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삶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법
나이 들면서 갑자기 사람이 변하면 죽을 때가 가까웠나 하는 말들을 툭 던집니다. 무의식이 자신의 죽음을 눈치채기 때문에 갑자기 죽음을 준비할 수도 있고, 또 실제로 뇌에 변화가 일어나 전혀 다른 사람처럼 변하는 수도 있습니다. 죽기 전 변화는 서로를 용서하고, 정말 사랑했던 사람에게 다가가 못했던 말을 하는 등 낭만적인 영화에서처럼 아름답고 긍정적일 수만은 없습니다. 전두엽쪽에 병이 생기면 오히려 더 난폭해지고, 더 수치심을 모르는 사람이 되기도 합니다.
장수 시대라, ‘철들자 노망난다.’는 옛말과는 조금 다르게, 꽤 많은 사람들이 죽기 전 자신의 삶에 대해 충분히 숙고하고 정리 할 시간이 주어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생에는 단순한 산수가 적용되는 것이 아닌지, 늙을수록 더 추하고 더 초라해질까 봐 많은 이들이 걱정하기도 합니다. 이런 상황과 관련있는 대목 중 하나가 마태오복음 17장 예수님의 변모 사화입니다. 우선 이 대목은 “여기 서 있는 이들 가운데에는 사람의 아들이 자기 나라에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마태 16,28; 마르 9,1; 루카 9,27)라고 말씀하신 후 엿새 후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같은 말을 마르코복음 9장 1절에서는 하느님의 나라가 권능을 떨치며 오는 것을 볼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씁니다. 이를 예수님의 청중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역사의 종말이 닥친다는 ‘종말시한어’라고 정의합니다. 종말이 임박했다고 확신하는 말세 신앙과 연결됩니다. 이 부분에 대해 두 가지 해석이 있다고 합니다. 첫 번째 해석은 일주일 후에 닥칠 예수님의 영광스런 변모와 그가 아버지의 영광 속에 다시 돌아온다는 예지라는 뜻입니다. 두 번째 해석은 사람의 아들이 갖고 있는 권위와 왕국이 부활 후 교회로 다시 내릴 것이라는 해석입니다. 신학적인 해석에 대한 판단능력은 없으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죽음을 맛보지 않을 사람”이란 우리들이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진시황 식의 장수와 신체적 영생은 아니라는 점은 확실하다고 생각합니다. 이 말씀을 하신 후 예수님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베드로를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십니다. 그런데 그분의 얼굴은 해처럼 빛나고 옷은 빛처럼 하얘졌습니다. 그때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나 그분과 이야기를 나눕니다.
이스라엘의 동북쪽에 있는 헤르몬(Hermon, 헐몬)산에서 일어난 일이 아닐까 하고 추측하게 됩니다. 이스라엘의 산들은 대부분 그리 높지 않지만, 헤르몬산은 해발 2000M가 넘기 때문에 초여름에도 눈이 녹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런데 전후 사정으로 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이끌고 이 산으로 올라갈 때는 수난과 부활 전 시기이니 충분히 눈이 많이 있을 것이라 짐작됩니다. 그런데 선글라스 없이 설산에서 며칠 머물다 보면 설맹이 생길 수 있습니다. 일시적이라 대부분 하산하면 회복이 되는데, 옷이 하얗고, 얼굴이 해처럼 빛난다는 묘사가 어쩌면 그런 현상이 일어났을까 하는 과학적인 추측을 해 보게 됩니다. 이때 환시나 착시 현상도 일어날 수 있어 모세나 엘리야의 모습이 예수님과 검쳐 보일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조금은 발칙 한 상상도 해 보게 됩니다.
제게 중요한 것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이런 장면이 성경에 기록된 이유는 무엇이고 그것을 어떻게 읽고 묵상하느냐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변모는 곧 있을 십자가에서의 수난과 부활을 준비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과정이었습니다. 당시 제자들로서는 모세나 엘리야에 버금가는 분을 모시게 되었으니 가슴 뛰는 순간이었을 터입니다. 한데, 예수님께서는 이에 대해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모세나 엘리야와 함께했다는 사실은 이미 예수님께서 삶과 죽음의 차원을 넘어선 경계에 이르신 것이라는 뜻으로도 읽힙니다.
평범한 우리에게 죽음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오는 것이므로, 사는 날까지는 죽는다는 사실을 잊고 열심히 살면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말기 암 환자도 죽는 그날까지 열심히 암과 투쟁하면서 사는 것을 영웅적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죽음을 이미 아시고 모세와 엘리야를 만나기 위해 가장 높은 산으로 올라간 것은 아닐까요. 가장 사랑하는 제자들을 데리고 간 것은 그런 족적을 조금이라도 경험하고 두고두고 새기라는 뜻은 혹시 아니었을까요. 가장 수수께끼 같은 대목 중 하나이긴 하지만, 죽음을 준비하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는 중요한 메시지가 여기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 모두, 과거에 죽은 사람들처럼 죽음을 향해 가고 있습니다. 먼저 죽은 사람들에게 무엇을 배워 준비를 해야 할지는 각자의 선택일 것입니다. 영원히 죽지 않을 것 처럼 삶에 집착했던 이들과 매일 성스러운 죽음을 준비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삶은 많은 차이가 있을 듯 싶습니다.
예수님의 죽음 준비와 완전히 반대편 쪽에 헤로데 임금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12장 20-25절은 아주 간단하게 헤로데 임금이 어떻게 죽었는지 묘사하고 있습니다. 헤로데는 티로와 시돈 사람들과 분쟁관계에 있었는데 평화조약을 맺기로 한 날 용포를 입고 옥좌에 앉아 멋진 연설을 하게 됩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신으로 추앙하게 됩니다. 그러자 주님의 천사가 헤로데를 내리쳤고, 그는 벌레에 먹혀 죽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는 완전히 정반대의 모습입니다. 신약에는 생각 외로 지옥에 대한 묘사가 많지 않은데 마르코복음 9장 48절에 지옥에서는 죄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사야서에는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이 나오고(이사 41,14) 다윗은 자신을 구더기요 백성들의 조통거리(시편 22,6)라고 비하했습니다.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원전일까요. 벌레로 변한 자신이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되는 체험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크게 다르지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도 때론 벌레보다 못한 인간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고, 또 상대를 벌레 취급할 때도 있으니까요. 어쩌면 양쪽 다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상실하는 순간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헤로데 임금이 벌레에 먹혀 죽었다는 것을 중의적으로 해석할 수도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옥 불에 떨어졌다는 뜻일 수도 있고, 구더기 같은 백성들에 의해 며칠 동안 죽임을 당했다는 것을 우회적으로 표현했을 수도 있습니다. 죽는 그 순간까지 자신이 신의 반열에 이른 듯 연설을 하며 한껏 고조되었지만 결국 버러지보다 못한 죽음을 맞았던 헤로데 임금의 마지막은 예수님의 부활과 대조되는 장면입니다. 나 자신의 죽음이 언제 올지 모르나, 어떤 준비를 하며 살아야 할지 냉정하게 생각하게 만드는 구절입니다.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예수님의 유언
신약의 예수님 말씀 중에는 일종의 유언처럼 읽히는 대목들이 많습니다. 그중 한 대목이 마태오복음 16장 24-27절입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천사들과 함께 올 터인데, 그때에 각자에게 그 행실대로 갚을 것이다.” 이 대목은 마르코복음 8장 34-38절, 루카복음 9장 23-6절, 요한복음 I2장 25-26절인 사복음서에 공통적으로 등장합니다.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대목은 꽤 많은 사람들이 자기 편한 대로 혹은 자기의 가치관에 맞추어 이해하는 것 같습니다. 저도 어쩌면 그중 하나일 것 같습니다.
먼저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는 유명한 구절입니다. 그래서 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의무, 혹은 자신을 힘들게 하는 상황이나 대상들을 십자가로 표현합니다. 그런데 가끔은 그런 상황까지 십자가로 이야기해야 하나 싶은 생각이 듭니다. 깊은 성찰 없이 남용하니까요. 심지어는 타인을 무조건 비난할 때 ‘너는 내 십자가다.’라고 들이댑니다. 무조건 ‘나는 희생자고 너는 가해자다.’라는 이분법도 있습니다. 들여다보면 자신의 영달, 부귀영화를 위해 애쓰다 보니 생기는 일인데도 마치 대단한 희생을 하는 것처럼 포장하는 것이지요. 어찌 보면 저를 포함한 모두가 자기의 이기심 때문에, 혹은 자기의 대수롭지 않은 재주 때문에 또는 다른 사람에 대한 집착 때문에 스스로의 무덤을 파거나 스스로 올라간 나무에서 떨어지면서 십자가 운운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라는 대목은 마치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 생즉사(死則生 生則死)’와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오기가 쓴 「오자병법」 ‘필사즉생 행생즉사(必死則生 幸生則死)’에 나오는 말을 이순신 장군이 인용한 것이라 합니다. 「오자병법」의 원전 의도는 그저 전쟁터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곳이라 죽기를 각오해야 살지 행운을 기대하면 죽는다라며 군인들을 독려하는 문맥 중 하나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보는 태도와 군인의 삶과 죽음을 보는 태도는 매우 다른 것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의 이 말씀을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세속적인 주문으로 곡해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즉 ‘목숨 걸고 일해야 출세한다, 목숨 걸고 싸워야 정권을 잡는다.’ 하는 식으로 편하게 해석하고 스스로의 충동적이고 본능적인 이기심을 마치 예수님의 가르침인양 호도하고 포장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그리스어 원문에서는 목숨이 프시케(Psyche), 즉 영혼, 혹은 마음으로 기록됩니다. 따라서 이 부분에서 “사람이 제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하는 대목은 육체의 손해가 아니라 영혼의 손해라고 이해해야 합니다. 그러니 목숨걸고 세속의 일에 투쟁하라는 주문으로 읽는다면 완전한 오독이 아닐까요. 또 어떤 사람들은 이 부분을 자신의 육체적인 건강이라고 해석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소유에 목매달지 마라, 나의 행복이 중요한 것이다라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물론 자신의 건강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니지만 예수님께서 주문하신 것은 작은 자아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큰 자기가 추구하는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헌신이기 때문에 본래의 의미를 자꾸 축소하고 왜곡하려는 우리 자신에 대해 좀 더 엄정하고 조심스러워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리 스스로를 다독여도 살면서 원래 갖고 있던 순수한 꿈, 열정, 기개, 맑은 정신 같은 것들은 점점 사라지면서 그저 작은 일이나 사람에 매달리고 쓸데없는 욕심을 부리게 되는 것이 우리의 본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나이가 들면서 그런 본능은 사라질 것 같지만 오히려 체력과 용모가 변해가는 만큼 자신감도, 능력도 떨어져 추한 면이 더 도드라지기도 합니다. 두려움, 공포, 피해 의식 같은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만 점점 더 쌓이는 것이지요. 죽음을 목전에 두고도 의연하게 아픈 나보다 주변을 먼저 살피고 따뜻하게 배려할 수 있는 이들을 만나기가 어려운 이유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음을 앞두고도 제자들에게 목숨을 버리고,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던 의미를 다시 생각해 봅니다. 길을 잃고 주저앉아 있을 때 인생의 의무와 책임과 고통이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처럼 무겁게만 느껴질 때 “너도 나처럼 십자가를 지고 있구나.”라는 위로의 말씀이 아닌지. 그래서 어쩌면 손을 잡고 등도 밀어 주시는 격려의 처방전은 아닐까도 싶습니다.
[신약으로 배우는 분석심리학]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기회
부활하신 후 예수님이 마리아에게 이르신 말씀 중 핵심은 “나는 내 아버지시며 너희의 아버지신 분, 내 하느님이시며 너희의 하느님이신 분께 올라간다.”(요한 20,17)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예수님을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라고 교리에서 가르치기 때문에 예수님만 아버지의 진실한 자녀이지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아닐 것이라는 생각을 무의식적으로나 의식적으로 하게 됩니다.
특히 어리석은 일을 했을 때, 마음이 사나와져 사랑의 마음이 사라질 때, 나는 참으로 무가치하고 무의미한 존재이니 더더구나 하느님의 자녀는 절대 아닌 것처럼 생각됩니다. 무기력한 마음이 되어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 하거나, 혹은 스스로에게 화가 나면 나뿐 아니라 남들에게도 함부로 합니다. 하필이면 이런 존재로 태어나게 했는지, 또 그렇게 나를 키워 준 부모, 내가 속한 사회를 원망하게 되기도 합니다. 부모나 사회를 원망하는 마음은 다시 하느님께 대한 원망으로 번집니다. 하느님이 있다면 나한테 이런 불행을 줄 리 없어. 또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나게 하는 하느님이라면 정말 나쁜 하느님일거야. 어떻게 세상을 이따위로 방치할 수 있지? 무책임하거나, 게으르거나, 아니면 정말 우리를 괴롭히고 싶으시거나. 그러니 하느님이 있다는 논리 자체가 틀린 것이야.… 이렇게 생각이 번지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모욕과 조롱 속에서 돌아가시면서 모든 희망이 사라진 제자들의 마음에도 아마 이런 번잡하고 시끄러운 생각들이 자리잡지 않았을까요. 억압과 가난과 시련 속에서도 우리를 구원해 주실 메시아라는 희망으로 간신히 버티고 있던 터라, 너무나 허무하고 비참하게 세상을 떠나셨으니까 말이지요. 이제 배신감까지 사로 잡힌 제자들에게는 뿔뿔이 흩어질 일만 남은 것 같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으니, 당연히 믿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특히 따지기 좋아하고 논리적으로 생각하는 제자 토마스는 예수님의 몸을 만져 가면서 확인하려고 합니다.(요한 20, 25-29 참조) 무엇이든 만질 수 있는 물리적 증거가 있어야 참이라고 주장하는 현대의 과학자들과 비슷합니다. 만질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빛, 또 형체가 없는 소리나 중력의 존재는 인정하면서 말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보지 않고 믿는 이들은 행복하다고 하십 니다.
한편으로는 베드로에게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을 거듭 물으십니다.(요한 21,15-19 참조) 세 번이나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정했던 베드로였지만 예수님의 거듭된 물음에 대답을 하면서 슬픈 마음에 빠집니다. 이미 내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을 아시면서 왜 거듭 물어보는지 이해가 가지 않을 수도 있었겠습니다. 어쩌면 베드로의 배신 때문에 제자들 가운데 베드로의 위상이 흔들릴까 봐 더 단단한 입지를 만들어 주시려는 것, 또 용서의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이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일까 하고 추측해 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을 떠난 사람과의 기억으로 행복하기 위해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것은 용서와 수용이라는 점을 가르치기 위해 이런 일화들을 남기시지 않으셨을까요. 먼저 간 사람이 혹시라도 내게 서운한 것을 다 풀지 않고 갔다면 그 사람을 용서해야 하고, 반대로 내가 부족해서 그 사람에게 더 큰 사랑을 충분히 베풀지 못했다고 생각해서 자신을 결코 용서하지 못하겠다는 태도 역시 버려야 한다고 말이지요. 물론 남이든 나 자신이든, 잘못한 일을 용서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용서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우리의 윤리적 소명을 수난을 통해 그대로 보여 주신 것 같습니다. 어떤 말이나 글보다 더 우리 인류를 근본적으로 뒤흔들고, 그 영향이 수 천 년 이상 지속될 수 있는 까닭이 아닐까 싶습니다.
또한 정말 세심한 마음으로, 제자들이 공과 과를 따지며 서로 다툴까 봐 말끔하게 정리까지 해 주십니다. 예수님의 애제자의 운명이 혹시라도 자신과 달리 특별하고 좋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내가 올 때까지 그가 살아 있기를 내가 바란다 할지라도, 그것이 너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 너는 나를 따라라.”(요한 21,22) 하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일, 또 그 사랑을 내 이웃과 실천하는 것까지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잘못된 공정과 정의의 논리를 내세우는 우리의 마음을 다 들여다보고 계십니다. 속된 성공하는 일뿐 아니라 천국에 가는 것, 부활에 동참하는 것까지, 다른 사람은 어떻게 되는지 궁금해 하다니요! 저 사람은 나보다 더 죄가 많으니 천국에는 절대 못 갈 거야, 하는 식으로 남과 나를 죽을 때까지 비교하고 있네요. 나와 상관없는 남의 일에 관심을 기울이느라 정작 필요한 내 일은 제대로 하지 못했던 잘못된 습관을 죽음의 순간까지 끌고 가면 내 손해입니다. 신앙이란 결국 신과 나와의 일대일 관계일 뿐이지 남들이 어떻게 되든 그게 뭐 중요하겠습니까.
하지만 예수님의 자녀다운 죽음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할지는 막막합니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수난의 길은 도저히 실천할 수도 흉내 낼 수도 없는 일들입니다. 아마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을 자주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냥 오늘 하루 즐겁게 살면 되지, 하고 말입니다. 우리 모두 결국 겪을 마지막 종착지라 해도, 죽음의 과정은 상상만 해도 무서우니까요. 우리 모두 피하고 싶은 바로 그 마지막 시간이 결국 내 존재의 실체와 살아온 과정 전체를 정직하게 직시하게 해 준다는 점을 성경 속의 수난과 부활의 장면들은 넌지시 이야기해 줍니다. 그 마지막 순간, 부족하고 어리석은 자신에 대한 집착과 미련은 다 벗어 버릴 수 있다면, 그래서 오로지 사랑으로 살고 사랑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의 심정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다면, 신에 대한 깨달음이 번개처럼 찾아오기만 한다면, 정말 크고 깊은 축복이 되리라 감히 상상하고 소망해 봅니다.
[유익한 심리학] “다 이루어졌다.”(요한 19,30)
“다 이루어졌다.”
이 말씀은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기 직전에 예수님께서 하신 마지막 말씀이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람의 행위로 그 존재를 평가해서는 안 되겠지만, 행위가 존재에 준한다는 라틴어 격언은 맞는 말이다. 사람의 행위는 그 사람의 존재를 반영하고 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다 이루어졌다”라고 하신 말씀에는 자신의 존재를 온전히 이루셨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메시아, 구세주)로서 자신을,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살아냄, 자유로운 선택으로 이루어진 행위들의 집합체로서 자기 삶, 곧 존재를 이루신 것이다. 구세주로서 자기 존재를 온전히 살아내기 위해 피할 수 없었던 것이 ‘십자가의 길’이었다. 따라서 누구든 자기 존재를 실현하고자 한다면 ‘자기 십자가’(마태 10,38; 루가 14,27. 참조)를 짊어져야 하는 까닭이다.
오늘날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사람은 자아실현 경향성을 타고나며, 자기실현의 삶을 살아갈 때 행복하고 삶의 의미와 보람을 느낄 수 있는 존재라는 점이다.
누구든 “다 이루어졌다”라는 마지막 말을 뱉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여기에 다른 하나가 더 있다. 그것은 누구든 자기 존재를 이루었을 때 비로소 하느님과 하나 됨에 이른다는 것이다. 우리의 존재가 하느님과 하나 될 때 비로소 모든 여정을 마친다는 것이다. 하느님은 관계의 하느님이요, 그래서 인격신이라고 부르는지도 모르겠다. 자아실현은 우리가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를 결정하는 우리의 선택이 이루어낸 결정체다.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사악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와 관계를 맺으신다.
‘지금-여기’에서 주님의 크신 선물인 자유의 선택으로 나는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만들어갈지 결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여기’에서 나의 행위요, 그 행위를 통해 ‘나는 존재한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살아있음이 얼마나 큰 축복이요, 은혜로운 순간인가?
이 순간을 놓치고 이승에서 ‘어떻게 되겠지!’ 하는 생각이 얼마나 나태하고 어리석은 생각인가? 어느 시대보다 현대인들은 ‘자기 SELF’에 관심이 많다. 아무리 관심이 많아도 그래서 욕심껏 하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크다 하여도, 제대로 보고, 제대로 생각할 줄 모르면 모든 것이 낭패로 끝날 수 있다.
우리가 이루어야 할 자기 존재는 궁극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로 나아가는 ‘나’를 이루는 일이기에 내 욕심껏 산다고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아실현에는 하늘의 뜻도 담겨 있으니 ‘나에 대한 하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자기를 실현하겠다고 할 수 있겠는가?
모든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뜻이 있으니, 그것이 사람의 눈에는 작게 보이고 하찮게 보일지라도 하늘나라를 위한 일은 결코 비교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작은 일이든 큰일이든 충실한 사람은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 대접을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마태 25,23; 루카 16,10; 19,17.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