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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교회의 가르침] (52) 베네딕토 16세 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 (상) 말씀은 교회를 위한 생명의 양식이며 지금도 우리 가운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23|조회수39 목록 댓글 0

[현대교회의 가르침] (52) 베네딕토 16세 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

말씀은 교회를 위한 생명의 양식이며 지금도 우리 가운데 살아있는, 세상에 선포해야할 사명이다

1. 역사적 배경과 전체적 구조

 

주님의 말씀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주제로 2008105일부터 26일까지 바티칸에서 열린 제12차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정기 총회 후속 교황 권고로서 주석학자들의 수호 성인 성 예로니모 사제 학자 기념일인 2010930일자로 발표되었다.

2차 바티칸 공의회를 전후하여 교회 안에서는 학문적으로나 신자들의 삶 안에서나 성경에 대한 관심이 크게 일어났다. 그러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막 50주년을 지내고 있는 지금의 시점에서라면, 공의회의 가르침을 기억하고 실천하려는 노력에 머물지 않고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돌이켜 보며 다시 방향을 잡아가는 것이 필요한 때에 이르렀다고 할 것이다. 이를 위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 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Verbum Domini)이라고 볼 수 있겠다.

서론 3항에서 말하고 있듯이, 이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내지 이 문헌의 위치는 두 방향에서 접근할 수 있다. 첫째로, 2005년에 열린 제11차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의 주제가 교회 생활과 사명의 원천이며 정점인 성찬례였고 그 후속 문서가 사랑의 성사였다는 점을 기억할 때, 근래에 있었던 두 번의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가 교회의 삶과 사명의 두 기둥인 하느님 말씀과 성체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가 성경을 풀어주실 때 그리고 빵을 쪼갤 때에 예수님을 알아 뵈었다는 복음 본문이 말해 주듯이(루카 24 참조), 말씀과 성체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방식들이며 순례하는 교회를 위한 생명의 양식이다.

주님의 말씀안에서도 제2부에서 말씀과 성찬의 관계에 대해, 그리고 말씀의 성사적 성격에 대해 빼어나게 설명하는 것을 볼 수 있는데(54-56항 참조), 말씀과 성찬을? 또는 더 일반적으로, 성사를? 대비시키는 것이 아니라 육화의 신비라는 하나의 맥락 안에서 그 두 가지를 함께 바라보고 있다는 점이 눈에 띈다. 전통적으로 개신교에 비하여 가톨릭 교회에서는 성사가 더 중시되고 말씀은 소홀히 여겨졌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데, 계시 헌장(하느님의 말씀)에서도 이미 분명하게 교회는 언제나 성경들을 주님의 몸처럼 공경하여 왔다. 왜냐하면 교회는 특히 거룩한 전례를 거행하면서 그리스도의 몸의 식탁에서 뿐만 아니라 하느님 말씀의 식탁에서도 끊임없이 생명의 빵을 취하고 신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21)라고 말하고 있음은 주목할 만하다. 이것이 공의회의 새로운 가르침이 아니라 교회의 실천 안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는 것임을 부각시키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둘째로, 주님의 말씀은 계시 헌장 이후의 한 세대를 정리하면서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 있다. 19세기를 거치면서 성경에 대한 비판적인 연구 특히 역사 비평적인 연구가 발전하게 되고 이를 교회가 수용해가는 과정에서 섭리하시는 하느님, 성령의 영감과 같은 문헌들이 나오게 되고 계시 헌장이 그 시대의 마침표를 찍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전의 문헌들에서 주로 문제가 된 것이 역사 비평적인 연구 방법에 대한 수용이었다면, 계시 헌장에서 그 수용은 이미 완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제 계시 헌장 이후의 발전에서 나타나게 되는 여정을 돌아보고 문제점들을 짚어보며? 분명 문제점들은 없지 않았다? 교회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것이 주님의 말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93년에 교황청 성서위원회에서 발표한 교회 안의 성서 해석은 내용적으로 볼 때 주님의 말씀을 향해 가는 중간 단계였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의 시기에 성서학계에서는 역사 비평만이 아니라 여러 새로운 방법과 접근들을 발전시켰고, 이에 따라 성서위원회에서도 이 문헌에서 여러 가지 접근들 등에 대하여 서술하고 평가한 다음 해석학적인 문제들을 다루고, 가톨릭 해석의 특징으로서 성서 전통 안의 해석교회 전통 안의 해석을 언급하고 있다. 전통 안의 해석을 강조한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의 큰 특징이기도 하고 이 점 외에도 이 문헌의 내용은 주님의 말씀과 상당 부분 겹쳐진다. 차이점으로 말하자면, 두 문헌에서 각 주제들에 부여하는 비중이 서로 다르고 전체적으로도 주님의 말씀은 이와 같은 개별적인 내용들을 한처음에 아버지와 함께 계셨던 분, 말씀이신 그리스도라는 큰 틀 안에서 다루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다음 단락 참조). 이는 공의회 이후에 계시의 삼위일체적이고 구원사적인 지평”(3)에 대한 인식이 커진 데에 기인한다.

이제 문헌의 전반적인 성격을 알아보기 위해서 그 짜임을 우선 전체적으로 훑어본다면, 문헌은 3부로 나뉘는데 그 제1부는 하느님의 말씀(Verbum Dei), 2부는 교회 안의 말씀(Verbum in Ecclesia), 3부는 세상을 위한 말씀(Verbum mundo)이다. 여기에서 이미 하느님의 계시에 관한 교의헌장인 계시 헌장과는 주제의 범위가 다르다는 것이 드러난다.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의 주제에 따라, 이 문헌이 교회의 삶과 사명 안에서하느님의 말씀을 바라보고자 했다는 것으로 이 차이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문헌은 사목적이고, 초점은 교회에 맞춰져 있다. 문헌의 제2부와 제3부에서는 교회가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태어나고 성장하고 살아갈 뿐만 아니라 또한 세상에게 그 말씀을 선포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강조되고, 이에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들이 상세하게 열거되는 것을 볼 수 있다.

다른 한편으로, 3부로 나뉜 주님의 말씀전체는 요한 복음서 서문을 기본 틀로 하고 있다(5). 하느님과 함께 계셨던, 하느님이신 말씀이 사람이 되시는 것이 제1부의 내용이라면 제2부는 그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이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교회를 이루어 살아가는 것, 말씀이 우리 가운데 머무시는 것을 말하고, 3부에서는 아무도 본 적이 없는 하느님을 하느님의 외아드님께서 세상에 보여 주셨다는 것, 곧 세상을 위하여 그 말씀이 지니는 의미를 말하고 있다.

이렇게 교회와 또 세상과의 연관 안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바라보려고 하는 것은, 계시 헌장 이후의 상황을 반영한다. 지난 40여 년 동안, 한편으로는 교회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어렵게 수용했던 성경의 비판적 연구가 고도로 발전을 계속했고 정교한 기술을 발달시켰다. 다른 한편으로는 가톨릭 교회 안에서 성경에 대한 관심이 공의회 이전보다도 더 크게 늘어났고, 신자들에게 성경이 보급된 것은 물론이고 삶과 신앙 안에서 말씀이 차지하는 자리가 커졌다.

그런데 문제는, 그 둘 사이의 거리가 점점 멀어졌다는 점이다. 때로 성경을 연구하는 사람들은 엠마오로 가는 길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것처럼 성경을 열어주는 것이 아니라(루카 24,32 참조) 성경을 닫아버리는 것으로 보이기까지 한다. 이러한 성경 연구는 때로는 전통적인 성서 이해를 잘못된 것이라고 선언해 버리고, 저자가 말하려고 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고 주장하고, 그래서 교회 안에서 성경을 읽어오고 또 지금도 읽고 있는 방식과 성서학자들이 성경을 읽는 방식 사이에 격차가 생기게 된 것이다. 이렇게 성경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신자들과 거리가 멀어질 때, 신자들의 성경 독서는 기초가 없어질 위험이 있다. 각자 나름대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면서, 기준점을 잃어버릴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은 이러한 거리를 극복하려고 하고, 하느님의 말씀이 지금도 교회 공동체 안에 살아 있는”(히브 4,12) 말씀임을 확인하려 한다.

 

 

 

 

 

[현대교회의 가르침] (53) 베네딕토 16세 교황 권고 주님의 말씀()

말씀은 이 순간에도 우리와 함께, ‘성령의 도움으로 성경 해석해야

2. 내용

 

이번 호에서는 주님의 말씀각 부분의 내용을 간략하게 살펴 보기로 한다.

1. 하느님의 말씀

주님의 말씀1부인 하느님의 말씀”(Verbum Dei)에는 특별히 계시 헌장(Dei verbum)과 비교할 점이 많다. 1부는 다시 말씀하시는 하느님,” “말씀하시는 하느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 그리고 교회 안의 성경 해석학의 세 부분으로 나뉘는데, 가장 먼저 살펴볼 것은 여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의 계시 이해는, 말하자면 요한 복음 서문처럼 단도직입적이고 대단히 그리스도 중심적이다. 계시 헌장은 4항에서 히브 1,1을 인용하면서 과거에 예언자들을 통하여 말씀하시던 하느님께서 마지막 때에 하느님께서 아드님을 통하여 말씀하셨다는 점을 강조하고 그런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계시의 충만”(2)이라고 했었지만, 주님의 말씀에서는 요한 복음서 서문에서 말하는 태초부터 계신 그 말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육화 이전에도 하느님께서 창조에서부터 인간에게 말씀하셨고 구약의 역사를 통해서도 하느님의 말씀이 인간에게 들려온다는 점은 계시 헌장에서나 주님의 말씀에서나 마찬가지라 하여도, 그 말씀이 바로 한처음에 계셨고 하느님과 함께 계셨으며 하느님의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강조하는 것은 주님의 말씀의 큰 특징이다. 여기에서는 창조 안에서, 그리고 구약의 역사 안에서 인간을 향하신 그 하느님의 말씀이 바로 마지막 때에 사람이 되신 그 말씀임을 강조한다.

이렇게 해서 사람이 되신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성경의 형성과 그 해석까지를 이어주는 것이 교회 안에 계시는 성령과 성전이다. 주님의 말씀1부에서 성경 해석과 관련하여 가장 눈에 띄는 점은 교회의 살아있는 전통에 대한 강조이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의 이해에 따르면, 성경 해석을 위하여 전통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성경이 성령의 작용으로 바로 그 전통 안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가톨릭 성경 해석의 고유한 특징이 바로 여기에서 정당성을 얻기 때문이다.

주님의 말씀에서는, 성경이 교회의 살아있는 전통(성전) 안에서 형성되었고 그 전통 안에서 해석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고 사도들과 함께 생활하시던 때부터 성전은 생겨나고 있었고 그 전승 안에서 성경이 기록되었으니, 성전은 부수적인 것으로 간주될 수 없고 오히려 성경이 형성된 모태이다. 그리고 성경이 이렇게 신앙 공동체에서부터 생겨났기에 성경 해석의 본래적 자리는 교회의 삶”(29)이다. 성경은 하느님 백성에 의하여, 하느님 백성을 위하여, 성령의 영감으로기록되었고(30), 따라서 성 예로니모가 말하듯이 성경해석에서 교회성은 외부로부터 부과되는 목소리가 아니다. “그 책은 바로 순례하는 하느님 백성의 목소리이며, 오직 이 백성의 신앙 안에서 우리는, 말하자면 성경을 이해하기 위한 주파수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30).

2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에 나타나고 있는 문제점들을 풀어가기 위한 하나의 열쇠를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고 본다. 주님의 말씀에서는 현대의 역사 비평적 방법론이 초래할 수 있는 위험들로 성경 연구에서 주석학적 차원과 신학적 차원이 분리되어 성경이 단지 과거의 본문이되고 만다는 점과 세속화된 해석학이 신앙의 해석을 대체하여 모든 것을 인간적 요소로 환원시키고 만다는 점 등을 지적한다(34). 그런데 그 극복은 전혀 새로운 방법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고 교회 안에서 그 성경이 해석되어 온 전통을 되살리는 것으로 추구된다.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이와 같이 교회 안에서 이루어진 성경의 형성 과정과 그 해석 방법 사이의 깊은 연관에 대해서 계시 헌장 12항에서는 이미 성령을 통해 쓰인 성경은 성령의 도우심으로 해석해야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고 주님의 말씀에서는 여기에 제시된 원칙들을 좀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성경을 성경으로서 즉 교회에 주어진 하느님의 말씀으로서 읽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태도들이다.

2. 교회 안의 말씀

2부와 제3부에 대해서는, 지면상 어떤 내용을 다루고 있는지 언급만 할 수밖에 없겠다.

2교회 안의 말씀에서는 교회가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받아들이며 그 말씀을 통해 주님께서 늘 교회 안에 현존하신다는 것을 말한 다음 구체적으로 전례와 사목, 교리 교육, 그리고 신자들의 생활에서 하느님 말씀이 어떤 위치를 차지하는지를 설명한다.

세계 주교 대의원 회의 폐막 메시지에서는 교회를 말씀의 집이라고 표현했었고(메시지 36), 주님의 말씀에서도 그 표상을 사용한다. 여기에서도 의미가 깊은 것은 요한 복음 서문과의 연결이다. 주님의 말씀50항에서는, “교회의 참 얼굴은 사람이 되심으로써 우리 사이에 천막을 치러 오신(요한 1,14 참조) 하느님 말씀에 대한 수용으로 규정되는 실재라고 정의하고 있다.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던 그 말씀을 받아들인 이들이(요한 1,12 참조) 교회를 이루고, 말씀은 교회 안에 세상 끝 날까지 현존하신다. 교회는 무엇보다 앞서 그 말씀을 들어야 한다(51). 교회가 해야 하는 모든 일들 가운데 말씀을 듣는 것이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그 말씀을 듣지 않고서는 교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는 것인지를 알 수도 없기 때문이다. 교회는 착실한 제자처럼 스승이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을 선포하고 또 살아야 한다.

말씀께서 교회 안에 현존하시는 특전적 장소는 전례이다. 전례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과거의 문헌으로서가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 살아있는 말씀으로 선포된다. 이러한 이해는 전례 헌장 7항에서 처음 나타났었는데, 주님의 말씀52항에서는 전례헌장의 그 본문을 인용하면서 그리스도께서 당신 말씀 안에 현존하시어, 교회에서 성경을 읽을 때에 당신 친히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말한다.

3. 세상을 위한 말씀

한편 제3세상을 위한 말씀은 하느님의 말씀이 세상에 대하여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리고 말씀과 세상의 관계에서 교회의 사명이 무엇인지를 말한다. 계속해서 요한 복음 서문을 따라간다면, 요한 1,18에서는 아무도 하느님을 본 일이 없는데 외아드님이신 그분께서 이 세상에게 아버지를 보여 주셨다고 말한다(90).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계시자가 되시고,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말씀이 이 세상에 들어와 사람들의 삶을 뒤흔들어 놓기도 하고, 사람들을 위로하고 생명을 주기도 하는 것이다.

그런데, 2부에서 보았던 것과 같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을 받아들인 교회는(말씀의 수신자) 말씀의 선포자로서 그리스도의 사명에 참여하게 된다(91). 주님의 말씀에서는 그러한 교회의 사명을 크게 두 가지로 이야기한다. 그 첫째는 말씀을 세상에 선포하는 것이고 둘째는 세상에 투신하는 것이다.

종합적으로 보면 주님의 말씀의 중심 주제는 말씀만이 아니라 말씀교회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주님의 말씀은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 여러 방향에서 커져가는 성경에 대한 관심들을 그 말씀의 수신자이며 선포자인 교회를 중심 축으로 하여 한데 모으고 있기 때문이다. 이 교황 권고는 교회는 말씀으로부터 태어나고 그 말씀으로 살아간다”(3)는 것을,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면서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와 그 지체들의 사명을 일깨우고 있다.

 

 

 

 

[현대교회의 가르침] (54)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신앙의 빛()

신앙은하느님 부르심에 대한 응답 / 그리스도 삶에 일치하는 것

1. 회칙에 대한 안내

 

신앙의 빛(Lumen Fidei)은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첫 회칙으로, 2차 바티칸공의회 개막 50주년에 선포된 신앙의 해를 맞아 신앙의 의미를 밝혀주기 위해 선포되었습니다. 이 회칙은 전임 교황이신 베네딕토 16세께서 그 이전에 쓰신 사랑에 관한 회칙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Deus caritas est)와 희망에 관한 회칙 희망으로 구원된 우리(Spes Salvi)와 함께 신망애의 향주삼덕에 대한 회칙입니다. 이 회칙의 7항이 밝히고 있듯이 베네딕토 16세께서 거의 완성하신 회칙의 초안을 프란치스코 교황님께서 조금 더 다듬고 내용을 덧붙이셨으므로, 회칙 신앙의 빛은 두 분의 교황님에 의해 완성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회칙은 전체가 60항으로, 서론과 네 개의 장으로 된 본론, 그리고 결론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 회칙의 서론 (1~7)

서론(1~7)은 회칙의 목적과 배경을 설명하기 위하여 왜 빛이 중요한가, 신앙도 빛인가, 왜 신앙의 빛이 중요한가, 왜 신앙의 빛을 강조해야 하는가, 그리고 왜 신앙의 빛을 되찾아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다룹니다.

먼저, 빛이 중요한 이유는 빛이 있어야만 우리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빛이 중요한 것만큼 어떤 빛으로 볼 것인가 하는 문제도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합니다. 빛의 종류와 밝기가 다를 때 사물이 달라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신앙이 빛이 되는 이유는 태양의 가시광선 덕분에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처럼 신앙도 우리를 비추어 인생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앙은 태양 광선이 비추어 주지 못하는 인간의 내면과 죽음, 모든 초자연적 현실을 비추어준다는 의미에서 태양 광선보다 훨씬 더 뛰어난 빛입니다. 신앙은 인간 실존의 전 현실을 볼 수 있게 해주는 참 빛이며, 오직 신앙만이 삶을 영원의 관점에서볼 수 있게 해줍니다. 이 회칙이 신앙의 빛을 강조하는 이유는 근대주의의 영향을 받은 현대사회가 신앙의 빛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여겨왔기 때문입니다. 인간 존재의 근원을 사고하는 인간의 이성에 두는 근대주의는 이성을 지배하거나 제한하는 어떤 권위도 배제하고자 합니다. 이런 근대주의의 영향으로 우리 삶의 많은 영역들이 신앙과 분리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신앙은 인간의 이성과는 거리가 먼 영역, 곧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영역에 속하는 것으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인류는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인간 이성이 비추는 빛의 한계를 깊이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신앙의 빛을 거부했던 인류는 이제 빛을 상실한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이 때문에 인류의 회복을 위해서 신앙의 빛을 되찾는 일이 시급해졌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 신앙의 빛을 되찾을 수 있는가 하는 중요한 물음이 남게 됩니다. 이 물음은 회칙의 본론에서 다루어지게 됩니다.

회칙의 서론은 일단 문제 제기를 한 후 신앙의 빛의 특성에 대해 요약 정리해주고 있습니다. 신앙의 빛은 인간 실존의 모든 측면을 비출 수 있는 유일한 빛이며, 인간에게서 나오는 빛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빛입니다. 신앙은 또한 우리 삶의 여정을 밝히고 안내하는 빛이며, 예수님께 대한 기억에서 나오므로 과거에서 오는 빛이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죽음 너머로 이끄시므로 미래에서 오는 빛이기도 합니다. 신앙의 빛은 우리의 지평을 열어주고, 고립된 자아를 넘어 드넓은 친교로 나아가도록 초대하는 빛입니다.

3. 회칙의 본론

회칙의 본론에서는 서론에서 제기된 신앙의 빛을 어떻게 되찾을 수 있는가 라는 물음을 다룹니다. 이를 위하여 본론의 1(8~22)은 신앙이 무엇인가, 2(23~36)은 신앙이 어떻게 진리 인식을 하게 하는가, 3(37~49)은 신앙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는가, 4(50~57)은 신앙이 인간 실존의 구체적 영역에 어떻게 빛을 비추는가 하는 주제를 다루게 됩니다. 회칙 신앙의 빛에 대한 설명이 두 차례에 걸쳐서 연재될 것이기 때문에 본고에서는 본론 1장을 설명하겠습니다.

3.1. 본론 제1(8~22)

신앙의 빛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앙이 무엇인지가 정확히 규명될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서 본론 1장은 신앙이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합니다.

먼저, 신앙이 개인의 주관적인 신념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히기 위하여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여정을 살펴보고 그들의 여정에서 드러나는 신앙의 특성을 제시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스라엘 백성의 신앙 여정이 보여주듯이 신앙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입니다. 인간이 스스로 신앙에 이르게 되는 것이 아니라 먼저 부르심이 있고, 그것에 응답하는 것이 신앙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신앙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에는 땅과 후손에 대한 약속,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인도하겠다는 약속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신앙 여정과 이스라엘 백성의 여정이 보여주는 것처럼 하느님의 약속은 번번이 위기에 처하는 듯이 보였지만 그들은 당신의 약속에 충실하신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의 약속을 굳건히 신뢰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은 약속의 아들인 이사악을 바치라는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할 만큼 하느님을 굳건하게 신뢰하였습니다.

이처럼 신앙은 현재의 실존뿐만 아니라 오지 않은 미래까지도 신앙의 빛으로 바라보게 해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체험한 놀라운 구원의 역사를 다음 세대들에게 전해주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어제의 구원 역사는 거듭 기억되었고, 이 기억은 다시 현재와 미래에 빛을 던져주어 그것을 구원 역사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우상숭배와 신앙이 다른 점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우상숭배는 즉각적이고 손에 잡히는 결과를 기대하는 자기중심적인 행위이며, 자기 자신을 현실의 중심에 두는 것입니다. 이와 대조적으로 신앙은 하느님을 우리 삶과 시간의 중심으로 삼기 위하여 모든 우상을 끊어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은 언제나 우리를 받아 주시고 용서하시며, 우리의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 주시면서 비뚤어진 우리 역사의 굴곡을 바로잡아 주실 수 있는 하느님의 자비로운 사랑에 우리 자신을 맡기는것입니다(13).

신앙이 개인적인 신념이 아니라는 점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의 중개자였던 모세의 존재를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아무도 직접 하느님을 뵙지는 못하기에 신앙은 중개자를 필요로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개인의 신앙 행위는 공동체 안에 자리잡아야 하고, 공동체는 신앙 안에서 서로 일치합니다(14항 참조).

구약의 백성을 통하여 드러났던 하느님의 사랑과 그 사랑에 담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 절정에 이르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사랑에 대한 결정적이고 완전한 계시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참여하는 것, 그분의 눈으로 보고 그분의 귀로 들으며 그분의 삶에 일치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자신과 다른 형제, 자매들을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로서 바라보며, 자아라는 울타리를 뛰어넘어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의 여정에 참여합니다(22항 참조).

 

 

 

[현대교회의 가르침] (55) 프란치스코 교황 회칙 신앙의 빛()

고통 속에 존재하는 주님 보며 절망에서 희망 찾을 수 있어야

3.2. 본론 제2(23~36)

 

2장은 신앙이 어떻게 빛이 될 수 있는가, 신앙이 어떻게 진리를 인식하게 하는가 하는 점을 다룹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현존과 활동에 대한 앎에 바탕을 둔 것이기 때문에 본질적으로 진리와 결합되어 있습니다. 신앙은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우리가 받아들인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를 변모시켜 실재를 새로운 눈으로 볼 수 있게 해줍니다. 그리하여 신앙인은 신앙을 통하여 진리를 볼 수 있는 새로운 눈을 얻게 됩니다.(26항 참조)

이처럼 신앙이 본연적으로 진리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회칙은, 제작 가능하고 측량 가능한 것만을 진리로 여기는 현대의 과학주의의 협소한 진리관과 보편적인 진리에 회의적인 입장을 보이는 상대주의적 경향 앞에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진리를 이해하는 바른 길을 제시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첫째, 신앙은 역사 자체의 의미가 무엇인지, 인류의 삶과 역사는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해줍니다. 둘째, 신앙의 인식 수단은 들음과 봄으로써,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을 바라봄으로써 신앙의 진리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지식은 말씀이신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삶을 관상하며, 그분의 현존을 인식함으로 점차로 깊어집니다.(30항 참조) 셋째, 그리스도교 신앙은 하느님의 완전한 사랑에 대한 진리를 선포하며, 그 사랑의 힘을 우리에게 열어주기 때문에 인간 체험의 근원까지 파고듭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빛이 가닿지 못하는 인간의 체험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신앙은 인간적인 사랑의 궁극적인 의미를 밝혀줍니다. 신앙의 빛으로 인간적인 사랑을 바라보게 되면 인간적인 관계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지속될 수 있습니다. 신앙은 또한 세상 만물 안에서 하느님의 선성을 바라볼 수 있게 해줍니다. 신앙은 보이지 않는 세계뿐만 아니라 물질세계까지 두루 비추기 때문에 이성의 지평을 넓혀줌으로써 과학의 탐구에 올바른 방향을 제시할 수 있습니다.(34항 참조) 또한 신앙의 빛은 그리스도교가 종교간의 대화에 고유한 몫을 하게 합니다. 신앙의 빛은 참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게 하며, 진리를 추구하는 비신자들의 마음을 하느님께로 인도합니다.

신앙은 인간의 이성을 비추어 하느님께 대한 더 깊은 이해에 이르게 하고 신학이 성장하게 합니다. 그리스도교 신학은 신앙의 빛의 인도를 받는 것이기에 신앙을 위해 봉사해야하며, 교도권과의 일치 안에서 이루어져야 합니다.

3.3. 본론 제3(37~49)

신앙의 빛이 인간 실존의 전 영역을 비추어 그 참된 의미가 드러나게 한다면 이 빛이 모든 시대를 통하여 전해져야 한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신앙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친교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근원적으로 공동체적이며, 교회적인 친교를 지향하는 것이므로 모든 세대를 통하여 나누어져야 하는 선물입니다. 그렇다면 이 선물을 어떻게 전달할 수 있을까요? 신앙은 교회의 가르침과 생활과 예배를 통하여 전달됩니다.

먼저, 교회는 신앙을 전달하는 탁월한 수단으로 성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회칙은 신앙 전수에 있어서 특히 세례성사와 견진성사, 그리고 성체성사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자세히 설명합니다. 그리고 성사 거행의 중요한 요소인 신앙 고백과 관련하여 다음 사실을 강조합니다.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은 자신이 고백하는 진리에 참여합니다. 우리가 변화되지 않는다면, 우리를 감싸 안고 우리 존재를 확장시키는 사랑의 역사의 일부가 되지 않는다면, 그리고 신경을 암송하는 궁극적인 주체인 교회라는 더 큰 친교에 속하지 않는다면, 진실하게 신경의 말마디를 암송할 수 없습니다.”(45)

회칙은 교회의 기억을 전달하는 중요한 요소인 주님의 기도와 십계명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십계명은 일련의 금지 명령들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를 입고, 그 자비를 전해 주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이기적이고 자기 폐쇄적인 의 사막에서 벗어나 하느님과의 대화 안으로 들어가는 데 필요한 구체적인 지침들입니다.”(46) 신앙의 이런 공동체성은 자아라는 폐쇄된 공간에 매몰되어 인류 공동체의 운명이나 미래에는 관심을 가질 줄 모르는 맹목적 이기주의의 결과물인 현대의 많은 문제들을 극복하게 하는 빛이 될 수 있습니다.

신앙의 전달에 있어서 강조되어야 할 점은 신앙의 일치성입니다. 교회의 사도적 계승과 교도권은 신앙의 일치성을 보존하고 신앙이 올바르게 전달될 수 있도록 봉사합니다.

3.4. 본론 제4(50~57)

4장은 신앙이 인간 실존의 구체적인 영역에 어떻게 빛을 비추어 주는지에 대해 고찰합니다. 신앙의 빛은 정의와 법과 평화에 구체적으로 봉사합니다. 인간관계의 부요함을 증진시키고, 사람들 간의 일치가 가능하게 함으로써 신앙은 인간관계가 공동선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이끕니다.

신앙의 빛은 교회 내부만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건설하는 데 이바지하게 함으로써 인류가 희망을 가지고 미래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게 합니다.(51) 혼인과 자녀출산, 진정한 형제애, 인간의 존엄성에 대한 이해, 자연에 대한 존중과 보존 의지, 공정한 통치 형태를 찾아가는 일, 그리고 인간간의 참된 용서가 가능해지는 것, 이 모든 것은 신앙 안에서만 그 참된 근거와 힘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신앙의 약화는 단지 교회의 약화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를 지탱하는 사회의 모든 근간의 약화를 의미하며, 그렇게 될 경우 인류의 삶은 위태롭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인간의 약함과 고통, 죽음이라는 사건은 신앙 없이는 그 의미를 찾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고통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지만 고통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고통이 결코 우리를 저버리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손에 자신을 맡겨 드리는 사랑의 행위가 될 수 있으며, 그리하여 고통이 신앙과 사랑 안에서 성장하는 순간이 될 수 있음을 압니다.”(56)

고통은 여전히 우리에게 설명할 수 없는 신비로 남지만, 그리스도인들은 고통 가운데서, 그리고 세상의 고통을 바라보면서 고통 가운데 현존하시는 하느님, 한 줄기 빛이 되어 고통이라는 어둠을 밝히고자 그 어둠 속으로 뛰어드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 곳곳에 절망의 그림자가 짙어지고 있는 오늘날 신앙은 희망을 증거합니다.

4. 결론 (58~60)

보고 들은 것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되새기심으로써 말씀이 삶 안에 결실을 맺게 하셨던 마리아를 신앙의 표상으로 제시하며, 우리를 위하여 같은 은총을 구해주시도록 마리아께 전구의 기도를 바치는 것으로 회칙은 끝납니다.

이 회칙은 신앙 따로, 삶 따로가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를 인식하게 해줍니다. 신앙이 우리의 인식을 비추는 빛이라면, 존재하는 모든 것을 신앙의 빛으로 인식한다면, 삶은 신앙을 통하여 규정되고, 신앙을 통해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현대교회의 가르침] (56)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이웃 향해 항상 열려 있는 교회돼야

 

20131124일 발표된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Evangelii Gaudium)은 프란치스코 현 교황(재위 2013~ )의 신학적 · 사목적 전망을 가장 잘 드러내는 대표적 교회 문헌이다. 그동안 이미 여러 기회를 통해 여러 차례에 걸쳐 이 문헌이 자세히 소개된 바 있지만 여기에서는 신학적 관점, 특히 교회론적 관점에서 이 문헌의 핵심 사상을 살펴보기로 한다. 한마디로, 교회 공동체는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주어지는 삶과 영의 충만함, 복음의 기쁨을 모든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그분께서 주시는 구원을 받아들이게 해야 한다는 것이 그 핵심 내용이다. 이러한 신학적 기조 사상은 전체 5개의 장으로 구성된 문헌 중 특히 제1(19-49)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출발하는 교회

복음의 기쁨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출발하는 교회의 중요성에 대하여 말한다(20-24항 참조). 그리고 이를 위해 첫걸음 내딛기’(primerear)라는 핵심 단어가 강조되며, 이러한 기조 사상을 바탕으로 여러 가지 교회 상이 제시된다.

첫째, 교회는 하느님을 향한 응답으로 항상 첫걸음을 내딛어야 한다. 그 모범은 창세기 12장에 나오는, 하느님 말씀에 대한 아브라함의 순명이다. “네 고향과 친족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너에게 보여 줄 땅으로 가거라.”(1-3) 이 말씀에 대한 응답으로, 우리는 하느님의 뜻을 찾아 식별하고 순종하여 그분께서 가리키시는 곳을 향해 출발해야 한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매일매일 결행해야 할 회심인 것이다. 그리고 이 회심의 차원에서, 여러 측면의 교회 쇄신이 요구된다. 사목 쇄신을 위한 구조 개혁 등을 말하면서, 심지어 교황직의 쇄신”(32)이 언급되기도 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처럼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쇄신이 교회 안에서만 끝나지 않으려면 선교를 그 목표로 삼아야 함”(27)을 또한 강조한다.

둘째, 이러한 하느님을 향한 회심의 첫걸음 내딛기는 이제 이웃을 향해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이웃을 향해 사랑과 봉사의 걸음을 내딛어야 하는 이유는 너무도 명확하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1요한 4,19)이다. “복음을 전하는 이 공동체는 주님께서 이 일을 먼저 시작하셨고 우리를 먼저 사랑하셨음을 아는”(24) 까닭이다.

셋째, 이처럼 이웃을 향해 출발하는 교회는 문을 활짝 열어 놓은 교회”(46)이다. 여기에서는 복음서에 나오는 그리스도론적 표상들이 교회론적 차원으로 전환되어 적용됨으로써 교회가 어떠한 모습이어야 하는지가 잘 제시된다. 먼저, 죄의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이 회심하여 돌아올 수 있도록 교회는 항상 열려 있어야 한다. ‘자비의 복음서로 일컬어지는 루카복음서 15장의 되찾은 아들의 비유’(11-32)가 그 성서적 근거로 제시된다. 교회는 돌아오는 아들을 멀리서 보고 달려가 목을 껴안고 입을 맞추는 아버지가 되어야 한다. “우리는 방탕한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아버지가 되어야 합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돌아와 선뜻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언제나 문을 열어 둡니다.”(46)

나아가, 교회는 모든 사람을 위해 언제나 문이 활짝 열려 있는 아버지의 집”(47)이 되어야 한다. 이는 요한복음서에 나오는 예수님 말씀에 근거한다.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그렇지 않으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러 간다고 말하였겠느냐?”(요한 14,2) 그러므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한다. “이러한 개방성을 보여 주는 하나의 구체적인 표시가 바로 모든 성당의 문은 언제나 열려 있다는 것입니다. 누군가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하느님을 찾고자 성당을 찾아왔을 때 차갑게 닫혀 있는 문을 마주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닫혀 있지 말아야 할 문들은 또 있습니다. 누구나 어떻게든 교회 생활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있고, 성사들의 문도 어떠한 이유로든 닫혀 있어서는 안 됩니다.”(47) 사실,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는 그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이 세상의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해 열려 있는 집이 되어야 한다.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나에게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매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마태 11,28-29)

넷째, ‘출발하는 교회는 이제 열린 마음(심장)을 가진 어머니(a mother with an open heart)”(46-49)가 되어야 한다. 뜨거운 심장 속에 사랑의 마음을 지닌 어머니는 불 속에 있는 자식을 구하기 위해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뛰어들며, 또한 진흙 속에 있는 자식을 구해내기 위해 자기 몸을 내어던진다. 이미 언론에 여러 차례 보도된 바 있는, 프란치스코 교황의 유명한 다음 진술은 이러한 모성적 교회 상에 기초한 것이다. “이제 출발합시다. 가서, 모든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전합시다. 제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사제들과 평신도들에게 자주 드렸던 말씀을 온 교회를 위하여 되풀이하여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자기 안위만을 신경 쓰고 폐쇄적이며 건강하지 못한 교회보다는 거리로 나와 다치고 상처 받고 더럽혀진 교회를 저는 더 좋아합니다. 저는 중심이 되려고 노심초사하다가 집착과 절차의 거미줄에 사로잡히고 마는 교회를 원하지 않습니다.”(49)

여러 도전에 직면하여

복음의 기쁨2(50-109)공동 노력의 위기 속에서라는 제목이 시사하듯, 1장에서 제시된 출발하는 교회가 마주하게 될 여러 도전들에 대하여 설명한다. 크게, “오늘날 세상의 도전들”(52-75)사목 일꾼들이 겪게 되는 유혹들”(76-109)로 나누어진다.

먼저 오늘날 세상의 도전들로 거론되는 것은, 모든 것을 경쟁의 논리와 약육강식의 법칙 아래 놓는 배척과 불평등의 경제(53-54), 그리고 그로 인해 우상화된 물신주의의 횡행(55-56), 봉사하지 않고 지배하는 금융 제도(57-58), 폭력을 낳는 불평등(59-60), 문화적 측면의 도전(61-67), 도시 문화의 도전(71-75) 등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를 통해, 인간적 면모를 상실한 현대의 경제적 흐름과 배타적 금융 구조의 심각한 문제점들을 날카롭게 지적한다.

한편 사목 일꾼들이 겪게 되는 유혹들로 거론되는 것은 이기적인 나태(81-83), 무익한 비관주의와 패배주의(84-86), 영적 세속성(93-97), 분열과 싸움(98-101), 청년 사목의 문제(105-106), 성소 감소의 위기(107) 등이다. 이 가운데 교회론적 관점에서 주목을 끄는 것은 바로 영적 세속성의 위험에 대한 지적이다. 이는 한마디로, “신앙심의 외양 뒤에, 심지어 교회에 대한 사랑의 겉모습 뒤에 숨어서 주님의 영광이 아니라 인간적인 영광과 개인의 안녕을 추구하는 것”(93)이라 규정된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 위험성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복음이 하느님의 백성에게 그리고 현대의 구체적인 요구에 실제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이렇게 하여 교회 생활은 박물관의 전시물이나 선택된 소수의 전유물이 되어 버립니다. 또 어떤 이들에게 영적 세속성은 사회적 정치적 쟁취에 대한 환상, 또는 실질적인 일처리 능력에 대한 자만, 또는 자립과 자아실현 프로그램에 대한 집착 뒤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이는 또한 보이는 것에 대한 관심, 다시 말해 여행, 회합, 회식, 연회 등으로 가득한 바쁜 사회생활로 풀이될 수도 있습니다. 영적 세속성은 또한 통계와 기획과 평가에 매달리는 관리자의 기능주의로 표현되며, 그 주요 수혜자는 하느님 백성이 아니라 오히려 제도로서의 교회입니다.”(95)

사실, 이는 바오로 6세 교황(재위 1963-1978)의 말씀처럼, “세상 안에 있으면서도 세상의 것이 되지 말아야 하는 교회”(Ecclesia in mundo, sed non mundi)가 세상과 소통하고 교류하는 상호작용 속에서 불가피하게 또 실제적으로 마주하는 도전이며 위험이라 할 수 있다. 그러기에 제2차 바티칸공의회(1962-1965)교회 헌장8항이 천명하듯, “자기 품에 죄인들을 안고 있어 거룩하면서도 언제나 정화되어야 하는 교회’(Ecclesia semper purificanda)는 끊임없이 참회와 쇄신을 추구한다는 당위적 명제 차원에서, 이는 교회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늘 함께 성찰하고 숙고해야 할 과제일 것이다.

 

 

 

 

[현대교회의 가르침] (57 · ) 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복음의 기쁨()

복음선포, 하느님 향한 가난한 이들 열망 고려돼야

프란치스코 현 교황(재위 2013- )은 권고 복음의 기쁨을 통해 오늘날 우리가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지, 그 도전과 전망에 관하여 설명한다. 지난번에는 전체 5개의 장 가운데 1~2장의 내용을 살펴보았다. 이번에는 3~5장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아보도록 하겠다.

복음 선포의 방법과 원리들

복음의 기쁨3장은 복음 선포의 여러 방법과 원리에 대하여 잘 설명한다. 직접적인 강론을 하는 사목자만이 아니라 모든 복음 선포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좋은 내용들이 매우 풍부하게 담겨 있다. 더 이상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 따로 있고 선교사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이제 우리 모두는 언제나 선교하는 제자”(120)여야 한다고 프란치스코 교황은 역설한다.

먼저, 현대의 복음화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적 죽음과 부활을 기쁨과 인내심을 갖고 점진적으로 선포하는 예언”(110)이어야 함을 프란치스코 교황은 말한다. 그러므로 교회는 참다운 보편성을 표현하면서도 다양한 모습을 한 교회의 아름다움을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 선포에 있어, 올바로 이해된 문화적 다양성과 토착화는 중요하게 숙고되어야 할 요소이다(116~118항 참조). 그리고 이런 차원에서, 토착화된 복음의 열매인 대중신심 안에 담긴 적극적인 복음화의 힘과 성령의 활동이 강조된다. 이는 그리스도교 민족들의 신심 안에서, 특히 가난한 이들 안에서 드러나는 하느님을 향한 열망과 삶을 가리킨다. “신경 구절은 거의 못 외우지만 묵주 기도에 매달리며 병든 아이를 간호하는 어머니들의 강인한 믿음을 저는 생각합니다. 또한 성모 마리아의 도움을 간구하는 누추한 집 안에 켜진 촛불에서 퍼져 나가는 큰 희망을 생각해봅니다. 이러한 행위들은 우리의 마음 안에 부어진 성령의 활동으로 힘을 얻는, 하느님을 향한 삶의 표현입니다.”(125)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 선포의 차원에서, 강론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한다. “평신도는 강론을 듣는 것이 어렵고 사목자는 강론을 하는 것이 어렵습니다. 사정이 이렇다는 것이 유감입니다. 사실 강론은 성령을 강렬하고 기쁘게 체험하는 일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쇄신과 성장의 지속적인 원천이신 하느님 말씀, 위로하시는 하느님 말씀을 만나는 것입니다.”(135) 이처럼 좋은 강론을 위해서, 먼저 강론자는 자기 공동체의 마음을 알아야 함”(137)이 요구된다. 순전히 도덕적이거나 교리적인 강론, 또는 성경 해석 강의가 되어 버린 강론을 지양하고, 마음과 마음의 소통이 이루어져 마음에 불을 지르는 말씀을 전해야 하는 것이다(142항 참조). 그리고 좋은 강론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성된 준비의 시간이 필요하다. “강론 중에 활동하시는 성령을 믿는 것은 단순히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의 모든 역량을 다하여 우리 자신을 하느님께서 사용하시는 도구로 바쳐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145)

마지막으로, 좋은 강론이란 긍정적인 언어를 사용해야 함을 상기시킨다. “강론이 부정적인 것을 지적하려 한다면, 언제나 매력적이고 긍정적인 가치도 보여 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강론이 불평이나 탄식, 비판이나 비난에 그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더욱이 긍정적인 강론은 언제나 희망을 주고 미래를 지향하며 우리가 부정의 덫에 갇혀 버리지 않게 합니다.”(159)

복음화의 사회적 차원

복음의 기쁨4장은 복음 선포가 지니는 사회적 측면에 대하여 설명한다. 복음의 기쁨이 사회 교리서는 아니고 복음 선포에 관해 말하는 문헌이지만, 복음화와 인간 증진 사이에 매우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보기에, 프란치스코 교황은 가난한 이들의 사회 통합”(186~216)공동선과 사회 평화”(217~237)에 대하여 특히 강조해 설명한다. 그리고 이러한 이상의 사회적 실현을 위해, 매우 중요한 네 가지 기본 원칙이 제시된다.

첫째는 시간은 공간보다 위대하다는 원칙이다. “시간은 우리 앞에 언제나 열려 있는 지평의 표현으로서 충만함과 관련되지만, 개별적인 순간들은 제한된 공간 속에서 살아가는 한계의 표현입니다.”(222) “이 원칙은 눈앞의 즉각적인 결과에 집착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천천히 확실하게 일할 수 있도록 해 줍니다. 이는 어렵고 적대적인 상황을 이겨 내고, 현실의 힘이 강요하는 계획의 변경을 참을성 있게 견뎌 내도록 도와줍니다. 우리가 이따금 사회 정치 활동에서 보는 잘못들 가운데 하나는 공간과 힘을 시간과 진전보다 더 중시하는 것입니다. 공간을 우선시한다는 것은 자신을 내세우는 권력의 공간들을 독점하고 모든 것을 현재에 가두어 두려고 하는 무모한 시도를 의미합니다. 시간을 우선시한다는 것은 공간들을 장악하기보다는 진전의 과정들을 시작하는 것에 더 관심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223)

둘째는 일치가 갈등을 이긴다는 원칙이다. 사회적 갈등을 진정으로 극복하는 일치는 먼저 우리 자신의 내면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함이 강조된다. “우리가 차이를 존중하며 평화를 이루어야 할 첫 자리가 우리 자신의 내면이라는 것을, 언제나 분열과 붕괴의 위협을 받는 우리 자신의 삶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수천 갈래로 산산조각이 난 부서진 마음으로는 진정한 사회적 평화를 이룩하기가 어려울 것입니다.”(229)

셋째는 실재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는 원칙이다. 이는 사회 참여에 있어, 실재를 가리는 온갖 수단들을 거부하라는 의미이다. “천사 같은 순수주의, 상대주의의 독재, 공허한 미사여구, 현실과 동떨어진 목표, 반역사적 근본주의, 선의가 없는 도덕주의, 지혜가 없는 지성주의”(231)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넷째는 전체는 부분보다 더 크다는 원칙이다. “전체가 부분보다 더 큽니다. 또한 전체는 그 부분들의 단순한 총합보다도 더 큽니다. 따라서 제한적인 개별 문제들에 너무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235)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체를 중시하면서도 결코 획일적이지 않고 각각의 고유성을 살리는 다면체적인 통합을 강조한다. “여기에서 우리의 모델은 구체가 아닙니다. 모든 점이 중심에서 똑같은 거리에 있으며 그 점들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없습니다. 그 대신에, 우리의 모델은 다면체입니다. 다면체는 모든 부분의 집합이고, 각 부분은 그 고유성을 간직합니다. 사목 활동과 정치 활동도 마찬가지로 이러한 다면체 안에 각각의 가장 좋은 부분을 모으고자 합니다.”(236)

성령으로 충만한 복음 선포자

복음의 기쁨5장은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이다. 여기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 선포자는 두려움 없이 성령의 활동에 자신을 내어 맡겨, 담대하게, 큰 소리로, 언제 어디서나, 또한 시류를 거슬러, 복음의 새로운 역동적 힘을 선포해야 함을 강조한다(259항 참조). 또한 진정한 선교사는 복음 선포 활동 가운데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진정한 선교사는 예수님께서 그와 함께 걸으시고 이야기하시고 숨 쉬시고 함께 일하신다는 것을 압니다.”(266)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부활은 과거에 일어나 사건이 아니라 이 세상에 스며든 생명의 힘을 지니고 있는 신비임을 복음 선포자는 체험해야 한다. “선교는 거래나 투자도 아니고 심지어 인도주의적 활동도 아닙니다. 광고에 따라 모인 관객의 수를 세는 공연도 아닙니다. 선교는 그보다 훨씬 더 깊은 것이며 그 무엇으로도 가늠할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활동을 통하여, 세상의 어떤 곳에, 우리가 결코 가보지 못할 그곳에 은총을 풍성히 베풀려고 하시는지도 모릅니다.”(279)

마지막으로, 프란치스코 교황은 복음화의 어머니이신 마리아”(284~288)에 관해 설명한다. “모든 이의 어머니이신 마리아께서는 정의를 낳을 때까지 산고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표지이십니다. 마리아께서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시어 우리 인생의 동반자가 되어 주시고 당신의 모성애로 우리 마음을 믿음으로 열어 주시는 선교사이십니다.”(286) “교회의 복음화 활동에는 마리아 방식이 있습니다. 마리아를 바라볼 때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온유한 사랑의 혁명이 지닌 힘을 믿게 됩니다. 우리는 그분 안에서 겸손과 온유가 나약한 이들의 덕이 아니라 강한 이들의 덕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마리아를 바라보며, 바로 그분께서 정의를 추구하는 우리에게 따스한 온기를 가져다주시는 분이심을 깨닫습니다.”(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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