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 루카 9,11-17
주제 : 내가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
삶에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사람마다 다릅니다. 어제는 왼손에 있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살았더라도, 오늘은 마음과 생각이 변하여 오른손에 있는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으로 살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사람의 마음이 달라지면, 행동이 바뀌는 것도 당연하지만, 그럴 때에 우리의 삶에는 어떤 문제가 생길까요? 사람의 삶이라는 것이 원래 그렇지, 문제는 아무것도 생기지 않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이 사람이 하는 일반적인 태도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일반적인 태도의 한 가지는 이렇습니다. 과거 언젠가 건강을 잃었었기에 고생했던 사람이라면 당연히 건강에 관한 것을 중요한 것으로 여기는 사람이 될 것이고, 삶에서 돈에 대한 어려움을 겪었던 사람이라면 모든 것의 첫째 자리에 돈을 생각할 거라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 두 가지 문제를 겪는 것처럼, 저도 사제로 살면서, 지금 말씀드린 두 가지 모두를 무시하지는 못하는 사람이면서, 그 두 가지보다 먼저 신앙인으로서 드러내야 할 올바른 모습이 더 중요하다고 말합니다. 강요할 정답은 아닙니다만, 여러분은 어떠합니까?
신앙의 내용들 가운데서 중요한 것이 어떤 것이며 그 내용은 무엇이냐고 묻는 것은 어리석은 사람이 하는 일입니다. 어리석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질문했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질문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신앙에는 더 중요하거나 덜 중요한 것이 따로 없는데도, 그 사람은 세상의 일을 대하는 자세를 벗어나지 못하고, 신앙인으로 산다고 하면서도 더 중요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묻기 때문입니다. 더 중요한 것과 덜 중요한 것에 대해서 묻고 대답을 들으면, 아무래도 덜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은 삶에서 멀리할 거라는 것은 누구라도 예상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혹시나 여러분은 그렇게 질문하지 않기를 바라고 또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반복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오늘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대축입니다. 사신 때가 우리와는 2천년쯤 시간차이가 나지만, 세상에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교회를 통해서 당신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라고 허락하신 것을 기념하는 축일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우리는 오늘 기념하는 축일의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몸과 피는 세상에 사는 우리가 하느님을 직접 만날 수 있는 방법입니다. 물론 음식의 형태로 그렇습니다. 우리가 미사에 올 때마다 볼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 의미를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기도 합니다만 그렇게 대하는 사람은 애석하게도 그가 드러내는 것만큼만 삶의 결과를 얻을 수 있을 뿐입니다.
사람은 먹어야 하고, 마셔야 자기 몸을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목숨을 유지해야 세상에서 좋은 일도 할 수 있고, 나쁜 일도 피하거나 막을 수 있습니다. 세상에 산다고 하면서 이 한계와 조건을 벗어나서 살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현실이 그러하지만 사람은 시간과 대상을 구별하면서 그 중요한 사실을 잊는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 살면서 먹지 않아도 살 수 있고, 마시지 않아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겠지만, 신앙인이라면서 우리에게 음식과 음료가 되어주시겠다고 선언하신 하느님을 만나지도 않고 먹지도(=성체/성혈을 마시지도) 않으면서, 하느님 앞에서 목숨을 유지할 수 있고, 또 죽지 않고 살 수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서글픈 일입니다. 착각은 자유라는 말이 있다고 하지만, 좋은 결과가 가능한 착각도 있고, 생각은 가능하지만 실현될 수 없는 착각도 있는데, 이렇게 잘못 대하고, 이렇게 잘못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무엇을 어떻게 알려주어야 그들이 올바른 길로 돌아올 것이고, 그들이 올바른 삶을 살겠습니까?
어쩌면 그들 개인이 세상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고 확실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사상누각(沙上樓閣)이라는 것을 알기 전에는 가능하지 않은 일일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한다고 해서, 그들이 세상에서 쓴 맛을 봐야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안타깝고도 딱하다는 것일 뿐입니다.
미사에서 만나고 우리가 반복하는 소리를 앵무새소리로 여기지 말아야합니다. 사람이 그렇다고 함부로 말해도 그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서 선택하신 방법이기 때문에 우리가 그 의미를 깨닫고 이해해야합니다. 신앙인으로서 바르게 살도록 도우심을 청할 시간입니다.
연중 제9주간 마르코 12,1-12
주제 : 하느님의 뜻을 해석하는 자세
이제 좋은 시절, 5월 성모성월도 이틀이 남았습니다. 시간을 계산한다면 그만큼이나 남았다고 말하지도 않겠지만, 이렇게 빨리 흐르는 시간을 대하면서 사람이 시간 앞에서는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람의 자존심을 앞세운다고 하더라도 실제로 시간을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가장 좋은 모습이라면, 그 시간의 흐름을 알고 그에 맞춰 사는 것이겠지요?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상의 논리에 따라, 하느님의 계명을 제 마음대로 해석하는 사람들의 얘기를 들었습니다. 세상에 사는 사람을 한 몫으로 묶어서 나쁘다고 평가해야 할 일은 아니지만, 욕심에 눈이 먼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는 행동이 다 옳은 것처럼 착각한다는 것이 안타까운 일입니다.
사람이 삶에서 얼마나 올바른 길을 따라 살 수 있겠습니까? 올바른 길이 무엇인지 해석하는 일이 앞서야 하지만, 사람이 욕심을 앞세운다면 모든 일을 다 아전인수(我田引水)식으로 해석하게 됩니다. 그렇게 한다면, 자기 자신에게는 이익이 되고 올바른 길이라고 우겨도 사실은 올바른 일이 아닌데도, 올바르다고 착각하는 것이죠.
삶에서 당연한 소리를 들으면, 그 당연한 소리를 당연하게 듣는 것은 기본입니다. 하지만 당연한 소리를 당연하게 듣지 않을 때 문제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 당연하지 않은 행동은 사람이 드러내는 욕심에서 시작됩니다. 내 것이 아닌 것을 내가 가지려고 하고, 정상적인 방법이 아닌 행동을 하려고 할 때가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미래에 힘겨운 어떤 일이 다가올지를 알면서도 무시하고 모른척하는 잘못을 저지릅니다.
지금 현실에서 드러내는 내 삶의 모양이 어떤 것일지를 미리 예측한다는 것은 중요한 일입니다. 좋은 것을 더 찾는 방법이 되기도 하고, 삶에서 불편하고 치워야 할 것을 멀리 하는 방법이 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내 삶에 힘겨운 일이 닥친 다음에, 후회하거나 돌이키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일을 찾아서 잘 실천할 수 있도록 해야 할 일입니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방문 축일 루카 1,39-56
주제 : 내가 하는 삶의 준비
오늘은 예수님의 미래 어머니, 마리아가 천사를 통하여 아들을 갖게 된다는 놀라운 소식을 듣고, 사촌언니 엘리사벳을 찾아간 일을 기억하는 날입니다. 흔히 세상에서 일어날 법한 일과는 그 차원을 조금 달리 볼 수 있는 날입니다. 이런 일을 방문(訪問)한 것이라고 한다면, 세상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이러한 일과 신앙을 중심으로 일어난 일과는 의미가 다르다고 할 것입니다.세상에서 일어나는 방문이란, 찾아가는 쪽이 선물을 갖고 간다는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찾아가는 사람이나 영접하는 사람이나 처한 상황은 비슷합니다. 무엇을 내놓아야 하는지 무엇을 내가 더 얻을 수 있는지 하는 계산을 먼저 해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일이라면, 신앙의 일에는 그 차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말 그대로 신앙의 차원은 세상의 기준처럼 얻거나 내주어야 할 것을 생각할 일을 앞세우지 않아도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리아가 엘리사벳을 찾아간 일은 하느님께서 세상에 하신 놀라운 일을 확인(!)하러 간 차원이라고 해도 될 것입니다. 물론 사촌언니 엘리사벳에게도 놀라운 일이 생겼다는 것이 정말인지 확인하러 갈 생각도 있었을 것입니다. 20살 미만의 한 여인이 아기를 갖게 되었다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을 듣고, 아주 큰 혼란에 빠졌을 마리아가 자신의 눈으로 하느님께서 이루신 또 다른 업적을 볼 수 있었고, 세상의 시각으로 그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는 것은 정말로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요즘처럼 도착하기 전에 연락을 한 것도 아니었을 텐데, 마리아는 놀라운 인사말을 듣습니다. 그것도 ‘주님의 어머니’라는 놀라운 소식을 언니에게서 들었으니, 그 놀라움은 또 어떻게 해석할 수 있었습니까? 세상의 시각은 이렇게 주고받은 말에서 의미를 찾지만, 신앙의 일에서는 나를 통해서 이루어질 하느님의 일에 더 큰 관심을 갖는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삶에 하느님의 일이 이루어지면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아직 내게는 그렇게 놀라운 일이 생긴 경험이 없으니 모른다고 해야 할까요? 하느님의 놀라운 일이 내 삶에 언제 실현될지는 모릅니다. 그것은 하느님이 하실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상하고 준비하고 마리아처럼 찬송을 준비하고 있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입니다.
제 삶에 당신의 빛을 비추어주소서. 그리하여 당신과 함께 살게 해주소서. 아멘.
연중 제9주간 마르코 12,18-27
주제 : 사람이 세상에서 사는 태도
사람이 세상에서 옳게 살고 있고, 잘 살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어야 하는 것은 아니지만, 때때로 내가 사는 모습이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비칠까하고 질문할 때가 있습니다. 질문한다고 해서, 내가 올바르게 사는 삶의 기준이 그에게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그 일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살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일까지 신경을 써야 할 이유가 훨씬 줄어들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사람이니, 다르게 생각한다고 해도 그 일은 쉽지 않은 일중의 한 가지입니다. 내 삶을 판단하시고, 내 삶에 대해서 옳다고 판단해주실 분은 하느님이시니까, 나와 같거나 비슷한 공간에 살더라도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두렵게 생각할 이유는 사실상 없는 편입니다.
내 삶에 참으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 다른 사람에게 이루어질 구원이란 과연 어떤 것인가 하는 질문이고 그 질문에 대한 우리의 상상입니다. 그 대표적인 본보기가 오늘 복음에 이야기로 나왔습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일곱 형제가 있었는데, 그들은 율법에 따라서 모두 한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여 살았고, 그들 모두가 다 자식이 없이 죽었는데, 부활의 때가 되면, 모든 이의 아내로 산 그 여자는 일곱 형제 중에서 누구의 아내가 되겠습니까?’
사람의 현실 삶에서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기도 하고, 오로지 그것만이 모든 문제의 최고가 될 수도 있는 심각한 문제입니다. 문제는 그렇게 예수님에게 질문한 사람들은 부활을 믿지 않았다는 것이고, 우리 신앙에서 말하는 부활은 그들이 질문한 내용에 들어있는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구별하지 못한 탓입니다.
현실 세상의 삶이 끝나면, 내세의 삶은 지금 내가 아는 것과 똑같은 모양이나 상식대로 이루어질까요?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살아있는 우리가 알 수 있는 문제는 아닙니다. 우리가 알 수 있는 분야가 아니고 안다고 해도 지금 현실의 삶과는 관련이 없을 텐데, 현실의 내가 아는 대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우기는 것이 문제입니다.
바오로사도가 자신의 동료 티모테오에게 부탁하는 것도 같은 내용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삶에서 멀리하고 살지 말라는 것입니다. 같은 말씀이라고 하더라도 사람이 알아듣는 방법은 저마다 다릅니다. 원칙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은 기도일뿐이고, 각자가 할 수 있는 것은 하느님의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성심 대축일 루카 15,3-7
주제 : 하느님의 마음
사람은 웬만하면 자신이 세상에서 공정하게 산다고 말하고, 공평하게 행동한다고 말합니다. 정확한 근거를 대지 못하고 그 말이 거짓이라고 주장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만, 사람이 세상에서 정말로 공정하고 공평하게 살까요? 바람과 다짐은 그러하다고 해도, 실제로 그 일은 가능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이 공평하게 행동하고, 공정하게 움직인다고 말은 합니다만, 실제로 그렇게 행동하지는 못하는 것이 사람일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에 비교해서 좀 더 공정하고 좀 더 공평하게 움직일 가능성은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에 말씀드린, 공정하게 살고 공평하게 움직인다는 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하는 상대성이 아니라, 절대적인 기준을 적용해야 하는 것이기에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사람이 하는 행동에 절대적인 기준을 적용할 것은 없습니다. 굳이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일이 늘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입장과 일치한다고 할 때 일 것입니다. 나에게 이익이 생기지 않고, 내가 이익이 생긴다고 말할 수 없고, 더더구나 나에게 손해가 생긴다는 것은 뻔히 알면서도 사람의 입장에서 그대로 행동할 사람이 있을까요? 이론이기는 하지만, 그럴 가능성은 없을 것입니다.
양 한 마리를 잃으면 찾을 행동을 하는 것은 누구나 다 하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세상에서 내가 그렇게 움직이려면 나머지 다른 양들의 안전을 걱정하지 않아도 될 때라야 가능할 것입니다. 만일 잃은 양 한 마리를 찾는 것은 좋은데, 그게 다른 위험을 부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예상을 하면 사람은 아마도 움직이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나 예수님께서 선언하신 일은 우리가 그대로 이해하기가 어려운 경우가 많습니다.
하느님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기를 바란다면서, 아흔아홉의 의인을 방치하거나 그들이 중요하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여기는 것은 사람의 생각인데, 사람의 생각을 하느님의 뜻인 양 호도(糊塗)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에게 뜻을 드러내시는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우리가 올바른 생각과 자세로 살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도움을 청하시겠습니까?
연중 제10주일 루카 7,11-17
주제 : 사람을 살리는 것이 목적인 신앙(!)
개인에게 묻을 때 그 누구도 삶이 쉽다고 말하거나 내 삶에서 모든 일은 내 마음과 내 뜻대로 이루어진다고 말할 사람은 없지만, 우리는 세상에 살면서 삶을 무조건 어렵게만 여기면서 살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런 자세로 살아야 내게 다가오는 세상의 삶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고, 다른 사람에게 내 삶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남길 수도 있으며, 내 삶에 숨어서 내게 다가올 수도 있는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는 오래된 격언이 담고 있는 의미도 같은 뜻입니다. 생각하고 말만 앞세운다고 해서 내 삶이 무조건 쉬워지는 것은 아니지만, 어렵다고 생각하고 힘들게 대할 때 그 삶에 쉬운 요소가 생기지 않는다는 이론과도 마찬 가지입니다.
삶에 대한 간단한 얘기는 아닌 내용으로 시작하는 오늘, 하느님은 과연 세상에서 우리 사람들이 어떻게 살기를 원하시겠는지 하느님의 뜻을 알아보고 실천할 것을 다짐할 시간입니다. 물론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찾는 것은 성경이어야 할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떤 모습으로 살기를 바라실까요? 그리고 우리는 그 하느님의 뜻을 어떻게 이해하고 실천하는 사람이겠습니까? 사람이 배우고 익힌 지식으로,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의 의미를 다 해석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람이 이해하려는 태도는 중요한 일입니다.
우리가 드러낼 수 있는 삶에 대한 태도는 긍정적인 것도 있고 부정적인 것도 있습니다. 긍정적인 것이 내 삶에 좋은 영향을 남길 거라는 이론은 알고 있지만, 이론을 안다는 것과 실제로 내 삶이 그에 일치한다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람이 생명을 누리고 살기를 바라시는 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오늘 열왕기상권의 독서와 루카복음서가 전하는 내용입니다. 하느님은 생명과 목숨을 인간에게 돌려주시는 이야기를 통해서 그 뜻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말을 시작하면, 사람도 다 그렇게 살지 않는가..... 하면서, 사람이 가진 뜻도 하느님의 뜻과 같거나 비슷하다고 주장할 수 있습니다. 개인에게 삶의 자세를 물으면 상상한 것과 똑같이 대답할 수는 있어도, 공동체나 집단으로 그 범위가 넓어지면 좋은 모습을 그 안에서 발견하는 것이 어려워질 수도 있습니다. 안타깝고도 딱한 일입니다.
예수님께서 나인이라는 마을에 가셨다가 과부의 죽은 아들을 만나셨고 그를 살려내시어 그가 그의 어머니와 다시 살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온 세상이 가물었던 때에 잘 피신해있던 어느 과부의 집에서 아들이 죽자, 엘리야예언자는 하느님께 간절한 청원을 바치고 과부의 아들을 살려내어 그가 어머니와 다시 살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이런 얘기를 말씀드리면, 우리가 원할 때마다 하느님께서 세상에 생명을 돌려주셔야 한다고 우길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삶에 대한 자세를 바르게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지난 2월4일에 ‘호스피스ㆍ완화의료 및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결정에 관한 법률’이라는 법(2018-02-04시행)이 국회의원들의 결정으로 통과되었습니다. 이름이 길기 때문에 간단하게, 환자연명의료결정법이라고도 합니다. 명칭만 대해서는 어떤 내용이 담겨있는지 알아듣기가 어렵습니다. 이 법은, 제1조에 ‘임종과정에 있는 환자의 최선의 이익을 보장하고 자기결정을 존중하여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고 적으면서, 사람에게 의학적인 치료를 중단하거나 중단을 요청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는 아주 묘한 내용을 담은 법입니다.
법이 가장 훌륭한 진실을 담을 것으로 우리는 흔히 생각하지만, 해석에 따라서 사람에게는 없는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 사람이 정하는 법률의 맹점이기도 합니다. 이 시간에 생명에 관한 이러한 말씀을 드리는 것은, 세상에 살아있는 사람들 가운데 ‘자기생명에 대한 결정권을 가진 사람’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법에서는 그 내용을 의료행위와 아주 묘하게 연결시켜서 ‘특정한 시간이 되면 죽을 수 있는 시간을 내가 선택할 수 있고, 의사는 그대로 실행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것이 신앙의 정신과 충돌한다고 말하는 것이고, 이 법은 사람을 존중하는 법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세상에서 언제까지 살아야 하고, 언제까지 살 수 있겠습니까? 개인이 그 시간을 정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고통때문에 내 의지로 삶의 길이를 짧게 정할 수 있는 권한이 사람에게는 없다는 것이 교회의 정신입니다. 사람더러 고통을 더 많이 당해야 하는 것이 교회의 정신이라 오해하지는 마십시오. 특정한 시간에 죽을 수 있다는 권리를 말하는 것보다는 사람이 삶의 의미를 더 충실히 드러내려고 애써야 한다는 것이 삶을 대하는 우리의 올바른 태도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살 권리를 말하는데, 인간은 그에 반하여 죽을 권리를 말하는 세상이 된다면,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기준을 따라 살아야 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