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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과 묵상

연중 제12주일 독서기도 그리스도는 영원히 왕이시고 사제이십니다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0|조회수42 목록 댓글 0

연중 제12주일 독서기도

그리스도는 영원히 왕이시고 사제이십니다

 

우리 구세주께서는 육신을 따라 참으로 기름 부음 받은 이가 되시어, 참된 왕, 참된 사제가 되셨습니다. 그분은 구세주로서 아무 부족함이 없도록 두 가지 신분을 다 지니셨습니다. 주님은 다음 성서 말씀에서 당신 자신이 왕이 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주는 당신의 거룩한 시온산 위에다 나를 임금으로 세우셨도다.” 그리고 다음 성서 구절에서 아버지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사제적 품위를 증거하십니다. “너는 멜기세덱의 품위를 따라 영원한 사제이니라.” 옛적에 기름 부음 받아 최초로 사제가 된 사람은 아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구세주까지 계승으로써 사제직을 이어받았다고 생각하지 않도록 여기에서 아론의 품위를 따라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아론이 가졌던 사제직은 대대로 물려주는 것이었지만 우리 구세주의 사제직은 대대로 물려주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분은 영원토록 사제이십니다. 그래서 너는 멜기세덱의 품위를 따라 영원한 사제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구세주께서는 육신을 따라 왕이시고 사제이십니다. 그러나 그분께서 기름 부음 받으신 것은 영적인 것이고 육신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왕들과 사제들은 육신적으로 기름 부음 받아 그 지위에 올랐습니다. 그렇지만 한 사람이 둘 다 되지는 않았습니다. 각자는 왕이든가 또는 사제이든가 했습니다. 율법을 완성시키지 위해 오신 그리스도께서만 만사에 있어 완성과 충만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개인으로서 둘 다 될 수는 없었지만 육신적으로 기름 부음 받아 왕이나 사제로 축성된 이들은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이라 하였습니다. 한편, 참으로 그리스도기름 부음 받은 이이신 우리 구세주께서는 당신에 관해 기록된 것을 이루시려고 육신적으로가 아니라 성령으로 기름 부음 받으셨습니다. “하느님이, 당신의 하느님이 즐거움의 기름으로 당신의 동료들보다 당신을 바르셨나이다.” 주님은 성령을 뜻하는 즐거움의 기름으로 기름 부음 받으셨기 때문에 당신 동료들보다 더 위대한 기름 부음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을 주님 친히 확인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이사야 예언서의 두루마리를 받아 드시고 주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으셨기에 주님의 성령이 나에게 내리셨다.”라는 대목을 읽으셨을 때 듣고 있던 사람들에게 그 예언이 성취되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들의 으뜸인 베드로도 그리스도이신 구세주께서 부음 받으신 크리스마는 성령 즉 하느님의 능력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그는 지극히 충실하고 자비로운 백부장인 고르넬리오에게 다른 여러 가지 가운데서 이것을 말했습니다. “요한이 세례를 선포한 이래 갈릴래아에서 비롯하여 온 유다 지방에 걸쳐서 일어났던 나자렛 예수에 관한 일들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에게 성령과 능력을 부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주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여기서 베드로는 인간인 예수께서 성령과 능력으로 부음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인간인 예수께서 참으로 기름 부음 받은 이그리스도가 되셨고, 성령의 기름 부음으로 영원히 왕이시고 사제이십니다.

응송 히브 6,20 참조

민족들을 구원하러 오시는 분의 위대함에 놀라나니, * 그분은 정의의 왕, 만세의 아들이시도다.

그분은 우리를 위해 선구자로, 멜기세덱을 잇는 영원한 대사제로 오시도다.

그분은. 정의의 왕, 만세의 아들이시도다.

 

 

 

 

연중 제12주간 월요일 독서기도

그리스도인은 제이의 그리스도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 누구보다 더 잘 알았고 또 그분의 이름, 즉 그리스도인이란 이름을 받은 이들이 어떤 사람이어야 하는지 자신의 생활을 통하여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를 너무도 정밀히 본받음으로 해서 자신 안에 이루어진 주님의 형상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는 이렇게 정밀히 그리스도를 본받아 그의 영혼의 형상은 원형이신 그리스도의 형상과 너무도 일치하여 이제는 말하는 사람이 바오로가 아니라 그리스도인 것처럼 보였습니다. 자신이 받은 축복을 잘 알고 있던 바오로는 그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통하여 말씀하고 계신다는 증거를 찾고 있던 여러분이 그 증거를 보게 될 것입니다.” 다른 데서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서 사시는 것입니다.”

바오로는 다음의 여러 가지 말씀을 할 때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얼마나 큰 힘을 지니고 있는지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능력이시오 지혜이시며, 평화 자체이시고 하느님께서 그 안에 거하시는 접근할 수 없는 빛이십니다. 우리의 속량과 구원과 대사제이시고 파스카이시며 영혼들의 속죄물이십니다. 하느님 영광의 광채요 그분의 본체의 모상이시며, 세기의 창조주이시고 우리의 영적인 양식과 음료이시며, 바위와 물이십니다. 신앙의 기초와 모퉁잇돌이시며,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모상과 위대한 하느님이시고, 당신 몸인 교회의 머리이시며 새 피조물의 맏아들이시고, 죽은 이들 가운데 최초로 부활이신 분이시오 죽은 이들 가운데의 맏아들이시며, 많은 형제들의 맏형이십니다. 하느님과 사람들 사이의 중재자이며, 영광과 영예의 월계관을 쓰신 외아드님이시고, 영광의 주, 만물의 시작, 정의의 왕이시며 세상의 어느 왕국도 그분을 경계선 안에 갇히게 할 수 없는 그런 권세를 얻으신 평화의 왕, 만물의 왕이십니다.

바오로는 이 칭호들과 이와 같은 다른 여러 가지 칭호들을 그리스도께 적용시키는데, 이들은 너무 많아서 열거하기조차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 모든 칭호들을 분류하여 하나 하나의 의미를 이끌어 낸다면,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지닌 놀라운 힘을 드러내 줄 것이고 우리 정신으로 파악할 수 있는 한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이름의 엄위를 나타내 보일 것입니다.

자비하신 주님은 우리가 모든 칭호 중에 가장 위대하고 거룩하며 첫째가는 그리스도라는 이 이름에 참여하게 하시어, 우리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꾸며 주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니고 있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도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표현하고 있는 모든 칭호들을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 이름을 거짓으로 지니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우리 생활은 그 이름의 증거와 확인이 되어야 합니다.

응송 시편 5,12; 88(89),16b-17a

주여, 당신께 피신하는 자 모두 다 기뻐하고, 그 기쁨 넘치는 소리 끊임없으리이다. * 당신은 방패 삼아 감싸 주시니, 주님 이름 받드는 자들 주 안에서 즐기나이다.

주여, 그들은 당신 얼굴의 빛 속에 걸으오리니, 그들은 항상 당신 이름으로 기쁘오리다.

 

당신은. 방패 삼아 감싸 주시니, 주님 이름 받드는 자들 주 안에서 즐기나이다.

 

 

 

 

연중 제12주간 화요일 독서기도

우리의 전체 생활은 그리스도를 드러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드러내고 구별 짓는 것은 행동과 말과 생각 - 이 세 가지입니다. 이 세 가지 중 생각이 먼저 나오고, 다음으로 마음속에 생기고 새겨져 있는 생각을 드러내 밝히는 말이 나오며, 생각과 말 다음으로 마음속에 생각한 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행동이 나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도중 행동하고 생각하고 말하게 될 때, 우리 말과 행동과 생각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을 설명해 주는 그 칭호들의 거룩한 규범에 맞도록 해야 하고 이들의 고귀한 함축적 의미에서 벗어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결코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고귀한 이름을 지니는 영광을 가진 사람은 자신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을 주의 깊게 살펴보아 이 세 가지 각각이 그리스도를 향하고 있는지 또는 그분에게서 떨어져 나가 있는지 판단해 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는 이 명확한 판단을 여러 방법으로 내릴 수 있습니다. 예를 들면 어떤 걱정과 불안이 담긴 행동과 생각과 말은 결코 그리스도께 상응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들은 영혼의 진주를 걱정, 불안이라는 진흙과 뒤섞어 그 귀한 보석의 광채를 손상시켜 버리는 악마의 날인과 자취를 지니고 있는 것들입니다.

한편 온갖 애착심에서 벗어난 순결한 것이 우리에게 있다면 그 원천은 우리 마음의 생각과 정감을 순수하고 깨끗한 샘에서처럼 솟아나게 하는 평화의 주이시고 왕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래서 개울에 흐르는 물과 항아리에 담겨 있는 맑은 물이 샘 속에 있는 물과 거의 같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우리의 생각과 정감은 그 원천인 그리스도와 유사성을 띠고 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순수성과 우리 마음속에 있는 순수성은 한가지로서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순수성은 샘에서 솟아 나와 샘에 고여 있는 그 순수성이고 우리의 순수성은 샘에서 솟아 나와 우리에게까지 다다른 물의 순수성입니다. 그리고 샘이신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물이 우리에게까지 이를 때 그분의 아름다움과 순수성을 담아다 줍니다. 또 내적 인간과 외적 인간의 조화가 이루어지도록 그리스도에게서 솟아 나오는 생각과 정감은 우리의 실제 생활을 꾸며 주어 거룩함과 질서의 길로 인도해 줍니다.

그러므로 내 생각으로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안전성은 그리스도라는 이름이 포함하는 모든 칭호를 우리 내적 생활과 우리 말과 행동이라는 외적 생활에 완전히 참여시키고 그것을 실천으로 옮기는 데 있다고 봅니다.

응송 골로 3,17; 로마 14,7

너희는 무슨 말이나 무슨 일이나, * 모두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

우리들 가운데는 자기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도 없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 죽는 사람도 없도다.

모두.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라.

 

 

 

 

연중 제12주간 수요일 독서기도

참되고 완전하며 영원한 우정

 

젊은이 중 가장 탁월했던 요나단은 다윗과 우정의 계약을 맺었습니다. 그러나 왕관을 얻어 보려는 희망에서 왕국을 기대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닙니다. 요나단은 우정으로 종인 다윗을 주인인 자신과 동등하게 만든 후, 자기 아버지 사울에 의해 쫓겨나고 사형 선고를 받아 사형 당할 몸으로 광야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그를 높여 주고 자신은 낮추었습니다. 요나단은 다윗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왕이 되겠고 나는 네 다음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것은 정말 참된 우정의 지극히 고귀한 모범이 아니겠습니까!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닙니까! 왕은 종 다윗에게 격노하여 흡사 다윗이 자기 왕국을 빼앗으려는 적수나 되는 것처럼 전국을 소용돌이치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사제들을 배신 죄로 고발하여 단순한 혐의 때문에 그들을 대량 학살했습니다. 숲 속을 뒤지고 골짜기마다 정탐하며 일단의 군대를 풀어 산과 벼랑을 포위했습니다. 모든 이들은 왕이 분노한 그 사람을 복수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런데 다윗을 질투할 이유를 지닌 유일한 사람 요나단만이 자기 아버지를 반대해야 한다고 생각하고는 자기 벗을 도와주고 온갖 역경에서 충고해 주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래서 왕국보다 우정을 앞세우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는 왕이 되겠고 나는 네 다음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아버지는 아들 요나단에게 소리치며 왕국을 주지 않겠다고 위협하여 공포심을 주고 명예를 박탈하겠다고 단언하면서 그의 마음에다 벗에 대한 질투심을 일으키고자 얼마나 애썼습니까!

사울이 다윗에게 사형 선고를 내렸을 때에도 요나단은 자기 벗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아버지 사울에게 이렇게 항의했습니다. “죽일 놈이라고요? 다윗이 무슨 짓을 했다고 그러십니까? 그가 목숨을 걸고 불레셋 장수를 죽였을 때 아버지는 기뻐하셨는데 지금 그를 왜 죽여야 되겠습니까?” 이 말에 사울은 화가 치밀어 요나단을 자기 창으로 찔러 성벽에다 꽂아 버리려 하면서 다음과 같은 말로 욕설을 퍼부었습니다. “이 몹쓸 화냥년의 자식놈아, 그래 네가 이새의 놈하고 단짝이 된 것을 모를 줄 아느냐? 네 망신이 어미 망신이 될 줄 알아라.” 그리고 나서 요나단에게 온갖 독설을 퍼부어 야망을 자극시키고 질투심과 탐욕과 쓰라린 마음을 일으키고자 한마디를 덧붙였습니다. “이새의 아들놈이 땅 위에 살아 있는 한 너와 네 왕권은 안전하지 못하리라.”

이 말을 듣고 마음이 흔들리지 않거나 질투심이 생기지 않을 사람이 있겠습니까? 이 말이 누구에 대한 사랑이건 존경심이건 우정이건 좀먹거나 감소시키거나 또 파괴시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지극히 충실한 그 젊은이는 우정의 서약을 지키면서 위협 앞에서 흔들리지 않고 모욕 앞에 꿋꿋했습니다. 우정 때문에 왕권을 멸시해 버리고 영광을 잊어버려 사랑을 변함없이 간직했습니다. “너는 왕이 되겠고 나는 네 다음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참되고 완전하며 영원한 우정입니다. 이 우정이야말로 질투심이 좀먹지 못하고 혐의가 감소시키지 못하며 야망이 산산히 조각내 버릴 수 없는 우정입니다. 이와 같은 우정은 시험 당할 때 중단되지 않고 공격받을 때 파괴되지 않습니다. 욕설을 당해도 굴하지 않고 숱한 모욕으로 공격당해도 움직이지 않습니다. “, 여러분도 가서 그렇게 하십시오.”

응송 집회 6,14. 17

성실한 친구는 안전한 피난처요, * 그런 친구를 가진 것은 보화를 지닌 것과 같도다.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참된 벗을 만드는도다. 그 사람에 그 친구이기 때문이로다.

그런. 친구를 가진 것은 보화를 지닌 것과 같도다

 

 

 

 

 

연중 제12주간 목요일 독서기도

하느님은 도달할 수 없는 바위와 같습니다

 

어떤 사람이 높은 산의 정상에서 한없이 깊은 바다를 내려다볼 때 현기증이 나는 것처럼, 내 정신도 주님의 고귀한 말씀의 정상에 서서 개념의 어떤 깊이를 내려다볼 때 현기증이 납니다.

해변에서 우리가 때때로 바다를 등지고 해변에 있는 산을 바라볼 때 산이 정상과 맨 밑바닥으로 잘려져 윗부분이 마치 바다의 수면 위에 걸려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그 높은 정상에서 저 바다 밑을 내려다본다면 현기증이 날 것입니다. 이처럼 나도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라는 주님의 위대한 말씀 위에서 내려다볼 때 현기증이 나고 맙니다.

이 말씀은 하느님을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의 관조의 대상으로 내어줍니다. 그러나 요한 복음사가가 말한 대로 하느님의 참모습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숭고한 지성을 지닌 바오로도 이것을 확인해 줍니다. “그분은 아무도 일찍이 본 일이 없고 또 볼 수도 없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바로 우리 생각에 아무 기초나 바탕을 주지 않는 미끄럽고도 가파른 바위이십니다. 모세도 자기 가르침에서 우리 정신이 결코 거기에 도달할 수 없다고 분명히 했습니다. 하느님을 파악하려 하는 사람은 그가 아무리 높이 올라간다 해도 다음의 말씀에 나오는 이유 때문에 그 가능성을 잃고 맙니다. “주님을 보고 나서 사는 사람이 없다.”

하느님을 보는 것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그러나 요한과 바오로와 모세라는 믿음의 기둥들은 하느님을 보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고 주장합니다. 이 말씀에 포함되어 있는 심연을 볼 때 영혼은 현기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하느님이 생명이시라면 그분을 보지 않는 사람은 생명도 보지 못합니다. 성령의 감도를 받은 예언자와 사도들은 하느님을 볼 수 없다고 증언합니다. 그렇다면 인간의 희망은 얼마나 큰 고뇌에 빠져들겠습니까?

주님께서는 고뇌에 빠져드는 이 희망을 붙들어 주시고 지탱해 주십니다. 물에 빠져드는 베드로가 빠지지 않도록 물을 굳게 하시고 그 위에 그가 서도록 하셨습니다. 말씀이신 주님의 손이 우리에게 뻗치시어 생각의 심연 속에서 흔들리는 우리를 다른 차원의 생각 위에 세워 주신다면, 우리가 우리를 인도하시는 말씀이신 주님의 선을 붙잡을 때 우리에게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응송 요한 1,18; 시편 144(145),3

일찍이 하느님을 본 사람은 없도다. *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도다.

주님은 위대하시고, 크게 기림직하옵시고, 그 위대하심은 측량할 길 없도다.

아버지의. 품안에 계신 외아들로서 하느님과 똑같으신 그분이 하느님을 알려 주셨도다.

 

 

 

 

 

연중 제12주간 금요일 독서기도

하느님을 뵈오리라는 희망

 

하느님의 약속은 너무도 위대하여 행복의 최고 한계를 초월합니다. 하느님을 본 사람이 하느님을 봄으로써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하게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렇게 좋은 것을 맛본 다음 무엇을 또 원하겠습니까? 사실 성서에서 무엇을 본다.”라는 것은 무엇을 가지다 - 누리다.”라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예를 들면 시편에서 예루살렘의 번영을 누리게 하여 주시기를이라는 뜻으로서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게 하시기를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악한 자는 주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 쫓겨나리라.”라는 말씀에서 예언자가 주의 영광을 보지 못하게라고 말할 때 그는 주의 영광에 참여하지 못하게라는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을 보는 사람은 이 보는 행위 안에서 이 세상에서 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갖게 됩니다. 그는 끝없는 생명, 영원토록 부패하지 않는 것, 사라지지 않는 행복, 영구한 나라, 끊임없는 기쁨, 참 빛, 감미로운 영신의 목소리, 도달할 수 없는 영광, 그리고 끝없이 지속하는 용약 - 한마디로 온갖 선을 얻습니다. 희망 속에 약속된 행복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것은 이렇게 많고도 큽니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하느님을 보는 것은 마음의 순수성에 달려 있으므로 마음이 깨끗한 사람만 하느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의 순수성은 우리 본성을 능가하고 우리가 이루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까? 이것을 생각할 때 내 마음은 한번 더 현기증을 느끼게 됩니다. 하느님을 보는 것이 이 순수성에 달려 있고 또 한편 모세와 바오로가 자기들이나 어떤 누구도 그분을 볼 수 없다고 말하듯이 자신들도 그분을 보지 못했다면 이제 말씀께서 우리에게 제안하시는 행복은 그전에도 성취되지 못했고 또 실제로 불가능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느님을 보게 될 수 있는지 알아도 우리가 알게 된 그 목적을 이룰 힘이 없다면 우리에게 유익되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이것은 흡사 이승에서 볼 수 없는 것을 천국에서 보게 되기 때문에 천국에 있는 것은 복되다고 말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말이 천국에 도달하는 방법까지 보여 주어야만 참으로 유익한 말이 될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천국에 이르지 못하는 동안에는 천국에 있는 것은 행복하다는 사실을 아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천국의 행복을 알면서도 그것을 아직 얻지 못하는 것은 결국 우리에게 앗긴 것으로 느껴질 때 번뇌와 환멸이 되어 버리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느님은 우리 인간 본성과 능력으로서는 할 수 없는 그런 엄청난 것을 명하신단 말입니까?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날개를 주시지 않은 이들 보고 새가 되라고 명하시는 일이 없고 뭍에서 살게 되어 있는 조물 보고 물 속에서 살라고 명하시지도 않습니다. 다른 모든 피조물에게 있어 법은 그 피조물의 능력에 맞게 되어 있고 그 능력 이상의 것을 지키라고 명하지 않는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에게 약속된 이 행복은 우리 능력으로 가능한 것임을 알아 그것을 이루는 데 실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요한도 바오로도 모세도 또 그들과 같은 다른 이들도 하느님을 보는 데에 존재하는 그 초월적 행복에서 누리지 못한 것이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바오로는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요한은 주님의 가슴에 기대어 있었으며”, 모세는 모든 이에 앞서 너를 알았노라.”는 하느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하느님을 보는 것은 인간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말한 이들이 행복을 이루었다면, 그리고 행복이 하느님을 보는 데에 있고 또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한 사람들이 하느님을 볼 수 있다면, 행복을 이룰 수 있게 해주는 그 순수성은 불가능한 것이 아닙니다. 바오로 같은 분들이 하느님을 보는 것이 인간 능력을 초월하는 것이라고 말할 때, 이 말이 사실이라면, “마음이 깨끗한 자는 하느님을 뵙게 되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은 바오로의 말과 모순이 되는데 이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겠습니까?

응송 시편 62(63),2bc. 16(17),15

내 영혼이 당신을 목말라 하나이다. *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나는 의로움으로 당신 얼굴을 뵈오리다. 깨어나 당신 영광을 뵈옴으로 흡족하오리다.

하느님. 내 하느님, 당신을 애틋이 찾나이다.

 

 

 

 

 

연중 제12주간 토요일 독서기도

하느님은 인간의 마음에서 찾아뵐 수 있습니다

 

육신의 건강은 인간 생활에서 가장 바람직한 것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참으로 행복한 사람은 어떻게 건강을 얻을 수 있는지 아는 사람이 아니고 실제로 건강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누가 건강의 가치에 대해 훌륭히 말하면서 병을 유발시키는 해로운 음식을 먹는다면 병으로 고통받는 그에게 건강에 관한 훌륭한 말이 무슨 소용 있겠습니까? 지금 설명하고 있는 것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행복한 사람이란 하느님에 대한 어떤 것을 아는 사람이 아니고 하느님을 자신 안에 모시는 사람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행복하다. 그들은 하느님을 뵙게 될 것이다.” 내 생각으로 이 성서 말씀은 영혼의 눈이 깨끗해진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당신 자신을 직접 보여 주신다는 뜻이 아니라고 봅니다. 놀라운 이 말씀은 주께서 성서 다른 곳에서 하느님의 나라는 바로 너희 안에 있다.”고 말씀하실 때 좀더 명백히 표현하시는 바를 뜻한다고 봅니다. , 모든 피조물에 대한 불의한 애착심에서 벗어난 사람은 이렇게 된 자신의 마음의 아름다움에서 하느님 본성의 모상을 보게 된다는 뜻입니다.

앞의 짧은 말씀에서 주님은 다음과 같은 충고의 말씀을 하고 계신다고 봅니다. “너희 인간 존재 안에는 참으로 선한 것을 보고 싶어하는 갈망이 있다. 그런데 너희가 하느님의 엄위는 하늘 위에 고양되어 있고 그 영광을 표현할 수 없으며 그 아름다움은 말로 다할 수 얼고 그 본성은 파악할 수도 볼 수도 없다는 말을 들을 때, 너희가 갈망하는 것을 직관하지 못한다고 해서 실망하지 말라. 열심하고 올바른 생활로써 마음에 붙어 있는 더러움을 씻어버린다면 너희 안에 하느님의 아름다움이 빛날 것이다.”

쇠붙이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숫돌로 녹을 다 벗겨내면 조금 전에 시커멓던 것은 빛나고 태양 빛을 받아 반짝일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이 마음이라고 부르시는 내적 인간의 축축한 부패가 그 안에 나타나게 한 녹 같은 때를 닦아 없애 버린다면 그 내적 인간은 다시 원형과의 유사성을 되찾고 선하게 될 것입니다. 선 자체와 같이 되는 것은 틀림없이 선한 것입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이 자신을 볼 때에 자신이 갈망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순수성을 볼 때 그 모상을 통하여 원형을 볼 수 있게 되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입니다. 예를 들면 거울을 통하여 태양을 보는 사람은 하늘 자체를 직접 보지 못하지만 태양을 직접 보는 사람 못지 않게 그 태양을 보는 것입니다. 이처럼 여러분도 여러분의 힘만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그 빛을 볼 수 없지만 원래 지니고 있는 그 모상의 아름다움과 은총으로 되돌아간다면 여러분 안에서 찾고 있는 것을 갖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은 완전히 순수하시고 죄악과 욕정이 없으시며 온갖 악에서 멀리 떨어져 계십니다. 이 모든 것이 여러분 안에 있으면 하느님은 틀림없이 여러분 안에 계십니다. 따라서 여러분의 영혼이 온갖 죄악에서 깨끗해지고 온갖 욕정에서 해방되어 모든 악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여러분의 시야가 밝아져 정밀한 눈을 갖게 되기 때문에, 행복한 사람이 되어 마음이 깨끗하지 못한 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여러분은 깨끗해졌기에 보게 됩니다. 물질에 대한 애착심이 야기시킨 어둠은 여러분 영혼의 눈에서 제거되어 여러분의 마음은 깨끗한 하늘에서 빛나는 영상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마음이 보게 되는 영상이란 무엇입니까 ? 그것은 거룩함과 깨끗함과 단순함이고 하느님을 보여 주는 그분 본성의 찬란한 광채들입니다.

응송 요한 14,6a. 9b; 6,47b

주께서 말씀하시는도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로다. *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니라.”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누리리라.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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