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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의 가르침] (46) 베네딕토 16세 교황 권고 「사랑의 성사」 (상) 성찬례, 다시 뜨거운 열의로...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22|조회수50 목록 댓글 0

[현대교회의 가르침] (46) 베네딕토 16세 교황 권고 사랑의 성사()

성찬례, 다시 뜨거운 열의로...

 

베네딕토 16(1927~)의 교황 권고 사랑의 성사2005102일에서 23일까지 성체성사를 주제로 개최된 세계주교대의원회의 제11차 정기 총회의 결실이다. 이 총회가 제출한 건의안에 대한 응답으로 베네딕토 16세 교황이 20072월에 사랑의 성사를 발표하였던 것이다.

이 문헌은 교회 안에서 성찬례에 대한 뜨거운 열의를 새롭게 다짐할 수 있도록 기본적인 방향을 제시”(5)하는 데에 그 목적이 있다. 97개 항목으로 구성된 본문은 성찬례를 믿고, 거행하며, 실천해야 하는 신비로 규정하면서, 성찬 신앙 안에서 신자 각자와 교회 전체가 진정으로 새롭게 변화되는 길로 나아가자고 촉구한다.

 

I. 성찬례, 믿어야 할 신비

성찬례는 삼위 하느님의 무상 선물

성부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세상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의 외아들을 생명의 빵으로 보내주셨다(요한 3,16-17). 성자는 성부의 뜻에 따라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을 내어주시고 당신의 피를 쏟아 부어 주시어 당신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다. 아울러 그분은 성체성사를 통해서 십자가 희생과 부활의 승리를 선취하시고 또 현존하게 하신다.”(10)

교회는 나를 기념하여 이를 행하여라.”는 성자의 명령에 따라 날마다 성찬례를 거행하면서 그분의 십자가상 희생제사가 성사적으로 현존하게 하는데, 여기서 성령께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신다.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가장 중요한 중심인 성찬례부터 시작하여 당신 교회 안에서 계속 현존하시며 활동하실 수 있는 것은 성령의 활동으로 말미암은 것이다.”(12)

성찬례는 교회 시작의 원리이며 친교의 토대

성찬례는 교회가 시작된 원리”, 교회의 기원 자체에 영향을 미친 원인”(14)이다.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리신 그리스도의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와 물(요한 19,34)은 성체와 세례성사를 상징하고, 이 두 성사와 함께 교회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그리스도께서 먼저 십자가에서 교회에 당신 자신을 주셨기 때문에 교회는 성찬례 안에서 그리스도의 신비를 거행할 수 있다.

또한 성찬례는 교회의 친교와 일치의 토대다. 성체성사는 빵과 포도주가 그리스도의 몸과 피로 변화되는 것만이 아니라 성찬을 받아 모신 신자들이 성령 안에서 한 몸을 이루는 것도 목표로 한다. 성찬례의 힘으로 교회는 친교의 공동체가 되는데, 개별 신자들 간의 친교만이 아니라 개별 교회들 간의 친교가 실현되어 보편적 친교가 가능하게 된다(15).

성찬례는 성사들의 중심

교회가 거행하는 일곱 성사의 중심은 성체성사로서, “다른 여러 성사들은 성찬례와 연결되어 있고 성찬례를 지향하고 있다.”(16) 세례와 견진, 성체성사는 그리스도교 입문의 성사인데, 그 절정은 성체성사다. 따라서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받는 것은 성체성사를 위한 것임”(17)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합당한 영성체를 위해서는 하느님 은총 안에 있어야하기 때문에 성체성사와 고해성사는 본질적인 관계를 이루고 있고, 따라서 성찬례의 의미를 가르치는 참된 교리 교육에는 참회의 길을 추구하라는 촉구가 포함되어야 한다.”(20) 또한 성체성사를 통해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고통과 죽음을 사랑으로 받아들이셨는지를 이해하게 된다면, 병자성사를 통해 병자들은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하여 당신을 내어 놓으신 그리스도의 봉헌에 일치하여 성인들의 통공의 신비 안에서 세상 구원에 참여할 수있게 된다(22).

예수님께서는 최후만찬에서 성체성사를 세우시는 동시 새 계약의 사제직도 제정하셨기 때문에 성체성사와 성품성사는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성찬례 거행에서 주교나 사제는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대신하며 온 교회의 이름으로 행동한다(23). 또한 혼인성사로 결합된 남녀의 유대는 그리스도와 그분의 신부인 교회가 이루는 일치에 본질적으로 연결되고(에페 5,31-32), 이 일치는 성찬례를 통해 성사적으로 표현된다. 그러므로 성찬례는 모든 그리스도교 혼인의 불가해소적인 일치와 사랑을 끝없이 강화해 준다.”(27)

성찬례는 순례하는 교회를 위한 선물

성찬례는 성인들과 이루는 통공의 기쁨 안에 거행될 마지막 잔치를 실제로 선취하는 것”(31)으로서, 순례하는 교회가 종말의 잔치를 미리 맛보도록 해준다. 이렇게 종말의 완성을 미리 맛보여주는 성찬례는 우리 육신 또한 영광스럽게 될 미래의 영광에 대한 약속으로서, “우리보다 앞서 간 이들을 다시 만날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키워준다.”(32) 우리는 그 희망을 간직하면서 성찬례 중에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II. 성찬례, 거행하여야 할 신비

성찬의 신비가 올바로 체험되고, 그 고유한 광채가 발하기 위해서는 성찬례가 합당하게 거행되고, 신자들은 거기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

합당한 성찬례 거행

 

그리스도께서는 성찬례 안에 현존하시며 우리에게 당신의 몸과 피를 주심으로써 우리를 당신과 일치시키신다. 이렇게 성찬례의 본래 집전자는 그리스도이기에 그 기본 구조는 우리 마음대로 바꾸거나 최신 경향에 얽매일 수 있는 것이아니다(37). 따라서 성찬례의 합당한 거행 방식은 새로운 것을 추가하기 보다는 현재 사용 중인 전례서를 존중하고, 다양한 표징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다. “몸짓의 소박함, 정해진 순서에 따라 진행되는 표징의 엄숙함은 그 어떤 인위적이고 부적절한 것을 추가할 때보다 더 많은 것을 전달하고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도록 한다.”(40)

합당한 성찬례 거행의 책임은 교구장 주교에게 부여된다. “탁월한 전례가인 주교는 자신의 교구에서 하느님 신비들의 첫째 관리자요 전례 생활 전체의 조정자이며 증진자요 보호자로서 사제와 부제, 그리고 평신도 그리스도교 신자들이 항상 전례 예식과 본문의 참뜻을 온전히 이해하여 활발하고 효과 있게 성찬례 거행에 참여하도록 마음을 써야한다.”(39)

성찬례 거행의 구조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추진한 전례 개혁이 교회 전통 안에서 충실하게 지속되기 위해서는 미사의 주요 부분을 올바로 이해하고 거행해야 한다. 이를테면 미사에서 말씀 전례와 성찬 전례는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오직 하나의 예배를 형성하는데, 이는 교리 교육은 물론 미사 거행 자체에서 분명하게 드러나야 한다. 그 외에도 미사 구조와 관련해서 다양한 주의, 요청 사항이 상세하게 언급된다(43-51항 참조).

성찬례의 능동적 참여

2차 바티칸 공의회가 촉구한 신자들의 능동적 참여를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예식을 합당한 방식으로 거행하는 것으로서, “거행 방식은 풍요로운 전례 규범을 충실히 따르는 데에서 비롯된다.”(38) 아울러 규범에 따라 거행되는 신비, 그리고 이 신비와 일상생활의 관계를 더 잘 인식하는것도 중요하다(52). 또한 성찬례의 능동적 참여에는 지속적인 회개의 정신도 포함된다. 이는 자신의 생활을 진지하게 반성하는 내적 태도로서, “예를 들어 전례 시작 전에 잠시라도 묵상과 침묵의 시간을 가지거나 단식을 통하여, 그리고 필요한 경우에는 고해성사를 통하여 촉진될 수 있다. 하느님과 화해를 이룬 마음이 진정한 참여를 가능하게 한다.”(55)

 

 

[현대교회의 가르침] (47) 베네딕토 16세 교황 권고 사랑의 성사()

가정에서일터에서쪼개진 빵으로 봉헌의 삶 살아야

III. 성찬례, 살아야 할 신비

 

성찬례는 믿고 거행할 뿐만 아니라 살아야 할 신비다. 성찬의 양식을 받아 모시는 그리스도인은 그 양식의 힘으로 신비롭게 변화되어 새로운 삶, 성찬적 모습의 삶을 살아야 한다.

성찬적 모습의 삶

성찬례의 힘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은 사도 바오로가 말한 대로 하느님께 합당한 예배”(로마 12,1), 온 교회와 일치하여 바치는 완전한 자기 봉헌”(70)을 드린다. 이런 자기 봉헌의 삶은 주님의 날에 따라 살아가는삶으로서, “그리스도께서 가져다주신 해방을 인식하며 살아가고 우리 삶을 하느님에 대한 지속적인 자기 봉헌이 되게 함으로써, 깊이 쇄신된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승리가 온 인류에게 온전히 드러나게 한다.”(72)

자기 봉헌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성체성사는 그리스도와의 친교만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와 친교도 더욱 깊게 한다. 따라서 성찬례에 기반을 둔 삶은 교회적이고 공동체적인 모습을 지녀야 한다. “그리스도의 지체가 되도록, 그리하여 서로서로의 지체가 되도록 부름 받은(1코린 12,27 참조) 우리는 존재론적으로 세례에 바탕을 두고 성체를 통하여 자라나는 실재, 우리 공동체 생활 안에서 가시적으로 표현되어야 하는 실재(76).

성찬례에 뿌리를 둔 삶은 일상 전체를 포괄하는 성찬 영성, “성령에 따라’(로마 8,4 이하 갈라 5,16.25 참조) 사는 삶”(77)으로 자라나야 한다. 이 성찬 영성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자신이 변화되도록 하면서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이지 분별”(로마 12,2)하는 것을 의미한다(77). 성찬 영성은 근본적으로 세상이 아니라 하느님께 기준을 두고 있기 때문에 다양한 문화 안에서 그 문화들과 나누는 대화가 되기도 하고 때로는 그러한 문화에 대한 도전이 되기도 한다.”(78)

그리스도인들이 살아야 할 성찬 신비

교회의 구성원 각자는 성찬례에 바탕을 두고 자신이 받은 고유한 소명을 실현해야 한다. 평신도들은 성찬례가 자신의 일상생활에 더 깊게 자리 잡게 함으로써 일터나 사회 안에서, 특히 평신도들의 고유 영역인 가정에서 설득력 있는 증인이 되어야 한다. 문헌은 가정들에게 성체성사에서 영감과 힘을 얻으라고 격려하면서, “남녀의 사랑, 생명에 열린 자세, 그리고 자녀 양육은 삶을 변화시키고 삶에 그 충만한 의미를 부여하는 성찬례 고유의 힘이 드러나는 탁월한 분야들이라고 역설한다(79).

성찬례 거행의 임무를 지닌 사제의 영성은 본질적으로 성찬의 성격을 지닌다. 사제는 성찬례를 통해서 자신의 소명에 더욱 굳건해진다. “충만한 믿음과 세심한 주의를 기울여 거행하는 미사는 사제가 그리스도를 더욱 닮게 하고 자기 소명을 더 굳건히 하기 때문에 매우 심오한 의미에서 양성의 성격을 띤다.”(80) 또한 수도자들의 증거의 삶, 특히 그들의 봉헌된 동정은 성찬의 신비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 “봉헌된 동정은 교회가 완전하고 풍요로운 충실성으로 자기 신랑으로 받아들인 그리스도께 전적으로 헌신한다는 표현으로서, “성찬례 안에서 그리스도께 완전히 헌신하기 위한 영감과 자양분을 얻는다.”(81)

성찬의 신비를 살아가려면 도덕적 회개, 인간 자신의 나약함을 인식하면서도 자신의 존재 전체로 주님의 사랑에 응답하고자 하는 진심 어린 바람과 노력”(82)이 요구된다. 또한 개인적 차원만이 아니라 공적 차원에서도 성찬에 맞갖게 살아야 한다. “하느님 마음에 드는 예배는 다른 사람들과 관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순전히 개인적인 행위가 결코 될 수 없고, 신앙을 공적으로 증언하도록 요구한다. 이는 물론 세례 받은 모든 이들에게 해당되지만, 특히 사회적 정치적 지위 때문에 근본 가치들에 관한 결정을 내려야 하는 이들에게는 의무로 지워진다. 이러한 가치에는 임신[受精]에서부터 자연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 생명의 존중과 수호, 남녀의 혼인으로 세워진 가정, 자녀 교육의 자유, 모든 형태의 공동선 증진에 있다.”(83)

세상에 선포되어야 할 성찬 신비

성찬의 신비는 교회 울타리를 넘어 세상에 선포되어야 한다. “우리가 성체성사로 거행하는 사랑은 우리 혼자만 간직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랑은 본성상 모든 이와 나누어야 한다. 세상이 필요로 하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 곧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을 믿는 것이다. 따라서 성찬례는 교회 생활뿐 아니라 교회 사명의 원천이며 정점이다.”(84) 그러므로 선교적 노력은 그리스도인 삶의 성찬적 모습에 필수적인 부분이다.

성찬례는 하느님의 사랑을 삶의 증언을 통해 세상에 선포하도록 인도한다. “하느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루어 주신 그 선물 앞에서 경이로움을 체험한 우리는 삶에 새로운 자극을 받고 그분 사랑의 증인이 되고자 노력한다. 우리 행동과 말과 존재 방식을 통하여 절대 타자이신 하느님께서 당신을 드러내시고 통교하실 때 우리는 그 증인이 된다.”(85)

세상에 주어야 할 성찬 신비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구원의 희생 제사를 기념하는 성찬례는 모든 이를 위한 것으로서, 그리스도인들이 모든 이에게 다른 이를 위하여 쪼개진 빵이 되어, 더욱 정의롭고 형제애가 넘치는 세상의 건설을 위하여 헌신하도록 촉구한다.”(88) 주님께서는 성찬례 안에서 형제적 친교를 굳건히 해주시고, 대화와 정의 실현에 마음을 열어 서로 화해하도록 촉구하시는데, 모든 신자들이 이에 응답하여 평화와 정의를 증진시키는 참된 일꾼이 되어야 한다. “성찬례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은 폭력과 전쟁, 그리고 오늘날 특히 테러리즘, 경제적 부패, 성적 착취로 얼룩진 이 세상에 평화를 이룩하고자 노력하여야 한다.”(89)

또한 성찬의 신비는 점점 더 심해지는 빈부 격차를 고발하고 극복하도록 촉구한다. “진리의 양식은 우리에게 불의와 착취 때문에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 가는 비인간적인 상황을 고발하도록 요구하고, 또 우리에게 새로운 힘과 용기를 주어 우리가 끊임없이 사랑의 문명에 봉사하게 한다.”(90) 문헌은 이렇게 성찬의 신비가 개인의 성화만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그릇된 관계들의 개선을 위하여 용감하게 일하도록 고무하고 촉진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교구와 본당 차원에서 사회 교리를 가르치고 증진할 필요성을 역설한다(91).

성찬의 신비는 사회 구조에 중요한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피조물과 환경 보호를 촉구한다. 성찬례 중에 사제는 빵과 포도주 위에 축복과 청원 기도를 바치는 데, 이 부분은 이 세상이 우리가 살아가는 데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도록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며, “세상이 하느님께서 세우신 좋은 계획 전체의 일부라는 것을 알게 해줌으로써 창조된 세상을 보호하는 활동에 책임 있게 투신하도록 촉구한다(92).

맺는 말

사랑의 성사의 결론 부분은 교회의 정화와 쇄신에 일조한 수많은 성인들은 성체 신심에 힘입어 진정한 삶을 살았다는 점을 역설한다(94). 실상 성찬 신앙은 장구한 교회 역사에서 교회의 쇄신과 성화에 원동력이 되었는데, 이런 점은 문헌의 시작 부분에서도 강조된다. “성찬 신앙이 더욱 활기에 넘칠수록”, 하느님의 백성은 교회 생활에 더욱 깊이 동참하여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맡기신 사명에 굳건하게 투신할 수있었고, “모든 중요한 개혁은 주님께서 성찬례를 통해 당신 백성 가운데 현존하신다는 믿음을 새롭게 발견하는 것과 어느 모로든 연결되어왔다(6). 성찬의 신비는 교회를 정화하고 쇄신하는 데에 최선의 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신앙의 활성화와 교회의 쇄신이 시급하다는 요청을 받고 있는 한국천주교회는 좀 더 성찬 신앙과 성찬 영성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현대교회의 가르침] (48) 베네딕토 16세 교황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하느님 없이는 참된 희망 없다

회칙의 발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첫 번째 회칙인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에 이어 두 번째 회칙인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Spe Salvi)20071130일에 발표하였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Spe salvi facti sumus)라는 로마서 824절의 말씀으로 시작하는 이 회칙은 희망을 상실하고 살아가는 우리 시대에 그리스도교적 희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한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탁월한 신학적 성찰을 담고 있다. 그리고 교황은 근대 이후 제기된 그리스도교 희망에 대한 다양한 비판들에 대하여 반박하고 적절한 대답을 제시한다.

회칙의 전체 구성과 주제

50개 항목으로 된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는 짧은 서론(1)8개 장의 본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1장인 신앙은 희망이다’(2~3)에서는 신앙과 희망의 관계를 다루고, 2장인 신약 성경과 초기 교회에서 신앙을 바탕으로 한 희망의 개념’(4~9)에서는 그리스도교적 희망의 근거를 찾는다. 3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10~12)에서는 회칙에서 다루는 핵심적인 문제가 제기되고, 역사 안에서 진행된 희망에 관한 다양한 논란과 오해를 다루기 시작한다.

4장인 그리스도교 희망은 개인주의적인가?’(13~15)에서는 그리스도교 희망이 개인주의적이라는 비판에 대해 직접적으로 반박한다. 그리고 제5장인 현대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희망의 변화’(16~23)에서는 근대 이후 제기된 그리스도교 희망에 대한 다양한 공격과 그 원인들을 비판적으로 분석한다. 마침내 제6장인 그리스도교 희망의 참모습’(24~31)에서는 근대 이후 제기된 논쟁의 역사라는 맥락 안에서 희망의 참된 의미에 대하여 적극적인 대답을 제시한다.

만일 우리가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를 이론 부분과 실천 부분으로 크게 둘로 나눈다면, 희망에 대한 이론적 성찰을 다루는 제1부는 제6장까지이다. 그리고 희망에 대한 실천적 권고를 소개하는 제2부는 제7장인 희망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리들’(32~48)에 해당한다. 회칙은 실천적인 자리로 기도, 활동과 고통, 그리고 심판을 제시한다. 마지막 제8장은 희망의 별이신 마리아’(49~50)에 관한 부분이다.

이상의 전체 구성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의 중심 주제는 그리스도교적 희망은 무엇인가?”이다. 이 주제를 다루면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신약 성경과 초기 교회 전승에서 출발하여 근대 이후 다양한 논쟁의 역사를 비판적으로 고찰하면서 그리스도인의 참된 희망이 어디에 있는지를 제시한다.

서론

서론에서는 전체 회칙에서 다룰 문제가 제시된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라는 성경 구절에서처럼, 그 희망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가 구원 되었다고 말할 수 있는 희망은 무엇인가? 그 희망이 존재한다는 사실 때문에 우리는 구원되었다고 말할 수 있게 하는 그 확신은 어떤 것인가?

신앙은 희망이다

1장은 그리스도교 신앙이 가지는 희망의 특성을 다양한 성경 구절에 근거하여 제시한다.

특히 히브 10,22.23 1베드 3,15 에페 2,12 1테살 4,13 등의 구절이 근거로 제시된다. 신앙과 희망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그리고 신앙은 희망의 토대이다. 히브리서 10장은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하느님께 나아갑시다”(22)에 곧이어 우리가 고백하는 희망을 굳게 간직합시다”(23)라고 권고한다.

신앙에 의해 그리스도인들은 미래를 가지고 있고, 자신의 삶이 공허하게 끝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현재를 살 수 있다. 그리스도교의 메시지는 단지 모르던 것을 알려 주는 역할뿐만이 아니라, 행동을 촉구하고 삶을 변화시키는 역할까지 한다. 그래서 희망의 메시지는 정보 전달적’(informative)인 것만이 아니라 실천적’(performative)이기도 하다.

그리스도교 희망의 근거는 무엇인가? 그 희망의 내용은 무엇인가? 회칙은 에페 2,12을 대답으로 제시한다. 사도 바오로는 에페소 신자들에게 이 세상에서 아무 희망도 가지지 못한 채 하느님 없이 살았다는 사실을환기시킨다. 하느님 없이는 인간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의 내용은 바로 하느님이시다. “참된 하느님을 알게 된다는 것은 희망을 얻는다는 뜻입니다.”(3) 회칙은 이 희망의 증인으로 아프리카 출신 요세피나 바키타(Josephine Bakhita) 성녀의 삶을 소개한다.

신약 성경과 초기 교회에서 신앙을 바탕으로 한 희망의 개념

2장은 초기 교회에서 신앙에 토대를 둔 희망이 단지 정보 전달적인 것만이 아니라 실천적으로 삶을 변화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사실을 신약성경의 예들을 통해 소개한다.

특히 7~10항에서는 희망이 신앙에 기초한다는 것과 희망이 삶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제시하기 위하여 히브리서를 상세하게 다룬다.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히브 11,1) 이 구절의 해석과 관련하여 교황은 그리스어 휘포스타시스를 객관적인 의미인 우리 안에 있는 실재가 아닌 주관적 의미인 내적 태도의 표현으로 이해한 마르틴 루터를 비판한다.

믿음은 단순히 아직 전혀 존재하지 않지만 앞으로 올 것에 대한 개인적인 지향이 아닙니다. 신앙은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줍니다. 신앙은 지금 당장에도 우리가 바라는 실제적인 어떤 것을 줍니다. 그리고 이러한 현재의 실재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의 확증이 되는 것입니다. 신앙은 미래를 현재로 이끕니다. 미래가 더 이상 단순한 아직 아니가 될 수 없는 까닭입니다. 이러한 미래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현재를 바꿉니다. 미래의 실재가 현재와 접촉하여 미래의 것들이 현재 있는 것들에 쏟아져 들어오고 현재 있는 것들이 미래의 것들에 쏟아져 들어갑니다.”(7)

그리스도교 신앙은 본질적으로 희망의 특성을 가지는데, 그 신앙은 단지 바라는 것들을 향한 내적 태도가 아니라, 바라는 것들의 실체(substantia), 알맹이를 지니고 있다. “신앙을 통하여 우리가 바라는 온전하고 참된 생명이 최초의 상태로, 말하자면 싹으로’, 따라서 실체’(substantia)에 따라 이미 우리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앞으로 올 것의 현존도 확신을 주는 것입니다.”(7)

이와 같이 그리스도인들의 희망은 전혀 근거 없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과거에 이미 보여 주셨고, 현재에도 그분의 현존 안에서 보여 주시는 것을 바탕으로 한 확고한 희망이다. 따라서 신약 성경의 희망은 이미 주어진 현재의 관점에서 앞으로 올 것에 대한 기대입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현존 안에서, 현존하시는 그리스도와 함께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완성과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다시 오실 것을 기대하는 것입니다.”(9) 여기에서 현재와 미래의 관계가 잘 드러난다.

이러한 신약 성경과 초기 교회의 신앙과 희망에 대한 고찰은 이제 다음의 질문으로 연결된다. “그리스도교 신앙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삶을 변화시키고 삶을 지탱해 주는 희망입니까?”(10)

 

 

 

 

[현대교회의 가르침] (49) 베네딕토 16세 교황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

나 혼자만 구원받겠다는 생각 버리고 공동체 안에서 그리스도교 희망 찾아야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의 제3-6장은 서양 근대사상사의 맥락 안에서 그리스도교 희망에 관하여 고찰한다. 먼저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희망의 내용인 영원한 생명’(eternal life)의 의미에 대하여 묻는다.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그래서 우리 안에는 이른바 유식한 무지(docta ignorantia)가 있습니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정말 무엇을 바라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참 생명’(true life)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가 모르지만 이끌리는 무엇인가가 틀림없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11) “우리는 단지 우리를 가두고 있는 한시성을 벗어나는 것을 상상하고, 영원성이란 달력의 날짜가 무한히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전체성이 우리를 감싸고 우리가 전체성을 얼싸안는 충만한 절정의 순간으로 느끼도록 노력할 수 있을 따름입니다. 이 순간은 마치 이전과 이후가 없는, 무한한 사랑의 바다에 뛰어드는 것과 같습니다.”(12) 영원한 생명의 의미는 회칙의 전체 구성 안에서, 특히 제6장의 27항에서 제시될 것이다.

그리스도교 희망은 개인주의적인가?

회칙은 그리스도인의 희망이 세상으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라 역사에로의 참여라고 강조한다. 먼저 교황은 희망의 개인주의적이고 사적(私的)인 유형을 비판한다. “이는 비참한 세상을 그냥 내버려 둔 채 배타적이고 개인적인 영원한 구원에서 피난처를 마련하는 방법인 순전한 개인주의(individualism)라고 무시당하게 된 것입니다.”(13) 그러나 교황은 그리스도교 희망의 사회적이고 공동체적인 차원을 강조한다. “우리가 도달하려고 늘 애쓰는 이 참된 삶은 백성들과 실존적으로 일치하는 데 달려 있으며, 이 삶은 우리 안에서 각자에게 실현됩니다. 이는 우리가 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것을 전제로 합니다. 이러한 보편적 자아에 열려야만 우리의 시선이 기쁨의 원천인 사랑 그 자체이신 하느님을 향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14) “‘복된 삶’(blessed life)에 대한 이러한 공동체 지향적인 관점은 분명히 현세를 초월하여 나아가는 것이지만, 역사적 상황과 그에 따라 주어지거나 배제된 가능성에 따라서 현세를 건설하는 것과도 연관됩니다.”(15)

현대에서 그리스도교 신앙과 희망의 변화

예수님의 메시지가 매우 개인주의적이며, 오로지 각 개인들을 대상으로 한다는 생각이 어떻게 발전될 수 있었습니까? 어떻게 영혼의 구원을 전체에 대한 책임 회피로 해석하게 된 것입니까? 그리스도교에서 구원을 찾는 것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봉사를 거부하는 이기적인 추구가 되어버렸다는 생각은 어떻게 나타나게 되었습니까?”(16)라고 새롭게 문제를 제기하는 교황은 이러한 오해가 생기게 된 사상적 배경을 근대에서 찾는다. 교황은 근대의 바탕을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을 일정한 법칙에 따라 설명할 수 있게 하고, 마침내 자연에 대한 기술의 승리에 이르게 하는 실험과 방법의 새로운 상호 관계(16)라고 밝힌다. 그래서 신앙이 단순히 부인되었다기보다는 오로지 개인과 다른 세상에 관련된 차원의 문제가 되고, 또 어느 모로 이 세상과 무관한 것이 되어버렸습니다.”(17) 그리고 이성과 자유라는 두 범주가 진보(progress) 개념의 중심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결국 이성과 자유의 확대를 통한 진보에 대한 희망은 프롤레타리아 혁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세상으로 이끌기는커녕 비참한 파괴만 남겼다. 여기서 교황은 칼 마르크스를 비판한다. “그의 오류는 더 깊은 데에 있습니다. 그는 인간은 언제까지나 인간이라는 사실을 망각하였습니다. 그는 인간을 망각하고, 인간의 자유를 망각하였습니다. 그는 자유가 언제든 악을 위한 자유도 된다는 점을 망각하였습니다. 그는 경제만 바로잡으면 모든 것이 바로잡힐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의 결정적 오류는 유물론입니다. 인간은 실제로 단지 경제적 조건의 산물이 아니고, 경제적으로 바람직한 조건을 마련하는 것을 통하여 외부적으로만 구원될 수는 없습니다.”(21)

그리고 교황은 참된 진보의 의미를 묻는다. “진보는 분명히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진보는 선을 위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하지만, 전례 없는 가능성인 악을 위한 무시무시한 가능성도 열어 놓습니다. 우리는 모두 진보가 잘못 인도되면 어떻게 끔찍한 악의 진보가 될 수 있고 또 실제로 그렇게 되었는지 목격하였습니다. 기술의 진보가 인간의 윤리 교육, 인간의 내적 성숙을 통한 진보와 상응하지 않는다면, 이는 결코 진보가 아니고 인간과 세상에 대한 위협일 따름입니다.”(22)

그리스도교 희망의 참모습

회칙의 제6장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그리스도교 희망이 무엇인지를 제시한다. 영원한 생명은 참되고 충만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명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만 가능하다. “영원한 생명이란 홀로 참하느님이신 아버지를 알고 아버지께서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진정한 의미에서 생명은 우리가 오로지 우리 안에만 간직하고 있거나 스스로의 힘만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관계입니다. 온전한 생명은 그 원천이신 분과 맺는 관계입니다. 죽지 않으시고 생명 그 자체이시며 사랑 자체이신 분과 관계를 맺고 있을 때, 우리는 생명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가 살아가는 것입니다.”(27) 구원의 개인주의에 반대하는 그리스도교 신앙은 희망의 새로운 차원을 제시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친교를 이룬다는 것은 우리가 그분의 모든 이를 위하는일에 참여하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의 존재 방식이 되게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다른 이를 위하여 살아가라고 당부하십니다. 바로 예수님과 이루는 친교를 통해서만 우리는 참으로 다른 이를 위한, 모든 이를 위한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28)

희망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리들

회칙의 제7장은 우리는 어떻게 희망을 우리 안에서 발전시킬 것인가?”라는 실천적인 과제를 다룬다. 첫째, 희망의 학교인 기도는 그릇된 희망을 정화한다. 희망은 기도의 열매이다. “기도한다는 것은 역사 현장을 벗어나 자기행복만 누리는 혼자만의 구석 자리로 숨어 들어가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올바로 기도할 때 우리는 하느님과 또 우리 이웃 사람들에게 자신을 여는 내적 정화의 과정을 겪게 됩니다.”(33)

둘째, 희망을 배우는 자리는 활동과 고통이다. “내 삶과 역사 전체가 온갖 좌절에도 스러지지 않는 사랑의 힘으로 굳건히 지탱되고 이로써 그 고유한 의미와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는 굳은 희망, 오로지 이러한 희망만이 행동하고 인내할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습니다.”(35) “인간다움의 참된 척도는 고통과 고통 받는 사람에 대한 관계에서 중요하게 판가름됩니다. 개인이든 사회든 마찬가지입니다. 고통 받는 이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함께 고통을 겪음’(com-passion)으로써 그들의 고통을 나누고 안으로 견디도록 돕지 못하는 사회는 무정하고 비인간적인 사회입니다.”(38)

셋째, 희망을 배우고 실천하는 자리는 심판이다. 심판은 공포가 아니라 희망의 메시지이다. “하느님 없는 세상은 희망이 없는 세상입니다. 하느님만이 정의를 이루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은 우리에게 그런 확신을 줍니다. 최후의 심판은 근본적으로 두려운 장면이 아니라 희망의 장면입니다.”(44)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개별 심판과 최후의 심판과 관련된 현대신학의 논쟁을 언급하면서, 연옥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 가르침을 재확인한다. 즉 교황은 죽음과 부활 사이에서 최종 판결이 아직 선언되지 않은 중간 상태의 개념(44)을 제시한다.

 

 

 

 

[현대교회의 가르침] (50) 베네딕토 16세 교황 회칙 진리 안의 사랑()

빈곤 기아커져가는 부의 불균형, 경제논리 떠나 형제애로 극복해야

 

1. 문서의 배경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세 번째 회칙이자 첫 번째 사회 회칙으로서 2009629일 발표된 진리 안의 사랑19673월 발표된 바오로 6세 교황의 민족들의 발전40주년을 기념하여 준비된 문헌입니다. 회칙의 부제가 사랑과 진리 안에서 이루는 온전한 인간 발전에 대하여라고 붙어있는 것처럼 이 회칙은 민족들의 발전에서 다루었던 참된 의미의 인간 발전, 즉 모든 사람이 자신의 기본권을 누리며 살아갈 수 있고, 한 인간으로서 온전히 자신을 실현하도록 돕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요구되는 가치와 실천을 주제로 다루고 있습니다.

민족들의 발전1960년대에 당면했던 세계적 차원의 빈곤과 불균형, 발전 문제를 처음으로 다룬 사회 회칙입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들은 급격한 경제발전을 이루고 부를 누리고 있었지만 신생독립국 등 개발도상국은 상대적으로 낙후된 경제 인프라와 저발전, 종속적인 무역관계로 인한 저개발과 빈곤에 따른 어려움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이 회칙에서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위한 인류의 노력을 말하면서 교회가 말하는 발전은 경제적인 성장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누구나 하느님께로부터 받은 인간 발전의 소명이 있으며, 그것은 한 인간 전체(全人)와 전 인류의 완전한 발전을 추구해야 한다는 원칙을 제시합니다(42). 이를 실천하기 위해서 각 개인의 타고한 소질을 개발하고 인격의 성장을 위한 책임을 고양하는 것은 물론이고 공동체 차원에서는 상호 연대성의 원리에 따라 부국이 빈국을 도와주고, 사회정의의 의무에 따라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에 공정한 통상관계를 이룩하고, 보편적 사랑의 의무에 따라 외국인 노동자 등을 환대하고 민족 차별 의식을 버리며 민족 간에 문명의 대화를 나누라고 촉구합니다. 회칙은 결론에서 발전은 평화의 새 이름”(76)이라고 선언하여 실질적 평화를 위해서 요구되는 가난의 극복과 인간의 성장을 위한 발전의 중요성을 드러냅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1987년에 발표한 민족들의 발전20주년을 기념하는 사회 회칙 사회적 관심에서 개발도상국의 빈곤, 억압, 차별이 지속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서양 진영의 정치적, 군사적 대립, 무기 경쟁에 투입되는 자원을 빈곤 퇴치를 위해 사용할 것과, 발전을 갈망하는 민족들을 위해 선진국들이 연대 의식을 가질 것을 촉구하였습니다.

진리 안의 사랑1991년에 나온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의 회칙 백주년이후 18년이 지나 처음 나온 사회 회칙이기에 그 이후 더욱 가속화된 기술의 발전,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금융과 무역구조의 변화 등과 그로 인한 개발도상국이 겪는 위기의 문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교황은 구체적으로 기존의 이익추구라는 경제논리를 넘어서 도덕성과 형제애를 드러내는 새로운 형태의 경제활동을 제안하며, 참된 인류의 발전에 이바지하는 것은 진리와 사랑의 근원이신 하느님께 마음을 향하고 열려있는 그리스도교의 인본주의라고 결론 맺습니다. 이제 자세히 회칙의 구성과 내용을 살펴보겠습니다.

2. 진리 안의 사랑이라는 제목의 뜻

서론에서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진리 안의 사랑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설명합니다. 교황은 사회교리의 핵심은 사랑인데, 이 사랑은 이성과 신앙의 빛인 진리에 비추어 이해하고 실천할 때만 참되다고 강조합니다. 지금까지 사랑의 의미가 오해되고 공허해져서 결과적으로 윤리적인 삶과 멀어지는 경향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진리가 없다면 사랑은 감상으로 변하고 주관적인 감정이나 의견에 사로잡히게 되기에 오직 진리 안에서만 사랑은 밝게 드러나고 올바르게 실천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2-3). 교황은 진리 안의 사랑을 실천함으로써 우리는 주관적이고 역사적이라는 한계를 초월하는 보편적 복음의 진리를 따르는 사회를 건설할 수 있고 참되고 온전한 인간 발전도 이룰 수 있다고 말합니다(4). 따라서 이 회칙 제목의 강조점은 진리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교황은 발전, 사회복지, 인류를 괴롭히는 심각한 경제적 사회적 문제들에 대한 만족스러운 해결책 추구, 이 모든 것에 이 진리가 필요하며, “더욱 필요한 것은 이 진리를 사랑하고 드러내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5).

교황은 진리 안의 사랑이 사회 발전을 위한 도덕적 행위로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형태는 정의와 공동선이라고 말합니다. 각자에게 정당한 몫을 돌려준다는 고전적인 뜻의 정의는 사랑에 본질적으로 내재하는 것으로서 사랑의 최소 척도이자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부분입니다. 따라서 개인과 민족의 합법적인 권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은 사랑이 요구하는 최소한의 정의입니다(6). 공동선은 자기자신이 아니라 사회 공동체에 속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추구하는” “‘우리 모두의 선입니다.” 공동선은 법과 제도를 통해 모두가 함께 자신을 완성하도록 도와주는 이웃 사랑의 방법이므로, 점점 세계화되는 사회에서 공동선을 위한 노력은 인류 가족 전체를 포함합니다(7).

3. 우리 시대의 새로운 문제들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제1장에서 민족들의 발전의 메시지를 요약하며 결론적으로 바오로 6세 교황이 지적한 저개발의 첫 번째 원인은 물질이 아니라 연대성의 의무를 소홀히 하는 것과 올바른 방향을 제시해주지 못하는 성찰의 부족, 그리고 개인과 민족 간의 형제애 부족이며 이를 위한 개혁의 절박성을 강조합니다(19-20). 그리고 바오로 6세 교황이 밝힌 발전은 구체적으로 기아, 빈곤, 전염병, 문맹으로부터의 구제, 민족들의 평등한 세계 경제에의 참여, 민족들의 연대 의식, 민주주의 체제의 강화를 의미한다고 지적합니다(21).

2장에서 교황은 이제 우리 시대에 더해진 새로운 문제들을 성찰합니다. 교황이 바라보는 우리 시대의 문제들은 어떠할까요? 부국과 빈국의 경계선이 명확치 않은 가운데 부가 증가하면서 불평등도 더욱 늘어납니다. 새로운 형태의 빈곤이 늘어나는 가운데 빈국에서 일부 소수계층은 엄청난 부를 누립니다. 세계화로 인한 상호의존이 폭발적으로 늘어납니다. 거대 다국적 기업은 노동자의 인권을 무시하고 국제원조도 많은 경우 무책임한 행위로 그 고유 목적에서 벗어나 있습니다. 일부 부국은 의료 분야 등에서 지나치게 지적재산권을 주장하고 있고, 일부 빈국에서는 발전을 저해하는 문화와 행동규범이 존속합니다. 세계화된 시장은 부국이 상품의 가격을 낮추기 위해 빈국에 생산기지를 세우면서 경쟁력 강화를 추구하는 댓가로 빈국의 사회보장제도가 축소되고 노동자의 권리가 위협받고 있습니다. 노동의 유연성으로 인한 근로 조건의 불확실성과 실업으로 인한 고통도 발생합니다. 여전히 빈국에서 물과 식량의 부족 등 기아와 이를 발생시키는 구조적인 문제도 심각합니다. 문화적 평준화, 강요된 피임과 낙태 확산, 안락사와 같은 생명경시, 종교 자유를 억압하는 테러, 종교 무차별주의와 실천적 무신론도 인간 발전을 방해하는 요소입니다. 이런 현실에 대해 교황은 어떤 구체적인 해결책을 제안하고 있을까요?

4. 인간발전을 위한 개선 방향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우리 시대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지적하는 가운데 부분적으로 개선방향을 언급합니다. 변화된 세계 환경에 맞게 공권력의 권한과 역할을 재평가하는 것, 노동자의 권리를 수호하는 노동조합을 장려할 것, 실업을 막기 위해 정부는 자본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가치를 상기할 것, 문화의 획일화와 절충주의에 맞서 참다운 문화간 대화를 할 것, 식량 문제의 구조적인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농업기술의 개발과 보급에 투자할 것, 식량과 물에 대한 권리를 기본적인 생명권으로 인정할 것, 경제 위기 해결을 위해 부국은 빈국과 연대할 것, 생명에 대한 개방성을 키우고 모든 민족과 개인의 생명권을 존중할 것, 종교 자유의 권리를 보장할 것, 다양한 차원의 인간 지식의 상호작용을 촉진하고 그 지성이 사랑으로 충만해지게 할 것, 지나친 부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안정된 고용보장을 최우선으로 삼을 것 등입니다.

사실 이러한 해결책들은 원론적이고 당위론적인 내용으로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곧 이어서 진리 안의 사랑을 바탕으로 이러한 문제들을 근본적으로 바꿀 수 있는 원리를 이끌어냅니다. 그것은 바로 무상성(無償性)의 원리형제애입니다.

 

 

 

[현대교회의 가르침] (51) 베네딕토 16세 교황 회칙 진리 안의 사랑()

자본보다 사람을 중심에 두고 정의와 공동선 위해 연대해야

 

4. 인간 발전을 위한 개선 방향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우리 시대가 당면한 여러 문제를 지적하는 가운데 부분적으로 개선방향을 언급합니다. 변화된 세계 환경에 맞게 공권력의 권한과 역할을 재평가하는 것, 노동조합을 장려할 것, 정부는 자본보다 사람이 우선이라는 가치를 상기할 것, 문화의 획일화와 절충주의에 맞서 상호 대화할 것, 식량 문제의 구조적인 원인을 해결하기 위해 농업기술의 개발과 보급에 투자할 것, 식량과 물에 대한 권리를 기본적인 생명권으로 인정할 것, 경제 위기 해결을 위해 부국은 빈국과 연대할 것, 종교 자유의 권리를 보장할 것, 다양하게 인간 지식의 상호작용을 촉진하고 지성은 사랑으로 충만할 것, 부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안정된 고용보장을 최우선으로 삼을 것 등입니다.

5. 무상성(無償性)의 원칙과 형제애

사실 이러한 해결책들은 원론적이고 당위론적인 내용으로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더 나아가 진리 안의 사랑을 바탕으로 형제애에 근거한 무상성의 원칙을 현실 문제의 개선 원칙으로 새롭게 제시합니다. “경제, 사회, 정치적 발전이 참으로 인간다운 것이 되려면 형제애의 표현으로서 무상성의 원칙이라는 여지를 마련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34). 경제생활에서 올바른 재분배뿐 아니라 나눔의 정신이 깃든 활동이 필요하고 상거래 관계에서도 무상성이 요구되는 등, 인간적이고 도덕적인 시장 경제를 촉구하는 것입니다. “진리 안의 사랑은 이윤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단순히 등가 교환 논리나 이윤 자체가 목적인 논리를 뛰어 넘는 숭고한 목적을 지닌 그러한 유형의 경제 활동을 요구합니다. 무상성은 경제 주체인 시장, 국가, 시민사회들 사이에 정의와 공동선에 대한 책임과 연대의식을 촉진하고 확산시킬 수 있습니다(38). 특히 전 세계적으로 저개발을 척결하기 위해서는 이런 무상성과 친교를 중시하는 경제제도가 요구됩니다.

구체적으로 교황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고려하는 새로운 형태의 기업 활동을 강조합니다. 예를 들어 오로지 소유주의 이익만을 위해서 하지 않고 노동자, 고객, 하위 공동체 등에 대한 책임을 지는 기업 경영, 정의롭지 못한 곳은 피하는 윤리적 투자, 투기적인 금융자원의 사용을 삼가고, 노동자의 요구와 존엄에 부응하는 활동을 제안합니다.

교황은 또한 정치 권위의 역할도 중요하며, 민주주의를 굳건하게 하기 위해 정치권력은 집중되지 않으면서 서로 협조해야 함을 지적합니다. 인류가 점점 서로 연결되어가는 세계화 과정에서 그 근본적인 윤리 기준은 인류 가족의 일치와 선을 향한 발전이며, 따라서 인간을 바탕으로 공동체를 지향하며 초월성에 열려 있는 과정을 촉진하기 위해 노력하자는 것입니다. 세계화는 그 자체로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고 사람들이 만들어 가는 것이므로, “관계와 친교, 재화의 나눔에서 인류의 세계화를 체험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는기본적이고 인간다운 윤리 정신을 지녀야 한다고 권고합니다(42).

6. 민족들의 발전, 권리와 의무, 환경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누구나 타인의 발전을 위한 책임과 서로 빚을 지고 있다는 연대의식을 가져야 하며, 권리가 방종이 되지 않으려면 의무를 전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지구 한 쪽에서는 풍요한 사회가 심지어 죄와 악에 대한 권리까지 요구하는 반면 저개발지역에서는 의식주, 기초 교육과 의료 혜택마저 부족하여 일차적이고 기본적인 권리를 침해받는현실을 지적합니다. 여기서 교황은 개인의 권리들이 그 권리에 완전한 의미를 부여해주는 의미의 틀을 벗어날 때 방종해질 수 있고, 실제로 무제한적이고 무분별한 요구들만 늘어나게 되면 결국 민족들의 진정한 발전은 위태로워진다고 경고합니다(43).

이어서 교황은 발전에서 권리와 의무의 개념이 실제적으로 적용되는 여러 차원을 설명합니다. 발전을 위해서는 생명과 가정이 가장 기본적인 가치이므로 쾌락적인 성의식, 강제적 산아제한 정책을 경계하고 도덕적으로 책임 있게 생명을 받아들이는 것은 사회와 경제의 풍부한 자원임을 강조합니다. 경제적 차원에서도 인간의 가장 깊은 도덕적 요구에 부응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므로 기업 활동에도 윤리가 확산되고 이윤을 추구하면서도 인간다운 시장과 사회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임을 인식하라고 촉구합니다(46).

발전의 주제는 인간과 자연환경의 관계에서도 적용됩니다. 인간은 하느님이 모든 이에게 주신 선물인 환경을 책임 있게 사용해야 하며 특히 가난한 이들과 미래 세대를 고려해야 합니다. 교황은 강자의 에너지를 독점 금지, 자원사용에 대한 평화적 합의, 에너지 자원의 재분배와 대체 에너지 연구, 환경보호를 위해서 향락주의와 소비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생활양식의 채택 등 환경에 대한 의무와 도덕적인 자세의 필요성도 언급합니다.

7. 인류 가족의 협력 및 기술 발전

베네딕토 16세 교황은 인류는 참된 친교 안에서 협력하는 한 가족임을 인식해야 진정한 민족들의 발전을 이룰 수 있다고 강조하며, 이를 위한 사고의 쇄신을 요청합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을 닮은 영적인 인간은 서로 관계를 맺는 가운데 완전해 지는 존재이므로, “모든 개인과 민족들이 정의와 평화라는 근본 가치를 바탕으로 연대하며 이루어진 인류 가족의 관계로 들어서는 것이 발전이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종교의 역할이 중요한데 교황은 공공 영역에 하느님의 자리가 있도록 신앙의 자유, 이성으로 정화된 종교(신앙과 이성의 대화), 비신자와 신자와의 협력이라는 과제도 수행하기를 요청합니다(56).

 

 

인류 가족이 협력해야 하는 구체적 분야에서 교황은 효과적인 국제 개발 협력(해외원조), 교육 받을 기회 증진, 건전한 국제 관광, 이민자들의 인권 존중, 실업으로 인한 빈곤 문제 개선, 비노조원의 권리까지 대변하는 노동조합의 역할 확대, 투명하고 도덕적인 국제 금융 투자, 국제기구의 개혁 등을 주문합니다. 마지막으로 교황은 인류의 풍요에 기여한 기술 발전의 긍정적인 가치를 인정하면서도 한계와 부정적인 측면을 인식하라고 경고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의 유일한 주인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새겨주신 자연도덕법의 규범을 인식해야 하는 존재이며, 기술을 통해 우리의 삶의 조건을 향상시킬 때도 인간의 자유는 도덕적 책임을 지닌 결정으로 하느님의 뜻에 부응하는 태도를 견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황은 무엇보다 기술을 활용한 생명조작, 매스미디어의 남용 등의 결과는 심각하며, 기술 중심의 사고방식은 발전의 문제가 물질적 성장뿐 아니라 인간의 영적인 성장을 포함한다는 것을 간과하게 만든다고 우려합니다.

결론에서 교황은 결국 인간은 혼자의 힘으로 진정한 발전을 이룰 수 없으며 사랑과 진리의 원천이신 하느님께 열려있는 그리스도교 인본주의를 통해서만 참된 발전에 이를 수 있다고 강조합니다(78). 참된 발전을 이루어 주는 진리 안의 사랑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은총으로 주어지는 것이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에 의지하며 항상 기도하며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노력하며, “인간 전체와 전 인간의 참된 발전을 위해서 인류 가족 전체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촉구합니다(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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