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으로 세상 보기]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인 선택’
우리에게 있어서 자연만큼 자상하고 좋은 스승은 없는 것 같습니다. 자연을 통해서 우리는 많은 것을 알게 됩니다. 새싹이 돋움을 통해서 봄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고, 낙엽이 떨어지고 바람이 부는 것을 통해서 가을이 다가옴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실제로 자연의 가르침을 알고 보는 것과 그것을 통해 깨닫고 실천하는 것은 다르다고 보겠습니다. 즉, 누구나 볼 수 있는 것이라 해서 모두 다 보는 것은 아닙니다. 또한 보았다고 해서 그것을 깨닫고 누구나 실천하는 것은 아닙니다.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누구나 볼 수 있는 엄연한 사실도 애써 보지 않으려고 고개를 돌리는 사람. 다른 잡다한 것을 보느라고 봐야 할 것을 보지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신약 성경의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카 16, 19-31 참조) 이야기가 생각이 납니다. 성경에 의하면 종기투성이의 거지 라자로는 화사하고 값진 옷을 입고 날마다 즐겁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는 부자의 집 대문간에 앉아서 부자의 식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주린 배를 채우려고 했습니다. 즉, 사람들이 던져주는 음식과 돈으로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는 가련하고 불쌍한 사회적 약자였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의문이 듭니다. 과연 부자는 라자로를 알고 있었을까? 자신의 집 대문간에 앉아 있는 거지가 눈에 거슬렸거나 혹은 눈에 가시로 여겼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분명한 것은 라자로를 잘 돌보지 않은 것은 확실해 보입니다. 왜냐하면 부자가 자선을 실천하지 못한 연유로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한 것을 보면 말입니다. 부자는 늘 함께 살아가는 라자로의 이웃이었지만, 애써 보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고, 어쩌면 다른 것들에 신경과 마음이 쏠려 있어서 볼 수 없었고, 보지 않으니 알 수가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가련한 이웃인 라자로에게 사랑을 베풀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관심과 사랑하는 마음이 있어야 이웃들을, 특별히 사회적 약자들 즉, 가난한 이들, 병든 이들, 고통 받는 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보는 것과 사랑하는 것은 같이 가는 것 같습니다. 또한, 우리가 무엇을 보고 무엇을 생각하고 살아가느냐에 따라 삶의 모습도 달라질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즉 우리는 보는 것을 생각하고, 생각하는 것을 말하고, 말하는 것을 실천하며 살아가게 마련인 것입니다.
관심과 사랑하는 마음 있어야 볼 수 있어
제 사목의 대상은 국내에 살고 있는 외국인들, 국내 이주민들입니다. 그들은 이주노동자들, 결혼 이주민들, 다문화 가정의 이주민 자녀들 그리고 요즈음 사회 안에서 이슈가 되고 있는 난민들입니다. 난민들의 경우는 자신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신앙을 지키기 위해, 가족들의 생명을 이어 나가기 위해 고향을 떠나 먼 나라 이곳 한국에서 고생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제가 주로 만나는 분들이 이주민이어서 그런지 이주민과 관련된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고, 관심을 갖게 되니 새롭게 알게 되는 것들이 있습니다. 한 예로, 예전에 비해 좀 나아지긴 했지만 외국인에 대한 편견 중 하나가 ‘잠재적인 범죄자’ 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 확률적으로 따지면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얼마 전 어떤 이주민 활동가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인들은 대부분 “철저한 준법 주의자”라는 것입니다. 그들은 좁은 도로의 횡단보도에서도 파란불을 지키며, 길거리에서도 침도 하나 뱉지 않으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혹시나 작은 잘못 하나로 추방되거나 그것이 이유가 되어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누구보다 모범된 삶을 살고자 노력하는 이들이 외국인 이라는 말입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예전 저의 4년 동안 해외 생활에서의 마음가짐과 생활 태도를 생각해 보니 수긍이 가고 동의가 되는 말이었습니다. 사실 저도 작은 잘못으로 인해, 그것이 빌미가 되어 그 나라에서 추방되어 다시 교구로 돌아가서 꾸중을 듣지 않을까? 걱정하고 신경 쓰며 지냈었습니다. 그러한 때를 생각해 보니 지금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이주민들의 마음이 이해가 되고 그 마음을 알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은 예전에는 관심을 갖고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고 하지 않았기에 가질 수 없는 생각이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제대로 보고, 알기 위해서는 보고자 하는 사람의 마음과 의지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다시 한 번 가져 보게 됩니다.
교회는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하느님 사랑 증거
사회교리의 기본원리 중 하나로, ‘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인 선택’이라는 교리가 있습니다. 교회는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과 고통 받고 박해받는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들에게 기쁨과 희망을 선사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몸소 가난한 이를 선택하셨고 그들을 사랑하셨기에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해야 하는 교회는 가난한 이를 우선적으로 선택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교회는 가난하고 불우한 사람들을 사랑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분명하게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입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라자로가 우리 집 문 앞에 앉아 있는 한 정의나 평화는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세상을 위해 자기 자신을 바치며, 그분과 함께 변두리의 더러운 곳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아니고서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여러분도 정치에 뛰어들어 정의와 인간 존엄성을 위해, 특히 가장 가난한 사람을 위해 싸우십시오. 여러분 모두가 교회입니다. 교회가 변하고 살아있는 교회가 되도록 힘을 다하시기 바랍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들의 비명에서, 환난을 겪는 사람들의 탄식에서, 아무도 돌보지 않는 사람들의 신음에서 사명을 찾기 때문입니다.”(프란치스코 교황, ‘DOCAT 무엇을 해야 합니까? 가톨릭 사회교리서’ 머리말)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러한 말씀을 통하여 교황께서는 우리 신앙인들이 변두리로 나아가 복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주변의 사회적 약자들을 돌봄을 통해(가난한 이를 위한 우선적 선택) 진정한 사회 정의를 실천하고 평화의 사명을 실천하라고 권고 하십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새로운 한 해를 시작하며 “깊은 데로 저어 나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아라.”(루카 5, 4)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하고 묵상하며 우리의 시선을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사회적 약자들에게 두고 살아가는 참된 신앙인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복음으로 세상 보기] 차별 대신 존중
‘육우당’이라고 들어보셨나요? 1970년대 노동자의 비참한 현실을 알리려 분신한 전태일 노동자는 잘 알지만 육우당은 생소하리라 생각됩니다. 아마 처음 들어보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저 역시 글을 준비하면서 좀 더 관심 있게 만나게 된 사람입니다. 육우당(1984-2003)은 동성애자 인권운동 활동가이며 2002년 등단한 시인이었습니다. ‘육우당’은 그의 여섯 친구인 술, 담배, 수면제, 파운데이션, 녹차, 묵주에서 유래한 그의 호이자 필명입니다.
그는 2003년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을 비관하며 동성애자인권연대 사무실에서 19년의 짧은 삶을 마감한 천주교 신자 안토니오입니다. 그는 2002년 고등학생 신분으로 동성애자인권연대(약칭 동인련)에 가입하여 학생 운동가로 활동을 시작하여 2003년 청소년 보호법 제정 시 서울에서 동성애 혐오단어, 금지단어 지정 반대 운동, 동성애자 차별 철폐 운동, 소수자 차별 철폐 운동 등을 벌였습니다. 육우당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밝히지만 오히려 다니던 고등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하고 학교폭력에도 노출되어 학교를 그만두어야 했습니다. 그는 감수성이 예민했던 사춘기 무렵부터 우울증과 불면증에 시달려 수면제를 복용하기 시작하였습니다.
2002년의 일기에서 “내가 비정상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른손잡이가 있으면 왼손잡이가 있는 것이고, 이런 길이 있으면 저런 길도 있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가장 많이 다니는 길’을 걷는다면, 난 단지 ‘인적이 드문 길’을 걷고 있는 것뿐이다.”(2002.10.8 육우당이 쓴 일기)라며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받아들이고 인정받고 싶어 했습니다.
묵주가 그의 친구 중 하나일 만큼 육우당은 독실한 신자였습니다. 그의 성 정체성과 무관하게 지지해준 수녀님들과 신부님들, 친구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성애자들을 죄인 취급하는 보수개신교에 육우당은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2003년 봄 국가인권위원회가 청소년 보호법상 동성애자 차별 조항 삭제 권고를 내리자,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은 이에 크게 반발하며 성명서를 발표했습니다. 그들은 “동성애는 소돔과 고모라의 유황불로 심판”해야 하며, 동성애가 창조질서에 도전이며 죄로 규정했습니다. 지금도 교회의 입장은 변함이 없습니다. 최근에도 거세게 차별금지법(합리적 이유 없이 성별, 장애, 병력, 나이, 성적지향성, 출신국가, 출신민족, 인종, 피부색, 언어 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내용의 법률)을 반대하는 보수 기독교계는 성소수자 혐오를 조장하고 있습니다.
성소수자들은 그 자체보다 사회의 혐오와 차별 때문에 더 고통
육우당은 자살 전 한기총의 반박성명에 큰 충격을 받아 유서에 “평소 동성애자로서의 삶도 힘들었는데 이제 소돔과 고모라, 하느님의 유황불 심판까지 들어야하는 현실이 너무 슬프다”라고 썼습니다. 그는 또 “동성애자를 차별하는 이 나라가 싫고 이 세상이 싫다”, “동성애자라는 이유로 한국 사회에서 인간으로서 대우받지 못한 것이 너무 가슴 아프다”고 밝혔습니다.
“언젠가 좋은 날이 올 거예요. …(중략)… 난 여러분이 유황불 심판을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여러분도 ‘하느님의 자녀’니까요. 난 그저 편안히 쉬고 싶습니다. (중략) 홀가분해요. 내 한 목숨 죽어서 동성애 사이트가 유해 매체에서 삭제되고 소돔과 고모라 운운하는 가식적인 기독교인들에게 무언가 깨달음을 준다면 난 그것만으로도 죽은 게 아깝지 않다고 봐요.”(유서의 일부)
성 정체성 때문에 차별과 폭력을 실제로 당한 경험이 있는 성소수자들은 자살에 대한 많은 유혹을 느낀다고 합니다. 그들이 성소수자여서 자살 생각을 많이 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을 배제하는 사회 때문에 자살 생각이 높아진다는 것입니다. 결국 동성애자여서 아픈 게 아니라, 혐오하고 차별하는 사회 때문에 아픈 것입니다. 육우당의 죽음은 세상의 편견과 일부 보수개신교의 동성애 혐오와 차별이 죽음으로 몰아간 사회적 타살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성소수자들 단죄하고 혐오와 차별이 죽음에 이르게 한 것입니다. 육우당은 성소수자를 혐오하는 종교계의 태도에 항의하는 유서와 천주교식으로 장례를 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떠났습니다.
요즘은 성소수자들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인식은 서서히 변하고 있습니다. 성소수자들이 커밍아웃을 하고 자기 목소리를 내고 ‘퀴어문화축제’를 하고 그 축제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참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보수개신교를 중심으로 성소수자나 동성애자들에 대한 혐오와 차별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천주교 역시 동성애에 대해 자유롭지 못합니다.
교회는 동성애자에 대한 어떠한 차별도 금지해
동성애에 대한 천주교회의 입장은 아직도 “동성애자들의 결합이 법적으로 인정되거나 혼인에 해당하는 법적인 지위와 권리를 부여받은 경우에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반대하여야 한다”(교황청 신앙교리성, 동성애자 결합의 합법화 제안에 관한 고찰. 2003.6.3.)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성결혼을 반대하는 것이지 동성애 자체를 단죄하는 것은 아닙니다. 교회는 동성애 성향이 스스로의 선택이 아니라는 점을 인정합니다. 그들 또한 자신의 잘못된 성향으로 고통 받고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어떠한 차별이나 부당한 대우도 금지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 2358항에서 “그들의 경우는 스스로 동성연애자의 처지를 선택한 것이 아니다. 객관적으로 무질서인 이 성향은 그들 대부분에게는 시련이 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존중하고 동정하며 친절하게 대하여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에게 어떤 부당한 차별의 기미라도 보여서는 안 된다.”고 명백히 가르치고 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즉위 직후 “게이인 자가 하느님을 찾는 데 내가 누구를 정죄할 수 있겠는가?”라고 발언해 성소수자와 관련 단체로부터 찬사를 받았습니다. 2016년 교황은 “교회가 동성애자들에게 사과해야 한다는 독일 추기경의 발언에 동의하느냐”는 질문에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동성애자들은 차별을 받아서는 안 되며 존중받아야 한다”면서 “그리스도인들은 이들에게 반드시 ‘미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교회는 성소수자 뿐만 아니라 가난한 이들, 착취당하는 여성들과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아이들에게도, 무기(전쟁)들에 축복을 내린 것에 대해서도 사과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교황은 성소수자에 대해 줄곧 “차별 대신 존중”이 필요하다고 강조했고 교회가 사목자의 마음으로 그들과 함께 할 것을 주문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모두 사랑하셨습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소외되고, 지탄받고, 멸시당하고, 죄인으로 낙인찍히고, 사회주변부로 밀려나고, 조롱당하고 차별받고 혐오의 대상이 되었던 약자들과 함께 그들의 친구가 되시고 그들을 다시 중심부로 세우셨습니다. 그들도 하느님의 소중한 자녀로 차별당하지 않고 당당한 한 사람으로 살아가길 원하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사랑임을 고백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으시기 때문입니다.”(로마2,11)
[복음으로 세상 보기] ‘오보’라는 썩은 음식보다 진실과 선이라는 건강한 음식
조국 장관 후보자 발표와 함께 정치권과 검찰과 언론이 대한민국을 뒤흔들었습니다. 조국 장관과 딸, 부인 등 가족들의 보도가 연일 끊이지 않았습니다. 모든 언론이 자고 나면 특종과 단독과 속보를 연일 쏟아냈습니다. 사실과 확인되지도 않은 의혹과 가짜 뉴스가 뒤섞여 매일 수 만 건의 뉴스를 만들어냈습니다. 한 인물을 중심으로 이렇게 많은 뉴스를 만들어낸 적이 일찍이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광풍이 불었습니다. 그리고 장관으로 임명된 다음에도 그 바람은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한국 언론들은 처음부터 역대 최악의 장관 후보라는 오명을 덮어씌우고, 자기들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해 온갖 반인륜적 수단을 거리낌 없이 동원했습니다. 모든 언론이 일가친척 주변의 먼지 한 톨까지 샅샅이 털어 의혹거리를 스스로 생산한 뒤 기정사실인 양 유포했습니다. 또한 검찰과 야당의 일방적인 주장만 받아쓰며 당사자들의 해명이나 정확한 팩트 체크를 하지 않고 편향된 뉴스를 엄청나게 쏟아냅니다.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고 한쪽 방향으로 몰아간 것입니다. 하지만 백만 건이 넘는 보도로 수많은 의혹이 제기됐지만 제대로 밝혀진 것은 없습니다.
대한민국은 조국 장관만 사는 나라 같습니다. 민생이 걸린 돼지열병과 노동자들의 투쟁과 우리나라의 운명을 바꿀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대한 뉴스는 다 묻혀버렸습니다. 흉악범죄나 나라를 팔아먹은 반역범죄도 아닌데 왜 유독 조국 장관에 대한 기사는 넘쳐나고, 더 많은 의혹이 있는 사람들은 다뤄지지 않는지 참 이해하기 힘듭니다.
요즘 언론을 보면서 예수님의 죽음을 묵상해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공생활 내내 기득권 세력이 만들어 내는 가짜뉴스와 온갖 음해에 시달렸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내려온 율법 학자들이 “예수는 베엘제불이 들렸다”고도 하고, “예수는 마귀 우두머리의 힘을 빌려 마귀들을 쫓아낸다”고도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사탄의 힘을 빌려 마귀를 몰아낸다는 가짜뉴스를 퍼트려 예수님을 궁지로 몰아가려했고, 군중들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고 사탄으로 몰아갔습니다.
가짜뉴스가 가장 광기를 부린 것은 예루살렘 입성에서 재판에 이르는 과정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할 때 자신의 겉옷을 벗어 깔고, 나뭇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열열이 외치던 사람들이 불과 며칠 사이에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쳐댑니다. 며칠 사이에 여론이 요동을 치며 뒤바뀐 것입니다. 그런데 그 여론을 만들고 몰아갔던 사람들은 누구였을까요? 가짜뉴스를 퍼트리고 여론을 형성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아갔던 세력들은 누구였을까요?
언론의 막강한 힘과 영향 때문에 교회는 언론의 올바른 역할 강조
이런 형태의 언론은 광기에 가깝습니다. 한 사람을 여론재판을 통해 범죄자로 만들고 죽음으로 몰아갔던 마녀재판을 연상시킵니다. 우리는 언론이라는 창으로 세상을 바라봅니다. 그래서 언론의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언론이 여론을 형성하고, 여론은 사람들을 어느 한 방향으로 몰아가고 움직이게 하는 막강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언론을 제4의 권력이라고 합니다. 제4의 권력이란, 기자와 언론기관이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힘을 삼권분립에 빗대어 이르는 말입니다. 곧 언론기관은 정보를 전달하고 퍼뜨림으로써 여론에 큰 영향을 미쳐 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에 비길만한 큰 권력을 가진다는 의미를 가리킵니다.
제4권력인 언론의 막강한 힘과 영향 때문에 교회는 언론의 올바른 역할을 강조해왔습니다. 교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에 ‘사회 매체에 관한 교령’을 포함시켰습니다. 이 교령에서 뉴스 취재와 보도에 대한 권리 혹은 정보의 권리는 보장돼야 한다고 명확히 하고 있지만 이 권리를 올바로 행사하려면 커뮤니케이션은 그 내용이 “언제나 진실하고 정의와 사랑을 지키며 완전해야”하고, 그 방법이 “공정하고 적절해야 한다”(6항)고 밝히고 있습니다. 이를 계기로 ‘세계 커뮤니케이션의 날’(홍보주일)도 1967년에 제정돼 매년 다양한 주제로 발표되어온 홍보주일 담화문을 발표합니다. 담화문은 사회 커뮤니케이션 매체들에 대한 올바른 활용 방안을 제시하고, 사회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교회가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제공해주고 있습니다.
공의회문헌과 후에 발표된 커뮤니케이션과 관련된 회칙 ‘일치와 발전’(1971년)과 새로운 시대(1992년)를 토대로 한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도 “대중 매체를 통한 정보 전달은 공동선을 위한 것이다. 사회는 진실과 자유와 정의와 연대 의식에 근거한 정보를 제공 받을 권리가 있다.”(2494항)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뉴스의 취재와 보도에서 인간의 정당한 권리와 존엄성 그리고 도덕률을 충실하게 지켜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언론인들에 대해서는 진실 전달에 이바지하고 사랑을 해치지 않을 의무가 있음을 명시하면서 “사실의 내용을 중시하는 동시에 개인에 대한 비판의 한계도 중시하도록 힘써야 한다. 그들은 명예를 훼손하고 싶은 유혹에 굴복하지 말아야 한다.”(2497항)고 강조합니다. 또한 “여론 조작을 목적으로 대중 매체를 통해서 거짓 정보를 제공하는 행위는 어떤 경우라도 정당화할 수 없다. 이러한 개입으로써, 개인과 집단의 자유를 해치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2498항)고 경고합니다.
언론의 가장 심각한 죄악은 ‘오보’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교회의 가르침에 기반을 두고 2018년 5월18일 이탈리아 외신협회 기자 400여 명과의 만남에서 겸손하고 자유로운 언론에 대해 역설했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진실과 정의에 따라 일해주시길 강력히 권고합니다. 그래야 소통이 참으로 파괴가 아니라 세우는 도구가 되고, 충돌이 아니라 만남의 도구가 되고, 독백이 아니라 대화의 도구가 되고, 혼란이 아니라 방향제시의 도구가 되고, 오해가 아니라 이해의 도구가 되고, 혐오를 퍼뜨리는 게 아니라 평화 안에서 걷는 도구가 되고, 목소리 큰 사람들의 확성기가 아니라 목소리 없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되는 도구가 될 것입니다.”라며 기자와 언론의 역할을 강조했습니다.
교황은 기자들의 역할이 “진실을 찾는데 기여하고 오로지 진실만이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면서 겸손과 진실을 강조했습니다. 교황은 이미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편견이 진실을 가린다고 말했습니다. 아울러 “기사나 트윗, 생방송 등을 통해 선을 행할 수도 있지만, 주의를 기울이지 않거나 꼼꼼하지 않는다면 때로는 타인과 공동체에 해악을 끼칠 수도 있다”고 말했습니다.
교황은 “자극적인 기사 제목이 현실을 거짓으로 진술하게 만든다고 말하는 한편, 기자들은 명백한 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기사를 발행하려는 유혹에 저항해야 한다”고 지적했습니다.
교황은 또 겸손한 기자란 “기사를 쓰기 전에 사실을 올바르고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하며 많은 사람들이 가짜 뉴스를 퍼뜨리는 시대에서 “겸손이 오보라는 썩은 음식을 팔아넘기는 데서 여러분을 보호해주고, 진실의 선한 빵을 제공하도록 여러분을 초대할 것”이라며 겸손하고 자유로운 언론이 되라고 주문했습니다.
2014년 12월15일 바티칸 방송 관계자들과의 만남에서 교황은 의도적인 그릇된 정보의 유포(오보)와 비방과 명예훼손, 이 세 가지가 언론의 죄악이라고 명시하면서 비방과 중상이 윤리적으로 가장 무거운 죄악이지만 언론에 있어서 좀 더 심각한 것은 오보라고 강조했습니다. 오보는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의 한쪽 면만을 믿게 만들어 실수하고 잘못하게 하기 때문”이라고 강조했습니다.(진슬기 신부의 교황님 어록 중에서)
일명 조국사태로 드러난 언론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까요? 우리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을 신문을 ‘찌라시’라고 부르고 기자들은 ‘기레기’라고 부르며 불신합니다. 왜 많은 사람들은 언론과 기자에 불신할까요?
언론 소비자인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공의회 교부들은 매체 수용자들에게 올바른 선택을 요청했습니다. 정신적 손해를 끼치는 것, 남에게 악 표양이 될 수 있는 것, 좋은 커뮤니케이션을 방해하고 나쁜 커뮤니케이션을 조장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사회 매체에 관한 교령 9)며 소비자의 역할을 강조합니다. 가톨릭교회 교리서에서는 “사회는, 진리와 자유와 정의에 입각한 정보를 제공받을 권리가 있다.”(2512항)고 명시합니다. 우리는 정확한 정보를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면 시민이 잘 식별해 나쁜 언론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몰아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복음으로 세상 보기] “우리들의 미래를 빼앗지 말고, 제발 책임 있게 행동해 주세요.”
올 여름도 무더웠습니다. 계절의 변화와 기상 이변을 심심치 않게 경험합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미세먼지가 전 국민의 관심사가 되었고 SF영화의 장면처럼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사람들은 예전보다 환경이나 기후에 관심을 많이 가집니다. 그만큼 우리가 살고 있는 환경이 사는데 큰 위험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특히 전 세계의 관심은 기후 변화에 집중됩니다. 기후가 변화면 우리 생활의 많은 부분에 변화가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기상 이변은 기후변화로 인해 발생하는 일종의 극단적인 사건으로, 생태계뿐만 아니라 인간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빙하가 사라지면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대형 태풍이 발생하거나 극심한 가뭄과 폭우, 폭염과 한파, 잦은 지진 등 기후 변화에 의한 자연재해가 심상치 않습니다. 지금 전 세계는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차원의 위기감에 휩싸여 있습니다.
2006년 발표된 영국 정부의 ‘기후변화의 경제학’ 보고서에 따르면 지구의 온도가 1℃ 오를 경우, 안데스 산맥 빙하가 녹으면서 이를 식수로 사용하고 있던 약 5000만 명이 물 부족의 고통을, 매년 30만 명이 기후 관련 질병으로 사망합니다. 지구의 온도가 3℃ 오를 경우 아마존 열대우림이 붕괴되고, 최대 50%의 생물이 멸종 위기에 처하게 되며, 4℃가 오르면 이탈리아, 스페인, 그리스, 터키가 사막으로 변하고 북극 툰드라의 얼음이 사라져서 추운 지방에 살던 생물들이 멸종합니다.
5℃ 오를 경우 히말라야의 빙하가 사라지고, 바다 산성화로 해양 생태계가 손상되며, 뉴욕과 런던이 바다에 잠겨 사라지게 됩니다. 저널리스트이자 환경운동가인 마크 라이너스는 저서 ‘6도의 악몽’에서 평균기온이 6℃ 오를 경우 현재 생물종의 90%가 멸종한다고 예측했습니다. 이로 인해 변화될 세상은 상상이 불가능합니다. 이제 인류는 기후변화라는 보이지 않는 적과 힘겨운 싸움을 해야 합니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6℃ 오를 경우 현재 생물종의 90% 멸종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5년 6월18일 생태회칙 ‘찬미받으소서’를 발표했습니다. 이 회칙에서 교황은 “공동의 집에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까?” 라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지구 온난화와 기후변화에 대해 깊은 우려를 하고 있습니다. 온난화와 기후변화는 어느 한 개인, 어느 한 지역의 문제가 아니라 온 지구의 문제, 온 인류의 생존이 달려 있는 매우 심각한 문제 중 하나입니다. 특히 미래세대인 어린이들, 청소년들에게는 더 심각한 문제입니다.
금년 5월24일 금요일에 “기후악당 탈출하자! 기후위기 교육개혁!”을 외치며 10대 청소년들 300여 명이 학교도 가지 않고 광화문 세종문화회관 앞에서 집회를 했습니다. 이들은 공동선언에서 “앞으로 우리의 일상을 바꿀 기후변화에 대해 교육받아야 할 권리도 분명 있다”며 “미세먼지의 원인이 도대체 무엇이고, 오늘과 같은 더위는 왜 점점 심해지는지,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배워야 한다”고 밝혔습니다.
기후변화에 심각성을 느낀 10대 청소년들이 우리나라 뿐 아니라 170여 개국에서 금요일에 학교수업을 거부하고 광장으로 나와 시위하기 시작했습니다. 청소년들은 어른들을 향해 “우리들의 미래를 빼앗지 말고, 제발 책임 있게 행동해 주세요.”, “당신들은 우리를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실제로는 우리의 미래를 훔쳐가고 있습니다.” 라고 절규합니다. 청소년들이 이토록 절절한 목소리를 내며 가두로 나선 것은, 작년 여름 이후 스웨덴 국회의사당 앞에서 1인 시위를 계속해 온 16세 소녀 그레타 툰베리로 비롯되었습니다. 그레타의 행동에 세계 각국의 청소년들이 함께 공감하고 지지하면서 기후변화에 대한 기성세대와 정치권의 각성과 정책을 요구하는 시위가 벌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지구를 지키는 십대 환경 운동가’로 불리는 그레타 툰베리는 9살 때부터 기후변화에 관심을 갖기 했습니다. 그녀는 학교에서 기후변화에 대해 공부하면서 깊은 절망감에 빠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기후변화가 얼마나 심각하게 우리 문명과 인류를 위협하는지 알면서도 실제로는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것을 보았습니다. 이대로 가면 자기 또래들에게는 아예 미래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에 우울증과 자폐증까지 갖게 됩니다. 그레타는 작년 폭염이 한참이던 8월에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 모슨 일이든 하고 싶다는 열망으로 국회의사당에 가서 1인 시위를 하면서 정치권을 향해 기후변화 대응을 촉구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대다수의 정부와 정치인이 기후변화와 생태계 위기로 벼랑 끝에 몰린 지구와 소외된 사람들을 외면하고 있으나 위험한 기후변화를 막기 위해서 경제와 사회 전반의 근본적 전환을 요구되고 있다. 세계 각국의 많은 시민들은 더럽고 위험한 에너지 생산과 공급 방식에 저항하는 동시에 참여와 협력을 통한 깨끗하고 지속가능한 재생에너지 보급을 주도하며 진정한 기후변화 해법을 찾아야 한다”며 ‘찬미받으소서’ 회칙을 발표하였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이 내린 메시지는 전 세계 각국의 호응을 얻어내 2015년 12월, 파리 기후변화협정을 체결하는 계기가 마련되었습니다.
경제성장제일주의 청산하고 ‘도덕적 경제’를 새로운 삶의 원리로 바꿔야
교황은 올해도 “기후변화와 과학․공학․정책 분야의 새 증거들”이라는 주제로 한 토론회에서 기후변화가 “인류와 모든 피조물에게 매우 중대한 사안”이라고 말했습니다. 여러 나라 재무장관들이 참석한 토론회에서 교황은 제21차 유엔 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 채택된 파리협정을 통해 각국이 합의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교황은 현 상황에 대해 무서운 경고하면서 “오늘날 표징이 좋지 않다”면서 청정에너지 투자 감소,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 상승 등을 지적하면서 “늦어도 금세기 중반까지 온실가스 배출에 종지부를 찍는 것은 물론, 그 이상의 성과를 달성하기 위해 결단력 있게 행동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지금까지 우리 인류는 계속되는 경제발전을 목표로 미래에 대한 경각심 없이 우리가 가지고 있던 세계 속 자원과 에너지를 마음껏 사용해 왔습니다. 그리고 현 세대 우리는 이로 인한 많은 기후변화 문제에 직면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모두가 기후변화의 가해자이며 피해자이면서도 여전히 그 심각성을 깨닫지 못한 채, 더 편리하고 쉬운 방법의 삶을 위한 에너지 소비를 해오고 있습니다. 현재의 추세가 지속된다면, 21세기는 예사롭지 않은 기후 변화와 전례 없는 생태계 파괴로 우리 모두에게 심각한 결과가 초래되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경제성장제일주의를 깨끗이 청산하고 모든 생활물자를 고르게 나눈다는 ‘도덕적 경제’를 새로운 삶의 원리, 사회의 핵심 가치로 바꿔야 합니다. 끝없는 성장을 계속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설계되어 있는 구조를 새롭게 바꾸지 않는 한 결코 해결될 수 없는 없는 위기입니다. 기후변화는 인류가 처음 직면하는 난제 중에 난제라고 주장하면서 성장과 지속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의 생활태도와 가치관을 새롭게 바꾸어야 합니다.
“우리들의 미래를 빼앗지 말고, 제발 책임 있게 행동해 주세요.” 라는 청소년들의 외침이 계속 귓가에 우립니다. 청소년들의 외침에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요? 우리는 어떻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 신앙인이 될 수 있을까요?
[복음으로 세상보기]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우리가 꿈꾸는 세상은 어떤 세상일까요? 예수님이 꿈꾸셨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요? 하느님은 우리가 자유롭게 마음껏 인생을 즐기며 행복하게 살길 바라실 것입니다. 그런데 하루하루 산다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어렵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점점 힘들어지고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불안으로 여유가 없습니다.
한 달에 얼마가 있으면 생활하는데 두려움과 불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인간의 최소한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필요한 돈은 얼마가 필요할까요?
2020년 최저임금이 결정되었습니다. 최저임금은 시급이 240원 인상된 8590원입니다. 이 결정에도 많은 난항이 있었습니다. 최저임금 결정을 앞둔 지난 7월4일, 자유기업원 원장은 한 TV 토론에서 무덤덤한 표정으로 내년도 최저임금은 4000~5000원으로 결정해야 한다는 실로 엄청난 주장을 펼치기도 했습니다. 최저임금을 무려 절반 안팎을 깎자는 주장입니다. 과연 지금의 최저임금으로, 또 반으로 삭감된 최저임금으로 생활할 수 있을까요. 그 사람의 연봉은 얼마나 될까 궁금하기도 했습니다.
신문보도에 의하면 삼성전자 종합기술원 회장의 연봉이 243억8100만원이라고 합니다. 한 달로 따지면 20억3175만원, 하루로 치면 9680만 원씩입니다.(한국일보 2018년 4월2일) 노동자들은 시간당 최저시급 9천원을 두고 치열하게 싸웠는데….
내년 최저임금을 적용해 보면 주 40시간과 유급 주휴시간을 포함하면 올해보다 5만160원 올라 월 179만5310원이 됩니다. 최저임금 인상 영향을 받는 노동자는 137~415만 명으로 추정됩니다. 하지만 주휴수당을 못 받는 사람들이 많다는데 있습니다. 그런데 이것도 너무 많이 올랐다고 비판하는 야당도 있습니다.
좋은 일자리는 점점 줄어듭니다. 그래서 청년들은 정규직이 되거나 공무원이 되어 안정적인 일자리를 갖는 것이 가장 큰 소원입니다. 기술 사회가 되면서 일을 하고 싶어도 일할 수 없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일하는 삶 자체가 어려운 시대가 되어갑니다. 일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들의 삶이 위협받고 있습니다. 비정규직과 알바로 생활하는 많은 사람들은 현재와 미래에 대한 절망과 좌절 속에 결혼을 포기하고, 출생률 꼴찌와 자살률 1위, 세계 최장노동시간 등의 파국적 삶으로 내몰리고 있습니다. 심각한 빈부격차와 양극화, 불평등, 민생고 문제들은 많은 사람들을 절망과 소외와 갈등으로 몰아갑니다.
기본소득은 경제가 아닌 인권의 문제
해결방법은 없는 것일까요. 마태오 복음 20장의 ‘선한 포도원 주인의 비유’가 떠오릅니다. 포도밭 주인은 이른 아침, 아침 아홉 시, 열두 시, 세 시, 다섯 시 각각 일꾼을 불러 저녁 때 까지 일을 시킵니다. 일을 다 마친 후 주인은 일꾼들에게 품삯을 주었습니다. 미리 약정한대로 주인은 모두에게 똑같이 노동자 하루 품삯 8만원에 해당하는 한 데나리온을 주었습니다. 일찍 와서 일한 사람들의 불평이 쏟아졌습니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마태20,12). 이에 주인은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마태20,13-14.)
우리는 선뜻 이 포도밭 주인의 처사에 동의할 수 없을 것입니다. 8시간 일한 사람이 1시간 일한 사람보다 더 품삯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8시간을 일하나 1시간을 일하나 똑같이 대우하면 불만이 생깁니다. 포도밭 주인처럼 일한 시간에 관계없이 똑같이 대우하면 누가 아침부터 일찍 나와서 일하겠느냐며 투덜댈 가능성이 많습니다. 그래서 공정하지 못하다고 이의를 제기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포도밭 주인이 선하고 후한 분이라서 똑같이 주었다고 합니다. 선하고 후한 분이라면 각자에게 각기 일한 만큼에 상응하여 차별적으로 기본급을 지급한 후에 보너스를 더 주거나 품삯을 최저시급 이상으로 계산해서 더 많이 하루 일당을 지급해주면 불평을 들을 필요도 없고 공정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장 나중에 일하러 온 사람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듯합니다. 5시까지 일자리가 없어서 놀고 있던 노동자의 심정은 어땠을까요? 아침 일찍 일자리를 찾아 일하는 사람보다 어쩌면 더 하루가 힘들었을 것입니다. 오늘 일하지 못하면 내일 가족의 굶어야 할지 모릅니다. 가족의 생계조차 책임지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스럽고 불안했을 것입니다.
한 데나리온은 생존의 기본임금을 의미합니다. 일이 없어 마지막에 온 사람에게 한 데나리온은 생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권입니다. 인간의 생명을 유지하고 돌보기 위해서는 일을 많이 한 사람이건, 일을 적게 한 사람이건 누구나 일용할 양식을 구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품삯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노동의 총량과 그 질에 관계없이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생존비용이 바로 기본소득입니다. 이 점에서 기본소득은 경제가 아닌 인권의 문제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 중심, 생명을 중심으로 임금을 바라봐야
예수님은 왜 이런 비유를 말씀하셨을까요? 예수님은 품삯을 줄 때 노동시간이나 노동의 양에 따라 합당하게 계산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기본적인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기본급, 생계비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8시간 일한 사람도, 1시간 일한 사람도 하루 살아가는데 필요한 돈은 비슷할 것입니다. 따라서 노동시간이나 능력에 관계없이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유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급이나 최저 생계비는 주어져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생계의 위협을 받지 않고 살 수 있는 나라가 하느님 나라에 가깝다는 것입니다.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에서 영감을 얻은 경제학자 존 러스킨은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라는 책을 썼습니다. 책의 부제는 생명의 경제학이었습니다. 간디는 본인의 자서전을 통해 “러스킨의 가르침에 따라 내 삶을 바꾸기로 결심했다. 내 삶을 송두리째 뒤바꾼 책이 바로 이 책이다”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생각했던 노동이나 임금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뒤바꿔 놓은 것입니다. 자본 중심의 경제학에서 사람과 생명을 중심으로 하는 경제학을 통해 자본이 아니라 사람이 먼저라고 강조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항상 “돈보다 사람이 먼저입니다”를 강조합니다.
우리는 어떤 기준으로 임금을 바라봅니까? 자본을 중심으로 능력과 노동을 강조하고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는지, 아니면 하느님이 주신 모든 재화는 사람의 생존을 위해 모든 사람들이 먼저 나눠 함께 살 수 있는 사람 중심, 생명을 중심으로 임금을 바라보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