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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1) ‘두려움’의 길을 가다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21|조회수57 목록 댓글 0

[영성의 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1) ‘두려움의 길을 가다

 

새로운 한 해의 시작입니다. ‘새로움이라는 시작은 언제나 우리에게 기대와 설렘으로 다가옵니다. 실패하고 포기한 과거의 모습에서 변화되어 가는 나를 기대합니다. 힘들고 어려웠던 삶이 조금은 나아지길 바랍니다. 복잡하고 미묘했던 감정들 속에서 갈등하고, 오해했던 미움이 사라지길 기도합니다. 매일 똑같은 삶의 지루함에서 특별하고 행복한 만남과 사랑을 찾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희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그 희망은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두려움과 떨림으로 상쇄되어 갑니다. 아무도 가지 않았던 길, 아무것도 보이지 않은 것 같은 어둠 속으로 나 혼자 나서야 하고, 한 걸음 내디뎌야 한다는 사실은 기대와 설렘보다는 두려움과 떨림이 더욱 커집니다. ‘어차피라는 한마디로 표현되는 나에 대한 불신은 시도조차 하지 않고 미리 포기해 버리는 비겁함으로 나를 빠져들게 합니다. 자신에 대한 기대는 걱정과 우려로, 할 수 있다는 확신은 주저함과 의심으로 바뀝니다. 희망을 꿈꾸지만 내 앞에 놓인 현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만큼 비참하고, 엉망입니다. 무엇을 희망하며,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나는 어떻게 살아갈까요?

희망을 되살리는 희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는 2025년 올해 정기 희년을 선포하시며 희망에 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Spes non cofundit.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로마 5,5). 바오로 사도는 희망의 영 안에서 이 격려의 말씀을 로마 그리스도인 공동체에 전하였습니다. 오랜 전통에 따라 교황이 25년마다 선포하는 희년 가운데 하나인 다가오는 희년의 핵심 메시지는 희망입니다. 저는 이 성년(聖年)을 체험하기 위하여 로마를 방문할 모든 희망의 순례자, 그리고 베드로 사도와 바오로 사도의 도시를 찾아올 수 없지만 저마다 지역 교회에서 희년을 경축할 그 밖의 모든 사람을 떠올려 봅니다. 모든 이에게 이 희년이 우리 구원의 ”(요한 10,7.9 참조)이신 주 예수님과 참되고 인격적인 만남을 가지는 때가 되기를 빕니다. 교회의 사명은 우리의 희망”(1티모 1,1)이신 주 예수님을 언제 어디서나 모든 이에게 선포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5년 정기 희년 선포 칙서 1>

교황님께서는 이 칙서에서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십니다. 세계 곳곳에서 끊이지 않는 전쟁으로 많은 민족이 잔혹한 폭력의 희생양이 되어갑니다. 그들의 절박한 호소는 세계 지도자들에게 어떠한 동기도 부여하지 못하고 자국의 이익에만 골몰합니다. 또한 생명을 전달하려는 원의가 상실되어 많은 나라에서 출산율은 갈수록 떨어집니다. 가정과 병원에 있는 많은 병자들, 보장되지 않는 미래에 직면하면서 꿈을 잃어가는 젊은이들, 더 나은 삶을 위해서 고향을 뒤로하고 떠난 이주민들은 망명자로, 실향민으로, 난민으로 전락하여 버립니다.

희망이 보이지 않는 이 세상에 교황님께서는 이 희년이 우리 모두에게 희망을 되살릴 수 있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희망하기 위해 우리는 어떤 삶의 자세로 살아가야 할까요? 희년을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는 무엇을 고민하며, 어디를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까요? 희망을 품기조차 두려운 우리의 삶들을 어찌 바라보아야 할까요?

걱정과 두려움 앞에서

우리는 희망의 가장 탁월한 증언을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에게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복되신 동정녀 안에서 희망이 순진한 낙관주의가 아니라 삶의 현실 한가운데에 있는 은총의 선물임을 보게 됩니다(‘희년 선포 칙서’, 24). 그중에서도 우리는 걱정과 두려움 앞에서도 희망의 순례를 떠나셨던 성모님의 삶을 바라봅니다. 성모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통하여 예수님의 잉태 소식을 접한 후(루카 1,26-38), 길을 떠나십니다(루카 1,39). 자신이 원하지도, 생각하지도 않았던 일이 자신에게 일어났고, 그 무겁고 힘든 십자가를 짊어지고 성모님은 어쩌면 두려움과 떨림으로 그 길에 첫발을 내딛으셨는지도 모릅니다. 그 길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나약하고 어린 여인의 몸으로, 뱃속에서는 태아를 품고, 홀로 어떠한 위험이 있을지도 모르는 머나먼 길 위로, 가슴 한쪽에는 큰 돌덩어리를 품은 채 성모님은 길을 나섭니다.

하지만 그 두려움과 떨림 앞에서도 가질 수 있었던 용기의 근원은 하느님이셨습니다. “보십시오, 저는 주님의 종입니다. 말씀하신 대로 저에게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루카 1,38)라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의탁이 한 걸음 나아가게 하는 힘이었을 것입니다. 힐라리오 성인은 두려움에 대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두려움이란 인간의 나약성이 자기가 겪고 싶지 않은 것을 겪게 될 것을 무서워할 때 갖는 공포심이다. 이 두려움은 학습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나약성에서 온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을 두려워해야 하는지 배우지 않는다. 우리가 두려워하는 사물 그 자체가 우리 마음속에 공포심을 일으킨다.”

두려움을 이겨내는 방법은 어쩌면 자신의 나약성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지 모릅니다. 나의 약함과 나의 죄스러움을 인정하면서 하느님의 위대함과 하느님의 강함을 믿고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이 길을 나서는 우리의 마음가짐이 되어야 합니다. 성모님의 마음도 그런 의지와 신뢰의 마음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께서 어디에든 계시며, 그 하느님께서 언제나 자신을 보호하고 지켜주실 것이라는 확신이 없다면 내딛기 어려운 발걸음입니다.

또한 그 발걸음의 마지막에는 엘리사벳이 있었습니다(루카 1,40). 같은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여인, 또한 같은 확신과 믿음으로 먼저 살아왔고 함께 걸어갈 수 있는 이를 두려움의 여정 안에서 만납니다. 그리고 그 만남 속에서 위로받고 용기를 냅니다(루카 1,46-56 참조). 그 확신과 믿음, 위로와 용기를 통해서 하느님의 희망을 품습니다.

지금 우리는 새로움을 시작하려 합니다. 새로운 한 해를 시작했고 새로운 만남과 새로운 관계를, 그리고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인연을 시작합니다. 그 새로움 속에 찾아오는 두려움과 떨림을 성모마리아의 희망으로 살아가길 기도합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더 힘들어지고 더 많은 고민으로 삶을 살아가더라도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그 길을 함께 걸어가고 계심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나의 능력이 아닌 하느님의 강함으로 그 어둠을 이겨냅니다. 또한 그 길을 나 혼자 걷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아니 그 길을 혼자 걷지 않도록 누군가를 내버려두지 않았으면 합니다. 기도로, 그리고 삶으로, 두렵지 않게 외롭지 않게 그 길을 그들과 함께 걸어가길 기도합니다

 

 

 

 

 

[영성의 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2) “기억은 희망하게 한다

현재가 과거를 도울 수 있을까? 산 자가 죽은 자를 구할 수 있을까?” 작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가 소년이 온다라는 소설을 시작하며 했던 질문이라고 합니다. 이 소설은 19805월의 광주를 이야기합니다. 군인들이 시민들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학살하는 비극적인 상황 속에서 고통과 상처를 입은 인물들의 내면을 소년이라는 상징적인 인물로 표현합니다. 작가는 자료를 준비하고 소설을 집필하면서 두 개의 질문을 뒤집어서 바라봅니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을까?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을까?” 그리고 실제로 그 질문이 현실이 되었다고 합니다.

지난 12월 어느 늦은 밤, 현실이라고 믿어지지 않을 일을 겪었습니다.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있었지만 영화 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완전히 무장한 군인들이 국회의사당에 들어가고 있고, 사람들은 도시 한복판에서 장갑차를 막아서고, 군인들의 총부리가 시민을 겨누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이것이 지금의 일인지 의심했습니다. 이 현실은 누군가에게는 온몸으로 그 모든 것들을 체험했던 두려움의 기억이었을 것이고, 누군가에게는 그립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게 했던 아픔의 기억이었을 것이고, 또 다른 어떤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명령과 강압에 의해 사람을 해하고 억압하는 죄의식의 기억으로 떠올랐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기억들은 우리 모두를 각자의 자리에서 도망치고 방관자로서 있지 않게 하였습니다. 국회의원들은 두려움 속에서도 누구보다도 빨리 국회로 달려갔고, 사람들은 그 국회에 군인들이 들어오지 못하게 자기 온몸을 다해 막아섰습니다. 사람들은 멀리서 밤을 새워가며 그 모든 일을 지켜봤고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면 광장에 모였습니다. 또한 군인들은 부당하고 무서운 명령에도 망설이고 주저했습니다. 군인 아들을 둔 어떤 아버지는 자기 아들에게 전화를 걸어 당부합니다. “너 자신의 목숨을 챙기라.”고 그리고 부대 병사들의 목숨을 지키라.”라고 또한 절대 시민들에게 총부리를 겨누지 말라.”고 힘을 주어 말합니다.

그렇게 45년 전에 무참히 희생되셨던 분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살리고 있었던 겁니다. 과거의 비참하고 참혹했던 사건이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떤 길을 걸어가야 할지를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죽은 자들이 산 자들을 도와 살리고 있었습니다.

희망하기 위해 기억하십시오

희망을 나타내는 히브리어 중에는 티그바라는 단어가 있습니다. 이 단어는 본래 ’, ‘밧줄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호수아가 예리코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정탐꾼을 보냈을 때 라합이라는 창녀가 이들을 자기 집에 숨겨 주고는 추격대를 따돌리고, 그들을 창문에서 밧줄을 내려 구해주었습니다. 이들은 라합의 집에 분홍줄로 표시를 달아 나중에 도시를 점령할 때 그녀를 해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여호 2,18.21).

그렇게 과거에 일어났던 일들이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를 으로 연결해 줍니다.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는 곤경과 역경 속에서도 과거의 일들을 기억함으로써 새로운 길을 찾고 그때의 교훈을 찾게 됩니다. 또한 그 사건 안에서 하느님께서 우리를 구해주시고 해방시켜 주신다는 확신의 끈으로 연결해 줍니다. 그렇게 하느님에 대한 기억, 헤어나 올 수 없는 수렁에서도 하느님께서 어떻게 우리는 이끌어내시고 구원해 주셨는지를 잊지 않는다면 우리는 지금의 이 어려움 속에서도 희망하고 길을 찾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 교황님께서도 칙서에서 성령께서 주시는 그 희망의 끈을 놓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또한 그것이 믿음이라고 강조하십니다.

성령께서는 순례하는 교회의 삶 안에 항구히 현존하심으로써 희망의 빛으로 믿는 모든 이를 밝혀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결코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우리 삶을 지탱하고 활력을 주는 그 희망의 불이 타오르도록 지켜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속이지도 실망시키지도 않습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37-39). 여기에서 우리는, 이 희망이 시련 가운데에서도 꺾이지 않는 이유를 봅니다. , 믿음에 토대를 두고 애덕으로 길러지는 희망은 우리가 삶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5년 정기 희년 선포 칙서 3>

성모님께서도 그 기억의 끈을 놓지 않으셨습니다. 성모님은 현실에서 어렵고 힘든 일이 있거나 놀랍고, 이해되지 않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언제나 마음속에 간직합니다’(루카 2,19.51). 성모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무엇을 해 주셨는지, 그리고 그 사건이 지금을 살아가는 자신의 삶에서 어떤 의미와 사랑으로 다가왔는지를 기억하셨습니다. 그 기억을 통해 아들이 죽어가는 그 십자가의 밑에서도 예수님을 바라보시며 희망을 가지셨습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기억을 통하여 희망하고 하느님의 뜻을 찾아가는 것, 그리고 그 뜻을 실행하기 위하여 인내하고 행동하는 것이 바로 우리의 믿음입니다.

희망하기 위해 기억하십시오. 우리의 과거에서 하느님을 발견하십시오. 그리고 그 하느님께서 나에게 베풀어주신 은총을 믿고 오늘을 행동하시고 살아가십시오. 하느님에 대한 기억은 우리를 희망으로, 사랑으로 이끌어 줍니다.

 

 

 

 

 

[영성의 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3) “carpe diem”

 

신자들과 함께 이스라엘 성지순례를 다녀왔던 기억이 납니다. 오랜 시간 성지순례를 준비해서 떠난 예수님의 땅은 성경으로만 상상하고 듣고 배웠던 그 이상의 것을 저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불어오는 시원한 바람, 따스하게 내리쬐는 햇볕, 나무 그늘 아래의 시원함, 사람들의 웅성거림, 그리고 손끝에서 찌릿하게 전해지는 전율까지. 성경 속 이야기가 지금 내가 있는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느낌이었습니다.

기쁘고 행복했습니다. 오랜 시간 성경을 공부하면서 느꼈던 그 어떤 기쁨과 행복감보다 컸습니다. 그래서 노트를 꺼내 그 느낌과 감흥을 적어 가기 시작했습니다. 오랫동안 그 생각과 감동을 간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글을 쓰다 보니 강론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화려한 문체와 미사여구로, 신자들의 눈물을 쏙 빼놓는 강론을 해야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과욕이었습니다. 헛된 것이었습니다. 글을 적고 강론을 준비하면서 아무것도 보지도 듣지도 느끼지도 못했습니다. 그저 강론을 멋있게 잘해야 한다는 욕심과 걱정만이 저를 사로잡아서 기쁘지도 행복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을 살아가지 못해서 희망을 잃어버리는 것일 수도 있습니다. 산해진미를 눈앞에 두고서 내일 먹을 것들을 걱정하는 모양새입니다. 지금을 기뻐하지 않기에,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것을 진정으로 바라보지 못하기에, 우리는 기뻐하지도 행복을 만끽하지도, 희망을 품고 살아가지도 못합니다. 걱정과 불안감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하더라도 아직 가보지 않는 길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우리는 어쩌면 지금을 살아가고 있지 못합니다. “carpe diem(오늘을 즐기며 최선을 다하라)”의 격언처럼 오늘을 기뻐하고 살아가는 것이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의 모습입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창세 1,1-5)

하느님의 첫 창조는 바로 시간입니다. “빛이 생겨라.” 이 말씀을 통해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고 낮과 밤을 구분 짓습니다(3-5). 그 시간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영원성을 체험합니다. 그 영원의 체험이 바로 기쁨의 뒷모습입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우리는 시간이 정말 가지 않아 시계만 쳐다보는 때가 있습니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경우에는 몇 시간이 눈 깜빡하는 순간처럼 훌쩍 지날 때도 있습니다. ‘영원은 무한한 시간이나 끝없는 되풀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영원은 우리가 시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는 순간삶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영원함을 체험하는 순간, 시간에 대한 감각을 잃어버리는 순간, 그 시간이 바로 기쁨의 순간입니다. 자신이 하신 일, 자신 앞에 놓인 모든 것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지금의 것들을 바라보고 기쁨을 발견해야지만 희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늘 아래 모든 것에는 시기가 있고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태어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긴 것을 뽑을 때가 있다. 죽을 때가 있고 고칠 때가 있으며 부술 때가 있고 지을 때가 있다.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기뻐 뛸 때가 있다.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의 때가 있다. 그러니 일하는 사람에게 그 애쓴 보람이 무엇이겠는가? 나는 인간의 아들들이 고생하도록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일을 보았다. 그분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다. 또한 그들 마음속에 시간 의식도 심어주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시작에서 종말까지 하시는 일을 인간은 깨닫지 못한다. 인간에게는 살아 있는 동안 즐기며 행복을 마련하는 것밖에는 좋은 것이 없음을 나는 알았다. 모든 인간이 자기의 온갖 노고로 먹고 마시며 행복을 누리는 것, 그것이 하느님의 선물이다.(코헬 3,1-13)

모든 것에는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기뻐할 때 기뻐하지 못합니다. 슬퍼할 때 슬퍼하고 아파할 때 고통스러워하지만 기뻐할 때 걱정합니다. 행복하고 사랑할 때 기뻐하지 못하고 두려워하며 질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제때에 아름답도록 만드셨습니다.”(코헬 3,11) 현재를 살아가야 합니다. 현재는 0.1초보다 짧습니다. 현재에서 하느님을, 하느님의 영원함을 만나야 합니다. 찰나의 순간을 살지 못하는 사람은 영원도 살아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매일 기쁨의 뒷모습을 찾았습니다. 강의할 때 언제나 시간이 부족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때로는 힘들고, 피곤하고, 부끄러운 강의 시간이지만 그 시간 안에서 사람들과 얘기하고, 하느님을 만나며 영원함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우리 각자가 기쁨이 보여주는 뒷모습을 찾아보았으면 합니다.

친구들과 커피숍에 앉아 수다를 떨거나, 백화점을 열심히 돌아다니며 쇼핑을 하거나, 공 하나를 쫓으며 운동장에서 열심히 뛰어다닐 때 우리는 바로 하느님의 기쁨을 체험할 때입니다. 커피숍에 앉아 책상 위의 책들과 일들을 걱정하고, 백화점을 돌아다니며 통장의 잔고와 사람들의 눈초리를 걱정하고, 운동장을 뛰어다니며 옷이 더러워지는 빨래를 걱정한다면 우리에게 하느님의 영원함을 들어오지 않습니다.

지금의 현재를 즐겨야만 기뻐할 수 있습니다. 또한 힘들고 어렵고 짜증 나는 일 속에서도 열정과 최선을 다하는 순간 기쁨의 또 다른 모습이 우리에게 찾아옵니다. 그 기쁨을 만끽하셨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기쁨 안에서 또 다른 기쁨이 찾아오길 희망합니다.

 

 

 

 

 

[영성의 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4) 하늘에서 내리는 이슬에 젖어

 

오늘을 맘껏 기뻐할 수 있을까?’ 우리는 이 질문에 답하기 이전에 먼저 기쁨의 때를 기억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언제, 어떤 상황 속에서 기뻐하고 있는가?’ 이런 기억을 떠올리려 할 때면 금방 이때야!’하며 생각나지 않습니다. 기쁘고 행복했던 순간보다는 오히려 힘들고 고통스러웠던 순간, 상처받고 누군가를 증오하고 미워했던 순간이 머릿속에 먼저 자리를 잡습니다. 기쁨은 오래 머물지 않습니다. 우리의 자리에 순간 머물렀다가 사라지곤 합니다. 어쩌면 기쁨은 느끼는 것이 아니라 찾고 발견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집트 탈출이라는 엄청난 구원의 사건을 체험합니다. 하지만 광야에서 목마르고 배고픔을 느끼자 그 기쁨은 걱정과 불평으로 변화합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는 엘림을 떠나, 엘림과 시나이 사이에 있는 신 광야에 이르렀다. 그들이 이집트 땅에서 나온 뒤, 둘째 달 보름이 되는 날이었다. 이스라엘 자손들의 온 공동체가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에게 불평하였다. 이들에게 이스라엘 자손들이 말하였다. “, 우리가 고기 냄비 곁에 앉아 빵을 배불리 먹던 그때, 이집트 땅에서 주님의 손에 죽었더라면! 그런데 당신들은 이 무리를 모조리 굶겨 죽이려고 우리를 이 광야로 끌고 왔소?”(탈출 16,1-3)

이스라엘 백성은 모세와 함께 이집트에서 나와 갈대 바다를 건너며 엄청난 환호와 기쁨을 맞이합니다. 이제 그들에게 어떤 어려움과 고난도 없이 하느님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굳게 믿습니다. 그래서 주님께 기쁨의 노래(탈출 15,1-19)를 부릅니다. 하지만 그 기쁨과 행복도 그들에게는 오래가지 않습니다. 눈앞에 놓여 있는 배고픔과 갈증 때문에 말입니다. 그런 불평을 들으시고 주님께서는 다시 그들에게 기쁨을 더해 주십니다.

주님께서 모세에게 이렇게 이르셨다. “나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불평하는 소리를 들었다. 그들에게 이렇게 일러라. “너희가 저녁 어스름에는 고기를 먹고, 아침에는 양식을 배불리 먹을 것이다. 그러면 너희는 내가 주 너희 하느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날 저녁에 메추라기 떼가 날아와 진영을 덮었다. 그리고 아침에는 진영 둘레에 이슬이 내렸다. 이슬이 걷힌 뒤에 보니 잘기가 땅에 내린 서리처럼 잔 알갱이들이 광야 위에 깔려 있는 것이었다. 이것을 보고 이스라엘 자손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몰라, “이게 무엇이냐?” 하고 서로 물었다. 모세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이것은 주님께서 너희에게 먹으라고 주신 양식이다.”(탈출 16,11-16)

 

 

 

하지만 또다시 이스라엘 백성은 배고픔과 돌봄의 상징이었던 이 만나를 두고 기뻐하지 못합니다. 시나이 광야를 떠나 다시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으로 가는 도중 그들은 다시 하느님께 불평을 늘어놓습니다.

그들 가운데 섞여 있던 어중이떠중이들이 탐욕을 부리자, 이스라엘 자손들까지 또다시 울며 말하였다.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먹여줄까? 우리가 이집트 땅에서 공짜로 먹던 생선이며, 오이와 수박과 부추와 파와 마늘이 생각나는구나. 이제 우리 기운은 떨어지는데, 보이는 것은 만나뿐, 아무것도 없구나.” 밤에 이슬이 진영 위로 내리면, 만나도 함께 내리곤 하였다.”(민수 11,4-9)

이스라엘 백성은 눈앞에 보인 만나만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행복해합니다. 당장 지금의 배고픔과 고통을 해결해주는 무엇인가에 기뻐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들은 그 만나 때문에 불평을 늘어놓고, 삶에 대한 의미를 포기해버릴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진정한 기쁨을 찾기 위해 만나에 집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한순간 느껴지는 쉼과 안정, 고통과 아픔이 해소되는 평온함, 세상과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느껴지는 즐거움은 기쁨도 주지만 그 때문에 우리를 더욱 깊은 수렁으로 몰아넣을 수도 있습니다.

촉촉한 이슬의 비옥함이 바로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우리는 오늘의 기쁨을 만끽하기 위해 만나가 아닌 이슬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슬은 힘들고 어려워하는 자신의 백성들에게 보내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이며 은총의 상징입니다. 마르고 죽은 땅에 하느님께서 이슬을 내리시어 촉촉한 대지를 만드시고, 그 비옥함 안에서 만나가 생겨납니다. 하느님께서 땅 위에 이슬을 내리시지 않으면 그 만나는 생겨날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태양이 떠올라 강한 햇볕이 비치며 이내 그 이슬은 사라지고 맙니다. 오직 만나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기쁨의 대상인 만나만을 발견하고 배불리 먹고 자신의 배만 채웠다는 기쁨이 있을 뿐 이슬의 존재도, 그 이슬이 가져다주는 그 어떤 것도 발견하지 못하고, 이슬을 내려 주신 하느님의 선물도 깨닫지 못합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발견하는 것, 촉촉한 이슬의 비옥함이 바로 기쁨의 원천이 되어야 합니다. 그 이슬의 존재를 찾고 발견할 때 우리는 만나가 없더라도, 만나만 먹더라도, 만나가 부족하더라도 기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니 기쁨을 희망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야만 기뻐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기쁨을 희망하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 하느님께서 사랑으로 내려 주시는 촉촉한 이슬의 비옥함을 발견하고 감사할 수 있는 시간들을 깨달아 갔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이슬로 우리 각자의 삶이 촉촉해지길 바라며, 그래서 오늘이 기쁨으로 가득하길 바라며.

 

 

 

 

 

[영성의 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5) 성모님의 길을 따라...

 

어렵고 힘든 삶 속에서도 하느님의 사랑과 은총을 발견하셨던 분은 그 누구보다도 성모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자신에게 닥쳐오는 삶의 무게를 스스로 인내하시고 감내하셨습니다.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예수님의 잉태를 알려 주었던 장면을 바라봅시다.

하느님께서는 가브리엘 천사를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이라는 고을로 보내시어, 다윗 집안의 요셉이라는 사람과 약혼한 처녀를 찾아가게 하셨다. 그 처녀의 이름은 마리아였다. 천사가 마리아의 집으로 들어가 말하였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 이 말에 마리아는 몹시 놀랐다. 그리고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하였다. 천사가 다시 마리아에게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마라, 마리아야. 너는 하느님의 총애를 받았다.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루카 1,26-33)

처녀가 임신을 했습니다. 그것도 결혼할 사람이 정해진 처녀가 말입니다. 어린 처녀는 이제 자신의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하기만 합니다. 자신의 약혼자에게 어떻게 이 사실을 전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자신의 부모에게 말을 꺼내는 것조차 두렵습니다. 동네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라도 하면 체면은 고사하고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숨겨두기에는, 감추기에는 마리아가 감당하기 힘든 상황입니다.

하지만 천사는 마리아에게 나타나서 기뻐하여라!”라고 인사합니다. 기뻐할 수도, 감당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말입니다. 어쩌면 성경의 저자는 마리아의 마음을 몹시 놀랐다.”라는 다소 건조한 언어로 표현하고 있지만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회피하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해 주신 일들을 기억해 내

하지만 마리아는 그 두려움 안에서도 천사에게 거부 의사를 표현하기보다는 이 인사말이 무슨 뜻인가 하고 곰곰이 생각합니다. 그 생각을 통해 마리아는 일생에서 하느님께서 자신에게 해 주신 일들을 분명 기억해 내었을 것입니다. 언제나 주님께서 함께 계심을, 두렵고 암울한 상황 속에서도 언제나 구원해 주시고 혼자 내버려 두지 않는 하느님을 마리아는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천사가 주님께서 너와 함께 계시다.”라는 이 말을 몸으로 체험하고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믿었을 것입니다. 마리아는 지금의 이 상황도 두려움이 아닌 하느님의 선물로, 두려움 속에 하느님의 진정한 사랑의 뜻이 감추어져 있음을, 그래서 기뻐할 수 없는 이 일이 하느님의 은총임을 믿었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하느님의 기쁨을 전할 수 있었던 것은 마리아가 일상에서 주님께서 늘 함께 계심을 믿었고, 그 믿음을 바탕으로 살았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현존을 믿고 사는 이는 모든 것을 은총으로 받아들이며 인생을 기쁘게 삽니다. 주님에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마리아는 그분께서 자기의 비천함을 굽어보셨다고, 그분을 찬송하며 행복을 노래합니다(루카 1,46-48).

성모님은 광야에서 먹을 것이 없다고, 만나만 먹는다고, 더 많은 만나를 달라고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이 되지 않습니다. 만나를 주시기 위해서 언제나 이슬로 땅을 촉촉하게 적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발견하고 믿고 의지하고 있었기에 기뻐하고 행복해합니다. 성모님은 단순히 잉태의 순간뿐 아니라 당신 삶의 모든 부분에서 하느님께서 함께 계심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십니다.

성모님의 삶은 어쩌면 고통과 두려움의 연속이었습니다. 걱정과 두려움에 휩싸여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어서 먼 길을 떠나 엘리사벳을 찾아갈 때도(루카 1,39-45), 만삭의 몸을 이끌고 요셉과 함께 나자렛을 떠나 베들레헴으로 갔지만 묵을 방이 없어서 헤매다 결국 마구간에서 예수님을 출산하였을 때도(루카 2,1-7), 어렵게 얻은 아들이지만 그 아들을 살해하려는 헤로데를 피해 이집트로 피신하고 다시 나자렛으로 돌아올 때도(마태 2,13-23), 율법에 따라 예수님을 봉헌하려고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지만 고통과 아픔으로 점철된 삶을 알려주던 시메온의 예언을 들었을 때도(루카 2,25-35), 며칠 동안을 잃어버린 아들을 찾아 헤매면서 자신을 원망하고 자책하면서 찾은 아들의 황당한 대답을 들으면서도(루카 2,41-52), 사랑하는 아들 예수님이 복음 선포를 위해 자신의 품을 떠났을 때도, 처음으로 어머니로서 아들에게 부탁하였지만 거절당하셨을 때도(요한 2,1-12), 걱정되어 아들을 찾아갔지만 가멸차게 외면하였을 때도(마태 12,46-50), 그리고 마지막으로 먼저 사랑하는 아들의 모욕과 수난, 죽음과 끝을 바라보았던 어머니로서의 모든 삶이 고통과 아픔으로 물들어져 있습니다.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 성모님처럼 고요함을 찾아봅시다

지저분하고 냄새나고 고통스러운 현실 안에도 하느님께서 계신다는 사실을 믿은 성모님은 어떤 어려움에서도 위로를 얻고, 고통 가운데서도 희망을 잃지 않으며, 미움 가운데서도 서로 사랑하고 기쁨을 잃지 않고 살 수 있는 진리를 우리에게 일깨우며 희망을 줍니다. 미운 사람에게 잘해주고, 저주하는 사람을 축복하고, 학대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복음은 바로 세상에 대한 신뢰를 일으키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에 근거한 것입니다. 성모님은 복음의 원천에서 살아가셨습니다. 천사가 마리아에게 기뻐하소서!”하고 인사한 것은 성모님의 이런 복음적 삶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불행한 일이 닥쳤을 때 우리는 하느님께 대한 원망이 먼저 생겨나지 않습니까? 그래서 도망치고 회피하고 포기하고 절망하지는 않습니까? 우선 성모님처럼 고요함을 찾아봅시다. 지금의 불행과 고통에서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곰곰이 생각하는 고요함과 여유를 가집시다. 그 고요함 안에서는 우리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언제나 함께 계셔주심을 기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의 뜻과 선물을 우리가 알지도 못하는 상황 속에서 우리에게 드러내 보여주고 계심을 우리는 발견하고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불행과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려고 하시는 은총과 선물이 무엇인지 발견합시다. 만약 그 선물을 지금 깨닫지 못한다면 하느님의 그 사랑을 믿고 신뢰하며 오늘을 인내하고 내일을 희망하면 됩니다. 그럼 어쩌면 불행과 고통 속에서도 기뻐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지금 우리에게 천사가 말을 건넵니다. “은총이 가득한 이여, 기뻐하여라. 주님께서 언제나 너와 함께 계시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 끝까지 너와 함께 있겠다.”

 

 

 

 

 

[영성의 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6) 인내는 희망의 딸이며 토대

 

몇 해 전 선배 신부님과 산책하면서 하루하루를 견디면서 산다라고 말한 기억이 납니다. 바쁜 일상에서 어떤 재미나 즐거움 없이, 그냥 그렇게 기쁨 없이 하루를 버틴다고, 사람들을 견뎌낸다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선배 신부님이 말했습니다. “네가 누군가를 견디어 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너를 견디고 있을 수도 있어. 후배가 선배에 맞춰 살아간다고 생각하지만, 선배들도 후배들 눈치를 엄청 보며 살아가.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견디어 내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런 대화를 나누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내 삶의 목줄을 쥐고 있는 누군가에게는 비굴하리만큼 참고 인내하고, 견디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항상 곁에 있는 가족에게는 참고 견디는 것에 서투릅니다. 쉽게 화를 내고, 쉽게 상처 주고, 쉽게 폭발합니다. 나만 피해를 보고, 나만 인내하며 참아낸다고 오해합니다. 그러고선 후회하고 스스로 아파합니다. 우리는 어쩌면 서로를 견뎌내고 있습니다. 서로가 상대를 참아내고 인내합니다. 나만이 아닌 서로가 말입니다.

우리는 때로 자신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아무 일 없는 듯 견디기도 하고, 모든 것을 잃을까 하는 두려움에 모든 것을 참아냅니다. 그 인내는 상대에 대한 이해일 수도 있고, 나 자신에 대한 사랑일 수도 있으며, 빼앗기지 않으려는 비굴함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모든 인내는 희망이 없으면 버티고 견딜 수 없습니다. 내일은 조금 더 나은 삶이 있을 거라는 희망, 고통과 아픔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끌어 가실 거라는 굳은 믿음이 오늘을 참아내고 인내할 수 있게 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희망을 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인내가 중요하다고 이야기하십니다.

이 인터넷 시대에, 시간과 공간은 언제나 현재하는 지금에 매여 있기에, 인내가 설 자리가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시 경외심으로 피조물을 바라볼 수 있다면, 우리는 인내의 중요성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계절의 바뀜과 수확에 감사할 수 있고 동물의 삶과 그 성장 주기를 관찰할 수 있습니다. 또한 800년 전에 쓴 피조물의 찬가’(Cantico delle Creature)에서 피조물을 대가족으로 인식하고 태양을 형제”, 달을 누이라고 불렀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단순한 눈길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인내의 가치를 새롭게 인식하는 것은 우리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유익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우리가 부단히 견디며 하느님 약속을 굳게 신뢰하여야 한다는 맥락에서 인내를 말하곤 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성인은 인내와 위로의 하느님”(로마 15,5)이신 하느님의 인내를 증언합니다. 인내는 성령의 열매 가운데 하나로 우리의 희망을 지켜주고, 덕이요 삶의 길인 희망의 힘을 길러 줍니다. 인내의 은총을 자주 청하는 법을 배웁시다. 인내는 희망의 딸이며 동시에 희망의 굳건한 토대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5년 정기 희년 선포 칙서 4>

예수님의 부모인 요셉과 마리아는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갔다가 예루살렘에서 아들 예수를 잃어버렸습니다. 사흘이 지나서 성전에서 어린 예수를 찾았을 때 그는 율법 교사들과 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아들에게 묻습니다. “얘야, 우리에게 왜 이렇게 하였느냐? 네 아버지와 내가 너를 애타게 찾았단다.”(루카 2,48) 하자, 예수님이 대답합니다. “왜 저를 찾으셨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하는 줄을 모르셨습니까?”(루카 2,49) 그러나 어머니는 아들의 이야기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합니다(루카 2,50-51). 어머니는 아들을 다그치지 않습니다. 혼을 내지도, 야단치지도 않습니다. 그냥 그렇게 참아내고 인내합니다. 그렇게 아들을 기다려 주고 아들의 생각과 의지를 바라봐줍니다.

서로를 인내하는 성모님과 예수님

그렇게 어머니 마리아는 평생 아들 예수를 견디십니다. 잉태의 순간(루카 1,26-38)에도, 성전에서 봉헌할 때(루카 2,22-39), 어린 시절 성전에서 아들을 잃어버리실 때(루카 2,41-52), 카나에서 자신의 청을 거절할 때(요한 2,1-12), 걱정되어 찾아갔지만 자신을 외면할 때(루카 8,19-21), 그리고 아들의 죽음을 바라보는 십자가 밑(요한 19,25-30)에서도 언제나 아들 예수님을 견디십니다.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시고 그냥 견디어 내십니다.

예수님의 권위에 짓눌려서, 아들과 불화를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 그냥 넘어가신 걸까요? 아닐 겁니다. 성모님께서 아들 예수님을 견디어 내신 것은 바로 사랑 때문입니다. 묵묵히 바라봐주는, 그래서 아들을 믿어주는 사랑 때문에 마음에 들지 않지만, 서운하지만, 황당하고 당황스럽지만 그분께서는 아들 예수를 기다려 주고 참아내십니다. 또한 그 인내는 예수님 안에서 이루시려는 하느님의 뜻을 믿고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이루시려는 뜻을 지금은 이해하고 깨닫지 못하지만 반드시 그 뜻이 존재함을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희망 속에서 성모님은 견디고 버티며 죽음의 순간까지도 예수님을 따르십니다.

예수님도 모든 사람을 참아내고 견디어 냅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예수님은 자신의 때를 이해하지 못하고 자신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당신의 어머니(요한 2,4)를 견디어 내십니다. 어머니뿐 아니라 예수님은 자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제자들을 견디어 내십니다(요한 6,60-61; 마태 20,17-28). 자기의 죽음 앞에서 괴로워하며 기도하시는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제자들 또한 견디어 내십니다(마태 26,36-46). 자신을 은전 30닢에 팔아넘긴 유다도 인내하십니다(마태 26,14-16). 마지막으로 십자가형을 선고한 빌라도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치는 군중들도, 자신을 죽음으로 내몰고 있는 유다인(루카 23,34)까지도 그분께서는 견디어 내십니다. 예수님의 인내 또한 사랑 때문입니다. 그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도, 그들의 몰이해도, 그리고 그들의 배반도 견디어 내시고, 고통과 죽음을 감수하십니다. 또한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절대적인 신뢰 때문에 인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매 순간 견디면서 만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기쁨과 즐거움 속에서 행복함을 맛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때로는 설렘과 기대 속에서 희망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 희망은 우리의 사랑과 믿음 안에서 인내를 통해 꽃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서로를 견디어 냅니다. 나 혼자만 견디고 참아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군가는 나를 인내하고 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왜 견디고 있는지, 왜 견뎌야만 하는지 그 이유에 대해서 다시 한번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그 기다림과 인내는 누군가에 대한 사랑 때문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 기다림과 인내는 하느님에 대한 굳은 믿음 때문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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