 및 제 성사 집전 경문과 기도서, 그리고 공문서 작성이 한글로 바뀌었으며 성경 역시 라틴어판에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판 한글 번역본으로 바꿔 사용하게 됐다.

 

제대도 벽을 뒤로하고 회중을 향해 놓이게 됐고, 감실과 십자가를 향한 인사도 무릎을 꿇는 서양식 대신 허리를 굽히는 한국식으로 대치됐다. 교회 건축과 예술 및 문학 부문에서도 한국적 정서나 색채가 드러나는 작품들이 등장하는 등 외형상 성과가 드러났다.

 

- 2차 바티칸공의회는 규모면에서 역사상 가장 큰 공의회였다. 다뤄진 안건의 양도 방대했을 뿐 아니라 참석 인원 규모도 엄청났다.

 

 

2차 바티칸공의회 가르침의 중심 개념인 친교 교회론이 강조되면서 평신도들이 주교회의 산하 각급 위원회를 비롯 단위 교회 제 위원회 위원들로 참여하게 됐고 제반 교회 활동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장이 마련됐다.

 

사회정의 실현과 세계 평화를 도모하는 활동 등 외부 쇄신과 관련해서도 상당한 성과를 보였다. 공의회 이전에 한국교회 구성원 대다수가 주로 교회 영역 안에서 성사생활에 참여하는 것으로 자족하는 신앙생활에 머물렀다면, 공의회를 계기로 한국교회는 대사회 활동에 적극 참여함으로써 교회의 사회적 이미지와 위상을 획기적으로 바꿔놓는 성과를 이뤘다.

 

무엇보다 한국교회가 교회 선교 200주년을 기념, 주교회의 의결을 거쳐 사상 최초로 성직·수도자·평신도가 공동으로 참여한 한국교회 선교 200주년 기념 사목회의개최는 기념비적인 성과로 평가되고 있다. 이후 각 교구에서 사목과 신앙생활의 쇄신을 지향해 개최된 시노드들 역시 이러한 쇄신 노력의 공식적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을 맞는 지금, 한국교회는 외형적으로 공의회 정신을 수용하고 열의를 드러냈지만 그 정신을 내적으로 체화하고 심화하는 작업에서는 더욱 노력을 가해야 한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

 

역동적 성장세의 둔화, 입교자 감소, 냉담·행방불명자의 증가, 청소년 계층의 외면, 수도성소의 감소 현상 등을 감당해야 하는 상황에서 과연 공의회가 촉구한 현대 세계의 복음화 사명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는 것인지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공의회는 한국교회 안에서 여전히 진행 중인 상태인 것이다.

 

 

 

 

[공의회는 진행 중한국교회와 새로운 복음화] (2) 총론 () 공의회, 어떻게 진행됐나

"형제애를 통해 현대인을 다시 하느님께로"

 

 

- 2차 바티칸공의회 제2회기 개막식에서 성 베드로대성당의 웅장함을 배경으로 교황 바오로 6세가 기도하는 모습. 공의회를 처음 소집한 교황 요한 23세가 선종하고 그 뒤를 이은 교황 바오로 6세가 공의회를 이어갔다.

 

 

19611225일 교황 요한 23세는 사도헌장 인간의 구원’(Humanae Salutis)을 통해 공의회 소집을 공표했다.

 

196222, 공의회 개회일을 19621011일로 확정한 요한 23세는 향후 개최될 공의회 관련 문헌들을 계속 발표하면서 제21차 세계 공의회에 대한 교회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이미 16일 성직자들에게 공의회 성공을 지향하며 성무일도를 하도록 촉구한 것을 비롯 415일에는 주교들에게 경건한 생활 자세를 갖추도록 조언했다. 428일에는 공의회 성공적 결실을 위한 전 신자들의 묵주기도 봉헌을 요청했다.

 

마침내 교황은 86일 자의교서 다가오는 공의회’(Appropinquante Concilio)를 통해 공의회 진행에 관한 지침서를 발표했다.

 

19621011일 드디어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역사적인 막을 올렸다. 교황 요한 23세는 개회 연설을 통해 세 가지 신비로운 일치, 즉 가톨릭 신자 사이의 일치, 또 가톨릭 신자와 갈라진 그리스도인의 일치, 가톨릭 교회와 그리스도교와 다른 신앙을 지닌 종교인의 일치를 이루는 것을 공의회 임무라고 강조했다.

 

또 파괴밖에 보지 못하고 현대 사회를 나쁘게만 생각하며 언제나 재난만을 예고하는 이들을 비판하면서 그들을 불운의 예언자로 불렀다. 보수적이며 방어적 태도를 보여왔던 교황청 성직자들을 겨냥한 것이었다.

 

공의회는 총 4회기에 걸쳐 진행됐다. 1회기(1962.10.11~12.8)에는 전례’ ‘계시의 원천’ ‘매스미디어’ ‘동방교회에 관한 의안을 다뤘다. 그러나 채택될 만한 초안을 찾지는 못했다. 이 회기 동안에는 동방교회와 프로테스탄트 17개 교파에서 35명 대표들이 참관인으로 초대받아 참석했다.

 

2회기(1963.9.29~12.4)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재개됐다. 교황 요한 23세가 제1회기 휴회 중 196363일 선종했기 때문이다.

 

이 회기를 시작하며 바오로 6세는 2회기는 그리스도교에 대한 진리를 잘 연구하고 정립하고 표현할 때가 도래하여 교회를 중심 의제로 다루어 교회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도록 정의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공의회가 교회 쇄신을 위해 노력한다는 것은 가톨릭 교회의 바람직하지 못한 모습을 인정하고, 본질적 전통과 단절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부적절한 형식을 제거하고 결실이 풍부한 것을 되찾음으로써 전통을 존중하기를 희망하는 것이었다. 더불어 가톨릭 교회는 갈라진 형제들과 분열의 책임을 함께 나누어 가져야 한다는 고백과 함께, 서로 용서하여 일치가 회복되기를 요청했다.

 

이 회기에서는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전례헌장)사회 매체에 관한 교령이 반포됐다. 총회에 평신도가 방청할 수 있는 규정이 만들어졌으며 제1회기 때보다 더 많은 개신교와 동방교회 참관인들이 초청됐다.

 

3회기(1964.9.14~11.21)에서 교황 바오로 6세 교황은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분명하게 밝히고 교계제도와 주교직의 기원·본성·사명·권한을 고찰하는 것이 공의회 중요 업무임을 규정했다.

 

교회, 주교의 직무, 종교의 자유, 유다교와 비그리스도교, 하느님의 계시, 평신도 사도직, 가톨릭 동방 전례의 교회, 현대 사회 안에서의 교회, 사제, 그리스도교 일치에 대한 토론이 있었던 제3회기는 일치 운동에 관한 교령’ ‘교회헌장’‘동방 가톨릭 교회들에 관한 교령이 반포되는 성과가 있었다.

 

바오로 6세는 폐회 연설을 통해 공의회에서 주교직의 품위가 장엄하게 선언되고 임무와 기능이 명기된 것에 대해 기쁨을 표명한데 이어 예수 그리스도가 베드로에게 준 수위권이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에게 주어졌음을 알리고, 또 교황권이 확인될 때에 주교 권위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음을 밝혔다.

 

아울러 교회헌장에서 밝혀진 교회 신비에 대한 가르침으로 교회의 참된 모습이 신자들에게 뚜렷하게 이해되기를 기대하면서 마리아를 신자들과 사목자의 어머니로 선언했다.

 

4회기(1965.9.14~12.7)는 사랑의 교류가 특색이어야 함이 강조됐다. 바오로 6세는 공의회를 하느님께 대한 사랑, 교회에 대한 사랑, 인류에 대한 사랑과 같은 삼중의 사랑의 행위로 특징 지웠다.

 

이 자리에서 바오로 6세는 교회의 공동선을 위해 교황이 적당하다고 생각할 때에 언제든지 지역 교회 주교들의 자문과 협조를 얻어 소집될 수 있도록 주교대의원회의설립 예정을 밝혔다.

 

회기 동안 주교들의 사목 임무에 관한 교령’ ‘수도 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령’ ‘사제 양성에 관한 교령’ ‘비그리스도교와 교회의 관계에 관한 선언’ ‘그리스도인 교육에 관한 선언’ ‘계시헌장’‘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 ‘교회의 선교 활동에 관한 교령’ ‘사제의 생활과 교역에 관한 교령’ ‘사목헌장이 반포됐다. 특별히 이 회기에서 교황 바오로 6세는 독신 생활에 대한 규율 강화를 역설했다.

 

1965127일 마지막 회의라 할 수 있는 제9차 공개회의에서 교황은 신자들이 공의회 가르침을 익히 알고 공의회 교령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를 원하는 한편 개인 생활이나 사회 생활에서 영성 쇄신에 박차를 가하고 하느님께 공의회 성과에 대해 감사하는 기도를 드리기를 희망했다. 이런 의미에서 196611일부터 529일까지 특별 성년이 반포됐다.

 

교황 바오로 6세는 이날 전체 공의회 의미를 형제애를 통해 현대인을 하느님께 다시 데려오기 위한 것으로 요약했다.

 

다음날인 128, 성 베드로 광장에서 열린 폐막식에서는 지식인, 예술가, 여성, 노동자, 고통 받는 이, 청소년들에게 메시지가 발표됐고, 이 내용이 각 그룹의 대표들에게 전달되는 인상적인 광경이 연출됐다. 이 자리에서 교황은 공의회 폐막을 선포했다.

 

세상 구원을 위해 시대의 징표를 읽고 세상 중심적으로 교회를 바라보며 세상에 교회 자신을 적응시키는 거대한 작업의 시간이 교회 역사 안에 방점을 찍는 순간이었다.

 

 

1차 바티칸공의회는? - 신앙 위기 극복 · 교황 영적 권위 강화

 

교황 비오 9(1846~1878)에 의해 1869128일부터 187091일까지 소집된 공의회다.

 

1848년 혁명에 기인한 이탈리아 통일 운동이 반() 가톨릭적-() 교황적 분위기를 몰고 온 시대적 상황에서 약화된 가톨릭 교회의 위상 및 교황권을 높이는 한편 가톨릭 자유주의에서 오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가톨릭 신학 정리가 주된 배경이라 할 수 있다.

 

교황 비오 9세는 1869128일 로마 베드로 대성전에서 공의회를 개회했으며 이 자리에서 삼위일체의 하느님의 영광, 가톨릭 교회와 가톨릭 신앙의 고양과 증진, 오류의 일소, 성직자와 그리스도인의 생활 쇄신, 인류의 화합과 공동 평화가 목표임을 선언했다.

 

공의회는 제3차 공개회의(1870424)에서 가톨릭 신앙에 관한 교의헌장 하느님의 아들’(Dei Filius)을 선포했다. 이 헌장은 합리주의적 이신론(理神論)에 반대하여 계시의 의미를 제시했고, 신앙주의에 반대하여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주장했다. 20세기에 등장하는 근대주의의 교회 침입을 저지할 수 있는 원칙을 제시했다.

 

4차 공개회의(1870718)에서는 그리스도의 교회에 관한 헌장 영원한 목자’(Pastor Aeternus)가 선언됐다. 이 헌장은 국가교회 사상을 종식시켰고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성을 정의, 교황의 영적 권위를 강화했으나 일부 서구 국가와 교회의 충돌(정교조약 파기)을 야기했다. 또 사목 교서의 권고를 거부한 가톨릭 신자들이 구가톨릭교를 조직해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는 사태가 빚어지기도 했다.

 

그 해 91일 마지막 회의가 열렸으나 920일 이탈리아 군대에 의해 로마가 함락됨으로써 교황령이 붕괴, 계획된 주교’ ‘공석 주교좌’ ‘교리문답서에 관한 의안은 토의 또는 승인받지 못한채 중단됐다. 이후로 공의회는 속개되지 못했다.

 

하지만 이 공의회는 교황의 영적 권위가 더욱 강화되고 교황이 세계 안에서는 세속 군주가 아니라 정신적 지도자로, 교회 안에서는 영적 지도자로 자리를 굳히는 계기가 됐다.

 

 

 

 

[공의회는 진행 중한국교회와 새로운 복음화] (3) 교회헌장 해설 ()

교회 본질 · 사명 본격적으로 다룬 최초의 문헌

2012년 신년기획 공의회는 진행 중-한국교회와 새로운 복음화가 총론에 이어 공의회 4개 헌장을 전문가 해설로 풀이해보는 기회를 마련한다.

 

2차 바티칸공의회 문헌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4개 헌장을 현 시대 신학자들 시각으로 조명함으로써 공의회 정신을 재발견하는 동시에 새로운 복음화를 향한 한국교회 모습을 함께 가늠해 보고자 하는 취지다.

 

2차 바티칸공의회는 공의회 문헌 중 거룩한 전례에 관한 헌장’(전례헌장 Sacrosanctum Concilium),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교회헌장 Lumen Gentium),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 헌장’(계시헌장 Dei Verbum), ‘현대 세계의 교회에 관한 사목 헌장’ (사목헌장 Gaudium et Spes) 4개 헌장을 발표했다.

 

교회헌장을 필두로 전례헌장, 계시헌장, 사목헌장 순으로 게재될 4개 헌장 해설은 각 헌장 당 2회에 걸쳐 내용이 소개될 예정이며, 해설은 신정훈 신부(가톨릭대 교수, 교회헌장), 윤종식 신부(의정부교구 정발산본당 주임, 전례헌장), 안소근 수녀(가톨릭교리신학원 가톨릭신학연구실장·성도미니코선교수녀회, 계시헌장), 정희완 신부(대구가톨릭대 교수, 사목헌장)가 맡는다. [이주연 기자]

 

 

개요

 

인류의 빛(Lumen gentium)은 그리스도이시다라는 말로 시작하는 교회에 관한 교의 헌장(교회에 관한 사목헌장과 대별되어 일반적으로 교회헌장이라고 불린다)은 그 빛을 받아 모든 사람을 비추는 사명을 지닌 교회의 본질과 구성원에 대해 서술한다. 교회헌장은 이천 년의 교회 역사 가운데 교회가 자신의 본질과 사명에 대해 본격적으로 서술한 최초의 문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교회 역사를 보면 교회는 오랫동안 그릇된 가르침을 거스르고 교회의 분열을 막기 위해 하느님과 인간의 본질에 관한 물음이나 은총과 구원에 관한 문제를 다뤘지만, 정작 그러한 가르침을 펼치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적극적으로 사유할 기회가 없었다. 특히 서양에서 교회는 사회를 지탱하는 의심할 나위없는 당연한 존재로 여겨졌기에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은 사실 제기될 이유가 없었다. 교회가 자기 자신에 대해 논구하기 시작한 것은 종교개혁 이후 세속화와 근대화를 겪으면서 교회가 자신을 사회와 구분되는 존재로 인식하면서 자신을 객관화하기 시작한 이후이다. 교황의 수위권과 무류권을 다룬 제1차 바티칸공의회처럼 교회가 자신의 일부 구성원에 대해 논구한 경우는 이전에도 있었지만, 전체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해 체계적으로 다룬 것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교회헌장이 처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관점에서 교회헌장이 어떤 과정을 통해 생성되었는지, 또 어떠한 내용을 담고 있는지, 그리고 교회헌장이 지금 교회의 삶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해 다루고 있는 교회헌장은 많은 신학적 토론과 수정을 거쳐 19643차 회기에 가서야 확정 선포됐다.

 

 

생성과정과 구조

 

교회헌장 역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다른 문헌과 마찬가지로 공의회 준비위원회에서 마련한 초안이 교부들에 의해 받아들여지지 않고 여러 번의 신학적 토론과 그에 따른 수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공의회의 문헌으로 확정, 선포되었는데(19641121), 이 과정을 살펴보는 것은 교회헌장의 이해에 큰 도움을 준다.도표 참조

 

먼저 준비위원회에서 작성된 초안을 보면 두 가지 사실이 드러나는데, 하나는 교회헌장에 공의회 시작부터 공의회의 핵심 관심사가 집중된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초안이 제1차 바티칸공의회가 계획했지만 완성시키지 못한 교회에 관한 헌장을 확장 완성시키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다는 점이다. 초안은 교회에 관련된 수많은 주제를 나열하고 있다. 이를 한 문헌 안에서 체계적이고 효과적으로 다루기가 난해하였으므로 각 주제를 깊이 논구하기 위하여 이 초안으로부터 많은 문헌이 파생되었다. 후에 4장은 주교들의 사목 임무에 대한 교령으로, 5장은 수도생활의 쇄신에 관한 교령으로, 6장은 평신도 사도직에 관한 교령으로, 9장은 부분적으로 사목헌장과 종교 자유에 관한 선언으로, 10장은 교회의 선교활동에 관한 교령으로, 11장은 일치운동에 관한 교령으로 발전했다. , 공의회의 16개 문헌 중에서 8개 이상의 문헌이 직간접적으로 교회헌장의 초안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이와 함께 이제까지의 공의회가 그릇된 가르침을 거슬러 정통교리를 수호하기 위해 열렸던 반면 어떤 이단의 위협도 없는 상황에서 열렸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교회의 내적 쇄신을 목적으로 하였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공의회 안에서 교회헌장의 비중을 어렵지 않게 가늠할 수 있다. 교회가 누구인지, 또 교회가 어떻게 사목을 하고 교회 밖의 사람들과 만나야 하는지를 밝히고자 했던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교회헌장은 모든 문헌 중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러한 비중에도 불구하고 초안은 이미 지적한대로 너무 많은 주제를 나열하고 있다. 1869년에서 1870년 사이에 열렸던 제1차 바티칸공의회는 전체로서 교회를 다룬 후 교계제도에 따라 교회의 다양한 구성원을 하나씩 다루려는 의도를 가졌으나 긴박한 공의회 당시의 정치적 상황 때문에 교회의 구성원 중 교황에 대한 가르침만을 우선적으로 확정한 후 중단되고 말았다. 그 이후 교회는 그동안 금지해왔던 성서연구의 방법론에 대해 전환된 입장을 취하게 되면서 교도권에 대한 가르침을 새로이 할 필요와 근대를 지나 현대로 접어들면서 국가와 교회 사이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필요성을 느꼈다. 또한 기존에 유럽사회에 집중되었던 그리스도교의 지평이 전세계로 확대되면서 여러 가지 새로운 상황에 대해 응답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종합하자면 초안은 제1차 바티칸공의회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동안 새롭게 추가된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를 가졌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차 회기에 벌어진 토론에서 교부들은 투쟁하는 교회라는 표현이 세상에 대한 교회의 방어적 이미지를 지나치게 강조한다고 지적하였다. 또한, 교회의 공동체적 차원을 강조할 필요성과 교회를 법률적 시각보다 구원경륜적 시각을 가지고 폭넓게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을 개진하였다. 이에 따라 새로운 문안의 작성이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이 작업에 이브 콩가르와 칼 라너가 신학자문위원의 자격으로 참여하면서 새로운 문안은 초안에 비해 간결하면서도 신학적 밀도를 더하게 되었다. 이렇게 기존의 틀을 벗어나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고유한 특징을 드러내기 시작한 수정안은 2차 회기에 상정되어 교부들의 열띤 토론의 바탕으로 이용되었다.

 

교부들은 수많은 제안을 통해 수정안의 골격을 유지하면서도 현재 모습의 교회헌장을 탄생시켰다. 그 중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것 중의 하나는 하느님의 백성이다. 쾰른 교구장인 프링스 추기경과 브뤼셀 교구장이었던 수에넨스 추기경은 공의회 문헌이 주교직에 대해서 다루기 전에 모든 세례받은 신자에게 공통되는 부분을 먼저 다루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 제안에 따라 공의회는 수정안의 2장에서 모든 교회 구성원에 해당하는 부분을 추출해서 하느님의 백성이라는 제목을 지닌 독립된 장을 구성하였다. 기존의 수정안은 마치 하느님 백성이 교계제도와 구분되는 개념으로 성직자와 구분되는 평신도만을 의미한다는 인상을 불러일으킬 수 있었으나 최종안은 성직자나 수도자나 평신도라는 신분에 따른 구분에 앞서 모든 신자들이 세례를 통해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한 공동체를 이룬다는 것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다른 특기할 만한 점 중 하나는 최종문헌의 5장인 교회의 보편적 성화 소명이다. 구조에서도 이미 드러나지만 본래는 수도자 신분만을 다루고자 하였다. 교회 안에서는 예나 지금이나 수도자들만이 완덕의 신분에 속하고 세속 성직자와 평신도는 완덕에 있어서 그 다음 가는 신분이라는 생각이 퍼져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교부들은 이러한 관념에 맞서 수도자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자신의 신분과 처지에 따라 하느님의 은총으로 성화에 이를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마지막으로 언급할 것은 7장이다. 공의회가 성인공경에 대해 언급할 것을 원하였던 복자 요한 23세의 유지에서 유래하는 이 부분은 순례하는 교회의 종말적 희망을 서술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드러나는 것은 천상교회와 지상교회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현세의 교회는 그 구조에 있어서나 구성원에 있어서 불완전하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교회는 하느님의 보우하심에도 불구하고 이미 완성되었다고 자만할 것이 아니라 순례의 길을 통해 자신을 정화시켜야 할 의무가 있음을 이 장은 상기시키고 있다.

 

2차 회기에서 교부들은 밀도 높은 신학적 토론을 통해서 교회의 본질과 사명에 대해 접근하였으나 수많은 제안을 회기 내에 다 수용할 수 없었기에 교회헌장은 해를 넘겨 19643차 회기에서 확정 선포될 수 있었다.

 

 

 

 

[공의회는 진행 중한국교회와 새로운 복음화] (4) 교회헌장 해설 ()

교회, 구원사업의 도구이자 그리스도의 신비체

 

각 장의 내용

교회헌장을 여는 제1장은 교회의 신비라는 제목을 지닌다. 신비를 뜻하는 미스테리움(mysterium)은 본래 그리스어에서 유래하였으며 라틴어로는 사크라멘툼(sacramentum)으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사크라멘툼은 교회 안에서 성사를 지칭한다. 그러므로 교회헌장은 교회를 성사로 이해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 안에서 성사와 같다. 교회는 곧 하느님과 이루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의 표징이며 도구이다.”(교회헌장 1) 교회를 성사로 보는 것은 교회 이해에 있어 두 가지 측면에서 획기적인 전환을 가져온다. 그 하나는 교회와 세상의 관계에 관련된다. 이미 초안이 투쟁하는 교회의 본질을 서술하려 하였듯이 공의회 이전의 교회의 세상에 대한 이해는 부정적인 면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이후 줄곧 교회는 세속권력과 실제적으로 정치적 대립관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중세 이후 발달했던 가르침, 즉 세속과 육신과 마귀는 영혼구령에 방해가 된다는 가르침은 그리스도교 신자로 하여금 세상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유도하기보다 세상과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이끌었다. 이렇듯 이전에 교회가 자신을 세상과 대별되는 존재로 이해했다면 교회헌장을 통해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를 세상을 위한 하느님의 도구로 이해한다. 본래 성사란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가시적으로 전달해주는 표지이다. , 성사를 배령하는 사람은 성사를 통해서 하느님의 은총을 얻는다. 성사는 성사 자체를 위해서가 아니라 성사를 배령하는 사람을 위해서 존재한다. 마찬가지로 교회는 하느님 구원의 표징이면서 동시에 도구로서 결코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존재할 수가 없다. 교회헌장은 교회를 결코 자족하는 존재가 아니라, 온 인류를 하느님께로 이끌기 위한 하느님의 도구로 이해한다. 산 위에 있는 고을과 등경에 올려진 등불처럼 교회는 세상의 빛으로서 세상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하는 존재이다.

다른 하나는 교회가 가시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비가시적인 차원으로서 구성된 복합체라는 것이다. “교계 조직으로 이루어진 단체인 동시에 그리스도의 신비체, 가시적 집단인 동시에 영적인 공동체, 지상의 교회인 동시에 천상의 보화로 가득 찬 이 교회는 두 개가 아니라 인간적 요소와 신적 요소로 합성된 하나의 복합체를 이룬다고 보아야 한다.”(교회헌장 8) 교회가 성사라는 사실은 근본적으로 교회가 결코 인간의 업적만으로 볼 수 없고, 오히려 하느님의 계획에 기원하고 그 안에 포함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존재로서 교회는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부분만으로는 결코 완전히 파악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회는 교회의 가시적 차원보다는 영적인 차원을 강조했던 종교개혁자들과 반대로 가시적인 차원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교회를 좁게 이해하였다. , 로마 주교인 교황과 유대하고 있는 이 만이 교회의 울타리 안에 속한다고 인정했다. 이에 따르면 로마교회와 유대가 없는 점 이외에는 신앙생활에 있어 가톨릭 신자들과 차이가 없는 정교회 그리스도인들조차 구원 문제에 있어 전적으로 배제되어 있는 듯이 설명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교회헌장을 통해 이러한 좁은 이해를 극복하고 교회를 전체로서 다시 조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로써 교회는 가시적 울타리 밖에 있는 갈라진 형제들과 일치를 위한 대화를 시작할 수 있었고, 제도적 교회 밖에서 발견되는 성화의 요소를 교회와 무관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교회를 이끌어 가시는 성령의 작용으로 인정할 수 있게 되었다.

2장은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소개하는데 이를 통해 개인에 치우쳤던 그리스도교의 구원관이 극복되고 부르심과 구원의 공동체적 차원이 조명된다. 초안에서 하느님의 백성은 교계제도를 이루는 성직자에 대당되는 개념으로서 이 둘 사이의 관계는 통치자와 백성이라는 정치적 구조에 비견될 수 있었다. 하지만 공의회를 통해 하느님의 백성은 세례 받은 그리스도 신자 전체를 지칭하는 개념으로 이해되며 본래 초기교회가 지녔던 신학적 의미를 회복한다. 하느님 백성을 이끄는 이는 하느님 자신이며,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하느님의 자녀로서 근본적인 동질성을 지닌다. 또한 교회의 직무는 공동체에 대한 봉사로 이해된다. , 직무는 그 자체를 위해 존재하지 않고 교회 공동체의 관계 안에서 그 가치를 얻는다. 교회헌장은 여기서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이 성직자들에게만 유보되어 있지 않고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주어졌다고 가르친다. 일례로서 다음의 문장은 모든 그리스도교 신자들에게 주어진 무류성을 인정한다.

성령께 도유를 받은 신자 전체는 믿음에서 오류를 범할 수 없으며, ‘주교로부터 마지막 평신도에 이르기까지신앙과 도덕 문제에 관하여 보편적인 동의를 보일 때에, 온 백성의 초자연적인 신앙 감각의 중개로 이 고유한 특성을 드러낸다.”(교회헌장 12)

1차 바티칸공의회에서는 교황만이 무류성을 지닌다고 선포하였다. 교황의 무류성은 본래 성령께서 이끄시는 교회에 주어진 무류성에 유래하지만, 당시의 상황은 교회로 하여금 불가피하게 교황의 무류성을 천명하는데 그치게 했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은 마치 교황이 개인적 차원에서 무류권을 누린다는 오해를 불러일으켜 왔다. 2차 바티칸공의회는 이를 보완하여 교황뿐만 아니라 주교단 전체, 그리고 나아가 그리스도교 신자 전체의 무류성을 선포한다. 이는 다름이 아니라 교회가 성령의 인도를 받는 하느님의 백성 전체로서 신앙 안에서 그르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이로써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제1차 바티칸공의회가 가르치고자 했던 바를 더욱 분명히 한다. 또한 신자들의 신앙 감각이 초자연적이라는 설명은 교도권이 일방적으로 행사되거나 전체 신자들의 신앙이 교도권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교도권과 신자들의 신앙이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주지시킨다.

교계 제도를 다루는 제3장에서는 특히 주교직을 상세하게 다룬다. 1차 바티칸공의회가 교황직을 강조한 결과 교황에 의해 임명된 주교들은 마치 지역교회에서 교황을 대리하는 듯이 비쳐졌다. 교회헌장은 이러한 오해를 교정하며 주교들이 교황의 대리자가 아니라, 사도들의 후계자이며 하느님의 대리로서 자신들의 고유한 목자의 직무를 수행한다고 천명한다. 아울러 베드로와 사도들이 하나의 사도단을 이루듯이 교황과 주교들이 단체적 일치를 이루는데, 그들의 합의체적 권력이 공의회를 통해 특별히 행사됨을 가르친다.

특별히 이목을 끄는 부분은 평신도에 관한 제4장이다. 교회헌장은 평신도들이 하느님의 말씀과 성사들의 도움을 거룩한 목자들에게 풍부히 받을 권리가 있으며, 자신들의 필요와 소원을 목자들에게 표명하여야 한다고 가르친다. 혹자는 1917년 법전에서 유래하는 이 문구를 두고 평신도들의 권리가 공의회 이전과 다를 바 없이 성직자들에 의해 제한된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제4장 전체를 보면 평신도의 위치가 교회 안에서 새롭게 자리매김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공의회 전까지만 해도 평신도라는 단어를 교회 사전에서 찾아보면 성직자라는 항목을 보라고만 적혀 있었고, 막상 성직자라는 항목에는 평신도란 성직자가 아닌 자로 정의되어 있었다. , 평신도는 오랫동안 교회 내에서 그 고유한 특성에도 불구하고 신학적으로는 자리매김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교회헌장은 이러한 평신도의 본질과 사명에서 시작하여 그들의 품위와 사도직, 그리고 사제직과 예언직과 왕직, 성직자들과 관계에 이르기까지 총 9개의 항을 할애하여 평신도에 대해 자세하게 서술한다. 교회헌장이 사제들에 대해서는 오직 1개의 항목을, 수도자들에 대해서도 5개의 항목을 할애한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세속성으로 특징 지워지는 평신도를 교회의 필수불가결한 신분으로 들어 높이고 있음이 명백하다. 혹시라도 평신도를 서술하는 개념이 현대적 시각으로 부족한 점이 있다면 이는 공의회의 의도가 부족한 것이 아니라 당시 그 의도를 풀어가는 언어적 표현이 부족하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는 앞으로 평신도에 관련된 신학의 발전 필요성과 밝은 전망을 시사한다고 볼 수 있다.

 

의의

2차 바티칸공의회의 대표적인 문헌인 교회헌장은 교회의 자기이해를 담고 있으며 균형적인 교회론을 전개한다. 교회는 하느님 구원 사업의 도구로서 불리움을 받았고 하느님과 인류전체의 일치를 위한 표징이다. , 교회는 본성상 결코 자족할 수 없으며 교회 밖에 대해 배타적일 수 없다. 교회는 하느님께서 주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 세상을 향해 열려 있어야 한다. 이러한 맥락에서 갈라진 형제들, 타종교인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 또한 교회의 시야에 포함되는 것이다. 또한 교회가 추구하는 구원은 결코 개별 신자의 차원에 국한될 수 없다고 교회헌장은 가르친다. ‘하느님 백성이라는 교회의 자기 이해는 남과 상관없이 나만 잘 믿으면 된다는 편협한 개인주의적 구원 이해를 뛰어넘는 공동체적 구원관을 제시한다. , 신앙생활은 교회 공동체 안에서 구성원 사이의 유기적 관계를 통해 펼쳐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공동체가 올리는 미사를 비롯한 전례, 공동체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선포되는 복음, 그리고 애덕실천의 본당활동 등이 적극적인 의미를 획득한다. 끝으로 교회헌장은 교회를 구성하는 각각의 신분, 즉 성직자, 수도자 그리고 평신도가 하느님 백성을 이루는 동시에 각기 고유한 사명을 지닌다고 가르친다. 성직자는 교회를 이끌고, 평신도는 세속에서 복음을 선포하며, 수도자는 이 세상에서 이미 하늘나라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러한 사명의 수행이 가져오는 선익이나 그 반대의 경우 초래되는 손해는 결코 그 신분을 수행하는 이들에게 국한되지 않고 전체 교회에 영향을 미친다. 따라서 모든 교회의 구성원이 각자의 사명에 따라 능동적으로 살아가야 하고, 또 어려울 때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는 가르침이 교회헌장에 담겨 있다고 볼 수 있다. 완성된 천상교회가 아닌 순례자로서 지상의 교회는 결코 완벽할 수 없기에 승리주의를 멀리하고 끊임없는 정화의 노력을 통해 하느님의 구원의 도구로서 그리스도의 빛을 더욱 환하게 세상에 비춰야 한다. 위와 같은 교회헌장의 주요 가르침은 반세기에 가까운 시일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 현실성이 조금도 상실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그 실천을 촉구한다고 할 수 있다.

 

 

 

 

 

 

[공의회는 진행 중한국교회와 새로운 복음화] (5) 전례헌장 해설 ()

전례에서 시작됐고, 전례 통해 계속되는 교회 개혁

현대화(Aggiornamento)’라는 목적으로 시작한 교회 개혁은 전례에서 시작됐고 또한 전례로 계속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왜냐하면 전례는 시대에 따라 변화하지 않는 절대적인 하나의 전통이 있는 반면에 시대와 지역, 민족에 따라 변화해야 하는 부분들로 인한 다양한 전통들도 있기 때문이다.

 

현시대에서 말씀하시는 주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또한 교회가 지닌 선교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보다 적합한 방법을 찾아 나선 교회의 모습을 드러낸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는 성령의 감도하심에 의해 시작됐다. 2차 바티칸공의회의 큰 특징은 시대의 요구에 겨우 맞추어 따라가는 정도에서 그쳤던 과거의 공의회와 달리 시대의 흐름을 면밀히 관찰, 분석하고 적극적으로 대처했다는 점이다. 아울러 그 속에서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는 깊은 영적인 의도가 있었으며, 시대의 다양한 요구에 따라 의제 토의도 교회생활 전체에 걸쳐 광범위하게 이루어졌다. 또한 오랫동안 갈라졌던 다른 형제 그리스도교와 함께 토의하는 교회일치의 의지가 무엇보다도 두드러졌다.

 

그런데 이런 노력과 의지, 진행과 결과는 어느 한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보여지는 것으로는 요한 23세의 강력한 개혁 의지의 표명이 중요했지만 그전부터 교회에서는 전례를 중심으로 교회 전반을 쇄신해야 한다는 움직임이 있었다. 이번 호에는 전례개혁의 태동과 공의회의 결과인 전례헌장의 특징들을, 그리고 다음 호에는 전례헌장의 구조와 내용 그리고 전례개혁의 구체적인 결실과 진행상황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전례개혁의 태동 - 전례운동

 

우리는 보통 물이 끓는 온도를 보통 100라고 알고 있다. 그러나 100가 되기 위해서는 그전부터 열이 있었기에 끓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잘 생각하지 않는다. 전례개혁도 마찬가지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헌장이 나오기까지는 그전에 많은 노력과 시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처음부터 교황청에서부터 움직인 것이 아니라 사목현장에서부터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그것을 연구하고 시도하는 수도원들과 연구단체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어떤 상황이었기에 전례개혁이 필요했을까?

 

1.1. 문화적으로 볼 때, 중세를 풍미했던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 그리고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거치면서 교회는 성직자와 평신도 사이의 간격이 외적, 내적으로 점점 멀어졌고 그것은 전례에서도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전례공간과 언어, 음악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예식들이 진행되는 제단은 거룩한 공간이라 생각하여 낮은 담으로 평신도들이 있는 공간과 극명하게 구분이 지워졌으며, 전례언어인 라틴어는 신자들이 못 알아듣고 주례자와 복사간에 주고받는 정도로 신비스런 언어로 자리했다. 음악은 신자들이 따라하기 힘들 정도로 품격이 올라갔고 성가대는 점점 어려운 성가를 선호하며 자신들의 음악성을 드러내는 데 자부심을 가졌다. 성가는 더 이상 신자들의 것이 아니라 전문 성가대원들과 성직자의 것이 되었다. 그래서 전례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례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에 대해서 평신도는 더 이상 관심이 없어지고 오히려 자신들이 알아듣기 쉽고 감성적으로 다가가기 쉬운 신심행위에 몰두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에서 계몽주의를 통해서 감성보다는 이성을 중시하고 전례의 의미를 찾는 시도들이 생겼으나 어디까지나 전례의 근본적인 의미를 찾기보다는 도덕적으로 신자들을 교육시키려는 수단에 불과했다.

 

1.2. 전례개혁을 이성적으로만 생각하지 않고 실질적인 운동으로 전개했던 사람들 중에 전례를 교회의 기도로 표현한 그의 작품 전례주년(L’Annee liturgique)을 지은 솔렘 수도원의 게랑제 수도원장(1805~1875)은 그레고리오 성가를 수집하고 정리하였으며 평신도들도 함께할 수 있도록 교육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다른 베네딕도 수도원들에 영향을 미쳤고 칼로엔(Caloen)의 경우에는 신자들이 미사에 함께 할 수 있도록 신자 미사경본(Missel des fideles)을 만들어 보급했다.

 

비오 10세는 성음악의 개혁에 주된 관심을 두고 있었는데, 여러 염려 중에서(Tra le sollecitudini(1903))에서 교회가 거행하는 공적이고 장엄한 기도에 대한, 그리고 성사거행에 대한 능동적 참여에 대한 염려를 표현한다. 이러한 교황의 사목적 염려를 본격적으로 논의한 것은 1909년 열린 말린(Malines) 회의로서 이때 베네딕도회 수도자인 보뒤앵(1873~1960)은 전례가 가톨릭 교의의 기초적인 교리를 확립하고 영성 생활을 자극하고 양육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라고 강조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전례운동은 독일에 전파되었는데, 전례에 대한 이해와 참여를 증진시킨 것은 마리아 라흐(Maria Laach) 수도원이다. 이곳에서 전례에 관한 연구잡지인 기도하는 교회(Ecclesia Orans)1918년에 출판되기 시작했으며 이 수도원 소속의 오도 카젤(Odo Casel)은 교부학과 종교학 연구를 통해 전례는 근원적 신비인 예수 그리스도가 그분의 구원업적과 함께 마치 구원의 운반자처럼 현존하게 되는 신비들의 거행이라고 하였다.

 

이는 전례가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연구의 결과로써 전례헌장에서 전례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데 있어서 중요한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1.3.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파리에서는 전례사목연구소 Centre de Pastorale Liturgique’가 설립되어 하느님의 집(La Maison-Dieu) 잡지와 전례총서인 Lex Orandi의 출판이 이루어졌다.

 

비오 12세 교황은 전례헌장의 서곡이라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중재자(Mediator Dei(1947))를 통해 전례에 대한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에 대해서 강조하였으며, 독일과 프랑스의 전례 연구소들이 주장한 대로 부활 전야 전례를 복구(1951)시켰으며 성주간전례를 개혁(1955)하였다. 그리고 전례개혁을 위한 준비 작업을 지시하여 1948년에 전례개혁회보가 나왔는 데, 이 책은 1)전례개혁의 필요성, 2)기본 원리들, 3)조직적 계획, 4)실제적 실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작업들은 요한 23세가 1959년 공의회를 선언했을 때, 전례준비위원회를 위한 가치있는 기초가 되었다.

 

 

2. 2차 바티칸공의회와 전례헌장

 

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전례개혁에 대한 논의를 하면서 지금의 전례가 무엇이 문제인데? 전통에 따라 내려온 것인데 무슨 문제가 있겠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은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무엇보다도 신자들이 전례에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없음에 동의했다. 그리고 전례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의 전환이 필요함을 전례운동을 하는 적극적인 신학자들이 강조했다. 트리엔트공의회와 그 이후에 전례는 고정적이고 법률적인 차원에서 예식규정을 했던 홍주’(rubrica)에 따라 외적으로 수행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래서 전례헌장은 전례는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사제직을 수행하는 것이다”(전례헌장 7)라고 하여 교회는 자신의 존재 이유인 그리스도 사제직 수행을 전례 안에서 수행하고 있음을 밝힘으로써 전례가 단순한 예식의 범주가 아님을 밝히고 있다.

 

전례의 참된 의미의 정립이라는 신학과 전례에 능동적인 참여라는 사목의 관점에서 전례개혁은 4가지 기준을 통해 이루어졌다. 1)예절과 본문에 대한 신자들의 이해가능성, 2)전통과 발전의 조화, 3)전례거행이 교회적 차원인 공동체성, 4)개혁에 대한 교계제도의 권한을 지역 주교들에게로 확대.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로마 12,1)라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은 이미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고 이 합당한 예배는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지금도 전례에서 계속 거행되고 있다. 여기서 시대를 뛰어넘는 예수님의 현존을 어떻게 전례에서 드러낼 것인가가 바로 전례개혁의 고민이다

 

 

 

 

 

[공의회는 진행 중한국교회와 새로운 복음화] (6) 전례헌장 해설 ()

전례 쇄신 통해 그리스도교 일치·세상 복음화 실현

 

 

3. 전례헌장의 의미와 내용

3.1. 공의회가 발표한 첫 문헌이 전례헌장이라는 것은 하나의 섭리다. 이 문헌에서 우리는 공의회가 의도하는 최종 목표를 발견하고 또한 그 길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의회는 전례헌장의 시작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거룩한 공의회(Sacrosanctum Concilium)는 신자들 사이에서 그리스도교 생활을 나날이 발전시키고, 변경할 수 있는 그 제도들을 우리 시대의 요구에 더 잘 적응시키고,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이의 일치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증진하고, 또 모든 이를 교회의 품으로 부르는 데에 이로운 것은 무엇이든 강화하려고 하므로, 특별히 전례의 쇄신과 증진을 위한 배려도 자기소임으로 여긴다.”(1)

시대 흐름에 맞추어 변경하려는 목적과 그리스도교 일치운동에 대한 강한 의지, 그리고 교회의 사명인 세상의 복음화에 대한 노력을 전례의 쇄신과 증진을 통해서 실현시키려는 의도를 명백히 하고 있다.

트리엔트공의회의 폐회일(1563124)4백주년 기념일인 1963124일에 전례헌장은 투표에 부쳐졌으며 2147표의 찬성과 4표의 반대를 얻어 바오로 6세에 의해 인가되었다. 헌장은 중세를 끝맺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으며, 또한 트리엔트공의회가 시간의 부족과 여러 사건의 연속 때문에 이루지 못했던 것들을 실현하였다. 전례는 교회의 예배로서 영과 진리 안에서 성부께 드리는 흠숭이며, 그리스도의 구원업적을 기념하는 것이라는 점을 명확히 하는 것, 참된 개혁을 위한 규범의 제정, ‘교부들의 가르침을 따라전례를 개혁할 것, 동시에 우리 시대의 필요성에 맞춘 개정 완수 등이다.

 

 

 

3.2. ‘전례헌장의 구조는 다음과 같다.

서론(1-4)

1장 거룩한 쇄신과 증진을 위한 일반 원칙

I. 거룩한 전례의 본질과 교회 생활에서 차지하는 그 중요성(5-13)

II. 전례교육과 능동적 참여의 촉진(14-20)

III. 거룩한 전례의 쇄신(21-40)

IV. 교구와 본당의 전례 생활 증진(41-42)

V. 전례적 사목 활동의 증진(43-46)

2장 성체성사의 지성한 신비(47-58)

 

3장 다른 성사와 준성사(59-82)

4장 성무일도(83-101)

5장 전례주년(102-111)

6장 성 음 악(112-121)

7장 성미술과 성당 기물(122-130)

부록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달력 개정에 관한 선언

 

1장에서는 예전의 공의회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례신학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특히 전례에 대한 정의와 전례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다양한 양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전례가 교회의 활동이 지향하는 정점이며, 동시에 거기에서 교회의 모든 힘이 흘러나오는 원천이라고 하며 교회생활에서 차지하는 전례의 중요성을 말한다.

그리고 교회는 모든 신자가 전례 거행에 의식적이고 능동적이고 완전한 참여를 하도록 인도되기를 간절히”(14) 바라고 있으며 그렇게 하기 위해서 전례교수를 양성시켜야 하며 신학교와 수도자 신학원에서부터 필수전공과목으로 지정했다. 이전의 전례교육은 단순히 전례규정과 거행실습 정도였다면 이제는 신학, 역사, 영성, 사목, 법률의 측면에서 다루고 교육을 받아야 한다. 또한 신자들의 전례교육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목자들은 말로만이 아니라 모범으로도 자기 양떼를 이끌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쇄신’(Instauratio)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데 모으는’(instaurare omnia in Christo)이라는 에페소서 110절을 떠올리게 하여 본래의 모습으로 복구하거나 복원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새롭게 하고 총괄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의미에서 공의회가 의도한 교회와 전례의 쇄신은 혁신적이며 본질적인 것이다. 쇄신을 위한 규범을 정하였는데, 전례규정이 사도좌와 지역주교의 권한임을 확인했고 전통과 진보의 조화를 꾀했으며 전례에서의 성경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쇄신 규범에 따라 예식서의 개정이 필요하며 라틴어뿐 아니라 지역 언어의 사용을 허가했다. 그리고 지역교회에 전례위원회를 두어 전례 사목활동을 증진시키는 데 도움을 주도록 권고하고 있다.

2장에서는 미사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위해서 미사통상문의 개정과 성경 활용, 강론의 권장, 보편지향기도의 복구, 라틴어와 모국어 사용을 언급하고 양형 영성체의 허용,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로 이루어진 단일한 미사, 공동 집전을 통한 사제직의 단일성 확인 등이 강조되었다. 개인적이며 사적인 미사가 성행되던 관행에서 본래 초기 교회의 공동체성을 강조하며 공동 집전을 부활시켰고, 더불어 본미사로 불리던 성찬 전례의 준비에 불과했던 말씀 전례도 미사의 본래 요소임을 강조했다. 후속 조치로 제대가 벽에서 떨어져 사제와 신자 사이에 위치했으며 사제와 신자가 마주보며 대화를 하는 구조의 미사형태로 바뀌었다.

3장부터 제7장까지는 전례에 속하는 성사들과 준성사, 성무일도, 전례주년에 대한 쇄신의 기준과 의미를 설명하고 있으며 성음악에 대해서도 그 중요성과 교육, 전통적인 그레고리오 성가와 다성 음악의 보존과 활용, 그리고 대중성가를 통한 신자들의 능동적인 참여를 말하고 있다. 성미술과 성당 기물에 대해서는 그 품위와 조건을 제시하며 주교들의 관심을 독려한다. 그러나 성당 건축에 대해서는 전례 행위의 실행과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 확보에 적합하도록 힘써 배려하여야 한다”(124)는 짧은 언급으로 그쳐서 아쉬움을 남긴다.

 

- 전례헌장은 시대 흐름에 맞추어 변경하려는 목적과 그리스도교 일치운동에 대한 강한 의지, 그리고 교회의 사명인 세상의 복음화에 대한 노력을 전례의 쇄신과 증진을 통해서 실현시키려는 의도를 명백히 하고 있다. 이에 따라 미사통상문의 개정, 모국어 사용, 양형 영성체의 허용 등이 이뤄졌고, 제대가 벽에서 떨어져 사제와 신자가 마주보며 대화하는 구조의 미사형태로 바뀌게 됐다.

4. 후속 조치들과 갈등

바오로 6세는 1964115일 사도좌 서간 거룩한 전례(Sacram Litur giam)로써 전례헌장 실시평의회를 설립하여 구체적인 후속조치를 명하였다. 그래서 구체적인 일반지침(Instructio Inter Oecumenici 1964), 성음악지침(Instructio Musicam Sacram 1967), 성찬례지침(Instructio Eucharisticum Mysterium 1967)을 통해 준비하고 전례서들을 출판하기 시작했다. 로마 미사경본의 경우에는 1970년 바오로 6세 미사경본이 출판되었고 1975, 2000, 2004년 개정판들이 나왔다. 현재, 한국어 미사경본 개정판은 주교회의의 승인을 거쳐 사도좌의 인준을 요청한 상태이다.

2차 바티칸공의회 전례 쇄신의 구체적 실행에 대해서는 두 가지 방향에서 도전을 받고 있다. 하나는 전례 거행과 성찬 기도문의 작성에 있어서 완전한 자유를 주장하는 전위파이며 다른 하나는 비오 5세의 전례(트리엔트공의회 전례)의 고수와 라틴어 사용을 거의 극단적으로 주장, 옹호하는 보수파이다. 전위파에 대해서는 2004년 교황청 경신성사성에서 구원의 성사(Redemptionis Sacra mentum)로써 요즈음 몇몇 지역에서 자주 행하고 있는 오용과 남용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교회의 규범을 확인해주었다. 보수파에 대해서는 2007년 베네딕토 16세가 교황들(Summorum Pontificum)을 통해서 1962년 미사경본 사용을 허락하면서 포용하였다.

 

구원의 성사5항에서 교회의 권위가 발표한 규범들을 준수할 때는 생각과 말과 외적 행위, 마음가짐이 일치하여야 한다. 규범들을 겉으로만 지키는 것은 명백히 거룩한 전례의 본질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전례를 통하여 당신 교회를 모으시어, 교회가 당신과 함께 한마음 한몸이 되기를 바라신다라고 권고한다. 전례에 생각과 말과 외적 행위, 마음가짐이 일치하여 규범에 따라 참여하는 것은 기본이며 이것을 넘어서 우리는 아버지 하느님과 대화하며 찬미와 감사, 그리고 청원을 드리며 성령의 감도로 성자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노는 마당이어야 한다. 그분과 함께하는 전례야 말로 참된 은총과 축복의 장이며 시간이다.

전례쇄신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전례헌장으로 끝난 것이 아니다. 교회는 계속해서 세상의 복음화를 위해 변화하는 시대의 요청에 응답하려고 노력하며 각 지역과 민족에 맞는 토착화의 노력도 기울여야 한다. 그래야 그리스도의 현존으로 이루어지는 구원의 현재화가 전례를 통해서 계속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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