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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공부, 교리

오늘의 성인 토마스 모어(6.22)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22|조회수23 목록 댓글 0

오늘의 성인 토마스 모어(6.22)

토마스 모어(6.22)

성인명 토마스 모어 (Thomas More)

축일 622

성인구분 성인

신분 법률가, 정치인, 순교자

활동지역

활동연도 1478-1535

같은이름 도마, 모로, 모루스, 토머스

 

 

성 토마스 모어는 147827일 영국 잉글랜드의 런던(London)에서 법률가이자 판사인 존 모어(John More) 경과 그의 첫 번째 부인인 아그네스(Agnes)의 아들로 태어났다. 캔터베리(Canterbury)의 순교자인 성 토마스 베케트(Thomas Becket, 1229)의 이름을 딴 그는 라틴어 학교에 다녔고, 12살 때부터 추기경이자 대법관이며 캔터베리의 대주교인 존 모턴(John Morton)의 궁정에서 시종으로 일하며 상류층과 당대의 저명한 인문주의자들을 만났다. 1492년부터 그는 아버지의 권유로 옥스퍼드(Oxford)와 런던 대학에서 신학과 법학을 공부하였다. 1499년에는 네덜란드의 인문주의자인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를 만나 평생의 친구가 되었다. 그는 인문학과 신학에 큰 관심을 보였고 이미 뛰어난 재능으로 명성을 얻고 있었다. 1500년부터는 런던의 카르투지오회에서 4년간 생활하며 사제직을 꿈꾸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의 뒤를 이어 변호사가 되기를 바랐던 아버지의 압력으로 사제직의 꿈을 접고 변호사로서 법조계에 진출하고 결혼을 선택하였다. 1501년 런던에서 변호사가 된 그는 1504년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고, 1505년에 제인 콜트(Jane Colt)와 결혼하여 세 명의 딸과 아들 하나를 두었다. 그런데 1511년 아내가 사망하자 그는 자신보다 7살 연상의 과부인 앨리스 미들턴(Alice Middleton)과 재혼하였다. 앨리스는 교육을 받지는 못했지만 경험 많고 상식적인 주부로서 성 토마스 모어의 어린 자녀들을 사랑으로 돌보았다.

 

성 토마스 모어의 집은 영국의 문예부흥 및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그 이유는 당대의 석학과 지성인들이 그를 중심으로 모였기 때문이다. 그의 해박한 지식과 기지는 만인의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영국 인문주의자들의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당대 최고의 석학이었다. 그는 자신과 친분을 맺은 에라스무스를 초청해 집에 머물도록 했고, 그곳에서 에라스무스는 라틴어뿐 아니라 그리스어 작품들을 번역하였다. 그는 또한 가까운 친구 사이인 케임브리지(Cambridge) 대학교의 총장이자 로체스터(Rochester) 교구의 주교인 성 요한 피셔(Joannes Fisherj, 622)와 다른 학자들과도 활발한 교류를 이어갔다. 그 역시 시와 역사를 비롯하여 프로테스탄트를 반대하는 논문, 신심 서적, 기도문 등을 저술하고 고전 번역 작업도 하였다. 1515년 외교사절로 임명되어 벨기에에 체재 중이던 그는 자신의 대표작인 유토피아”(Utopia) 집필을 시작해 런던으로 돌아와 완성한 후 1516년 벨기에 루뱅(Louvain)에서 라틴어로 출판하였다. “유토피아는 이성이 지배하는 이상적인 국가상을 묘사한 것으로 출판 즉시 인문주의자와 공직자들의 필독서이자 세계의 고전의 되었다.

 

1509년 국왕 헨리 7(Henry VII)가 서거하고 그의 아들인 헨리 8세가 왕위에 오른 뒤 성 토마스 모어는 1510년 런던의 사정 장관보(司政 長官補)로 임명되었고, 1515년 프랑스와 플랑드르(Flandre)의 외교사절로 활약했고, 1517년에는 추밀원에 진출했으며, 1521년에 재무 차관에 임명되고 기사 작위도 받았다. 그리고 1523년에 하원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그해에 그는 자신의 저서인 루터를 배격하는 헨리의 변호”(Vindication of Henry against Luther)에서 1521년에 헨리 8세가 출판한 칠성사 옹호론”(Assertio Septem Sacramentorum)을 지지하였다. 헨리 8세는 그를 왕실 자문위원으로 임명하고 비공식적으로 그를 방문하곤 했다. 1520년대 후반 헨리 8세는 아라곤의 캐서린(Catherine of Aragon) 왕비와의 이혼을 고려하면서 그에게도 자문하였다. 헨리 8세는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여러 자녀를 두었으나 아들이 없었는데, 레위기 2021(“어떤 사람이 자기 형제의 아내를 데리고 살면, 그것은 불결한 짓이다. 그가 제 형제의 치부를 드러낸 것이므로, 그들은 자손을 보지 못할 것이다.”)을 근거로 이혼을 고려했다. 캐서린은 헨리 8세의 형인 웨일스의 왕자 아서(Arthur)와 결혼했다가 결혼 직후 아서가 사망한 뒤 헨리 8세와 다시 결혼하였다. 성 토마스 모어는 처음에는 전문적 지식이 부족하다며 답변을 거절했으나 계속 추궁받자 국왕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분명히 했다.

 

1529년 토머스 울지(Thomas Wolsey) 추기경이 대법관직에서 해임된 후 헨리 8세는 성 토마스 모어를 그 자리에 앉혔다. 그는 이 직책을 맡은 최초의 평신도로 국왕의 이혼에 대해 강력한 어조로 반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법관으로 기용되었다. 판사로서 그는 공정하고 청렴하며 신속한 판결로 칭송을 받았다. 하지만 그의 경력과 명성이 절정에 다다랐을 무렵 국왕은 자신의 재혼을 위해 캐서린과의 결혼 무효에 대한 그의 지지를 요구했다. 1531년 헨리 8세는 스스로 영국 교회의 수장이 되어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영국을 분리하고, 모든 성직자는 이를 인정하고 그의 새로운 칭호인 영국 교회의 보호자이자 수장임을 받아들이는 서약(Oath of Supremacy)을 하도록 강요했다. 성 토마스 모어는 대법관직을 사임하고 싶었으나 성 요한 피셔의 설득으로 그리스도의 법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라는 추가 조항을 받아들여 서약을 수락했다. 하지만 헨리 8세의 의도가 점점 분명해지고 교황청에 캐서린 왕비와의 이혼 허가를 요청하는 서류에 그가 서명을 거부하자 국왕의 태도가 돌변하였다. 성 토마스 모어는 가톨릭교회를 공격하는 일련의 서류에 대해 공식적으로 반대를 표명한 후 1532년 대법관직과 모든 공직에서 사임하고 첼시(Chelsea)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다.

 

헨리 8세는 1533년 초에 임신 중인 앤 불린(Anne Boleyn)과 비밀리에 결혼했고, 새로 임명된 캔터베리(Canterbury)의 대주교로부터 캐서린과의 혼인에 대한 무효 선언을 받고 앤 불린과의 혼인이 유효하다는 선언도 받았다. 1534년 수장령(首長令, Act of Royal Supremacy)이 공포되면서 헨리 8세와 앤 불린의 자녀들에게 왕위가 계승되어야 한다는 왕위 계승법도 통과되었다. 앤 불린의 왕비 책봉식에 불참하여 왕의 분노를 샀던 성 토마스 모어는 왕위 계승법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면서 국왕에게 정면으로 맞서게 되었다. 결국 그는 영국 교회의 수장인 국왕의 권위를 부인했다는 명목으로 1534417일 체포되어 런던탑에 감금되었다. 그는 15개월 동안 옥중 생활을 하는 중에도 왕의 수장령에 서명할 것을 요청하는 토머스 크롬웰(Thomas Cromwell)에게 침묵권을 행사하며 반대 의사를 표명하였다. 1535622일 친구인 성 요한 피셔 주교가 처형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지켜본 성 토마스 모어는 71일 반역죄로 재판을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았다. 그는 판사들에게 이 세상 삶이 끝난 후 모두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 속에 다시 만나기를 바랍니다.”라고 기원하였다.

 

그리고 5일 뒤인 153576일 성 토마스 모어는 처형장인 타워힐(Tower Hill)로 끌려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그는 런던 시민들 앞에서 나는 국왕의 충실한 종이 될 수 있으나 먼저 하느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라고 선언한 위대한 신앙인이었다. 그는 또한 사형 집행인에게 내 수염은 반역죄를 짓지 않았으니 도끼를 맞을 이유가 없네.”라고 농담을 하며 수염을 정리했다고 한다. 그의 처형 소식은 유럽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의 절친이었던 에라스무스는 그의 사형 소식을 듣고 영혼이 눈보다 깨끗하고 결코 과거나 미래에서나 영국이 다시 가질 수 없는 천재라며 그를 애도하였다. 성 토마스 모어의 시신은 런던탑의 사슬에 묶인 성 베드로 성당(Church of St Peter ad Vincula)에 묻혔고, 참수된 그의 머리는 런던 다리(Tower bridge)의 장대 위에 오랫동안 매달려 있다가 템스강에 던져지기 전에 그의 딸 마거릿 로퍼(Margaret Roper)가 담당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되찾아 캔터베리의 성 던스탄 성당(Church of St Dunstan)에 있는 로퍼 가문 묘에 안장하였다.

 

1850년 영국의 가톨릭 교계제도가 재확립된 후 헨리 8세의 수장령과 관련해 순교한 이들의 시복시성이 추진되면서 18861229일 성 토마스 모어와 로체스터의 성 요한 피셔 주교 그리고 52명의 순교자들이 교황 레오 13(Leo XIII)에 의해 시복되었다. 그리고 순교 400년이 되는 1935519일 교황 비오 11(Pius XI)에 의해 성 요한 피셔 주교와 함께 성인품에 올랐다. 성 토마스 모어의 축일은 79일로 정해졌다가 1969년 전례력 개정 이후 성 요한 피셔 주교와 같은 622일에 함께 기념하게 되었다. 한편 1980년 성 요한 피셔 주교와 성 토마스 모어는 영국의 종교 개혁에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성공회의 성인 목록에 추가되어 76일에 함께 축일을 기념하고 있다. 법률가의 수호자로서 공경을 받던 성 토마스 모어는 20001031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Joannes Paulus II)에 의해 정치인들의 수호성인으로 선포되었다.

 

2001년 개정 발행되어 2004년 일부 수정 및 추가한 로마 순교록76일 목록에서 영국 런던에서 성 토마스 모어의 순교를 기념하며 622일에 성 요한 피셔와 함께 그의 축일을 기념한다고 적었다. 그리고 622일 목록에서 성 요한 피셔 주교와 성 토마스 모어는 영국의 국왕 헨리 8세의 이혼과 로마 교황에 대한 수위권 논쟁에 반대하다가 런던탑에 투옥된 순교자이며, 학식과 위엄으로 유명했던 로체스터의 주교 성 요한 피셔는 이날 국왕의 명령으로 감옥 앞에서 참수당했고, 고결한 삶을 살았던 아버지이자 대법관이었던 성 토마스 모어도 가톨릭교회에 대한 충성심으로 76일 성 요한 피셔와 같이 순교에 동참했다고 기록하였다. 성 토마스 모어는 라틴어로는 성 토마스 모루스(Thomas Morus, 또는 토마스 모로)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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