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교회의 가르침] (40)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상)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구원의 희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21조회수56 목록 댓글 0[현대교회의 가르침] (40)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상)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구원의 희망 온 세상에 전파
삼천년기를 맞이하여 희년을 지낸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2003년에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Ecclesia de Eucharistia vivit)을 통해서 성체성사가 교회를 살게 하는 신비의 핵심임을 강조하였다.
이 회칙의 서론에서 “주님께서 ‘내가 세상 끝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고 하신 약속의 항구한 성취를 교회는 다양한 방식으로 기쁘게 체험하지만, 특히 빵과 포도주가 주님의 몸과 피로 변하는 성체성사를 통하여” 주님의 현존을 강하게 체험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모든 교우들이 이런 주님의 현존을 의식하고 체험하고 있는 지 의문이 간다. 왜냐하면 한국천주교회는 교우수가 계속해서 증가를 하지만 그것 보다 더 많은 쉬는 신자들이 생겨서 주일미사 참례자는 2013년 전체 신자수의 21.2%(2013년)에 불과하다. 곧 세례 받은 교우들의 다섯 중에 한 사람만이 실질적인 신앙생활을 한다는 의미이다.
무엇이 문제일까? 교회를 세우고 양육하며 종말론적 희망으로 나아가게 하는 성체성사에 현존하시는 주님을 만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주님을 만나면 우리는 변한다. 이 회칙은 성체성사에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만날 수 있는 여정을 가르쳐준다.
앞으로 2회에 걸쳐서 서론과 6장으로 구성된 본론, 그리고 결론으로 이루어진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에서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내용들을 간추려서 설명을 하겠다. 현존하시는 주님이 가장 잘 드러나고 그분을 만나는 체험을 하기에 가장 적절한 성체성사의 중요성을 이해하고 능동적인 참여를 증진시키는 데 도움이 되리라 여겨진다.
1. 파스카 신비에서 태어난 교회
교회의 원천이 어디부터인지, 또한 누구에 의해서 시작되었는지를 확인하는 것은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첫 걸음이다. 2000년이라는 시간의 흐름 속에서 교회는 자신의 기원과 사명을 성체성사를 거행하면서 계속해서 확인해왔다.
이러한 과정의 결실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성령의 감도하심과 오랜 신학적 통찰력으로 성체성사가 “그리스도교 생활 전체의 원천이며 정점”(교회헌장 11항)이라고 하며 교회의 모든 영적 선인 “살아있는 빵이신 그리스도께서 그 안에” 계심을 올바르게 선포했다. 교회의 시작이 성체성사의 제정과 연결되어 있음을 회칙은 강조하고 있다.
예루살렘의 한 다락방에서 예수님께서 친히 만찬을 주례하시며 빵을 들고 쪼개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 줄 내 몸이다”(마태 26,26 루카 22,19 1코린 11,24 참조)하고 잔을 들어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모든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마르 14,24 루카 22,20 1코린 11,25 참조)하고 말씀하셨으며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루카 22,19 1코린 11,25)고 명하심으로써 교회는 예수님께서 행하는 것을 기본적인 사명으로 여기며 수행해왔다(회칙 2항 참조).
주님의 구원신비들은 전례, 특히 성삼일 전례 안에서 선포되며 기억된다. 그래서 과거에 예수님께서 이루신 구원의 현실이 바로 현재의 교회 안에서 실재가 되어 나타난다. 성체성사 안에서 사제가 “신앙의 신비여!”라고 하면, 교우들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라고 응답하면서 교회는 자신의 토대와 근원이 바로 “파스카 성삼일 전체”라고 증언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교회에 성체성사를 주심으로써 교회에 파스카 신비가 영원히 현존하도록 하셨다”(회칙 5항).
2. 그리스도의 얼굴 바라보기의 절정은 바로 성체성사
대희년의 유산으로 교회에 「새 천년기」(Novo Millennio Ineunte, 2001)와 성모님께 관한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Rosarium Virginis Mariae, 2002)와 연결된 ‘그리스도의 얼굴 바라보기’를 주제로 교회의 다양한 측면들을 더욱 심화시키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며 제삼천년기를 맞이한 교회가 새복음화의 열정으로 역사의 바다에 깊이 뛰어들도록 권고하는 요한 바오로 2세의 계획이다.
여기서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은 그분께서 여러 현존 양식으로, 특히 당신의 몸과 피의 살아 있는 성사로써 당신을 드러내실 때마다 그분을 알아볼 수 있다”는(회칙 6항) 말이다.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가 겪었던 체험을 교회가 성찬례를 거행할 때마다 할 수 있는 것이다. “그제서야 그들은 눈이 열려 예수를 알아보았다”(루카 24, 31). 예수님을 알아보는 데 있어서 ‘빵 쪼갬’ 예식으로 초기교회에 불려졌던 성찬례 만큼 좋은 곳이 없다는 것을 교회는 재확인하고 있다.
3. 주님의 현존의 잔치인 성체성사의 의미를 모호하게 하거나 평가절하하는 행위들에 대한 우려
회칙의 서론 마지막에 성체성사에 대한 우려가 되는 여러 상황들에 대한 서술이 있습니다. “일부 지역에서는 성체 조배 관습이 거의 사라지고 있습니다. 또 교회의 여러 지역에서는 이 놀라운 성사에 관한 가톨릭 교리와 건전한 신앙에 혼란이 생기는 폐해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때로는 성체성사의 신비를 극단적으로 축소하여 이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사도직 계승에 바탕을 둔 직무 사제직의 필요성이 때때로 흐려지고, 성찬례의 성사적 본질이 일종의 선포 형식이라는 단순 효과로 축소되기도 합니다.”(회칙 10항).
교황님은 이러한 현상의 결과로 교회의 신앙 표현 원리에 어긋나는 성찬 관습에 빠져 드는 초교파적 행위들이 생겨남에 대한 깊은 슬픔을 느끼며 성체성사의 큰 은총에 대한 모호성이나 평가절하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표명합니다. 그러면서 회칙이 “용인할 수 없는 교리와 관습의 어두운 구름을 걷어 내는 데 실질적인 도움을 주어, 성체성사가 그 찬란한 신비로 끊임없이 빛나기를 바랍니다”(회칙 10항)라고 하면서 회칙의 목적을 설명한다.
4.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는 과거의 사건이 아닌 현재의 사건
회칙은 성체성사가 의미로만 구원의 사건 재현이 아니라 과거의 사건을 기억(anamnesis)을 통해 현재로 불러오는 ‘오늘’(hodie)의 사건임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마치 그 자리에 함께했던 것처럼 당신의 희생 제사에 참여할 수 있는 방법인 성체성사를 남겨 주신 다음에야 십자가 희생 제사를 바치시고 성부께 되돌아가셨다(회칙 11항 참조).
부활로 정점에 이르는 그리스도의 희생 제사를 미사에서 성사적으로 재현하는 것은 실체 변화라는 매우 특별한 현존과 관계된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의심 없이 총체적으로 또 온전하게 하느님이며 인간으로서 현존하시게 되는 곧 본체적인 현존 방식”이다.(바오로 6세, 「신앙의 신비」 39항).
희생 제사의 구원의 힘은 주님의 몸과 피를 받아 모시는 영성체에서 완전하게 실현되며 이는 신자들과 그리스도의 내밀한 결합을 지향한다. 물론 이는 강생의 신비 때 함께 했으며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되게 한 성령의 내림으로 가능해진다.
영성체와 성령을 통해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교우들은 ‘새 하늘’과 ‘새 땅’(묵시 21,1)에 대한 종말론적 희망을 지니면서 가장 약하고 가장 힘없고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희망을 거의 잃어버린 듯한 이 세상에 그리스도의 희망을 전하고 복음에 따라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노력을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1코린 11,26) 계속 이어가야 한다(회칙 20항 참조).
[현대교회의 가르침] (41)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회칙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 (하)
성찬례, 복음화 원천이며 사제생활 중심
「교회는 성체성사로 산다」는 교회와 성체성사의 불가분의 관계를 재조명한 문헌이다.
교황은 묵주기도의 해 중간인 2003년 성목요일에 우리가 다루고 있는 이 회칙을 발표하면서 성체성사와 교회의 뗄 수 없는 관계에서 성체성사의 신비를 조명한다. 회칙은 성체성사의 각 부분의 역사적, 신학적 과정과 의미를 자세하게 설명하기 보다는 성체성사의 가장 본질적인 신학적 원리인 구원역사의 현재화와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에 대해서 말하고, 사도로부터 이어온 교회의 사도 전래성을 강조하며 교회일치운동을 전개하면서 생길 수 있는 신학적 원리의 이완된 적용의 문제제기를 한다.
또한 매일의 미사거행이 사제들에게 영적양식을 얻는 데 필수적인 요소임을 강조하고 조절과 적응에 있어서 사제개인의 임의적인 행위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주교들과 교황의 친교와 유대 안에서 지역상황과 문화를 고려한 토착화의 원리를 재확인해주고 있다. 마지막으로 성체적 신앙생활의 모범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구원의 신비에 동참한 성모 마리아를 제시한다.
성체성사는 복음화의 원천이며 정점
온 세상의 복음화는 교회의 지상명령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사명을 이어받아서 온 인류를 그리스도를 통하여 성부와 성령과 친교를 이루게 하는 복음화를 계속하고 있다. 회칙은 이 복음화의 원천을 성찬례에서 발견한다. “교회는 십자가의 영원한 희생 제사에서, 그리고 성찬례를 통하여 그리스도의 몸과 피에 결합됨으로써 자신의 사명을 수행할 영적인 힘을 얻습니다. 그러므로 성찬례는 모든 복음화의 원천이며 정점입니다.”(회칙 22항).
교회의 구성원들은 그리스도와 결합함으로써 힘을 얻어 복음화를 계속해서 실행할 수 있다. 성찬의 희생 제사 거행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미사 밖에서 이루어지는 성체 공경도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끼고 그분과의 친교를 더욱 돈독하게 하는 데 기여한다. 그래서 교회는 “예수님과 시간을 보내며, 예수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처럼 예수님의 품에 바싹 기대어(요한 13,25 참조) 그분 마음속의 끝없는 사랑을 느끼는”(회칙 25항) 즐거운 일인 성체 조배를 특별히 장려한다.
성체성사는 사도 전래성을 기반으로 교회가 거행한다
「가톨릭 교회 교리서」는 사도들 위에 세워진 교회의 사도 전래성(apostolica indoles)을 세 가지 의미로 보았다.
먼저,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직접 뽑으시고 선교에 파견하신 증인들인 ‘사도들의 기초’(에페 2,20) 위에 세워졌습니다.”(857항) 따라서 성체성사도 사도들에게 기초를 두고 있다.
두번째는 “교회는 그 안에 계시는 성령의 도움으로 사도들의 가르침과 고귀한 유산, 사도들에게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보존하고 전한다.”(857항), 마찬가지로 성체성사도 사도들의 신앙에 따라 거행되기 때문에 사도적이다.
마지막으로, 교회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사도들의 사목직을 이어받아 그들을 계승한 사람들, 곧 ‘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회의 최고 목자와 하나되어 사제들의 도움을 받아 이 명령을 수행하는’ 주교단을 통하여, 사도들에게 가르침을 받고 거룩하게 되며 지도를 받는다.”(857항)는 의미이다. 곧 유효한 주교품을 처음부터 중단 없이 이어받는 것을 뜻한다. 일반사제직을 수행하는 신자들은 “자신의 왕다운 사제직의 힘으로 성찬의 봉헌에 참여”(교회헌장 10항)하지만, “참으로 그가 지닌 거룩한 힘으로 사제다운 백성을 모으고 다스리시며, 성찬의 희생 제사를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거행하고 온 백성의 이름으로 하느님께 봉헌하는”(교회헌장 10항) 사람은 성품 사제이다.
최근 몇십년 동안 교회 일치 영역에서 많은 열매를 맺고 있다. 그러나 가톨릭이 오랫동안 가르침으로 전해온 진리를 저버릴 수 있는 위험이 있는 것에 대해서는 분별력 있는 행동이 요구됨을 회칙은 명백하게 밝히고 있다.
“가톨릭 신자들은 갈라진 형제들의 종교적 신념을 존중하지만, 성찬례의 본질을 흐리는 것을 묵과함으로써 진리를 명백히 증언할 의무를 저버리지 않도록, 그들의 예식에서 나누어 주는 친교의 빵을 거절하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을 경우 눈에 보이는 완전한 일치를 향한 진전이 늦어지게 될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위에서 말한 교회 공동체들의 신자들과 함께 하는 초교파적 말씀 전례나 공동 기도 예식, 나아가 그들 공동체의 전례 예식 참여로 주일 미사를 대신하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러한 전례나 예식이 어떤 특별한 상황에서 성찬의 친교를 포함하여 완전한 친교의 목적을 이루는 데에 아무리 훌륭하게 이바지한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성찬례를 대신할 수는 없습니다.”(회칙 30항). 또한 가톨릭 신자들은 사도 전래성에 문제가 있어서 유효한 성품성사가 없는 공동체에서는 성체를 받을 수 없다(회칙 46항, 참조).
사제는 날마다 성찬례를 거행함으로써 목자다운 사랑을 지속할 수 있다
다양한 사목활동에 참여하는 현대의 사제들은 수많은 다양한 임무 속에서 중심을 잃어버릴 지극히 현실적인 위험에 직면해 있다는 것을 교황님은 직시하고 다음과 같이 당부한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목자다운 사랑에서, 사제의 생활과 활동을 통합시켜 주는 끈을 보았습니다. 이 목자다운 사랑은 ‘주로 성찬의 희생 제사에서 흘러 나오며, 따라서 성찬례는 모든 사제 생활의 중심이며 근원’(사제생활교령 14항)이라고 공의회는 덧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제들이 날마다 성찬례를 거행하라는 공의회의 권고를 따르는 것이 사제의 영성 생활과 교회와 세계의 선익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 수 있습니다.”(회칙 31항).
성찬례 거행은 그 거룩함의 품위를 예술의 도움을 통해 이루어왔다
교회는 예식적·심리적 차원에서 이해한 성찬례의 신비를 흠숭하려는 노력을 꾸준히 해왔으며 지역의 훌륭한 건축물과 예술작품들이 그리스도교 예술에 이바지한 공로가 매우 크다. 동방의 종교 예술은 놀랄 만큼 강한 신비 의식을 간직해 왔으며, “이러한 의식은 예술가들이 아름다움을 창조하려는 그들의 노력을 단순히 그들 자신의 재능의 표현으로만 보지 않고, 신앙에 대한 참된 봉사로 보도록 이끌었다.”(회칙 50항).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성찬례의 의미를 예술의 모든 요소로써 표현하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노력과 일선 사목자들은 종교 건물의 건축과 장식, 그리고 종교 음악을 규제하는 규범들에 주의를 기울여 성찬례 거행이 더욱 그 의미를 다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체성사 제정 이전에 이미 성체성사의 신앙을 지니신 성모님은 ‘최초의 감실’이자 ‘성찬의 여인’에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성모님께서는 강생에서부터 십자가의 죽음, 그리고 부활과 승천, 성령강림까지 제자들과 함께 하신 성모님의 참된 ‘성찬의 여인’이시다.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고 하신 주님의 명령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행하신 것을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주저하지 말고 “무엇이든지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5)고 하시며 그분께 순명하라시는 성모님의 초대를 받아드려야 한다(회칙 55항 참조). 성모님처럼 그리스도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분과 함께 신앙의 길을 걸어갈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성찬의 사람’이 될 것이다.
[현대교회의 가르침] (42)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 (상)
“성체성사는 교회 신비와 신앙생활 정점”
성체성사의 해를 여는 교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1994년 교서 「제삼천년기」에서 “2000년은 열렬한 성찬의 해가 될 것입니다. 성체성사 안에서, 20세기 전에 마리아의 태중에서 육신을 취하셨던 구세주께서는 당신 자신을 신적 생명의 원천으로서 인류에게 계속하여 내어 주십니다”(55항)라고 천명하시고, 1998년 교서 「주님의 날」(Dies Domini)을 통해서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 신자들이 모이는 날인 주일과 주일 성찬례를 강조하셨다. 2000년 대희년에는 교회와 세계 안에 살아계시고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현존을 극대화하기 위하여 로마에서 ‘세계성체대회’가 개최되었다. 대희년을 마무리하면서 교황께서는 2001년 「새 천년기」 교서를 통해서 모든 신자들이 바라봐야 할 얼굴은 바로 부활하신 그리스도이시고, 바로 이 그리스도에게서 새롭게 출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얼굴을 가장 잘 바라보고 알아보시는 성모님과 함께 구원의 신비를 관상하도록 묵주기도의 해(2002년 10월~2003년 10월)를 교서 「동정 마리아의 묵주기도」를 발표하면서 시작하였다. 이 교서에서 묵주기도를 성모님의 문으로 예수님 삶과 죽음의 신비를 바라보는 관상기도로 정의하면서 묵주기도에 ‘빛의 신비’를 추가하여 더 완벽한 복음의 요약으로 만들었다. 이 ‘빛의 신비’는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밤 최후만찬에서 거룩한 성체성사를 제정하신 사건에서 절정에 이른다.
교황께서는 교회가 특별히 이 거룩한 성체성사의 신비로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성체성사의 해’(2004년 10월~2005년 10월)에 교서 「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이하, 교서)를 발표하면서 선포하였다.
교서는 서론, 4장으로 이루어진 본론,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론 제1장은 제2차 바티칸공의회와 대희년의 발자취를 그동안의 교서와 회칙들을 통해 살펴보고, 성체성사의 해가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교회사목의 특징을 이루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강생과 구원 사건을 묵상하는 데 초점을 두고 있음을 강조한다. 제2장 ‘빛의 신비인 성체성사’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빛임을 선포하며 신자들은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 말씀 뿐 아니라 생명의 빵으로 영적 힘을 얻게 된다고 밝힌다. 제3장은 ‘친교의 근원이자 표징인 성체성사’의 관점에서 성체성사가 성체를 모시는 신자들의 일치를 촉진시킨다고 강조하며, 제4장 ‘선교원리이자 계획인 성체성사’에서 예수와의 만남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주님의 증인이 되도록 하며 교회 복음화에 나서게 한다고 말한다.
성체성사의 해는 새 천년기 사목계획의 일환
성체성사의 해를 선언한 바로 다음 주일인 6월 13일 삼종기도 훈화에서 교황께서는 성체성사의 해 선포배경을 자세히 설명했다. 새 천년기를 맞아 그리스도로부터 새롭게 출발해야 하는 신자들은 성체성사 안에 참으로 현존해 계시는 강생하신 말씀(그리스도)의 얼굴을 묵상함으로써 기도에 맛들이고 복음적 생활에 투철함으로써 새로운 복음화에 매진하게 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배우고 그리스도를 닮고 그리스도께 기도하고 그리스도를 선포하면서 성모 마리아와 함께 주님 성체성혈의 신비를 향해 신앙과 사랑 안에서 모든 공동체가 성체성사의 해 안에서 성장하기를 희망한다고 교황은 밝혔다. 곧 교황이 성체성사의 해를 선포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라 제3천년기를 준비하던 1990년대 후반부터 이미 계획해온 새 천년기 사목계획의 일환이다.
교황의 권고로 세계교회는 2000년 대희년과 새 천년기 준비를 위해 1997년 성자의 해, 1998년 성령의 해, 1999년 성부의 해를 지냈다. 2000년 대희년을 지내고 2002년 10월부터 2003년 10월까지 묵주기도의 해를 보냈다. 그리스도 강생 2000년을 기념하는 대희년과 성모 마리아와 함께 그리스도의 신비를 묵상하는 묵주기도의 해에 이어 성체성사 안에 현존하시는 그리스도를 묵상하는 성체성사의 해 제정은 연속성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교서 「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 10항에서 ‘성체성사의 해’는 이전까지의 여정을 종합하는 해라고 밝히고 있다. “‘성체성사의 해’는 그리스도와 그분 얼굴에 대한 관상이라는 주제에 변함없이 충실하면서도, 해를 거듭하면서 더욱 풍요로워진 배경 위에서 시작됩니다. 어떤 의미에서 ‘성체성사의 해’는 우리가 걸어온 여정의 정점이며 그 여정을 종합하는 해가 되어야 합니다.” 교서는 앞선 권고와 회칙들에서 성체성사의 의미를 체득하기 위해서 제시했던 몇 가지 생각들을 정리해 제시하고 있다. 교황께서는 성체성사의 해를 통해 교회의 신비와 신앙생활의 정점인 성체성사 안에서 새 복음화의 열정으로 역사의 바다에 깊이 뛰어들도록 권고하고 있다. 빛의 신비인 성체성사
교서는 성체성사를 빛의 신비와 연관하여 설명한다. 동방박사들이 별의 인도로 아기 예수님을 찾고 경배했던 것을 기억한다면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을 “세상의 빛”(요한 8,12)이라고 말씀하신 것이 쉽게 이해가 된다.
빛은 어두운 곳일수록 그 진가를 발휘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과 가족만의 이익과 안위만을 위하고 물질만능주의에 젖어들어 이웃의 고통에 무관심한 어두운 세상에서 사랑의 희망을 갖게 하는 빛이시다. 그런데 단순히 이승에서의 위안과 평안을 넘어서 영원한 구원의 희망을 주는 빛이라는 특성은 주님의 변모와 부활 사건에서 더욱 명백히 드러났으며, 이러한 사건을 통해 그분의 신적 영광이 눈부시게 빛났다. 이러한 그리스도의 영광이 성체성사에 감추어져 있으며 신앙을 통해서 그 감추어진 것들이 현실이 된다. 그래서 성체성사는 탁월한 신앙의 신비(mysterium fidei)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이 완전히 감추어진 그 신비를 통하여 빛의 신비가 되시고, 그 신비 덕분에 신자들은 하느님의 생명 안으로 깊이”(교서 11항) 들어갈 수 있다.
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루카 24,29 참조)
현재의 미사는 두 식탁, 곧 말씀의 식탁과 빵의 식탁으로 이루어져있고 이 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심을 드러내는 의미를 각기 다른 매개체를 통해서 연속해서 드러낸다. 이러한 연속성은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이야기에서 잘 드러난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과 예수님은 함께 걸어가면서 성경 전체를 당신 신비와 연관하여 잘 설명을 해주셨다.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주셨다.”(루카 24,27) 그분의 말씀은 “제자들의 마음에 ‘뜨거운’ 감동을 불러일으켜, 그들을 슬픔과 좌절의 어둠에서 벗어나게 하고 그들 안에 그분과 함께 머무르려는 열망을 불러일으킵니다.”(교서 12항).인생을 긴 여행길이라 할 때 누구와 함께 가고 싶고, 어딘가에서 머물러 쉬어야 할 때 누구와 함께 하고 싶은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 자신이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사도로 이어오는 교회는 이승뿐만 아니라 저승에서도 주님이라 고백하는 그분과 함께 걷고 싶고 함께 머물기를 희망하며 ‘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라고 청한다. 이제 그분은 그 청을 받아들이셨을 뿐만 아니라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신다(마태 28,20 참조). 그런데 그분이 함께 하고 계심을 어떻게 알아보고 어떻게 체험할 수 있을까?
[현대교회의 가르침] (43)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교서 「주님, 저희와 함께 머무소서」 (하)
성체 안에 ‘현존’하며 우리와 하나되길 원하는 주님
교서 목적은 신앙이 삶의 증거로 변화되는 것
교서 발표 당시 경신성사성 장관 프란시스 아린제 추기경은 교황께서 이 교서를 통해 교회 공동체에 신앙은 증거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키고자 한다면서 이 교서가 단순히 성체성사 거행을 강조하고 성체성사를 묵상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 안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책임, 특히 평화 건설과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회의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에 대한 봉사를 강조하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전례 정신의 기본인 ‘믿는 규범(Lex credendi)을 기도하고(Lex orandi), 기도한 바를 생활해야 한다(Lex vivendi)’는 정신을 그대로 이어가고 있는 교서라 하겠다.
말씀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말씀을 묵상해야 함을 교서는 강조한다. “하느님 말씀이 사람들의 정신과 마음에 가 닿을 수 있도록, 복음 선포를 신중하게 준비하고 경건하게 귀 기울여 들으며 조용히 묵상하지 않는다면, 성서 구절을 모국어로 읽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교서 13항).
성사의 차원을 알아듣기 위해서는 신비 차원에 열려진 마음이 요청됨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는 예수님과 함께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었고, 말씀으로 충분히 준비가 되어 있었기에 식탁에서 ‘빵을 떼어 주시는’ 단순한 행위로도 그분을 알아보게 된 것이다. “정신이 빛을 받고 마음이 불타오를 때, 표징들이 ‘말’을 하기 시작한다. 성체성사는 풍부하고 명료한 메시지를 담은 표징들의 역동적인 관계 안에서 펼쳐지고, 이러한 표징들을 통하여 그 신비는 어떤 식으로든 믿는 이의 눈앞에 활짝 열리게 된다”(교서 14항). 표징들을 통해서 펼쳐지는 신비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그 신비의 차원에 마음을 열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성체성사가 ‘식사’라는 본질적인 요소와 이 식사가 ‘희생 제사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한 미사가 희생 제사 ‘기념’을 통하여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시고 부활하신 그분을 ‘오늘’에 현존하도록 하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미래, 곧 ‘종말’로 우리를 향하게 한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제대로 성체성사의 신비를 알아보게 된다(교서 15항 참조).
그리스도 현존을 바탕으로 잘 거행되어야 하는 성체성사
성체성사에서 단순한 상징주의를 넘어선 의미를 부여하게 하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현존이다. 그래서 성체성사는 현존의 신비이며, “이를 통하여 세상 끝날 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겠다고 하신 예수님의 약속이 완전하게 실현된다.”(교서 16항). 그런데 예수님의 약속이 완전하게 실현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성체성사가 잘 거행되어야 한다. 거룩한 미사가 그리스도인의 생활의 샘이며 정점으로 드러나기 위해서는 모든 공동체가 정해진 규범을 따르며, 그리스도의 신비체로서 회중과 성직자가 맡은 바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면서 노래나 전례 음악의 거룩한 특성을 살리며 거행되어야 한다(교서 17항 참조). 각 본당 공동체가 ‘미사경본총지침’과 전례주년의 흐름을 충실히 따르며 옛 교부들이 즐겨 하던 ‘신비’교육(Mystagogia)에 전념하여야 한다. 이러한 교육이 성체성사를 통해서 드러난 신비로 그리스도인들이 들어가는 데에 도움을 준다.
성체의 올바른 공경을 방해하는 남용이 있는지 살펴보기
교서는 “성직자들과 신자들은 깊은 존경으로 성체를 대하여야 한다”(18항)고 권고한다. 이 교서가 발표되기 전인 2004년 3월 25일 경신성사성에서 ‘지극히 거룩한 성찬례와 관련하여 준수하거나 회피해야 할 일부 문제들에 관한 훈령’ 「구원의 성사」(Redemptionis Sacramentum)를 발표했다. 공의회 이후 전례쇄신의 그림자인 여러 가지 남용들에 대한 문제들의 심각함을 직시하며 더 이상 침묵해서는 안 된다고 훈령은 말한다. 남용의 문제점은 성체성사에 관한 건전한 신앙에 혼란을 야기할 수 있음도 지적하고 있다. “전례의 남용은 이 놀라운 성사에 관한 가톨릭 교리와 건전한 신앙에 혼란이 생기도록 하는 데에 일조한다. 따라서 그러한 남용은 신자들이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루카 24,31)고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두 제자가 겪은 일을 다시 체험하는 데에 장애가 된다”(훈령 6항). 남용의 구체적인 실례와 그에 대한 올바른 지침을 제시하고 있는 교령 「구원의 성사」는 모든 성직자들이 읽어보고 혹시 본인들이 자유에 대한 잘못된 이해와 사목적 배려라는 차원으로 남용이 없는 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성체에 계신 그리스도와 시간보내기
어렸을 적에는 성당에서 무릎을 꿇고 성체 앞에서 조배하는 교우들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그러면 아이들도 잘 모르면서 따라서 무릎을 꿇고 성체 앞에 있었다. 성당이 학교 가는 도중에 있으면 잠깐이라도 성체조배를 하고 가는 학생들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이런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만큼 성체를 관상하는 습관이 교우들 사이에서 사라지고 있다. 교서는 이러한 현실을 깨닫고 다음과 같이 권고한다. “성체 안에 현존하시는 예수님 앞에 무릎을 꿇는 시간을 가집시다. 그렇게 하여 우리의 믿음과 사랑으로 부주의하고 태만한 행동들을 고쳐 나가고, 우리 구세주께서 세계 도처에서 견디셔야 하는 상처들까지도 치유합시다. 또한 오래되었거나 새로운 수많은 신비주의 체험과 하느님 말씀에 영감을 받은 기도문들에 의지하여, 성체 조배를 통하여 우리의 개인적·공동체적인 관상에 깊이를 더해 나갑시다.”(교서 18항)
우리를 떠나지 않고 친교를 맺으시는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우리가 머물러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으며 삶의 활력을 얻을 수 있다고 하신다. 또한 당신도 우리 안에 들어와 머무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요한 15,4) 이 얼마나 긴밀한 관계이며 친교인가! 어느 드라마의 ‘네 안에 내가 있다’라는 유행어가 혹시 예수님의 말씀을 인용한 것이 아닐까라고 생각할 정도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당신 성령을 보내 주시어 당신과의 일치를 이루게 하고 또한 당신께서 직접 성체 안에 현존하심으로써 이 일치를 끊임없이 증진시킨다. “성찬례의 빵 하나가 우리를 한 몸이 되게 한다. 바오로 사도가 말하였듯이, ‘빵이 하나이므로 우리는 여럿일지라도 한 몸입니다. 우리 모두 한 빵을 함께 나누기 때문입니다”(1코린 10,17)”(교서 20항).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인의 친교의 드러남인 성체성사에서 또 다른 차원들, 곧 교회의 다양한 역할과 직무에 대한 인식을 바탕으로 하는 교계적 친교와 상호 개방과 애정, 이해와 용서를 촉진하는 ‘친교의 영성’으로 자라나는 형제적 친교도 촉진된다(교서 21항).
교서는 성체성사가 ‘선교’ 원리라고 선포한다
“성체성사를 통하여 지속적으로 강화되고 심화되는 그리스도의 만남은 교회와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증언과 복음화의 절박성을 일깨워주며”(교서 24항) 또한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상황에서 친교와 평화와 연대의 촉진자가 되는 법을 배우게 한다고 말한다. 성체성사는 단순한 구원 표징의 모음이 아니라 현실이며 그리스도의 사명을 지속하게 하는 힘의 원천임을 교서는 천명한다.
[현대교회의 가르침] (44) 베네딕토 16세 교황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상)
“하느님 사랑에 감화되면 이웃 사랑 멈출 수 없어”
해설을 시작하며
제목이 다소 평이했나보다. 처음에는 필자의 눈길이 본 회칙에 선뜻 가지 않았다. 솔직히 ‘허’를 찔린 듯한 느낌마저도 있었는데, 뮌헨-프라이징 대교구장 시절의 사목표어 “Cooperatores Veritatis”(진리의 협조자)가 말해주듯 그리고 24년간을 교황청 신앙교리성 장관으로 봉직해 오신 요제프 알로이스 라칭거(Joseph Alois Ratzinger) 추기경님의 ‘과거’ 때문에 회칙의 제목이 다소 식상한 감도 주었다. 게다가 ‘유럽의 재복음화’를 위해 베네딕토로 명명하신 터라 발표하실 첫 회칙은 긴박한 생명윤리나 무분별한 상대주의 혹은 세속화에 대한 저항 등을 담은 문헌이 될 것이라는 예상도 있었다. 국내언론에서도 보도된 것처럼, 실제로 교황님께서는 2005년 4월 19일 취임하신 그해 이탈리아 정부가 6월 12일부터 13일까지 인간 배아에 대한 치료 복제와 실험의 타당성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하자 “인간 배아는 하느님이 주신 생명이며 생명은 투표대상이 아니기에” 반생명적 국민투표를 보이콧해 기권하도록 호소하셨고 그 결과 투표율 미달로 부결시키신 적도 있었던 터였다.
하지만 문헌을 접해보면, 복잡하고 긴급한 현대사회의 문제를 가장 단순한 진리 즉 ‘사랑이신 하느님’으로 명쾌하게 풀어주셨음을 즉시 깨닫게 된다. 지면이 매우 제한적인지라, 이 회칙의 내용을 여덟 가지의 가르침으로 요약해보고자 한다. 더 자세한 것은 가톨릭대학교 사목연구소의 제15회 학술심포지엄(2007. 11. 10.)에서 필자가 발표한 내용을 참조할 수 있겠다.
가르침 1. 회칙의 취지: 종교 · 종파 간 갈등의 유일한 극복 방법은 사랑 체험
교황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할 인간의 새 힘을 불러일으키고자》(1항 §3) 이 회칙을 발표하신다고 밝히는데, 왜 하필 취임 첫 해, “새 힘”의 필요성을 느끼셨을까? 바로 “복수나 심지어 증오와 폭력의 명분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결부시키는 오늘날”의 시대적 위기상황 때문이다.(참조: 1항 §3)
사실 ‘하나님의 이름으로’ 혹은 ‘알라의 이름으로’ 혹은 ‘여호아의 이름으로’ 서로 대립해 가해자와 피해자 역할을 수시로 바꿔가면서 증오, 폭력, 복수를 행하고 있다. 늘 불안한 팔레스타인 정황이 그렇고, 2001년 미국의 9·11 항공기자살테러, 게다가 2004년 6월 이라크에서 처형된 한국개신교도 김선일 사건이 그렇다.
이렇게 단언하신다:
《사랑을 체험하십시오. 그리하여 하느님의 빛이 세상에 들어올 수 있게 하십시오. 이것이 제가 이 회칙을 통하여 여러분께 드리고자 하는 권고입니다.》(39항)
그리고 당시 기자회견의 형식으로 회칙을 반포(2005.12.25)하신 것도 이례적이었지만, 배석한 ‘Cor Unum’(한마음) 교황청 평의회 의장 폴 요제프 코르데스(Paul Josef Cordes) 대주교의 인터뷰에서도 이런 취지는 확인되었다:
《…구체적인 예: 최근 쓰나미 참극에서, 가톨릭 신자들 편에서 발휘된 합법적인 행위와 함께 우리는 폭넓게 대응했습니다. 전 세계에서 “카리타스 연맹”(Confederazione Caritas)은 단독으로 미화 4억 달러 상당을 모을 수준이었으며, 이미 짜임새 있게 사용되었습니다. 그것은 인도적 필요에 직면해 애덕의 힘을 인상적인 방법으로 확인시켜주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이들을 위해 침묵 속에 행한 것이 얼마인지는 기억할 필요조차 없습니다. 2. 신사숙녀 여러분, 이것들은 베네딕토 16세 교황 성하의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를 오늘 소개하기 위한 명백한 전제조건들이었습니다. 바로 당신 전임자들처럼, 지금 교황 성하께서도 이런 교도권의 첫 문헌과 함께 막 시작하신 당신의 교황직무의 기본 노선들을 설계하고자 하십니다. 동시에 명백히 이해되어야 할 것은 오늘의 회칙 본문이 아예 애덕 활동에 대한 첫 번째 회칙이라는 점입니다.…》
가르침 2.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 그리스도와의 만
“그리스도인 됨”은 “윤리적 선택이나 고결한 생각의 결과가 아니라”, “너무나 세상을 사랑하신 나머지 내어주신 하느님의 외아들(요한 3,16)과의 만남”이라고 단언하신다. 그러한 하느님의 사랑은 이제 “계명”으로서가 아니라 “사랑의 은총에 대한 응답”으로서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도록 재촉하는데, 이는 “하느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기 때문”이다.(참조: 1항, §2)
가르침 3. 에로스와 아가페 그리고 가장 철저한 사랑: 예수 그리스도
교회가 전통적으로 극히 꺼리던 단어 “에로스”는 “절제되고 정화되어야 할 상승의 힘”인데도 “남녀 간의 성적인 사랑”으로 축소되어 사용되었고 반면 그리스인들조차도 잘 사용하지 않던 단어 “아가페”를 구약 성서가 선택한 본뜻은 “자아도취가 아니라 다른 이를 참되게 발견하는 사랑”이고 “이타적이며 신적인 하강의 힘”이었다. 그러기에 두 단어는 “서로 다른 차원을 가진 하나의 실재”라는 것이다.(참조: 1-8항)
그러므로 하느님의 사랑은 “에로스이면서 동시에 아가페”인데(참조: 9-11항), 그 하느님의 “가장 철저한 형태의 사랑”은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신 나자렛 예수님이시다. 그분이 세운 성체성사를 통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이제 참으로 하나”가 될 수 있기에 ‘계명’으로서의 사랑도 가능해지며 그 계명을 잘 지키기 위해 ‘지금 여기서’ 《교회는 신자들의 일상생활에서 가까운 것과 먼 것의 관계를 언제나 새롭게 해석해줄 의무가 발생》(15항)하기도 한다고 지적하신다.
가르침 4.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불가분 관계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거짓말쟁이”(1요한 4,20)라는 말씀을 인용하면서 사랑은 그 속성상, 상대방이 싫어하는 것은 싫어하고 좋아하는 것은 좋아하도록 의지적으로 일치함으로써 ‘우리’가 되려고 한다고 가르치신다. 계속되는 하느님의 사랑에 감화되어 이웃 사랑을 멈출 수 없기에, 사랑의 이중 계명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상호 불가분의 관계가 된다고 강조하신다.(참조: 16-18항)
[현대교회의 가르침] (45) 베네딕토 16세 교황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
“애덕 실천, 교회 존재 드러내는 필수적 표현”
가르침 5. 삼위일체적 사랑의 표현인 교회의 조직화
교황님께서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서도 사랑으로 ‘함께’ 일하시듯(참조: 19항) 개인이 아닌 교회공동체에도 본분인 애덕 실천을 위해 “공동으로” “조직화”가 필요했다고 강조하신다. 사도들의 직분인 ‘기도’(leitourgia)와 ‘말씀’(lerygma)의 봉사로부터 분리시켜 만든 ‘식탁’의 봉사(diakonia)인 부제 직분은 원래 사회적 봉사만이 아니라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영적 봉사였다”고도 상기시키신다. 그래서 애덕 실천이야말로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되는 일종의 복지활동이 아니라 교회 본질의 일부”이며 “존재를 드러내는 필수적 표현”이라는 것이다.(참조: 20-25항)
가르침 6. 국가와 교회의 상호 연대
가난한 사람들의 권리를 빼앗는 부자들에게 양심의 가책을 덜어주면서 가난한 현실의 현상 유지에 악용된다는 마르크스주의식 주장으로 인해 한때 교회의 아가페-카리타스의 활동이 단순한 ‘자선’(eleemosynae)으로 오인된 적도 있다고 지적하신다. 이제는 국가와 교회 간에는 국가가 개인을 전체적으로 직접 통제하면서 관료적으로 체계화하기 보다는 중간 집단인 교회의 활동을 보조하는 ‘보조성의 원리’(principle of subsidiarity)가 필요하다고 하신다. 본문에 언급은 없지만 잠깐 설명하자면, 이 원리는 가톨릭 사회교리(social teaching)의 주요 원리 중 하나로서 1931년 교황 비오 11세의 회칙 「40주년」 35항에서 처음으로 언급된 개념인데, 그 안에서는 세 가지가 강조되었다. 첫째로 사회는 개인의 인격을 존중할 것, 둘째로 큰 단체는 작은 단체를 보호할 것, 셋째로 국가는 개인이든 단체이든 국민을 보조할 것 등이다.
비록 국가가 정의로운 이성의 판단에 따라 공동선의 증진을 추구하지만 그 안에는 특수이해 관계자와 권력으로부터의 부자유스러움이 항상 있다. 그래서 교회는 정치 투쟁을 통해서가 아니라 실천이성의 정화와 윤리교육 그리고 애덕-카리타스 활동을 통해 국가와 서로 연대해야 한다고 강조하신다. 그러기에 국민으로서의 교회 평신도들도 조직화하고 제도화하여 다른 일반국민들과 공동선의 증진에 있어서 상호 연대해야 한다고 가르치신다. 그저 단순히 곁에서 협력하는 수준이 아니라 직접 책임지는 주체로서 연대하기를 바라시는 것이다.(참조: 26-30항)
가르침 7. 교회의 애덕 실천이 지닌 고유성
교황님께서는 애덕 활동을 하는 교회는 “단순히 일반 사회복지기관이 아님”을 명백히 밝히신다. 왜냐하면 교회의 애덕 활동에는 나름의 원칙이 있기 때문인데, 그 첫째 원칙은 긴급 요구와 특수 상황에는 “무조건적 응답”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구·국가·국제 카리타스 기구들은 “마음에서 우러나는 정성으로” 지원함으로써 일반 사회복지기관들과는 “구별”되어야 한다. 나무 무늬는 같아도 그 뿌리가 다르듯이, 외적으로는 ‘같은 모양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돕고는 하지만 그 동기의 ‘근본’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교회의 이런 활동가들에게는 전문적인 훈련뿐 아니라 “마음의 양성”도 제공해야 한다.(참조: 31항 가))
둘째 원칙은 “당파와 이념 전략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고(참조: 31항 나)), 셋째 원칙은 애덕 실천이 “개종 권유”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되며 “하느님에 대해 말해야 할 때”와 “침묵하며 애덕만을 보여주어야 할 때”를 분명히 식별해야 한다는 것이다.(참조: 31항 다))
가르침 8. 주교의 책임 하에 있는 교회의 애덕 실천과 행동 원칙들
교황님께서는 애덕 활동의 참된 주체가 교회 자체라는 것, 보편 교회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교황청 사회복지 평의회가 설치되어 있지만 개별 교회에는 “주교”가 첫째 권위자라고 강조하신다. 교회법이 주교에게 “다양한 사도직 활동들을 조정할 책임”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인데, 현실적으로 애덕 실천에 있어서 “긴박한 요구나 특수한 상황”에 처했더라도 개입해야 할 “순서”를 식별해야 할 책임 또한 주교에게 있다는 것이다.(참조: 32항)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해 애덕 실천에 책임 있는 주교가 태만함으로써 안타까운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실무 책임자가 지녀야 할 마음의 책무는 아무 것도 없다는 것, 그저 ‘주님의 도구’로서 “부여받은 권한 만큼만” 봉사하면 된다는 그런 의미인 것이다. 교황님께서는 끝도 없는 과도한 현실적 요구 앞에서 결코 “낙담할 필요도 없고” 이럴 때일수록 세속주의와 행동주의로 기울어질 유혹에 대항할 “기도”의 중요성은 더욱 높아진다고 가르치신다.(참조: 35-37항)
교황님께서는 더 나아가, 가톨릭 사회복지기구의 실무 책임자들이 세상을 ‘주도적으로’ 개선하려는 이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그리스도의 사랑에 감화를 받아야 한다는 것, 지역 주교에게 협력해야 한다는 것, 다른 단체들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 자신이 내어주는 선물 속에 자기 자신을 담아주어야 한다는 것, 등을 제시하신다. 봉사자들은 봉사의 수혜자들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닌 이유는 봉사자 자신이 봉사하면서 동시에 수혜자도 되기 때문이라고 밝히신다.(참조: 33-35항) 그리고 그저 “사랑의 체험”을 하기를 바랄 뿐이시라는 것이다.(참조: 39항)
해설을 마치며
교황님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관점은 다른 교회문헌에서 보다도 독특하게 빛난다. 임신부 엘리사벳에게 하신 석 달 동안의 산후조리 봉사와 그리고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보여주신 전구(轉求) 봉사 속에서 성모님을 ‘애덕 실천의 주보자’로 제시하시기 때문이다. 그리고 구도자로서 시인으로서 이렇게 마무리 기도를 바치신다: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성모님, …저희에게 예수님을 보여주소서. 저희를 예수님께 인도해 주소서. 예수님을 알고 사랑하는 법을 저희에게 가르쳐 주시어, 저희도 참된 사랑을 할 수 있게 해 주시고, 목마른 세상 한가운데에서, 생명의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 되게 하소서.》(42항)
필자는 종종 바보 같은 생각을 해본다. 종교·종파 간의 우열은 어떻게 가릴 수 있을까? 교황님의 가르침에 따라 ‘사랑 체험’으로 종교·종파 간의 갈등이 극복될 수 있다면, 어느 종교 어느 종파가 그런 “가장 철저한 형태의 사랑” 체험이 가능할지 아니 그런 사랑 체험을 해야 할지도 질문거리가 될 것이다. 죽을 때 가장 진솔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인정한다면, 현존하는 주요 종교 창시자들의 마지막 순간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예를 들어, 천수를 누린 80대 노인 싯다르타의 식중독사(食中毒死)에서인지, 부를 누린 60대 노인 무하마드의 병사(病死)에서일지, 십자가에서의 30대 청년 예수의 잔혹사(殘酷死)에서일지, 이제 그 신봉자들이 스스로 답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