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복음말씀과 묵상

[말씀의 우물] 마르타의 선택

작성자은총의샘|작성시간26.06.13|조회수36 목록 댓글 0

[말씀의 우물] 마르타의 선택

- 이탈리아 화가 안드레아 바카로의 <마르타와 마리아>. 17세기 나폴리 화파답게 작품에서 강렬한 빛과 어둠의 대비를 사용했다. 분주하고 행동적으로 그려진 마르타(오른쪽)와 달리, 마리아는 경건하고 평온한 표정이다. 주님께 경청하는 몫만큼 중요한 건 없다는 바카로의 신앙이 담겼다.

길을 가시던 예수님을, 마리아의 언니 마르타가 집으로 모십니다.(루카 10,38-42 참조) 마르타는 예수님 시중을 드느라 분주합니다. 반면 동생 마리아는 조용히 예수님 발치에 앉아서 그분 말씀을 듣느라 여념이 없습니다.

루카복음에서 예수님 발치(발 앞)에 앉는다는 말은 그분을 따르려고 마음먹은 사람, 곧 그분 제자로서의 태도를 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와서, 마귀들이 떨어져 나간 그 사람이 옷을 입고 제정신으로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을 보고는 그만 겁이 났다.”(루카 8,35)

마르타가 한마디합니다. “주님, 제 동생이 저 혼자 시중들게 내버려두는데도 보고만 계십니까? 저를 도우라고 동생에게 일러 주십시오.”(루카 10,40) 예수님께서는 뜻밖의 대답을 하십니다. “너는 많은 일을 염려하고 걱정하는구나. 그러나 필요한 것은 한가지 뿐이다. 마리아는 좋은 몫을 택하였다.”(루카 10,41-42)

의문이 뒤따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곁에서 말씀 경청에 몰입하는 마리아의 몫만 좋다는 말일까요? 온 힘을 다해 예수님을 모시느라 땀을 뻘뻘 흘리는 마르타의 몫은 별 가치가 없는 걸까요?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의 선택이나 시중드는 일을 평가절하하지 않습니다. 시중드는 일에만 몰두하는 마르타에게, 마리아가 선택한 일 즉 주님 말씀을 경청하는 일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최고의 가치를 지닌 몫이니 그를 방해해서는 안 된다고 바로잡아 주실 뿐이죠.

그날 예수님께서는 틀림없이 마르타가 준비한 음식을 함께 나누시며 축복을 가득히 내려주고 떠나가셨을 겁니다.

복음에서 우리가 교훈으로 삼을 바는, 우리가 사는 이 세상 어떤 일보다도 예수님 말씀을 경청하는 일만큼 가치 있는 일은 없다는 사실입니다. 마르타가 예수님을 집에 모신 것도, 그분 시중을 드느라 분주한 것도 다 그분 말씀을 듣고 강복을 받기 위함이 아니었겠습니까? 그분 말씀이 이미 강복이자 은혜가 아니겠습니까?

본당에서 구역이나 가정방문 때, 함께 나눌 대화나 필요한 성사와 미사 집전에보다는, 상대에게 무엇을 대접할까에 더욱 마음을 쓰는 경우를 많이 봅니다. 아마 그럴 때 예수님께서는 마르타에게 하신 말씀을 그대로 들려주실 겁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중요하고도 반드시 필요한 것은 말씀을 경청하고 나누며 그분과 하나 되는 일이다.’

예수님의 마르타와 마리아 방문(루카 10,38-42 참조) 바로 앞에는 가장 큰 계명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루카 10,25-28 참조)과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루카 10,29-37 참조)가 나옵니다.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는 믿음에 따른 행동이 강조됩니다. ‘행동주의(Activism)’라고 일컬을 수 있겠지요.

그러나 이러한 행동 중심의 신앙생활도 결국 마르타와 마리아 이야기에서처럼 그분 말씀을 경청하며 그분과 하나 되는 경건주의(Pietism)’에서 꽃을 피우게 되지 않겠습니까? 개화(開花)의 절정은 바로 미사성제 안에서 영원하신 분을 모시는 성체성사의 신비에서 이뤄지리라고 저는 봅니다.

그들(초대교회 신자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 2,42)

 

 

 

[순간포착! 성경에 이런 일이] 중풍병자를 옮긴 네 사람

 

기도할게.” 어려움을 겪고 있는 누군가와의 대화 끝에 한 이 말을 곱씹어봅니다. 기도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믿기에 당연히 그를 위해 기도도 하고 미사를 봉헌하며 지향도 두지만, 끝내 솟구쳐오는 질문을 떨칠 수가 없을 때가 있습니다. ‘혹시 그를 위해 더 해줄 일은 없었는가?’, ‘혹시 기도한다는 말로 그를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더 없다는 나의 무력감을 정당화하려 하지는 않았는가?’

중풍병자가 예수님 앞에 실려옵니다. 복음서는 네 사람이 인파를 뚫고 나아갈 수가 없어서 예수님이 계신 집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예수님 앞에 내려 보냈다고 전합니다(마르 2,3-4 참조). 의학이 발달한 이 시대에도 중풍은 무서운 질병인 만큼 이 병자는 무거운 절망에 짓눌려 있었을 것입니다. 중풍병자를 옮긴 네 사람의 마음도 헤아려 봅니다. 그들이 극복해야했던 가장 큰 어려움은 절망에 빠진 병자에게 예수님을 만나면 그가 나으리라는 믿음을 불어넣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혹시 예수님도 고쳐주지 못하면 어떡하나, 그래서 병자가 더 큰 상심에 빠지면 어떡하나이런 생각들과 싸우면서 그들은 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가지 않았을까.

분명 그들은 중풍병자가 나으리라는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 그들 스스로가 먼저 예수님을 믿는 과정을 겪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지 않았다면 그들은 예수님을 보러 온 많은 인파의 등 뒤에서 낙담한 채 발길을 돌릴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의 믿음은 결국 병자를 예수님 앞에 데려다 놓는 데 성공하게 만듭니다. 그것도 남의 집 지붕을 뚫고 예수님을 비롯한 여러 사람에게 지붕의 흙먼지를 뒤집어쓰게 만드는 민폐를 감수하면서 말입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웃으셨다는 표현은 찾아볼 수 없지만 예수님은 틀림없이 이 순간에 불쾌해하지 않으시고 크게 웃으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침내 병자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자기가 실려온 들것을 지니고 걸어 나갈 만큼 건강해져서 돌아갑니다. 중풍이 나은 사람 못지않게 감격했을 네 사람의 모습을 상상해 보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입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믿음과 기도가 우리를 어떻게 행동하게 만드는지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이는 삶의 현실, 혹은 죄책감에 짓눌려 선하신 하느님에 대한 희망을 갖기가 대단히 어려워 보이는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기도할게.”라는 말이 단지 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 없는 상황에서 우리 자신의 무력감을 달래기 위해 하는 도피처 같은 말이 되지 않으려면 무엇보다 믿음을 더해 주시기를 간절히 청해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간절한 믿음이 행동으로 결실을 맺도록 작은 용기를 낼 수 있다면 예수님께서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마르 2,5)라는 복음이 우리 삶에서 실현되는 복된 경험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다시 만난 신약 성경] 엠마오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가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24장에서 두 제자는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오로 갑니다. 이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이 두 사람은 나자렛 사람 예수님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로 믿고 있었고, 그분이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했습니다(24,19.21). 그런데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시고 이미 사흘째가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처음에는 믿음도 있고 희망도 있었는데, 믿고 바랐던 것과 다른 사태가 벌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예수님을 찾아 나서지도 않습니다. 이미 여자들이 무덤에 갔다가 천사들을 만났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도, 더 알아보거나 예수님을 찾아보려는 아무런 시도도 하지 않고 예루살렘을 떠나갑니다. 사도들 역시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지만 적어도 베드로는 그 말을 확인하러 무덤으로 달려갔다는 것과도 대조됩니다(24,12).

여기에 문제가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예수님은 이미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을 알고 그곳을 향해 가셨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지 않고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24,20) 한 것이 마땅하고 당연한 일이었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른 가능성은 없었다고 말할 수도 없습니다. 인간의 죄가 필연적인 것은 아니지요. 하지만 예수님은 이들에게,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24,26)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근거는 구약 성경입니다. 예언자들이 당신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는 것입니다. 예루살렘이 예언자들을 거부해 온 역사를 돌아본다면(13,34 참조), 예수님의 죽음은 그분이 메시아이심을 의심하게 할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 두 제자는 구약 성경에 다시 귀를 기울이면서 변화되기 시작하고, 예수님이 빵을 떼시는 순간에는 부활하신 분을 알아보기에 이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어정쩡한상태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에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다른 목적지에 도달한 것도 아니고, 그저 예루살렘을 떠나가는 중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것을 믿고 있지도 않습니다. 루카 복음 24장은 어쩌면 이들과 똑같이 어정쩡한상태에 있는 이들을 위한 말씀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셨지만(그것이 어제이든 이천 년 전이든),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에 관한 복음을 듣지 못한 것도 아니지만, 아직 부활하신 분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 복음은 믿음과 희망에 이르는 길을 알려 줍니다. 예루살렘을 떠나가고 있던 이들, 믿음에서 오히려 멀어지고 있던 이들이 어떻게 길을 돌이키게 되었는지를 보고, 우리도 그 길을 따라가게 해 줍니다. 그리고 그 비결은 말씀과 성찬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을 비추어 주는 말씀 안에서,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요약해 주는 성찬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께 일어난 일이 뜻밖의 일이거나 믿음을 잃게 만드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엠마오로 가던 길을 돌이켜 다시 예루살렘을 향한 이 두 제자의 발걸음은, 방황하는 우리가 뒤따라갈 지침이 됩니다.

이렇게 해서 루카 복음은 다시 예루살렘에서 끝나고, 그 이후의 이야기는 사도행전에서 이어집니다.

* 본문에 인용된 성경구절은 모두 루카 복음입니다.

 

 

 

 

 

[성경] 행복하여라

 

우리는 누구나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일까요? 예수님께서 산상 설교에서 여덟 번이나 연속해 행복 선언을 하실 때 기분이 좋아집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이후로 대상만 바뀐 상태로 선포가 나열됩니다. 그 대상은 슬퍼하는 사람들, 온유한 사람들,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자비로운 사람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등입니다.

사회 통념과는 아주 다르죠? 아파트가 몇 채라든가 현금과 주식이 얼마라든가 하는 식으로 재산에 대해서는 일절 언급하지 않고, 오직 사람들의 상태나 품성에만 초점을 맞추십니다. 인간적인 풍요가 아니라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다는 점에 강세를 둡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마태 5,3)은 곧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하느님의 인정을 받았다.’라는 뜻인 셈이죠. 남들이 알아주지 않더라도 하느님께서 알아주기만 하면 행복한 이들이죠.

그들에게는 합당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하늘 나라가 주어지고, 슬퍼하는 사람들은 위로받게 되고, 온유한 사람들은 땅을 차지하리라는 약속이 주어집니다. 로마의 식민지 시절이라 아무것도 바랄 수 없는 사람들에게 희망의 불씨를 피워주셨던 것이죠. 그런데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의 보상이 모두 하늘 나라라는 데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는 어떤 공통점이 있기에 똑같은 보상을 받는 걸까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내적인 성향이 결핍된 상태를 나타냅니다. 하느님으로 채워져야만 결핍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들이죠. ‘의로움은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것을 뜻합니다. 따라서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하느님의 뜻에 따르다가 고난을 겪는 이들입니다. 그들에게 하늘 나라라는 보상이 주어지는 것은 당연한 결과겠지요.

여기서 하늘 나라 보상은 다른 보상과는 달리 현재 시제로 표현됩니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 5,3.10) 둘째부터 일곱째 보상은 모두 미래에 주어질 보상인데 말이죠.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마태 5,4)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마태 5,5) 왜 첫째와 여덟째 보상만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임을 강조했을까요?

하늘 나라는 예수님께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라고 하셨듯이 가까운 미래에 벌어질 일로 선포되었습니다. 그런데 참행복 선언에서 그 하늘 나라를 지금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십니다. 하느님으로 채워져야만 결핍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을 따르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들은 이미 하늘 나라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거죠. 우리 사회에서 그 행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말씀의 우물] 하느님 나라는 어디에?

하늘나라가 공간적 개념만 나타내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하늘나라는 진정 우리 마음 안에또는 마음속에만들어 있을까요? 이 물음에 우리 마음 안에있다고 대답하는 분들이 적지 않을 터입니다.

예수님께서 답을 주십니다.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와 있는 것이다.”(마태 12,28)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느님 나라가 너희 마음에또는 너희 마음속에가 아니라 너희에게(고대 그리스어로 너희 위에 또는 너희 둘레에)’ 와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는 너희 가운데에 있다”(루카 17,21)고도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시간이나 장소적 의미만이 아닙니다. 시공간을 훌쩍 뛰어넘어 아주 새로운 시대가 활짝 열렸음을 뜻합니다. 예수님 등장으로 새로운 시대, 구원의 시대 곧 하느님 나라가 본격적으로 움터왔습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사탄아, 물러가라.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주 너의 하느님께 경배하고 그분만을 섬겨라.’ 그러자 악마는 그분을 떠나가고, 천사들이 다가와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마태 4,10-11)

마귀의 손아귀에서 신음하던 이들이 해방되고 치유되어 빛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파견하신 일흔두 제자가 돌아와서 활동 경과를 보고하자 그분께서 친히 증언하십니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루카 10,18)

이와 같이 예수님의 등장으로 마귀(사탄)의 시대는 사그라집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하셨다.”(마태 10,1)

신약성경에서 더러운 영은 악마, 마귀, 악령 등과 맞바꾸어 놓을 수 있는 용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악령 퇴치 권한뿐 아니라, 갖가지 병자와 허약한 이들에 대한 치유 권한까지도 부여받습니다.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주었다.”(마르 6,12-13)

내가 하느님의 영으로”(마태 12,28) 대신에, 루카는 병행 구()에서 내가 하느님의 손가락으로 마귀들을 쫓아내는 것이면”(루카 11,20)이라고 전해줍니다. 이 말씀은 모세의 기적들을 부정하던 파라오의 요술사들 이야기를 떠올리게 해줍니다.

모세의 손을 통하여 기적을 일으키시는 주 하느님의 위력을 체험한 파라오의 요술사들은 본의 아니게 얼떨결에 자신들의 믿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이것은 하느님 손가락이 하신 일입니다.”(탈출 8,15) 그와 같이 놀라운 기적들은 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며 바로 그분 손가락이, 곧 그분께서 친히 이루신 그분의 작품이라고 그들도 인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그 지침을 줍니다. 하느님 나라는 먹고 마시는 일이 아니라, 성령 안에서 누리는 의로움과 평화입니다.그러니 평화와 서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는 일에 힘을 쏟읍시다.”(로마 14,17-19)

 

 

 

[다시 만난 신약 성경] 양 한 마리

 

예루살렘을 향하여 가는 길에서, 잠시 멈추어 봅시다. 루카 복음 15장에는 되찾은 양과 되찾은 은전, 그리고 되찾은 아들에 대한 말씀이 나옵니다. 되찾은 양 한 마리에 대한 말씀은 마태오 복음에도 나오지만, 다른 두 비유는 루카 복음에만 들어있는 고유한 부분입니다. 특히 되찾은 아들에 대한 말씀은 루카 복음이 보여주는 하느님의 모습을 대표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이 비유들을 정말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도, 어딘가 매끄럽게 넘어가지 못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되찾은 양의 비유에서는 아흔아홉 마리를 광야에 놓아둔 채”(루카 15,4)라는 구절이 걸림돌이 됩니다. 아흔아홉 마리를 목자 없이 내버려 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서면, 오히려 그 아흔아홉 마리 가운데 여러 마리를 잃어버리게 되지 않을까요? (저는 이 복음을 들을 때마다 그 생각을 합니다.) 한 마리를 구하자고 여러 마리를 방치해도 되는 걸까요?

되찾은 아들의 비유에서는 언제나 큰아들이 마음에 걸립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때에는 자비로운 하느님 아버지에 대해 말씀을 하신 것이었지만, 인간의 눈에는 아버지가 큰아들에게 부당하게 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충실하게 살았던 큰아들에게는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15,29) 없는데, 재산을 들어먹은 작은아들에게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주시는 것이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실상 적지 않은 이들이 이 복음을 읽으면서, 자신이 큰아들의 위치에 있다고 느낍니다. 스스로 아버지만큼 관대하고 자비롭다고 느끼기는 쉽지 않지요. 그리고 어쩌면 그것은 당연합니다. 우리가 하느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충실한 큰아들이라고 생각하는 경우는 많습니다. 쉽게 확인을 해 본다면,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해 화를 내는 경우가 많지요. 사람들이 같이 살아가다 보면, 어떤 일에 대해 흔히 두 부류로 갈라집니다. 잘못하는 사람들과, 그것을 보고 화를 내는 사람들입니다. 잘못하지도 않고, 잘못하는 것을 보고 화를 내지도 않기는 참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 큰아들 부류에 속하는 사람은, 복음을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아버지가 작은 아들을 용서하는 것이 화가 나는 것이지요. 특히나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오셨다고 했습니다(4,18). 큰아들은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나중에 자캐오에게 예수님은, “사람의 아들은 잃은 이들을 찾아 구원하러 왔다”(19,10)고 하십니다. 자캐오는 하늘 나라에 가까이 있었습니다. 작은아들도 하늘 나라에 가까이 있었습니다. 용서를 베푸시는 하느님의 자비가, 다른 사람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임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비유도 루카 복음에 고유한 부분이지요(18,9-14). 스스로 의인이라고 생각했던 바리사이는, 정말로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하고 십일조를 바쳤지만 의롭게 되지 못했습니다. “그 바리사이가 아니라 이 세리가 의롭게 되어 집으로 돌아갔다”(18,14).

되찾은 양의 비유를 기쁘게 듣지 못하는 것은, 내가 그 길 잃은 양 한 마리이고 잃었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하느님의 자비를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임을 깨닫게 될 때, 비로소 루카 복음은 나를 위하여 선포된 말씀이 될 것입니다.

* 본문에 인용된 성경구절은 모두 루카 복음입니다.

 

 

 

 

[성경 다시 보기] 마르코 복음서의 마무리

 

마르코 복음서가 16,20으로 끝난다면, 마지막 부분에 마르코 복음의 짧은 끝맺음이란 소제목으로 된 이것은 또한 무슨 말인지, 의문이 일어납니다.

3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마르코는 16,8로 끝난다. 2) 16,20으로 끝난다. 3) 16,8에 이어 짧은 끝맺음으로 마무리된다.

마르코 16장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와 살로메라는 안식일이 지나자, 무덤을 방문하러 가서 하얗고 긴 옷을 입은 웬 젊은이가 하는 말을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일러라는 전달을 받습니다. 그 내용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예수님을 찾지만, 그분은 되살아나서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그분은 전에 말씀하신 대로 여러분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가실 터이니 거기서 그분을 뵙게 될 것이다. 전에 하신 말씀이란, 최후 만찬 때 베드로의 배반을 예고하시며 하신 말씀인데, “그러나 나는 되살아나서 너희보다 먼저 갈릴래아로 갈 것이다”(14,28). 이런 분부를 받은 그녀들은 무덤에서 나와 달아났고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려 두려워서 아무에게도 말을 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16,8).

 

1) 오래된 필사본일수록 마르코 복음서는 168절로 끝난다고 합니다. 마르코 복음서가 그 무덤을 찾아간 여자들이 그 젊음 이의 말을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전달하지 않고 무서워 떨면서 도망갔다는 것으로 끝나버리면, 혹시 그 후의 대목들,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과 제자들의 복음 선포의 사명 같은 대목들이 떨어져 나간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16,8로 마르코 복음이 끝날 수 있다는 이론은 이렇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려면, 그분께서 생전에 말씀하신 대로, 갈릴래아에 가서 그분을 만날 수 있으니, 거기서 만나면 된다는 것입니다. 갈릴래아는 그분께서 살아생전에 주로 활동하신 곳인데, 말씀과 기적들을 통해 당신이 하느님의 아들로 그리고 그 메시아, 구세주임을 보여 주신 곳입니다. 그러니까 그분의 말씀과 행적들을 묵상해 보면,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자신도 모르게 그분께서 우리들의 마음 안에서 다시 살아 활동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그분의 부활(復活: 다시 활동하심)입니다. 그래서 부활의 체험을 스스로 직접 하라는 것으로 마르코 복음이 마무리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밑에서 그분의 죽음을 목격한 유다인이 아닌 이방인인 백인대장이 직접 체험한 것처럼 참으로 이 사람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셨다(마르 15,39).

 

2) 이런 설명들이 그래도 미흡하고 부족하다고 느낀 후대 필사본들은,

) 마리아 막달레나가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 제자들에게 가서 그 소식을 전하고(16,9-11), ) 루카의 엠마오 사건처럼, 다른 두 제자가 시골로 가다가 그분을 뵙고 돌아와 다른 제자들에게 알리고(16,12-13),

) 그분께서 마침내 식탁에 앉은 열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셔서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라는 사명을 주시고(16,14-18),

) 그리고 그분은 승천하시고 제자들은 가서 복음을 선포하셨다(16,19-20)는 내용들을 마태오, 요한, 루카, 그리고 사도행전을 참고하여 마르코 복음서에 첨가하여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3) 세 번째는 2)의 사건들을 다른 복음서에서 잘 서술하고 있으니 건너뛰고, 16,8에 이어 무덤을 방문했던 그 여자들은나중에 정신을 차려 베드로와 그 동료들에게 그녀들이 분부 받은 얘기를 전달한 것으로 끝을 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미사 전례에서 16,9-20은 전례력에 따라 사용되고 있습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