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만난 신약 성경]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거의 매일 저녁, 함께 사는 수녀님이 “뉴스 보기 싫지만 봐야지?”라고 하십니다. 요즘 뉴스는 기쁜 소식이 거의 없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는 더욱 그렇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전해지는 기쁜 소식은 어떤 것일까요?
루카 복음에서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광야에서 유혹을 받으신 다음, 갈릴래아에서 활동을 시작하시면서 나자렛의 회당에 들어가 이사야서의 한 단락을 읽으십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니...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4,18-19). 앞으로 하실 일을 요약해서 말씀하시는, 취임사 같은 중요한 말씀이지요. 그런데 여기에서 예수님의 사명은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것이라고 일컬어집니다.
그러한 예수님의 사명은 마리아의 노래에서도 예고되었습니다.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1,53). 마리아의 노래에서 하느님은 세상의 질서를 바꾸어 놓으시는 분으로 나타납니다. 비천한 종에게 큰일을 하시고, 교만한 자들과 통치자들은 흩으시고 비천한 이들은 들어 높이십니다. 힘 있는 사람들이 지배하는 질서가 아닌, 오히려 그것을 반대로 돌려놓는 질서입니다. 루카 복음서의 앞부분에서 예수님이 행하시는 일들은 이렇게 예고됩니다. 병든 이들을 고치시고, 죄인에게 용서를 선포하시고, 죽은 이들을 살리시는 일들은 모두 가난한 이들에게 전해지는 기쁜 소식입니다.
7장에서 세례자 요한이 감옥에서 제자들을 보내어 예수님이 “오실 분”이신지를 묻게 했을 때도 예수님은, “눈먼 이들이 보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7,22)라고 말씀하심으로써 당신이 “오실 분”이라는 것을 확인해 주십니다. 그분이 선포하시는 말씀과 그분이 행하시는 일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된다는 것이 바로 그분이 메시아시라는 표지가 됩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신 지 이천 년이 지났는데도 아직 세상 여기저기서 전쟁을 일으키고 힘없는 사람들이 더 큰 희생을 치르게 하는 요즘의 상황들을 보면, 과연 기쁜 소식이 선포된 것이 맞는가 싶을 정도입니다. 그럼에도 마리아의 노래에서는, 아직 예수님이 태어나지도 않으셨는데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라고, 이미 그 일이 이루어진 것처럼 말을 하지요. 미래의 일이지만 확실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자렛 회당의 설교에서도 예수님은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4,21)라고 하십니다. 과연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이 전해졌는가 의심스럽게 보일 때, 어쩌면 우리는 감옥에 있는 세례자 요한과 같은 입장이 됩니다. 사람들에게 예수님이 메시아시라고 선포해 놓고서도 세상의 어두움에 눈이 가려지는 것이지요. 그때 예수님은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는 말씀에 한 마디를 덧붙이십니다. “나에게 의심을 품지 않는 이는 행복하다”(7,23).
[말씀의 우물] 불면증과 우울증 이야기
불면증은 아주 어릴 적부터 올 수 있다고 합니다. 갓난아기도 오랜 질병이나 주변 환경 때문에 뒤척이거나 잠 못 이루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부모가 큰소리로 자주 다투면 입이 무거워지고 웃음이 차츰 엷어지다가 어느 순간부터 말수까지 줄고 아예 미소까지도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다음은 자연히 우울감이 속마음을 짓누르게 되어, 생각도 판단도, 내·외적 성장이나 발육도 더디거나 제대로 이뤄지지 않게 됩니다.
실은 저 자신이 아주 오래전부터 불면증을 겪으며 지냅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우울증세가 스며듦을 느낍니다. 불면증을 뜻하는 라틴어 ‘인솜니아(insomnia)’는 본디 수면(睡眠)을 뜻하는 라틴어 ‘솜누스(somnus)’에서 유래합니다. 그 반대말로 접두사 ‘인(in-)’을 붙여서 불면증이 자연스레 ‘인솜니아(in-somnia)’가 되었습니다.
오랫동안 잠 못 이루다 보면 누구나 결국 우울한 마음에 갇혀 힘겹게 살아가기 일쑤입니다. 성경 안에서도 불면증과 우울증으로 고생하다가 결국 죽음에 이르는 경우를 자주 만납니다.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Antiochos IV Epiphanes)가 겪은 불면증과 우울증은 성경 안에서 찾아볼 수 있는 대표적 예라고 봅니다. 죽음이 다가왔음을 직감한 안티오코스는 신하들과 자기 측근을 불러 놓고 이릅니다. “내 눈에서는 잠이 멀어지고(불면증) 마음은 근심으로 무너져 내렸다네(우울증).”(1마카 6,10) 우울증을 뜻하는 영어 ‘디프레션(depression)’도 본디 ‘짓누르다’를 뜻하는 라틴어 ‘데프리메레(deprimere)’에서 유래합니다.
안티오코스 4세는 기원전 175년부터 164년까지 12년 동안 셀레우코스 왕국을 다스린 임금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을 신격화해 ‘에피파네스(신으로 나타난 자)’라는 별칭을 붙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그의 부도덕함과 오만함을 보고서 ‘에피파네스’ 대신에, 뒤에서는 ‘에피마네스(Epimanes, 미쳐버린 자)’라고 부르며 비웃었다고 합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유다 민족을 멸망시키려던 그는 자신을 신격화하는 데서 그치지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곳곳에는 큰 슬픔이 일어 지도자들과 원로들은 탄식하고 처녀 총각들은 기운을 잃었으며 여인들의 아름다움은 사라져갔다. … 땅도 그 주민들 때문에 떨고 야곱의 온 집안은 수치로 뒤덮였다.”(1마카 1,25-28)
안티오코스는 이스라엘을 점령해 약탈하고 조공을 바치게 하면서 갖가지 방식으로 유다인들을 박해한(1마카 1,36 참조) 결과로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결국에는 죽음을 맞이합니다.마음과 영을 맑게 해주고 축복해 주는 음악과 그림 등이, 잠을 설치게 하는 침울함을 누그러뜨리는 데 상당히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보내신 영이 사울에게 내릴 때마다, 다윗은 비파를 손에 들고 탔다. 그러면 악령이 물러가고, 사울은 회복되어 편안해졌다.”(1사무 16,23)
말씀의 우물을 읽으시는 여러분 중에도 불면증과 우울증에 시달리는 분들이 계실 터입니다. 그 고통을 외면하시지 않고, 오히려 여러분 안에서 함께 아파하고 계시는 하느님을 기억하며 잠시 숨이라도 돌리실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다시 만난 신약 성경] 즈카르야의 노래
잠깐 한 가지를 짚어두고 갑시다. 루카 복음 첫머리에서는 “존귀하신 테오필로스 님”(루카 1,3)께 이 책을 적어 드린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도행전은 “테오필로스님, 첫 번째 책에서 저는...”(사도 1,1)이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의 저자 문제를 애써 다루지 않더라도, 두 책이 이어지는 형태로 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가운데 첫 권인 루카 복음은, 다른 이들이 “처음부터 목격자로서 말씀의 종이 된 이들이 우리에게 전해 준 것을 그대로 엮은” 것처럼 이 책의 저자도 그 일을 자세히 살펴보고 적은 것이라고 말합니다. (자신이 처음부터 목격자였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목격자가 전해 준 것을 정리했다고 하는 것이지요.) 이것이(루카 1,1-4) 루카 복음에 대한 설명서입니다. 그리고 사도행전은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 그리고 땅끝에 이르기까지”(사도 1,8) 복음이 전해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이러한 두 책의 전체 구도에 따라 루카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시작됩니다.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가 성전에 있을 때, 그에게 요한의 탄생이 예고되는 장면입니다. 요한의 탄생 예고와 예수님의 탄생 예고의 비교는 대개 많이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나이 많은 엘리사벳과 처녀인 마리아, 믿지 않은 즈카르야와 믿었던 마리아...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이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마태 1,1)인 메시아라는 것을 말하기 위해 요셉까지 이르는 족보 이야기로 시작하는 반면, 루카 복음은 성모님 이야기를 많이 하는 편이라 가브리엘 천사가 성모님께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아기의 이름을 예수라고 하라는 말씀도 마태오 복음 1장 21절에서는 요셉에게 전해지는데, 루카 복음 1장 31절에서는 마리아에게 전해지지요.
그런데 한 가지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마리아의 노래가 즈카르야의 노래보다 먼저 나온다는 점입니다. 엘리사벳이 아기를 가진 지 여섯 달이 되었을 때 마리아가 찾아가 “내 영혼이 주님을 찬송하고...”라고 노래를 부르고, 그 엘리사벳이 아기를 낳은 다음에 즈카르야가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라고 노래합니다.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어떻게 생각하면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즈카르야는 말을 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런데 왜 말을 할 수 없게 되었습니까? 믿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마리아는 믿었기에 선포할 수 있었고, 즈카르야는 믿지 않았기에 선포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쩌면 다른 이유도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 없이는 의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즈카르야의 노래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 노래에서 요한에 대해 말하는 부분은 짧습니다. 노래의 앞부분에서는 하느님이 “우리를 위하여 힘센 구원자를 일으키셨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이미 예수님의 탄생도 얼마 남지 않았고, 그러기에 아기(요한)가 예언자가 되고 길을 준비하는 것이지요. 달리 말하자면, 즈카르야는 요한이 태어남을 기뻐하지만 그가 노래하는 것은 하느님이 예수님의 탄생을 통해서 이루시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어쩌면 즈카르야가 마리아보다 앞서 노래를 할 수 없었던 것이겠지요.
[성경] 사람 낚는 어부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제자로 부르실 때 짧고 단순하게 말씀하십니다. “나를 따라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마태 4,19) 지금 바로 취해야 할 행동과 미래의 전망을 담아서 말씀하시는 거죠.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떤 배경과 신분인지는 아예 접어두십니다. 다만, 그 사람이 살아온 배경을 바탕으로 미래의 전망을 더 분명하게 전달하십니다. 물고기가 아니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드시겠다고요.
예수님께서 처음 공생활을 시작하면서 하셨던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마태 4,17) 지금 회개하라고 촉구하는 동시에 가까운 미래의 전망을 담아 선포하십니다. 가까이 다가온 하늘 나라에 가기 위해서는, 지금 이 순간 회개하는 첫걸음을 떼야만 합니다. 세례자 요한도 예수님에 앞서 하늘 나라가 다가왔으니 회개하라는 똑같은 메시지를 전달했습니다.(마태 3,2 참조) 이어 사람들이 요르단 강에서 죄를 고백하고 세례를 받게 함으로써 하늘 나라로 가는 첫걸음을 떼게 했습니다.
마태오는 예수님이 공생활을 시작함과 동시에 어부 네 사람을 제자로 불렀다고 전해 줍니다.(마태 4,18-22 참조) 제자들이 예수님의 활동을 함께하기 위해서는 그동안 몸담았던 터전에서 떠나야만 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는 그물을 버리고, 야고보와 요한은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그래서 사람 낚는 어부이자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사도가 될 수 있었습니다.
마태오는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세리 마태오를 부르시는 이야기를 전해 줍니다. 그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의 말씀은 더 짧습니다. “나를 따라라.”(마태 9,9) 세리로 살아왔기에 그의 직업적 배경으로 펼쳐줄 미래의 전망은 없었던 것이죠. 대신에 죄인으로 손가락질받아 왔던 세리들과 함께 어울려 식사함으로써, 당신이 앞으로 펼쳐나가실 일을 분명히 보여주십니다.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태 9,13)라는 충격적인 메시지를 전달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제자들 중에서 열두 명을 뽑아 열두 사도로 선별하십니다.(마태 10,1–4 참조) ‘사도’는 파견받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로부터 파견받아 하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을 해 나간다는 것이죠. 왜 열두 명일까요? 이스라엘의 열두 부족을 떠올리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로마 식민지에서 벗어나게 해줄 메시아 대망 사상과 함께 그 대망을 함께 이루어 나갈 이스라엘의 온전한 모습을 시사하는 것이죠.
‘예수’라는 이름도 ‘야훼는 구원이시다.’라는 뜻으로, 이스라엘을 가나안 땅으로 이끌었던 여호수아를 그리스어로 옮긴 이름입니다. 구원에 대한 열망을 담았기에, 당대에 예수라는 이름으로 불린 인물은 많았습니다.(마태 27,16; 사도 13,6 참조) 우리는 예수님처럼 이름값에 걸맞은 삶을 살고 있습니까?
[말씀의 우물] 요셉의 운명
요셉에 관한 이야기는 아브라함, 이사악, 야곱에 관한 이야기 못지않게 섬세하게 펼쳐집니다.(창세 37장, 39~50장 참조)
요셉은 어느 날 자신의 꿈 이야기를 형제들에게 들려줍니다. “우리가 밭 한가운데에서 곡식 단을 묶고 있었어요. 그런데 내 곡식 단이 일어나 우뚝 서고, 형들의 곡식 단들은 빙 둘러서서 내 곡식 단에게 큰절을 하였답니다.”(창세 37,7)
이 꿈 이야기를 계기로 요셉은 형들로부터 더욱 미움을 받게 됩니다. “그리하여 형들은 그의 꿈과 그가 한 말 때문에 그를 더욱 미워하게 되었다.”(창세 37,8)
요셉은 또 다른 꿈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내가 또 꿈을 꾸었는데, 해와 달과 별 열한 개가 나에게 큰절을 하더군요.”(창세 37,9)
그럼에도 아버지 야곱은 요셉을 힘껏 보살펴줍니다. “형들은 그를 시기하였지만, 그의 아버지는 이 일을 마음에 간직하였다.”(창세 37,11) 고대 근동 지방 사람들은 흔히 신이 꿈을 통하여 자신의 계획을 계시해 준다고 믿었습니다.
결국 인신매매의 희생양이 되어 이집트로 팔려 간 요셉은 파라오의 경호대장 포티파르에게 넘겨져 그의 종으로 지내게 됩니다. “몸매와 모습이 아름다웠다”(창세 39,6)는 요셉은 경호대장 아내의 유혹을 거절하다가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힙니다.(창세 39,7-23 참조) 쓰라린 운명의 연속입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구원의 때를 기다리는 가운데, 중요한 때마다 꿈풀이를 잘한 덕분에 이집트 왕국의 전 재산을 관리하는 재상직에까지 오르는 축복을 얻습니다. 이로써 요셉은 파라오 다음가는 제2인자가 된 것입니다.
요셉은, 가나안 지방에 기근이 심하여 양식을 구하러 이집트로 구걸을 온 자기 형들에게 자신의 신분을 밝힙니다. “내가 …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창세 45,4) 이어서 그 모든 불행과 고통스럽고 어두운 일은 주님 섭리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니 염려하지 말라며 형제들을 안심시킵니다.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이집트로) 보내신 것입니다.”(창세 45,5)
요셉은 영원하신 분의 섭리를 짧고 명료하게 요약해 줍니다. 하느님께서 우리 온 가족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이집트로 ‘보내셨다’고요. 이는 구세사적인 해석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이사악, 야곱 그리고 요셉에 이르는 이 모든 이스라엘 선조 이야기가 모두 역사적 사실의 보도라기보다는 하느님께서 주관하시는 구원 역사를 신학적 관점에서 요약하여 정리한 설화 문학으로 볼 수 있습니다. 곧 그분께서 이끄시고 이루시는 인류 구원 역사에 대한 신앙 고백문으로 보면 이해가 쉽겠습니다.
낯선 땅 이집트로 팔려 가 살던 요셉은 형제들을 만나자, 마음속으로 겪던 억울함과 서글픔과 그리움으로 한꺼번에 참아오던 울음을 터트립니다. “요셉은 …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울었다.”(창세 43,30) 그때까지 요셉이 지녔던 든든한 무기는 주님께 대한 끊임없는 신뢰와 변함없는 믿음이 아니었을까요?