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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과 묵상

예수성심대축일 주제 : 내가 가질 마음(!)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0|조회수33 목록 댓글 0

예수성심대축일

신명기 7,6-11 1사도요한 4,7-16 마태 11,25-30

주제 : 내가 가질 마음(!)

 

오늘은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하는 날, 예수성심대축일입니다. 우리가 오늘을 축일로 기억합니다만, 마음이 어떤 모양인지 아는 사람도 없을 것이고, 그 마음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확실하게 말해줄 수 있는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표현하는 예수성심의 모양은 예수님의 모습이라고 하는 그림에, 심장모양의 그림에 화살이 한 개 꽂힌 모습이지만, 이 그림이 정말로 예수님의 마음을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지 누가 정확하게 말해주겠습니까?

오늘 독서와 복음으로 들은 말씀은 하느님과 예수님의 행동을 전해줍니다. 이렇게 글로 전하는 모습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이나 예수님의 마음을 짐작할 수도 있고, 알 수도 있다고 하면 얼마나 진실이겠습니까?

하느님의 뜻은 세상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을 피해간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서글픈 생각이 듭니다. 세상의 지혜를 깨치고, 세상에서 내 목소리를 내면서 살게 된다는 얘기는 결국 하느님의 뜻을 알아듣지 않게 되거나 하느님에게서 멀어진다는 뜻으로 들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것은 마음의 변화를 본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동을 보고서 하는 얘기입니다. 바꿔 말하면, 우리가 몸은 커지고 세상에 대한 지혜는 익힌다고 하더라도 순수한 마음을 회복하는 것이 좋다는 얘기인데, 이것이 얼마나 가능하겠습니까? 혹시 그렇게 살려고 한다면, 바로 그것이 세상에서는 열등한 사람이 되겠다는 선택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면 더 불안해질 것입니다.

하느님은 히브리백성을 이집트임금 파라오의 손에서 구해내신 분으로, 그들에게 원하는 것은 계명과 규정과 법규들을 지켜야한다고 모세는 선언했습니다. 둘 사이의 관계는 함께 가는 것인데, 혹시라도 우리가 전자(前者)는 좋아하고 후자(後者)는 부담스러워하는 것은 아닐까요?

사도요한은 오늘 성심대축일에 읽는 말씀을 통해서, 사랑을 실천하고 사랑을 드러낼 것을 강조합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우리는 무엇이 사랑이냐?’고 질문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우리 귀에 와 닿는 소리에게 여러분이 대답을 해야 하는 사람이라면, 무어라고 표현하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세상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향하여, 드러내신 모든 것을 정확히 이해하고 따르는 것은 불가능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말하는 것도 어디까지나 사람의 지혜와 능력을 먼저 생각한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달리 말하면 올바른 지혜를 얻고 그것을 삶으로 표현하는 것이 가능할 수도 있다는 얘기입니다. 어떤 방법을 우리가 택하면 그게 가능하겠습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기억하는 날, 우리들 각자의 마음이 예수님을 얼마나 따를 수 있는지는 숙제입니다. 이 숙제를 충실히 하는 사람도 있고, 그냥 듣고 잊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은 어느 쪽에 속할지 아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는 어떤 쪽을 향하고 있는지 아는 것이 더 중요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향하여 어떤 마음을 바라시겠습니까? 나는 거기에 어떻게 응답하겠습니까?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 대축일 [0629]

사도행전 12,1-11 티모테오24,6-8.17-18 마태오 16,13-19

주제 : 본보기를 따라 살기

 

오늘은 우리 신앙의 기초를 놓았고, 복음을 선포한 사람과 전달자로 살았던 베드로와 바오로사도축일입니다. 하느님에게서 받은 길이만큼만 세상에서 살 수 있는 사람으로서 그 시간에 특별한 일을 한다는 것은 참으로 큰 업적입니다. 이 업적이라는 것은 내가 쌓고 싶다고 해서 아무 때나 쌓을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기회가 되었을 때 그 일을 할 수 있다면 그는 아주 큰 행복 가운데서 사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말을 듣는 이 순간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업적은 무엇이겠습니까?

후대에 사는 우리는 베드로사도와 바오로사도가 신앙인들에게서 받는 영광만을 생각하고 부럽다고 하거나 나도 그런 무리에 들고 싶다고 바람을 말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그분들이 세상에 살았던 전체기간 동안에 영광과 영예, 또 칭송하는 소리들 가운데에서만 살았겠느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달라질 것입니다. 실제로 두 분의 삶에는 우리가 생각하고 싶은 대로 찬사와 영광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힘겨움과 고난과 함께 사신 분들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주변에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부로 살다가 처음으로 제자가 되고 사도가 된 뒤에 제국의 수도 로마에서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 순교하신 분이 베드로사도였고, 바리사이의 아들로 태어나고 성장하여 율법에 충실한 삶을 살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놀라운 체험을 한 다음, 복음선포자가 되어 수천 킬로미터나 되는 먼 거리를 선교여행으로 다니셨고 결국에는 로마에서 칼로 참수형을 당하신 분이 바로 바오로사도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람의 삶에 지식이 반드시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가 세상에서 뛰어난 일을 하셨던 분의 삶을 본받고 싶다면, 그분들이 세상에 살았을 때에 그들에게 다가온 어려움들을 어떻게 이겨내고 살았는지 아는 일은 중요할 것입니다. 그렇게 지식을 준비한 다음에, 그분들이 누리는 영광에 어떻게 하면 나도 참여할 수 있겠는지 실천방법을 찾는 것이 중요한 순서입니다.

우리나라 교회의 과거역사에서도 마찬가지였지만, 현실에서도 신앙을 가장 앞세우고 그 신앙대로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어쩌면 충실한 신앙생활을 하겠다면서도 육신의 편안함이나 안락함을 찾는다면 그 두가지는 서로 일치하지도 않는 삶이고, 서로 연결되지도 않은 일이니, 그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아주 잘못 살고 있는 사람이라고 말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베드로사도가 다른 사도와 제자들보다 먼저 신앙고백을 말로 드러낸 내용입니다. 제자들이 스승인 당신을 어떻게 생각하면서 따르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었을 때, 예수님의 뜻에 맞는 꼭 맞는 대답을 한 사람이 베드로사도였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은 베드로사도가 고백한 믿음을 바탕으로 그 위에 교회를 세우겠다고 선언하십니다.

이렇게 세상에 하느님으로, 세상에 구원자로 오셨던 예수님이 그 일을 세상에서 계속하게끔 의도했던 교회공동체를 세울 수 있는 기초가 되는 올바른 믿음은 어떤 것이겠습니까? 간단한 표현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지만, 신앙인으로 사는 우리는 베드로사도가 이렇게 고백한 믿음을 드러내면서 살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말만 해도 되는 것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래서 올바른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이 왈가왈부할 수 없는 개인적인 것이라고 말하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개인적인 것이라고 모른척하기보다는 그 믿음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은 어떤 것이 좋은 것인지 찾을 수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사도는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습니다. 로마제국의 식민통치자로부터 인정을 받았던 정치가들에게서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소식을 전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베드로는 그 말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그게 신앙의 올바른 길이라고 자기 목숨을 놓고 증언합니다. 그렇게 했다는 행동 때문에 베드로사도는 감옥에 갇히고, 다음날이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이 그에게 벌어졌는데, 베드로사도는 세상이나 현실과 타협하지 않았고, 그런 신앙의 자세를 읽은 하느님은 그를 감옥에서 아무런 일도 없이 풀려나오는 놀라운 체험을 하게 하십니다. 같은 사정을 우리가 사는 현실에 적용하면 어떤 소리가 가능하겠습니까?

우리가 세상 삶에서 일관성을 드러내면서 충실하게 산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쉽지 않다고 해서, 세상과 적당히 타협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타협한다는 것은 세상의 목숨을 구하는 일은 될 수 있어도, 신앙을 우선으로 산다는 사람이 선택해도 좋은 일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바오로사도께서 제자 티모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나는 훌륭히 싸웠고, 달릴 길을 다 달렸으며, 믿음을 지켰다는 자신감을 드러내는 자세로 세상에서 살아야 한다는 것인데, 어떻게 하면 이런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현실의 삶에 바오로사도께서 표현하신 그 자세를 실천하는 것은 어떻게 사는 것이겠습니까?

오늘 베드로사도와 바오로사도의 본보기를 기억하는 날에 우리는 교황님을 위해서도 기도합니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참여하는 기도가 실제로 어떤 효과를 발휘할지 아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것은 말 그대로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가져야 할 자세는 하느님의 힘을 생각한다면서 인간의 부족한 생각을 앞세울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한 하느님의 자비와 호의를 믿고 받아들이는 자세이어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 하느님나라가 설 수 있도록 협력하고 협조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그렇게 살게 해주시라고 기도할 시간입니다.

 

 

연중 제 13 주간 월요일

아모스 2,6-10; 13-16 마태 8,18-22

주제 : 하느님이 원하시는 일

 

다른 사람이나 다른 대상과 관련을 맺고 살게 되면, 우리는 그 상대방이 내게 무엇인가를 해주기를 기대하는 것도 있고, 내가 그 상대방을 위해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런 경우 다른 사람과 좋은 관련을 맺겠다면, 내가 다른 상대방을 위해서 내 시간을 허락하고 내주는 경우가 좋은데, 그렇게 하지 않고 다른 사람에게서 희생과 양보를 요구하는 경우에 문제가 발생합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 다른 대상이라고 하는 그 대상이 사람인지, 혹은 하느님인지에 따라 우리가 행동할 수 있는 범위나 양식도 달라집니다. 내가 대하는 대상이 다른 사람이면 그래도 타협의 여지는 있는데, 그 대상이 하느님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잘못될 수 있는 의도가 담긴 질문일 수도 있지만, 이런 경우에 사람이 이길까요? 아니면 하느님이 이길까요?

오늘 독서로 들은 아모스예언서 말씀은, 사람이 세상에서 실천해야 하는 정의(正義)를 얘기합니다. 1980년에 우리나라 정치역사에 적용됐던, ‘정의사회구현에서 말한 정의와 단어는 같지만, 뜻은 다르다는 것을 기억은 해야 할 일입니다.

독서의 말씀은, 북이스라엘국가의 백성들이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제멋대로 산 모습을 전합니다. 그렇게 산 결과가 그들이 속했던 나라의 멸망으로 결정되지만, 아직 결과를 모르던 사람들이 저질렀던 삼의 모습이 우리들 가운데 있는 것은 아닌지, 그래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나라의 모습도 여차하면 같은 모양으로 흐르지는 않을지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성경을 오늘의 상황에 맞춰 제대로 본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와는 달리, 그저 과거에 일어났던 일과 이야기라고 생각한다면, 예상보다 심각한 결과를 맞이할 수 있습니다.

그 상황은 표현이 조금 다르기는 합니다만, 복음말씀에도 그대로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 제가 당신을 따르겠습니다하고 말하는 율법학자의 소리에 예수님은 그 삶이 힘겹다고 말씀하시고 그를 돌려세웁니다. 잠시 후 다른 사람이 예수님을 따르겠다고 말하면서, 인륜(人倫)의 한 가지인 장례를 치루는 문제를 말하자, 예수님은 그 일보다 더 급한 것이 지금 당장 따르는 일이라고 하여, 복음대로 산다고 하는 일이 쉽지 않음을 말씀하십니다.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각자의 사정을 얘기하면, 내가 처한 일이 가장 큰 일이고, 가장 급한 일이며, 이 일만 정리하고 나면 하느님을 따르는 일에 아무런 장애도 없다고 말하기 쉽지만, 하느님의 뜻을 먼저 생각한다면, 인간의 모든 조건들은 둘째 문제이어야 한다는 소리를 우리는 어떤 마음으로 듣겠습니까?

세상에 이루어져야 할 하느님의 뜻은 과연 어떤 것이겠는지 생각할 일입니다. 이 같은 일이 생기면 우리는 어떤 쪽에 더 우선권을 두어야하겠습니까? 지금 잠시 생각할 시간입니다.

 

연중 13 주간 수요일

아모스 5,14-15.21-24 마태오 8,28-34

주제 : 사람이 선하게 산다는 것

 

오늘 독서, 아모스예언서의 말씀은 우리가 하느님을 기억하는 사람으로서 선하고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얘기였고, 복음은 가다라지방에서 생긴 일이라고 전하는 일로 돼지들이 마귀들 때문에 비탈을 내리달려 죽었다는 말씀이었습니다.

하나는 경고의 말씀이고, 다른 하나는 받아들이는 입장에 따라서 반길 수도 있을 만한 놀라운 일이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내 삶에는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일 수도 있습니다. 세상의 삶에는 이러한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는 모든 사람에게 좋고, 모든 사람이 반길만한 일들만 생기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왕이면 나는 항상 이익을 얻을 수 있고, 늘 기쁨을 누리는 쪽에 서기를 바라지만, 그게 마음이나 생각처럼 쉽지는 않다는 데에 삶의 문제점이 있습니다.

삶에서 힘겨운 일이 생기고, 그것을 겪다보면 우리는 선()에 대해서 질문하게 됩니다. ‘세상에서 내가 선하고 착하게 살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하고 말입니다. 헌데 이런 질문은 대부분의 경우, 정말로 선하게 사는 합당한 이유를 찾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남들처럼 악하게 살아도 좋다(!)는 이상한 평가를 바라는 경우라는 것이 문제입니다. 즉 내가 하는 선행으로 남들이 선하게 살게 하거나 그들의 삶에 생기는 선의 모습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내 눈에 보이는 사람들 가운데, 악하게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던 사람을 그리워해서 하는 질문이라는 것이 문제점입니다.사람은 세상에서 선하게 살아야 하는 것일까요? 이렇게 하는 질문에 대답해야 한다면, 여러분은 어떤 대답을 해주겠습니까? 그리고 어떤 이유로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대답하겠습니까?

우리들 삶에 영향을 끼치는 세상의 것들은 많습니다. 어디까지나 이론이기는 하겠지만, 선한 것을 지향하고 목표로 해서 우리들 삶에 영향을 끼치는 것도 있을 것이고, 우리가 미처 알지는 못하지만, 내가 잘못된 행동을 했을 때 나에게 다가올 수도 있는 무서운 결과들 때문에 나나 우리가 행동을 조심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오늘 들은 아모스예언서의 말씀은 하느님의 하소연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예언자가 이러한 말씀을 선포한 바로 그 나라에 생긴 일을 함께 보면, 그들은 예언자의 말대로 사람들이 살지는 않았다는 판단을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예언자의 말을 함부로 여긴 것이겠지만, 현세의 우리는 그들과 얼마나 다른지 질문해야합니다.

사람의 삶에 일어나는 일들에는 여러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이왕이면 우리들의 삶에 좋은 영향을 남길 수 있는 일들을 먼저 생각한다면, 같은 일에 대해서도 실망하는 비율이 줄어들 수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당신의 뜻을 우리에게 밝히실 때, 우리는 과연 그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며, 지금 이 순간이 바로 그때라면 우리는 어떻게 사는 사람이겠습니까?

 

 

성 토마스 사도축일 [0703]

에페소서 2,19-22 요한 20,24-29

주제 : 믿음이란 무엇인가?

오늘은 토마스사도의 축일입니다. 흔히 불신앙의 사도라는 별칭이 따라 붙기는 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삶의 끝까지 신앙을 드러내지 못한 분은 아닐 것입니다. 토마스 사도가 이러한 별명을 얻은 이유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저녁에 다른 제자들은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다락방에 숨어 있었고, 거기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는데, 그 장소에 함께 있지 않았던 일과 관련된 이야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에 관련된 내용을 오늘 복음의 전반부에서 들었습니다.

믿음이란 무엇일까요?

믿음이란 어떤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주님을 첫 장면에서 만나지 못한 토마스사도가 했다는 말을 들으면서, 우리는 과연 믿음을 어떤 것으로 생각해야 하는지 질문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가 한 가지 더 추가할 질문이 있습니다. 우리가 토마스사도를 불신앙의 사도라고 부르거나 기억한다면, 그와는 상대적으로 우리는 얼마나 신앙의 사도에 가까운 생활을 하고 있는지를 물어야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 제자들을 찾아오셨을 때에 현장에 있지 않았던 토마스는 자기 눈과 손으로 현장검증을 해야만 믿겠다고 말했습니다. 현실에 사는 우리들 가운데도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없을까요? 그러한 사람들에게 믿음이 무엇인지 얘기해준다는 것은 아주 어려운 일입니다.

믿음은 눈으로 확인하거나 손으로 검증하는 것을 전제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확인이고 검증이라고 하는 것이지 믿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눈으로 보고, 손으로 뭔가를 잡아서 확인한다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눈으로 보지 않아서 받아들이지 않았고 손으로 대하지 않아서 인정하지 않았던 것을 그 이전의 상황과 다르게 받아들이게 된다면 그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도 없고, 믿음의 결과라고도 말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래서 올바른 믿음을 갖고, 하느님을 대하되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힘들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같은 믿음을 갖고 같은 믿음을 드러낼 때, 혈연으로는 연결되지 않더라도 한 시민이며 한 가족이 된다는 소리를 어떻게 이해하면 좋겠습니까? 우리는 흔히 내가 알고, 내가 이해하는 것을 기준으로 살아갑니다. 누구라도 그러할 것입니다. 그게 세상에서 사는 지혜일테니 말입니다. 하지만, 신앙으로 같은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뭔가 더 달라질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내가 가진 믿음의 자세보다 조금은 못했을(!) 토마스사도의 본보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하느님께 얼마나 더 가까이 머물려고 하는지, 잠시 돌아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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