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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말씀과 묵상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대축일 주제 : 우리를 살리는 힘이신 성체와 성혈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1|조회수28 목록 댓글 0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대축일 (가해)

신명기 8,2-3.14-16ㄱ 코린토110,16-17 요한 6,51-58

주제 : 우리를 살리는 힘이신 성체와 성혈

 

오늘은 세상에 사는 사람들을 위하여 만물의 창조주이신 하느님께서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모습으로 나시어, 피조물인 사람에게 당신의 생명을 나누신 일을 기념하고 기억하는 지극히 거룩하신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 대축일입니다.

사람이 이해하고 싶은 축제일에 관한 설명이 어렵습니다만, 세상에 사는 우리는 하느님과 만나는 일로써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시는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생명에 참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가 먹고 마시는 일로 시작하고 완성할 일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하느님을 만나는 일이 쉬운 것은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어려운 일이지만,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일이기에 가능하다고 사람이 알아듣고 이해하는 일입니다. 먹는 일은 사람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달리 말하면, 먹는 행동으로 사람이 자기의 배를 채우지 않는다면, 사람은 목숨을 유지할 수 없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배를 채우거나 먹는 것을 중요하게 여기는 차원에서 사람은 세상의 모든 일을 먹는 데서부터 해석할 수 있기도 합니다.

먹는 일을 중요하게 여길 때, 우리가 생각하는 속담으로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말이 어떤 의미로 생각하십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표현은 먹고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무리한 일을 하거나, 심지어 잘못된 일까지도 하게 된다는 뜻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즉 산다는 일이나 목숨을 유지하는 일은 그만큼 절박하다는 의미로 씁니다. 지금 시대에는 사용하지 않습니다만, 속담이 있었던, 조선시대의 포도청은 죄인을 잡아 다루던 관청이었기에, 이 속담에는 먹고 살기 위해서는 포도청에 갈 위험도 감수한다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아프리카나 중동에 있는 것과 같은 사막이라고 부를 만한 장소는 없습니다. 그러니 그곳을 횡단하면서 히브리 민족이 위험을 만났던 일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그런 체험을 했던 다른 민족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는 그 일의 심각함을 알아듣지 못합니다. 우리가 오늘 독서에서 만난 내용입니다만, 그 사막을 40년 동안 헤맸던 히브리 민족을 생각하면, 사막에서 사람이 먹고 마신다는 일이 얼마나 힘든 것인지는 그저 상상으로 아는 정도일 뿐입니다. 그 놀라운 시간을 지냈던 히브리 민족은 40년 동안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향하여 엄청난 고생을 했습니다.

그렇게 아라비아반도에 있는 사막을 가로지르면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걱정한 일은 하느님의 도움과 사랑이 없었더라면, 히브리 백성들이 그 곤경과 어려움을 이겨낼 방법은 없었을 것입니다. 옛날의 사람들이 겪은 그 일을 현실에서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시면서 세상을 이기고, 우리가 하느님을 향해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시고 거기에서 힘을 얻는 일은 사람의 생각과 힘만으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당신을 빵과 음료로, 그리고 당신을 밥과 국으로 소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사람이 먹을 수 있는 음식으로 소개하신 이유는 사람들이 당신에게 찾아와서 생명과 목숨을 유지하는 방편으로 예수님을 대하고 생명을 얻게 하기를 바라신 목적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간절히 이렇게 원하셨지만, 그 소리를 들은 사람들이 올바르게 행동했다는 보장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하는 말을 다른 사람이 알아듣지 못하고 이해하지 못할 때, 다른 사람의 삶을 답답하게 여길 수도 있습니다. 내가 하는 행동을 다른 사람이 이해하지 못할 때 그 답답함은 어떻게 표현하겠습니까?

다른 사람이라면 적당히 무시하고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것처럼 대하면 되겠지만, 내가 하는 말의 의도를 이해하고 그의 삶이 바뀔 수 있는 가능성을 보고서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라면 그 답답함은 아무도 해석하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 그리스도의 성체와 성혈의 대축일에 당신을 우리에게 생명을 건네주는 방법으로 주겠다고 선언하신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의 삶을 대하면서 예수님도 답답하게 여기셨을 것입니다.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에게 어떤 행동을 해야 내가 갖는 아쉬움이 없어지겠습니까?

이론으로는 여러 말을 하겠지만, 받아들이고 내 삶의 한 부분으로 만들지 않는다면 실제로는 아무 것도 전달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는 예수님의 삶을 이해하면서 성체와 성혈을 먹고 마시면서 올바르게 살면 좋겠습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몸과 피는 우리에게 구원과 희망이 될 것입니다.

 

 

 

[최성준 신부와 함께하는 동양고전산책]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1요한 4,8)

 

- 예수성심성월에 생각해 보는 사랑의 의미

서점에서 책을 고르다가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제목의 책이 눈에 띄었습니다. 어느 방송 작가의 수필이었습니다. 책을 읽어 보지는 못했지만 그 제목만으로도 생각할 바가 많았습니다. “나는 지금 사랑하고 있는가?”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 7-8)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 15,12)

 

사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면서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건 누구나 잘 압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계명의 핵심이라는 것, 그러기에 사랑하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남겨주신 유언과 같은 것이겠지요. 그러니 사랑하라는 말씀의 중요성을 모르는 그리스도인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사랑을 실천하고 있는지요? 눈을 감고 사랑하는 사람을 한 번 떠올려 보세요. 누가 떠오르나요? 부모님, 아이들, 배우자나 연인, 친구. 이들을 사랑한다는 건 알지만 과연 그 사랑을 늘 느끼며 살아가고 있나요?

 

지난 415() 저녁,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과 가족을 위한 1주기 추모미사가 성모당에서 대주교님의 주례로 거행되었습니다. 미사 끝에 그 참사로 아들을 잃은 한 어머니의 말씀이 있었습니다. 아이를 떠나보내고 1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어머니의 눈물은 마르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사랑하는 자식을 잃고 쉽게 잊을 수 있을까요? 늘 곁에 있어서 익숙한 사람이 있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죽음이나 뜻하지 않은 이별로 그 사람을 잃으면 그제야 그 사람의 소중함을 절실히 느끼고는 합니다. 이렇듯 사랑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본성(本性)입니다.

 

어느 날 번지(樊遲)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인()에 대해서 물었을 때, 공자는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이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1) 또 이렇게도 이야기합니다. “()은 사람이다.”2) 인이란 사람이라면 누구나 지닌 본성이라는 이야기지요. 그리고 누구에게나 있는 그 인이란 결국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이러한 사랑은 계산하지 않는 순수한 마음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에 계산적인 생각이 들어간다면 그것은 인간 본성에서 나오는 순수한 사랑이 아니라 이기심이나 욕심에 오염되어 버린 상태일 것입니다.

 

흔히 우리는 조건 없는 사랑, 무차별적인 사랑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유가(儒家)에서 말하는 사랑은 차별적인 사랑입니다. “친친(親親)”, 즉 친한 사람을 친애하는 것으로 나와 가장 가까운 이를 먼저 사랑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그 사랑을 확장시켜 다른 사람에게로 넓혀 나가는 것이지요. 다른 이보다 나의 부모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큰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하지만 내 부모님을 사랑하는 데 머물지 않고 나아가 다른 이의 부모님도 공경하는 것입니다. 내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다른 아이를 챙겨 주는 마음보다 더 애틋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더 나아가 다른 이의 아이까지도 사랑으로 대해 주는 것이 사랑의 확장입니다.

 

이처럼 사랑은 모든 관계의 근본 뿌리()입니다. 이 뿌리에서 다른 모든 감정이나 관계가 뻗어 나갑니다. 대학(大學)물유본말(物有本末)”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사물에는 근본 뿌리()가 있고 가지와 나뭇잎 같은 말단()이 있다는 말입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줄기와 잎, , 열매 같은 것들이 무성하게 자랄 수 있는 것처럼, 근본이 바로 서야 말단도 제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있는 법입니다. 사람에게 가장 근본은 바로 사랑입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제대로 갖춰질 때, 사랑으로 관계가 제대로 맺어져 있을 때 비로소 다른 사람과의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 4-5)

 

가지인 우리는 포도나무이신 예수님의 사랑 안에 머물러야만 생명을 유지하며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포도나무에 붙어 있다는 것은 결국 사랑을 실천하며 산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근본을 바로 세워야 하겠습니다.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사랑해야 할까요? 장자(莊子)에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너는 들어 보지 못했느냐? 옛날에 바닷새가 노나라 서울 밖에 날아와 앉았다. 노나라 임금은 이 새를 친히 종묘 안으로 데려와 술을 권하고, 아름다운 궁중 음악을 연주해 주고, 소와 돼지와 양을 잡아 대접했다. 그러나 새는 어리둥절해하고 슬퍼할 뿐, 고기 한 점 먹지 않고 술도 한 잔 마시지 않은 채 사흘 만에 죽어 버리고 말았다. 이것은 사람을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른 것이지, 새를 기르는 방법으로 새를 기르지 않은 것이다.”3)

 

이 이야기를 들으면 누구나 노나라 임금의 바보스러움에 조소를 금치 못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도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데 있어서 자주 이런 잘못을 저지르곤 합니다. 상대가 원하고 상대에게 맞는 방식으로 사랑하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내게 맞는 방식으로 사랑을 베풀고는 거기에 호응해 주지 않는다고 화를 내거나 실망합니다. 부모 욕심대로 아이들을 키우면서 이 모든 것이 결국 아이를 위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아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도 주지 않지요. 사람 관계가 다 그렇습니다. 내 기준으로 베푸는 사랑이 아니라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그러니 나의 입장에서 상대를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상대의 마음은 어떠할지 헤아려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공자도 인()을 실천하는 방법으로 가장 중시한 것이 바로 ()”입니다. 자의 한자를 풀어 보면, 같을 여() 자에 마음 심() 자입니다. ‘마음을 같이한다.’는 뜻입니다. ‘너의 마음을 헤아려 보고 내 마음을 너의 마음과 같게 한다.’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

 

자공이 공자께 여쭈었다. ‘한 마디 말로 종신토록 행할 만한 것이 과연 있겠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 그 한 마디일 것이다. 내가 원하지 않는 것은 남에게도 베풀지 말라.’”4)

 

예수성심성월입니다. 사랑이신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을 기리며 그 마음을 닮아 가려고 노력해야겠습니다. 예수성심은 바로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그 마음을 닮는다는 것은 바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지금 사랑하고 있습니까?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어느 작가의 표현처럼, 지금 우리가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 있다면 모두 주님 앞에서 죄를 짓고 있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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