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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과 묵상

[자아의 신화를 찾아서] (1) 상담을 시작하며 삶의 진통들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5.12.01|조회수48 목록 댓글 0

[자아의 신화를 찾아서] (1) 상담을 시작하며

삶의 진통들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이번 주부터 삶과 신앙 전반에 관한 궁금증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상담코너, ‘자아의 신화를 찾아서가 개설됩니다. 김정택 신부님과 이나미 원장님께서 답변해주실 본란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바랍니다.

스페인 안달루시아의 광야에서 양을 치며, 더 넓은 세상을 만나고 싶어하던 청년 산티아고는 똑같은 꿈을 연달아 두 번이나 꿉니다. 꿈에 한 아이가 나타나서, “만일 당신이 이집트의 피라미드로 간다면 숨겨진 보물을 찾게 될 거예요하고 말합니다. 산티아고는 어느 날 살렘의 왕이라는 한 노인을 만나게 됩니다. 그는 이렇게 일러줍니다.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내는 것이야말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지. 세상 만물은 모두 한가지라네. 자네가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 온 우주는 자네의 소망이 실현되도록 도와준다네.” 이어서 그 노인은, “보물이 있는 곳에 도달하려면 표지(標識)를 따라가야 한다네. 신께서는 우리 인간들 각자가 따라가야 하는 길을 적어 주셨다네. 자네는 신이 적어주신 길을 읽기만 하면 되는 거야.” 그날부터 산티아고는 긴 여정을 시작합니다.(파울로 코엘료, ‘연금술사참조)

 

 

 

우리는 모두 자아의 신화를 찾아 길을 떠난 사람들입니다. 그 길은 바로 하느님이 적어주신 표지(標識), 우리들 삶의 곳곳에 놓여 져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자신의 그릇된 욕망과 욕심에 사로잡혀 그 표지들을 제대로 읽지 못합니다. ‘자아의 신화를 이루는 것은 바로 우리 모두에게 주어진 유일한 의무라고 파울로 코엘료는 그의 대표작인 연금술사에서 이야기 합니다. 스위스의 정신의학자이자 분석심리학을 창시한 칼 융은, 자아의 신화를 이루어나가는 과정을 개성화의 과정(Individuation process), 자기실현의 과정이라 불렀습니다. 그도 똑같이 우리 모두가 가야 할 그 길은 바로 우리에게 부과된 유일한 의무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모두 알게 모르게 그 길을 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엄청난 부와 풍요를 차지하고 있는 현대인들은 대부분 행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숱한 삶의 질곡에서 허둥대며 어렵게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불안이나 두려움, 삶의 공허감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칼 융은 현대인들이 바로 신화를 잃어버린 세대라 표현하며, 그것이 바로 현대인들을 방황하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라 지적합니다.

 

 

 

상담코너를 통해서 저는 여러분들과 삶의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습니다. ‘자아의 신화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삶의 진통들을 함께 나누고, 잘못 들어선 길을 바로잡고, 제대로 된 방향으로 다시 돌아서 열심히 삶을 살아 나가도록 여러분들을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그것이 바로 사제요, 수도자인 제가 이 상담코너를 통해서 여러분들을 만나려는 이유입니다. 여러분이 자아의 신화를 찾아나가는 길에서 혹 방황하고 있을 때, 슬쩍 제가 손만 잡아주어도 큰 힘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그리고 저도 여러분의 삶의 이야기들을 통해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 상담이란 바로, 서로가 성장해 나가는 배움의 과정이요, 깨달음의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상담을 저는 둘이 함께 추는 이라 비유하고 싶습니다. 상담에서는 내담자와 상담자가 서로 잘 협력해야만 경쾌하게 스텝을 밟으며 춤이 주는 신바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신바람을 저는 성령의 바람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어떤 주제이든지, 어떤 어려움이든지 그 사연을 보내주시면, 여러분과 제가 함께 손을 잡고 신나는 스텝으로 춤을 출 수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바로 하느님의 신바람을 함께 체험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가 자아의 신화를 찾아나가며 행복해지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자아의 신화가 겨냥하고 있는 것은 바로 진정한 나 자신, 즉 하느님이 내 안에 심어주신 이마고 데이(Imago Dei), 바로 하느님의 이미지를 찾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가톨릭신문 독자 여러분들이 이 뜻 깊은 여정에 적극적으로 함께 해 주시기를 고대합니다!

 

 

[자아의 신화를 찾아서] (2) 상담을 시작하며

힘들고 아픈 마음 함께 나누고파

 

삶과 신앙 전반에 관한 궁금증을 알기 쉽게 설명해주는 상담코너, ‘자아의 신화를 찾아서가 개설됩니다. 김정택 신부님과 이나미 원장님께서 답변해주실 본란에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과 성원을 바랍니다.

 

내담자들이 처음 방문하면 우선 지금 무엇이 가장 힘든지 묻게 된다. 가까운 가족이 세상을 떠난 사람, 건강이 나빠진 사람, 거액의 손실을 경험한 사람, 억울하게 누명을 쓰고 지위에서 쫓겨 난 사람이들은 모두 상처받은 마음을 부여잡고, 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이들이다. 약의 도움을 받아 증상이 완화되고, 다시 살아갈 수 있도록 공감과 위로를 받으며 조금씩 상처가 회복되긴 하지만, 상담과정에서 근본적으로 이들과 씨름할 문제는 고통의 의미이다.

 

 

 

우리는 종종 어떤 나쁜 일이 일어나면 도대체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을까”, “내가 도대체 무엇을 잘못했다고 이런 벌을 내려 주는 것일까라고 묻게 된다. 실제로 죄 하나 짓지 않은 어린아이를 갑자기 병으로 잃은 부모, 평생을 정직하고 열심히 살았는데 하루아침에 사기꾼(요즘엔 큰 증권회사나 신용금고 같은 기관들) 때문에 전 재산을 날린 노인, 종교생활을 열심히 하며 오로지 자식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며 살았는데 자식이 엇나가 행패를 부리기에 인생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부인 등특히 신앙이 있는 경우는 오히려 사랑이신 하느님이 우리에게 왜 고통을 주시는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토로하기도 한다.

 

 

 

완전한 사랑의 화신이자 만물의 창조주인 하느님께서 어째서 인간이 고통을 겪게 그대로 놔두시는 것인지(혹은 그조차 계획을 하신 것인지)에 대한 신학적 논의는 기독교뿐 아니라 타종교에서도 오랫동안 씨름해온 질문이며, 여전히 많은 철학자들이 지금도 묻고 있는 질문이다. 그리스도교 신학자들은 그것이 인류의 원죄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기도 하고, 다른 누군가의 죄를 고통받는 사람이 대신 받는 것이라 말하기도 하고, 고통으로 더욱 겸손하게 만들고 신앙을 단련시켜 천국에 들게 하기 위함이라고도 한다. 불교에서는 인생 그 자체가 생로병사라는 근본적인 조건에 더해서, 만나기 싫은 사람을 만나야 하고, 좋아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고, 자기 욕심과 본능에 휘둘리는 육체 그 자체 때문에 고통스럽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상담 과정에서도 이런 유사한 질문을 할 때, 필자는 어떻게 설명하는가. 종교나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도 아니고, 또 고통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할 입장은 되지 못해서 원인에 대해 말해 줄 수는 없다. 다만, 고통스런 상황에 처했을 때 역설적으로 우리가 과연 무엇이 내 인생의 본질인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는 이야기를 한다. 예컨대 갑자기 신변에 이상이 생겨 사회의 밑바닥으로 떨어졌을 때 끝까지 남는 사람은 누구인지, 돈과 지위와 건강과 사람까지 모두 잃고 이 세상에 나 혼자 남아있다는 생각이 들 때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 생각하게 해 준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문제에까지 깊이 들어가는 내담자들이 꼭 많은 것만은 아니다.

 

 

 

짧은 몇 가지 질문과 답으로 이루어진 상담 코너는 사실 여러 가지 제한이 많아서 특히 오랜 기간 분석을 하면서 참자기를 찾도록 도와주려고 하는 입장에서는 여러 가지 그 의의에 대해 회의가 가는 부분도 많다. 하지만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분석가나 상담가를 찾아가지 못하는 사람, 또 지면으로라도 크고 작은 도움을 받고 싶어하는 이들을 위해, 짧은 글이 가질 수밖에 없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상담코너를 시작하려고 한다.

 

 

 

세상 모든 사람들은 다 각자의 문제가 가장 무겁게 느껴진다. 남의 아픈 마음에 대해 객관적으로 뭐 그까짓 것 갖고 그래라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운명은 견딜 수 있는 만큼 고통스럽게 한다는 이야기도 있다. 해서, 어떤 문제든, 절실하고 힘든 것이라면 상담의 지면을 통해 많은 이들과 그 아픈 마음을 나누었으면 좋겠다.

 

[자아의 신화를 찾아서] (4) 지나치게 보수적인 아버지대화 힘들어

질문

 

저희 아버지께서는 좀 보수적인 분이십니다. 신문도 방송도 딱 보시는 것만 보세요. 그래서인지 세월호 참사나 강정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화부터 내십니다.

제가 사실은 그게 아니라고, 교회에서 말하는 입장에 대해 말씀을 드려도 그냥 침묵하실 뿐 제 이야기를 귀담아듣지 않으시고 다음에 또 같은 이야기를 하십니다. 그 후에도 몇 번 더 말씀을 드렸더니 제 앞에서는 이야기하시지 않지만 저를 못마땅해 하시네요. 이런 경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답변

 

아버님 같으신 어르신들이 이 땅에는 참 많습니다. 그 분들 중에는 직접 일제시대와 6·25 동란을 겪으신 분들이 많이 계십니다. 일제강점기의 군국주의 교육을 받았거나, 전쟁 중 북한과의 갈등으로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죽거나 다치는 것도 봤던 분들이십니다. 그 와중에 일본의 전체주의나 식민사관 등에 젖으신 분들도 있고, 이념 갈등으로 인해 생각이 극단적으로 굳어지신 분들도 많습니다.

 

또 이승만이나 박정희 독재에서 고초를 겪으신 분들보다는 독재자들에게 영합하고 동조하는 여론의 주장에 그대로 믿으신 분들이 더 많으십니다. 그런 과거에 대한 정보가 없으면 왜 그렇게 지금의 젊은이들과는 다른 생각을 하고 계신지 이해하시기가 힘드실 겁니다. 더구나 뇌는 나이가 들수록 더 이상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게 변합니다.

 

그런 분들한테는 자신들의 생각을 그대로 전달하고 피력하기보다는 그분들이 일단 과거, 일제나 독재, 또 다른 전쟁 세력들과 어떻게 만났고 대처하는지를 물어보시는게 좋으실 겁니다. 그분들 중에는 일제 말, 조용히 독립운동에 참여하신 분들도 있고, 4·19 학생 혁명에 참가하신 분들이 계실 겁니다. 10·26 전후, 독재와 관련되어 힘든 고비를 넘기신 분들도 계실 겁니다.

 

물론 반대로 그 와중에도 절대적으로 권력지향적인 삶을 사신 분들도 물론 계시겠지요. 하지만 일단 어떤 이념을 갖고 있건 노인들의 삶에는 젊은이들이 갖고 있지 않는 정보와 지혜가 숨어 있습니다. 그분들의 말을 참을성 있게 다만 한 시간이라도 들어주다 보면, 오히려 마음의 문을 열어주실 가능성도 있습니다.

 

예컨대 아버님도 한때는 독재에 반대하는 혁명에 동참하셨군요. 그런데 아버님의 그런 정의로운 기질을 그대로 전승한 젊은이들이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요새 젊은 사람들은 정치권이 잘못되건 말건, 정의로운 것보다는 자기 이익에만 더 집중하는 편이지요?”라고 물어보신다면, 아버님도 한 번쯤 자신의 생각을 다시 한 번 정리해 보실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념과 종교가 다를 때 사실 대화를 이끌어 가기가 매우 힘들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각자의 가치관이 있어서 남들에 의해 그 가치관이 부정될 때 마치 자신의 존엄성이 훼손되는 것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혹시라도 아버님 세대의 정치적 지향성이 젊은 세대들의 눈으로 다르다 해도, 또 그런 생각이 이 사회의 균형을 맞추어 주는 하나의 축이 될 수 있으니까, 서로 상대방에 대해 깊이 이해해 보려는 태도가 필요하겠습니다.

 

더구나 가족이나 친구라면 어떤 인생관을 갖고 있건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해주고 그에 대해 절대적인 가치판단을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진정한 가족애나 우정에는 어떤 이데올로기도 넘을 수 있는 아름다운 힘이 들어가 있어야 합니다.

 

자아의 신화를 찾아서는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로 진행됩니다.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삶에서 겪는 어려움을 나누고 싶은 분은 아래 주소로 글을 보내주십시오.

 

 

 

 

[자아의 신화를 찾아서] (6) 제가 재미없대요어떻게 고쳐야죠?

질문

 

저는 주변에서 재미없는 사람이라 인식되고 있습니다. 예전에는 그게 뭐 어때?’라는 생각이었지만, 제 인간관계가 너무 사무적으로 되는 거 같아 걱정입니다.

오랜만에 지인들을 만나거나 연락을 해도 딱히 할 말도 없고, 재미도 없다 보니 저한테 먼저 연락해주는 사람도 없고. 문제는 어디서부터 어떤 걸 고쳐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답변

사람들은 만나면 재미있는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라, 만나면 편하고 기분 좋아지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재미는 개그나 예능 프로그램을 보거나 만화를 보아도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재미보다는 상대방이 자신에 대해 존중해 준다는 느낌, 또 무언가 배울 점도 있고 채워진다는 느낌이 들 때 만족감을 느낍니다.

 

그러나 이런 느낌은 사람들을 만나서 돈을 푼다든가, 자신의 정보와 지식을 자랑한다든가, 혹은 무조건 우스운 이야기나 소문만 잔뜩 풀어낸다든가 하는 태도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상대가 진지하게 잘 들어주고, 자신의 삶에 관심을 가져 주고, 또 자신들의 고민과 고생이 결코 의미 없는 것이 아니라 매우 소중하다고 인정을 해 줄 때, 사람들은 상대에 대한 신뢰를 느끼게 됩니다.

 

만약 사람들이 너를 만나면 재미가 없어라고 말한다면 너는 농담도 못하고, 말 주변도 없어란 뜻이 아니라 자신들의 이야기를 잘 들어주고 동조하지 않는다는 뜻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가만히 관찰을 하면, 진심으로 오랫동안 인기 있는 친구들은 말을 많이 하거나 재미있게 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조용히 다른 사람들의 말을 잘 경청해 주고, 또 말없이 문제를 해결해 주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현대인들은 모두 각자 사는 것이 바빠서 좀처럼 먼저 다른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이 바쁠까봐 배려해 주느라 연락을 하지 않는 수도 있습니다. 또 자존심들도 강해서 혹시라도 거절당할까봐 먼저 손을 내밀지 않는 경우도 많고요. 막상 만나도 술이나 마시고 비만이 되기 쉬운 고열량 음식만 먹고 담배연기만 잔뜩 맞고 헤어진다면 오히려 기분만 나빠지고 건강에도 해롭기 때문에 사람을 만나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내게 전화를 하지 않는 것이 꼭 내가 재미없는 사람이어서만 그런 게 아닐 수도 있다는 뜻이지요. 수동적으로 왜 사람들이 나를 찾아 주지 않지, 나는 왜 이렇게 재미가 없는 사람인가 하고 자조하고만 있을 것이 아니라, 내가 무엇을 할 때 재미가 있는지 적극적으로 찾아보는 태도가 중요합니다.

 

취미가 맞으면, 특별히 상대방의 성격이나 배경과 관계없이 얼마든지 친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재미는 꼭 엄청난 자극과 돈이 필요한 것에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예컨대 혼자 조용히 하는 목공일, 도자기 만들기, 그림 그리기, 영화 보기, 외국어 배우기, 악기 다루기, 산책하기, 애완동물 키우기, 시집 보기, 요리하기, 성경공부하기 등등 얼마든지 생활에서 찾아낼 수가 있습니다.

 

강력하고 자극적인 재미보다는 은근하고 오래가면서도 몸과 마음에 이로운 재미를 찾다 보면 그런 재미를 소중하게 생각하는 이들과 또 자연스럽게 어울리게 됩니다. 친구는 얼마나 많이 사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한두 사람이라도 얼마나 가치 있는 우정을 나누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자아의 신화를 찾아서는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로 진행됩니다.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삶에서 겪는 어려움을 나누고 싶은 분은 아래 주소로 글을 보내주십시오.

 

 

 

[자아의 신화를 찾아서] (8) 별거 중 엄마를 나쁜 여자로 욕하는 고모들

질문

 

1년 전 저희 부모님은 별거를 시작하셨습니다. 30년에 가까운 의처증으로 엄마를 괴롭히던 아버지는 퇴임 후 음주가 잦아지면서 폭력을 행사하는 일이 잦았습니다.

별거 후 중간에 있는 저희에게 너무도 마음 아픈 시간들이 이어졌습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아버지, 부모님이 평생 모시던 저희 할머니의 이간질과 간섭, 자존감이 회복되지 않는 엄마. 그 틈에서 저희가 말 한마디라도 거슬리게 하면 어느새 저희가 그 싸움의 주인공이 됐습니다.

어쨌거나 아버지의 피해의식과 화를 다독여가며 아버지도 지키고 엄마도 지키는 것이 저희의 역할이라는 생각에 양쪽 다 챙기느라 버거운 생활들을 이어왔고 어느 정도 안정된 분위기를 만들어냈습니다. 문제는 고모들인데요. 엄마가 할머니와 아버지를 못 챙기는 상황이 되니 고모들은 엄마를 나쁜 여자로 몰고 있습니다.

최근 할아버지 제사에 만난 고모들은 분위기상 오지 못하신 엄마 얘기를 꺼내어 저희들에게 화풀이를 하며 따지면서 모든 탓을 엄마에게로 돌렸습니다. 주일에 들러 할머니께 반찬을 해주는 것은 나중에 생색내기 위함이고 남편을 의심하게 한 것도, 화나게 하는 것도, 중간에 있는 저희가 아무것도 안하도록 잘못 키운 것도, 자기들의 엄마를 불쌍하게 하는 것도 엄마 탓이라며 막말을 쏟아내며 심지어 임신 8개월 중인 저에게 따귀를 때리며 자기들 입장만 쏟아냈습니다.

제가 슬픈 이유는 그들이 저와 같은 신앙을 믿고 같은 복음을 듣고 같이 묵상하는 신앙인이라는 것입니다. 성지순례며 공동체 생활을 열심히 하는 그들의 신앙생활이 모순되어 보이고 그들 아니라 열심인 다른 신자들 또한 신앙과 현실은 별개의 것인지 복잡한 생각이 이어져 괴롭습니다.

 

 

답변

 

이미 아시겠지만 겉으로 열심한 듯 보이는 신앙생활이 실제로 주변 사람에게 큰 사랑으로 변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지금 자매님께서 당면하고 있는 문제는 고모들의 이중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자신과 형제들이 어머니가 아버지와 같이 안 산다는 점 때문에 고모, 아버지, 할머니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점인 것 같습니다.

 

그분들이 어른답게 행동하면 매우 좋겠지만, 그분들이 아이처럼 행동하건, 비윤리적으로 행동하건 자매님과 형제들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다만 어떤 이유를 대건 물리적인 폭력, 인격모독이 심한 욕설 등을 그대로 수용한다면 오히려 병이 될 것입니다. 갈등이 없는 가족은 없지만, 그렇다고 모두 손찌검을 하거나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을 하지는 않습니다.

 

한데 자매님의 경우는 할머니를 부양할 의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상황으로 봐서는 아버지가 병석에 있는 것도 아니고 고모들이 자주 와서 들여다보고 있는데, 굳이 지금 당장 제사 때마다 친정에 가서 친정 일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듭니다. 만약 아버지가 자매님과 형제들의 생계를 다 책임지고 고모들이 제사를 지내러 와서 모든 일을 다 그분들이 하고 있다면, 그분들의 비난을 온전히 다 피해가기는 힘들 것입니다. 반대로 자매님과 형제들이 충분히 자립 능력이 있고, 아버지 역시 병석에 있는 것이 아니라면 굳이 아버지나 고모들하고 지금 엉켜서 살아야 하는지도 의문이 듭니다. 어머니가 혼자 자립하실 정도이고 형제들 역시 따로 살림들이 있다면 아버지와 고모들 할머니가 나름대로 평화롭게 사시도록 조금 거리를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나중에 아버지가 정말 쇠약해지셔서 자녀들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면 그때 더욱 열심히 도와드리는 것도 방법입니다. 오히려 그때를 위해 지금 열심히 일하고 저축해서 정작 필요할 때 부모를 봉양하는 것이 도리이겠습니다.

 

다만 할머니와 아버지 고모들이 어머니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건 그분들의 자유이기 때문에 형제들이 나서서 어머니 입장을 설득하려 해도 아마 소용이 없고 돌아오는 것은 말씀하신 대로 폭력적인 언행일 것입니다. 해서, 이 기회에 자매님은 친정으로부터 확실하게 독립하고 다른 형제들에게도 빨리 아버지와 고모로부터 떨어져 살도록 조언해 주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어머니 입장과는 또 다른 아버지 입장도 있을 것이니, 아버지를 무조건 죄인 취급하기보다는 부부 갈등은 자녀들 문제가 아니라는 점을 확실하게 각인시켜 드리고, 자매님은 자녀로서의 의무만 확실하게 해 주시면 되겠습니다.

 

자아의 신화를 찾아서는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로 진행됩니다.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삶에서 겪는 어려움을 나누고 싶은 분은 아래 주소로 글을 보내주십시오.

 

 

 

 

[자아의 신화를 찾아서] (9)

질문) 형편상 결혼해도 아이 계획 없다는 말에 화내시는 신부님

 

저는 주일미사도 꼬박꼬박 참례하고, 본당에서 활동도 나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청년입니다. 그런데 하루는 신부님께서 제가 결혼은 하고 싶은데 형편상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다고 말하니 화를 내시더군요. 신부님께서 왜 화를 내셨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별로 묻고 싶은 생각도 없고요. 제가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답변) 자녀 양육은 결혼을 통한 하느님 축복혼배성사 의미 깨닫기를

본당에서 활동도 열심히 하고 있는 청년이, 본당신부님께 결혼은 하고 싶은데 형편상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다고 말하니 본당신부님이 화가 많이 나셨으리라 짐작이 갑니다. 물론 본당신부님도 무작정 화를 앞세워 대화를 단절해버렸으니, 더 이상 묻고 싶은 생각도 없어졌다는 질문자의 마음도 이해가 되네요. 또한 본당신부님께서 화를 내기에 앞서 질문자와 대화를 시도했으면 좋았으리라는 생각이 많이 드네요. 그렇지만 왜 본당신부님이 화가 나셨는지 한번 생각해 볼까요?

혼인은 하느님 앞에서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어 새로운 작은 교회가 탄생하는 가톨릭의 7성사 중에 하나입니다. 가톨릭의 혼배성사는 하느님의 큰 은총이 함께하는 통로이며 축복의 예식입니다. 창조주께서 처음부터 그들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나서 그러므로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이 될 것이다하고 이르셨다.(마태 19:4-5) 혼배미사에서 그 절정을 이루는 혼인 예식에서, 주례자는 정혼자들이 자유로운 마음으로 혼인하려고 하는지, 일생 서로 사랑하고 존경하겠는지를 묻고 나서 다음과 같은 중요한 질문을 합니다. “두 분은 하느님께서 주실 자녀를 사랑으로 받아들이고 그들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기르겠습니까?” 이 질문은 가톨릭에서의 혼인은 바로 하느님이 맺어주시는 성사이며, 자녀를 낳아 기르는 것은 결혼을 통한 하느님의 축복이며 선물인 동시에, 부부가 함께 지고 가야 할 중요한 의무라는 사실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신자로서 본당활동도 열심히 하는 젊은이가 결혼은 하고 싶은데 형편상 아이를 가질 생각은 없다고 말하니 어찌 본당신부님이 화가 나지 않겠는지요? 물론 본당신부님께서도 화를 내시기에 앞서 질문자가 얘기한 형편상이란 것이 어떤 형편을 이야기하는지를 물어보고, 혼배성사에 담긴 뜻을 충분히 설명해 주셨더라면 더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질문자의 태도에도 다음과 같은 문제점이 있습니다. 먼저 결혼이라는 것이 단순히 남자와 여자가 결혼해서 두 사람의 성적욕구를 법적으로 채우면 그만이라는 잘못된 생각이 들어있는 것 같아요. 또한 자녀는 키울 형편이 되면 키우고 아니면 키우지 않겠다는 이기적인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 것 같고요. 이런 이기적인 생각 때문에 결혼을 거부하고 혼자 살겠다는 젊은이들이 점점 더 늘어나는 것 같아서, 갈수록 더 큰 사회적인 이슈가 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의 심각한 현실입니다. 이런 이기적인 태도는 점점 인간관계를 피상적으로 만들어, 제대로 된 깊이 있는 관계를 맺지 못하는 어려움을 야기시키고 있기도 하지요. 독일의 유명한 영성가인 안셀름 그륀신부님은 현대인이 지닌 질병이 바로 제대로 된 깊은 관계를 맺지 못하는 것이라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대인의 질병을 치료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영성’(Spirituality)이라 보고 있는 것이지요. 신부님은 영성을 초월에 대한 감각이며, 의미에 대한 직관이라 주장하시면서, 현대인들이 회복해야 할 관계의 영성을 네 가지 차원에서 제시합니다. 바로 자신과의 관계’, ‘사물과의 관계’, ‘타인과의 관계’, ‘하느님과의 관계입니다.

 

질문자도 관계의 영성을 통해서 네 가지 차원의 관계를 다시 한 번 점검해보면서, 결혼과 혼배성사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시면 좋겠습니다. 질문자가 지닌 태도로는 성당에서 혼배성사를 올릴 수가 없는 상황이니, 본당신부님이 얼마나 안타까웠으면 화부터 내셨는지를 이해할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저도 기도로 힘을 보탤게요!

 

자아의 신화를 찾아서는 독자 여러분들의 참여로 진행됩니다. 신앙생활뿐만 아니라 삶에서 겪는 어려움을 나누고 싶은 분은 아래 주소로 글을 보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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