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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30) 신앙 · 희망 · 참사랑을 통해 찾는 신앙인의 행복한 직장 생활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9|조회수44 목록 댓글 0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30) 신앙 · 희망 · 참사랑을 통해 찾는 신앙인의 행복한 직장 생활

수많은 김 부장들의 드라마, 최고의 반전은 하느님과의 우정

 

<서울 자가에 대기업 다니는 김 부장 이야기>라는 긴 제목을 가진 드라마가 많은 직장인을 울컥하게 했다. 이 드라마를 보거나 이야기를 들은 직장인들은 자신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떠올렸다. 치열한 성과 경쟁과 구조조정의 불안, 회사 정책과 인간적 양심 사이에서 흔들리는 한 직장인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실적 압박 속에서 승진을 앞두고 동료와 미묘한 신경전을 벌이며, 구조조정 소문에 마음이 무너졌다가 다시 버티는 장면들이 반복된다. 주인공 김 부장은 겉으로는 성공한 중간관리자처럼 보이지만, 내적으로는 무엇이 정말 옳은지, 무엇을 위해 일하는지, 내 인생의 마지막 기준이 무엇인지를 끊임없이 묻고 있는 사람이다.

거의 손에 잡은 듯했던, 자신의 성공을 놓치고 좌절하는 김 부장을 바라보며, 인간이 진정한 행복을 얻기 위해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가진 능력과 강점만으로 충분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떠오른 것이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신덕(對神德)’, 곧 신앙(fides), 희망(spes), 참사랑(caritas)에 대한 설명이다. 토마스 성인은 좌절하고 방황하는 김 부장과 같은 우리에게 무엇을 조언해 줄 수 있을까?

자연적인 덕과 구별되는 초자연적인 대신덕

토마스는 사회적 동물인 우리의 자연적 상태에 적합한 덕들과, 하느님께 다가가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을 정화하는 덕들을 날카롭게 구별한다. 토마스는 자연적 행복에 비례하는 도덕적 덕 외에도, 초자연적 행복에 비례하는 다른 덕들이 필요함을 강조하면서 이 덕들을 대신덕(virtus theologiae)’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향주덕(向主德) 또는 신학적 덕이라고도 번역되는 이 덕들의 대상은 바로 하느님이기 때문이다.(I-II,62,1) 여기에는 지성에 있어서 신앙’, 의지에 있어서 하느님을 향하는 희망그리고 그분과 일치하게 해주는 참사랑이 속한다.(I-II,62,3)

이 덕들은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누릴 자격을 얻을 수 있게 하려고 하느님이 인간의 영혼에 불어넣어 주는 것이다. 따라서 토마스는 이를 인간의 반복된 행위로 얻어지는 획득된 덕’(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한 지성적 덕이나 도덕적 덕)들과 구별하기 위해서 주입(注入)된 덕이라고 불렀다.(I-II,62,1; II-II,24,12)

획득된 덕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두가 관심을 기울이는 인간사와 지상의 행복에 적합하게 만들어주지만, ‘주입된 덕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가야 하는 삶에 적합하도록 만들어 준다. 세례성사를 받을 때 이 덕이 주입되면 그리스도인의 이성과 의지는 은총에 의해서 자연 본성을 넘어서는 능력을 행사하게 된다. 이처럼 대신덕은 하느님이 그리스도인에게 부여하는 자유로운 선물이다.

대신덕으로서의 믿음(신앙)과 희망과 사랑은 순수하게 인간적인 영역에서 같은 이름으로 불리는 대상들과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김 부장이 잘 보여주듯이, 인간적인 영역에서 믿음과 희망에는 통찰력 부족, 무력함 등의 결함이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불확실한 믿음과 희망을 진정한 덕이라고 생각할 수 없다. 그러나 대신덕인 희망은 단순한 바람이 아니라, 근원적이고 궁극적인 것에 대한 바람이다.

 

 

토마스에 따르면, 희망이란 덕의 대상은 참된 행복인데, 이는 획득하기 어렵지만 가능한 미래의 선”(II-II,17,7)이다. 마찬가지로 신앙과 참사랑이라는 다른 대신덕도 하느님의 결함 없는 권위와 전능한 능력으로 지탱되기 때문에 인간 행위가 지닌 불확실함과 무력함이 없다.

대신덕을 통해 변화되는 그리스도인

좌절했던 김 부장을 어떻게 도울 수 있을지, 우선 둘째 덕인 희망을 집중해서 살펴보자. 토마스는 희망을 자만(praesumptio)과 절망(desperatio) 사이의 중용이라고 분석한다.(I-II,64,4). 실제 직장 생활에서 이 중용을 찾기 어려운 것은 대기업 문화로 대표되는 경쟁 사회가 이 두 극단으로 끊임없이 유혹하기 때문이다. 드라마 초반의 김 부장처럼 승진에 성공하고 인정받을 때 우리는 내 능력과 인맥으로 뭐든 할 수 있다는 자만으로 흐르기 쉽다. 중반 이후의 김 부장처럼 구조조정 대상이 되면, 김 부장은 이제 내 인생은 끝났다고 느끼는 절망으로 기울고 만다.

만일에 김 부장에게 희망의 덕이 주입되었다고 가정해 보면, 그는 한편으로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인식하고, 다른 한편으로 자신의 최종 목적이 이 회사, 이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는 희망을 통해서 하느님을 우리 자신을 위한 행복의 원천으로 사랑하게 된다. 희망이라는 덕은 성과주의와 번아웃 사이에서 김 부장이 절망과 냉소에 빠지지 않도록, 최종 목적을 향한 긴 호흡을 제공한다.

신앙이 없는 김 부장들은 실적 압박과 보고서 조작의 유혹, 상사의 눈치와 양심 사이에서 흔들리게 된다. 그러나 그가 신앙이라는 덕을 갖추게 된다면, 사내의 가짜 뉴스와 음모론에 대해서도 비판적으로 거리를 두게 되고, 양심적으로 무엇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분별하는 능력을 갖추게 될 것이다.

드라마에서 열정적으로 노력하던 김 부장은 팀을 위해 희생하고 부하 직원을 감싸는 모습에서 좋은 상사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동기가 팀원의 선과 공동선을 위한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평판·이미지·승진이라면, 토마스의 기준에서 이는 참되지만 불완전한 덕혹은 덕의 거짓된 유사품일 뿐이다.(II-II,23,7). 그가 참사랑을 갖추게 된다면, 그의 모든 덕과 선택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의 공동 행복이라는 최종 목적에 맞게 재정렬하여, 팀 운영과 회사 정치 속에서도 타인을 수단이 아닌 친구이자 이웃으로 대하게 될 것이다.이처럼 토마스 아퀴나스의 대신덕은 좌절하는 수많은 김 부장을 단지 생존·승진·몰락의 서사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그의 말대로, 인간은 자기 행위의 결정자로서, 대신덕 안에서 자연적인 덕을 구체적 상황에서 실현함으로써 스스로 자신의 운명을 만드는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I-II,62,4; 63,3)

대신덕은 이렇게 그리스도를 믿는 현대 직장인의 평범한 하루를, 하느님과의 우정에 의해 통합된 인격의 드라마로 변형시키는 놀라운 힘으로 작용한다. 직장을 다니는 그리스도인은 회사를 무대로, 신앙·희망·참사랑이라는 은총의 습성을 따라 자신의 직장 생활을 초자연적 행복을 향한 여정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23) 행복한 순간도 어둡게 만들 수 있는 두려움의 그림자

이성적 성찰 통한 진정한 담대함이 두려움을 극복한다

 

현대 사회의 큰 특징 중 하나는 여러 매체를 통해 쏟아져 나오는 광고들이다. 그런데 광고에서 가장 자주 클로즈업되는 광경은 특정 상품을 썼을 때 느끼는 행복한 표정이다. 그러나 그것 못지않게 앞으로 다가올 불행들을 나열하며 그에 대한 두려움을 부추기는 보험 관련 광고도 적지 않다.

행복감을 느끼는 장면과 끊임없이 다가올 불행을 예방하라는 광고의 홍수 속에서 두려움은 행복과 어떤 관계에 있는지 의문이 생겨난다. 현대인들이 느끼는 두려움의 원인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취업, 노후, 건강), 사회적 평가와 비교(열등감, 실패), 과거 경험과 후회, 생활환경 변화, 병리적 요인(불안 장애, 공포증), 생존 본능(자연재해, 범죄) 등으로 매우 다양하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는 두려움에 대해서도 주목할 만한 성찰을 많이 남겼다. 특히 그는 두려움을 정념으로 다루기도 하고 성령의 선물로 다루기도 하는데, 지금은 정념으로서의 두려움과 그와 반대되는 담대함에 대해서만 고찰하도록 하겠다.

두려움에 대한 토마스의 정의와 성찰

토마스는 두려움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에 주목하며, ‘자연적인 두려움(timor naturalis)'자연적이지 않은 두려움(timor non naturalis)’을 구분한다.(I-II,41,3) 자연적인 두려움은 그야말로 본능에 의한 두려움이다. 예를 들어 어떤 물체가 눈앞에 갑자기 나타나면 우리는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눈을 가린다. 그에 비해 비자연적인 두려움은 인식을 전제로 하는 두려움이다. 예를 들어 인간들은 아무리 체구가 작고 못생겼어도 폭군이나 독재자와 같은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이가 나타나면, 벌벌 떨면서 피하게 된다.

이어서 토마스는 두려움을 미래에 일어날 재난이나 고통앞에서 느끼는 특별한 감정으로 규정한다: “두려움은 미래의 악과 관련되는데, 그 악은 두려워하는 사람의 역량을 넘어서는, 즉 그에 맞서 대항할 수 없는 것이다.”(I-II,41,4) 따라서 두려움은, 지각·상상에 의해 인간의 마음으로 미래에 마주칠 악의 이미지가 들어올 때, 그리고 자신의 힘으로 이를 대응하기 어렵다고 판단될 때 발생한다. 두려움은 이성의 판단과 상상력이 결합한 결과로 생긴다.

물론 선도 그 선을 애호하는 이들이 그것이 상실될까 봐 두려워한다는 점에서 두려움의 간접적 대상은 될 수 있다. 우리가 어떤 것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것을 잃어버리는 일이 악의 형태를 띠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가 사랑하는 것들의 목록은 동시에 두려움이 우리 영혼에 침입할 수 있는 길들을 보여주는 표지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직접적 대상은 악이다.’(I-II,42,1)

두려움의 원인과 결과

그렇다면 무엇이 다양한 두려움들을 불러일으키는가? 토마스는 무엇보다 먼저 자신을 해칠 수 있는 대상의 힘에서 그 원인을 찾는다. 우리는 즉시 대처할 수 없기 때문에 갑자기 일어나는 것, 뜻밖에 발생하는 것을 더 두려워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가 제어할 수 없는 것들은 더 지속적인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더욱 두렵다.(I-II,42,5&6) 단순히 환상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낄 수 있는 주체의 나약함도 두려움의 원인이 된다.(I-II,43,1&2) 다가오는 악을 물리칠 힘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두려움에 빠진다. 나약한 우리는 두려움 자체를 두려워할 수도 있고, 실제로도 그런 일이 흔하다. 두려움의 연쇄는 한없이 계속될 수 있다.

 

토마스는 두려움의 다양한 결과도 보여준다. 두려움은 심장을 수축시키고 숨을 멈추게 하며, 떨게 하고 창백하게 하고, 육체의 힘도 사라지게 한다. 두려움의 영향 아래 있는 사람은 움츠러들고 행동이 제한되며 자신 안으로 물러나게 된다. 또한 두려움은 다른 모든 정념과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악이 임박해 있지 않을 때보다 잘 숙고하는 것을 방해한다. 그렇지만 반대로 우리가 더 기꺼이 조언을 구하고 충고에 귀를 기울이게도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두려움이 지나치지 않다면 영혼의 힘을 촉진하기도 한다.(I-II,44,1-4)

두려움에 맞서는 담대함(audacia)’이란 정념

악이 다가온다고 해서 우리가 필연적으로 두려움이라는 정념에 빠지게 되는 것은 아니다. 토마스에 따르면, 그 악이라는 동일한 대상은 때로는 우리 안에서 두려움과는 반대되는 정념인 담대함을 일깨운다.

담대함이란 끔찍한 악을 만났을 때나 이루어지기 어려운 선을 추구할 때 취하는 충동적이고 용감한 움직임에서 성립된다.(I-II,45,1) 그것은 언제나 선을 추구하고 악을 피한다는 희망에서 비롯된다.(I-II,45,2) 어떤 사람이 자신의 힘에 대해 알고 있는 지식, 위험을 겪어낸 그의 체험, 그가 성공적으로 행위를 할 가능성이 크다는 고찰 등은 희망을 직접적으로 증가시킨다. 또한 자기편에 있는 사람들이나 하느님의 도우심을 신뢰하는 것 등은 그 희망을 강한 담대함이 되게 한다.

그런데 토마스는 겪게 될 어려움들을 깨닫지 못한 채로 위험 속으로 뛰어드는 정념으로서의 담대함이 아니라, 이성적 인식의 단계들을 거쳤기 때문에 어려움을 보고도 놀라지 않는 것을 진정한 담대함이라고 규정한다. 이런 담대함은 위험을 온전히 인식하고 있으며 모든 어려움과 패배를 알고 있으면서도 단호하게 가까이에 있는 악에 맞서 싸우러 가는 것이다. 그렇지만 담대함이 이성의 규제를 넘어 과도할 때 두려움의 결핍 때문에 악습으로 전락할 수도 있다.(II-II,127,1-2) 현대 사회에서 쾌락에 대한 집착이 강해질수록, 그것을 잃어버릴 것에 대한 두려움은 더욱 커져 왔다. 그렇지만 우리는 두려움을 단순히 억압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볼 것이 아니라, 올바른 방향으로 성찰하고 대처하여 삶의 성장과 행복을 위한 기회로 변화시켜야 한다. 두려움은 인간을 위험에서 보호할 수 있지만, 지나치면 행복을 방해한다.

토마스가 말한 대로 두려움은 삶을 위축시키지만, 이성적 성찰을 통해 담대함을 실천하면 극복과 성장이 가능하다. 두려움을 극복하려면 먼저 두려움의 원인을 객관적으로 성찰하고, 도망가지 않고 점진적으로 직면하며, 자신을 격려하는 가족, 친구 등의 지지 체계도 잘 활용해야 한다. 토마스가 강조한 담대함의 개념처럼,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선을 위해 행동하는 경험을 반복하면 두려움에 좀 더 잘 대처함으로써 결국 더 깊은 행복으로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22) 고통과 슬픔, 인간이 피해야만 하는 가장 큰 악()일까?

이웃의 불필요한 고통 없애주는 하느님의 손되어주자

우리는 예기치 못한 질병이나 고통이 다가왔을 때, ‘혹시 내가 무엇인가를 잘못해서 하느님으로부터 벌을 받는 것은 아닐까하는 질문을 떠올리게 된다. 그러나 고통이 꼭 죄인들만이 아니라, 올바르고 열심히 살아온 이들에게도 닥치는 모습을 만나게 된다.

많은 종교인은 하느님이 의인(義人)을 시험하거나 교육하기 위해서도 고통을 내린다라고 해석한다. 이런 입장은 역사가 매우 길지만, 근대에 들어서면서 철학적인 논변의 형태를 갖추며 변신론(辯神論)’으로 발전했다. 근대철학자 라이프니츠는 악 없이 선이 존재할 수 없고 악을 거쳐 선이 증가되기 때문에 전체의 조화를 위해 악은 불가피하게 허용된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모든 고통이야말로 악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보는 현대인들에게 터무니없는 것처럼 들릴 뿐이다.

변신론에 대한 거부감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더라도, ‘과연 고통과 슬픔이 인간의 행복을 위해 피해야만 하는 가장 큰 악인가?’ 하는 질문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그렇다면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런 입장들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취했을까?

그 자체로 악인 고통에 대한 정당한 저항

토마스는 고통이 선하거나 악한가를 판단하기 위해서 가장 먼저 그 자체로(secundum se)’어떤 다른 것을 전제로(ex suppositione alterius)’,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라는 구분을 기준으로 들여온다. 그는 그 자체로바라본다면 모든 고통은 악이라고 주장한다. 아무런 조건 없이 고통을 바라본다면 욕구가 선 안에 머무르는 것을 방해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토마스의 판단은 라이프니츠식의 변신론적 주장들이 설 자리를 없애는 셈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입장이 고통을 무조건 없애 버려야만 하는 악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는 것은 아니다. 토마스는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는고통이나 슬픔도 선이 될 수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 악인 고통이 선이 될 수 있는 조건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토마스는 수치스러운 어떤 일이 이미 벌어졌다는 전제 아래 부끄러움은 선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어떤 잘못된 일이 전제되고, 어떤 이가 현존하는 악에 대해서 슬퍼하거나 고통스러워한다면 이는 선한 일이다.(I-II,39,1)

조건에 따라 선도 될 수 있는 고통

토마스는 이런 결론에 만족하지 않고 계속해서 그 선하다라는 것이 어떤 의미를 지니는가를 탐구해 들어간다. 그는 욕구가 도달하고자 하는 최종 목적으로서의 선인 정당한(Honestum) 과 사람들이 욕구하는 목적에 도달하는 길인 유익한(Utile) ’, 그리고 최종 목적을 즐길 때 느껴지는 편안한(Delectabile) 을 구분한다.

이러한 구분을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라는 주장과 연결시켜 보자. 가장 먼저 고통이나 슬픔은 정당한 선일 수 없어 보인다. 그러나 토마스는 슬픔도 악에 대한 인식과 거부를 포함하는 한에서정당한 선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육체적 고통의 경우, 위험하고 고통을 일으키는 것을 본성이 피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생명이라는 선을 보존할 수 있다. 또한 내적 슬픔의 경우, 악에 관한 인식은 이성에 의해 만들어지고 이를 거부하는 것이 올바른 일이라면, 슬픔도 정당한 선이 될 수 있다.(I-II,39,2) 이것을 인정한다면, 두 번째로 고통과 슬픔이 다른 선에 도달하기 위한 유익한 선이 될 가능성은 훨씬 더 높아 보인다.

실제로 서구 사상사 안에서 고통에 대해 죄에 대한 처벌, 사회 안정성 유지 등으로 도구적인 유용성을 인정하려는 해석은 끊임없이 지속됐다. 토마스는 여기서도 고통 전체보다는 내적인 고통인 슬픔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우선 죄와 같이 피해야만 하는 악에 대한 슬픔이라면 유용하다. 또한 악은 아니더라도 악의 계기가 될 수 있는 이 세상 사물들이 지닌 일시적 좋음에 대한 슬픔은 유용할 수 있다. 더욱이 피해야만 하는 어떤 것에 대한 슬픔은 그 악을 피하려는 노력을 강화시킬 수 있기 때문에도 유용하다.(I-II,39,3) 그렇더라도 정상적인 사람이 고통과 슬픔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이다.

토마스는 고통에 대한 논의를 마치면서 어떤 슬픔이나 고통도 인간에게 가장 큰 악일 수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에 따르면, 모든 슬픔이나 고통은 진정으로 악인 것에 의해 발생하거나, 실제적으로 선인데 악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에 의해 발생한다. 그에 따르면 이 두 가지 경우에 모두 그것에 대한 슬픔은 가장 큰 악일 수 없다. 진정으로 악인 것에 대한 슬픔보다 실제적으로 악인 것을 악이라고 판단하지 않음이나 그것을 거부하지 않음이 더 나쁘기 때문이다. 선인데 악인 것처럼 보이는 어떤 것에 대한 슬픔보다 진정한 선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서 아무런 슬픔조차 느끼지 못할 때 가장 큰 악이 된다.(I-II,39,4)

고통받는 이를 위로할 때 필요한 감수성

우리가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고통은 인간이 지닌 초월성을 드러내고, 하느님을 만나는 기회가 되기도 한다. 그렇지만 이런 가능성을 인정하더라도, 고통받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섭리를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무조건 하느님을 옹호하는 것은, 자칫 그들의 솔직한 상태나 표현을 억누르거나 고통을 더욱 가중시키는 2차 가해가 될 위험이 있다.

따라서 그 고통 받는 이가 한탄이나 질문을 통해 표현하는 불확실성과 불평을 함께 마음을 열고 경청하면서 견딜 수 있도록 곁에 머물러 주어야 한다. 이를 통해 그 스스로 받아들일 수 있는 대답을 찾아내도록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 그런데 이 경우에도 고통의 심오한 의미가 고통받는 사람들 스스로에 의해 수용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린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고통의 유용성을 과장해서 미래의 행복을 근거로 인간의 고통을 당사자가 그저 받아들여야 한다고 가르쳐서는 안 된다. 고통은 그 자체로 악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특정한 조건 아래에서고통이 유용하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인간의 유한성에 뿌리를 둔 더 이상 극복될 수 없는 고통인간의 이기심과 악의로 인해 빚어지는 고통을 구분해야 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만났을 때, 이들을 단순히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며 구해달라고 하느님께 간청하는 것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우리 스스로가 그들의 불필요한 고통을 제거하기 위한 하느님의 손이 되어야 할 것이다.

 

 

 

 

[사막 교부에게 배우는 삶의 지혜] (16) 버려라!

오직 하느님 바라보며 세속적인 집착에서 자유로워지길

예수님은 당신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르 9,34) 누구든지 자기 소유를 다 버리지 않는 사람은 내 제자가 될 수 없다.”(루카 14,33) 한 마디로 자기 자신과 소유를 다 버려야 당신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버리다갖다’, ‘소유하다’, ‘모으다의 상대어다.

흔히 우리는 무언가를 갖고 소유하고 모으고 싶어 한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의 욕구와는 반대된다. 이런 면에서 그분은 우리에게 철저한 포기를 요구하신다. 그리스도인(Christianos)그리스도의 추종자’, ‘그리스도의 제자를 뜻한다. 따라서 버리라라는 요구는 우리 그리스도인 모두에게 해당한다. 단 부르심에 따라 버리는 방법과 정도에 있어 차이가 있을 뿐이다.

예수를 따르는 길

복음을 보면, 예수의 제자들은 주님,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랐습니다.”(마태 19,27)라고 말한다. 실제 어부였던 시몬과 안드레아,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의 부르심을 받고 즉시 그분을 따랐다. 그들은 그물과 배를 버리고, 삶의 터전과 가족을 떠났다. 어부에게 그물과 배는 생계를 위한 유일한 수단임을 생각하면 모든 것을 버린 것이다. 이런 철저한 포기는 십자가를 지고 스승을 따르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그리스도인으로의 부르심, 특히 수도자나 사제로의 부르심은 일종의 소명이다. 그래서 직업 의식이 아닌 소명 의식이 필요하다. 소명 의식이 없을 때 단순히 한 직종을 선택한 것처럼 생각할 수 있다. 이는 성소의 고귀함과 그 가치를 떨어뜨리는 행위다. 사제직이나 수도 생활은 결코 일신의 영달이나 개인의 이상 실현을 위한 방편도 아니고, 생계를 위한 직종은 더더욱 아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매일 제 십자가를 지며 예수를 따라 하느님과 사람들을 섬기는 삶으로의 부르심이다.

사막에서의 포기

일부 열심한 그리스도인들은 세상과 자신이 소유한 모든 것을 버리고 이집트 사막으로 들어갔다. 사실 사막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는 자신의 고향과 환경, 가족과 친지를 포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포기는 고향과 가족에 대한 집착과 온갖 세상 근심·걱정에서 벗어나기 위한 것이었다. 특히 아르세니우스와 같은 귀족 출신의 인물에게는, 화려했던 이전 삶의 조건을 포기하기 위한 영웅적 결단이 필요했다. 사막 수도승들의 포기는 철저하고 근본적이었다. 그들이 버린 것은 세상과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이었다. 예컨대, 부와 권력, 명예, 세상의 가치, 옛 생활 습관(악습), 온갖 인간적 집착과 애착 등이었다.

더 나아가 자기 자신(에고)과 의지도 버렸다. 수도승은 그리스도를 따름으로써 하느님을 찾는 데 전적으로 투신하기 위해 자신과 세상 쾌락과 재물을 포기해야 했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90) 이는 사랑 때문에 사랑에 응답하려는 노력이었다. 이 응답은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요약될 수 있는 금욕적 노력이었다.

세 단계의 포기

카시아누스는 성경의 권위와 사부들의 전통에 따라 수도승이 실천해야 하는 세 가지 포기를 이야기한다. “첫째 포기는 현실적으로 이 세상의 모든 부와 재물을 업신여기는 것이다. 둘째 포기는 과거에 가졌던 마음과 육신의 습관과 악행과 감정을 배척하는 것이다. 셋째 포기는 우리 마음이 현세적이고 가시적인 모든 것을 멀리하고, 오직 미래의 것을 바라보며, 볼 수 없는 것을 열망하는 것이다.”(담화집 3,6) 이를 외적 포기, 내적 포기, 관상적 포기라고 한다.

포기는 수도승을 끊임없는 기도로 이끌어준다. 포기와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마음의 순결을 얻은 수도승은 순수한 기도로 나아가 하느님과의 일치를 이루고 하느님 나라에 도달한다. 따라서 이러한 포기 없이는 끊임없는 기도도, 마음의 순결도, 순수한 기도도, 하느님과의 일치도, 하느님 나라도 불가능하다. 이것이 카시아누스를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사막 교부의 가르침이다.

포기하는 자

어느 날 대()마카리우스가 우연히 만난 수행자들에게 내가 어떻게 수도승이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하자 그들이 말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포기하지 않으면 수도승이 될 수 없습니다.”(()마카리우스 2) 그래서 카시아누스에 의하면, 수도승은 포기하는 자’(Renuntians)로 불렸다.(규정집 4,1) 다시 말해 수도승은 버리는 자인 것이다. 독방에 하느님의 것을 가지고 있는 수도승은 이 세상 것을 포기한다. 사실 어떤 원로의 말처럼, 무소유의 감미로움을 맛본 사람은 의복과 물 주전자까지도 거추장스럽다. 그의 정신은 이제 다른 곳에 있기 때문이다.(사막 교부 이렇게 살았다, 146)

사막 교부들은 자기 뜻의 포기도 강조한다. 테베의 압바 요셉은 이렇게 말했다. “주님 앞에 값진 세 가지 일이 있습니다. 아프고 유혹을 당할 경우 감사하게 그것을 맞이하는 것, 어떤 인간적인 것도 중히 여기지 않으며 하느님 현존 안에서 자신의 모든 일을 순수하게 수행하는 것, 끝으로 자기 뜻을 완전히 포기하고 영적 사부 밑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이 마지막 것으로 정말 고결한 왕관을 얻게 될 것입니다.”(테베의 요셉 1) 압바 모세는 자기 뜻을 포기할 때, 하느님은 그와 화해하시고 그의 기도를 받아들이신다고 말한다.(모세 4) 압바 포이멘도 인간의 의지는 그와 하느님 사이의 황동 벽이자 걸림돌’(포이멘 54)이라고 하면서 자기 뜻의 포기를 강조하고 있다.

버리는 훈련

버리는 것은 예수를 따르기 위한 전제조건이다. 하지만 자신이 소유한 무언가를 버린다는 것은 절대 쉬운 일이 아님을 우리는 경험으로 잘 알고 있다. 심지어 자기 뜻조차 내려놓는다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다. 그래서 예수를 따르기가, 예수의 참된 제자로 살기가 그토록 힘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버리는 것, 내려놓는 것은 연습이 필요한 일종의 훈련이다.

우리는 빈손으로 이 세상에 왔다. 하지만 세월과 더불어 많은 것을 소유하고 지키려 너무 많은 시간과 힘을 쏟고 있다. 우리가 집착하는 이 세상 것들은 한순간에 사라져 갈 것이다. 우리 역시 이 지상 여정을 마칠 때 여지없이 우리가 소유하고 집착하고 있는 모든 것을 놓을 수밖에 없다.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 우리 인생이다. 하느님 외에 이 세상 모든 것에 대한 집착에서 자유로워질 때, 우리는 예수의 참된 제자가 될 것이다. 사막 교부들은 바로 버리는 지혜, 내려놓음의 지혜로 우리를 초대하고 있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행복의 길을 묻다] (13) 인간은 과연 행복을 얻을 수 있는 자유를 가졌을까?

오직 인간의 의지만이 자유로운 특권 향유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비롯한 많은 그리스도교 사상가가 인간이 지닌 의지의 근본적인 특성을 자유라고 봤지만, 모든 학자가 이에 동조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결정주의적인 입장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났다.

예를 들어 인간의 행동은 운명이나 별들 또는 악령들의 힘에 의해 결정된다는 신화적 결정주의, 자유로워 보이는 행위도 인체를 구성하는 요소의 영향에 따른 단순한 반응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리학적 결정주의 이외에도 사회학적, 심리학적 결정주의 등이 있다.

특히 근대 이후 많은 이가 추종했던 것은 과학주의적 결정주의이다. 이에 따르면 일반적으로 의지의 자유에 따라 행한 것으로 생각되는 모든 일이 실제로는 선행하는 원인들에 의해 법칙적으로내지 규칙적으로발생하는 일련의 사건에 불과하다.

도덕적 책임을 위해 필수적인 인간의 자유

이렇게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는 강한 결정주의의 경향들을 거슬러 성 토마스는 여러 논거를 통해 인간이 자유롭다는 것을 증명하려 시도한다. 간접적인 논거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를 부정하는 자들은 일체의 윤리적 판단을 부정하는 부조리에 빠지고 말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필연적으로 행동하게 되는 것이라면, 도덕 철학의 성립 근거가 되는 숙고, 권고, 계율과 처벌, 칭찬과 비난 등은 아무 소용도 없게 된다.”(악론6,1)

토마스에 따르면,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는 윤리 영역에서의 모든 칭찬과 비난이 객관적 기반을 상실할 것이므로, 만일 자유가 없다면 인간의 도덕성은 결코 성립될 수 없다.

결정주의는 또한 실천적으로 큰 문제점을 지닌다. 자기의 선택과 행동들이 결정되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그 활동들이 자기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자유롭게 존재하고, 사랑하고, 계획하고, 노력하는 등 인생의 근본적 의미들에 대한 통찰들은 결정주의와 양립할 수 없다.

맹목적 본능이나 외적인 영향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이고 내적인 동기에 의해 움직이는 자유가 존재함을 알려주는 일화가 있다. 스토아학파에 속했던 에픽테투스(Epictetus)는 어느 폭군이 나는 네 주인이니 너한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라고 위협하면서 자신에게 굴복하지 않을 경우 목을 베겠다고 위협하자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나를 자유롭게 하는 것은 바로 신성 자체요. 신은 자기의 아들 하나가 당신의 권력에 짓밟히고 있다는 그 사실을 잠자코 허용하고 있다고 생각해 두시오. 당신은 내 몸뚱이의 주인이오. 그러니 자, 마음대로 하시오! 그밖에 당신은 나에 대해서 아무런 권리도 없소!”

이 일화는 어떠한 외적인 상황이나 억압도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래적인 자유, 내적인 자유는 어찌할 수 없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목적을 향한 의지와 그 수단을 선택하는 자유재량

토마스는 또한 사물의 본성을 파악할 수 있는 이성과 선()을 고유 대상으로 삼고 있는 의지의 구조에 기초를 두고 인간의 자유를 증명하려 한다.

선택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에 관련된 것이기 때문에, 완전한 선 곧 참행복이 아니라 다른 특수한 선들과 연관된다. 따라서 인간은 필연적으로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선택한다.”(I-II,13,6)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의지는 필연적으로 참행복을 선택할 수밖에 없지만, 인간이 행하는 수단의 선택은 전적으로 자유롭다는 점이다. 토마스는 이를 분명히 하기 위해 의지’(Voluntas)가 자유로운 선택들의 근원으로 취해질 때 그것을 그리스도교 전통에 따라 자유재량’(Liberum Arbitrium)이라고 부른다. 토마스는 의지와 자유재량은 두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의 능력이란 점을 강조한다. 그러나 의지의 고유한 대상이 일차적으로 목적이라면, 자유재량은 목적으로 인도하는 수단들을 선택하는 역할을 한다.(I,83,4)

최종 목적인 지복직관에 도달하기를 원하는 신자들은 사제의 길을 통해, 또는 결혼과 자녀 출산을 통해서 등 다양한 길을 선택할 수 있다. 이렇게 인간의 의지는 수단들에 관한 한, 어떤 규정되고 확실한 목적에 대해 단 한 가지 유일한 길만 따를 수 있는 자연 사물들에서 발생하듯이, 필연적으로 규정될 수 없다.”(진리론22,6)

인간의 육체와 감각은 모두 필연적인 자연법칙에 따라 움직이지만, 오직 의지만은 자유로운 특권을 향유한다. 성 토마스는 의지가 자기 행위와 대상의 절대적인 주인이라는 상황을 묘사하기 위해 최상급인 최고로 자유로운’(Liberrima)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다.

의지는 최고로 자유로우므로, 거기서부터 의지는 예속 상태로 강요될 수 없다는 데 이르게 된다.”(명제집 주해II,39,1,1,ad3)

따라서 자기 행위의 주인으로서의 인간은 행복에 도달하기 위한 다양한 가능성과 대안들을 숙고한 후에 선택한다. 예컨대 결혼하기를 원하거나 원하지 않을 수 있고, 원하면서도 이를 실제로 행하거나 행하지 않을 수도 있으며, 또는 이 사람과 아니면 저 사람과 결혼할 수도 있다. 이렇게 의지는 행복을 필연적으로 원하지만, 개별적 선 혹은 목적을 향하는 수단들의 선택, 그리고 행위의 실행 여부와 관련해서는 자유를 갖는다.

각 개인은 자주 외적인 환경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은 무기력에 빠지게 되지만, 그 극한 상황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도 그의 자유 안에 남아 있다. 이 자유야말로 모든 악한 것이 빠져 나온 후에 판도라의 상자 속에 남은 희망인 셈이다.

토마스는 신학대전(I, qq.105-106)에서 자유로운 행위의 원인은 이를 이루는 인간 인격이지 하느님도 악령도 별들이나 이런 부류에 속하는 다른 것들도 아니라는 점을 입증했다. 의지나 자유재량은 자연이라는 광대한 우주 전체에서 의심할 바 없이 아주 독특하며 유일한 천부적 재능이다. 오직 인간만이 이 재능을 소유하고 있는 데 반해, 이 세상의 다른 모든 실재에게는 그것이 없다.

이런 특징 때문에 현대 사회로 올수록 인간의 자유를 절대화하는 경향이 자주 나타났다. 인간의 자유가 그렇게 특별하다면, 이것만으로 인간은 참행복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다음 회에서 이 문제를 심층적으로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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