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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1) 신앙인에게 과학은 왜 필요한가?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23|조회수27 목록 댓글 0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1) 신앙인에게 과학은 왜 필요한가?

참된 신앙 가치 지키고 선포하려면 과학 이해할 필요 있어

 

과학의 주장과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은 서로 충돌하지 않는가? 신앙인에게 과학이 필요한가? 과학이 하느님을 섬기는 도구가 될 수 있을까? 여전히 많은 이들의 인식 속에는 교회가 과학을 배척하거나 포용하지 않는다는 편견이 자리잡고 있다.

새해부터 연재를 시작하는 기획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는 과학과 신앙 간의 조화가 충분히 가능하며, 이 둘 모두가 하느님을 섬기는 좋은 도구가 된다는 것을 알아가는 장이다.

우리는 과학이라는 단어를 일상적으로 자주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커피나 맥주를 함께 마시면서 최근까지 우리를 괴롭혀온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에 대해서 토론을 한다고 해보죠. 그러면 어떤 사람은 그냥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 중 몇 가지에 근거해서 이렇다더라 저렇다더라이렇게 어물적 얘기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렇지 않고 코로나 바이러스는 이런저런 이유 때문에 어떤 온도 또 어떤 상황에서 증식이 가장 잘 된다더라라고 하면서 나름의 근거와 논리를 가지고 설명을 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이들에게 우리는 저 사람은 과학적으로 접근하는군하고 말합니다.

우리의 일상 삶 안에서는 이런 식으로 근거와 논리를 가지고 말하는 사람들이 좀 피곤할 수 있겠습니다만, 적어도 어떤 심각한 문제나 사안이 있을 때, 우리가 살면서 어떤 결정을 내려야 될 때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과연 올바른 삶인가에 대해서 우리가 심각하게 고민해야 될 때에는 이렇게 이성적인 추론과 보편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를 통해서 무언가를 따지고 탐구하는 자세가 분명히 필요한 것 같습니다.

농사를 짓는 경우를 예로 들어보죠. 아침에 해가 뜨면 일어나서 아침밥 먹고 조금 쉬다가 농사를 짓다가 또 점심 때 해가 중천에 떠오르면 밥을 먹고 낮잠 좀 자다가 또 옆집에 마실도 갔다가 또 저녁이 되어서 해가 지면 저녁을 먹고 좀 있다가 자고이런 식으로 단순하게, 큰 고민 없이 물 흘러가듯이 사는 것도 일반적으로 추천할 만한 삶이긴 합니다. 하지만 살아가다 보면 왜 올해는 유독 비가 오지 않을까, 왜 올해는 유독 병충해가 많은 걸까, 왜 올해는 유독 이렇게 비가 많이 와서 홍수 때문에 농사가 잘 안 되는 것일까 등등 살면서 분명히 우리에게 닥치는 여러 가지 어려움들, 고민거리들을 하나하나 따지고 이런 문제가 생기게 된 이유를 밝혀내는 사람들도 분명히 필요해 보입니다. 이러한 소수의 사람들이 조금씩 조금씩 자기 나름의 경험을 글로 남기거나 후세 사람들에게 전달해 줌으로 해서 세상에는 많은 종류의 학문들이 자연스럽게 생겨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특별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과 우리 주변에 이 자연의 위치를 따지고 탐구하는 과정에서 이상적인 추론과 보편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를 통해서 이러한 것들을 따지고 탐구하는 사람들이 언젠가부터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왜 평소에는 하늘의 색깔이 파랗다가 태양이 떠오르거나 질 때에만 왜 하늘의 색깔이 빨갛게 물드는 것일까? 여러분도 궁금하지 않으신지요? 그런데 일반적인 하늘색은 파란색이고, 노을색은 빨간색인 이유를 알게 된 지는 불과 150년밖에 되지 않습니다. 거의 1870년경이 되어서야 레일리 남작이라고 흔히 알려져 있는 존 윌리엄 스트럿(John William Strutt, 1842~1919)이라는 물리학자에 의해 비로소 하늘의 색깔에 관한 정확한 물리학적인 이유가 완벽하게 이해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면 1870년 이전의 사람들은 하늘의 색깔에 관해서 아무런 생각이 없었을까요? 아닙니다. 그들도 나름 이런저런 근거와 이유를 따져가면서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애를 썼지만, 그 설명이 정확하지 못했기 때문에 계속해서 더욱 정확한 설명을 찾아가다가 1870년경이 되어서야 비로소 그 현상에 관한 완전한 근거와 이론을 확립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런 식으로 이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학문들 중에서 특별히 이성적인 추론과 보편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를 통해서 세상과 자연의 이치를 따지고 탐구하는 학문을 우리는 특별히 과학(Science)이라고 부릅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여러 변이들 중에서 왜 하필 다른 변이도 아니고 델타 변이, 오미크론 변이가 전염성이 강한 것일까요? 이 질문은 현재 아주 중요한 과학의 주제가 되고 있습니다. 대단히 이성적이고, 보편적이고 논리적인 근거를 통해서 이 질문에 대해 답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그때에는 코로나 바이러스의 창궐이라고 하는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상당히 중요한 실마리를 찾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과학이 실제로 이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데 대단히 필요한 학문이라는 것을 우리는 우리의 경험을 통해 이미 충분히 잘 알고 있습니다.

만일 과학적인 태도가 없다면 증권에 투자하는 사람들은 십중팔구 망할 수밖에 없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과학적인 태도가 없다면 많은 이들이 그냥 전염병에 걸릴 것이고 다른 이들보다 건강하지 못한 채로 살다가 세상을 떠날 가능성도 분명히 높아지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사이비 종교에 빠져서 평생을 헛되이 살다가 진정한 구원을 맛보지 못한 채 허무하게 죽을 수도 있게 될 것입니다. 정말 종교를 제대로 믿기 위해서라도 우리에게는 과학적인 자세가 대단히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사이비 종교 신자들의 그럴듯한 논리와 설득에 휘둘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과학이라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고 이 과학의 내용을 잘 이해하는 것을 통해서 우리 신앙의 가치와 내용을 지켜나가는 것이 사실 대단히 필요합니다. 바로 우리의 신앙을 올바로 정립하기 위해서라도 과학이라는 주제는 사실 상당히 중요합니다. 그런데 그 과학 가운데서도 특별히 자연을 학문의 대상으로 탐구하는 과학을 우리는 자연과학이라고 부릅니다. 자연과학에는 물리학, 화학, 생명과학 같은 학문이 있습니다. 이 학문들이 특별히 오늘날 우리에게 중요한 이유는 이 학문들이 일상생활 안에서 우리에게 너무나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벌어지고 있는 코로나 바이러스 문제가 대표적인 자연과학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한 사건입니다. 그리고 자연과학적인 내용을 잘 모르게 되면 우리는 빅뱅이라든가 진화론처럼 우리의 신앙과 충돌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이런 자연과학적인 문제와 맞닥뜨리게 될 때에 우리가 아무런 답을 할 수가 없게 되고 그러면 일방적으로 과학적 배경 지식을 갖춘 무신론자들에게 끌려다닐 가능성이 대단히 많게 될 것입니다.

이 글을 읽는 분들께서 다니시는 본당의 신자분들 중에는 진화론과 같은 과학적인 질문을 하면서 이 과학의 주장과 우리 가톨릭의 가르침이 서로 충돌되지 않습니까?”라고 묻는 이들이 분명히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께서는 바로 그러한 질문들에 대해서 이제부터 권위있게 답을 해주실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신론을 극복하고 우리가 우리의 참된 신앙을 계속적으로 다른 이들에게 선포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자연과학의 내용을 어느 정도 알아야 될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필요성을 느끼고 있는 신앙인 여러분들을 위해 저는 올 한 해 최선을 다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2) 스핀 유리와 우리의 신앙

공동체에 스핀 유리생기지 않도록 성령의 도우심 청해야

 

이 글을 쓰는 저는 가톨릭교회의 사제이면서 동시에 이론물리학자이기도 합니다. 그러다 보니 제가 사제품을 받은 직후부터 주변의 많은 분들로부터 우리 가톨릭교회의 교리 내용과 현대 과학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는지, 과학과 신앙 간의 조화를 어떤 식으로 이루어야 하는지에 대해 많은 문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올 한 해 동안 매달 두 차례씩 과학과 신앙 간에 조화가 충분히 가능하며 이 둘 모두가 하느님을 섬기는 좋은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가톨릭신문의 지면을 통해 여러 방식으로 강조해 보고자 합니다.

이 목적을 위한 첫 번째 시도로서 저 자신이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주 전공 분야의 예를 통해 우리의 신앙에 대해 되짚어 보고자 합니다. 이 예는 제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앞으로 제가 이 지면을 통해서 어떤 식의 논의를 할 것인지를 잘 보여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해 10월 초에 발표된 ‘2021년도 노벨 물리학상복잡한 물리계의 이해에 대한 획기적인 공헌에 관한 업적으로 조르지오 파리시(Giorgio Parisi, 이탈리아 사피엔자대학교 물리학과 교수)가 다른 두 명의 과학자와 함께 공동 수상하였습니다. 파리시가 노벨상을 받도록 한 대표적인 연구 주제는 스핀 유리’(Spin Glass)라는 것인데요, 이제 20여 년간 스핀 유리를 연구해온 제가 물리학적인 딱딱한 설명보다는 우리의 일상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간단한 예를 통해 스핀 유리가 무엇인지에 대해 설명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 각자가 다니는 본당에 새로운 단체가 하나 생겼다고 해봅시다. (레지오마리애든 구역반모임이든 무엇이든 좋습니다.) 창립 멤버는 총 4명입니다. (그 각각의 멤버를 1·2·3·4라고 부르기로 하죠.) 그런데 이 4명이 모두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12, 23, 34는 사이가 좋지만 (이 좋은 관계를 +J로 표기하죠.) 41 사이는 어쩐 일인지 사사건건 싸우는 사이입니다. (이 안 좋은 관계는 J라고 표기하죠.)

그런데 1번이 어느 날 2번에게 카톡으로 이제 위드 코로나가 시작되었으니 오랜만에 다 같이 모여서 식사나 한번 하자는 제안을 합니다. 2번은 “OK”라고 동의한 후 (동의를 로 표기하겠습니다), 3번에게 동일한 제안을 합니다. 3번 역시 “OK”라고 동의한 후, 4번에게 제안합니다. 4번 역시 3번의 제안에 “OK”라고 동의했으나, 잠시 뒤 이 제안이 1번으로부터 시작된 것임을 알고서 이 제안에 반대를 할까를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반대를 로 표기하겠습니다.) 이렇듯이 4번은 동의와 반대 두 갈림길에서 고민을 하게 됩니다. 3번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동의를 하고 싶은데, 1번과의 관계를 생각해보면 반대를 하고 싶은 마음이 다시 생기면서 결정을 못한 채로 쩔쩔매는 상태에 놓이게 되는 것이죠. 바로 이 쩔쩔매는 상태는 바로 3번과 4번 사이의 +J인 관계 및 4번과 1번 사이의 J인 관계로부터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JJ라는 관계가 하나라도 바뀌지 않는 한 쩔쩔매는 상태는 바뀔 수 없게 되고 4번은 큰 고심에 빠지게 됩니다.

물리학에서 말하는 스핀 유리는 바로 고착화된 +JJ가 무작위로 고체 안에 존재함으로 인해서 그 고체 안의 스핀(그 고체가 자석이 되도록 하는 물리적 현상)를 결정하지 못한 채 쩔쩔매는 상태를 가진 특이한 자석을 의미합니다. 4번과 같은 쩔쩔매는 상태가 많을수록 이 자석은 자석 고유의 특성인 철을 끌어당기는 능력을 잃어버리게 되고, 이도 저도 아닌 고체 덩어리인 스핀 유리로 전락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스핀 유리는 1970년경에 처음 발견된 이래로 상당히 많은 연구가 지금까지 진행되어오고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신앙은 원칙적으로는 아무런 주변의 도움이 없어도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잘 발전시켜 나가기만 하면 됩니다. 하지만 이는 세속적인 유혹이 넘쳐나는 실제 삶 안에서는 무척이나 힘든 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본당이라는 조직과 여러 단체, 모임 등이 우리 각자의 신앙에 도움을 주기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각 본당의 신부님들과 수녀님들은 우리 각자의 신앙을 증진시켜서 우리 각자가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데에 도움을 주기 위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여러 단체, 모임 안에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분들 역시도 나의 구원에 도움이 되기 위해 존재하는 이들인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내가 다니는 본당, 내가 속한 단체나 모임에서 위에서 예를 든 4번과 같은 쩔쩔매는 상태가 여러 군데에 존재하게 된다면 그 교회, 단체, 모임은 과연 어떻게 될까요? 아마도 그 교회, 단체, 모임은 자석이 자석 고유의 능력을 잃어버린 스핀 유리가 되는 것처럼 그 교회, 단체, 모임 특유의 성격과 카리스마를 잃어버린 채 영적으로 무기력한 곳으로 전락해버리고 말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마태오복음에서 말씀하신 맛을 잃은 소금, 밖에 버려져 짓밟히고 마는 소금처럼 말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이제 저는 이 말씀을 여러분께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들 각자가 각 공동체 안에서 쩔쩔매는 상태를 유지하게 되면, 결국 여러분이 속한 그 공동체는 바로 여러분 각자의 쩔쩔맴으로 인해 자석 고유의 능력을 잃은 스핀 유리나 맛을 잃은 채 버려져 짓밟히는 소금이 되고 말 것입니다. 해당 공동체가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우리 각자가 타인과의 인간관계를 J에서 +J로 변화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 공동체 내의 모든 구성원들이 +J의 관계를 가지게 된다면 그 공동체는 자석으로서의 역할, 소금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다 하는 살아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잘 알 듯이 J인 인간관계를 +J로 바꾸는 것은 인간적인 노력만으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의 도우심이 필요한 것입니다. 성령송가에서도 표현되듯이, 성령께서 우리의 인간관계 안에 직접 개입하셔서 굳은 맘을 풀어 주시고 찬 마음을 데우시고 바른 길을 이끌어주실 때에 비로소 우리 각자의 공동체는 살아있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가정, 우리의 본당, 우리 교구, 우리나라 교회 전체가 살아있는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결국 J+J로 만드는 초월적인 능력을 지니신 성령께서 도와주실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일치를 이루시는 성령께서 우리 모두와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4) 과학과 신앙의 근본적 차이점 1

사실에서 원리 찾는 과학’, 계시를 마음에 받아들이는 신앙

- 세바스티앙 부르동 모세와 불타는 떨기나무’. 과학은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사실들로부터 법칙과 원리들을 향해 간다면, 신앙은 위로부터 유일회적 계시가 떨어져서 우리 각자의 마음에 구체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거치게 된다.

 

저는 지난번 글을 통해 과학과 신앙은 원래 자연에 관한 경외심이라는 동일한 출발점에서 나왔지만, 계몽주의 시기를 거치는 중에 과학과 신앙이 갈라지기 시작해서 현재에 이르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한번 갈라진 과학과 신앙은 서로 화해할 기미가 좀처럼 보이지 않고 있습니다. 무신론적인 성향의 과학자들은 신앙을 미신으로 치부하면서 무시하고, 신앙인들은 그러한 과학자들에 대해 큰 반감을 가지게 되는 악순환이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공공연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과학과 신앙은 서로 갈라진 이후 왜 이렇게까지 사이가 벌어져 있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이제부터 설명해드리는 바와 같이 과학이 신앙과 상당히 다른 고유한 특징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은 모두 신앙인들이시죠? 모두 가톨릭 신앙을 공유하고 있는 이들이기 때문에 이제부터는 과학만의 고유한 특징이 무엇인가를 우리 신앙과의 비교를 통해서 한번 살펴보고자 합니다. 이렇게 설명을 드리게 되면 과학의 고유한 특징에 대해서 훨씬 이해하시기가 쉽게 될 것입니다.

과학과 신앙의 성격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가를 이제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과학은 먼저 자연 현상 또는 사회 현상에서 발견되는 경험적인 사실들을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면서 계속적으로 데이터를 축적을 하고, 그 데이터 안에서 재현성과 보편성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지속적으로 발견되면, 그다음부터 데이터에 관한 엄밀한 분석을 통해서 경험 법칙과 원리들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과학은 발전하게 됩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는 경험적 사실들로부터 시작해서 고차원의 법칙과 원리를 향해 가는 방향으로 과학은 발전합니다.

그런데 신앙은 과학과는 정반대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그냥 살아가고 있는데 우리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는 어떤 절대적인 존재로부터 단 한 번 있는 계시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집니다. 모세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모세는 자신이 속한 민족인 히브리인들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미디안 사람들과 같이 양이나 치면서 조용히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저쪽에 있는 떨기나무에서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모세야, 모세야하는 소리에 그쪽으로 가봅니다. 갑자기 얼토당토않게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어떤 목소리가 들려옵니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다. 너는 내 백성을 이끌고 약속된 땅으로 들어가라.”

이렇듯이 어느 누구도 이전에 경험해 본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경험할 수 없는 오직 모세만이 경험하는 유일회적인 계시가 그에게 주어집니다. 사실 어떤 한 사람의 신앙 체험은 역사상 어느 누구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 사람만의 경험인 것입니다. 그리고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주어지지도 않습니다. 평생 동안 딱 한 번 그 사람에게 그 시점에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절대자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일회적 계시가 하늘로부터 뚝 떨어지면 그다음부터 모세는 자신에게 고유하게 주어진 그 계시 내용을 곰곰이 분석하기 시작합니다. ‘나는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가? 혹시 내가 헛것을 보고 헛소리를 들은 것은 아닌가?’ 그렇게 분석하다 보면 어느 순간에 이 계시 내용과 자신의 과거 경험들을 비교하게 됩니다. ‘내가 어렸을 때 나의 어머니께서 야훼 하느님이라는 분이 계신다고 말씀하셨던 적이 있었던 것 같은데그분인가? 진짜 내가 내 백성을 이끌고 가야 되나? 내 형님 아론을 만나서 이 계시 내용을 전달해 줄 때 뭐라고 해야 하나?’ 등등. 그러면서 자신의 삶의 경험과 이 유일회적 계시 내용을 비교해 보면서 이 내용이 어느 정도 맞는 것 같고 이 계시 내용을 받아들여도 될 것 같다는 판단이 들면 그때에는 신앙을 받아들이고 그 신앙의 내용에 따라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신앙은 하늘로부터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나중에 나의 마음 안에서 내면화되는 과정을 거쳐서 신앙이 더욱 깊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은 하늘로부터 아래의 인간에게로 떨어지는 방식을 가집니다. 신앙은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아주 예외적인 사건을 기반으로 해서 만들어집니다.

그래서 과학과 신앙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형성된다는 것을 우리는 이제 알 수 있게 됩니다. 과학은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사실들로부터 법칙과 원리들을 향해 간다면, 신앙은 위로부터 유일회적 계시가 떨어져서 우리 각자의 마음에 구체적으로 받아들여지는 과정을 거치게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 과학과 신앙은 서로 상극(?)으로 비춰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냥 상극인 상태로 두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과학과 신앙은 둘 다 자연에 대한 경외심이라는 엄마로부터 함께 탄생한 쌍둥이이기 때문입니다. 이 둘을 조화롭게 수용하는 것이 바로 21세기 현대 과학 시대에 걸맞은 신앙생활일 것입니다.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 (5) 과학과 신앙의 근본적 차이점 2

정반대 접근법 취하는 과학과 신앙충돌 발생은 자명한 일

 

저는 지난번 글을 통해서 과학과 신앙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설명드린 적이 있습니다. 과학은 자연현상 또는 사회현상에서 발견되는 경험적인 사실들을 관찰하는 것으로부터 고차원적인 법칙, 원리로 나아가는 방식이지만, 신앙이라는 것은 하늘로부터 우리 각자에게 일방적으로 주어지는 것이고 그것이 나중에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서 내면화되는 과정을 거쳐서 신앙이 더욱 깊어지게 되는 식입니다. 이러한 과학과 신앙의 근본적인 차이점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과학은 자연현상 또는 사회현상에서 발견되는 경험으로부터 얻어진 수많은데이터에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법칙, 원리를 발견하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하기 때문에, 관측을 통해 주어지는 데이터의 양이 일단 많아야만 합니다. 바로 이러한 수많은 데이터로부터 장소, 시간에 구애되지 않는 보편적 법칙을 찾는 것이 과학의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인간의 역사 안에 주어진 유일회적인계시를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받아들이는 과정을 통해 탄생되고 퍼져나갑니다. 여기서 신앙의 내용인 계시는 이 세상의 역사 안에서 단 한 번 주어지며 결코 반복되지 않는 특징을 가지게 됩니다. 모세가 경험한 불타는 떨기나무 사건’(탈출 3)은 인류 역사 안에서 오직 모세만이 그의 평생 안에서 단 한 번 경험한 것이죠. 그래서 유일회적인 계시 내용은 그 자체로는 결코 보편적이라고 할 수 없지만, 그 계시 내용을 접한 여러 사람들이 그 계시 내용과 자신들의 삶의 경험을 비교하는 과정에서 어느 정도의 보편성을 획득하게 되며 그 계시 내용은 점차 권위를 얻어 나가게 됩니다.

과학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인간 역사 안에서 일어난 모든 사건들은 특정한 법칙을 통해 설명할 수 있어야 하고, 그렇지 않은 예외적인 사건은 거짓 혹은 관찰의 오류로 여겨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수많은데이터에 의존하는 과학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인간 역사 안에서 일어난 유일회적인사건을 계시라는 차원으로서 이해하며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은 납득하기 힘들어 보입니다. 과학이 보기에는 그러한 유일회적인 사건은 측정의 오류 내지는 데이터의 조작으로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현대의 많은 과학자들이 예수의 부활 사건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유일회적 부활 사건이 그들의 관점에서는 측정의 오류(누군가가 헛것을 본 것)나 데이터의 조작(누군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의도적으로 부활을 거짓 주장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세상의 모든 사건들은 특정한 법칙만으로는 설명 불가능한 고유성이 있으며, 그 고유성 안에서 활동하시는 신적 존재의 계시를 찾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그러다보니 신앙의 관점에서 보기에는 유일회적인주요 사건들의 초자연성과 특별함을 과학이 단지 단 한 번 발생했다는 이유를 들어 평가절하하는 것은 신앙의 권위를 훼손하는 모욕적인 태도로 여겨질 수밖에 없습니다.

과학은 법칙이라는 보편성의 눈으로 모든 사건들의 개별성을 설명하려고 시도하지만, 신앙은 특정한 계시 사건이라는 개별성의 눈으로 모든 사건들의 보편성을 설명하려고 시도합니다. 이렇듯이 과학은 신앙과는 사실상 정반대의 접근법을 취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다 보니 과학이 발전함에 따라 과학과 종교 간에 긴장과 갈등이 생겨나고 충돌이 발생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는 자명한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이런 극명한 차이에 입각해 볼 때 만일 과학과 신앙, 양쪽이 충돌할 경우 어느 쪽이 대중적으로 더 설득력을 얻을 것인가?’라는 질문을 해 본다면 과학이라고 답변하는 이들이 압도적일 것입니다. 과학은 누구나 확인 가능한 보편성이 있으며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반면, 신앙은 주요 계시 내용을 극소수만 확인 가능하며 과학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비이성적으로 접근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은 아니지만, 개신교에서 현재까지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과학과 신앙 간의 충돌의 구체적인 예로 창세기 1~2장에 제시된 우주의 나이 계산인류 첫 조상의 창조등의 문제를 들 수 있겠습니다. 미국과 한국의 보수 개신교계에서는 아직도 우주와 지구, 그리고 인류의 첫 조상이 지금부터 대략 6000년 전에 하느님께서 행하신 6일간의 창조로 인해 생겨났다고 믿는 이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경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그들의 입장 때문이죠. 하지만 물리학자들이 최근까지 행한 수많은 연구에 따르면 우리의 우주는 138억 년 전에 있었던 빅뱅이라는 사건에 의해 생겨났습니다. 그리고 인류의 출현은 찰스 다윈 이래로 발전해 온 진화론에 의해 점진적인 진화 과정을 거쳐 현재의 호모 사피엔스가 지구상에 출현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바로 이 창세기 해석 문제는 사실 신앙의 중요한 텍스트인 창세기의 내용이 자연과학, 특히 우주론 및 진화론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심각한 문제에 해당합니다. 하지만 성경을 글자 그대로 무조건적으로 믿는 소수의 근본주의적 개신교 신자들을 제외한 오늘날의 대다수 사람들에게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그들이 과학의 내용을 신앙의 내용보다 더욱 신뢰하는 현대의 사회적인 분위기 안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글자 그대로 무조건적으로 믿는 소수의 근본주의적 개신교 신자들조차도 소위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의 그들 나름의 과학적 접근법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 내용을 옹호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에 있는 것이죠. ‘창조과학은 그들이 결국 스스로 과학이라고 부르는 방패를 이용해야만 할 정도로 과학적 방법론이 현재 신앙의 내용에 근본적인 공격을 가하고 있는 상황에 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되겠습니다.

이러한 예들을 통해서 볼 때, 과학과 신앙 간에 충돌이 발생할 경우 과학이 더 큰 힘을 발휘하는 것은 자명해 보입니다. 그러다 보니 점차 과학들이 발전해 감에 따라 신앙의 입지는 상대적으로 점점 약해져 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는 역사상 신앙의 입지가 가장 약한 시대인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의 신앙을 어떻게 지켜나갈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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