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치스코의 향기] (1) ‘꼰벤뚜알’ 영성
꼰벤뚜알, 함께 살아가며 세상에 응답하는 ‘작은형제들’
꼰벤뚜알 작은형제회는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창설한 수도회이며, 그 회원들을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이라 부른다. 지역 고유의 호칭 사용을 허가하는 규정에 따라 한국에서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라 부른다. ‘꼰벤뚜알’이라는 이름은 ‘공동의’ ‘수도원의’라는 뜻이다.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은 창설자의 뜻에 따라 참된 형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따라서 회원들은 형제로서 모두가 동등한 권리와 의무를 지니고(단, 성품성사에서 비롯된 것들은 예외다) 공동체의 일상과 소임에 참여한다.
‘꼰벤뚜알’이라는 명칭은 작은형제들이라는 이름에 일찍이 덧붙여졌다. 1517년 이후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은 개혁 프란치스칸들 그리고 카푸친 작은형제들의 등장·설립과 함께 그들과 구분 짓는 이름이 되었다. 1517년 이전까지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은 대중적으로, 또 공식적으로 ‘작은형제회’, ‘작은형제들’로 불렸다.
‘꼰벤뚜알’은 수도원이라는 일반적 의미에서 시대 징표를 읽고 응답하는 공동체라는 의미로까지 확장되었다.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은 세상과 교회의 필요와 요구에 응답하고자 ‘꼰벤뚜알적으로’ 그들 자신을 발전시켜온 수도 공동체에 속한 수도자들이었다. 그들은 프란치스칸 개혁 운동이 부흥하던 시기에도 꼰벤뚜알 작은형제회라는 이름으로 완전한 자치권과 독립성을 유지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다른 프란치스칸 1회와 마찬가지로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규칙을 따른다. 이 수도규칙은 1223년 호노리오 3세 교황이 칙서 「Solet annuere」로 인준하였다.(「인준받은 수도규칙」) 수도규칙 원본은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의 아시시 대수도원(Sacro Convento)에 보관되어 있다. 수도규칙 준수와 관련된 프란치스칸 1회 각자의 생활방식의 엄격함과 금욕적 차이는 각기 고유한 회헌으로 규정되었다. 이러한 회헌은 수도규칙을 현재에 충실히 준수하며 살아가는 기준을 제시해준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2019년 총회에서 개정한 회헌을 교황청 인준을 받아 사용하고 있다.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의 회헌은 “순종 안에, 소유 없이, 정결 안에서 살면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는” 작은형제들의 수도규칙과 생활을 충실히 구현하기 위해 작음과 형제애, 꼰벤뚜알 정신을 강조한다.
작음은 형제회의 이름인 작은형제회와 연결돼 있다. 작음은 프란치스코가 형제들이 지니기를 원했던 가난과 겸손, 단순함을 드러낸다. 성인은 이 작음의 영성이 모든 일에 있어 교회에 겸허히 순종함으로써 특별히 ‘더 작은 사람들’이 되어 살아가며 형제회의 삶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형제애는 형제회의 핵심 요소다. 형제회는 개별 수도원과 봉사자요 종인 장상들, 그들에게 순종해야 하는 형제들로 구성된 하나의 유기적인 가족이다. 형제애는 특별히 프란치스칸 영성과 복음적이고 사도적인 삶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마지막으로 꼰벤뚜알 정신은 형제회를 특징짓는 이름인 ‘꼰벤뚜알’과 연결되어 있다. 이 정신은 ‘교회의 봉사를 위한 다양한 사도직’을 만들고 발전시키는 기본 요소다. 꼰벤뚜알 정신은 형제들로 하여금 교회의 기본적 사목활동뿐만 아니라 선교·학문·사회복지·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세상과 교회 요구에 응답하기 위해 노력하게 만든다. 더불어 더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직책뿐만 아니라 교황직처럼 높고 더 많이 봉사해야 하는 직책을 맡게 한다. 꼰벤뚜알 정신은 수도규칙의 완화, 특전의 남용, 느슨한 생활과 동의어로 여겨질 수 없는 영성이다.
[프란치스코의 향기] (2)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아시시 성지 ①
아시시, 800년 이어온 살아 있는 신앙의 유산
200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는 이탈리아 움브리아주의 작은 도시 아시시를 ‘아시시, 성 프란치스코 대성당과 그 밖의 프란치스칸 성지들’이란 명칭으로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재했다. 이는 단순히 중세 건축물의 보존 상태가 훌륭하다는 물리적 평가를 넘어선 결정이었다.
등재 기준 가운데 여섯 번째 항목이 매우 인상적이다. 아시시가 “작은형제회의 발상지로서, 타 종교와 신앙에 대한 평화와 관용의 보편적 메시지를 담고 있는 살아있는 신앙의 유산”임을 명시적으로 밝히고 있다. 아시시는 과거의 영광에 머물러 있는 화석이 된 유적이 아니라, 성 프란치스코가 뿌린 다양한 가치가 8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인류의 양심을 깨우는 역동적이고 거룩한 곳임을 세계가 인정한 것이다. 이 등재는 아시시의 예술적·영성적 가치가 특정 종교를 넘어 전 인류의 보편적 자산임을 선포한 역사적 이정표가 되었다.
이 거대한 영적 유산의 중심에는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자리한다. 앞선 글에서 설명했듯이 ‘꼰벤뚜알’은 ‘공동체’ ‘수도원’이란 뜻을 내포하는 이름이며, 이는 성인의 유해가 안치된 아시시 대수도원(Sacro Convento)을 중심으로 형제들이 공동체를 이루고 살며 성지를 수호해 온 정체성을 대변한다.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은 1230년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를 대성당으로 옮겨 모신 이래, 단 한 번도 이 거룩한 터전을 떠나지 않고 성인의 숨결을 지켜왔다. 아시시의 돌벽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기도의 향기와 대성당의 장엄한 전례는 바로 이들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이 8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이어온 헌신과 기도의 결실이다. 이들은 단순한 관리인을 넘어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을 현대의 언어로 옮기고 순례자들의 영혼에 평화의 씨앗을 심는 영적 파수꾼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아시시의 성지 가운데서 대성당의 웅장함보다 앞서 마주해야 할 곳은 평원 아래의 ‘리보토르토(Rivotorto)’ 성당이다. 1209년 교황 인노첸시오 3세로부터 「생활 양식(원 수도규칙)」을 구두로 인준받은 직후 프란치스코와 초기 형제들은 이 구불구불한 개울가에 위치한 낡은 오두막에서 첫 공동체 생활을 시작했다. 이곳은 이름도, 규칙도, 거창한 수도원 건물도 갖추지 못한 채 오직 복음의 기쁨만으로 가득했던 형제회의 못자리와도 같은 장소다. 리보토르토의 생활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복음만을 실행에 옮기며 살아가려는 프란치스코의 결심이 가장 순수하게 구현된 순간이었다. 비가 새고 바람이 드는 비좁은 석조 오두막 안에서 형제들은 세상이 줄 수 없는 ‘완전한 기쁨’을 노래했다.
오늘날 리보토르토 성당 내부에는 당시 형제들이 기거했던 초라한 오두막이 보존되어 있다. 거대한 성당이 이 작은 돌무더기를 보석처럼 감싸안고 있는 형상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지향하는 가치를 상징적으로 드러낸다. 화려한 예술로 성인을 현양하면서도, 그 핵심에는 가장 가난했던 ‘작은형제들’이라는 초심을 잃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다.
순례자들은 리보토르토의 낮은 문을 통해 몸을 굽히며, 성 프란치스코와 초기 형제들의 겸손이 관념이 아닌 구체적인 생활양식이었음을 체험한다. 결국, 아시시는 도시 전체가 돌과 기도로 쓰인 하나의 거대한 프란치스코의 생애를 기록한 전기문학작품이다.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은 이 전기가 바람에 흩어지지 않도록 정성껏 갈무리해 온 기록자들이다. 리보토르토의 가난에서 시작된 이 전기의 서막은 이제 아시시 언덕 위의 대성당으로 이어지며, 인류가 나아가야 할 평화의 길을 밝히는 위대한 고전이 되고 있다. [가톨릭평화신문, 2026년 5월 24일, 한규희 신부(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프란치스코의 향기] (3)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아시시 성지 ②
800년 만에 다시 드러난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
아시시 서쪽 끝, 한때 죄인들의 처형지여서 ‘지옥의 언덕’이라 불렸던 곳은 성 프란치스코의 시신을 모심으로써 ‘천국의 언덕’으로 거듭났다. 그 정상에 우뚝 솟은 성 프란치스코 대성전은 로마네스크와 고딕 양식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룬 중세 건축의 걸작이다. 1228년 성인의 시성식 이튿날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직접 초석을 놓았고, 이후 치마부에·조토·시모네 마르티니 등 당대 거장들의 프레스코화가 대성전 벽면을 가득 채우며 성인의 삶을 예술로 승화시켰다.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은 1230년 대성전 완공 이래 이곳을 수도회의 본산으로 삼아 성인의 가르침을 전 세계로 전파하는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대성전의 심장은 지하 무덤 성당(Tomba)이다. 1230년 성프란치스코를 안치할 당시, 엘리아 형제는 성해 도난과 훼손을 우려해 대성당 바닥 깊은 곳에 시신을 비밀리에 매장했다. 이 비밀이 철저히 지켜진 탓에 형제들조차 정확한 위치를 알지 못한 채 588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1818년 비오 7세 교황의 허가 아래 발굴 작업이 시작되었고, 마침내 성인의 유해가 안치된 석실이 발견되었다. 이후 무덤 성당이 정비돼 순례자들이 성인의 곁에서 기도할 수 있게 되었다.
2026년은 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해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2026년 2월 22일부터 3월 22일까지 성인의 유해를 일반에 완전히 공개했다. 1978년의 제한적 공개와 달리, 이번에는 특수 유리관에 안치된 성인의 유해를 누구나 가까이서 알현할 수 있었다. 800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이 장엄한 현시 기간 동안 전 세계에서 약 50만 명의 순례자가 방문해 아시시의 언덕을 기도의 열기로 채웠다.
이 성해 공개 및 현시가 갖는 의미는 단순한 역사적 기념을 넘어선다. 성 프란치스코는 평생 그리스도의 수난을 자신의 몸에 새기길 갈망했고, 마침내 라 베르나 산에서 오상(五傷)을 받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완전한 일치를 이루는 은총을 받았다. 800년의 세월을 건너 우리 앞에 나타난 그의 성해는 복음의 가치가 결코 낡거나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생명력을 지니고 있음을 온몸으로 증언한다.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이 수세기 동안 묵묵히 이 무덤을 지켜온 이유는 바로 이 ‘복음의 실재성’을 세상에 알리기 위함이었다. 성인의 유해는 죽음을 이긴 신앙의 증거물이자, 오늘날 갈등과 분열로 점철된 인류에게 던지는 강력한 평화의 메시지다.
아시시의 종소리는 이제 우리에게 마지막 물음을 던진다. 800년의 시간을 뚫고 우리 곁으로 다가온 성 프란치스코의 유해는 우리 역시 각자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향기’가 되어야 함을 일깨운다.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이 정성껏 보존해 온 성지의 돌 하나, 성인의 유골 한 조각은 모두 우리가 회복해야 할 인간다움과 형제애를 향하고 있다. 아시시 대성당 지하의 고요한 불빛 아래 우리는 성인의 마지막 유언과도 같은 인사를 가슴에 새긴다. “주님께서 여러분에게 평화를 내려 주시기를 빕니다!” 이 인사는 800년 전 리보토르토의 작은 오두막에서 시작되어 오늘날 대성당의 영광을 거쳐 우리 모두의 삶이라는 새로운 전기로 이어지고 있다
‘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 특별 희년’ 기념 대담
수도복도 활동 형태도 다르지만, 우리는 모두 ‘작은 형제들’
태양을 형제라 부르고, 달을 자매라 노래했다. 바람과 물·불·땅 심지어 죽음마저 형제자매라 불렀다. 800년 전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눈이 멀어 가는 고통 속에서 ‘피조물의 노래’를 완성했다. 가난도 병도 그에겐 찬미였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던 눈이다. 그 눈으로 나환자(한센인)를 껴안고, 맨손으로 이집트 술탄을 찾아가 평화를 말했다.
그로부터 800년, 성 프란치스코는 ‘제2의 그리스도’라 불리며 종교를 넘어 인류의 유산이 됐다. 최초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탄생한 데 이어, 레오 14세 교황은 “우리 시대는 프란치스코 성인이 살던 시대와 크게 다르지 않고, 그 가르침은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며 올해 성인 선종 800주년 특별 희년을 선포했다.
프란치스코의 찬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성인을 사부라 부르는 프란치스칸들이 온 세상에서 그 이상을 따라 살고 있기 때문이다. 희년을 맞아 프란치스칸들이 한자리에 모여 이 땅에서 프란치스코의 제자로 살아가는 진솔한 이야기를 나눴다.
본지는 작은형제회 오학준(관구 경리) 신부,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 권정대(참사위원, 성소계발 담당) 신부, 카푸친 작은형제회 한규호(학생, 홍보미디어·성소계발 담당) 수사를 초대해 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 특별 희년 대담을 가졌다.
Q 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 희년을 맞아 특별히 한자리에 모인 소감을 나눠주십시오.
권정대 신부(이하 권) : 이 희년은 단순한 기념제가 아니라 ‘기억’과 ‘식별’의 시간입니다. 교회는 성인의 죽음 자체가 아니라, 끝까지 자신을 내어주며 프란치스칸은 물론 모든 그리스도인, 나아가 모든 이가 성인처럼 자유롭고 기쁘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오학준 신부(이하 오) : 프란치스칸이 이렇게 한자리에 모인 것 자체가 기쁩니다. 관구 경리 소임을 맡고 있어 신자들과 만날 기회가 많지 않은데, 희년이 시작된 뒤 수도원을 찾는 분들이 눈에 띄게 늘었습니다. 서울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봉헌되는 직장인 미사에도 전보다 훨씬 많은 분이 오시고요. 수도원 담장 너머까지 사람들이 찾아오는 모습을 보면서 희년을 실감하고 있어요.
한규호 수사(이하 한) : 저도 홍보미디어를 맡고 있다 보니 이번 희년을 계기로 신자들이 프란치스코 영성을 더 가까이 느끼면 좋겠다는 바람입니다. 개인적으로도 경당에서 전대사를 열심히 바치고 있고요. 무엇보다 세 수도회가 이렇게 이야기 나누는 자리가 처음이라 감회가 새롭습니다.
Q 신자들이 프란치스칸 수도회를 잘 구분해서 보기는 어렵습니다. 수도복은 어떻게 다른지, 수도회 이름의 뜻도 설명해주십시오.
오 : 본래 처음 수도복은 아주 소박했죠. 당시 가난한 이들이 입던 옷 그대로였습니다. 염색도 하지 않은 천이었죠. 지금은 작은형제회와 카푸친이 갈색 계열, 꼰벤뚜알은 검은색이나 회색 계열을 입습니다. 모양에도 차이가 있는데, 작은형제회는 모자가 어깨선에서 끝나고, 꼰벤뚜알은 아래로 길게 내려옵니다. 카푸친은 뾰족한 모자가 옷에 붙어있습니다.
권 : 성인이 처음 머물렀던 수비아코 성 베네딕도 수도원 벽화에 잿빛 수도복이 등장합니다. 저희는 그 수도복이 원래 모습에 가장 가깝다고 보고 있습니다. 꼰벤뚜알은 라틴어 ‘꼰벤뚜스(conventus)’, 곧 ‘공동체’에서 유래했습니다. 공동체성을 중요하게 여긴다는 뜻이죠.
한 : 카푸친은 가장 나중에 개혁했기에 수도복 유래도 비교적 명확합니다. 이탈리아어 ‘카푸치오(cappuccio)’는 뾰족한 모자를 뜻합니다. 카푸친 프란치스칸 운동을 시작한 형제가 꿈에서 성인이 긴 모자를 쓴 모습을 보고 수도복을 고쳐 입은 것에서 유래합니다. 카푸치노 커피도 저희와 관련 있다고 하는데요. 갈색 수도복을 입은 대머리 수사들의 모습이 커피의 하얀 거품을 연상시켰다고 하죠.(웃음) 당시 카푸친 형제들이 대중에게 그만큼 친숙했다는 뜻이기도 하고요.
Q 각 수도회만의 카리스마를 소개해 주신다면요.
한 : 개혁 자체가 프란치스칸 안에 뿌리처럼 자리한 DNA라고 생각합니다. 카푸친 형제들은 개혁 이후 가장 먼저 흑사병 환자 돌봄에 뛰어들었습니다. 사람들 사이로 나아가 동고동락하는 카리스마입니다. 실제 어느 나라를 가도 카푸친 형제들에게서는 비슷한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소박하고 어눌하지만 가깝다는 느낌. 우스갯소리로 나사 하나 빠진 듯한 친근함이랄까요.(웃음)
오 : 그런 점에서 우리는 서로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습니다. 세 수도회를 연구한 한 예수회 사제의 논문을 봤는데, 결론이 ‘지금은 사는 꼴이 똑같다’였습니다. 결국 사람들 곁에 함께 있는 모습이 프란치스칸 정체성 아닐까요.
권 : 맞습니다. 서로 다른 이상을 품고 갈라졌지만 살아가는 모습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꼰벤뚜알의 특징이라면 이름처럼 공동체성을 더 강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형제적 삶과 전례, 기도와 식사에 적극 참여하는 삶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물론 쉽지 않지만요.
Q ‘가난’과 ‘형제애’는 성인의 핵심 가르침입니다. 어떻게 살아내고 계신가요?
권 : 식사 때마다 회헌을 읽는데, 최근 가난에 대한 부분을 다시 성찰하게 됐어요. 결국 사부님이 말씀하신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이를 실현하는 저희 수도회 활동 중에 지적·자폐성 어려움을 겪는 남성들과 함께 사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프란치스칸 형제애를 가장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현장이죠. 또 12.3 계엄 후인 지난해 초 서울 한남동 집회 땐 정치 색채와 관계없이 모두에게 수도원을 개방해 쉼터를 제공한 것도 작은 실천이었습니다.
한 : 저희 형제들은 실제 가난하게 살고 있습니다. 다만 그 가난을 영적으로 어떻게 살아내느냐는 늘 고민해야 할 문제이죠. 형제애와 관련해선 평등성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사제와 평형제 구분하지 않고 모두를 ‘형제’로 부르며 서로 존댓말을 씁니다. 그런 작은 문화 안에도 프란치스칸 정신이 담겨 있다고 여깁니다.
오 : 최근 관구 회의에서 설문조사를 했는데, 수도회 안에 꼭 있어야 하는 사도직 공동체와 실제 살고 싶은 공동체가 다르다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쪽방 공동체나 빈민 식당 같은 곳이 대표적이었죠. 저 역시 선뜻 가기 어려운 곳입니다. 그런데 그곳 형제들의 얼굴은 참 밝습니다. 그런 현장이 있다는 자체가 프란치스칸의 힘이죠.
Q 전쟁이 난무하는 이 시대에 ‘평화의 사도’로 불리는 성인이 던지는 메시지는 무엇일까요?
한 : 미국-이란 전쟁이 사부님 선종 800주년에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레오 14세 교황님이 800주년 기도문을 직접 주셨죠. 가장 마음에 남는 표현이 ‘무기를 들지 않고 무장을 해제한다’는 말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폭력뿐 아니라 보이지 않는 폭력까지 넘쳐나는 시대이기에 오히려 더 필요한 메시지라고 여깁니다.
오 : 맞습니다. 이번 기도문은 전쟁 시대에 평화를 말했던 성인에게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마치 현 사태를 예견한 듯합니다. 지금도 팔레스타인에 프란치스칸들이 현존하고 있음을 기억해주셨으면 합니다. 실제 분쟁 지역에서 평화를 살고 있는 형제들이 있다는 사실 말입니다.
Q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프란치스코 영성이 가장 필요한 영역은 어디일까요?
한 : 양극화가 너무 심합니다. 조금만 달라도 쉽게 등을 돌리다 보니 더 외로워지는 겁니다. 화해의 메시지가 더욱 필요한 시대입니다. ‘무기를 들지 않고 무장을 해제한다’의 핵심은 ‘내 탓’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입니다.
Q 갈수록 교회를 떠나는 젊은이들에겐 어떻게 다가가고 계신가요?
권 : 부산교구 본당 사목할 때 교구 신부님과 광안리 해수욕장에서 6개월 정도 버스킹을 한 적이 있어요. 교회를 떠난 젊은이들과 비신자들을 위한 거리공연이었는데 반응이 참 좋았습니다. 지금 성소 계발을 담당하면서도 느끼는 게 시대가 아무리 바뀌어도 하느님을 찾는 갈망 자체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겁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정신과 삶이 분리되지 않는다는 것을 몸소 보여줬습니다. 오늘날 인공지능(AI) 시대에도 깨어 식별하며 선한 것을 택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져준다고 생각합니다.
Q 비신자들도 성인의 삶과 영성에 많이 매료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오 : 멋있잖아요.(웃음) 옷을 다 벗고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사람, 무장하지 않고도 상대를 무장해제시키는 사람. 자기실현을 원하는 현대인들에게 이상적인 삶으로 보인다고 생각해요. 프란치스코를 교황명으로 택하신 전임 교황님의 영향도 크다고 봅니다.
한 : 저 역시 성소를 고민할 때 진정한 자유를 갈망했습니다. 귀도 주교님 앞에서 옷을 벗는 성인의 모습이 굉장히 강렬하게 다가왔죠. 세속의 것은 아버지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을 따르는 자유. 사람들은 물질을 바라보지만 결국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있잖아요. 성인은 그 답을 삶으로 보여주셨습니다.
Q 좋은 이상이지만 쉽지 않은 길이네요. 프란치스칸으로서 가장 내려놓기 힘든 점이 있다면요?
한 : 가난 실천이 힘들 거 같다고들 얘기하시는데, 저에겐 ‘순종’입니다. 성인 유언에 “우리는 무식한 사람들이었으며 모든 이에게 복종하였습니다”란 구절이 있습니다. 외아들로 자란 저에겐 공동체에서 형제를 받아들인다는 일이 쉽지 않았습니다. 몇 달씩 말을 안 하기도 했고요. 그러다 감실 앞에서 며칠을 앓으며 기도한 후 형제를 진심으로 받아들일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던 경험이 있습니다.
권 : 사람은 결국 자기중심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자신을 직면할 때 참 아프죠. 하지만 그 아픔을 통해 다시 하느님께 돌아갑니다. 성인은 심지어 자신이 쌓아올린 덕행조차 자기 것으로 삼지 말라고 했습니다. 끝이 없는 여정이지만, 하느님만이 전부라 고백하며 살아가는 것이 프란치스칸의 소명이라 생각해요.
오 : 회칙에 ‘대가를 바라지 말라’는 말이 나오지만, 손해 보기 싫어하는 제 모습을 자주 봅니다. 치사해지지 말자, 사사롭지 말자. 그렇게 다시 프란치스코를 바라봅니다. 이 수도복을 입고 있다는 자체가 제겐 다시 살게 만드는 힘입니다.
Q 프란치스칸으로서 오늘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조언해 주신다면?
권 : 성 프란치스코는 복음을 몸소 살아낸 분이었습니다. 쉽지 않겠지만, 성인처럼 그리스도를 따르려는 마음으로 기도와 보속의 삶을 살아간다면, 세상 안에서도, 하느님 나라 안에서도 참된 보화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Q 서로에게 덕담 한마디씩 건네면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오 : 오늘 처음 뵀는데도 전혀 낯설지 않았습니다. 같은 뿌리지만 다른 집이기에 오히려 더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양성과 존중의 아름다움을 느꼈습니다.
권 : 참 많이 배웠습니다. 오늘 이 만남 자체가 지금 시대에 보여줄 수 있는 좋은 표징이라고 생각합니다.
한 : 두 수도회가 있어 늘 든든합니다. 같은 사부님을 모시는 우리 프란치스칸, 함께 기쁜 여정 걸어갔으면 합니다.
분열 아닌 영성의 확장… 800년 역사 속 프란치스칸의 ‘다양성’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성인이 활동할 때부터 긴장이 싹텄다. 급속히 늘어나는 회원 수, 대학과 도시 사목의 필요성, 교황청의 요구 등이 맞물리며 ‘가난을 얼마나 엄격하게 지킬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이 있었다.
프란치스코 선종 후 13세기 후반부터는 성인의 가난 정신을 현실에 맞게 적용해야 한다는 흐름과, 어떠한 타협도 없이 엄격하게 지켜야 한다는 흐름 사이 갈등이 깊어졌다. 여러 교황이 중재에 나섰지만, 내부 긴장은 쉽게 해소되지 못했다.
결국 1517년 레오 10세 교황이 칙서 「Ite vos」를 반포하면서 수도회는 도시와 수도원 중심 공동체 생활을 강조한 ‘꼰벤뚜알(Conventual) 작은형제회’와, 엄격한 규칙 준수와 청빈을 강조한 ‘옵세르반트(Observants·준수파) 작은형제회’로 공식 분리됐다.
16세기 초에는 준수파 내부에서 다시 ‘더 철저한 개혁’을 요구하는 흐름이 나타났다. 카푸친이다. 이들은 흑사병 환자 돌봄과 민중 설교 등 헌신적 사목으로 개혁 정신을 드러냈고, 1528년 클레멘스 7세 교황에 의해 독립 수도회로 승인받았다.
그러나 준수파 안에서는 더 철저한 청빈과 개혁을 추구하는 흐름이 이어지며 여러 갈래로 다시 나뉘었다. 이후 1897년 레오 13세 교황이 준수파 개혁 계열을 통합하면서 오늘날 작은형제회가 형성됐다. 작은형제회, 꼰벤뚜알 작은형제회, 카푸친 작은형제회가 분리 통합되는 과정이다. 이 세 수도회를 ‘프란치스칸 1회’라 부른다.
프란치스칸 가족은 남자 수도회만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2회는 관상 공동체 형태로 성인과 클라라 성녀를 따르는 성 클라라 수도회, 3회는 재속 프란치스코회와 프란치스코 규칙을 따르는 수도 3회로 구성된다. 재속 프란치스코회에서 발전해 공동생활과 수도 서원을 하는 ‘율수 3회’ 공동체도 형성됐다.
복잡한 분화 과정을 거쳤지만, 프란치스칸의 역사는 이권 다툼의 결과가 아니다. ‘가난을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 앞에 각자의 방식으로 프란치스코 정신을 더 충실히 살고자 하는 몸부림이었다. 이 ‘다양성’은 프란치스칸을 대표하는 특징으로도 꼽힌다.
현재 전 세계적으로 작은형제회는 약 1만 2000명, 카푸친 작은형제회는 약 1만 명, 꼰벤뚜알 작은형제회는 약 3200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재속 프란치스코회는 30만 명 이상, 수도 3회는 20만 명 이상으로 추산된다. 50만 명 넘는 이들이 세계 각지에서 프란치스코 영성을 따르고 있는 셈이다.
한국에는 작은형제회가 1937년 캐나다 선교사들에 의해 가장 먼저 진출했다. 현재 141명의 종신서원자가 전국 21개 공동체(분원 포함)에서 빈민·북향민·한센인·장애인·이주민·본당 사목 등을 펼치고 있다. 출판사, 수도자신학원도 운영하며, 성지관구를 비롯해 여러 선교지에도 파견돼 있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1958년 이탈리아 파도바 관구 소속 범덕례(프란치스코 팔다니) 신부가 부산에 도착하면서 시작됐다. 한센인 돌봄을 시작으로 본당 사목과 소신학교·피정의 집 운영, 성모기사회 활동 등을 이어왔다. 현재 61명의 종신서원자가 국내 8개 수도원과 미국 캘리포니아 토렌스 수도원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사회복지 시설, 출판사도 운영 중이다.
카푸친 작은형제회는 1986년 고 김수환 추기경의 요청으로 진출했다. 독일 유학 시절 카푸친 형제들의 상설고해와 24시간 성체조배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은 김 추기경은 서울대교구장이 된 뒤 직접 한국 진출을 요청했고, 아일랜드 관구가 선교사를 파견했다. 현재 종신서원자 17명이 상설고해·사회복지·심리상담 등 사도직을 수행 중이다.
주목할 점은 평신도 신앙으로 출발한 한국 교회처럼 한국 프란치스칸의 시작 역시 재속 프란치스코회였다는 사실이다. 올해 선종 60주기를 맞은 고 장면(요한 세례자, 1899~1966) 박사는 이미 1921년 미국에서 재속회에 입회해 1922년 ‘프란치스코’를 수도명으로 서약, 한국 재속 프란치스코회 발전에 큰 역할을 했다. 현재 한국 재속 프란치스코회 회원은 1만 명이 넘는다.
[프란치스코의 향기] (4)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성체 영성
성체, 가난과 겸손이 만나는 자리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는 성체성사에 대한 깊고 뜨거운 신심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의 글, 특히 「권고」와 「형제회에 보낸 편지」에서 그의 성체신심을 느껴볼 수 있다.
프란치스코는 “오, 탄복하올 높음이며 경이로운 공손함이여! 오, 극치의 겸손이여 오, 겸손의 극치여! 우주의 주인이시며 하느님이시고 하느님의 아들이신 분이 이토록 겸손하시어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 하찮은 빵의 형상 안에 당신을 숨기시다니!”라고 고백하며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의 겸손에 감탄했다. 성인이 성체 앞에서 느낀 것은 육화의 신비, 곧 하느님께서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오신 사건이 미사 때마다 반복된다는 굳은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프란치스코의 성체 신심은 개인적인 차원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형제들뿐만 아니라 성직자들에게도 성체에 관한 구체적이고 간절한 권고를 남겼다. 「성직자들에게 보낸 편지 1」에서 다음과 같이 권고하고 훈계하고 있다. “이 지극히 거룩한 신비에 봉사하는 모든 이들, 그 가운데 특히 규정에 어긋나게 봉사하는 이들은 그분의 몸과 피를 제물로 봉헌하는 데 사용되는 성작과 성체포 그리고 제대포가 얼마나 형편없는지를 반성해야 합니다. 그리고 많은 성직자들이 성체를 형편없는 곳에다 놓아두고 내버려 두며, 불손하게 옮기고 합당치 않게 먹으며, 다른 이들에게 분별없이 나누어주고 있습니다.”
또 형제들에게는 성체가 모셔져 있는 성당을 지날 때면 반드시 자신이 알려준 단순한 기도를 바치도록 권고했다.(「유언」 4) 이 기도 권고는 단순한 신심 행위를 규정한 것이 아니었다. 성체 안에서 당신을 내어주시는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일치를 체험하는 신앙 행위였다.
프란치스코는 「권고」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분은 겸손한 모습으로 매일 우리에게 오십니다. 매일 사제의 손을 통하여 아버지의 품으로부터 제대 위에 내려오십니다.” 이처럼 프란치스칸 성체 영성의 독특한 점은 성체를 ‘육화의 연속’으로 이해한다는 데 있다. 하느님의 아들이 인간의 몸을 취하신 사건이 육화의 신비라면, 성체성사는 그 겸손이 빵의 형상 안에서 다시금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둔스 스코투스 같은 프란치스칸 신학자들은 육화가 단순히 인간을 구원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하느님 사랑의 자유로운 자기 증여라고 이해했다. 성체 역시 마찬가지다. 그리스도는 참되고 순수한 사랑으로 빵과 포도주의 형상으로 당신을 내어주신다.
성체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것은 그 자체로 프란치스칸 영성의 핵심인 ‘작음’, 특히 ‘겸손(humilitas)’을 몸으로 표현하는 행위다. 또한 하찮은 빵의 형상 안에 머무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은 작음, 곧 가난과 겸손, 단순함을 지향하는 프란치스칸 수도자들에게 깊은 공명을 일으키는 신비다. 성체는 프란치스칸 영성의 주요한 두 요소인 가난과 겸손이 만나는 자리이며, 형제들이 매일 찾아와 마셔야 하는 생명의 원천이다.
[프란치스코의 향기] (5)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와 성체 영성
기적을 지키는 형제들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는 성 프란치스코의 성체 신심을 형제회 생활의 핵심축으로 삼아왔다. 형제 공동체 중심의 수도 생활 방식을 선택한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은 공동으로 봉헌하는 미사와 성무일도를 통해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함께 만나고 찬미하는 데에 특별한 소명을 지닌다.
성체 거동과 현시 및 강복, 조배와 같은 성체 신심 행위를 공동체 전례 생활의 중요한 부분으로 삼는 것은 단순한 관행이 아니라, 창설자의 권고를 형제 공동체의 삶 속에서 구체화한 결실이다. 수도회는 또한 두 곳의 성체성혈 기적 성지를 관리함으로써 성체 신심의 수호자라는 역할을 교회 안에서 충실히 수행해왔다.
이탈리아 토스카나주의 아름다운 도시 시에나, 꼰벤뚜알 프란치스코 수도회가 관리하는 성 프란치스코 성당에는 중세의 기적이 살아 숨 쉬고 있다. 1730년 8월 14일 밤, 도둑들이 성당에 침입하여 350여 개의 성체가 담긴 성합을 훔쳐갔다. 사흘 뒤 성합이 인근 성당에서 발견되었고 성체들은 아무런 손상 없이 그대로 있었다. 성 프란치스코 성당으로 다시 모셔진 이 성체들은 이후 300년 가까이 어떠한 방부 처리도 없이 원형을 유지하고 있다. 1780년·1789년·1850년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러 차례 과학적 검증이 이루어졌고, 성체들의 상태는 매번 온전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은 지금도 이 성체들을 정성껏 보관하며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이탈리아 아브루초주의 란치아노에는 그리스도교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가장 철저하게 과학적으로 검증된 성체성혈 기적이 보존되어 있다. 8세기 초, 성 바실리오 수도회 한 사제가 미사 중 축성 순간 제병과 포도주가 실제 인간의 살과 피로 변화되는 사건을 체험했다. 오랫동안 성체 안 주님의 실제 현존을 의심해온 이 사제는 놀라움 속에서 이 사실을 알렸고, 13세기에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이 성당을 세워 현재까지 관리해오고 있다. 1970년 의학·생물학 전문가들의 분석 결과, 살은 인간의 심근(心筋) 조직으로, 피는 AB형 인간의 혈액으로 확인되었으며 단백질 구성비는 신선한 혈액과 동일했다. 연구팀은 수 세기에 걸친 보존에 대해 아무런 과학적 설명을 내놓을 수 없었고, 1981년 세계보건기구(WHO) 후속 조사에서도 동일한 결론이 나왔다.
시에나와 란치아노. 두 성지는 배경도 사건도 다르지만 하나의 신앙적 진실을 숙고하게 해준다. 성체 안에는 살아 계신 그리스도께서 실제로 현존하신다는 것, 그 현존은 인간의 이해를 뛰어넘는 신비라는 것이다. 성 프란치스코가 눈물로 호소했던 그 권고는 꼰벤뚜알 작은형제들이 이 두 성지를 통해 오늘도 교회에 전하는 메시지다. 미사와 성체 신심, 선교와 복음 선포를 통해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세상에 증거하는 것, 그것이 세라핌 사부 성 프란치스코의 성체 사랑을 이어가는 길이다. 매일 거행되는 미사 안에서, 형제들이 봉헌하는 제대 위에서, 그 기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