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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로 풀어 보는 세상사] 남의 일자리가 나의 행복에 중요한 이유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23|조회수51 목록 댓글 0

[심리로 풀어 보는 세상사] 남의 일자리가 나의 행복에 중요한 이유

 

일흔여덟의 할머니가 길을 걷고 있었다.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한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러자 이 남자가 갑자기 할머니에게 달려들었다. 그의 손에는 각목이 들려 있었다. 가로수 지지대로 사용하는 나무만큼이나 굵은 것이었다. 이 남자는 각목으로 할머니의 머리를 내리쳤다.

할머니가 쓰러진 뒤에도 각목을 휘두르던 남자는,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서 횡단보도를 건너려던 또 다른 여성을 발견하고는 다시 각목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이 이야기는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2016525일 오후 5시 무렵, 부산 동래구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이 남자는 원한을 가지고 있거나 복수를 하려 했던 것이 아니다. 피해자들을 개인적으로 알지도 못했다. 단지 눈앞에 보이는 누군가를 향해 달려든 것이다, 마치 좀비처럼. 이빨로 상대방의 살점을 물어뜯지만 않았을 뿐, 이 남자의 폭력은 좀비를 떠올리게 한다.

우리는 좀비와 함께 산다

되살아난 시체라는 뜻의 좀비’(Zombie)는 아직까지는 상상이 만들어 낸 존재일 뿐이다. 하지만 과연 현실에 좀비들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좀비 같은 사람을 우리 사회에서 찾는 것은 크게 어려운 일이 아니다. 우리는 어쩌면 이미 좀비와 함께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그들이 영화 속 좀비들처럼 기괴하게 걷지 않고, 입에 피를 묻힌 채 돌아다니지 않아서 이들이 좀비인지 분간하기 힘들 뿐이다.

우리 사회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있는 묻지 마 범죄는 눈에 띄는 사람을 아무 이유 없이 무차별적으로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다는 점에서 좀비들의 폭력과 닮았다.

묻지 마 범죄의 발생에 대한 소식은 더욱 빈번해지고, 범죄의 대상과 장소는 다양해지고 있다. 곳곳에서 좀비들의 묻지 마 공격에 노출될 가능성이 높은 사회에서, 우리는 이런 좀비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묻지 마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에게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이 대부분 상당히 오랜 기간 동안, 일하기를 원했지만 일할 기회를 찾지 못한 상태로 지내 왔다는 것이다.

일자리의 주된 기능은 우리에게 경제활동의 기회를 줌으로써 생존에 필요한 재화를 획득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일자리의 또 다른 기능은 사회적 상호 작용의 기회를 주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학교에 간다.’라는 말은 공부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또래의 친구들과 만나서 함께 사회적 상호 작용을 할 기회를 갖게 된다는 것을 뜻한다. 학생에게 학교는 공부와 사회적 상호 작용을 위한 공간이다.

마찬가지로 직장인들에게 출근한다.’라는 것은 돈을 번다.’는 것을 의미하는 동시에 오늘도 다른 사람들과 상호 작용을 한다는 것을 뜻한다. , 직장은 돈을 버는 곳이면서 동시에 사회적 상호 작용이 이루어지는 공간이기도 한 것이다.

따라서 일자리가 없으면 경제적으로 타격을 받지만 동시에 사회적 상호 작용의 기회도 잃게 된다. 사회적 동물인 인간에게 사회적 상호 작용의 기회를 박탈하는 것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할 수 있는 기회를 제거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묻지 마 범죄와 일자리

많은 사람이 자신의 직업과 직위를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과 인간관계를 유지한다. ‘김 부장이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김 부장이기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과 상호 작용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직장을 잃는다거나 애초에 취업의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은 사회 심리적 자산을 통째로 빼앗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일자리를 잃은 당사자에게는 사회 전체가 자신을 집단적으로 따돌리는 것 같은 심리적 충격이 가해지는 것이다.

사람들이 규범을 지키면서 살아갈 수 있는 이유는 사회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자신이 속한 사회의 규범을 점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규범을 점검할 수 있는 기회인 사회적 상호 작용으로부터 단절되면, 한 사회의 규범이 개인의 마음과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힘은 급격히 약화된다. ‘사람을 칼로 찌르면 안 된다.’는 지극히 당연해 보이는 규범조차도 다른 사람들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재확인되지 않으면 개인의 행동을 제어하는 힘을 상실하게 된다.

일하기를 원하고 열심히 준비했어도 일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상황은 좌절감을 불러일으킨다. 그 좌절은 자신을 좌절시킨 대상에 대한 분노를 야기한다. 여기에 더해서 직장이라는 상호 작용의 공간으로부터 배제되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과의 사회적 상호 작용의 빈도는 급격히 감소한다.

그 결과, 현실 규범을 재확인할 기회를 찾기 어려워진다. 자신을 좌절시킨 사회에 대한 분노와 현실 규범에 대한 검증력의 상실이 결합되면, 이제 묻지 마 범죄를 저지르려는 기본적인 준비는 끝나는 것이다. 좀비 모드로의 변환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좀비는 가해자인 동시에 피해자

일단 좀비가 되고 나면, 그에게서 지난날의 인간적인 모습을 찾는 것은 불가능해진다. 좀비는 눈앞에 보이는 사람은 모두 닥치는 대로 무자비하게 공격하는 존재일 뿐이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것은, 좀비들은 자신들이 본디 사람이었다는 사실은 쉽게 잊는다는 것이다. 좀비들은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전에는 모두 평범한 사람들이었다. 오히려 좀비가 되기 전에는 좀비를 혐오하고, 심지어는 좀비들을 없애거나 자신의 가족과 친구를 지키려고 그들과 치열하게 싸웠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묻지 마 범죄를 저지른 사람들의 지난날도 좀비들의 지난날과 크게 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 태어나면서부터 사람들을 향해 무차별적인 폭력을 휘둘렀던 괴물이 아니라, 아마도 한때는 착한 어린이였고, 성실한 학생이었으며, 불의에 치를 떠는 시민이었을 것이다.

좀비는 가해자이지만, 동시에 피해자이다. 이 피해자들 가운데는 우리가 지킬 수 있었던 사람들도 있었다. 아무리 힘세고 싸움 잘하는 사람도 좀비들에게 둘러싸이면 혼자서는 어쩔 수가 없다. 공동체의 도움과 협력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들이 힘을 모으고 도왔다면 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 홀로 남겨져 외롭게 싸우다 좀비가 되는 것이다.

결국, 우리가 지켜 내지 못한 사람들이 좀비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좀비가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다.

묻지 마 범죄에 대한 대책으로 범죄자에 대한 단호하고 엄격한 처벌이 강조된다. 강력 범죄에 대해서는 강한 처벌을 하는 게 맞다.

그렇지만 현실 규범에 대한 검증 능력을 상실해서 이미 좀비가 되어 버린 사람들에게 더욱 강력한 처벌을 경고한다고 해서 이들이 자신의 마음과 행동을 조절할 수 있게 될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따라서 실업 문제를 방치한 채로 묻지 마 범죄에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하는 것은, 좀비들을 만들어 내는 근본적 이유인 좀비 생산 공장은 그대로 놔두고 일단 눈에 띄는 좀비들만 단호하게 조치하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특히, 현재의 청년 실업 문제를 그대로 방치하는 것은 미래의 좀비들을 예약해두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좀비가 아닌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묻지 마 범죄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은 일하고 싶은 사람에게 일할 수 있는 기회를 내어 주는 것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좀비로 변하기 전에 일자리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과 행동의 적절성을 점검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 일자리가 사람을 좀비가 아닌 사람으로 살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일자리는 그 사람의 삶에만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일자리는 내 마음의 평화와 신체적 안전에 매우 중요한 구실을 한다. 일자리가 좀비 없는 사회를 만들기 때문이다. 공동체 구성원들의 삶은 매우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

따라서 좀비 없는 세상에서 안전하고 행복한 삶을 추구하고자 좀비가 될 위기에 놓인 사람을 지켜 줄 수 있는 공동체가 필요한 것이다.

당신은 곤경에 빠지거나 도움 받기를 원할 때 의존할 가족이나 친구가 있습니까?” 이 질문에 대한 당신의 대답은 어떠한가? 긍정인가? 아니면 부정인가?

지난해 국회입법조사처가 발표한 ‘OECD 사회통합지표 분석 및 시사점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사람은 곤경에 빠졌을 때 의존할 수 있는 가족이나 친구가 조사 대상 36개국(OECD 34개 회원국과 브라질과 러시아 포함)가운데 가장 적은 것으로 나타났다.

이 조사는 우리 사회가 좀비가 만들어지기 아주 좋은 여건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일자리를 잃는 순간 도움을 찾기 어려운 사회, 그래서 좀비 바이러스에 감염되기 쉬운 사회에서 살고 있는 것이다.

좀비 바이러스는 공동체가 무너진 곳에서 확산된다. 우리가 구해 내지 못한 사람들이 좀비가 된다.

따라서 좀비 없는 세상은 실업 문제의 해결, 그리고 위기에 놓인 사람에게 도움의 손길을 줄 수 있는 공동체의 회복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남의 일자리와 공동체의 회복은 나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도 필수적인 것이다.

 

 

 

 

 

[심리로 풀어 보는 세상사] 안과 밖이 다른 사람

 

부장 김기준은 너무 자상하다. 신입사원이 산더미 같은 서류를 들고 낑낑대는 모습을 발견하면, 바로 달려가 짐을 나눠 들어 주는 사람이다. 이런 상사가 있을까 싶을 정도로 인간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평판이 자자하다.

한편, 남편 김기준은 인정머리라곤 찾아볼 수가 없다. 자기는 조그맣고 가벼운 비닐봉지 하나 달랑 들고 앞서 걸어가면서, 가파른 오르막길에서 자기보다 더 많은 짐 보따리를 들고 오느라 뒤처진 아내에게 빨리 와!” 하고 소리치는 인간이다. 저런 남편이랑 어떻게 살 수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든다.

두 김기준은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동일 인격체임에도 회사에서의 김기준과 집에서의 김기준의 모습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보인다.

김기준은 공익광고협의회에서 만든 가족 사랑 캠페인광고의 주인공이다. 이 광고에는 김기준을 포함해 그의 아내, 아들, 그리고 딸이 등장한다. 광고에 등장하는 네 명의 가족 구성원의 공통점은 가족에게 행동하는 모습과 사회생활을 할 때의 모습이 너무도 다르다는 것이다. 마치 이중인격자처럼 밖에서 만나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친절하고 다정한 모습을 보이려고 최선을 다하다가도, 집에 돌아와서는 정작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가족에게는 무관심하고 냉정하게 변해 버린다.

당신은 안과 밖이 다른 사람인가요?” “밖에서 보여 주는 당신의 좋은 모습, 집안에서도 보여 주세요!”로 마무리되는 이 광고는 우리가 지금 가족에게 어떻게 행동하고 있는지를 되돌아보게 만든다.

이 광고가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이유는 우리 삶의 모습이 광고 속 가족과 닮았기 때문이다. 광고를 접했던 많은 사람이 자신의 모습을 광고에서 발견했다고 고백하곤 한다. 광고를 보면서 죄책감이 들었다는 사람도 있다. 사회생활을 하면서 만난 사람들에게는 아무리 화가 나는 일이 있더라도 만면에 미소를 짓다가, 집에만 들어가면 아주 작은 일에도 화를 내던 자신의 모습을 본 것이다. 학교에서는 친구들에게 다정하고 어른스러운 친구였지만, 집에만 돌아오면 짜증 부리는 아이로 변한 자신의 모습을 봤다고 고백하는 학생도 있다.

이 광고는 우리 자신의 행동을 객관화시켜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매우 의미심장하다. 광고 덕분에 많은 사람이 지금까지 자기가 가족에게 했던 행동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이 광고는 모든 문제는 개인에게 있다.’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는 것이다. 특히, “당신은 안과 밖이 다른 사람인가요?”라는 이 광고의 카피(문안)는 사회와 가정에서 이중적인 행동을 하는 것은 바로 당신 개인이 고쳐야 하는 문제라고 직접적으로 말하는 것처럼 들린다. 과연 모든 책임은 개인에게 있는 것일까?

두 얼굴의 사나이로 만드는 사회

직장에서는 마음이 넓고 성격이 원만하다는 평가를 받지만, 집에서는 속 좁고 화도 잘 낸다는 핀잔을 듣는 경우가 있다. 이런 사람들은 심지어 남들에게만 따뜻하고 가족에게는 냉정한 이중인격자라는 비난에 직면하기도 한다. 왜 직장이나 학교에서는 좋았던 성격이 집으로 돌아오면 나빠지는 것일까?

상냥한 사원, 친절한 꽃집 주인, 쾌활한 친구, 그리고 자상한 부장이 되려면 자기 자신을 잘 조절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 한다. , 욕 나오는 상황에서도 자신의 감정을 잘 조절해서 상대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득시키고, 심지어 미소까지 지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회사나 학교에서 성격과 인간성이 좋은 사람이라는 평을 들을 수 있다.

이런 자기 조절과 통제 과정에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 문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에너지의 양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대다수 직장인과 학생은 직장이나 학교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를 모두 소진한 채 집으로 돌아오는 경우가 허다하다.

에너지가 완전히 방전된 상태로 가정에 복귀하면, 직장이나 학교에서는 만면에 웃음을 띠고 넘길 정도의 약한 스트레스에도 자신의 감정과 행동을 조절하지 못한 채 짜증이나 화를 낼 가능성이 커진다. 최악의 경우에, 안팎에서 지속적으로 스트레스에 노출되면, 정신적 맷집이 아주 약해져서 사소한 스트레스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이는 두 얼굴의 사나이로 불렸던 헐크처럼 변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성적이고 친절한 과학자인 브루스 배너도 처음에는 몇 번이고 참는다. 하지만 참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고갈되는 순간 헐크로 변하고 마는 것이다. 헐크와 마찬가지로 우리도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에너지가 고갈되면, 직장이나 학교에서와는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두 얼굴의 사나이가 되고 만다.

구성원들의 에너지를 모두 고갈시켜 버리는 의 조건을 그대로 내버려 둔 채 개인만의 노력으로 안과 밖이 같은 사람이 되기를 요구하는 것은 개인에게 불가능한 작전을 수행하기를 요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밖에서 보여 주는 좋은 모습을 집 안에서도 보여 주려면 개인의 이러한 결심이 실현될 수 있는 사회적 조건도 함께 갖추어져야 하는 것이다. ‘가족 사랑은 가족 구성원만의 노력으로 완성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의 보약

미국 플로리다대학교의 로이 버마이스터 교수 등의 연구에 따르면, 우리가 자기조절과 통제를 위해 사용하는 에너지는 혈당이라고 한다. 혈액 내에 존재하는 포도당이라고 할 수 있는 혈당이 바로 뇌가 자기 조절과 통제를 위해 사용하는 에너지 또는 일종의 연료인 셈이다. 실제로 한 연구에서는 설탕이 들어간 레모네이드를 마신 사람들이 무설탕 레모네이드를 마신 사람들보다 자기 통제를 더 효과적으로 수행한다는 것이 밝혀졌다.

우리가 혈당을 획득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균형 잡힌 식사를 규칙적으로 하는 것이다. 만일 당신의 남편이나 아내가 당신에게 날카롭게 대한다면, 배우자를 비난하기 전에 먼저 배우자의 영양과 건강상태를 확인해 보는 것이 좋다. 배우자는 당신에게 일부러 못되게 구는 것이 아니라 당신에게 잘 대하려는 데 필요한 에너지가 바닥난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이런 사람에게 인간성의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문제 해결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먼저 몸의 균형을 회복시켜 주는 것이 좋다. 그리고 그 첫 단계는 제대로 된 식사를 하고 에너지를 재충전할 수 있는 시간, 곧 휴식을 취할 시간을 제공하는 것이다. 밥이 보약이라는 말이 있다. 또한 잠이 보약이라고도 한다. 건강한 식사와 휴식은 육체의 보약이기도 하지만 정신적 맷집을 키워 주는 마음의 보약이기도 한 것이다.

, 마음, 그리고 사회

우리의 몸과 마음은 독립적으로 기능하지 않고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몸이 변하면 마음도 변하고, 마음에 변화가 오면 몸도 변화한다. 사람들이 자신의 마음을 잘 조절하거나 통제하지 못하는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그 사람의 몸에 있다. 몸의 불균형이 마음의 균형을 깨뜨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평화로운 마음으로 살려면 먼저 내 몸이 평화를 찾아야 한다. 더 나아가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평화를 찾게 해야 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와 환경으로부터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심리로 풀어 보는 세상사] 돈으로 행복을 사는 방법

 

부자인데, 왜 그렇게 우울해요

스크루지 영감, 그에게는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분명하게 구분된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바로 돈이다. 돈은 그가 유일하게 갖고 싶어 하는 것이다. 그는 돈밖에 모르는 인간이다. 덕분에 엄청난 돈을 모았다.

하지만 돈을 쓰는 데는 지독하리만큼 인색하다. 그의 인색함은 정평이 나 있어서 심지어는 거지들도 스크루지에게는 돈을 구걸하지 않는다. 스크루지는 다른 사람에게만 인색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자기에게 쓰는 돈도 철저히 아낀다. 크리스마스 전날 밤, 날씨가 너무 추워서 사무실이 꽁꽁 얼어붙을 것 같지만 불을 피울 생각조차 하지 않는다.

스크루지 영감이 싫어하는 것은 바로 사람이다. 다른 사람과 관계 맺는 것을 싫어한다. 그래서 친구도 없고, 아내도 없으며, 물론 아이도 없다. 그는 혼자다. 혼자가 편하다.

하나밖에 없는 혈육인 조카가 크리스마스에 자기 가족과 함께 지내자며 초대의 말을 건네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너는 너대로 크리스마스를 보내라며 나는 나대로 알아서 할 테니까 상관하지 말라고 한다. 그에게는 돈도 없는 인간들이 크리스마스라고 흥겨워하는 것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스크루지는 돈이 사람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굳게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조카에게 묻는다, 가난뱅이 주제에 크리스마스가 뭐가 그렇게 기쁘냐고. 그러자 그의 조카가 되묻는다, 삼촌은 엄청난 부잔데 왜 그렇게 우울하냐고.

영국의 찰스 디킨스가 쓴 유명한 소설 크리스마스 캐럴의 스크루지 영감은 자신이 좋아하는 돈을 가졌고, 자기가 혐오하는 인간관계는 단호하게 차단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원하는 것을 가졌고,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으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다.

돈이 행복을 방해하는 이유

사람들이 돈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 가운데 하나는 돈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행복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더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을수록, 더 많은 월급을 받을수록 더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스크루지와 크게 다르지 않은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실 이러한 스크루지식 믿음은 어느 정도의 진실을 담고 있다.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 정도로 아주 가난한 사람보다는 돈 걱정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부자가 더 행복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연구들에 따르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돈이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돈이 더 이상 우리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데 많은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그 결과, 아주 가난한 사람보다 경제적으로 안정된 중산층이 훨씬 더 행복하지만, 중산층에 비해 돈이 넘쳐나는 부유층이 중산층보다 더 큰 행복감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것은 아니라는 얘기이다.

많은 돈이 꼭 많은 행복을 보장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미국 미네소타대학교의 캐슬린 보스 등의 학자들이 2006사이언스(Science)에 발표한 연구에서는, 돈에 대한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활성화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사회적 관계를 맺거나 그 관계를 지속하려는 욕구가 줄어든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돈에 대해 생각하면 혼자 놀고 혼자 일하는 것에 대한 선호는 증가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날 때 물리적으로 더 많은 거리를 두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자신이 어려울 때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요청하지도 않고, 반대로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필요할 때는 도와주지 않는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자신이 추구하는 가장 중요한 가치가 돈이 된 사람의 인간관계는 위축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다른 사람과의 직접적인 상호 작용은 부담스러워하며, 혼자 생활하는 것을 선호하고, 인간관계에 문제가 발생했을 때 관계를 지켜 나가고자 노력하기보다는 관계의 단절을 선택할 가능성이 커지는 것이다. 돈에 대한 생각만으로도 사람들은 스크루지 영감처럼 행동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돈으로 행복을 사는 방법

행복에 대한 수많은 연구가 공통적으로 보고하는 것은 행복은 관계에서 온다는 것이다. 사람들과의 따뜻한 관계가 행복을 만드는 핵심 요소인 것이다. 하지만 돈은 고립을 유도한다. 돈이 많은 사람의 인생이 쓸쓸해지기도 하는 이유다.

따라서 돈은 경제적인 지원을 제공하여 우리의 행복을 증진시킬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지만, 동시에 사회적 관계의 끈을 약화시키도록 우리를 무의식적으로 조정하여 우리의 행복을 감소시키는 데 기여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돈을 이용해서 더 행복해질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한 가지 방법은 돈을 자기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연구에서는 가족도 다른 사람에 포함됨)을 위해 쓰는 것이다.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대학교의 엘리자베스 던 등의 학자들이 2008사이언스에 발표한 연구에서, 미국인들을 대상으로 자신을 위해 쓴 지출액(생활비와 자기 선물)과 타인을 위한 지출액(선물, 기부)이 행복감에 미치는 영향을 조사했다.

사람들은 한 달 평균 약 1713달러를 자신을 위해 쓰고, 145달러를 타인을 위해 쓴 것으로 나타났다. 열 배가 넘는 금액을 타인보다 자신을 위해 사용한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자신을 위한 지출은 행복감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그 반면에, 기부나 타인을 위한 선물과 같이 친사회적인 지출이 많으면 많을수록 행복감은 더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평균 5천 달러가량의 보너스를 받은 사람들을 대상으로 한 두 번째 연구에서도, 자신이 받은 보너스 중에서 타인을 위해 지출한 금액이 많으면 많을수록 보너스를 받고 6-8주가 지난 뒤의 행복감이 더 커지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신을 위해 사용한 것보다 훨씬 적은 금액인데도 타인을 위해 사용한 돈은 우리의 행복을 매우 효과적으로 증진시킨 것이다.

만일 아침에 참여한 실험의 대가로 한 사람은 5달러를 받고 다른 사람은 20달러를 받았다면 저녁에 누가 더 행복감을 느낄까? 아마도 대부분은 5달러를 받은 사람보다는 20달러를 받은 사람이 더 행복해할 것이라고 예상할 것이다.

실제로 누가 더 행복한지를 알아보려고 아침에 참여자들에게 5달러나 20달러를 주고 오후 다섯 시까지 받은 돈을 모두 사용하게 했다. 결과에 따르면, 20달러를 받은 사람과 5달러를 받은 사람 간의 행복감의 차이는 없는 것으로 나타났다. , 아침에 받은 돈의 액수의 차이는 저녁의 행복감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 것이다.

그렇다면 아침에 받은 돈을 자신을 위해 사용한 사람과, 타인을 위해 사용한 사람이 있다면 누가 저녁에 더 행복할까? 한 조건에서는 받은 돈을 모두 자신을 위해 사용하게 했고, 다른 조건에서는 모두 타인을 위해 쓰게 했다.

결과는 타인을 위해 돈을 사용한 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사용한 사람들보다 돈을 받기 전인 아침에 비해 돈을 모두 사용하고 난 저녁에 더 행복해진다는 것을 보여 주었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 없다고 하는데, 그 이유는 돈을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사용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는 돈이 많을수록 행복하고, 이 돈을 자신을 위해 사용할 때 더 행복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하는 행복감은 돈의 액수보다는 돈을 어떻게 사용하는지에 따라 크게 달라지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내가 아닌 남을 위해서 돈을 사용했을 때 우리의 행복감은 더 크게 증가한다. 마치 크리스마스 캐럴의 마지막 장면에서 스크루지 영감이 이웃에게 선물을 나눠 주고 치료비를 제공하면서부터 인생의 행복을 맛보기 시작했던 것처럼, 타인을 위해서 사용한 돈이 자신의 행복감을 증진시키는 것이다.

돈으로 행복을 살 수도 있는 것이다.

 

 

[심리로 풀어 보는 세상사] 선생님을 살려 내야 하는 이유

학교 의 추억

 

요즘처럼 일진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예전에도 학교마다 잘나가는(?) 아이들이 있었다. 아직도 기억에 남는 친구 한 명은 또래와는 차원이 다른 골격과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눈빛만으로도 학생들을 바로 주눅 들게 만들었다. 주먹도 눈빛에 못지않아서 개학한 지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아 학교를 평정해 버렸다. 누구나 인정하는 학교의 이 된 것이다.

그 당시에는 잘 몰랐는데, 지금에 와서야 흥미로운 것은 을 먹었던 그 친구가 선생님들한테는 꼼짝도 못 했다는 것이다. 몸이 너무 왜소해서 살짝 밀치기만 해도 바로 휘청거릴 것만 같던 선생님 앞에서도 그 친구는 다른 학생들과 똑같은 학생일 뿐이었다.

선생님이 말씀하시면, 당연히 그 말씀에 따라야 한다는 점에서는 그 친구나 다른 친구들이나 차이가 없었다. 심지어 선생님이 비합리적인 지시나 요구를 하더라도 도 별 수 없이 선생님의 말씀을 따를 뿐이었다.

어쩌면 학생들이 선생님을 폭행했다는 뉴스가 심심찮게 나오는 요즘에는 상상하기 쉽지 않은 일일지도 모른다. 교감 선생님한테 담배를 뺏기고 야단을 맞자, 교감 선생님의 머리와 배 등을 주먹과 발로 폭행한 사건. 방학의 보충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휴대 전화를 뺏었다고 칼을 꺼내 위협한 사건. 이제는 학생들이 선생님께 가하는 폭력은 일상화되었고, 그 강도는 우리의 상상을 훨씬 뛰어넘는다.

요즘과 비교하여 달랐던 것 가운데 또 하나는 그 당시에는 왕따라고 불리는 형태의 집단 따돌림이 없었다는 것이다. 특이한 친구들은 꽤 있었다. 말은 청산유수였는데, 중학생인데 글을 제대로 읽지 못했던 친구, 구구단을 외우지 못하던 친구, 뚱뚱한 몸집에 변성기가 지났는데도 여자 목소리를 내면서 땀 냄새를 진하게 풍기던 친구들 말이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집단 따돌림의 피해자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은 친구들이 분명히 존재했지만, 그 당시에는 특정인을 왕따로 삼아서 괴롭히는 일은 없었다. 서로 친한 친구들이 달랐을 뿐이지, 누군가를 반 전체가 괴롭히거나 착취하는 일은 없었다.

나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존재

무엇이 이런 차이를 만들었을까? 다양한 이유가 있겠지만, 우리 사회에서 선생님이 의미하는 바가 크게 달라졌다는 것도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지난날의 선생님은 단순히 어떤 지식을 가르쳐 주는 사람을 넘어서는 존재였다. 선생님은 인간의 도리가 무엇인지 알고, 자신이 가르치는 학생을 하나의 통합된 인격체로 만들어주는 스승이었다.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 속에는 자신에게 단순한 지식만을 전달해 주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하나의 완성된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존재에 대한 존경심이 내포되어 있다. 예전에 선생님의 한마디에 학교의 도 고개를 숙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먹으로 학교를 주름잡던 친구에게도 자신을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존재에 대한 존중과 존경이 있었던 것이다.

학교에서 가장 잘나가는 을 포함해서 학생들이 선생님에게 이런 생각을 품었던 것은 사회가 선생님을 그런 존재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 학생들의 생각은 당시 우리 사회가 선생님이라는 대상에 대해 가지고 있던 생각을 반영한 것이다.

학부모의 입장에서 선생님은 자신의 아이를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존재였다. 빗나가려는 자신의 자식에게 매를 든 선생님에게 감사한 마음이 먼저 들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선생님은 아이들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스승이라고 믿고 있었고, 학생들도 자연스럽게 사회 전체가 갖는 믿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였던 시대였다.

돈 내고 사는 서비스

안타깝게도 우리 사회는 선생님에 대한 존중을 거둬들이기 시작했다. 동시에 선생님이라는 존재는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달하는 사람으로 한정되기 시작했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우리가 사회생활을 하면서 비용을 지불하고 받을 수 있는 여러 가지 서비스 가운데 하나로 간주되었다. 선생님은 학부모나 학생에게 그저 지식 전달의 기능을 담당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우리 사회가 선생님을 지식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으로 한정하면서부터 선생님은 폭력의 대상이 되었다. 예전에는 선생님의 한마디에 학교의 도 고개를 숙였지만, 요즘은 서비스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돈을 지불한 의 위치에서 자신의 돈을 받고 일한다고 생각하는 인 선생님께 불만과 폭력을 행사한다.

존경받는 심판이 필요한 사회

선생님에 대한 존중이 사라진 시대의 사회 현상 가운데 하나는 집단 따돌림과 같은 학교 폭력이다. 학교 폭력이 우리 사회의 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한 시점은 선생님들에 대한 사회적 존중이 사라진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선생님의 존재감이 약화되자, 학내에서 약자에 대한 폭력이 증가한 것이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선생님은 지식을 전달하지만, 동시에 학생들 사이의 상호작용을 조율하는 역할을 담당한다. 학교라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경기의 심판을 보는 것이 선생님이다. 학교를 축구 경기장이라고 하면 학생은 선수이고, 선생님은 심판이다.

심판의 주된 역할은 반칙이 일어나지 않도록 경기를 진행하고, 선수들이 반칙을 저지르면 주의나 경고, 심지어는 퇴장 조치를 취해서라도 경기 규칙을 지키게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심판, 곧 선생님들에게 권한이 있어야 한다. 권한이 없는 심판의 지시는 선수들이 무시하기 때문이다.

학교 폭력에 대한 다양한 대책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런데 많은 경우, 대책은 선생님들의 권한보다는 책임에 초점을 맞춘다. 선수들이 더 이상 존경심을 보이지 않는 심판에게 사회가 계속 책임을 묻게 되면, 반칙은 줄어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증가할 가능성이 높다.

사회가 심판의 권한과 경기 운영의 자율권은 대폭 제한하면서 책임만 계속 물으면 선수들은 심판을 더 우습게 여기고 그의 지시를 무시하게 된다. 학교 폭력을 포함한 다양한 학교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심판의 권한과 경기 운영의 자율권을 늘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장기적으로는 사회적 차원에서 선생님에 대한 존경심을 살려야 한다. 선수들은 자신들이 존경하는 심판이 나오면, 옐로카드나 레드카드를 꺼내지 않더라도 심판의 지시를 믿고 따르게 된다. 존경하는 심판이 있는 경기장에는 무질서와 폭력이 존재할 수 없다.

선생님이 존경받는 사회에서 학생은 안전하게 성장할 수 있고, 그때야 비로소 학교는 하나의 완성된 인격체를 만드는 공간으로 살아나게 된다.

선생님이 살아나야 학교가 살아나고, 그래야 학생이 살아난다. 그리고 학생이 살아나야 나라가 살아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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