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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과 묵상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16) 하느님 자녀로 사는 삶의 기쁨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느끼며 기쁘게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08|조회수32 목록 댓글 0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16) 하느님 자녀로 사는 삶의 기쁨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 느끼며 기쁘게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 삶은 흥겨운 잔치로 변화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을 아름답게 표현한 문구다.

요한 복음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 이야기(요한 2,1-12 참조)로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을 알린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시기에(요한 1,14 참조), 그분과 함께하는 우리 삶은 포도주와 같이 마음을 흥겹게 하는 잔치가 된다는 것을 전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잔칫집에 술이 빠질 수 없듯, 그리스도인의 삶에 예수님이 빠진다면 앙꼬 없는 찐빵처럼 무미건조하고 무기력할 것이다. 신앙은 예수님과 함께하는 삶이요 흥겨운 잔치다. 이것이 신약 성경이 우리에게 전하는 핵심 메시지다. 실제로 예수님은 삶을 잔치처럼 사셨으며, 그 기쁨의 삶으로 모든 사람을 초대하셨다.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을 담고 있는 산상 설교’(마태 5-7)는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으로 사람들을 초대하는 초대장이다. 예수님은 고리타분한 가르침이나 고역과 같이 의무로 부과된 계명이 아닌, 흥겹게 사는 법을 알려주셨다. 그 삶이란 하느님을 알고 그분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느님 자녀로서의 삶이다.

예수님께서 알려주신 하느님은 세상 만물을 창조하시고 보살피시며, 당신 자녀들에게 모든 것을 아낌없이 후하게 넘치도록 베풀어주시는 자비로운 아버지시다.

너희가 악해도 자녀들에게는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야 당신께 청하는 이들에게 좋은 것을 얼마나 더 많이 주시겠느냐?”(마태 7,11)

그런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자녀의 삶은 기쁨이며 환희일 수밖에 없다. 세상 모든 근심과 걱정에서 벗어나 아버지의 따뜻한 품 안에서 느끼는 위로요 위안이며 든든함이다.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내일을 걱정하지 마라. 내일 걱정은 내일이 할 것이다. 그날 고생은 그날로 충분하다”(마태 6,34)

물론 인간사에는 고난과 시련, 근심과 걱정이 끊이지 않는다. 각자가 처한 삶의 상황도 모두 다르다. 가난할 때도, 슬플 때도,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를 때도 박해를 받을 때도 있다. 온유하고 자비롭고 마음이 깨끗하고 평화를 꿈꾸기에 세상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을 살 때도 있다.(마태 5,3-12 참조) 그렇지만 하느님의 자녀는 세상 사람이 보는 것 너머로, 하느님 아버지의 크신 뜻과 계획을, 그리고 자녀에게 약속하신 하느님 나라를 믿고 희망한다. 또한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지지만, 하느님 아버지의 약속이 당신 자녀들 안에서 영원히 이루어질 것이며, 그분 정의와 자비가 결국 승리할 것임을 확신한다.

하느님 자녀로 사는 기쁨은 저절로 주어지지 않는다. 매일 주어지는 그 날의 고생 앞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절망과 의기소침과 싸우는 영적 싸움의 연속이다. 그 싸움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늘 우리와 함께 계시는 아버지 하느님의 현존을 믿고, 우리를 끝까지 돌보고 지켜 주시리라는 그분의 약속에 희망을 둘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늘 새롭게 각자에게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당신 아드님을 통해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내어주신 하느님의 사랑에 눈을 뜰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쁨의 싸움이기도 하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 있든, 하느님께서 무한한 사랑으로 우리와 함께 계시며 우리를 끝까지 지켜주실 것임을 확신할 때, 인간의 힘으로 도무지 해결책이 보이지 않는 여러 상황도 극복될 것이며, 아버지의 자녀로서 누리는 참 행복을 지금 여기서 맛볼 것이기 때문이다.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17) 익어가는 술처럼

인격의 완숙과 함께 무르익는 믿음

 

카나의 혼인 잔치(요한 2,1-12 참조)에서 가장 인상적인 대목은 늦게까지 남겨 둔 좋은 포도주에 대한 과방장의 찬사다. “누구든지 먼저 좋은 포도주를 내놓고, 손님들이 취하면 그보다 못한 것을 내놓는데,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남겨 두셨군요.”

늦게까지 남겨둔 좋은 포도주에서 그리스도 신앙인을 떠올리는 것은 무리일까? 포도주가 사람의 마음을 흥겹게 하듯, 예수님과 함께할 때 삶은 흥겨워지고 자기도 모른 채 예수님을 닮아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 참조)를 풍기기 때문이다.

좋은 포도주는 시간이 지날수록 맛도 향기도 깊어진다. 시간이 갈수록 익는 것은 포도주만이 아니다. 나이가 들수록 인품이 깊어지며 존경심을 자아내는 사람이 있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오랜 신앙을 통해 삶에 배어나는 거룩함의 향기가 있다.

우린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조금씩 익어가는 겁니다라는 유행가 가사가 여러 사람의 마음을 울린 것은,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세상에서 무가치하고 불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인격의 완숙을 통해 더 소중한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을 일깨워주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풍기는 향기가 있다. 시간이 갈수록 그 향기는 진해지고 그윽해진다. 가끔 출신 본당에 갈 때가 있는데, 늘 그 자리에서 변함없이 기도하는 옛 교우들을 만날 때면 그분들에게서 배어 나오는 거룩함의 향기를 느낀다.

그뿐이 아니다. 신앙 안에서 우리는 익어갈 뿐 아니라, 더 젊어진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생명을 주시는 성령의 법이 그대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로마 8,2)

그리스도 신앙의 매력은, 나이가 들수록 더 젊어지며 더 자유로워진다는 것에 있다. 비록 육체적으로, 정신적으로 힘을 잃고 쇠약해지지만, 성령과 함께라면 영혼은 계속해서 젊어지고, 젊은이들이 깨닫지 못하는 인생과 신앙의 지혜를 터득하며 마음의 깊은 평화를 누린다. 종종 노년 생활에서 겪는 어려움을 토로하는 어르신을 만날 때가 있다. 그때마다 말씀드린다. “어르신, 지금 모습 그대로 보기 좋고, 저희에게 귀감이 됩니다. 계속 건강하게 살아만 주셔요.”

그러나 환상은 금물이다. 저절로 익어가는 것은 없다. 술이 잘 익기 위해서는 누룩이 필요하다. 누룩이 시간과 잘 작용해야 맛좋은 술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술이 되지 않고 부패가 되어 악취를 풍길 수 있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앙이 저절로 우리를 성장시켜 주지 않는다. 시련이 삶에 고통을 주지만 그 시련이 나를 성장시켰음을 나중에야 깨닫는 것처럼, 신앙에서도 시련과 위기는 힘든 시기로 다가오지만, 나를 성장시키는 시간이기도 하다. 시련과 위기는 우리 신앙이 맛 좋고 향 좋은 술처럼 익어가도록 하는, 반드시 필요한 누룩이다.

어느 누구도 처음부터 완벽한 신앙으로 출발하지 않는다. 신앙은 삶 안에서 아주 조금씩 성장한다.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에서는, 수많은 만남과 사건, 시련과 위기, 환희의 순간까지도, 모두 나의 인격을 무르익게 해주는, 나의 인격이 예수님의 온유하고 겸손한 마음을 닮아가는 계기들로 변화한다.

여기에 신앙의 매력이 있다. 당장은 변화도 없고, 무미건조한 것처럼 느껴지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는 조금씩 변화해 간다. 우리가 맛 좋고 향 좋은 포도주로 더 잘 익어갈 수 있도록, 우리 삶에 존재하는 모든 것, 시련과 위기까지도 끌어안고, 계속해서 주님의 뒤를 따라 앞으로 나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18) 좋은 밭으로 가꾸어가는 신앙

믿음의 싹 틔울 마음 밭 일구기

 

우리는 소비시대를 살고 있다. 모든 것이 소비의 대상이 돼버린 듯하다. 심지어 영적인 것조차 상품화되어 판매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향유하는 소비문화가 쓰레기 양산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종종 잊는다. 신학교에서 후원 회원을 위한 피정을 준비하면서, 500명이나 되는 방문객을 대접하기 위해 도시락 이야기도 나왔지만, 쓰레기 문제로 인해 학교에서 직접 국과 밥을 준비하기로 했다. 국 하나에 김치, 깍두기가 전부이지만, 그 안에 담긴 정성과 사랑이 피정객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줄 거라 기대해 본다.

소비시대에 살다 보니, 신앙도 소비의 대상으로 삼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신앙은 소비의 대상이 아니며, 성당은 서비스 센터가 아니다. 신앙인이 소비자와 다른 점은, 계속해서 변화와 성장을 지향하며 발전해가는 영적인 존재라는 것에 있다. 이와 관련하여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마르 4,1-9 참조)는 많은 생각 거리를 준다.

씨 뿌리는 사람이 씨를 뿌리는데, 어떤 것들은 길에, 어떤 것들은 돌밭에, 어떤 것들은 가시덤불 속에, 어떤 것들은 좋은 땅에 떨어졌다. 이 비유를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으로 알아들을 수도 있지만, 예수님의 교육학적 의도를 고려한다면, 한 사람의 여러 상태로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신앙은 하느님 말씀이 사람의 마음에 뿌려져 싹을 틔우고 자라나 열매를 맺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살다 보면 말씀을 듣고 곧바로 잊어버리거나, 환난이나 박해로 넘어지기도 하며 세상 걱정과 재물의 유혹에 빠져 신앙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이러한 때를 거친 다음 말씀을 새롭게 받아들이기도 한다. 좋은 땅이란 처음부터 존재하는 것이라기보다 삶의 여러 계기를 거치며 말씀을 받아들여 싹을 틔우고 자라날 만큼 비옥해진 마음일 것이다.

다른 한편, 예수님의 비유는 신앙이 자라기 위해, 환경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말해준다. 씨앗이 싹을 틔우기 위해서는 적당한 온도와 습도가 잘 어우러진 상태여야 한다. 그렇지만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고 해도, 씨가 준비가 되어 있지 않으면 싹을 틔울 수 없다. 싹을 틔우기 위해 씨앗은 외부의 물기를 받아들여야 하며, 물기가 깊숙이 배어들 때까지 시간을 두고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열고 깨뜨리는 순간이 필요하다. 이를 자신에게 죽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삶의 환경은 어떠한가? 텔레비전, 스마트폰, 다양한 소비와 여가 문화. 그중에는 삶을 윤택하게 하는 것도 있지만, 말씀이 우리 안에 뿌리를 내리지 못하게 하는 것도 있을 것이다. 말씀을 위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우리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바로 침묵일 것이다. 필자는 한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피정의 집 벽에 걸려 있는 법정 스님의 말씀을 본 적이 있다. “우리가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땅속에서 삭는 씨앗의 침묵을 배워야 한다.” 씨앗이 자신을 깨고 싹을 틔워 뿌리를 내리는 것처럼, 우리 역시 침묵 속에서 자신을 비우고 버리는 시간, 자신을 깨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으로 덧붙이신다. “들을 귀 있는 사람은 들어라.”(마르 4,9) 열매를 맺기 위해 우리는 들을 준비를 갖춰야 하며,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찾지 않는다면 그 어떤 것도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없다. 반대로 찾는 사람, 더 나은 삶 더 좋은 세상을 위해 마음을 열고 기다리며 준비하는 사람에게는 미래가 열려 있고,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스스로에게 묻자. 우리는 마음이라는 땅의 개간에서 어디쯤 와 있는가?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신앙] (19) 자유와 순종 사이에서 (1)

하느님 사랑 안에서 자유롭게

 

신앙은 자발적인 순종이다. 이는 매우 역설적인 말이다. 순종이면 순종이고 자발이면 자발이지, 어떻게 자발적인 순종인가? 이분법적 관념에서는 불가능하나 신앙에서는 가능할 뿐 아니라, 반드시 그래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것은 진정한 신앙일 수 없다.

이 역설을 조화롭게 사는 것이 쉽지 않기에 한쪽만 강조하다 신앙을 왜곡하는 경우가 많다. 신앙 성장의 길에서 둘을 조화시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신앙인의 성숙도는 그 둘을 얼마나 조화시키며 사는지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어떤 신자가 말씀하셨다. “신부님, 저는 집에서는 가장으로, 사회에서도 나름대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데, 왜 성당에만 가면 고개 숙이고 아무 말 못 하고 주눅 들게 되는지 모르겠어요.” 왜 그럴까? 혹시 성당에서 아이처럼 취급하거나 스스로를 아이 취급하기 때문은 아닐까? 혹은 성직자나 수도자에 대한 과도한 존경심 때문은 아닐까?

어쩌면 하느님께 대한 생각의 오류 때문일 수 있겠다. 하느님께서는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종이 아닌, 자유로운 자녀가 되기를 바라시는데, 우리는 마치 되찾은 아들의 비유(루카 15,11-35 참조)에 나오는 큰아들처럼 스스로를 종으로 여기며 자신의 뜻과 의지를 무심하게 외면해 온 것은 아닌지?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루카 15,29)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실 법하다. “내가 언제 너에게 종처럼 일하라고 했느냐?” 그러나 자비로운 아버지는 아들이 상처를 입을까 차마 그렇게 말씀하지 않으신다.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얘야, 너는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다.”(31)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종처럼 섬기며 시키는 것만 하는 맹목적인 사람을 바라지 않으신다. 그것은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아닌 주인과 종의 관계다.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하며, 주인의 눈치를 보고 두려워하는 것이 종이다. 그와는 반대로 하느님께서는 인간과 자유로운 관계를 맺고자 하신다. 인격적인 관계를 통해 인간이 당신 자녀로서 사랑받는 고귀한 존재로서 행복하고 기쁘고 자유롭게 살기를 바라신다.

여기서 말하는 자유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마음대로 하는 막 나가는 자유가 아닌, 사랑 안에서의 자유다. 사랑을 받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경험한 사람은, 그 사랑이 나 자신의 자유롭고 자발적인 응답을 바란다는 것을 안다. 사랑받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사랑하지 않는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의지와 반대되는 것을 억지로 강요하지 않으신다. 우리 스스로 생각하고 찾기를 바라신다. 그 과정에서 당신과 인간의 진리를 발견하기를 바라신다. 진리를 발견한 사람은 진리가 참된 것임을 알기에 진리에 스스로 순종한다. 스스로 찾지 않은 사람에게는 하느님의 말씀과 뜻이 외적인 강압으로 다가오지만, 스스로 찾는 사람에게는 자유를 주는 기쁨의 원천이 된다.

이 역설을 깨닫기 위해서는 실제로 길을 걷고 경험하는 수밖에 없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대신해서 살아주지 않으신다. 믿음과 삶의 주체는 우리 자신이다. 각자의 삶에서 스스로 하느님의 얼굴과 뜻을 발견하기를 바라신다. 물론 그것이 쉽지 않기에 시행착오는 불가피하다. 그러나 성장은 실패와 좌절 없이가 아닌 그것을 통해서이루어진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 찾아 나서는 것이다. 정해진 답에 만족하지 말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며 말이다.

 

 

 

 

 

[한민택 신부의 금쪽같은 내 신앙] (20) 자유와 순종 사이에서 (2) 하느님의 교육법

시행착오 거치며 제자리를 찾아가다

 

예수님의 비유 중에 포도원에서 일하도록 아버지의 명을 받은 두 아들의 이야기가 있다.(마태 21,28-32 참조) 맏아들은 처음에는 싫습니다하고 답했지만 나중에 생각을 바꿔 일하러 갔고, 다른 아들은 가겠습니다하였지만 끝내 가지 않았다. 결국 아버지의 뜻을 실천한 이는 맏아들이었다. 이 이야기를 듣고 인생 역전’, ‘막판 뒤집기등을 떠올릴 수도 있지만, 실은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는 신앙에 관한 이야기다.

비유에 나오는 아버지처럼 하느님도 결코 자녀에게 강요하지 않으신다. 찾고 물으며 스스로 답하기를 바라신다. 당신 뜻을 헤아리며 따를 때까지 기다리신다. 이것이 하느님의 교육법이다.신앙은 자발적인 순종이다. 처음에는 모순처럼 보이지만, 경험을 통해 신앙 안에서 진정한 순종은 자발적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된다. 이는 아이가 커서 성인이 되는 과정과 흡사하다. 어렸을 때는 자기 의지와 상관없이 부모님이 시키는 대로 한다. 부모님의 세상이 자기 세상이 되고, 부모님의 생각이 자기 생각이 된다. 그러나 커가면서 자기 삶의 책임을 질 준비를 하게 된다. 미래를 꿈꾸고 진로를 준비하며, 스스로 해야 할 것을 찾는 법을 배운다. 이 과정에서 아이는 자기 생각과 의지에 대해 의식하게 되고, 부모나 선생님의 권위에 도전 아닌 도전을 하게 된다. 양편 모두에게 힘든, 그러나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이 시기를 거치며 아이는 자기 삶에 책임을 지는 성인이 된다. 그리고 자기 삶을 스스로 살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게 되며, 특히 부모님이 겪으신 것을 하나씩 겪어 나가며 부모의 생각과 뜻이 옳았음을 인정하며 그 뜻을 따르게 된다. 결국 자발적으로 부모님께 순종하게 되는 것이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어릴 때는 부모의 손을 잡고 성당에 다녔지만, 커가면서 신앙을 여러 면에서 불편하고 부자유스럽게 하는 족쇄처럼 느낄 수 있다. 몸과 마음이 성당에서 멀어질 때도 있다. 그러나 세상 풍파에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살다 보면, 결국 하느님의 말씀과 교회의 가르침이 옳았음을, 그리고 나를 끝까지 믿어주고 기다려주는 분은 하느님과 교회뿐임을 깨달으며 다시 아버지께로 돌아오게 된다.

이 점은 자신이 걷는 신앙의 길을 이해하고, 자녀를 신앙 안에서 키우기 위해 매우 중요하다. 어느 순간 자녀가 신앙에 대해 묻고 불만을 표현할 때, 그것을 위기가 아닌 기회로 여길 필요가 있다. 부모님의 권위에 따르는 피동적 신앙에서 자기 스스로 하는 자발적 신앙으로 넘어가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우리 또한 그 길을 걸어왔음을 인정하며, 자녀가 경험하는 것을 신앙인으로 성장하는 과정으로 이해하고 공감할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완벽한 논증으로 설득시키는 것이 아니라(자녀가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서로 솔직하게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나누는 것이며 신뢰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다. 여기서 신앙과 삶에 대한 부모의 경험을 나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자녀는 자기 이야기를 경청하며 삶의 이야기를 솔직히 나누는 부모님과의 대화 속에서 계속해서 좋고 옳은 것을 스스로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만나는 하느님은 교리나 성경 속에 갇힌 분이 아닌, 우리 삶 안에 살아계신 분, 당신 자녀가 기쁘고 행복하기를, 자비롭고 정의로운 멋진 삶을 살기를 바라시는 분이시며, 그분 앞에서 더욱 자유롭고 사랑받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모두 이 아름답고 환희에 찬 신앙의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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