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의 언어] Mutual indwelling(상호내주, 영어)
삼위일체 대축일에 늘 생각나는 대중가요 가사가 있습니다. “너는 내가 되고 나도 네가 될 수 있었던 수 많은 기억들.” 사랑하는 사람은 서로 닮아가게 됩니다. 서로 닮은 말투와 행동, 기억과 습관이 은연중에 배어납니다. 같은 시간과 공간에 머물면서 서로 내면에 영적인 존재감을 남깁니다. 사랑이 깊어져서 서로의 내면에 살아있는 관계가 되면 시간과 공간이 떨어져 있어도 늘 곁에 있는 듯 대화하게 됩니다. 각자의 정체성은 변하지 않지만 사랑은 서로 안에 머물며 일치를 이루게 합니다. 사랑 안에서 하나가 된 모습, 사랑의 역동적인 관계를 서로 부둥켜안고 춤추는 모습 같다고 페리-코레시스, 영어로 서로 안에 살아있는 관계, 상호내주(mutual indwelling)라고 합니다.
삼위일체 신비를 묵상하는 키워드가 바로 이 상호내주입니다.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는 사랑의 신비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Trinity)는 하느님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시며 한 분이시라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이를 한 본질 안에 세 위격(three persons in one substance)이라고 설명합니다. 사랑의 일치 안에서 아버지와 아들과 영은 하나이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사랑의 신비에 우리를 초대하십니다. 미사를 시작할 때 주례 사제는 이 친교로 인사를 건넵니다. 오늘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가 건넨 바로 그 인사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과 하느님의 사랑과 성령의 친교가 여러분 모두와 함께하기를 빕니다.”(2코린 13,13) 여러분의 내면에 누가 살아 있어 자주 대화하시나요? 여러분은 누군가의 마음 안에 살아있나요?
[교회, 하느님 백성의 친교] (53) 거룩한 교회, 거룩한 신자, 「교회헌장」 제5장 제39항
「교회헌장」 제5장은 “교회의 보편적 성화 소명”이란 제목을 갖고 있습니다. 사실 5장은 수도자에 대해서 다루는 6장과 연관이 깊은데, 공의회는 제2회기까지 두 장을 하나의 장으로 다뤘습니다. 하지만 거룩함으로의 부르심이 비단 복음적 권고의 서원을 한 수도자들에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기에, 공의회는 보편적 성화 소명과 수도자에 관한 가르침을 구별하였습니다. 그리고 수도자의 성화 소명은 하느님 백성 전체의 그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므로, “보편적 성화 소명”을 5장에서 먼저 언급하고 6장에서 “수도자”에 대해서 다룹니다.
5장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첫 번째 항에서는 ‘교회의 거룩함’에 대해서, 두 번째 항은 ‘모든 신자의 성화 소명’에 대해서, 세 번째 항에서는 ‘모든 신자의 성덕 실천’에 대해서, 끝으로 네 번째 항은 ‘성화에 이르는 길’에 대해서 언급합니다.
공의회는 「교회헌장」 1장과 2장에서 이미 교회의 거룩함에 대해 언급했으며, 5장에서는 교회 안의 성화 소명에 집중합니다. 먼저 “교회는 흠 없이 거룩하다고 믿어진다.”라고 말합니다. ‘신앙 고백’에 나오는 이 언급은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성부와 성령과 더불어 ‘홀로 거룩하신 것’에 근거를 두고 있는데, 교회는 ‘대영광송’에서 그분을 “홀로 거룩하시고, 홀로 주님이시며, 홀로 높으신 예수 그리스도님”이라고 노래합니다.
이어서 공의회는 교회의 거룩함을 에페 5,21-33(아내와 남편)에 나오는 ‘그리스도의 신부’인 교회에 관한 언급을 통해 설명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신부인]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25절)은 “교회를 말씀과 더불어 물로 씻어 깨끗하게 하셔서 거룩하게 하시려는 것”(26절)입니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당신과 한 몸을 이루게 하시고, 성령의 선물로 가득 채워주셨기에, 교회는 거룩합니다.
따라서 하느님께서 교회의 신자들에게 바라시는 것은 신자들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1테살 4,3 참조). 그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우리를 선택하시어, 성직자나 평신도의 구분 없이 모든 신자가 거룩함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에페 1,4 참조). 이러한 거룩함은 성령께서 신자들 안에 맺어 주시는 은총의 열매를 통하여 드러날 것입니다.
먼저 신자들이 일상생활 안에서 사랑을 실천하여 이웃에게 그 사랑을 전할 때 교회의 거룩함은 신자 개인에게서 나타납니다. 또한 교회의 거룩함은 복음적 권고 곧 청빈, 정결, 순명을 실천하는 수도자들에게서 고유한 방식으로 드러납니다. 이렇게 성령의 이끄심으로 개인으로든 수도 생활을 통해서든 그리스도인들이 수행하는 복음적 권고의 실천은 교회가 거룩함으로 불리었음을 세상에 보여주는 것이며, 교회는 그렇게 세상에 거룩함의 모범을 증언해야 합니다. 무력(武力) 앞에서 평화(平和)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상식 더하기] (19) 예수님의 나이는 33살이다?
청년의 모습으로 우리의 시간 속에 사셨던 예수님
성당에 가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만납니다. 문득 ‘저기 계신 예수님은 몇 살이실까?’ 하는 궁금증이 듭니다. 수난·부활·승천이 모두 같은 해의 일이니 십자가 위 예수님의 나이는 예수님께서 지상에 계셨던 햇수기도 합니다. 흔히 그 햇수를 33년이라고들 합니다.
‘33살’이라는 추정은 복음서에서 나온 것으로 보입니다. 루카 복음사가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서른 살쯤에 활동을 시작”(루카 3,23)하셨다고 합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공생활 기간을 더해 33이라는 햇수가 나오는 것이지요.
그런데 성경에는 공생활의 ‘기간’이 언급되지 않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하시고 세 번의 파스카 축제(요한 2,13; 6,4; 13,1)가 있었다는 요한복음서의 기록을 보고 2~3년가량으로 짐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정확히 33년이라고 보기 어렵습니다. 일단 서른 살‘쯤’이라는 표현에서부터 명확하지 않고, 공생활 기간도 추측이기 때문이지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해 계산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수난일이 “파스카 축제 준비일”(요한 19,14)이었고, 그다음 날이 “안식일”(요한 19,31), 곧 토요일이었다고 말하는데요.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지역에 파견된 서기 26~38년 사이에 이 조건에 맞는 해는 서기 30년과 33년 두 번입니다.
서기 33년이면 예수님 나이 33살이 딱 맞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요. 사실 ‘서기’를 만들 당시 계산이 잘못돼 서기 1년은 예수님의 탄생 연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헤로데왕 생존 당시 태어나셨는데, 헤로데왕은 기원전 4년에 사망했기 때문이죠. 그래서 예수님이 기원전 6~7년경 탄생했을 것이라는 설이 유력합니다. 학자들은 서른 살쯤과 가까운 서기 30년을 예수님 부활 연도로 추정합니다.
성경적으로도 역사적으로도 예수님의 정확한 나이를 알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33’이라는 숫자는 여전히 우리가 예수님의 지상 생애와 수난·부활을 묵상하도록 해줍니다. 구체적인 숫자 덕분에 예수님이 우리의 시간 안에 실제로 계셨음을 기억하게 되지요.
그런 의미에서 교회는 1933년(1900+33)과 1983년(1950+33)에 희년을 지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도 2025년 희년을 선포하시면서 “예수님께서 수난과 죽음과 부활로 얻어 주신 속량을 기념하는 2000주년이 될 2033년을 향한 여정을 이끌어 줄 것”이라고 말씀하셨지요. 이 밖에도 여러 기도나 신심 활동에서 33이라는 상징이 활용됩니다.
오늘날 33살이면 청년입니다. 혹시 너무 어리다고만 생각하고 있지 않으신가요? 하지만 예수님의 젊음은 매 순간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향한, 바로 우리 구원을 위한 ‘속량’의 소중한 준비였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권고 「그리스도는 살아 계십니다」 23항 참조) 예수님과 비슷한 나이의 청년들을 맞이할 2027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준비하는 지금, 한 번쯤 ‘청년’ 예수님의 생애를 묵상해 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교회의 언어] Confirmatio(콘피르마치오, 라틴어) : 견진(堅振)
콘피르마치오는 동사 콘피르마레(confirmare)에서 파생된 명사입니다. 콘(con)은 ‘~와 함께’라는 전치사 꿈(cum)이 변형된 접두사로 ‘완전히’, ‘철저하게’라는 의미입니다. 피르마레(firmare)는 ‘굳게 하다’, ‘강하게 만들다’라는 뜻입니다. 세례로 신앙을 받아들인 새 신자는 신앙을 ‘완전히 굳게 하고(견, 堅) 앞으로 나아가도록(진, 振)’ 힘을 주는 견진성사를 받습니다.
흔히 세례를 새로운 탄생과 출생신고에 비유한다면 견진은 영적 성인식과 주민등록증 발급에 비유하곤 합니다. 하지만 견진성사의 핵심은 ‘성령을 받는 성사’입니다.(사도 8,14-17; 19,1-6 참조) 오늘 복음의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파라클리툼 Paraclitum, 성령)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요한 14,16)이라는 예수님의 약속이 실제로 증명되는 순간이 바로 견진성사입니다. 우리는 이 성사로 성령의 일곱 은사와 아홉 가지 열매를 풍성히 받아 신앙의 성숙과 함께 세상을 향해 나아갈 굳건한 힘을 얻습니다.
[가톨릭 교리] 점수로 매겨질 수 없는 인간의 가치
교내 시험이나 모의고사가 끝난 뒤, 펑펑 울던 친구들의 모습을 기억합니다. 시험을 잘 보지 못하면 스스로를 인생의 낙오자처럼 여기고, 대학 입학이 늦어지면 남들보다 한참 뒤처진다고 착각하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능력 기준에 미달하면 존재 자체가 평가절하된다는 느낌이 강했던 것입니다. 이는 한국 사회에 깊이 자리 잡은 ‘성적 줄 세우기’ 문화와 무관하지 않습니다. 각종 시험을 통해 개인을 수치화함으로써 점수를 곧 인간의 가치인 것처럼 판단하는 이 문화는 여전히 한국 사회에 남아 있습니다. 아직도 좋은 대학과 좋은 직장을 다니는 사람이 더 훌륭한 인격을 지닌 것처럼 평가되는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그 결과 입시와 사회적 시선에 대한 압박은 많은 청소년 청년들에게 큰 스트레스로 작용하는 듯합니다.
이러한 구조는 마치 우생학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생학이란, 인간 집단의 유전적 ‘질’을 향상하기 위해 특정한 형질을 가진 사람은 늘리고, 그렇지 않은 사람은 줄이려는 사상과 운동을 의미합니다. 오늘날에는 과거의 노골적인 형태는 줄어들었지만 유전자 검사와 배아 선별, 특정 조건의 태아를 선택하거나 낙태하는 문화, 장애인과 노인, 병자에 대한 무의식적 배제 등으로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특히 능력과 지능, 경제적 생산성을 인간 가치의 기준으로 삼는 사회의 경향은 인간을 끊임없이 선별하고 개선해야 할 대상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우생학적 사고와 닮아 있습니다.
다시 성적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시간이 흐르며 저는 실제로 깨달았습니다. 인간의 삶은 어떠한 조건에 있느냐가 아닌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살아가느냐에 달려 있다는 것을 말입니다. 좋은 학력과 배경을 가지고 있어도 자기밖에 모르거나 타인을 도구로만 생각한다면,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지 못하거나 물질적인 것에 매몰되어 있다면, 그 사람이 훌륭하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인간은 조건의 완벽함이 아닌 사랑을 통해서 완성되는 존재입니다. 조건으로 등급화될 수 없으며 실패의 자리에서도 연대와 사랑을 통해 성장할 수 있습니다. 물론 개인의 노력과 성취는 인정되어야 하며, 교육의 중요성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절대적 기준이 되어, 사랑을 실천할 힘을 잃어버린 세상을 살게 되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다면 덜 가치 있어 보이는 존재는 자연스럽게 배제되고, 결국 모든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쓸모없는 존재로 전락하게 될 것입니다. 혹시 지금 스스로가 보잘것없거나 남들보다 뒤처진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사랑할 힘이 있으며, 이웃을 도울 능력도, 앞으로 나아갈 힘도 남아 있습니다. 바로 그 점에서 우리는 이미 고유하고 소중한 존재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힘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