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9주일 독서기도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삽나이다
주여, 당신은 위대하시고, 크게 기림직하옵시며 당신 능이 크시고 그 슬기는 헤아릴 길 없나이다. 이제 당신이 내신 한줌 피조물, 이 인간이 당신을 찬미하고자 생심하옵다니 - 죽음 살이 두루 뻗쳐 스스로 지은 죄의 증거와 “오만한 자를 당신이 물리치시는” 그 증거를 몸소 지니는 인간이 아니오니까? 그러하와도 당신의 한줌 피조물 인간이 감히 당신을 기리려 드옵나이다. 당신을 기림으로써 즐기라 일깨워 주심이오니 님 위해 우리를 내시었기 님 안에 쉬기까지는 우리 마음이 찹찹하지 않삽나이다.
주여, 당신을 부르는 것이, 아니면 당신을 기리는 것이 먼저인지, 또는 당신을 아는 것이 부르는 것보다 먼저인지 나를 알게 하소서. 알아듣게 하여 주소서. 그러나 누구 있어 당신을 모르면서 부르오리까? 모르고 하는 자는 이것 대신 딴 것을 부르기가 쉽사옵니다. 이러하올진대 차라리 부름 받으시기는 알음받기 위함이시온지? 그러하오나 “믿은 바 없는 그분을 어찌 부르며 전도하는 자 없이 어찌 믿으오리까.”
“그를 찾는 자들이 주님을 찬미하리니,” 찾는 자들이 그분을 얻고, 얻으며 그분을 찬미하리로다. 주여, 내 당신을 부르며 찾고, 당신을 믿으며 부르오리니, 이미 당신은 우리에게 전도되셨음이니이다. 내게 주시고, 당신 성자의 인성과 당신 전도자의 성직으로 내게 불어넣으신 내 신덕의 주여, 당신을 부르옵나이다.
내 천주, 내 주 하느님을 부른다 함이 어인 말인고. 그를 부름이 곧 내 안으로 불러 모심이거늘? 내 하느님이 내게 오실 자리가 내 안에 있기라도 하단 말인가? 하늘과 땅을 만드신 천주, 그 하느님이 오실 자리가 내 안에? 내 임자 하느님이시여, 당신을 용납할 무엇이 과연 내 안에 있으리까? 당신이 창조하셨고, 나를 그 안에 만드신 저 하늘과 땅이 당신을 담기라도 하나이까? 아니 오면 존재하는 모든 것이 당신 없인 있지 않을 뻔했기에 있는 것이란 무엇이든 당신을 용납하는 것이랍니까?
내가 이렇듯 존재하는 바에야 내 안에 오시라 비는 까닭이 무엇이오니까? 내 안에 당신이 아니 계신다면 있지도 못할 내가 아니오니까? 내 아직 지옥에 있어 보지 않았어도 당신은 거기도 계시나이다. “나 지옥에 내려갈지라도 거기 당신이 계심”이니이다. 내 천주여, 나는 있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신이 내 안에 아니 계셨던들 절대 나는 존재치 않았을 것입니다. “그한테서 모든 것이, 그를 말미암아 모든 것, 그 안에 모든 것이” 존재하는 당신 안에 내가 있지 않았던들 애당초 있을 수 없었다 함이 차라리 낫지 않으오리까? 그러합니다. 주여, 실로 그러하옵니다.
이미 당신 안에 있는 나라면 어디로 당신을 불러 모시리까? 어디로 좇아 당신이 내 안으로 오시리까? 하늘땅 너머 어디로 벗어나서 그리로 좇아 내 하느님을 내 안으로 오시게 하오리까? “내가 하늘과 땅을 채우리라.” 말씀하셨거늘?
뉘 있어 나를 당신 안에 쉬게 해주리까? 그 누가 당신으로 하여금 내 마음 안에 오시게 해주리까? 내 마음 흠뻑 취하게 만드시면 내 죄악 모두 잊고, 오직 하나인 나의 행복 당신을 얼싸안으오리다. 당신은 나의 무엇이 되시나이까? 어여삐 여기소서, 아뢰리이다. 내가 당신의 무엇이길래 날같은 것이 당신을 사랑하라 명하시고, 아니하면 진노하시며 엄청난 비참을 내리시리라 으르시나이까? 당신을 사랑 아니하는 것이 작고 작은 비참이라도 되는 것이랍니까? 아아! 주 내 하느님이여, 당신이 나의 무엇인지 어여삐 여기심으로써 내게 말씀하소서. “내 영혼에게 말씀하소서. 네 구원이 나로라.”고.
이리 말씀하소서, 듣겠나이다. 보소서, 주여, 당신 앞에 내 마음의 이 귀들을. 이를 열으사 내 영혼에게 말씀하소서. 내 구원이 나로라고. 이 목소리 뒤로 내달아 가서 당신을 붙잡고 말으오리다. “당신 얼굴 나한테서 감추지 마옵소서.” 차라리 뵈옵고 죽으리다, 아니 죽기 위해서.
응송 시편 72(73),25-26; 34(35),3c
◎ 당신 아닌 누구가 하늘에서 날 위해 주오리까? 당신과 함께 있노라면, 즐거울 것 땅에는 없삽나이다. 이 몸과 이 마음 다한다 하여도 * 내 마음의 바위 나의 몫은 항상 하느님.
○ 내 영혼에게 “네 구원이 나로라.” 말씀하소서.
◎ 내 마음의. 바위 나의 몫은 항상 하느님.
연중 제9주간 월요일 독서기도
마음의 온갖 불안의 이유는 아무도 자기 자신을 책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형제 여러분, 사람은 자기 마음을 상하게 하는 말을 들을 때 흔히 그 말을 못 들은 체하며 아무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귀로 흘려 버리지만, 어떤 때는 그 말을 듣자마자 마음이 불안해지고 괴로워집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번 생각해 봅시다. 이 차이점의 원인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원인은 하나입니까, 여러 가지입니까? 내 생각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고 보지만 특히 한 가지가 다른 모든 이유의 원인이 된다고 봅니다. 누가 말한 대로 “그 차이점은 그것을 들을 때 듣는 그 사람의 내적인 마음 상태에 달려 있습니다.”
예를 들면 누가 기도와 묵상 중에 있다면 그때 마음 상하게 하는 형제를 가장 쉽게 참아 줄 수 있고 평온도 유지합니다. 이것은 형제에 대해 뜨거운 사랑을 지니고 있어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을 잘 참아 내거나 또는 자기 마음을 상하게 하는 사람을 경멸하고 그를 제일 못난 놈으로, 대답해 줄 가치조차 없는 사람으로 여겨 버리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릅니다. 이 경우 그는 자기가 받은 욕이나 모욕을 다른 이에게 말하는 것조차 원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어떤 경우 사람이 불안해지지 않거나 괴로워하지 않는 이유는 마음 상하게 하는 말을 무관심으로 돌리고 무시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모욕하는 형제의 말 때문에 괴로워하는 이유는 그 순간 기분이 좋지 않기 때문이거나 또는 그를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이외에도 다른 여러 가지 이유들이 있고 또 그 이유들을 여러 방법으로 제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점에 대해 면밀히 검토해 본다면 마음의 온갖 불안의 이유는 아무도 자기 자신을 책하지 않는 데에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분 상하고 마음 괴로워하는 것은 바로 여기서 생겨나고, 때때로 마음의 평화를 찾을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이것을 놀라워 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평화를 얻고자 한다면 이밖에 다른 길이 없다고 성인들도 가르쳤습니다. 이것은 성인들에게서만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생활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평화를 바라보면서도 그분들의 가르침을 따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만사에 화를 내고 잘못을 우리 자신에게 돌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면서 옳은 길을 가고 있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 그러합니다. 한 사람이 참으로 수많은 선업을 쌓을지 몰라도 이 길을 따르지 않는다면 결코 평화를 얻지 못할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늘 괴로워할 것이고 또 다른 이들을 괴롭힐 것이며 그의 수고는 헛된 것이 될 것입니다.
응송 1요한 1,8. 9; 잠언 28,13
◎ 만일 우리가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자신을 속이는 것이지만, *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면 진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리라.
○ 제 잘못을 감추는 이는 잘될 리 없지만,
◎ 우리가. 우리의 죄를 하느님께 고백하면 진실하시고 의로우신 하느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리라.
연중 제9주간 화요일 독서기도
마음의 거짓된 평화
자기 자신을 책하는 사람은 어떤 불편이건, 손해건, 모욕이건, 어떤 괴로운 일이건 자기에게 닥칠 때 그것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또 그런 것을 자기가 마땅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며 그것 때문에 조금도 마음 불안해하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보다 더 평화로운 사람이 있겠습니까? 아마도 어떤 이는 반론을 제기할지도 모릅니다. “어느 형제가 나를 괴롭히지만 내 자신을 돌이켜볼 때 그가 나를 그렇게 할 이유를 찾지 못하는데 어떻게 나를 책할 수 있단 말입니까?”라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하느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자신을 세밀히 반성해 본다면 자기 자신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점을 결코 찾아내지 못할 것이고, 자신의 어떤 행동이나 말이나 태도로 그런 계기를 유발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가 현재 이 모든 점에서 자기 잘못을 찾지 못한다고 해도 다른 때에 그 똑같은 행동이나 또는 다른 행동으로 말미암아 그 형제를 괴롭혔거나 또는 다른 형제의 마음을 거의 틀림없이 상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그 잘못이나 다른 곳에서 저지른 다른 여러 가지 잘못들 때문에 응당히 자신을 책해야 합니다.
또 다른 이는 이렇게 물을지 모릅니다. “내가 평화 속에 조용히 앉아 있는데 한 형제가 다가와서는 기분 상하는 모욕적인 언사로써 내 기분을 상하게 했을 때 왜 나를 책해야 하겠습니까? 이 사람은 그것을 참지 못하고 자기가 성내고 불안해지는 것이 당연하다고 느끼면서 그가 끼어들지 않았거나 말하지 않았거나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면 자기가 죄를 짓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우스운 말이며 무게 없는 생각입니다. 그 형제가 그 말을 했다고 해서 마음속에 분노의 격정을 집어넣은 것이 아니고, 다만 그 말이 이미 그의 내부에 있던 격정을 드러나게 했다는 점입니다. 이때에 그가 원한다면 그것은 회개의 기회가 될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덜 익은 밀알과 같습니다. 겉으로는 싱싱하고 반짝이지만 바수어 트리면 내부의 더러운 것이 나옵니다.
그래서 자기 나름대로 생각하듯 평화 속에 조용히 앉아 있는 이 사람은 자기가 보지 못하는 격정을 내부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형제가 나타나 그에게 불쾌한 말을 한마디 던지면 그 안에 감추어져 있던 고름과 더러운 것을 토해 냅니다.
그가 자비를 얻고자 한다면 먼저 회개하여 자신을 정화시키고 좀 더 나아지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그렇게도 유익한 계기를 가져다 준 그 형제를 욕하는 것보다 도리어 감사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이런 사람에게 앞으로 유혹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가 진보하면 할수록 그만큼 더 쉽게 유혹을 맞을 수 있고, 영혼이 진보하면 좀 더 용맹하고 강해져 어떤 어려움에 봉착한다고 해도 그것을 견디어 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응송 욥 9,2. 14; 15,15 참조
◎ 하느님 앞에서 죄 없다고 할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 나 어찌 한마디인들 대답할 수 있으며, 그와 맞서서 과연 무엇을 말하겠는가?
○ 하늘에 있는 거룩한 자들 중에도 하느님께 신뢰받을 만한 자 없고, 하늘마저도 당신 보시기에 깨끗하지 못한데,
◎ 나 어찌. 한마디인들 대답할 수 있으며, 그와 맞서서 과연 무엇을 말하겠는가?
연중 제9주간 수요일 독서기도
참된 가르침은 자만심을 피한다
“욥, 이제 내 말을 들어 보시오. 한마디도 놓치지 말고 귀를 기울이시오.” 오만한 사람들의 가르침은 하나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가르침에 겸손하게 전달할 줄 모르며 자기들이 알고 있는 진리를 그대로 전해 줄 수 없습니다. 이 점은 그들이 가르칠 때 쓰는 말에서 밝히 드러납니다. 즉, 그들은 자기네가 어떤 탁월한 높은 위치에 앉아 있다고 느끼면서 자기네가 가르치고 있는 이들이 까마득히 저 밑 가장 낮은 데서 앉아 있는 것으로 내려다보고는 권고하는 식으로 말하지 않고 명령하는 식으로 말합니다.
주님은 예언자를 통하여 이런 사람들에게 잘 말해 주십니다. “너희는 폭력과 잔학으로 그들을 다스렸도다.” 폭력과 잔학으로 다스리는 사람들은 자기 휘하의 사람들을 온유한 설득으로 고쳐 주려 하지 않고 잔혹한 지배로 꺾으려고 합니다. 한편 겸손한 사람의 참된 가르침은 생각으로 오만의 죄과를 열심히 피하면서 말씀의 화살로써 있는 힘을 다해 오만의 괴수를 추적합니다. 거룩한 말씀으로써 듣는 이들의 마음속에 그 괴수를 추적하는 동안 오만한 태도로 말미암아 도리어 그 괴수를 증거하지 않도록 조심합니다. 그는 생도들에게 말보다 행동으로 진리를 말해 주기 위해 가르침과 생활로써 모든 덕행의 스승이요 어머니인 겸손을 보여 주려고 노력합니다.
이 때문에 바오로는 데살로니카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흡사 자신의 고유한 사도직의 품위를 잊어버린 듯이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어린이처럼 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사도 베드로도 말합니다. “여러분이 간직하고 있는 희망에 대해서 설명을 듣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는 언제라도 답변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십시오.” 그리고 나서 우리의 가르침은 적절한 방법으로 전달되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려고 다음과 같이 덧붙여 말합니다. “그러나 답변을 할 때 여러분은 언제나 깨끗한 양심을 지니고 부드러운 태도로 조심스럽게 해야 합니다.”
바오로가 디도에게 “큰 권위를 가지고 이러한 일들을 가르치고 사람들을 권고하시오.”라고 말할 때 권위로 지배하라고 권고하지 않고 모범적 생활이 주는 권위로 하도록 권고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가르치기 전에 자신이 먼저 그것을 실천한다면, 그 사람은 가르치는 바를 권위 있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행동이 말하는 것과 모순된다면 그 가르침은 믿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합니다. 그래서 바오로는 오만한 말이 지니는 권위보다 착한 행실에서 오는 신뢰성을 천거합니다. 주님 역시 “그 가르치신 것이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달리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고 성서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인간의 약점에서 오는 어떤 죄도 범하시지 않았기 때문에 주님 홀로 참된 권위를 가지고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분은 당신 인성의 무죄성을 통하여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고 또 우리를 위하여 행사하신 권위를 당신 신성의 힘으로 말미암아 소유하고 계셨습니다.
응송 1베드 5,5b; 마태 11,29b
◎ 너희는 모두 겸손의 옷을 입고 서로 섬기어라. *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시는도다.
○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의 영혼이 안식을 얻으리라.
◎ 하느님께서는.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사람에게 은총을 베푸시는도다.
연중 제9주간 목요일 독서기도
교회는 밝아 오는 새벽처럼 나아간다
동녘이 밝아 올 때 어둠이 빛으로 변하기 때문에, 뽑히운 이들의 교회는 여명 또는 새벽이라고 합니다. 새벽이 어둠 후 태양의 빛나는 광채로 날을 밝혀 주듯이 교회도 불신앙의 밤에서 신앙의 빛으로 밝혀 줍니다. 이것은 아가에 잘 묘사되어 있습니다. “밝아 오는 여명처럼 나아오는 그녀는 누구인가?” 천상 생활의 상급을 갈망하는 성교회는 죄의 어둠을 떠나 정의의 빛으로 빛나기 때문에 여명이라고 부릅니다.
여명의 성격에 대해 좀더 깊이 고찰해 봅니다. 여명이란 밤이 이미 지나갔음을 말해 주지만 정오의 완전한 밝음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여명은 밤을 몰아내고 날빛을 환영할 때 빛과 어둠을 혼합 상태로 둡니다. 진리를 따르는 우리 모두는 이 현세에서 빛과 어둠을 혼합 상태로 두는 새벽 같은 존재들이 아닙니까? 우리는 빛에 속하는 일도 하지만 어떤 일에서는 아직도 어둠의 잔재에서 완전히 해방되지 못했습니다. 예언자는 하느님께 아뢰었습니다. “살아 있는 누구도 당신 앞에서 의로운 사람이란 없삽나이다.”
또 다른 데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실수하는 일이 많삽나이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가 “밤이 거의 새었다.”라고 말할 때 “낮이 왔다.”고 덧붙이지 않고 “낮이 가까웠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밤이 샌 후 낮이 “왔다”고 하지 않고 “가까이 왔다”고 말하는 그는 의심할 여지 없이 자신도 아직 어둠을 지니고 태양이 뜨기 전의 새벽 상태에 있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뽑힌 이들의 성교회는 죄의 어둠이 자신과 섞여 있지 않을 그때에만 완전한 낮이 될 것입니다. 교회는 내적인 빛의 완전한 열기로 밝혀 질 때에만 완전한 낮이 될 것입니다. 새벽이 아직도 그 도정에 있다는 사실은 “당신은 새벽에게 ‘이것이 네 자리다.’ 하고 일러 주셨습니다.”라는 말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누구를 자기 자리로 보낼 때 그는 분명히 한 자리에서 나와 다른 자리로 갑니다. 새벽의 자리란 영원한 직관의 완전한 광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직관에 도달할 대 지나간 밤의 어둠은 그 흔적조차 없을 것입니다. 새벽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다윗이 말해 줍니다. “내 영혼, 하느님을 그리나이다. 내 영혼, 하느님을, 생명의 하느님을 애타게 그리건만 그 하느님 얼굴을 언제나 가서 뵈오리까?” 사도 바오로는 자신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원한다고 말했을 때, 또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라고 말했을 때 새벽은 자기가 알고 있던 이 자리로 급히 줄달음쳐 달리고 있었습니다.
응송 필립 1,3. 6. 9
◎ 나는 너희를 생각할 때마다 나의 하느님께 감사 드리노라. * 너희에게 훌륭한 일을 시작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계속 하실 것이며,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성하실 것이로다.
○ 내가 너희를 위하여 기원하는 것은 너희의 사랑이 참된 지식과 분별력을 갖추어 더 풍성해지는 것이로다.
◎ 너희에게. 훌륭한 일을 시작하신 하느님께서는 그 일을 계속 하실 것이며, 마침내 그리스도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성하실 것이로다.
연중 제9주간 금요일 독서기도
주님은 마음의 생각과 지향을 다 아십니다
주님은 우리 마음의 생각과 지향을 알고 계십니다. 주님은 틀림없이 이 모두를 알고 계시지만 우리는 이와 달리 그분이 분별의 은총으로써 분별하게 해주시는 것만을 알고 있습니다. 인간이 지니고 있는 영은 인간 안에 있는 것 모두를 알고 있지는 않고,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지니고 있는 생각의 대상도 언제나 객관적으로 파악하지는 않습니다. 그는 영의 눈 바로 앞에서 바라보는 것마저 시야를 흐리게 하는 안개 때문에 정확히 분별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또 자주 자신의 판단에서 또는 다른 사람들의 영향력으로 또는 마귀의 유혹으로 하느님이 보시기에 덕행의 상급을 받을 만한 것이 되지 못하는 것을 거룩한 것으로 보게 됩니다. 그리고 어떤 속임수로써 마음의 시야를 가리는 덕행의 유사품과 악행의 유사품도 있습니다. 이 유사품은 실제로 좋지 않은 것이 좋은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 좋은 것이 나쁜 것으로 보이는 듯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나약함과 무지의 소산이므로 우리는 참 한탄하고 매우 두려워해야 합니다.
성서는 말합니다. “사람 눈에 바르게 보이는 길이 마침내 죽음에 이르는 길이 되기도 한다.” 성 요한이 “그들이 성령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과연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보십시오.”라고 말할 때 이 위험을 피하도록 권고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생각과 정감과 지향을 정확히 또 올바른 판단력으로 판단하기 위해 하느님께로부터 영의 분별력을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하느님께로부터 온 것인지 아닌지를 시험해 볼 수 있겠습니까? 이 분별력은 참으로 온갖 덕행의 어머니이고, 다른 사람의 생활을 지도할 때, 자신의 생활 방향을 찾거나 그것을 고칠 때 모든 이에게 반드시 필요한 것입니다.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생각은 그것을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하려고 할 때에만 올바릅니다. 마음의 순수성 안에서 그분께 향하는 지향만 참으로 거룩합니다. 우리 눈이 단순할 때에만 우리 모든 생각과 행동이 빛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단순한 눈”이란 말은 두 단어, 즉 “눈” 그리고 “단순하다”로 되어 있습니다. 눈이란 올바른 판단으로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본다는 것을 뜻하고, 단순성이란 이중적인 것을 피하고 거룩한 지향으로 행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올바른 생각은 오류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지향은 허위를 배제합니다. 참된 분별력은 올바른 생각과 거룩한 지향의 결합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일은 분별력의 빛 안에서, 즉 하느님 안에서 그리고 하느님 현존 앞에서 해야 합니다.
응송 미가 6,8; 시편 36(37),3
◎ 사람아, 주께서 무엇을 좋아하시는지, 무엇을 원하시는지 들어서 알지 않느냐? * 정의를 실천하는 일, 한결같은 사랑을 즐겨 행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 주님만 바라고 너는 선을 하라. 네 땅에 살면서 태평을 누리리라.
◎ 정의를. 실천하는 일, 한결같은 사랑을 즐겨 행하는 일, 조심스레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일, 그 일밖에 무엇이 더 있겠느냐?
연중 제9주간 토요일 독서기도
참 생명에 이르는 길
그리스도 친히 길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는 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그분으로 말미암아 아버지께로 가까이 나아가게 되었기 때문에” 그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길은 목적지에서 떨어져 있지 않고 목적지와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주님은 덧붙여 “나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따라서 주님은 길이신 동시에 목적지이십니다. 인성에서 볼 때 길이시고 신성에서 볼 때 목적지이십니다. 그래서 주님은 인간으로서 “나는 길이다.”라고 하시고 하느님으로서 “나는 진리요 생명이다.”라고 덧붙이십니다. “진리와 생명”이라는 이 두 단어는 길의 목적지를 잘 지시해 줍니다.
길의 목적지는 우리 인간 열망의 목적입니다. 인간은 무엇보다 다음 두 가지를 열망합니다. 첫째로 진리를 아는 것을 열망합니다. 이 열망은 인간에게만 고유한 것입니다. 둘째로 존재의 지속을 열망합니다. 이 열망은 모든 피조물에게 공통적입니다. 그리스도 친히 진리이시기 때문에 진리의 앎에 이르는 길이십니다. “주여, 진리 안에서 나를 인도하소서. 그러면 나는 당신 길을 걸으리이다.” 그리스도 친히 생명이시기 때문에 생명으로 이끄는 길이십니다. “주여, 당신은 나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길의 목적지를 진리와 생명이라고 명명하셨습니다. 위에서 이 두 가지가 그리스도께 속하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째로 주님 친히 생명이십니다. 성서는 “그분 안에 생명이 있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 친히 진리이십니다. 성서는 “그분은 사람들의 빛이셨다.”고 말합니다. 빛은 진리입니다.
여러분이 어떤 길을 통해서 가야 하는지 알고 싶어한다면 그리스도를 택하십시오. 그분은 길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는 말합니다.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다. 이 길을 따라가거라.” 성 아우구스티노는 말합니다. “사람을 통해서 걸어가라. 그러면 하느님께 도달할 것이다.” 길을 벗어나 속력을 내는 것보다는 길을 따라 절뚝거리며 가는 것이 더 낫습니다. 길을 따라 절뚝거리며 가는 사람은 비록 진보는 느리지만 목적지에 조금이라도 다가섭니다. 한편 길을 벗어나 걷는 사람은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목적지에서 더 멀어집니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싶어한다면 그리스도께 바싹 다가서십시오. 주님은 우리가 다다르고자 갈망하는 진리이십니다. “내 입은 진리만을 말한다.”라고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어디에 머물러야 하는지 알고 싶어한다면 그리스도께 바싹 다가서십시오. 주님은 생명이십니다. 그분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얻으면 생명을 얻고 하느님의 은총을 받는다.” 그러므로 안전하게 있기를 원한다면 그리스도께 바싹 다가서십시오. 주님이 길이시기에 여러분은 곁길로 나아갈 수 없을 것입니다. 그분께 바싹 다가서는 사람은 곁길로 가지 않고 바른길로 걸어갑니다. 주님은 진리이시고 모든 진리를 가르치시기 때문에 속이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오직 진리를 증언하려고 났으며 그 때문에 세상에 왔다.” 주님은 생명이시고 또 생명을 주는 분이시기 때문에 불완전하실 수 없습니다. 그분은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그들이 생명을 얻고 더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세상에 왔다.”
응송 욥 42,10b. 11ab. 12a; 1고린 10,13b
◎ 주께서 욥의 소유를 전보다 두 배나 돌려주셨으며, 그의 형제들이 찾아와 그를 위로해 주었도다. * 주께서 욥의 여생에 전날보다 더한 복을 내려 주셨도다.
○ 하느님께서는 신의가 있는 분이시며, 너희에게 힘에 겨운 시련을 겪게 하지 않으시고, 시련을 주시더라도 그것을 극복하고 벗어날 수 있는 길을 마련해 주시리라.
◎ 주께서. 욥의 여생에 전날보다 더한 복을 내려 주셨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