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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의 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7) 길을 나서다...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22|조회수39 목록 댓글 0

[영성의 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7) 길을 나서다...

 

지난 530일 제가 있는 가톨릭목포성지에서는 성모님과 함께 길을 나서다라는 주제로 성모의 밤을 거행했습니다. 정기 희년 희망의 순례자라는 주제에 맞게 신자들이 성모님의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을 묵상하며 성모님을 맞아드리고 함께 그 여정을 순례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성모의 밤을 준비했습니다.

시작은 평생 순례자로서 살아가신 성모님이셨습니다. 성모님께서는 천사의 말을 듣고 그 엄청난 일에 순종하시며 길을 떠나십니다(루카 1,39). 인간의 구원을 위한 구세주의 탄생을 위해서도 먼 길을 나서십니다(루카 2,4). 또한 예수님과 함께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까지 예수님의 성공과 실패, 기쁨과 슬픔, 두려움과 고통, 그리고 마지막의 십자가까지 동행하시며 순례하십니다. 그렇게 성모님께서는 순례자로서 살아가십니다. 그런 그분이 오늘도 우리를 위해 길을 나서십니다. 우리의 아픔과 슬픔에 함께하시기 위해서, 우리를 하느님께로 더 가까이 다가가게 하려고 우리의 삶에 찾아오십니다.

그런 성모님과 함께 길을 나서는 행사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의 달인 5월 한 달 동안 길을 나서는 성모상을 모시고, 목포에서 가장 먼 흑산도에서 시작하여 여러 섬을 돌아 목포 시내 본당을 거쳐 마지막은 성지의 바실리카까지 순례하였습니다. 5월 성모의 밤 수많은 촛불과 장미꽃이 성지 광장을 수놓았고, 묵주기도의 장미꽃다발이 성모님의 주변을 수놓았습니다. 아름다웠습니다. 석 달 동안 행사를 준비하면서 걱정도 많았고 짜증도 부렸지만 그 모든 것들이 녹아내렸습니다.

행사를 마치고 방에 들어와 책상 앞에 앉으니 갑자기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가진 것에서 떠나고 싶었고, 익숙한 곳에서 떠나고 싶었고, 하던 일에서 떠나고 싶었고, 그렇게 얽매임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고 싶었습니다. 똑같은 일상, 쫓기듯 살아왔던 삶에서 벗어나 여유를 가지고, 조금은 한가롭게 길을 걷고 싶어졌습니다. 성모님과 함께 길을 나서서 떠나자고, 성모님의 순례에 함께하자고 다른 이들에게는 말했지만 정작 저는 떠나지 못하고, 길을 나서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더 집착했고, 가진 것을 내려놓지 못했고, 그냥 맡겨두지 못했습니다. 떠나야 합니다. 희년을 선포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도 순례를 위해 떠나라고 우리에게 권고하십니다.

모든 희년 행사의 근본 요소는 순례입니다. 전통적으로, 순례 여정을 나서는 것은 삶의 의미를 추구하는 것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도보 순례는 침묵, 노력, 단순한 삶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데에 큰 보탬이 됩니다. 다가오는 희년에 희망의 순례자들은 틀림없이, 희년을 충만하게 살아내고자 옛 순례길과 오늘날의 순례길을 걸어갈 것입니다. 로마 자체에서도 전통적인 카타콤바와 일곱 교회 방문과 더불어 또 다른 순례 여정이 제안될 것입니다. 국경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 우리는 한 나라에서 다른 나라로 넘어가고 한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건너가서 피조물과 예술 작품들을 바라보면서 서로 다른 체험과 문화의 풍부함을 보물로 여기는 법을 배웁니다. 또한 기도 안에서 그 아름다움을 하느님께 봉헌하며 하느님께서 이루시는 놀라운 일들에 감사하게 됩니다. 순례길과 로마 시내에 있는 희년 성당들은 믿음의 순례길에서 쉼터이자 영성의 오아시스가 될 수 있습니다. 그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곳에서 모든 참된 회심의 여정의 본질적 출발점인 화해의 성사에 다가가, 희망의 샘에서 길어 올린 물을 마실 수 있습니다. 개별 교회에서는 사제와 신자들의 고해성사 거행을 준비하며 개별적 고백의 형태로 기쁘게 고해성사를 할 수 있도록 각별한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5년 정기 희년 선포 칙서 5>

떠나야만 하는 이유

하느님을 믿는 사람들은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아브라함도 하느님께로부터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창세 12,1)라는 명령을 받고 즉시 이를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런 무모한 모험은 하느님께서 어디든 계시며, 그 하느님께서 언제나 자기를 보호해 주실 거라는 확신이 없다면 감행할 수 없습니다. 어쩌면 신앙인은 하느님 때문에 모험을 감행하는 사람들이며 믿기 위해서, 하느님을 더 사랑하기 위해서 스스로 떠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떠나야 할 것들은 너무 많습니다. 자기를 묶어 놓은 가족의 울타리에서, 생활 습관이나 행동 방식 그리고 모든 소유와 집착에서 떠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더욱 떠나지 못하는 인간으로 변해가는지도 모릅니다. 텔레비전에 묶이고, 핸드폰에 묶이고, 부동산, 주식에 묶이고, 소유에 묶이고, 인기와 성공, 명예와 권력에 묶입니다. 떠나지 못할수록 자유를 잃어가고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확신은 사라집니다. 내가 집착하고 있는, 내가 묶여있는 그것들을 더 믿고 확신하며 살아갑니다.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기 전에 받으셨던 악마의 유혹은 예수님의 떠남을, 그리고 인간으로서 떠나지 못하는 가장 기본적인 욕망에 대해서 묵상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가득 차 요르단 강에서 돌아오셨다. 그리고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시어, 사십 일 동안 악마에게 유혹을 받으셨다. 악마는 모든 유혹을 끝내고 다음 기회를 노리며 그분에게서 물러갔다.(루카 4,1-13)

성령께서 예수님을 인도한 곳은 다름 아닌 외롭고 쓸쓸하고 배고픈, 극한의 상황이 펼쳐진 광야입니다. 하지만 그 광야는 인간이 내는 모든 소리와 화려한 빛이 차단된 절대 고독의 장소입니다. 그래서 자신 안에서 들려오는 하느님의 소리를 듣고, 하느님의 것들을 느낄 수 있는 은혜의 장소입니다. 그렇게 우리도 광야로 떠나야 합니다. 성령께서는 세상의 것들에 묶여 자신 안에 매몰된 우리의 모습을 안타까워하시며 우리를 광야로 떠나보내십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여전히 악마에게서 유혹을 받겠지만 그 떠남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언제나 함께 계심을 확신하는 기회가 될 것입니다.

어둡고 거칠고 막막한 광야를 헤쳐 나가다 보면 자신이 연약하고 보잘것없는 존재라는 사실도, 자신의 삶이 무한한 은총으로 채워져 있음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사서 고생하는 무모한 모험일 수 있습니다. 아무도 가지 않으려는 힘든 여정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더 확실한 믿음을 위하여,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하여, 그리고 희망 안에서 끊임없이 나아가기 위하여 우리는 그 무모하고 쓸데없을 것 같은 순례를 오늘도 떠나야 합니다.

 

 

 

 

 

[영성의 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8) 쉼을 위하여...

 

똑같은 일상에서, 매일 반복되는 삶의 무료함에서 우리는 새로운 자극을 위해 떠남을 계획합니다. 아니면 많은 스트레스로 답답했던 일상에서 생각 없이 먹고 마시며, 즐거움과 행복을 찾기 위해 떠남을 바랍니다. 그 떠남의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목적은 입니다. 지치고 피곤한 일상에서 떠나 몸도 마음도 생각도 쉬면서 새로움을 받아들이고 활력을 얻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쉼의 방법은 각자 다릅니다. 어떤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집에 있는 것이 쉼 일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집을 나서는 것만으로도, 일상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쉼을 만끽하고, 어디론가 떠나는 것을 계획하고 준비하면서 설레고 들뜬 기대감에 부푸는 것이 나름의 쉼일 수 있습니다.

각자의 쉼에 대해서 생각해 봅시다. 나는 어떻게 쉬고 있는지, 무엇을 하며, 무엇을 바라며, 어떤 모습으로 쉬고 있는지 나의 쉼의 모습을 찾고, 그 쉼의 모습을 통해서 일상을 떠나봤으면 합니다. 그런 우리의 쉼을 찾는다면 어디론가 떠나지 않아도 우리는 일상에서 떠날 수 있는 여유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쉼

떠난다는 것이 쉬기 위해서라면 하느님께서는 쉬셨을까요? 우리 모두 알고 있듯이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마지막 날에 쉬셨습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이렇게 하늘과 땅과 그 안의 모든 것이 이루어졌다. 하느님께서는 하시던 일을 이렛날에 다 이루셨다. 그분께서는 하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이렛날에 쉬셨다. 하느님께서는 이렛날에 복을 내리시고 그날을 거룩하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여 만드시던 일을 모두 마치시고 그날에 쉬셨기 때문이다. 하늘과 땅이 창조될 때 그 생성은 이러하였다.”(창세 1,1-2,4)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모든 일을 마치시고 마지막 날에 하느님께서는 쉬셨습니다. 그 쉼은 복을 내리시고 거룩하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성경에서 거룩함은 하느님의 다른 이름과 같습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홀로 거룩하시기 때문입니다. ‘거룩하다의 히브리말은 코데쉬라는 단어를 쓰는데, ‘떼어 놓다’, ‘자르다’, ‘분리하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하느님은 세상과 완전히 다른분이기에 거룩하시고, 거룩하시기에 인간의 이해와 인간의 범위를 초월하시는 분이십니다. 거룩하신 분은 절대 다른 분, 절대 타자이십니다. 인간은 그런 하느님의 거룩함을, 인간으로서는 이해할 수도, 닮아 갈 수도 없는 그분의 거룩함을 배워가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나가라고 얘기하시면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8)라고 명령하십니다. 히브리서에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의 거룩함으로 우리를 이끌어주십니다. “육신의 아버지들은 자기들의 생각대로 우리를 잠깐 훈육하였지만, 그분께서는 우리에게 유익하도록 훈육하시어 우리가 당신의 거룩함에 동참할 수 있게 해 주십니다”(히브 12,10). 우리는 하느님의 그 완전함, 그 거룩함을 배워나가야 합니다. 그분의 거룩함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느님의 쉼은 어쩌면 우리에게 당신의 거룩함을 닮아가라는 또 다른 가르침일 수 있습니다. 당신의 쉼을 배워가며 거룩해지라고, 그러면서 당신의 완전함을 배워가라는 명령입니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드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

하느님은 어떻게 쉬셨을까요? 각자가 자신만의 쉼의 모습을 가지고 있듯이 하느님께서도 쉼의 모습을 가지고 계실 것입니다. 우리가 그 쉼을 배워간다면 하느님의 그 거룩함에 동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마치시고 어떻게 쉬셨는지는 설명되지 않고 그저 쉼의 목적, 거룩하게 하시기 위한 쉼임을 성경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창조하시는 하느님의 일상(?)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그분의 쉼의 방법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창조가 이루어지는 6일의 시간에 하느님께서는 분명히 쉬셨습니다. 첫날의 창조 이야기만을 살펴보아도 일상의 쉼의 흔적이 드러납니다.

한처음에 하느님께서는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

하느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빛이 생겨라.”하시자 빛이 생겼다. 하느님께서 보시니 그 빛이 좋았다. 하느님께서는 빛과 어둠을 가르시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첫날이 지났다.(창세 1,1-5)

하느님께서는 첫날뿐 아니라 매일의 반복되는 일상에서 자신이 창조하시고 자신이 해 왔던 일을 바라보십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좋음을 찾으십니다(창세 1,3.10.13.19.21.25). 그리고 마지막 날에는 하느님께서 보시니 손수 만든 모든 것이 참 좋았다.”(창세 1,31)라고 성경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하느님께서 어떻게 쉬셨는지에 대한 정답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쉼은 바쁘게 살며 내 앞에 있는 것만 바라보고, 나에게만 집중했던 시간들을 뒤로 하고, 한 발짝 물러서서 여유를 가지고 바라보는 것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내가 걸어왔던 길, 내가 바라보고 있는 목표, 내가 원하는 꿈들을 바라보고, 내가 했던 행동과 일들이 그 목표와 꿈들에 얼마나 가까이 다가와 있는지, 아니면 완전히 다른 방향의 길로 나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시간이어야 합니다. 또한 나의 말과 행동, 나의 삶들을 되돌아보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위에 누가 있는지, 그 주위의 환경에 나는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나의 미움과 나의 분노와 나의 걱정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지만 진정한 하느님의 쉼은 그 안에서 나쁨을 발견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라봄의 목적, 쉼의 목적은 좋음을 발견하기 위함입니다. 좋음은 당신의 사랑이 녹아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쉼을 배워나가야 하는 우리도 여유를 가지고 우리를 바라보는 시간을 만들어 갔으면 합니다. 그래서 그 좋음을 찾았으면 합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은 다른 것안에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이해를 벗어난, 전혀 거룩하고, 사랑스럽고, 좋은 것이 아닌 것에도 당신의 사랑과 헌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느끼는 미움과 걱정, 고통과 슬픔 속에서도 어쩌면 당신의 좋음이 있음을 우리는 그 쉼에서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의 쉼을 우리 모두가 지금의 일상에서 살아갔으면 합니다. 한 발짝 물러서서.

 

 

 

 

 

[영성의 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9) 참 좋은 것을 바라보는 순례

 

순례의 또 하나의 목적은 잘 바라보기 위해 떠나는 여정입니다. 단순히 어떤 것을 보기 위해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처럼 좋음을 제대로 보기 위해 떠나는 여정입니다. 우리의 눈은 아름다움을 추구하면서도 끊임없이 추함을 가려내려 합니다. 좋음을 바라보고 좋음을 행하기 위해서 언제나 나쁨만을 바라보며 나누고 구별하고 비판합니다. 사랑을 원하면서 끊임없이 보기 싫고 미운 사람을 만들어 냅니다.

언제나 미와 추, 성과 속, 선과 악을 가르며 구별과 가름의 잣대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잘 바라보기 위해서 떠나는 순례는 좋음을 바라보기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의 시선으로 세상을, 주위를, 이웃을, 그리고 나를 제대로 보고, 그 안에서 좋음을 바라보기 위한 여정이 되어야 합니다. 눈먼 이를 고쳐주시는 예수님의 기적은 제대로 보기 위한 순례의 여정이 어떤 과정으로 이루어지는지를 묵상하게 합니다.

그들은 벳사이다로 갔다. 그런데 사람들이 눈먼 이를 예수님께 데리고 와서는 그에게 손을 대어 주십사고 청하였다. 그분께서는 그 눈먼 이의 손을 잡아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가셔서, 그의 두 눈에 침을 바르시고 그에게 손을 얹으신 다음, “무엇이 보이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는 앞을 쳐다보며, “사람들이 보입니다. 그런데 걸어다니는 나무처럼 보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분께서 다시 그의 두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히 보게 되었다. 그는 시력이 회복되어 모든 것을 뚜렷이 보게 된 것이다.(마르 8,22-26)

가장 먼저 우리는 볼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눈먼 이는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에게 이끌려 예수님께 다가갑니다. 눈이 보이지 않는 자신이 예수님께 청을 드리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람들이 예수님께 청을 드렸다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아야 합니다. 보고 있지만, 보이지만 보지 못하고 있는 삶을 스스로가 인정할 때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있는 순례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두 번째는 가까이 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사람을 손을 잡고 자신만의 공간으로 부르십니다. 그리고 침을 발라 어루만져 주십니다. 그렇게 예수님과의 특별하고 개별적인 관계성 속에서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함께 있는 그 시간 안에서, 어루만져 주시는 예수님의 온기 속에서 예수님의 시선과 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보이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한 번의 고침으로, 일회성의 어루만짐으로는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다시 한번 예수님께서는 그의 눈에 손을 얹으시니 그가 똑똑하게 볼 수 있게 됩니다. 계속해서 예수님과 함께 있어야지만 우리는 제대로 볼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 보이지만 예수님과 멀어져 있었기에, 그리고 예수님의 시선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에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같은 것을 보지만 우리의 마음과 생각과 의지가 욕심으로 오만으로 탐욕으로 물들어져 제대로 볼 수 없게 됩니다. 순례의 여정은 예수님과 함께, 같은 시선으로, 같은 마음과 사랑으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다시 볼 수 있도록....

우리에게는 그렇게 바라보려는 의지가 있어야 합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는 눈이 보이지 않는 이를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이야기가 한 번 더 나옵니다. 그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는 바라봄의 여정을 더 자세히 새길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많은 군중과 더불어 예리코를 떠나실 때, 티매오의 아들 바르티매오라는 눈먼 거지가 길가에 앉아 있다가, 나자렛 사람 예수님이라는 소리를 듣고, “다윗의 자손 예수님,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치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많은 이가 그에게 잠자코 있으라고 꾸짖었지만, 그는 더욱 큰 소리로 다윗의 자손이시여,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외쳤다. 예수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불러오너라.” 하셨다. 사람들이 그를 부르며, “용기를 내어 일어나게, 예수님께서 당신을 부르시네.” 하고 말하였다. 그는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갔다. 예수님께서 내가 너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 눈먼 이가 스승님, 제가 다시 볼 수 있게 해 주십시오.” 하였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가거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고 이르시니, 그가 곧 다시 보게 되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섰다.(마르 10,46-52)

바르티매오라는 거지도 같은 방식으로 예수님께 치유를 받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치유와 다른 점은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이 만류하지만 그는 계속해서 소리칩니다. 또한 자신의 겉옷을 벗어 던지고 일어나 예수님께 달려갑니다. 그는 예수님께 청을 드릴 때 다시볼 수 있게 해주라고 청을 드립니다. 예전에는 볼 수 있었지만 지금은 볼 수 없다는 것을 자신이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예수님과 가까이 있기 위해서 예수님을 따라 길을 나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가거라.”라고 명하시지만 그는 예수님에게서 멀어지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길을 나섭니다. 마르코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바르티매오가 같이 걸어간 길은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이며, 수난의 길이고 죽음의 길입니다(마르 11,1-15,41 참조).

하느님의 시선으로, 예수님의 시선으로 좋음을 본다는 것은 자신이 보고 싶은 것만을 보는 것이 아닙니다. 죽음과 고통 안에서도 사랑과 용서의 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슬픔과 아픔의 상황 속에서도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총과 자비의 선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더러움 안에서도 아름다움을, 고통 안에서도 은총을, 나쁨 안에서도 좋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죽음의 도구입니다. 두렵고 꺼려지고 피하고 싶은 것이지만 그 십자가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사랑을 바라봅니다. 예수님의 희생과 은총과 구원과 부활을 바라봅니다.

바라보는 순례의 여정은 그렇게 감추어져 있고 숨겨진 하느님의 선물을 찾아내는 보물찾기와 같습니다. 우리가 처한 고통 속에서도 하느님의 시선과 마음으로 다시 제대로 본다면 그 보물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제대로 보고 있다고 자만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그래서 섣불리 판단하고 비판하면서 미워하고 심판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또한 꾸준히 예수님을 따르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그분의 시선으로, 그분의 마음으로 지금의 이 상황과 사람들을 바라보려 고민하고 노력했으면 합니다. 그럼 용서와 자비의 마음, 사랑과 연민의 마음으로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당장 그 순례를 떠나십시오. 그리고 나를, 가족을, 이웃을, 그리고 세상을 제대로 다시 볼 수 있었으면 합니다.

 

 

 

 

 

[영성의 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10) 만나기 위한 순례

 

얼마 전 대한민국에서 다양한 종교 간의 이해와 화합을 증진하기 위해 한국종교인평화회의(KCRP)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하는 이웃종교스테이라는 프로그램을 가톨릭목포성지에서 진행하였습니다. 7개 종단(천주교, 개신교, 불교, 유교, 원불교, 천도교, 민족종교연합회) 사람들 약 40명이 함께 천주교의 문화를 체험하고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천주교를 이해하고 편견의 시각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이 행사를 준비하면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가톨릭에 대해서 모르는 사람들에게 23일이라는 시간 동안 어떤 것들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무엇을 느끼게 해줘야 할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라면 쉽게 설명하고 편하게(?) 이야기할 수 있지만, 단어 하나, 행동 하나도 낯선 그들에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시작했습니다. ‘내가 사제로서, 하느님의 자녀로서, 예수님의 제자로서 살아가려 노력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은 언제였는가? 가톨릭 신앙을 가졌다는 것에 감사하고 다행이라고 느꼈던 일들은 무엇인가? 상처받아 좌절하고 포기하고 싶을 때 신앙인으로 무엇을 통해 위로받고 용기를 얻었는가?’라는 질문부터 시작해 보았습니다. 누군가를 대접하기 위해 음식을 준비하면서 내가 먹어보고 맛없는 음식을 내놓으면서 맛있게 먹으라고 얘기할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프로그램을 마무리 짓고 다시 되돌아보았습니다. 3일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과 함께 개인적인 관계를 맺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 3일이라는 시간 동안 그들은 어쩌면 저의 삶과 제가 살아가고 있는 행복한 세상에 잠시 머물렀다 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위로받았던 그 시간에, 내가 하느님을 느끼고 사랑받고 있음을 느꼈던 그 장소에, 부끄럽고 나약한 자신을 바라보는 거울과도 같은 그 무엇에 잠시 머물렀던 것입니다. 누군가와의 진정한 만남은 그의 이름을 알고 취향을 알아가며, 같은 공간에 앉아 공동의 관심사를 나누는 것만으로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진정한 만남은 어쩌면 각자가 살아가는 자신의 세상에서 떠나 상대의 세상에 초대되어 자신을 그곳에 잠시 머물게 하는 여정이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를 만나는 것은 의 환경에서 만을 끄집어내어 만나는 것이 아니라 너의 환경속으로 떠나는 순례입니다. ‘와의 만남 안에서는 가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는 일도, 사랑하는 사람도, 미워하고 증오하는 무엇도 함께 만나게 됩니다. 그래야만 그 만남은 과거에 머물러 있는 하나의 사건을 넘어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창조적인 사건으로 이루어집니다. “희망을 품고 살아가야만 하는 우리의 순례도 각자의 삶을 떠나 서로의 세상에 초대되어 머무는 진정한 만남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무엇을 만나야 하는가?

잘 쉬기 위해서, 잘 바라보기 위해서 떠나는 순례는 또 다른 세상을 만나기 위해 떠나는 순례이기도 합니다. 그 세상은 하느님께서 함께하는 세상입니다. 보이지 않고 감추어져 있지만, 자세히 보려고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그런 세상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만나는 여정입니다. 그 여정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가장 먼저 나 자신을 만나야만 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나 자신과 잘 만나고, 내가 가장 원하는 것을 알고 계십니까? 내가 기도하고, 내가 하느님께 청원하는 그 진짜 이유를 알고 계십니까? 수능시험을 앞둔 자식을 위해 한 어머니가 100일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어머니가 100일을 거르지 않고 열심히 기도한 이유가 뭘까요? 자식을 사랑하고 잘 되기를 바란다는 명목을 내세워 어머니 자신을 위해서, 자신의 지위와 체면 때문에, 내가 이루지 못한 꿈을 이루기 위해 기도하는 것은 아닌지 살펴봐야 합니다.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면서 우리는 자신을 위해 기도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우리는 먼저 때로는 나약하고 때로는 추잡하며 때로는 약삭빠른 자신과 만나야 합니다. 그 진정한 이유와 대면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니 언덕에서 자신과 만났습니다. “돌을 던지면 닿을 만한 곳에 혼자 가시어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원하시면 이 잔을 저에게서 거두어 주십시오.’”(루카 22,41-42) 자신의 부족하고 나약한 마음, 회피하고 도망치고 두려워하는 마음과 대면하셨습니다. 그렇게 자신과의 만남은 하느님과 만나는 여정의 첫걸음입니다.

나 자신의 이유와 만났다면 우리는 이제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이웃과 만나야 합니다. 내가 살아가고 있는 내 주변의 삶과 만나야 합니다. 내 삶에서 무엇을 만나고 바라보아야 할지는 성모님과 엘리사벳의 만남”(루카 1,39-45)이 우리는 이끌어 줍니다.

그 무렵에 마리아는 길을 떠나, 서둘러 유다 산악 지방에 있는 한 고을로 갔다. 그리고 즈카르야의 집에 들어가 엘리사벳에게 인사하였다. 엘리사벳이 마리아의 인사말을 들을 때 그의 태 안에서 아기가 뛰놀았다. 엘리사벳은 성령으로 가득 차 큰 소리로 외쳤다. “당신은 여인들 가운데에서 가장 복되시며 당신 태중의 아기도 복되십니다. 내 주님의 어머니께서 저에게 오시다니 어찌 된 일입니까? 보십시오, 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행복하십니다, 주님께서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리라고 믿으신 분!”

저는 엘리사벳의 인사말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80세가 넘은 엘리사벳이 20살도 되지 않은 마리아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높은 지위에 있던 대사제의 아내가 시골 출신의 가난한 소녀에게 최대의 예우를 갖춥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겉모습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그녀는 마리아의 뱃속에 있는 예수님, 다시 말해 하느님의 신비를 발견하고 바라봅니다. 그래서 여인 중에 가장 복되다라고 칭송하며 뱃속의 아기도 축복합니다. 내가 살아가는 삶의 주변과 만나는 것은 다름 아닌 하느님의 신비와 만나는 것입니다. 너무나 보잘것없는 사람에게서 하느님이 신비와 손길을 발견하고, 누가 보아도 피하고 싶은 상황에서 하느님께 주시려는 은총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피투성이의 죽음과 고통의 십자가 안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부활의 영광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찾고, 그 뜻이 어떻게 우리의 삶과 세상에서 실현되는지, 그래서 나는 그 삶 속에서 무엇을 바라보며 살아가야 할지 선택하고 행동하는 여정이 바로 진정한 만남의 여정입니다. 그 여정은 더 이상 고통과 인내의 여정이 아닙니다. 감사와 기쁨의 여정이 됩니다. ‘만남을 위한 순례는 잠시 나의 세상에서 떠나 하느님의 나라에 머무르는 순례입니다. 나의 삶이지만, 고통과 아픔이 있는 삶이지만 그 안에서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손길과 은총을 발견하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랑과 희망의 순례입니다.

 

 

 

 

 

 

[영성의 샘]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11) “모순(矛盾)”

 

우리의 삶을 들여다보면 모든 것이 모순(矛盾)’ 투성이 입니다. 우리 마음이 향하는 곳과 현실에서 행하는 우리의 행동은 언제나 다른 방향을 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모순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면 어쩌면 삶의 진리를 깨닫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삶도 모든 것이 모순입니다. 두 개의 양극단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죽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고, 첫째가 되려면 꼴찌가 되어야 하고, 얻으려면 내어놓고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의 여정은 언제나 갈림길입니다. 때로는 잘못된 선택을 알면서도 행하고, 죄를 짓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 길을 걸어갑니다. 또한 우리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아주 미약한 한 줄기의 빛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죽음의 고통 속에서도 작은 말 한마디에 위로를 느낍니다. 그렇게 모순의 삶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게 됩니다.

교회의 여정에서도 그런 모순의 삶과 발견이 이루어집니다. 어쩌면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은 모순이라는 삶을 통해서 새로움을 깨닫고, 새로운 여정을 시작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교회의 시작도 죽음이라는 절망 안에서 부활이라는 희망으로나아갑니다.

오순절이 되었을 때 그들(사도들)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불꽃 모양의 혀들이 나타나 갈라지면서 각 사람 위에 내려앉았다. 그러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성령께서 표현의 능력을 주시는 대로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 시작하였다.(사도 2,1-4)

사도들(사도 1,12-14 참조)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있었던 이유는 절망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셨고 부활한 예수님을 체험했지만, 예수님은 하늘로 떠나가셨습니다(사도 1,6-11 참조). 유다인들은 혈안이 되어 그들을 찾아 죽이려고 합니다. 무엇을 어디에서부터 해야 할지 그들은 생각하지도 못하고 실행할 엄두도 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그들에게 하신 나의 증인이 될 것이다”(사도 1,8 참조)라는 말씀을 까맣게 잊고서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을 잃었고, 두려움과 절망 속에 빠져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절망을 루카 복음사가는 침묵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령께서 이들에게 내리자 이들은 그 절망에서 용기와 희망을 찾습니다. 완전히 변화되고 새로워져 절망의 침묵희망의 선포로 바뀝니다. 이제 새로운 하느님의 백성, 새로운 그리스도 공동체가 탄생하게 됩니다.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공동체, 두려움과 죽음 앞에서도 당당히 사랑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을 선포하는 용기와 생명의 공동체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그렇게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성령을 받아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는 공동체, 교회를 이룹니다.

성령께서는 순례하는 교회의 삶 안에 항구히 현존하심으로써 희망의 빛으로 믿는 모든 이를 밝혀주십니다. 성령께서는 결코 꺼지지 않는 등불처럼 우리 삶을 지탱하고 활력을 주는 그 희망의 불이 타오르도록 지켜주십니다. 그리스도인의 희망은 속이지도 실망시키지도 않습니다. 그 무엇도 그 누구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으리라는 확신에 뿌리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5.37-39). 여기에서 우리는, 이 희망이 시련 가운데에서도 꺾이지 않는 이유를 봅니다. , 믿음에 토대를 두고 애덕으로 길러지는 희망은 우리가 삶에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프란치스코 교황 성하의 2025년 정기 희년 선포 칙서 3>

성령과 함께 살아가는 삶, 희망을 품고 살아가는 삶

우리는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품고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우리는 하느님의 성령을 매일 체험하며 성령과 함께 살아가고 있는가?’라는 질문과 같은 질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해서 성령을 받습니다. 그러면 성령은 일생에 한 번 받고 끝나는 것인가요? 아니면 매년 성령 강림 대축일에 성령의 은사를 통해 받는다고 생각하십니까? 특별한 시기나 장소에서, 특정한 행위와 전례에 참석해야만 성령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일을 시작하면서 바치는 기도오소서, 성령님! 저희 마음을 성령으로 가득 채우시어 저희 안에 사랑의 불이 타오르게 하소서. 주님의 성령을 보내소서. 저희가 새로워지리이다. 또한 온 누리가 새롭게 되리이다.”라고 시작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새로운 일을 시작하거나 일상적인 일을 시작할 때 언제나 성령을 청하는 기도를 합니다. 무슨 일을 하면서 언제나 잘 되고 성공하리라는 법은 없습니다. 새로운 일에 대한 낯섦, 자신에게 닥쳐올 어려움과 고난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실패와 좌절에 대한 걱정 때문에 선뜻 행하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합니다. 언제나 성령께서 나와 함께 해주시기를, 그리고 나의 능력과 더불어 성령께서 보호(보호자 성령, 파라클레토스)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그렇게 성령께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는 흘려들었던 누군가의 목소리에서 위로받기도 하고, 지루했던 신부님의 강론에서 삶의 해답을 찾기도 합니다. 드라마의 한 대사에 우리는 눈물 흘리고 같이 아파합니다. 그렇게 성령께서는 무심히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또다시 걸어갈 힘과 용기를 주십니다. 또한 성령께서는 몸에 밴 악습과 잊고 있던 사실을 깨우쳐 주십니다. 매일 우리의 일상에 찾아오시어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십니다. 매일 수 없이 긋는 성호경을 통해서, 때론 습관적으로 참례하는 미사 전례를 통해서, 의무감에서 읽어가는 성경 말씀을 통해서도 나를 발견하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일깨워 주십니다.

절망의 순간에도 우리를 다시 길 위에 서게 하고, 다시 걷게 하는 희망을 가지기 위해서는 언제나 우리와 함께 있는 성령을 느끼고 바라보고, 그 은총과 사랑을 믿어야 합니다. 모순이 가득한 삶에서 옳은 길을 갈 수 있는 선택도, 반대 방향에서 돌아서는 용기도, 언제나 성령께서 우리와 함께 그 길을 걸어가는 순간임을 잊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영성의 샘] 마침과 시작을 함께... 기다림의 희망을

 

12월이 되면 언제나 마침과 시작을 동시에 체험합니다. 2025년 한 해를 정리하며 못 만났던 사람들, 잊고 있었던 것들을 다시 한번 기억하고 정리하는 시기입니다. 또한 교회에서는 전례력으로 대림시기를 시작하며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고, 예수님의 성탄을 기다리며 새로운 것들을 계획하고 다짐하는 시기이기도 합니다. 사제로서 먼저 시작을 바라봅니다. 무엇을 어떻게 할지, 어떤 일에 열정을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를 계획하여 봅니다. 어떤 일에는 더욱 집중하고, 어떤 일은 조금 내려놓자 다짐도 합니다. 그렇게 할 일할 수 있는 일을 바라봅니다.

하지만 저는 자꾸 무엇을 하기만 원하는 것 같습니다. 일하기를 원하고, 놀기를 원하며, 사랑하기를 원하고, 행복해지기를 원합니다. 그래서인지 자신이 하기 원하는 만큼 누군가에게 그렇게 하기를 요구합니다. 그래서 만약 그 일이 제대로 행해지지 않으면 실망하고 그를 괴롭힙니다. 나도 이만큼 하니까 너도 이 정도는 해야 한다며 다그칩니다. 무엇을 하기위해서 어쩌면 무엇을 했는지를 먼저 바라보았으면 합니다. 그러면 내가 하지 못했던것들에 대해서 더 자세히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다그치지 않고 내가 먼저 할 수 있지 않을까요!

앞으로 다가올 일에 대해서 우리는 알지 못합니다. 기다리며 준비할 뿐입니다. 우리는 먼저 내가 하지 못했던 일을 바라보아야만 잘 준비하고 잘 기다릴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시작을 준비하면서 내가 살아왔던 지난 시간을 정리하여 봅니다. 희망을 바라보고 걸어왔던 우리의 순례의 여정을 다시 되돌아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이 사랑했는지, 그 사랑을 얼마나 많이 표현하고 지켜왔는지, 또한 다른 이의 사랑을 욕심 없이 얼마나 잘 받아들였는지, 먼저 바라보는 것이 더 잘 할 수 있는 힘을 갖게 합니다. 아직 오지 않는 시간을 위해, 아직 만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그리고 더 많이 사랑하기 위해 우리는 잘 준비하고 잘 기다려야 합니다. 지난 역경의 시간 속에서 나의 일과 나의 모습을 바라보고 얼마나 미안하고 감사한 일들이 많은지 느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잘 준비할 수 있고, 함께 그 시간을 이겨나갈 수 있습니다. 그런 기다림의 시간을 보냈으면 합니다.

기다림의 희망

우리는 기다림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매년 찾아오는 이 기다림의 시간을 더욱 의미 있게 만들며 올해의 순례를 마무리 짓고 싶습니다. 그 기다림의 시간이 좀 더 행복했으면 합니다. 하지만 기다림의 시간이 언제나 행복과 설렘으로 가득하지 않습니다. 같은 기다림의 시간이라도 무엇을 기다리느냐에 따라 그 기다림의 내용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소풍 전날 잠을 이루지 못하는 아이의 기다림과 시험 전날 잠을 못 자고 공부하는 아이의 기다림은 다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과 불편하고 어려운 사람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은 다릅니다. 무엇을, 누구를, 어떤 상황을 기다리고 있느냐에 따라 기다리는 시간이 행복하고, 웃음이 배어 나오고, 기대되는 순간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같은 예수님이라도 어떤 예수님을 기다리느냐에 따라 그 기다림의 시간은 달라집니다.

요셉도 갈릴래아 지방 나자렛 고을을 떠나 유다 지방, 베들레헴이라고 불리는 다윗 고을로 올라갔다. 그는 다윗 집안의 자손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와 약혼한 마리아와 함께 호적 등록을 하러 갔는데, 마리아는 임신 중이었다. 그들이 거기에 머무르는 동안 해산날이 되어, 첫아들을 낳았다. 그들은 아기를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뉘었다. 여관에는 그들이 들어갈 자리가 없었던 것이다.(루카 2,4-7)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저희가 스승님께 청하는 대로 저희에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바라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스승님께서 영광을 받으실 때에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하고 대답하였다.(마르 10,35-38)

같은 예수님이지만 완전히 다른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베들레헴에서 가장 힘없는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태어나신 예수님이십니다. 좋은 곳에서, 궁전 같은 화려하고 멋들어진 곳이 아닌 지저분하고 냄새나는 마구간에서, 말구유 위에 누운 예수님이십니다. 가장 가난하고 비천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신 예수님이십니다. 하지만 어떤 이는 전능하고 영광 가득한 모습의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내가 청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줘야만 하는 예수님을 바랍니다. 더 많이 챙기고, 더 편안한 것을 바라는 희망 안에서 예수님을 바라봅니다. 여러분은 어떤 기다림을 하고 있습니까? 후자의 모습으로 예수님을 기다린다면 지금의 기다림은 허황된 꿈이며, 우리의 여정은 절대 행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가장 가난하게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은 연약한 아기한테서 하느님의 힘을, 보잘것없는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를 보기 위해서입니다.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병든 사람한테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고, 미워하는 사람과 죄짓는 사람에게서 하느님을 찾는 마음을 읽는 날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다림의 시간에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경배하고, 만나는 모든 사람을 하느님을 대하듯 하는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자신의 것을 나누어 주고, 잘남을 못남으로 감싸고, 미운 이들을 사랑으로 대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변화가 일어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 좋은 일을 하겠다, 사랑하겠다, 나누겠다, 마음만 먹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할 수 있는 변화가 우리에게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구유에 누운 힘없는 아기를 보듬어 안을 때, 우리에게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그 기다림은 매번 설렘과 행복으로 가득할 것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시간, 우리의 기다림은 어떤 기다림일까요? 기쁨과 행복의 기다림인가요? 아니면 고통과 초조함의 기다림인가요? 그것도 아니면 매년 다가오는 성탄이기에 너무 익숙해져 버린, 그래서 아무 느낌 없는 기다림인가요? 가난한 구유에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나요? 아니면 화려하고 아름답게 꾸며진 크리스마스의 화려함 속에 오신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나요? 어떤 예수님을 기다리고 있는지 잘 바라보아야만 기다림의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알 수 있습니다. 저는 오늘도 가난하게 오신, 나의 가장 가난한 마음에 오시는 예수님을 기다려 봅니다. 그리고 주위의 가장 가난한 이들을 안아 주려 합니다. 그 사람 안에서 하느님을 보기 위해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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