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73 성경 통독 길잡이] 히브리서
히브리서는 헬레니즘 문화 배경을 지닌 유다계 그리스도인이 디아스포라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에 보낸 서간입니다. 편지의 수신인인 디아스포라에 거주하고 있는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초기의 열정을 잃어버린 채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모이는 모임에 참석하지 않는 등 잘못된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리고 박해의 시런 속에서 신앙의 위기를 맞이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해서 히브리서 저자는 그리스도께서 모세보다 뛰어나신 분이며, 유다교의 제사와 대사제직을 완성하신 분임을 드러내면서 그리스도를 통해 옛 계약이 새 계약으로 대치되었음을, 아울러 신앙을 잃어가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자 서간을 작성하였습니다.
히브리서의 구조를 살펴보면 먼저 1장 1-4절은 머리말로 하느님의 아드님시며 만물의 상속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우월성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어서 1장 5절-4장 13절은 본격적으로 하느님의 아드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님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먼저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을 두고서 천사들보다 위대하신 분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천사들보다 높으신 예수님께서 죽음을 겪으신 것에 대해 저자는 하느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과 영광으로 이끄시기 위해 마련하신 조치이며, 이를 통해 거룩해진 사람들은 예수님과 한 형제가 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죽음의 권능을 지닌 악마를 당신의 죽음으로 파멸시킴으로써 모든 이들을 죽음의 굴레에서부터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또한, 그분은 하느님의 아드님으로서 하느님의 말씀을 증언하는 종인 모세보다 뛰어난 분이십니다.
4장 14절-10장 39절은 새 계약의 대사제이신 그리스도에 대한 설명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제가 아니셨지만 히브리서는 예수님을 대사제라고 부르면서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중재자 역할로 예수님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대사제는 하느님 앞에서 백성을 대표하며, 백성들 앞에서는 하느님을 대표합니다. 하지만 이들은 동시에 죄를 짓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기에 자신의 죄를 속죄하기 위해서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대표해서 하느님께 큰 소리로 부르짖으며 기도와 탄원을 올리셨고, 하느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어주셨습니다.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당신께 순종하는 모든 사람에게 영원한 구원이 되어주심으로써 구약의 대사제직을 넘어서셨습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으시며, 하느님의 약속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드러났으니 이러한 사실을 깨닫게 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 말씀에 더욱 맛들여야 하며, 종말론적 희망을 견지하면서 성숙한 신앙을 고백해야 합니다. 과거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선택을 받은 사람이었지만 정의의 임금이며 평화의 임금인 멜키체덱에게 나아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모든 것의 십분의 일을 봉헌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살아 계시며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이시기 때문에 영구한 사제직을 지니시며, 당신을 통해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또한 아무런 죄가 없으시기에 자신의 죄의 용서를 위해 먼저 제물을 바쳐야 하는 다른 대사제들과 달리 당신 자신을 바치실 때 이 모든 일을 한 번에 이루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더 나은 약속을 바탕으로 구약의 옛 계약을 넘어서시며, 구약의 옛 계약을 완성하는 새 계약의 중재자로 자리하고 계십니다. 아무런 흠이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사람이 만들지 않은 완전한 성막으로 들어가시어 당신 자신을 제물로 바치시면서 단 한 번 흘리신 피로 모든 사람의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을 기다리는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 위해 죄와 상관없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반면 대사제들이 바치는 제사와 제물은 죄를 기억하게 할 뿐 그 자체가 죄를 없애지는 못합니다. 율법 또한 장차 주어질 구원을 맞이할 수 있도록 삶을 준비하게 하지만 구원의 징표가 되지 못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희생 제사를 통해 성소와 지성소를 나누고 있던 휘장이 사라지고 구원의 길이 열렸으니 이제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은 진실한 마음으로 충실한 신앙생활을 이어가야 합니다.
11-12장은 믿음의 완성자로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고 있습니다. 저자는 믿음을 두고서 “믿음은 우리가 바라는 것들의 보증이며 보이지 않는 실체들의 확증입니다.”(11,1)라고 설명합니다. 그리고 뒤이어 아벨,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 올바른 믿음을 고백했던 인물들을 언급하면서 이들 모두가 하느님께로부터 믿음으로 의로움을 인정받았음을 이야기합니다. 충실한 믿음으로 인해 그들은 하느님께로부터 인정받았지만 아직 약속된 것을 얻지는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약속의 실현은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통해서 이루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수많은 반대자들의 적대 행위를 견뎌내신 것처럼 우리 또한 주어진 시련을 하느님께서 허락하시는 시간으로 생각하면서 인내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한 모든 사람과 평화롭게 지내며 거룩하게 살기 위해 노력하면서 하느님의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이어가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13장에서 저자는 형제애, 부부관계, 가난의 영성, 올바른 가르침 등 참된 공동체를 이루기 위해 지켜야 할 구체적인 실천 규범들을 알려준 뒤 하느님의 축복을 전하면서 격려의 글을 마칩니다.
[말씀의 우물] 성경에서 찾는 불면 · 우울증의 치유
불면증과 우울증은 전문의를 찾아 상담과 진료로 치유되면 더 바랄 것이 없겠지만, 오늘은 성경에 뚜렷이 등장하는 경우를 통해 그 극복의 길도 찾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셀레우코스 왕국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os IV Epiphanes)가 저지른 권력 남용 사례를 지난 주간에 들려드렸습니다. 유다 민족을 말살하려던 계획이 수포가 되고 부하 장수들이 잇따라 패배하자, 그는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봅니다.
“도대체 내가 이 무슨 역경에 빠졌단 말인가? 내가 이 무슨 물살에 휘말렸다는 말인가? 권력을 떨칠 때에는 나도 쓸모 있고 사랑받는 사람이었는데….”(1마카 6,11) 그러다가 돌이킬 수 없는 과오를 찾아냅니다. “내가 예루살렘에 끼친 불행이 이제 생각나네. 그곳에 있는 금은 기물들을 다 빼앗았을뿐더러, 까닭 없이 유다 주민들을…”(1마카 6,12)
안티오코스는 다시는 유다 민족과의 전투에서 승리할 가망이 없음을 직감하고는 절망에 이릅니다. 그는 친지들을 불러 진심을 털어놓습니다.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1마카 6,10)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는 불면증 호소이며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는 우울증 호소입니다.
다른 원인에서 오는 불면증과 우울증에는 치료 방법이 따로 있겠지만, 전쟁광 안티오코스의 치료제는 ‘회개’뿐일 테죠. 그 회개가 말처럼 쉽지는 않겠지만요.
2001년 여름 전국 신학부 교수 모임 때, 통풍으로 양쪽 발이 퉁퉁 붓고 아파서, 거실에서 불과 70여m 떨어진 모임 장소조차 걸어가지를 못해 암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지금도 부족하지만 저는 2003년부터 십일조 정신으로 살며 힘을 얻고 있습니다. 잠을 제대로 못 자도, 또 우울감이 짙어 올 때도 자꾸만 은혜로운 일을 떠올립니다. 안경을 개발한 분들, 신발을 만들어 준 분들, 농어민, 자동차나 옷을 만들어 주는 분들, 의료진, 도로 건설, 건축가, 그리고 갖가지 생활용품을 만들어 주는 분들…. 제가 미처 챙기지 못하는 고마운 분들이 이렇게 많습니다.
그러면 이웃과 타인에 대한 미안한 마음, 부족했던 사랑과 배려에 죄송한 마음, 이제라도 아껴 주고 덮어 주고 감싸 주고 갚아드리고 싶은 마음도 차오릅니다. 그 모든 분께 감사드리며 축복을 빌어드리다 보니 어느 순간 마음도 몸도 가벼워지더군요. 이같이 은혜로운 마음이 우리 영혼 깊숙이 자리 잡게 되면 꿀잠도 자게 되고 행복한 마음도 그만큼 늘어나지 않겠습니까?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선종 800주년 특별 희년입니다. 희년의 기본 정신이 다음 구절에 들어있습니다. “땅을 아주 팔지는 못한다. 땅은 나의 것이다. 너희는 내 곁에 머무르는 이방인이고 거류민일 따름이다.”(레위 25,23)
참된 회개는 자기 책망이 아니라 사소한 것에도 감사를 찾을 줄 아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설령 어둠 속을 걷고 있어도 ‘하느님 곁에 머무르는’ 매 순간이 얼마나 기적과 같은지 묵상해 봅시다. 그때마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알 수 없는 힘에 귀 기울이며 점점 익숙해져 봅시다. 우리 마음도 그렇게 조금씩 아물어 갈 터입니다.
[다시 만난 신약 성경]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복음서들마다 예수님의 일생을 소개하는 방식에 차이가 있어서, 예수님의 여정도 항상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루카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했지요. 주님의 성소에서 천사가 즈카르야에게 세례자 요한의 탄생을 알리는 것이 복음의 첫 장면이었습니다. 그 후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신 예수님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봉헌되십니다. 마태오 복음에 나오는 이집트 피신 이야기는 루카 복음에는 나오지 않습니다. 고향 나자렛으로 가신 다음에도 “예수님의 부모는 해마다 파스카 축제 때면 예루살렘으로 가곤 하였다.”(2,41)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 후에 요르단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루카 복음에서는 예수님이 갈릴래아에서 활동하신 기간이 3년이라는 것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공생활 3년이라는 것은 요한 복음에서 나타납니다.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은 갈릴래아에 계시다가 한 번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여러 해 전 경주에 갔을 때, 사찰 건축을 설명하던 분이 물어보셨습니다. “불국사처럼 탑이 두 개 있는 경우하고, 절에 탑이 한 개만 있는 경우하고, 어느 편이 더 탑을 중시하는 것일까요?” 그때 함께 갔던 이들이 모두 정답을 맞췄으니, 여러분도 맞추셨을 것입니다. 하나만 있는 경우이지요.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한 번 올라가셨다고 하는 것도, 말하자면 그 한 번에 모든 것을 집중하기 위해서일 것입니다. 예수님의 삶 전체를, 한 번 예루살렘을 향해 가신 여정으로 요약하는 것입니다.
“하늘에 올라가실 때가 차자,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가시려고 마음을 굳히셨다”(9,51). 이는 루카 복음에만 있는 구절입니다. 예루살렘에는 왜 가실까요? 그 길을 떠나시기 전에, 조금 앞서 거룩한 변모 장면에서 마음의 준비를 시키십니다. “영광에 싸여 나타난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이루실 일, 곧 세상을 떠나실 일을 말하고 있었다”(9,31). 이어서 수난 예고도 나옵니다. 명백합니다.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것은 당신의 파스카를 위해서입니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13,33).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는 “보다시피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고 있다. 이제 사람의 아들에 관하여 예언자들이 기록한 모든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18,31)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은 피할 수 없는 곳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서 일어날 일을 아시면서, 바로 그 일을 위해 오셨기에 길을 떠나십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예수님의 사명은 어쩌면 처음부터 그런 결말을 맞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13,34). 예수님은 “오늘 너도 평화를 가져다주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더라면!”(19,42)이라고 말씀하시며 우십니다. 모든 예언자들의 길이 그러했던 것처럼, 평화의 길을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예루살렘에서 겪으실 죽음을 예고합니다. 그래서 마르코 복음에서 보았던 것처럼, 예수님은 이 길을 시작하시면서 당신 수난과 부활을 예고하시고 제자들에게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9,23) 따르라고 하십니다.
* 본문에 인용된 성경구절은 모두 루카 복음입니다.
[성경]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4명의 어부를 제자로 부르신 이후에 예수님께서는 어떤 삶을 사셨을까요? 마태오는 한 문장으로 요약해서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온 갈릴래아를 두루 다니시며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 가운데에서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마태 4,23) 다시 말해 가르침과 복음 선포와 치유 행위로 많은 군중을 사로잡으셨다는 거죠.
당신을 따르는 군중이 많아지자 예수님께서는 산으로 올라가 자리를 잡으시고 본격적으로 가르치시기 시작합니다.(마태 5,1–2 참조) 이 가르침이 바로 참행복 선언으로 시작하는 산상 설교(마태 5-7장)입니다. 예수님의 다섯 설교 모음집 가운데 첫 번째이며, ‘산’에서 가르치셨다고 해서 ‘산상 설교’라 합니다. 루카 복음서에는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루카 6,17) 도착하신 후에 이루어졌기에 ‘평지 설교’라 하고요.
두 복음서 저자가 참행복을 선언하는 장소를 다르게 이야기한다는 것을 눈치채셨나요? 마태오복음은 ‘산’을 율법이 선포되는 전형적인 장소로 제시합니다. 십계명이 이집트를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시나이산에서 주어졌듯이, 하늘 나라의 참행복과 지침이 주어지는 장소도 ‘산’이어야 한다는 것이죠. 헤로데 임금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피난 갔다가 돌아온 성가정 이야기로 예수님을 모세와 연관시켰던 것과도 일맥상통합니다.(마태 2,13-23 참조) 나아가 예수님의 설교를 다섯으로 묶어 모세오경을 떠올리게 하지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의 사명을 부여하시는 장소도 ‘산’입니다. “열한 제자는 갈릴래아로 떠나 예수님께서 분부하신 산으로 갔다.”(마태 28,16) 이와 달리 루카복음에서는 사명 부여도 평지에서 이루어집니다.(루카 24,36-53 참조) 어디 그뿐인가요. 예수님께서 광야에서 받으셨던 마지막 유혹도 “매우 높은 산”(마태 4,8)이었던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그러기에 교부들도 예수님이 왜 산으로 올라가셨는지에 대해서 주목합니다. 산이 복음의 더 높은 의로움을 가리킨다거나(아우구스티누스), 하느님의 의로움에 대해 가르치고 듣는 이는 누구든지 가장 높은 영적 덕을 갖추어야 된다는 식으로요.(마태오복음 미완성 작품) 어찌 되었든 신앙인의 삶에 유익한 지침을 내리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좋은 가르침이라도 실천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죠. 예수님도 산상 설교를 마치기 전에 실천할 것을 거듭 강조하십니다. “나에게 ‘주님, 주님!’ 한다고 모두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행하는 이라야 들어간다.”(마태 7,21) “나의 이 말을 듣고 실행하는 이는 모두 자기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슬기로운 사람과 같을 것이다.”(마태 7,24)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나요?
[말씀의 우물] 하누카 (봉헌)의 유래
고대 유다인들에게 가장 혐오스러운 임금을 대라면, 흔히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os IV Epiphanes)를 꼽을 터입니다. 도대체 재위 12년 동안 안티오코스의 업적이 어땠길래 그럴까요? 업적이라기보다는 그가 저지른 ‘죄악’이라고 보는 편이 더 어울리기 때문이겠죠.
안티오코스는 세계화(그리스화) 정책을 펼쳤고, 모든 나라 곧 그가 지배한 주변 나라는 하나같이 그리스화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도 ‘야훼 하느님’ 신앙을 버리고 이교도들의 풍습과 종교까지 그대로 따르도록 강요당했죠. 그리스 잡신들을 공경해야 했던 겁니다. “임금(안티오코스)은 온 왕국에 칙령을 내려, 모두 한 백성이 되고 자기 민족만의 고유한 관습을 버리게 하였다.”(1마카 1,41-42)
안티오코스는 유다교 탄압에 열을 올리며, 특히 리시아스를 시켜 유다인 말살 정책을 폅니다. “이스라엘의 병력과 예루살렘에 남아있는 자들을 없애버리고…”(1마카 3,35) 심지어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그리고 그들의 온 영토에 외국인들을 이주시켜 그들의 땅을 나누어 주라고 하였다.”(1마카 3,36)
그즈음에 마타티아스의 아들 유다 마카베오가 혜성처럼 나타나 이스라엘인들의 용기를 북돋웁니다. “유다와 그의 형제들은… (자기) 백성을 파멸시키고 몰살시키라는 임금의 명령이 내려졌음을 알고는, 서로 ‘우리 백성을 폐허에서 일으키고 우리 백성과 성소를 위하여 싸우자’ 하고 말하였다.”(1마카 3,42-43) 그때 유다 군중은 유다 마카베오를 중심으로 싸울 준비를 하며 주님께 기도 올립니다.(1마카 3,44 참조) 기도에 힘입어 전투는 유다의 대승으로 끝납니다.(1마카 4,28-35 참조)
이와 같이 유다 마카베오는 안티오코스의 오른팔 격인 리시아스 군대를 물리치고 나서, 안티오코스에 의해 더럽혀진 성전을 정화하고 봉헌예식을 거행합니다. 유다와 형제들은 말합니다. “이제 우리 적을 물리쳤으니 올라가서 성전을 정화하고 봉헌합시다.”(1마카 4,36) 이어 흠 없이 율법에 충실한 사제들로 하여금 성소를 정화하고 더럽혀진 돌들도 치워버리며 더럽혀진 제단까지도 헐어버립니다.(1마카 4,42-45 참조)
유다인들은 기원전 164년 12월 14일 아침에 더럽혀진 성전을 새로 봉헌합니다. “새로 만든 번제 제단 위에서 율법에 따라 희생 제물을 바쳤다. 이민족들이 제단을 더럽혔던 바로 그때 그날, 그들은 노래를 하고 수금과 비파와 자바라를 연주하며 그 제단을 다시 봉헌한 것이다.”(1마카 4,53-54)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고 새로 봉헌하던 그날은 에피파네스 임금이 성전 제단 위에 제우스 신상을 만들어 놓고 그것에 희생 제물을 바치도록 한 지 만 3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또한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을 부정하게 만들고 그것을 올림포스의 제우스 신전이라고 부르게 하였으며….”(2마카 6,2)
히브리어로 하누카(봉헌)라고 부르는 이 봉헌 축일은 요한복음서에도 나옵니다. “그때에 예루살렘에서는 성전 봉헌 축제가 벌어지고 있었다. 때는 겨울이었다.”(요한 10,22) 오늘날의 우리도 삶에서 우리의 믿음을 꺾어놓는 시련과 적들을 만나기도 합니다. 그때마다 하누카를 기억하며 의지를 다지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