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우물] 성령의 열매는?
사도 바오로는 육의 행실(부도덕)을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갈라 5,19-20) 등 열다섯 가지나 나열합니다. 이어서 성령의 열매 아홉 가지를 열거합니다.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입니다.”(갈라 5,22-23)
여기 나오는 부도덕(악덕)을 네 종류로 나누어 봅니다. 첫째, 불륜, 더러움, 방탕 등은 우리의 사랑을 빗나가게 합니다. 둘째, 우상 숭배와 마술은 하느님 예배(경신례)를 빗나가게 합니다. 셋째, 분열과 분파 등은 사랑의 끈을 풀어 서로 갈라지게 만듭니다. 넷째, 만취와 흥청대는 술판 등은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며 인간성을 타락시킵니다.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가운데 사랑은 뒤따르는 여덟 가지 덕목의 으뜸 개념입니다. ‘육(肉)의 행실’을 나타내는 그리스말 본문은 본디 ‘육의 행실들(ta erga te-s sarkos)’로 복수로 쓰인 데 반해, 성령의 열매 ‘사랑(agape-)’은 단수로 쓰입니다. 성령의 열매가 다양하지만, 그 모든 열매는 결국 사랑이라는 하나의 뿌리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신약에서 하느님이 누구신지를 가장 짧게 설명해 주는 구절을 대라면 다음 둘을 꼽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은 영이시다.’”(요한 4,24) 요한의 첫째 서간 저자는 그분이 누구이신지를 한마디로 서술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1요한 4,16) 훗날 아우구스티노 성인은 요한의 첫째 서간 주해에서 말합니다. “사랑하라. 그리고 네가 원하는 바를 행하라.”
‘신비의 하느님이 누구신가?’에 한마디로 요한의 첫째 서간은 ‘사랑(agape-)’이시라고 서술해 줍니다. 첫째가는 계명이 하느님 사랑이라면 둘째가는 계명은 이웃 사랑입니다.(마르 12,29-31 참조) 따라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10)
저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쭈그러들 때는 소화력도 떨어지고 기쁨도 줄어들지만, 거꾸로 사랑이 충만해질 적에는 의욕도 생기고 기쁨도 솟아남을 느낍니다.
지난해 무더운 여름 7월과 8월을, 산골짜기 작은 농장에서 작물도 가꾸고 닭과 개 두 마리를 돌보며 지냈습니다. 처음에는 1~2m씩 거리를 두던 닭들에게 3주 정도 지나면서, 기본 먹이 외에 씀바귀, 참비름, 상추 등 즐기는 것을 뜯어다 주었더니, 닭들이 거의 손에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오면서 부리로 손등이나 신발을 장난치듯 툭툭 건드리기도 하면서 마치 친구를 대하듯 하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프란치스코 성인 생각이 났습니다. ‘사랑을 주면 식물도 동물도 친근해지고 기쁨과 풍요로움으로 보답하는구나.’ 아울러 시편 노래가 마음속에서 흘러나왔습니다. “숨 쉬는 것 모두 주님을 찬양하여라. 할렐루야!”(시편 150,6)
함께 시편으로 기도드리시겠습니까?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 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주님께서도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그 열매를 내어 주리라.”(시편 85,11-13)
[다시 만난 신약 성경] 영원한 생명의 말씀
요한 복음 6장은 빵에 대해 한참 이런저런 말씀을 하시면서 길이도 길어서, 평일 미사에 이 장이 복음으로 한 주간 내내 나오면 강론을 준비해야 하는 신부님들이 “빵 주간”이라고 괴로워하시지요. 그런데 이 장에서 제가 좋아하는 구절은 엉뚱하게도, “이 말씀은 듣기가 너무 거북하다. 누가 듣고 있을 수 있겠는가?”(요한 6,60)라는 제자들의 반응에 관한 구절입니다. 지금 주시는 빵이 당신의 살이라는 말씀을 듣고도 거북함을 느끼지 않는 것은, 우리가 저렇게 말했던 이들보다 굳건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그 말씀을 진지하게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일까요? 오래 전에 이사야서 6장에서 이사야가 하느님을 뵙고 “큰일 났구나. 나는 이제 망했다”(이사 6,5)라고 말하는 장면을 보면서, ‘인간이 정말로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난다면 저런 반응이 나오겠구나.’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내 삶 안으로 뚫고 들어오실 때, 이전의 평탄한 삶이 그대로 유지되지는 않을 테니까요.
사람들은 병자들에게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빵을 많게 하신 표징을 보고서는 “이분은 정말 세상에 오시기로 되어 있는 그 예언자시다.”(요한 6,14)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임금으로 삼으려 합니다. 이때까지는 그분을 붙잡고 싶어 하고, 그분과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호수 건너편으로 가셔도 굳이 따라갑니다. 빵을 먹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당신 자신이 하느님의 아들이시고,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시고, 더구나 당신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마시지 않으면 생명을 얻지 못한다고 하시자 거북해하며 “제자들 가운데서 많은 사람이”(요한 6,66) 되돌아갔습니다. 그냥 군중이 아니라, 그분의 말씀을 배우고 따르려고 하던 이들 중에서도 적지 않은 이들이 떠나갔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해할 만도 합니다. 예수님의 몸을 신자들이 생명의 양식으로 받아 먹는다는 것은, 이것을 식인 풍습으로 알아들었던 고대 로마인들에게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지요. 많은 이들이 떠나간 것이 오히려 당연하다고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시몬 베드로는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라고 대답합니다(요한 6,67-68). 똑같은 말씀에 대해서, 어떤 이들은 듣기가 거북하다고 여겨 떠나가고 어떤 이들은 이것이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라고 고백하며 예수님 곁에 남습니다. 베드로에게는 그 말씀이 거북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단정 지을 수는 없지만, 어쩌면 베드로에게도 이 말씀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그가 그분의 말씀을 증언하기 위하여 목숨을 바치게 될 것을 상상할 수 있었을까요? 알 수 없지만, 그는 남들이 거북하다고 하는 그 말씀을 따라갑니다. 거북하고 죽음을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이것이 생명의 말씀임을 아는 것입니다.
어째서 어떤 사람들은 떠나가고 어떤 사람들은 그분 곁에 남는지는 인간이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어 주지 않으시면 아무도 나에게 올 수 없다”(요한 6,44). 우리에게 믿음이 선물로 주어졌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따라가면 위험할 것 같은 저 말씀을 생명의 말씀으로 여기고 그 말씀과 함께 머물게 하는 것은, 오직 아버지의 선물로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성경 73 성경 통독 길잡이] 야고보서
야고보서는 베드로 1.2서, 요한 1.2.3서 유다서와 함께 가톨릭 서간으로 분류됩니다. 편지의 수신처가 여타의 바오로 서간처럼 특정 교회가 아니라 넓은 범위의 그리스도교 신자들이기 때문에 ‘보편된’이라는 뜻을 지닌 가톨릭 서간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야고보서는 야고보의 이름을 빌려 쓴 유다계 그리스도인인 차명 저자가 디아스포라에 흩어져 사는 유다인들에게 보낸 서간입니다. 야고보서가 집필되던 1세기 말 교회 공동체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지나치리만큼 맹목적으로 바오로 사도에 대한 기억에 집착하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빈부의 격차가 점점 커지면서 나타나게 된 부유한 유다인들과 그렇지 못한 유다인들을 통합하는 문제였습니다. 또한 바리사이들보다 더 율법 중심주의를 지키고자 하는 에세네파의 경향을 지닌 유다교와 그리스도교를 화해시키고 일치시켜야 하는 과제가 주어져 있었습니다. 야고보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그들이 공동으로 실천할 수 있는 윤리와 도덕적 책임을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느님을 섬기는 관계와 연결시키면서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습니다.
1장 1절에서 저자는 먼저 디아스포라에 사는 유다인들에게 인사를 건넵니다. 그리고 2절부터 18절에 이르기까지 믿음의 시험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나약한 인간은 누구나 다 여러 유혹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며, 이로 인한 시련을 겪게 되기도 합니다. 또한 믿음을 저해하거나 흔드는 여러 가지 어려움을 직면하기도 합니다. 저자는 이에 대해서 기도 안에서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고, 의심하지 말고 인내하며 시험을 이겨내면 온전한 믿음을 지닌 사람으로 성장하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참빛이신 하느님께서는 좋은 선물과 완전한 은사만을 주시며, 시련과 유혹은 하느님께서 믿음을 시험하시기 위해서 주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잘못된 욕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상기시킴으로써 부당한 책임을 하느님께 돌리지 말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1장 19절-27절에서 저자는 먼저 말씀을 받아들이기 전에 자신 안에 있는 분노, 더러움, 악을 벗어버리라고 이야기합니다. 그런 뒤에 영혼을 구원할 힘을 지닌 말씀을 받아들이고 여기서 그치지 말고 말씀을 실행하라고 강조합니다. 말씀을 듣기만 하고 실천으로 옮기지 않으면 자신의 부족함을 자각했지만 변화로 나아가지 않은 것이며, 이는 하느님 보시기에 올바른 믿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2장 1절-13절에서 저자는 교회 내에서 발생하게 된 부유한 사람과 가난한 사람에 대한 차별 대우의 부당함을 지적합니다. 하느님께서는 가난한 사람, 부유한 사람 할 것 없이 모두를 사랑하시며 모두를 구원하고자 하십니다. 그리고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 사회적 약자로서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을 더 가까이 하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을 차별한다면 이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행동이며, 하느님 심판의 대상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중요한 계명으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이야기하셨고, 바오로 사도가 이웃에 대한 사랑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이야기했던 것처럼 참믿음을 고백하는 사람들은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2장 14절-26절에서는 같은 맥락에서 믿음과 실천의 문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참된 믿음은 말로 하는 고백이나 거룩한 느낌 또는 감정을 넘어서서 선한 행동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는 믿음은 아무 소용이 없으며, 그러한 믿음은 죽은 믿음으로 타인은 물론 믿음을 지닌 사람조차도 구원할 수 없습니다. 하나뿐인 아들 이사악을 제물로 바친 아브라함이나 유다인들이 보낸 심부름꾼을 친절하게 맞아들인 예리코의 창녀 라합은 모두 다 이웃 사랑이라는 실천으로 자신의 믿음을 드러냈고, 하느님께서는 이를 의로움을 받아주셨습니다.
이어서 3장에서는 하느님을 찬미하는 사람의 입에서 타인을 험담하거나 비난하는 말이 나와서는 안된다고 말하면서 말을 조심히 할 것을 당부합니다. 또한 세속적인 세상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주시는 참지혜를 청하면서 온유하고 착한 마음을 지닐 것을 권고합니다. 그때 평화롭고 온유하며, 편견과 위선을 넘어서 자비와 좋은 열매가 빚어질 것입니다.
4장은 공동체 안에서 분란의 원인이 되는 여러 욕정과 욕망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만족할 줄 모르는 세속적인 욕심보다 더 크고 좋은 것을 당신 은총으로 베풀어주시니 유혹에 맞서 하느님과 하느님의 것을 선택해야 합니다. 그리고 심판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시니 형제를 심판하거나 헐뜯지 말고 기도해주어야 하며, 사치와 쾌락에 빠지거나 이를 자랑하지 말고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일을 성실하게 해나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5장에서는 자신들만을 위해 부를 축적하는 부자들에 대해서 단호하게 경고한 뒤 주님께서 재림하실 마지막 날을 기다리며 굳은 마음으로 겸손과 사랑의 실천으로 이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라고 당부합니다. 또한 공동체 가운데 함께 아픔과 기쁨을 나누고, 서로를 사랑하고 용서하면서 살아가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야고보서는 공동체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 지녀야 할 공동체 윤리와 사회 윤리를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실천적 측면과 연결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말씀의 우물] 다니엘 안에 있는 거룩한 영
다니엘서는 히브리어, 아람어, 그리스어 본문까지 모두 세 가지 언어로 쓰였습니다. 오늘 우리가 보는 다니엘서 1장부터 14장까지 전체가 다 쓰여서 최종 편집된 시기는 기원전 164년쯤으로 볼 수 있습니다.
셀레우코스 왕국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os IV Epiphanes)의 그리스화 정책 아래 억압당하며 죽어가는 이들이 속출할 무렵 부활 희망이 분명하게 등장합니다. 사실 구약성경 전체에서 우리 개인의 부활에 대한 약속이 명시적으로 나오는 구절은 다니엘서가 처음입니다. “또 땅 먼지 속에 잠든 사람들 가운데에서 많은 이가 깨어나 어떤 이들은 영원한 생명을 얻고 어떤 이들은 수치를, 영원한 치욕을 받으리라.”(다니 12,2)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의 유다교 말살 정책의 흔적이 곳곳에 나타납니다. “그때에 사람들이 몰려와서, 다니엘이 그의 하느님께 기도와 간청을 올리는 것을 발견하였다.”(다니 6,12) 그 즉시 다니엘은 임금에게 고발당해 사자 굴에 던져집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오히려 그를 악의로 고발한 이들이 사자 굴에 던져져 죽게 됩니다.(다니 6,15-29 참조)
그즈음 바빌론 어느 곳에 수산나라는 미모의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다니 13,1-64 참조) “수산나는 매우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주님을 경외하는 여인이었다. 수산나의 부모는 의로운 이들로서 그 딸을 모세의 율법에 따라 교육시켰다.”(다니 13,2-3)
그 무렵 유다 원로 둘이 부정한 마음을 품고서 수산나와 정을 통할 기회를 엿보다가, 수산나가 혼자 정원에서 목욕할 때를 알아채고, 다가가 불륜을 저지르려 합니다. 수산나가 거절하자, 원로들은 큰 소리를 지르면서 수산나가 어떤 젊은이와 정을 통하려 했다고 오히려 수산나에게 자기들의 죄를 뒤집어씌웁니다.
꼼짝없이 죽임을 당하게 된 수산나는 억울함을 주님께 호소하며 기도를 드립니다. “아, 영원하신 하느님! … 이자들이 저에 관하여 거짓된 증언을 하였음도 알고 계십니다. 이자들이 저를 해치려고 악의로 꾸며낸 것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는데, 저는 이제 죽게 되었습니다.”(다니 13,42-43)
주님께서는 수산나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사람들이 수산나를 처형하려고 끌고 갈 때, 하느님께서는 다니엘이라고 하는 아주 젊은 사람 안에 있는 거룩한 영을 깨우셨다.”(다니 13,45) 혜성처럼 등장한 다니엘, 성령의 인도를 받은 다니엘은 사형 집행을 멈추라고 소리 지릅니다. “신문을 해 보지도 않고, 사실을 알아보지도 않고, 어찌 이스라엘의 딸에게 유죄 판결을 내릴 수가 있습니까?”(다니 13,48)
다니엘은 타락한 두 원로 재판관을 갈라놓고서 ‘어떤 나무 아래에서 수산나가 관계하는 것을 보았는지’ 따로따로 묻습니다. 한 원로는 ‘유향나무 아래’라고 대답하고, 다른 원로는 ‘떡갈나무 아래’라고 다른 대답을 하는 바람에 그들의 거짓이 들통납니다. 그 결과 수산나는 무죄로 풀려나고, 두 원로는 유죄 판결을 받아 처형되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깨어 있으면서 의롭게 살 때, 우리 안에 계시는 주님과 그분의 영이신 성령께서 우리를 통하여 우리 주변을 정화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다시 만난 신약 성경] 표징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처음으로 갈릴래아 카나에서 표징을 일으키시어, 당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
요한 복음의 전반부(1-12장)를 흔히 표징의 책이라고 하고 이 부분에 기록된 표징이 일곱 개라는 것을 헤아리지만, 복음서 저자는 스스로 예수님의 표징들을 모두 기록했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듯합니다. 2장에서는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을 포도주로 바꾸신 표징을 이야기하고는 성전 정화에 대해 말할 뿐인데, 그다음에 바로 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그분께서 일으키신 표징들을 보고 그분의 이름을 믿었다”(요한 2,23)라고 하니까요.
첫 번째 표징인 카나의 혼인 잔치에 관한 본문은, 천천히 읽어 보면 많은 의문을 품게 됩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이상하고, 복음의 다른 장면들과도 색깔이 많이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이번에 복음을 읽으면서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다고 하시면서 왜 표징을 보여주신 걸까요?
교과서 같은 설명을 좀 벗어나 보겠습니다. 보통은 요한 복음 1-12장을 표징의 책이라고 하고 13장 이후를 영광의 책이라고 하면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때가 그분의 영광이 드러나는 때였다고 봅니다. 그런데 사실은 2장에서도 그분의 영광을 본 사람들이 있는 것이지요. (요한 복음 1,14에서도 “우리는 그분의 영광을 보았다”라고 했습니다). 그 영광은 누가 보았을까요? 기적을 직접 겪은 것은 물을 떠온 사람들입니다. 80리터 이상 되는 물동이가 여섯 개였으니 상당히 많은 물을 길어야 했을 텐데 별다른 이의를 제기했다는 말도 없고, 포도주의 양도 엄청난데 그런 놀라운 일을 보고서도 어떤 반응을 보였다는 말이 없습니다. 영광을 보고 믿었다면 ‘그들’이 믿었어야 할 것 같은데, 복음서는 그들이 아니라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요한 2,11)라고 말합니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습니다. 탈출기에서도 표징이라는 표현을 쓴다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이집트 땅에서”(탈출 7,3), “그들[이집트인들] 한가운데에”(탈출 10,1), “그들[이집트인들]에게”(탈출 10,2) 표징을 일으키십니다. 그러나 이집트인들이 하느님을 믿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내가 주님임을 너희가[이스라엘이] 알게 하려는 것이다”(탈출 10,2).
요한 복음에서, 표징에 대한 말씀들 가운데 가장 충격적인 것은 “예수님께서는 그들 앞에서 그토록 많은 표징을 일으키셨지만, 그들은 그분을 믿지 않았다.”(요한 12,37)라는 마지막 결론입니다. 모세 때에 이집트인들이 강력한 표징들을 보고도 믿지 않았던 것처럼, “세상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요한 1,10). 하지만 그분은 당신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권한을 주셨다”(요한 1,12). 어쩌면 표징은, 표징을 행하시는 분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것일 뿐만 아니라 그 표징을 보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드러내는 것이라고도 하겠습니다. 카나의 혼인 잔치에서는, 표징을 눈앞에서 보고서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이들과 그 표징에서 “아버지의 외아드님으로서 지니신 영광”(요한 1,14)을 알아보는 사람들이 드러납니다. 복음을 읽는 오늘의 우리도 영광을 알아보고 믿음에 이를 수 있도록 비추어 주시기를 기원해 봅니다.
[성경]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아멘.” 하고 마무리합니다. 사도 바오로도 같은 방식으로 축원하셨습니다. “평화의 하느님께서 여러분 모두와 함께 계시기를 빕니다. 아멘.”(로마 15,33) ‘아멘’이라는 말에 기도나 축원으로 빌었던 내용이 확실히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이 담겨 있다고나 할까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와 달리 먼저 ‘아멘.’이라고 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는 구절은 마태오 복음에서 여기서 가장 먼저 언급되는데, 그리스어로 ‘아멘 레고 휘민(ἀμὴν λέγω ὑμῖν)’입니다.
여기서 아멘은 ‘진실로’란 뜻입니다. 우리가 ‘정말이야.’ 하면서 자기 말이 사실이라는 것을 강조할 때 쓰는 어투입니다. 예수님도 당신께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청중에게 확고히 심어주려 하셨던 거죠. 무슨 메시지일까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으리라는 겁니다. 그 배경으로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라고 거듭 강조하기까지 합니다.
‘하늘과 땅’은 서로 대립하는 개념으로 ‘창조 세계 전체’를 가리키는 히브리식 관용 표현입니다. 모든 것이 없어져 새로 완성되기 전까진 율법을 임의로 해석하거나 무효화시키려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죠.
당대에 사람들이 율법을 대하는 태도는 아주 달랐습니다. 헤로데를 보좌했던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의 탄생 장소를 알려주는 참고문헌으로만 여겼습니다.(마태 2,4-6 참조) 다른 율법 학자들은 그들의 수입과 직결되는 규정은 준수하라며 강조하면서도 율법의 근본정신은 소홀히 하기도 했습니다.(마태 23,23 참조)
그러니 예수님께서 ‘아멘’(진실로)이라고 강조하면서까지 율법 준수의 중요성을 역설하실 수밖에요. 율법에 대해서 조금 안다고 해서 어떤 계명은 소홀히 여겨 어기는 일이 있어서는 안 되니까요. 더 나아가 예수님은 율법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를 여섯 가지 예시로 제시해 주십니다.(마태 5,23–48 참조)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하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악인에게 맞서지 마라.”(마태 5,38–39)
청중이 들은 말씀을 명제로 먼저 내세운 다음에 예수님의 말씀을 반명제로 내세운다고 해서 학계에서는 이를 대당 명제라고 합니다. 이 대당 명제에서 예수님은 율법 규정을 확장하거나 심화시키시기도 하고,(제1, 제2, 제5 대당 명제), 축소하거나 폐지하시기도 합니다.(제3, 제4, 제6 대당명제) 통념이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율법 규정을 자유자재로 다루면서도 완성하실 수 있으셨던(마태 5,17 참조) 예수님! 그분을 조금이나마 닮을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말씀의 우물] 그리스도인이 되어감에 대하여
‘그리스도인(독일어 christsein)’과 ‘그리스도인이 되어감(독일어 christwerden)’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우리는 세례성사로 이미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이는 존재론적 차원의 표현입니다. 세례를 통하여 본당 교적에 등록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신자가 된 우리는 모두 완성된 신자일까요?
‘신자인가? 비신자인가?’라는 물음, 곧 존재론적인 물음에는 ‘예, 신자입니다!’라고 마땅히 응답해야겠습니다. 그러나 목적지에 도달한 신자, 곧 성인의 경지에 도달한 참신자가 되어 ‘이제는 회개도 발전도 더는 필요하지 않은 완전한 신자가 되었는가?’라는 물음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예’하고 응답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실존적 차원에서는 아직 더 배우고 더 회개하고 매일 조금씩 더 노력하며,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발전해 나가는 과정 안에서 우리 모두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우리는 세례성사로 그리스도인이 되었지만 아직 보다 더 나은 신자가 되어가는 과정 곧 나그네 살이 중에 있는 것이지요.
그렇다면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도록(christwerden) 힘껏 노력해야 할 터입니다. 그런 과정 안에서 나의 성화뿐 아니라 이웃의 회개와 성화에도 기여하도록 힘써야 하겠지요?
이와 같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주님을 뵙게 되는 지복직관(至福直觀)의 경지에 이르기까지 오늘도 내일도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천국에서, 주님 품 안에서 그분을 뵙고 누리게 될 영원한 삶을 지복직관이라 이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어떻게 될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도 그분처럼 되리라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그분을 있는 그대로 뵙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1요한 3,2)
주님을 믿는 이들은 “그분(하느님)의 얼굴을 뵐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이마에는 그분의 이름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묵시 22,4) 이마에 이름을 적어 놓는다는 이야기는 “인장 반지를 새기듯, 그(아론, 훗날 대사제) 위에 ‘주님께 성별된 이’라고 새겨라”(탈출 28,36)라는 전통에서 유래하죠.
베드로의 첫째 서간 저자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멈춰있지 말고 성장하여 보다 나은 신앙인이 되라고 권고합니다. “모든 악의와 모든 거짓과 위선과 시기, 그리고 모든 중상을 버리십시오. 갓난아기처럼 영적이고 순수한 젖을 갈망하십시오. 그러면 그것으로 자라나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 주님께서 얼마나 인자하신지 여러분은 이미 맛보았습니다.”(1베드 2,1-3)
베드로의 첫째 서간 속 주요 주제 가운데 하나는 그리스도인의 성장 곧 ‘보다 나은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순종하는 자녀로서, 전에 무지하던 때의 욕망에 따라 살지 말고, 여러분을 부르신 분께서 거룩하신 것처럼 여러분도 모든 행실에서 거룩한 사람이 되십시오.”(1베드 1,14-15)
예비신자 교리를 마치고 세례성사를 받으면 그때부터 온 힘을 다해 ‘참신자’가 되어가도록 노력해야 하겠지요? 이제(오늘)부터 거룩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이 말씀은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더없이 소중한 가르침입니다.
[다시 만난 신약 성경]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신약 성경은 왜 썼을까?”라는 질문으로 연재를 시작했었지요. 요한 복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질문을 던져 봅니다.
2026년에 그리스도인으로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표현이 너무 익숙하고, 예수님은 당연히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서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과 같은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은 먼저 한 인간이셨습니다. 그분이 땅에서 걸어 다니시는 것을 눈으로 보았으니까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몇십 년이 지났을 때도, 인간 나자렛 예수님에 대한 기억은 루카 복음 첫머리에 언급된 것과 같은 증인들을 통해 전해졌습니다. 예수님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고, 그분을 따르는 무리에 관심을 갖게 된 이들은 그분에 대한 기록을 찾아보고 그분의 가르침과 행적을 찾아보았을 것입니다. 요한 복음이 작성된 때는 이미 바오로 사도의 서간들이 있었고 다른 복음서들도 있었습니다. 그 복음서들에서는 예수님의 행적에 놀라면서 “저분이 누구시기에?”라고 묻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요한 복음은 그 첫 장에서부터, “저분이 누구시기에?”라고 묻지 않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한처음에 말씀이 계셨다. 말씀은 하느님이셨다.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사셨다.”(요한 1,1.14)라고 선포합니다. 소문을 들었던 그분, 놀라운 일들을 일으켰다고 하고 많은 무리가 따랐던 그분, 십자가에 달려서 돌아가셨고, 또 부활하셨다고 하는 그분이 하느님이시고, 한처음에 이미 하느님과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신 바로 그 말씀이 사람이 (원문 그대로는 “육이”) 되시어 우리 가운데 머무셨다는 것입니다.
요한 복음이 작성되던 때에, 그리고 그 이후에도 있었던 이단들을 생각하면 이 말들은 더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나자렛 예수님을 그저 한 인간으로만 여기고 신성을 부인하면서 그 예수님이 세례를 받으실 때 ‘그리스도’가 그 위에 내려와서 얼마 동안 머물고 그 ‘그리스도’는 나중에 다시 떠나갔다거나, 아니면 그분이 정말로 인간이 아니었고 하느님이 다만 인간의 겉모습으로 나타나셨다는,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신성을 부인하거나 인성을 부인하는 여러 주장들에 맞서, 요한 복음 1장은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기본적이면서도 가장 중요한 내용을 밝혀 줍니다. 그분이 참으로 하느님이시고 (그래서 마리아에게서 태어나신 때가 아니라 한처음부터 하느님과 함께 계셨고), 또한 참으로 사람이시라는 (그래서 겉모습만이 아니라 정말로 육이 되셨다는) 내용을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려고 이 복음서 전체를 쓴 것이기도 하지요.
그리스도론이라는 말만 들어도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온갖 신학 논쟁이 떠오르지만, 이것은 내가 정말 그리스도교 신자인지 아니면 마음대로 만들어 놓은 종교를 따르고 있는지 분별하는 기준이기도 합니다. 잘못하면 스스로도 모르고 겉으로 티도 나지 않으면서 사실은 잘못된 신앙에 빠져있을 수도 있습니다. 요한 복음 1장을 한 구절씩 읽으면서 거기에서 말하는 내용을 모두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다면, 이것은 우리의 신앙을 확인하는 지표가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