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42)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 볼 수 있을 때 하나됨 체험
한 남성이 어린 시기를 거쳐 어른이 되는 고대 남성 입문 예식들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바로 부족 전체와 부족의 영은 물론이고 존재하는 모든 것과 하나가 되는 체험을 하는 것에 있다. 말하자면 한 남자가 자신의 내외적 힘을 올바르게 활용하기 위해서는 모두 연결된 존재의 위대한 테두리 안에 포함되는 체험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둘씩 짝지어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지니지 말 것을 당부하신 것에는 이런 심오한 의미가 들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한다. 둘씩 짝지어 보내지만 결국은 모든 존재가 조화되고 어우러져 하나의 유기체로 존재하는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살아 체득하고 선포하라는 것이 예수님 제자 파견의 핵심이 아니겠는가! 프란치스코 성인도 자신의 삶에 합류하는 형제들이 모였을 때 예수님처럼 형제들을 둘씩 짝지어 하느님 나라의 현실을 선포하라고 세상에 파견했다고 한다.
요즘처럼 개인주의적 가치 체계나 개인이나 집단을 우선으로 하는 지나친 경쟁 구도와 상거래식 이해관계가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들의 정신세계 속에 깊이 파고들어 사회 병리 현상을 더욱더 심각하게 부추기는 것은 사람들, 특히 남성들이 전체와 하나 되는 입문 예식과 통과 의례를 거치지 못한 채 겉으로만 어른이 되어가기 때문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리처드 로어는 저서 「Adam’s Return-The Five Promises of Male Initiation」(아담의 귀환- 남성 입문에 있어 다섯 가지 약속)에서 고대 남성 입문을 통해 다음의 다섯 가지 진리를 경험하게 된다는 것을 강조한다. ① 인생은 고되다. ② 당신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③ 당신의 인생은 당신과 관련된 것이 아니다. ④ 당신은 통제력을 갖고 있지 않다. ⑤당신은 죽을 것이다. 이 다섯 가지 진리를 경험한 자만이 진정으로 한 남성(어른)으로서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며 그때 비로소 그는 이 삶 안에서 다음의 다섯 가지 약속을 얻게 된다는 것이 이 책의 주제이다.
① 삶이 고되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하느님과 존재의 위대한 사슬 안에서 모든 것과 연결될 때 그 삶은 가볍고 편안해지는 것이다: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습니다.”(마태 11,28)
② 당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부분적 전체로서 우주적 삶에 참여하게 될 때 당신은 전체로서의 중요성을 지니게 된다: “여러분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되어 있다는 것을 모릅니까?”(루카 10,20)
③ 당신의 인생이 여러분과 관련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사실이지만, 결국 모든 것이 연결된 현실에 참여함으로써 당신의 인생이 우주 전체에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 2,20)
④ 당신은 통제력이 없다는 것이 사실이지만, 당신이 자신의 통제력을 놓을 때 온전히 책임을 져주시는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그분 안에서 진정한 통제력을 얻게 된다: “너희 가운데 누가 걱정한다고 해서 자기 수명을 조금이라도 늘릴 수 있느냐?”(루카 12,25)
⑤ 여러분이 죽는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존재의 원천에 연결되어 살아갈 때 이 세상 삶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프란치스코 성인이 드렸던 매우 단순한 기도,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시여!”(Deus Meus et Omnia!)는 이 가장 위대한 존재의 진리에 감탄하며 하느님께 드렸던 기도이다. 사실 이 말을 제대로 해석하자면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가 아니라 ‘나의 하느님과 모든 것’으로 해야 하지 않을까 한다. 왜냐하면 ‘나의 하느님 나의 전부’라고 한다면 ‘Deus et Omnia Meus’나 ‘Deus Meus et Omnia Meus’로 썼어야 했기 때문이다.
물론 이 번역이 완전히 잘못된 것이 아니라는 것도 부정할 수 없고, 일반적으로 사람들 대부분이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으므로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단순한 기도를 우리가 지금 나누고 있는 ‘존재의 위대한 사슬’의 관점에서 살펴본다면 그냥 ‘나의 하느님과 모든 것’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한다. 즉 하느님은 모든 것에 스며들어 계신 분이시기에 그 모든 것과의 연결고리 안에서 살아가며, 그 모든 것 안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과 하나 됨을 체험할 수 있다. 그리고 프란치스코도 이것을 염두에 두고 그 기도를 바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43) 가난과 희생을 통해 그리스도의 동정(同情)을 배우다
10. 그리스도와 인격적 만남과 존재적 앎
① 존재의 위대한 사슬 안에서 그리스도의 마음과 하나됨: 동정(同情-compassion)
삼위일체 하느님이 모든 존재와 연결되어 계신다는 진리는 하느님의 영, 혹은 마음까지도 모든 것과 연결되어 존재하신다는 것을 내포하는 진리이다. 하느님께서 물질 세상을 초월해 계신 분이시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지만 이 물질 세상이 이미 하느님의 초월성이 부여되어 창조된 것이라면 하느님께서는 동시에 이 세상 안에 내재하시는 분이시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 세상을 통해서 하느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이를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의 다른 모든 피조물과 모든 인간 피조물을 통해서 당신을 계시하시는 분이시며, 심지어는 다른 방법이 아니라 이 세상을 통해서만 당신을 계시하시는 분이시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육체를 지니신 인간 존재였듯이 우리도 그분의 영과 육으로 그분의 모습을 따라 창조되었기에 우리는 그분의 모상을 타고난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1221년 수도규칙」 23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늘과 땅의 임금이신 주님’(마태 11,25), 당신의 거룩한 뜻에 따라 그리고 당신의 외아드님을 통하여 성령과 함께 모든 영신적인 것과 육신적인 것을 창조하셨으며, ‘당신의 모습대로 그리고 비슷하게’ 만드신 저희를 ‘낙원에 두셨으니’(창세 1,26; 2,15), 바로 당신 자신 때문에 당신께 감사드리나이다.”
이 관점에서 하느님의 육화와 모든 피조물에 대한 프란치스칸 신학이 발전되었다. 이것을 보나벤투라는 명료하게 발전시켰으며 특히 요한 둔스 스코투스가 더욱 발전시켰다. 창조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것에 앞서서 의도되었고 뜻하신 바였기 때문이다. 사도 바오로가 콜로새서 1,15-20에서 말하듯이, 그분은 모든 것의 본보기이시고 모델이시다. 성 보나벤투라는 우리가 하느님 모상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을 부여받게 되었다고 말한다. 모든 피조물이 다 그분의 지혜와 힘과 선을 나누어 받았지만, 특히 인간이 더욱 많이 부여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이런 것들을 알 수 있고 체험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우리는 은총의 선물에 참여하도록 초대받았다. 즉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과 함께 생명의 더욱 충만한 상태를 살도록 초대받은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거처에서 머물 수 있는 능력을 우리에게 주셨고, 이것을 알고 기억할 수 있는 능력도 주셨다. 우리가 예수님과 더욱 많이 닮으면 닮을수록 더욱 하느님같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안에서 더 많이 의식되도록 하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당신의 생명을 사시도록 하게 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이 하느님의 내재를 자연스럽게 표현하며 살아가지만, 우리 인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자유 의지로 인해 이 하느님의 내재를 보고 느끼며 표현하고자 하는 선택을 의지적으로 할 때 이것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더 하느님과 유사하게 창조되었기에 이를 다른 어떤 피조물보다 훨씬 더 강력하게 하느님을 드러낼 수 있도록 창조되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프란치스칸 사상을 주의주의(主意主義)라고 한다. 프란치스칸 사상은 하느님께서 영원성으로부터 순수한 당신 의지로써 ‘사랑’ 자체로 존재하시고 이 세상의 창조를 이루시며 완성해 가신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칸 사상에서는 하느님의 자유 의지를 부여받은 인간 역시도 같은 방식으로 다른 인간 피조물은 물론이고 모든 피조물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생명을 나누도록 창조된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궁극적 소명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통합하는 일이고, 이것이 바로 거룩함을 회복하는 일, 혹은 하느님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촉구하시는 ‘성화(聖化)’이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우리더러 이것을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만들어내라고 억지를 부리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 의지를 통해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다른 모든 존재와 통합할 수 있는 모범을 이미 보여 주셨고, 또 우리 삶 순간순간에 성화하는 은총을 통해 우리에게 그러한 기회를 계속해서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할 것이다.
프란치스코는 모든 이들, 특히 가난한 이들, 소외된 이들, 나환우들과 온갖 병자들 안에서, 그리고 모든 약한 피조물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일깨워주시는 동정(同情-compassion)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 삶의 목적은 극단적이고 영웅적인 ‘가난’이나 ‘인내’, ‘희생’을 살아내는 것이 아니라, 모든 존재와 같은 마음을 지니는 것이었고, 결국은 이를 통해 그리스도와 같은 마음을 지니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는 또한 자신의 가난과 병고, 그리고 연약함을 통해 우리 인간에 대한 사랑으로 가난하게 되신 그리스도를 만났고, 다른 이들의 고통에 함께하는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왜냐하면, 모든 존재는 그와 연결된 존재, 즉 같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44) 동정의 자비, 세상 모두를 치유하고 구원하는 힘
프란치스코는 「권고 말씀」 14번에서 이렇게 말한다. “‘행복하여라,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 여러 가지의 기도와 일에 열중하면서 자기 몸에 많은 극기와 고행을 행하지만, 자기 육신에 해가 될 것 같은 말 한마디에, 혹은 자기가 빼앗길 것 같은 그 무엇에 걸려 넘어져 내내 흥분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이들은 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프란치스코에게 삶의 목적은 존재의 원천을 공유하는 다른 모든 존재와의 관계성으로 들어서는 일이었기에, 그는 자신이 겪는 아픔과 궁핍함을 통해 다른 이들의 아픔과 궁핍함에 같은 마음을 지니는 법을 배웠다.
클라라 역시도 자신의 약점과 질병 안에서, 그리고 아프고 병약한 자매들을 돌보면서 자비와 동정심을 배워야만 했다. 클라라는 인간이 되는 것, 즉 자신의 피조물인 현실을 배워야 했다. 지나친 가난과 극기(특히 단식)를 살면서 클라라는 인간성을 배웠고 그 인간성의 체험으로 인해 변화될 수 있었다. 그래서 그는 「프라하의 아녜스에게 보낸 세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의 ‘육신이 무쇠로 되어 있지도 않고’, 우리 ‘힘이 바위 같지도 않기에’ 아니 오히려 우리는 연약하고 온갖 육신의 나약함으로 기울어지기에, 사랑하는 자매여, 나는 그대가 무분별하고 불가능하게 재를 지켜 왔다고 알고 있는데, 지혜롭고 분별 있게 지나친 엄격함을 피하라고 주님 안에서 그대에게 부탁하고 요청하는 바입니다.”(38-40)
클라라는 가난과 극기의 삶을 통해 자신의 강함을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약함을 통해 오직 하느님만을 찾는 것을 배워야 했다. 클라라는 침실의 벽돌 바닥이나 나무 위에 눕는 것보다 오히려 건초를 사용하는 것을 배워야 했다. 클라라는 프란치스코와 주교에게 순종하여 음식을 먹어야만 했다. 어느 누가 이렇게 해야 했는가? 예수님께서 구유에서 그렇게 하셨다! 클라라의 삶에 있어 자신의 수난은 예수님의 수난이었다. 그녀는 그분이 그녀 안에서 살아 계신다는 것뿐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법을 배워야 했다. 삶 자체가 그녀의 교육자였던 것이다.
2014년도 4월 16일에 있었던 세월호 참사 이후 많은 이가 혼란에 빠졌고 여전히 이 상황과 관련해 고통을 겪는 이들이 많다. 특별히 희생된 이들의 가족과 친지, 친구 모두를 위해 기도하는 마음으로 나누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났던 해의 일이다. 당시 필자가 알고 지내던 지인의 아들이 당시 고등학생이었는데, 세월호 참사 이후 겪고 있었던 심리적 어려움으로 심리 상담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필자가 그 지인에게 아들이 단원고에 다니는지를 물었는데, 아니라고 하면서 당시 우리 사회의 많은 이들, 특히 젊은이들이 이와 같은 심리적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사실 필자 역시도 그즈음에 영적, 심리적 혼란을 겪었던 것을 기억한다.
이런 모습이 우리가 모두 연결되어 생명을 살아가고 있다는 단적인 예가 아니겠는가? 일찍이 맹자는 「공손추(公孫丑)」 상편에서 인간의 본성에서 나오는 실천 도덕의 근본이 있다고 말하면서, 그것은 바로 ‘인의예지(仁義禮智)’에 있어 단서가 되는 네 가지 마음이라고 했다. ‘인(仁)’에서 나오는 측은지심(惻隱之心), ‘의(義)’에서 나오는 수오지심(羞惡之心), ‘예(禮)’에서 나오는 사양지심(辭讓之心), ‘지(智)’에서 나오는 시비지심(是非之心)이 그것이다. 이 네 가지 중에서 특히 근본이 되는 것을 주자(朱子)는 측은지심이라 하였다.
이것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근본적으로 주신 마음이며, 이는 하느님의 자비(misericordia)와 다르지 않은 것이다. 우리 이웃의 일을 그저 ‘남의 일’로 여기지 않고 ‘내 일’로 여길 줄 아는 마음이 바로 이 측은지심(惻隱之心)인 것이고, 또한 이것은 우리의 연결된 존재성을 증명해주는 단서가 아닐 수 없다. 이제는 우리 마음 깊은 구석에 깊이 숨겨져 있는 듯한 이 측은지심을 우리가 다시 끄집어낼 때이다. 왜냐하면, 이 측은지심이 바로 병자들과 죄인들을 바라보면서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지극히 깊은 동정의 자비이고, 이 자비의 마음이 바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과 세상 모두를 치유하고 구원하는 힘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우리 안에 이런 자비의 힘이 이미 부여되었다는 것을 아셨기에 병자들과 죄인들에게 기적을 일으키신 것이 아니라 그들 안에서 기적이 일어나게 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 이 측은지심과 자비의 힘이 이 세상을 다시 일으킬 수 있도록 사도들에게 ‘용서의 복음’을 선포하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희생하는 사랑과 자비는 바로 이것이다. 십자가 상의 희생 제사와 성체성사 안의 희생 제사에서 바로 이 희생하는 사랑의 힘이 가장 강력하게 드러난다. 예수님은 아일랜드에서 특히 사제들의 성체 신심 증진을 위해 투신하고 있는 베네딕도회의 한 사제에게 하신 말씀에서 당신께서는 이런 희생하는 사랑 이외에 다른 어떤 것에서도 기쁨을 얻지 못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45) “고통은 죄로 인한 벌이 아니라 사랑의 귀결”
인간의 논리로는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것이 있다.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고통을 받는 이들과 고통을 함께하시면서 치유와 구원을 이루신다는 것이 그중 하나이다. 아마도 프란치스코에게 나환우의 모습으로 나타나 프란치스코를 회개의 삶으로 이끄신 주님의 계획도 바로 이런 동정의 자비와 분명히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세월호 참사 당시, 왜 하느님은 그 순수한 사람들을 살려주지 않으셨을까? 하는 생각을 한참이나 했었다. 아마도 참사 이후 사람들이 겪었던 트라우마 안에는 이런 생각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당시 필자는 이런 생각으로 마음이 힘들었을 때 문득 나치 강제노동수용소에서 생사를 넘나드는 삶을 살았던 엘리 위젤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 장본인이 엘리 위젤인지, 다른 어떤 사람의 이야기인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무튼 그가 노역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다섯 명의 동료가 교수형을 당하고 있었다. 그중 네 명은 이미 숨이 끊어진 상태였는데, 한 사람은 아직도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너무도 고통스럽게 발버둥 치고 있었다. 몸이 가벼운 어린아이였기 때문이었다. 공개 처형 상황에서 이를 지켜보던 이들의 마음은 얼마나 괴롭고 고통스러웠을까! 그런데 그때 엘리 위젤 옆에 있던 사람이 그에게 괴로움 속에서 이렇게 질문했다. “저 아이가 저렇게 극심한 고통 속에 죽어가는데 당신의 하느님은 어디 계신가?” 그때 엘리 위젤이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우리 하느님도 저 아이와 함께 저렇게 고통스럽게 목매달려 죽어가고 있소!”세월호 참사 때에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고통스럽게 죽어가던 사람들과 함께 하느님께서도 그렇게 고통스럽게 죽임을 당하셨을 거라는 생각에 가슴이 너무도 먹먹해졌다. 그러면서도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왜 그렇게 함께 고통을 당하시는 방식으로만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셔야 하는가 하는 답답한 의문도 들었다.
프란치스코는 신자들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런데 그분의 수난이 다가오자…’ 그분의 수난은 인간 조건을 가진 모든 사람은 겪어내야 할 수난이었기에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우리는 모두 이렇게든 저렇게든 고난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분은 제자들과 파스카를 기념하시면서 빵(그것은 당신처럼 작은 것이다)을 들고 축복하신 다음 쪼개어 제자들에게 나누어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받아먹어라. 이것은 나의 몸이다. 그리고는 잔을 들어 다시 감사를 드리신 다음 그들에게 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새로운 계약을 위한 나의 피이다. 죄를 사하기 위해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피다.’” 이 쪼개어진 그리스도, 즉 성자 하느님의 몸이 여러분에게 주어진다!”
프란치스코는 카타리파의 잘못된 생각에 대응하여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여러분의 고통은 죄로 인해 받는 벌이나 그 결과가 아니라, 여러분이 진정한 사랑을 살아갈 때 수반되는 것입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하느님께서 동정녀의 태중으로부터 태어나시는 연약함을 취하셨다는 것이다. 탄생은 고통스러운 순간이다. 하느님이 사랑으로 인해 연약한 인간 조건 안으로 들어오신다. 그리고 성모님 역시도 사랑으로 인해 세상의 구세주, 즉 사랑과 연약한 하느님, 한 아기를 받아들이신 것이다.
프란치스코에게는 고통이 벌이 아니라 사랑의 귀결이다. 한 어머니가 생명을 낳기 위해 고통을 감수하는 것처럼, 사랑으로 취해야 할 하나의 조건인 것이다. 그래서 죄 많고 연약한 교회 안에서 산다는 것은 벌이 아니다. 죄인인 우리 형제자매들은 우리가 사랑으로 인해 끌어안아야 할 사람들이다. 주님께서는 뭔가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라고 우리를 이곳으로 인도해주셨다. 즉 공동체를, 형제애를, 자매애를 창조해내라고 우리를 인도해주신 것이다. 그분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폭력에 의해서가 아니라, 사랑과 용서로써 함께 삼위일체적 모델을 창출해 내라고 초대하시기 위해 연약한 우리 인간의 모습을 취하신 것이다.
② 온몸으로 아는 앎 - 존재적 앎(kinesthetic knowing)과 참여적 앎
앞서 십자가의 성 요한의 이야기를 인용하면서 언급했듯이, 하느님을 아는 것은 우리가 이 물질 세계에서 어떤 대상을 알아가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만 가능하다. 그것이 바로 참여적 앎이다.
리처드 로어는 이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하느님(그리고 고유하게는 삼위일체)은 우리가 다른 대상 ─예를 들어 기계나 객관적 개념, 혹은 나무들─ 을 아는 것처럼 알 수 없다. 이런 것들은 우리가 ‘객관화’할 수 있는 것들이다. 우리는 대상들을 보고 우리의 정상적 지성을 통해 그 대상의 여러 부분을 분석하고 이것과 저것을 구분하여 멀리서도 그것들이 무언지를 판단한다. 이때 우리는 부분들을 이해하는 것이 전체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렇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과 관련된 대상들은 절대 이런 식으로 객관화할 수 없다; 이런 것들은 오직 그것들과 하나 됨으로써만 알 수 있는데, 이것이 바로 ‘주관화’이다! 여러분 자신이나 다른 이들이 그저 단순한 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고 양쪽이 다 상호 존중의 ‘나-당신’의 관계에 편안히 있을 수 있다면 여러분은 영적인 앎에 이르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46) 이웃과 같은 마음 갖는 동정심이 성령의 마음
하느님의 본질이 관계성이기에 우리 역시 이 관계성의 영역으로 들어설 때 비로소 하느님을 알게 된다. 관계성이신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당신을 알아차릴 수 있는 당신의 모상을 심어주셨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연약하고 죄 많은 인간 중 하나가 되신 것처럼 우리도 고통과 슬픔을 겪는 이웃과 같은 마음이 되어 주는 ‘측은지심’ 혹은 ‘동정’(同情)이다. 이 마음은 어떤 것도 허투루 보지 않고 존경심을 갖고 바라보게 해주는 성령의 마음이다.
결국, 수양 혹은 자신을 갈고닦아 나가는 것은 우리 존재에게서 없는 것을 새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이미 주어진 선물을 존중의 마음으로 깨어 바라보며 은총에 힘입어 반복적으로 이를 키우고 촉진해가는 일이다. 이것 외에 하느님을 아는 방식은 없다. 이렇게 온 존재로 참여함으로써 알게 된 지식은 다른 말로 ‘존재적 앎’ 혹은 ‘운동감각적 앎(kinesthetic knowledge)’이라고 한다. 이것은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온 존재로 아는 것이다.
이 운동 감각적 앎에서 대표적인 예가 바로 자전거를 타는 법을 아는 것이다. 자전거를 타는 법을 배울 때 우리는 두 바퀴로 가는 자전거를 타면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론으로 배우게 된다. 즉 넘어지지 않기 위해서 원심력을 사용해야 하기에 넘어지는 쪽으로 자전거 핸들을 돌리라는 이론적인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런데 실제로 자전거를 타는 법을 알게 되면 그 원리를 머리로 알아서 자전거를 타는 것이 아니라, 몸이 그것을 기억해서 자전거를 탈 수 있고, 또 한 번 몸으로 알게 된 이 앎은 우리 몸에 깊이 각인되어 있어서 잊히지 않는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의 덕에 참여하여 그 덕을 수양의 마음으로 꾸준히 실행해 가면서 그 덕으로 인해 갖게 되는 복됨의 의미를 몸에 익혀 살아갈 때 비로소 그 덕을 지니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의 이치다.
프란치스코는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께 드리는 찬미」에서 온갖 덕이 다 하느님의 속성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 하느님께 찬미를 드린다. 달리 말해 덕을 몸에 익히는 것과 하느님을 아는 것, 그리고 하느님과 일치하는 것은 다 같은 이치에서 설명될 수 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는 「덕들에 바치는 인사」 6-7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의 덕을 가지고 있고 다른 덕들을 거스르지 않는 사람은 모든 덕을 갖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의 덕을 거스르는 사람은 하나도 갖지 못하고 모든 덕을 거스르게 됩니다.”
프란치스코는 이 덕 목록에 ‘존중’ 혹은 ‘존경심’의 덕을 넣고 있지 않지만, ‘순종’의 덕에 사랑을 자매 덕으로 놓으면서 이렇게 말한다. “자기 육신의 억제로 영에 순종하고 자신의 형제에게 순종하도록 합니다. 따라서 사람은 세상에 있는 모든 이에게 매여 있고 그 아래에 있으며, 또한,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집짐승과 들짐승들에게까지 매여 있고 그 아래에 있게 됩니다.”이것이 바로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존재 모두에 대한 존중심을 갖고 사는 자세가 아닐까 한다. 우리가 다른 존재에 대해 존경심을 지니고 살아간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다른 모든 덕도 부여해주실 것이다.
틱낫한 스님은 저서 「Living Buddha, Living Christ(살아있는 부처, 살아있는 그리스도)」에서 성령의 본질을 ‘한 대상에 온 마음을 기울여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 혹은 대하는 것(mindefulness)’이라고 말한다. 다시 한 번 ‘바라봄’에 강조점이 놓인다. ‘존경심을 가지고 바라보는 것’을 우리가 반복하여 실천하는 것이 바로 수양의 가장 중요한 토대라는 말이다. 틱낫한 스님의 말대로 우리가 모든 존재를 존경심을 갖고 바라보고 대할 때 성령이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이고, 여기서 더 나아가 우리가 이렇게 바라보는 ‘나’를 의식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성령의 인도로 살아간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존중심과 존경심을 지니고 바라보는 것과 관련하여 한 가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가 바라보는 대상이 나에게 미치는 영향(긍정이든 부정이든)과는 아무 상관 없이 존중심의 마음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는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똑같이 햇볕을 비추어 주시고 비를 내려 주시는 자비하신 하느님이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당신처럼 자비로운 자 되라고 초대하시면서 여기에 참 행복이 있다고 가르치시기 때문이다.(마태 5,44-45; 루카 6,35-36 참조)
리처드 로어는 이것을 ‘관상의 실천’이라고 말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관상의 차원에서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그런 앎은 대상들을 참으로 온전하고 전체적으로 관계와 의미의 모든 차원에서 직관하게 해준다. 아마도 이 앎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전체적 구도에서 그 대상들을 보게 해주는 앎이 아닐까 한다. 이처럼 삶의 순간들에 대해 관상적으로 응답하는 것은 늘 그 순간에 대한 가치를 인정하고 감사하며 우리 내면의 존경심으로 바라보는 것(re-spect: ‘다시 바라보는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지금 내가 바라보는 것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대상 대부분을 우리가 언뜻 부분적으로 관찰할 때 우리에게는 이런 존중심이 부족할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아직도 관상적 앎이라고 할 수 없는 상태다. 솔직히 여러분이 대상들을 관상적으로 볼 때 우주 안의 모든 것은 하나의 거울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47) “존경심을 갖고 다른 이를 바라보는 덕을 수양하라”
프란치스코는 ‘주님’이라는 단어가 들어 있는 종이쪽지 같은 것을 보게 되면 그것을 소중한 곳에 모셨다고 한다. 그 안에 주님의 현존이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프란치스코의 첫 번째 전기작가인 토마스 첼라노는 프란치스코의 그런 자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는 하느님의 말씀이나 인간의 말이 쓰인 글을 발견하면 길에서나 집에서나 땅바닥에서나 대단히 공손한 태도로 그것을 집어서, 거룩한 장소나 합당한 곳에 가져다 놓곤 하였다. 주님의 이름이나 성경 말씀과 관련된 글들이 그러한 곳에 적혀있지 않을까 해서였다. 어느 날, 한 형제가 그에게 질문하기를, 주님의 이름이 비치지도 않은 글이나 이단자들의 글까지도 그렇게 지성으로 줍느냐고 하였다. 그가 대답하였다. ‘아들이여, 주 하느님의 지극히 영광스러우신 이름을 쓰는 데 사용되는 글자들이 그중에 같이 섞여 있기 때문입니다. 선(善)이 들어 있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방인들의 것도 아니고 어떤 사람의 것도 아니며, 오로지 모든 선이 깃들어 있는 오로지 하느님의 것입니다.’”
프란치스코의 이런 존경심의 자세는 본래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해주도록 창조된 존재 모두에게 향해 있었다. 코로나바이러스의 위협 속에 살아가는 우리에게 최우선으로 필요한 것은 물리적인 함께함보다 먼저 ‘존경심을 갖고 다른 이(다른 모든 피조물)를 바라보는 덕’을 수양해 가는 일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나’는 ‘지금 여기’, 곧 현재의 내 자리에서 주님과의 관계성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고, 또 다른 모든 존재와의 관계성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를 의식해 보아야 한다. 나는 내가 함께 살아가는 이들과 만나는 이들을, 그들이 누구이건 간에 주님께서 그들에 대해 지니신 사랑과 존경심을 가지고 각 사람을 존경하고 있는가? 내가 존경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누구인가? 인간 인격에 대한 존중은 어떤 차별도 없는 것이다.
누가 인격들인가? 내가 함께 일하기를 원하는데 누구도 함께 일하기를 원하지 않는 그런 인격들이 있는가? 우리는 이 사람들을 주님께로 데려가서 그분의 사랑과 인내, 겸손, 존경심 등으로 치유하기 위해 우리 각자의 느낌에 어떻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는가? 주님께서는 우리 서로를 통해서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데, 그 문의 문고리는 문 안쪽에 달려 있다. 나는 근본적으로 내 마음의 문을 조금 열어 놓는 그런 개방성을 지니고 있는가?
이렇게 하는 것은 우리 마음의 문을 두드리시는 주님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어서 들어오십시오!”라고 하며 기쁘게 맞아들이는 행위이다. 우리 마음의 문을 조금 열어 놓는다는 것은 무언가 신성한 것, 곧 하느님의 속성이며, 또한 다른 이들에 대한 존경심을 표하는 마음의 자세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다른 사람들의 거룩함과 그들 안에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존중하는 일이다. 이렇게 할 때, 우리는 우리가 다른 사람들-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가져다주는 선물-에 의해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상호 교환성을 지니고 있다. 즉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서로에게 선생님도 되고 학생도 되는 것이다.
다시 반복하여 말하자면 이렇듯이 덕을 지닌다는 것은 그 덕의 원천이시며 그 덕을 당신의 모상과 유사함으로 창조해 주신 우리 인간에게 부여해주시는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다. 이렇게 실질적으로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행위, 혹은 수양 안에서만 우리는 하느님을 알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존재적인 앎, 혹은 온몸으로 아는 지식인 것이다.
사람들 대부분은 새로운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하며 자기 삶의 방식이 바뀌기를 바란다. 하지만 생각이나 사고만으로 우리의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우리의 착각일 수 있다. 오히려 실질적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며 긍정의 덕을 행할 때 우리의 사고방식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이고, 또한 이것이 바로 우리 존재를 변화시켜 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참여적 앎과 존재적 앎이 의미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마음에 깊은 존경심을 지니고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수양은 덕의 원천이신 하느님을 받아들이는 행위이고, 결국은 이런 수양은 ‘주님의 영과 그 영의 거룩한 활동’을 간직하는 일이며, 결국 우리 삶과 존재가 성령의 일치하시는 힘으로 인해 하느님과 같은 존재로 변모하게 하는 일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 전통 전체의 핵심이며, 하느님께서 우리 인간에게 계속해서 해주시는 초대가 아닐까 한다.
언젠가 어떤 신부님이 필자에게 이런 기도를 바칠 것을 권한 적이 있다. “하느님, 하느님께서 저를 바라보아주시는 그 눈으로 저도 저를 바라보게 해주시고 온 세상을 바라보게 해주소서!” 이 기도의 주된 목적은 ‘의식’에 있다.
바라본다는 것은 사고하는 것이기도 하지만, 행하는 것이기도 하다. 우리가 무언가를 바라보거나 생각할 때 의식함 없이 바라본다면 그것은 그저 ‘생각하는 것’이 될 수 있지만, 어떤 마음 자세로 바라보아야 할지를 분명하게 의식하며 바라본다면 그것은 정확히 ‘행하는 것’, ‘수양하는 것’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